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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비를 나온 윤우일에게 도어맨이 다가와 섰다. 윤우일이 끌고온 가방을 보고는 투숙객이 나오
는 것으로 안 모양이었다.
[택시 잡아드릴까요?]
[부탁해.]
새벽 2시, 호텔 앞쪽 길가에는 노란 등을 켠 모범택시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도어맨의 손짓을 받은
모범택시 한 대가 곧 앞에 와 섰다. 윤우일은 가방을 실어주는 도어맨에게 만원권 한 장을 쥐어주었
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문을 닫은 도어맨이 차 안의 윤우일을 향해 정색하고 경례를 올려붙였다.
밤거리를 달리는 차안에 앉아 윤우일은 한동안 인적이 드물어진 거리를 바라보았다. 박태홍과 김은배
는 둘 다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어서 결사적이었다. 박태홍은 다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외국으로 도
주할 계획이었으며 김은배는 돈을 주기로 약속한 고위층들에게 거짓말을 한 셈인데다 박태홍의 협박
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쓴웃음을 지은 윤우일은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둘 다 악랄한 성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박태홍을 제거하면 김은배는 모든 것을 박태홍한테 미루고 시치
미를 뗄 작정이다. 16명에게 분배해준 주식이 추적당한다고 해도 박태홍이 입을 열지 못하는 한 증거
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박태홍은 어떤가? 김은배를 협박하여 돈을 대출받고 나서 도주하면 김은배
가 몽땅 뒤집어쓰게 될 것이었다.
박태홍은 전화기를 집으면서 벽시계를 보았다. 아침 8시 반이었다. 어젯밤에 3시가 넘어서야 눈을 붙
였으므로 아직도 온몸이 나른했고 술이 덜 깬 터라 머리도 지끈거렸다. 전화기를 귀에 붙인 박태홍은
심호흡을 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해올 사람은 없다. 그래서 잔뜩 긴장이 된 것이다.
[여보세요.]
[박 회장, 이번 사건 때문에 나하고 단둘이 만나야겠는데.]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태홍은 바짝 긴장했다.
[당신 누구야?]
[꼭 누군가를 알아야 만나겠단 말인가? 지금 앞뒤 잴 형편이 아닐 텐데.]
[누구야, 도대체?]
박태홍은 눈을 부릅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당신한테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니야. 어때? 만날 거야, 말 거야?]
이제는 사내도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박태홍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말했다.
[좋아, 만나지.]
[당신하고만 단둘이 만나야겠어.]
[좋아, 시간과 장소를 말해.]
[지금 당신 집 앞에 있으니까 일 분 후에 찾아가지.]
놀란 박태홍이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는 엉겁결에 문 쪽을 보았다. 현관의 벨이 울린 것은 그로부터 30
초도 안 되었다. 80평형 빌라에는 박태홍이 정부 이유미와 둘이 살고 있었다. 이유미가 맑은 목소리로
누구냐고 물었다. 서둘러 잠옷을 꿰어 입은 박태홍이 응접실로 나갔을 때 현관에 서 있던 이유미가 그
를 바라보았다.
[금방 전화하신 분이라는데요?]
[문 열어.]
어금니를 물었다가 푼 박태홍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놈의 말마따나 이 상황에서 앞뒤 잴 만한 여유
가 없는 것이다. 오늘 김은배가 은감원장을 시켜 제일은행장에게 담보 대출건을 승인받게 해주지 않
으면 서둘러 도망쳐야만 한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사내를 보자 박태홍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체격이
컸고 눈빛이 강해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자, 이쪽으로.]
박태홍이 턱으로 서재를 가리키고는 앞장을 섰다. 그리고는 서재 문을 열면서 이유미에게 말했다.
[내가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마.]
그들은 서재의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박태홍은 조금 안정이 된 눈치였다. 그러나 아직 눈빛은 매서
웠다. 낯선 방문자의 신분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 무슨 일이오?]
