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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위원 폼페이오가 북한을 방문할 계획이 있었는데, 어제 뉴스에 트럼프 대통령이 취소시켰습니다. 이전에 여러 번 방문해서 협상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않았기에 폼페이오 방문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는데 없으면 실망입니다.
바울을 대신하여 데살로니가에 다녀온 믿음의 아들이며 동역자인 디모데는 달랐습니다. 디모데는 사랑과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소식에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그전에는 염려와 걱정으로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살맛이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이 기쁨과 감사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기도했습니다. 낮에는 텐트 메이커로 일하면서, 짬짬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도 피곤하였지만 기도를 했습니다. 어떤 기도냐 하면 10절에 말하기를 “직접 성도들을 만나서 믿음의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도록 해 달라”(10)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해서 성도들을 직접 만나기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만나기를 이렇게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했을까요? 10절에는 ‘믿음의 부족을 채우는 일’입니다. 더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은 13절에 나옵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거룩한 성도들이 되도록 돕기 위해서 데살로니가에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10절과 13절은 각각 다른 목적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믿음의 부족을 채우는 일은 곧 거룩함에 흠이 없도록 하는 일인 것입니다. 믿음이 충만해 지면 거룩함에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거룩한 자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성도이지 않습니까? 성도란 ‘거룩한 무리’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한데 또 거룩해져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다 사해 주셨습니다. 죄 없다고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물어 보십시다. 여러분은 진짜로 거룩합니까? 여러분에게는 거룩에 흠이 없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차마 다른 사람이 안다면 진저리 칠 죄와 허물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한 것입니까? 거룩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거룩한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아하, 그렇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거룩하지 않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인쳐주셨습니다. 죄 없는 거룩한 자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부족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주시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인정해 주심처럼 더 거룩한 존재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성경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가장 강력하게 찬양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천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거룩 거룩 거룩”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거룩 거룩 거룩입니다(계 4:8).
왜 우리가 거룩해야 합니까?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그 자녀된 우리가 거룩해야 한다’(레 19:2)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최종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무엇을 보시는가 입니다.
세상에 살 때에 돈을 얼마나 모았느냐? 무슨 직책으로 무슨 일을 했느냐? 이것이 아닙니다. 거룩하게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그 사람이 주님 앞에 설 때에 칭찬과 상급이 있습니다.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거룩하게 하지 못한 일은 결국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지 아니하는 일은 해봐야 그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룩할 수 있을까요? 가장 우선적으로 나 스스로에게는 거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에 나 스스로에게 거룩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위해 스스로 개발하려고 할 것입니다.
가령 내가 골프를 잘 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좋은 프로 코치의 지도를 정기적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필드에 나가서 실전을 쌓으면 어느 정도까지 골프 실력이 향상됩니다. 이렇게 자기 향상을 위해서 자꾸 자꾸 갈고 닦으면 뭐가 된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룩해 지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아담의 후손입니다. 욕은 안 가르쳐도 잘하고 싸움은 안 가르쳐 주어도 잘 합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이며 악한 사탄이 속임수로 인간을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야, 네가 큰소리치고 강해야 이기는 거야. 네가 싸우지 않으면 지는 거야”라고 충동질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온유한 자가 되고, 겸손한 자가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요,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인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는 거룩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어디서부터 거룩이 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죄로 인하여 부정하고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나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여기서부터 나의 거룩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심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부족을 날마다 알려주고, 우리의 연약을 날마다 일려 주므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나는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므로 날마다 거룩함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순간순간 “너의 연약함을 알아라. 십자가의 주를 바라보라”고 감화하시고 감동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는 길, 성령의 감동 감화를 받을 수 있는 첩경, 지름길을 가르쳐줍니다. 바로 디모데전서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1. 거룩한 성도의 교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13)
바울이 무슨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 방문을 위해서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사탄의 방해로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대신 보내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해주십사” 기도했습니다. 만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만나서 무엇 하려고 했겠습니까? 성도의 거룩한 교제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자기가 받은 은혜, 자기가 받은 복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깨우치게 해주신 말씀, 은혜를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만나서 교제의 떡을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속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간절함이 가득했습니다.
우리 교회 부흥의 나라가 올해 들어서 많이 성장했습니다. 부흥의 나라가 모이면 다른 것 안 합니다.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삶을 나눕니다. 한 주간 동안, 기뻤던 일, 슬펐던 일, 힘들었던 일들, 나를 무너지게 했던 순간들 등등 삶을 나누다 보면 서로를 알아갑니다. 그가운데서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다 연약함이 있네’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제목을 알게 됩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여기서 위로 받고 힐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주간 동안 했던 말씀 묵상을 나눕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무엇을 반성하게 하는지, 어떤 삶을 요구하셨는지를 나누는 것입니다. 말씀이 교제의 방법입니다.
