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덫을 만들던 사람이었다.
사냥꾼이라 불린 적은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장인이라 불렀고,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 나무의 결을 읽고 쇠의 성질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나무가 휘어지고, 어떤 쇠가 끝내 끊어지는지를 그는 손끝으로 먼저 알았다.
덫은 늑대를 잡기 전부터 있었다.
인간이 굶주렸을 때, 인간이 두려웠을 때, 인간이 자기 힘보다 큰 존재를 만났을 때부터. 덫은 먹이를 얻는 도구였고, 위협을 제거하는 장치였으며, 무엇보다 멀리서 작동하는 무기였다. 들고 휘두르지 않아도 되었고, 겨누지 않아도 되었다. 그 점이 덫을 오래 살아남게 했다.
그는 덫을 무기로 생각하지 않았다.
무기는 의도를 필요로 하지만, 덫은 구조로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느 길에 놓느냐에 따라 늑대덫이 되기도 했고, 곰덫이 되기도 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상을 정하지 않는다. 길을 정할 뿐이다.”
처음 덫을 만들었을 때 그는 늑대를 떠올렸다.
그러나 두 번째 덫부터는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다. 얼굴을 떠올리면 손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목적보다 구조를 생각했다. 얼마나 조여야 놓치지 않는지, 어느 순간 힘이 고르게 전달되는지. 덫은 감정이 아니라 균형의 문제라고 그는 믿었다.
덫을 놓을 자리는 늘 다른 이들이 정했다.
“여긴 늑대가 다닙니다.”
“여긴 위험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직였다. 선택은 늘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그는 만드는 사람이었지,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장 근처에 덫을 만들게 되었다.
늑대를 위한 것이라 들었다. 그러나 그곳의 발자국들은 일정하지 않았다. 무거운 것도 있었고, 가벼운 것도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가장 표준적인 크기로 덫을 만들었다. 표준은 언제나 가장 많은 경우를 포괄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며칠 뒤, 소문이 돌았다.
늙은 숫양 하나가 덫에 걸려 죽었다고 했다.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길을 잘못 든 나그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이 뒤따랐고, 덫 근처에서 피 묻은 신발이 발견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산적이었을 것이라는 말과, 사냥꾼이 자기 덫에 되물렸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섞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 하나가 다리를 잃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는 늑대를 쫓다 길을 벗어났다고 했다.
죽음과 부상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늘 같은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유를 나눴다.
“양이 너무 늙었다.”
“늑대가 숲을 어지럽혔다.”
“산적이 많아진 탓이다.”
“질서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말들은 달랐으나, 방향은 같았다.
누구도 덫을 탓하지 않았고, 아무도 덫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그 점에서 안도했고, 거의 동시에 불안해졌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것은, 책임도 형태를 잃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늘 구체적이었지만, 원인은 점점 추상적이 되어 갔다.
그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덫은 한 번에 하나만 잡지 않는다는 것을.
덫은 죽음을 나누어 배치하고, 해석을 흩어 놓으며, 책임이 모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숫양은 상징이 되었고,
나그네는 불운이 되었으며,
산적은 당연한 결과가 되었고,
마을 사람의 상처는 통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덫은 여전히 길 위에 놓여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덫을 떠올리지 않았다.
덫이 작동하는 순간이 아니라, 작동하지 않는 시간들을 생각했다. 아무도 걸리지 않은 채, 비와 흙을 맞으며 길 위에 놓여 있는 시간. 누구를 향해 놓였는지 끝내 묻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힘.
그러나 덫이 작동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는
그 말이 더 이상 온전하지 않았다.
아무도 걸리지 않은 덫은 무고해 보였으나, 동시에 이미 완성된 위협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언제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힘. 그는 그 무차별적인 힘이 길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너무 쉽게 지나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계산해 보았다.
늑대가 다닐 확률, 양이 길을 벗어날 확률, 인간이 숲을 지날 가능성. 그 모든 경우를 더해 보았을 때, 덫은 언제나 얼굴을 묻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 열림에는 이름이 없었고, 얼굴도 없었다. 그러나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한 구조였다.
그는 마침내 이 질문에 이르렀다.
덫은 누가 걸릴지를 모른 채 놓여도 괜찮은가.
그 질문은 윤리의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그의 기술을 향한 질문이었다.
기술이 끝까지 정확하다면, 결과 또한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작동의 순간에 부재한 채로도, 그 죽음을 자신의 일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는 답하지 못했다.
아니, 답은 나와 있었으나 그 답을 견딜 수 없었다. 덫은 이미 충분히 완성되어 있었고, 그래서 더 이상 핑계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날 이후 덫을 만들지 않았다.
부수지도 않았고, 고발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장인이었고, 파괴는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손을 씻었다. 오래 씻었다. 쇠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숲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길이 달라졌다. 늑대는 돌아갔고, 양은 무리를 좁혔으며, 인간은 숲을 피해 다녔다. 덫은 더 이상 무엇을 잡느냐보다, 무엇을 포기하게 만드느냐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의 제자가 뒤를 이었다.
제자는 덫을 무기로 인정했다. 그래서 더 정교하게 만들었다. 오작동을 줄였고, 고통을 단축했으며, 효율을 높였다. 사냥도 늘었다. 제자는 스승의 윤리적 고뇌를 '낡은 감상'이라 치부했다. 그는 말했다.
“덫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잘못 쓰이는 것이 문제지요.”
늙은 장인은 그 숲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안다. 덫은 악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대부분의 덫은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위험한 덫은, 누구를 잡기 위한 것인지 아무도 끝까지 묻지 않는 구조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가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가 만든 것은 덫이 아니라,
선택을 대신해 주는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또한 알고 있다.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는 말이
책임을 끝내는 선언이 아니라,
책임에서 물러났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가 손을 거두어도 덫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고,
덫이 놓이는 한 숲은 계속 누군가를 통과시킬 것이다.
덫은 여전히 닫힌다.
늑대를 위해서라 말해지고, 질서를 위해서라 불리며, 안전을 위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덫은 묻지 않는다. 누가 걸릴지를.
그래서 숲의 이야기는 이렇게 남는다.
누군가 덫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그 덫에 걸렸으며,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사이에서
아무도 겨누지 않았다고 믿었다는 이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