박태홍이 도전하듯 묻자 사내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배어났다. 그리고는 사내가 주머니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놓고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 김은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박태홍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오후 1시가 되었을 때 김은배의 앞에 놓인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국회 회기 기간이었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있었던 것이다. 휴대폰을 쥔 김은배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김 의원님.]
사내의 목소리를 들은 김은배가 번쩍 눈을 치켜 떴다. 박태홍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 시간에는 윤우
일이 전화를 해야 맞는다.
[아니, 박 회장.]
[실망하신 것 같은데, 내가 전화를 해서. 그렇지 않소?]
[이봐, 박 회장. 무슨 말이야?]
[네가 날 죽이라고 윤우일이를 보냈잖아?]
[아니, 도대체 그게……]
[윤우일이가 날 죽이려다가 잡혔다. 그리고 다 자백했단 말이다.]
목소리를 높인 박태홍이 말을 이었다.
[그놈이 자백한 내용을 다 녹음해 놓았어. 어디, 너 이 새끼, 살인교사로 잡혀 들어가 봐!]
[이봐, 박 회장……]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놈같이 보이드냐? 너는 살인교사에다 주가조작, 횡령으로 아마 몇 십 년
은 살아야 될 거다.]
[무슨 오해를 한 것 같은데.]
겨우 그렇게 말을 막은 김은배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앞쪽을 보았다. 그러나 초점이 흐려져서 사물
이 두 개 세 개씩으로 보였다.
[누구세요?]
현관을 비치는 모니터에 김경명의 얼굴이 확실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오수경은 다시 물었다. 그러자
김경명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김경명이를 모르신단 말예요?]
목소리가 컸으므로 오수경은 저도 모르게 현관문의 버튼을 눌렀다. 김경명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녀
는 김은배의 가족사진을 봐서 이미 알고 있었다. 현관으로 다가간 오수경이 고리를 벗겨내고 문을 열
자 김경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깥쪽에서 문이 와락 당겨지면서 두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으로 밀린 오수경은 비틀거렸다. 김경명과 함께 들어선 사내 하나가 문을 닫았고, 다른
하나가 오수경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소리 지르거나 반항하면 죽여 버릴 테야. 그러니 찍소리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오수경은 온몸에 찬 기운이 덮여지는 느낌이었다. 주머니에서 날이
시퍼런 회칼을 꺼낸 사내가 칼몸을 오수경의 볼에 붙였다. 금속의 찬 감촉에 몸서리를 친 오수경이 김
경명을 보았다. 반쯤 돌아선 김경명의 얼굴도 겁에 질려 있었다.
[연락 못 받았는데요.]
귀찮다는 말투로 자금부장 이유석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박 회장님.]
[아니, 괜찮습니다. 그럼.]
전화기를 내려놓은 박태홍이 이를 악물었다. 오후 4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오늘 결재가 난다고 해
도 돈을 빼내기는 이미 늦었다. 한동안 앞쪽 벽을 노려보던 박태홍은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나 열 번
도 더 시도했지만 김은배는 휴대폰의 전원을 끈 상태였다. 통화가 되지 않았다.
[좋아, 해보자는 거지.]
그가 잇사이로 씹어뱉듯 말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고, 그는 서둘러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납니다.]
이제는 귀에 익은 윤우일의 목소리였다.
[지금 급한데 어디 계시오?]
대뜸 윤우일이 묻자 박태홍은 다시 긴장했다.
[난 지금 맴피스 호텔에 있는데 왜 그러시오?]
[방금 정보를 들었는데 김은배가 박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답니다. 검찰이 고발장을 들고 출발을 했다
는데.]
윤우일이 다급하게 말했다.
[김은배가 검찰에다 손을 다 써놓은 것 같습니다. 이거 나도 큰일났는데.]
[……]
[우리가 너무 세게 밀어붙인 것 같습니다.]
[그, 그게 사실이오?]
박태홍이 겨우 그렇게 묻자 윤우일의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확실합니다. 이거, 나도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돌아가도 받아주지도 않을 테지만 말이야.]