성도의 교제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말씀의 교제와 기도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있을 때에 거룩을 연습하게 됩니다. 더 깊은 거룩의 자리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만나서 기도와 말씀의 교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기에 이 만남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2. 거룩한 사랑
그리고 기도합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12)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만나서 거룩한 교제를 통해서 사랑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성도들이 만나서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면 무엇이 일어나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랑’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 안에서 교제하면 거룩한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도님들이 말씀 가운데, 기도 가운데 자신의 부족함들, 자신의 실패와 성공, 기쁨과 슬픔을 나누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그 받은 사랑을 흘러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사랑했을까요? 바울은 돈을 바라고, 인기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 교회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복음의 열정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한 순수한 사랑으로 희생하고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자신있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사랑이 넘치기를 말합니까? 첫째는 ‘피차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 사이입니다. 성도 간에 진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교회 성도끼리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달리, 교회 안에서 머시기가 되어서 본체 만체하며 교회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며 헐 뜯고 싸우는 교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이 없습니까?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 악의 영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지배와 권고가 없으면 아담과 하와의 후예답게 칭찬하는 것보다는 남들을 흉보는 것을 훨씬 더 재미있어 합니다. 서로 깍아 내리고 트집 잡는 일에 더 열중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영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해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는 거룩한 사랑을 못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영의 붙잡혀서 서로를 사랑하다 보면 그 범위가 확대됩니다. 그 다음은 ‘모든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 나아가 원수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범위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매년 하는 ‘사랑나눔 축제’를 합니다. 이것은 연례행사 이전에 우리는 ‘사랑 나눔’의 한 실천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챙기는 마음으로 합니다. 여기에는 사랑과 관심 그리고 배려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사랑이 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 권사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권사님은 서울대학 약학과를 나오신 엘리트였습니다. 그 권사님은 성도들을 가운데 특별히 어렵고 힘든 가정을 찾아 위로하는 일을 참 잘하셨습니다. 함께 교회를 섬기면서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 권사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은 무슨 인기를 얻고 자기 사람을 얻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수 년 전에 암에 걸렸는데, 많은 성도들이 그녀를 위해 찾아와 기도해주고 섬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완쾌되었습니다.
그 후에 권사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삶은 덤으로 얻었다고 생각하시고는 받은 바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님들의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하셨습니다. 큰 교회 교역자들이 다 살피지 못하는 부분을 개인적으로 물질을 써가면서 성도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겼습니다.
저는 그 분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의 삶을 잊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거룩한 사랑을 권사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흘러 보내는 거룩함을 드러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받은 사랑, 은혜를 흘러 보내는 거룩한 사랑을 통해서 입니다.
3. 거룩한 마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13)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거룩함에 흠이 없기 위해서는 ‘마음이 굳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는 것은 완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굳게 의지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에 반대해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끝까지 저항한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기철 목사입니다. 그는 한국기독교의 상징적 인물인 동시에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는 47세의 젊은 나이에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獄死)했습니다. 그의 생전에 마지막했던 설교 중에 일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도 청장년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에게는 오로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오로지 주를 의지하는 마음, 주를 사랑하고 주의 은혜로 살아가겠다는 일편단심의 마음이 순교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는 죽었으나 지금 살아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은 마음입니다(잠 4:23).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굳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죽을 때까지 주님 만을 섬기겠다는 일편단심,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여호수아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굳은 심령을 달라고요. 여기에서 거룩함이 나옵니다.
며칠 전에 한 성도님이 화요모임에 참석하고는 목장모임에서 대충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요즘 생활이 힘이 듭니다. 그 이유는 말씀 묵상을 안 하는 것 같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예전에 말씀 묵상하는 것에 얽매어서 기쁨으로 하지 못하고, 이렇게 해서 뭐하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깐 억지라도 말씀 묵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것에 매여 살 때도 많은데 말씀 묵상은 ‘거룩한 매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집니다. 거룩한 매임과 습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거룩함에 흠이 없기 위해서 거룩한 교제, 거룩한 사랑, 거룩한 일편단심이 있기를 기도하십시다. 주님이 강림하실 때에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는 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너 성결키 위해(212, 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