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무술 수련
1. 바둑 두는 노인
다음 날 오전에 한준과 이중부는 얼른 땔감을 두 단씩 해놓고 약속한 정오 무렵에 박달촌 십칠 선생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집안이 조용하다.
아는 얼굴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다만,
살구나무 아래 자리 잡은 평상 위에 초로 初老의 노인 두 분이 바둑을 두고 있다.
백발 白髮의 노인은 흰 도포를 입고 있고, 반백 半白의 노인은 상의는 노루 가죽옷을 걸친 체 정좌 正坐 자세로 장고 長考하고 있다.
집안에 다른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몇 잎 남지 않은, 뒤늦게 피었던 살구꽃 한 잎이 손등에 살며시 떨어진다.
두 노인에게 목례 目禮하고 평상으로 다가간다.
바둑에 열중한 두 노인은 낯선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바둑은 중반전 中盤戰 막바지 상황이다.
그런데 반면 盤面의 분위기가 심각하다.
반백의 노인이 투박스러운 나무통 속의 검은 바둑돌을 집었다, 놓았다 몇 번을 거듭하더니, 돌을 도로 통속으로 다시 집어 넣고 또, 다시 장고 長考를 거듭하고 있다. 감히 착점하지 못하고 있다.
대마 사활 死活에 확신이 서질 않는다.
중앙 中央에 떠 있는 미생 未生의 대마 大馬가 자꾸 눈에 거슬린다.
대마에 한 수 가일수 加一手를 하면 완생 完生하는 형태인데, 그러면 선수 先手를 상대에게 빼앗겨 큰 끝내기를 당하는 모양새다.
그러면 몇 집 차이로 지게(敗) 되는 어려운 형국 形局이다.
그렇다고 미생의 대마를 방치하고 큰 끝내기를 해버린다면, 우상변 右上邊에서부터 뻗어 나온 검은 대마가 죽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대마가 비명횡사 非命橫死 한다면 그걸로 상황 끝이다.
그래서 대마에 손을 빼고도 상대의 공격에도 살아날 수 있는 수를 연구하고 있다. 머릿속은 이런저런 수십 가지의 변화도 變化圖를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뇌가 복잡하다.
모든 경우의 수를 읽고 계산해 본 후, 다시 검토하고 또, 재점검 再點檢 해 본다.
그런데도 확신이 서질 않는다.
상대가 파호 破戶하며 공격해 오면 대마가 자체로는 두 집을 낼 수 없으니, 탈출을 시도해야 하는데, 유일한 탈출구가 좌하 左下 방면 方面이다.
그런데 좌하 방면에 포진 布陣하고 있는 백의 세력 勢力이 은근히 두터워, 흑 黑 진영 陣營과의 연결이 쉽잖아 보인다.
아군 我友 진영과의 연결이 어렵다면, 한 수를 투자하여 자체로 한집을 더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 하변 右下邊의 열 집 상당의 큰 끝내기를 상대에게 양보하는 형국 形局이 되어버린다.
그럼, 그것으로 이 바둑은 승부 勝負가 나버린다.
그러니까 어렵다.
그래서 한없이 장고 중이다.
한참 후, 드디어 결심하였는지 오른손의 중지가 검지 손톱 위에 겹치게 집게 손을 만들어, 돌 통에서 검은 돌을 한 개 집어내어 바둑판 위로 가져가서 착점하려는 순간, 손이 멈칫한다.
얼핏 다른 수가 보였다.
지금까지 검토한 수가 아닌, 백의 또 다른 공격 수단이 있는 것 같다.
‘아차’ 노인의 돌집은 손이 얼른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바둑판을 한번 선회 旋回하고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다시 돌 통 속으로 들어 간다.
빛바랜 살구꽃 한 닢이 바둑돌을 대신하여 반상 盤上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맞은 편 백두옹 白頭翁은 살평상 위에 놓여 있던 부채를 들어 반상 위의 낙화 洛花를 부채 바람을 일으켜 날려버린다.
백두옹의 왼손에 쥔 부채는 알록달록한 수꿩의 꼬리깃으로 만든 것으로, 대나무 손잡이가 반질반질하게 녹색 윤이 난다. 아마 찬 바람 부는 추운 겨울철에도 들고 다닐것 처럼 보여진다.
크게 덥지도 않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수꿩의 꽁지깃 부채로 부채질을 두어 번 하더니 주위를 휘둘러 보며 여유 있게 한마디 던진다.
“어 허~ 바둑 두는 사람 어딜 갔나?”
상대를 조롱하는 어투다.
수읽기에 여념 餘念 없는 상대방을 조급하게 만드는 일종의 심리전 心理戰이다.