[알았습니다.]
휴대폰의 전원을 끈 박태홍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은배의 약점을 잡아 대출을 일으키면 윤우
일에게 10억을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여기서 헤어지자구.]
사내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오수경은 시선을 내렸지만 김경명은 눈을 치켜 떴다.
[그렇다면 묶은 걸 풀어줘야 할 것 아냐?]
[그래야겠지.]
쓴웃음을 지은 사내가 주머니에서 회칼을 꺼내더니 김경명과 오수경의 손발을 묶은 나일론 끈을 잘랐
다.
[이봐, 손가락 하나 안 대고 이렇게 놔주는 사람은 드물어, 우리한테 고맙다고 해야 될 거다.]
[흥, 고맙다고 하라구?]
손목이 아팠는지 손목을 문지르면서 김경명이 암팡지게 대들었다.
[당신들은 곧 잡혀.]
[김 의원은 신고도 하지 못할 거야.]
사내가 마당에 세워진 트럭을 눈으로 가리키며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저 돈의 출처가 알려지면 당장에 구치소에 가게 될 테니까.]
그리고는 사내가 정색하고 김경명과 오수경을 보았다.
[김은배는 사람을 시켜서 우리 회장님을 죽이려고 했어. 살인교사까지 했단 말이야. 그 일까지 밝혀지
면 김은배는 무기징역감이야.]
놀란 듯 김경명과 오수경이 눈만 크게 떴다.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더러운 놈, 리베이트로 받은 돈을 70억이나 쌓아두고 있다니, 네 아버지한테 우리 회장님이 이걸 가
지고 외국으로 뜬다고 전해라.]
그리고서 사내가 몸을 돌리고는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스형 트럭에 올랐다. 사내의 일행은 넷이
었고 승용차 한 대와 트럭은 곧 출발하더니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았다. 차에다 시선을 주었던 김
경명이 머리를 돌렸을 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수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떡하면 좋죠?]
오수경이 먼저 물었다. 그들은 마루 끝에서 엉거주춤 일어서 있었는데 오후 5시가 넘은 시간이라 별장
은 산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이곳은 김경명도 몰랐던 파주 교외의 산 속 별장이다. 김은배는 이곳의
창고에다 돈을 옮겨 놓았던 것이다. 오수경의 시선을 받은 김경명이 대답 대신 주위의 산을 둘러보았
다.
[신고할 수는 없어요.]
이윽고 김경명이 뱉듯이 말하고는 마당으로 나와 섰다.
[김 의원님한테 댁이 연락은 하셔야겠죠. 놈들이 나하고 댁을 인질로 잡고 이곳까지 왔다고 말하세요.
그리고……]
김경명이 똑바로 오수경을 보았다.
[놈들은 댁이 사는 곳을 알고 있었어요. 내가 데려왔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난 놈들 위협에 문을 열
게 했을 뿐이니까.]
차가 국도로 들어섰을 때 한명철은 휴대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 신호가 떨어지더니 윤우
일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형님, 다 끝났습니다.]
[그래? 이쪽도 잘 됐다. 지금 박태홍이 공항으로 가고 있으니까.]
윤우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타이밍이 맞았다.]
김은배가 오수경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저녁 6시 반경이었다. 통상 사용하는 휴대폰을 꺼 놓았지만 오
수경을 비롯한 극히 제한된 몇 사람만 알고 있는 또 하나의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온 것이다.
[선생님, 큰일났어요.]
오수경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수화구를 울렸을 때 김은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요즘은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야?]
[저…… 어떤 사람들이 집에 들어와서 저를 데리고 파주 산장에 갔어요.]
금방 얼굴이 노랗게 된 김은배의 귀에 오수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칼로 죽인다고 위협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사람들은 둘째 아가씨까지 인질로 잡고 끌고 왔어요.]
[경명이까지?]
[예, 경명 씨도 잡혀왔어요.]
[그, 그래서?]
