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말
박정란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
친절한 목소리에 그만
속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탈탈 먼지까지 털었다
전화를 끊고
왠지 입안이 땡감 먹은 듯 떫었다
통화 내용을 분석해보니
업어치기, 자치기, 둘러치기
얼굴이 화끈화끈 따가웠다
새벽이 먼 한밤중
저 교활한 말들이
잠들었던 무거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온몸이 화끈화끈 뜨거웠다
---{애지},2024년 가을호 발표예정
지구는 둥근 공처럼 생겼으며, 모든 길들은 다른 길들과 이어졌고, 그 어떤 산들도 단독적이 아닌 수많은 산맥들과 이어져 있다. 말도 우연히, 저절로 솟아난 말이 아니라, 수많은 말들의 체계에 따라 그 문맥들과 이어져 있는 것이다.
산과 산의 울림이 메아리이듯이, 말과 말의 울림도 단독적이 아닌 수많은 메아리 효과를 지니게 된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나는 자유인이며,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박정란 시인의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 친절한 목소리에 그만/ 속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라는 시구에서처럼, 그야말로 속을 탈탈 털어 다 보여줬지만, 그러나 그 말의 후유증은 깊고 깊은 밤의 잠자리까지 다 초토화시킨 것이다. 첫 번째는 그의 친절한 목소리에 이것 저것 따져볼 새도 없이 자기 자신의 속마음을 다 까발린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솔직한 마음의 고백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반사효과라고 할 수가 있다. 험담은 적어도 세 사람을 죽인다는 {탈무드}의 교훈도 있다. 첫 번째는 험담을 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험담을 듣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세 번째는 그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말은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고, 그리고 그 패거리들의 싸움을 관전하면서 수많은 또다른 패거리들이 나타나기까지, 그토록 사납고 엄청난 이전투구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말은 어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고, 어느 누구도 그 말 앞에서 자유롭거나 모든 책임을 다 질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이전에 언어적 동물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의 터전은 영토와 집이 아니라 말들의 문법 체계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돈과 명예와 권력은 말의 소유물이며, 우리 인간들은 이 말의 명령에 따라 울고 웃다가 죽어가는 희극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착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다. 때로는 더없이 사악하고 교활한 가면을 쓸 때도 있고, 때로는 더없이 착하고 선량한 가면을 쓸 때도 있다. 박정란 시인의 [한밤중의 말]은 선악의 경계에 있는 말이며, 더없이 착하고 친절한 그의 말에 속아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가, 그 잘못을 깨달은 자의 회한의 아픔이 배어있는 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지고 보면 그와 함께 더없이 착하고 선량한 탈을 쓰고 있는 내가, 즉, “업어치기, 자치기, 둘러치기” 등의 온갖 이전투구의 술수를 사용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그러나 그 자책감보다도 더 뼈 아픈 그 사악하고 교활함에 대한 자기 고백이 이처럼 [한밤중의 말]을 더없이 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하고, 제일급의 명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새벽이 먼 한밤중”의 “저 교활한 말들”은 더없이 사악하고 교활한 말이며, 따라서 “잠들었던 무거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온몸을 화끈화끈” 뜨겁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시한폭탄이고 원자폭탄이며, 참으로 사악하고 교활한 인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우리 시인들뿐이며, 이 천하제일의 정직함이 박정란 시인의 삶 자체를 시로 만든다.
말은 불이고 불씨이고, 말은 화약이고 대포이며 원자폭탄이다. 천둥과 번개와 온갖 태풍과 홍수 등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우리 인간들의 말싸움은 이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은 언어의 법칙인 것이다. 자연의 법칙 앞에서는 모두가 다같이 순응해야 하지만, 말싸움, 즉, 언어의 법칙 앞에서는 모두가 다같이 사생결단식으로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업어치기는 상대를 업어치는 것이고, 자치기는 상대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것이고, 둘러치기는 능변이나 달변과도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험담, 즉, 나쁜 말은 강도와 폭력과 살인보다도 더 나쁠 수도 있고, 그 파괴력이 더 클 수도 있다. 험담은 인간을 더없이 사악하고 교활하게 만들며, 공동체 사회의 도덕과 법률, 혹은 전통과 역사를 다 파괴하며,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과 탐욕만을 성화시키게 된다.
박정란 시인의 [한밤중의 말]은 “나는 더없이 사악하고 교활한 인간이다”라는 자기 고백의 말이며, 자기 스스로를 더없이 잔인하고 끔찍하게 만드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말이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