“바둑은 생각하는 재미지”
그러나 반백 노인의 어투도 서두르지 않고 여유가 있다.
“그려~, 그런데 하수가 오래 생각한다고 좋은 수가 나올까? 시간만 죽이는 게지”
두 노인네의 바둑 전력 戰歷이 한두 해가 아닌 것 같다.
오가는 어감 語感이나 바둑판 앞에 앉은 모양새가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럽다.
여유가 있는 백두옹. 두 소년을 보더니 그제야 아는 체한다.
“아 하, 젊은이들이 왔었군, 자네들이 산동에서 온 맥족 貊族인가?”
“네~, 어떻게 아세요?”
반은 맞고 반은 아니나, 소년들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한준은 조상 대대로 산동성 청주에서 살아온 부여의 맥족이 맞으나,
이중부는 사로국에서 온 한반도의 한족 韓族이다.
그러니, 크게 보면 다 같은 동이족이기에 그냥 수긍 首肯해 버린다.
연세 많은 어른 앞에서 미주알고주알 설명하기도 불편하다.
“십칠인지 칠십인지 하는 선생이란 작자가 자네들이 올 거라고 하더군”
“십칠 선생님은 어디에 계세요?”
“난들 알 수가 있나?, 발 달린 동물 어딘들 못 가겠느냐?”
보기와는 다르게 백두옹의 말투가 좀 삐닥하다.
본인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말한다.
‘딱’
바둑판에 놓는 돌 소리가 야무지게 들린다.
반백 노인은 오랜 장고 끝에 결심하였는지, 결연한 자세로 까만 돌을 상대의 흰 돌에 힘있게 붙여 간다.
그런데 반백노인의 장고 長考 끝에 둔 착점은 큰 끝내기도 아니고, 미생마를 안정시키는 수도 아닌 상대방 돌들을 절단시켜 공격하는 착점이었다.
공격 도중에 자신의 미생마가 자연스레 안정화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그리고는 한마디 한다.
“당사자가 나타나면 꼼짝도 못 하는 늙은이가 젊은 사람들에게 허풍은... 쯔쯔”
상대방의 심기 心氣를 살짝 건드려본다.
“머라~ 누가 누구에게 꼼짝 못한다는 말인가?”
백두옹은 두 눈을 부라리며 반백 노인을 노려본다.
자신이 제일 께름직하게 여기는 수를 상대가 두어왔다.
내심 內心, 그 수를 상대방이 못 보길 바라고 있었는데, 상대는 그 수를 기어코 찾아내고 말았다.
드디어 심리전에 말려들었다.
바둑은 제쳐두고 설전 舌戰이 시작된다.
반상 盤上과 더불어 반외전 盤外戰이 동시에 개전 開戰된다.
“왜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내어 헛말을 했는가?”
“허. 네놈은 날이 갈수록 버르장머리가 없어져 큰일이야, 이제 이 형님과 맞먹자는 거야, 뭐야?”
“어, 허 누가 형님인데, 이놈이 갈수록 태산일세”
옆에서 두 노인의 말다툼을 듣고 있는, 이중부와 한준은 할아버지 정도의 연세가 많아 보이는 분들이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갈수록 격렬해지는 말싸움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그냥 듣고 있기도 민망스럽다.
말다툼의 수위 水位가 올라가더니, 손가락이 허공 찌르기 신공을 선보인다.
전장 터가 바둑판을 이탈하여 확전 擴戰 되고 있다.
이제 ‘이놈 저놈’은 상용어 常用語다.
한 달 전에 일어난 술자리에서의 술잔이 누구에게 먼저 돌렸는지부터 시작하여, 술자리 서열문제 序列問題까지 따져가며 다투더니, 급기야 육두문자 肉頭文字까지 튀어나온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바둑판을 뒤엎을 듯이 험악스러운 욕설이 난무하고, 이쪽저쪽 손가락질이 왔다 갔다하며 서로가 잡아먹을 듯이 싸워도, 바둑판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잘들 싸운다.
반상 위의 바둑돌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를 고이 지키고 있다.
아직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일반인들이 이정도 수위의 싸움이 벌어졌다면, 바둑돌과 바둑통이 허공을 날아다니고, 바둑판이 적어도 몇 번은 뒤엎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두 노인네, 바둑판만큼은 손도 대지 않고 격렬히 싸우고 있다.
아니 오히려 양손으로 바둑판을 보호하듯이 하고 싸우고 있다.
이 한 판이 무척 중요한 것 같다.
그냥 시간 보내기식 바둑이 아니라 내기가 걸린 것 같다.
그것도 상당히 큰 내기가 이 한판의 바둑에 걸린 느낌이다.
-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