[죽인다고 해서 파주 별장까지. 그리고……]
[다 가져갔어?]
[네……]
[몇 놈이야?]
[네 명인데 자기들 회장님을 죽이려고 했던 보복이라고 했어요.]
[……]
[그리고 그 돈을 갖고 외국으로 떠난다고 했는데……]
[알았어, 그런데……]
길게 숨을 뱉은 김은배가 눈의 초점을 모아 앞쪽을 보았다.
[경명이는 지금 어디 있어?]
[같이 묶여 있다가 조금 전에 헤어졌어요. 저는 지금 파주 시내에서 전화를 하고 있어요.]
[혼자 돌아갈 수 있겠어?]
[무서워서 오늘은 엄마한테 갈게요.]
[알았어.]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은배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박태홍인 것이다. 이쪽에서 전화도 받지 않자 김경
명과 오수경을 찾아내어 비밀금고를 털어 간 것이다. 이제는 비자금도 한 푼 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
를 악문 김은배는 시선을 들었다. 비밀금고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놈은 윤우일일 것이다. 박태홍에게
잡힌 그놈은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았다. 고문을 당했을지도 모르지만 대가 약한 놈이다.
밤 8시 반이면 사당동의 먹자골목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도 없다. 사람들을 헤치고 먹자골
목 앞까지 다가선 김경명은 겨우 숨을 돌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10대와 20대 청년들이
어서 분위기는 밝고 활기에 차 있었다.
[어때? 정신이 드는 것 같지 않아?]
옆에서 누군가가 소리쳐 말했다. 김경명은 머리를 돌리고는 웃었다. 윤우일이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
었던 것이다.
[저 겁없는 젊음을 보라구.]
바짝 붙어선 윤우일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그들 앞으로 서너 명의 남녀가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
는 중이었는데 고등학생 또래였다. 그리고 모두 얼굴에 술기운이 배어 있었다. 윤우일이 김경명의 팔
을 쥐었다.
[우리, 낚지볶음 먹으러 가자.]
그들이 들어선 곳은 낚지볶음 코너였는데 이곳에도 손님들이 버글거렸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은 그
들 앞으로 금방 낚지볶음과 소주가 날라져왔다.
[빠르네.]
김경명이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웃었다.
[맛있겠다.]
붉게 익혀진 낚지 한 점을 입에 넣은 김경명이 맛있게 씹더니 입술을 내밀었다.
[후우, 매워.]
윤우일은 잔에 소주를 채우고는 술잔을 들었다.
[얼마를 줄까?]
힐끗 윤우일에게 시선을 주었던 김경명이 소주잔을 들더니 한 모금에 삼켰다. 그리고는 정색했다.
[5억만, 그 이상은 필요 없어.]
[현금이 60억이 넘어. 잔 수표도 10억 가깝게 되고.]
[난 집에 들어갈 거야.]
다시 낚지 한 점을 입에 넣은 김경명이 윤우일의 가슴께에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그 5억도 비상금으로 넣어두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나머지는 내가 보관해두지.]
윤우일도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김경명은 오수경의 집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었다. 한명철과 함
께 김경명은 제발로 오수경을 찾아가 문을 열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공범이다. 술을 삼킨 윤우일이
입을 열었다.
[난 비서관을 그만 둔다. 내일 전화로 그만둔다고 할 참이야.]
그리고는 윤우일이 똑바로 김경명을 보았다.
[아마 네 아버님도 의원직을 잃게 될지도 몰라. 이번에 큰일이 터졌거든.]
[사람을 시켜 누굴 죽이려고 했다는 거 정말이야?]
김경명이 정색하고 물었다. 윤우일은 시선을 비꼈다. 하이콘전자와의 사건에 대해서는 일체 말해주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김경명은 윤우일이 박태홍과 손을 잡은 것은 물론이고 박태홍이 누구인지도 모
른다.
[아마 그랬던 모양이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윤우일이 김경명의 잔에 술을 채웠다.
[어쨌든 그 일은 끝난 것이고 오늘은 네 귀가를 축하하는 파티를 하자.]
[아버지는 어떻게 될까?]
섹스를 마친 후 천정을 바라본 채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고 누워 있던 김경명이 물었다. 사당동의 여
관방 안이었다. 엎드려 담배를 피우던 윤우일이 힐끗 김경명을 보았다. 이제까지 김경명은 김은배를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드물었던 것이다. 대개 그 사람이라고 3인칭을 써왔다.
[글쎄, 일이 터지면 의원직을 내놓고 구속될 수도 있지.]
[누굴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청부를 맡았기 때문에 나만 증언하지 않으면 돼.]
그러자 김경명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윤우일을 보았다.
[자기가 일을 맡았어? 누구를 죽이라고 했던 거야?]
[곧 언론에 크게 보도될 주가 조작범.]
[왜?]
[그놈이 네 아버지한테 협박을 했기 때문에.]
[그럼 오늘 창고를 턴 것도 그놈의 소행으로 되었겠네.]
[그렇지.]
담배연기를 길게 내품은 윤우일이 몸을 돌려 천정을 바라보며 누웠다.
[하지만 그놈은 오늘 저녁 비행기로 태국으로 떠났어. 가족은 모두 뉴질랜드에 있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을 거야.]
[……]
[네 아버지는 수단이 좋아서 모든 일을 그놈한테 미루고 빠져나올지도 모르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윤우일이 벽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 반이었다.
[어쨌든 나도 그동안 좋은 경험을 했다. 네 아버지 덕분에 스케일 큰 도둑질을 낱낱이 볼 기회가 있었
어. 내 인생에 많은 참고가 될 것 같다.]
김은배의 목소리가 울렸을 때 윤우일은 심호흡을 하고는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저, 윤우일입니다.]
[아, 자네 지금 어디 있나?]
조금 놀란 것 같으면서도 탐탁치 않은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으므로 윤우일은 입술 끝을 비틀었다.
[저, 어제 저녁에 풀려났습니다만 몸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
[팔과 다리가 한쪽씩 부러졌고 이가 네 대가 빠졌습니다. 그리고……]
[……]
[갈비뼈도 다섯 대가 부러져서 거의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의원님.]
[그거 안됐는데……]
마침내 김은배의 목소리에 감정이 섞여졌다. 동정이나 관심보다도 초조해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지금 병원에 있나?]
[예, 지방 병원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줄 일이 있나?]
[없습니다. 그저 일이 실패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이미 끝난 일이야. 신경쓰지 마.]
[놈들이 눈치를 챘는지 잡혀버려서 지금도 억울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고문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부분만 털어놓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글쎄,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구.]
[그래서 의원님, 저 일을 그만 둘까합니다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김은배가 숨을 두어 번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았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네.]
[남아서 도와드리고 싶지만 몸이 이 꼴이 되어서 움직일 수도 없는 형편이라……]
[몸 관리나 잘하고 완쾌되면 한번 찾아오게.]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의원님.]
윤우일은 정색한 얼굴로 차분하게 휴대폰의 덮개를 닫았다. 이것으로 김은배와의 인연은 끝난 것이
다. 그러나 김은배의 덕분으로 1200억이 넘는 거금을 쥐게 되었다. 현금이 5백억이 넘었으며 수표가 7
백억 원이다. 쓴웃음을 지은 윤우일이 아직 아침이라 비어 있는 호텔 커피숍을 둘러보았다. 새 아침이
다.
[다녀올게요.]
명혜에게 시선을 주었던 김희연이 몸을 돌리자 정 여사가 물었다.
[오늘도 늦니?]
[다섯 시쯤 올텐데, 무슨 일 있어요?]
[너 오면 삼촌한테 가려고. 오늘이 삼촌 생일이란다.]
[끝나면 바로 올게요.]
[신경쓰지 마라.]
아파트를 나온 김희연은 심호흡을 했다. 명혜는 이제 엄마가 아침에 나가는 것에 익숙해져서 보채지
는 않았지만 일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나이였다. 닷새 전에 정 여사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명혜는
베란다의 난간에 상반신이 끼어져 있었는데 손과 발이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몸이 커서 난간의 쇠창
살 밖으로 빠져나가지는 않았지만 정 여사는 10년 감수를 한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김희연은 현관을 나와 주차장으로 다가갔다. 지난 달에 산 소형차는 편리했지만
신경이 많이 쓰였다. 박동진과 결혼생활을 할 적에도 자가용이 필요 없었던 김희연이다. 차가 필요하
면 박동진이 기사 딸린 벤츠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차에다 오일 교환까지 직접 해야
만 한다. 차로 다가간 김희연이 키를 꽂았을 때였다.
[제법 열심히 사는 것 같구만.]
갑자기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굳혔던 김희연이 숨 한번 마시고 뱉을 동안 가만 있다가 천
천히 몸을 돌렸다. 차 한 대 건너편에 윤우일이 상반신만 드러내고 서 있었다.
[그 못난이 딸은 어머니가 맡은 건가?]
[왜 또 나타난 거야?]
김희연의 말투도 차가웠다. 다시 차에 키를 꽂은 김희연이 머리만을 돌리고 윤우일을 보았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어?]
[네가 죽기 전까지는 뗄 수가 없지.]
윤우일이 느릿하게 말했다.
[좋은 소식하고 나쁜 소식이 있는데, 무엇부터 들려줄까?]
그러자 이를 악문 김희연이 몸을 돌리고는 윤우일을 정면으로 보았다. 김희연의 출근시간은 10시 반
이어서 어중간한 시간대인 터라 주차장에는 그들 둘 뿐이었다.
[좋은 소식.]
윤우일이 차를 돌아 김희연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얼굴 표정이 밝았다.
[한남유통이 법정관리로 들어갔어. 박동진이는 거지가 되어버렸지. 부채가 5천억이 되니까 아마 몇
년쯤 교도소에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
[---]
[그리고 나쁜 소식.]
이번에는 윤우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것.]
[수작 끝났어?]
김희연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윤우일을 보았다.
[그럼 잘 가.]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앞에 마두라 섬이라고 있어. 아름다운 곳이야.]
눈을 치켜 뜬 윤우일이 김희연을 똑바로 보았지만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마치 홀린 듯한 표정이었
다.
[내가 일 년 전에 한 여자하고 다섯 살짜리 여자애의 유골을 그곳 별장 마당에다 뿌렸지. 그 여자는 내
품에 안겨서 죽었는데 그 순간에 날 사랑한다고 했어. 행복하다고.]
그 순간 김희연은 숨을 삼켰다. 부릅뜨고 초점없는 윤우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윤
우일이 두 팔을 벌려 누구를 안는 시늉을 했다.
[그 여자는 그때 날 힘껏 안아달라고 했어. 힘껏 --]
[---]
[그런데 -- 그 순간에 나는 너를 생각했어. 죽어 가는 그 여자를 안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말을 그친 윤우일이 눈물을 떨구었다. 짧고 굵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울지 마 --]
마침내 김희연이 팔을 뻗어 윤우일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바보같이 왜 이래?]
그 순간 김희연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너를 버릴 수 없어. 그래서 너하고 명혜를 그곳으로 데려가고 싶어.]
이윽고 얼굴을 든 윤우일이 충혈된 눈으로 김희연을 보았다.
[널 다시는 놓지 않을 거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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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즐거운 시간이였는데 아쉽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잘보았습니다
역시 인생은 공술래야. 날면 쏘고 엎니면 발고 세상 요지경이야...
그동안 수고 하셨읍니다
독, 하였읍니다만 전체적인 글이 
,
항상 감사


므
약간 아쉽게 짧군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허허 끝이????/정말 재미있었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넘 넘잼있었습니다. 꾸벅 꾸벅~~^^
잘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
ㅈㄷ
ㅈㄷ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