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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부아지에는 그당시까지 믿고 있던 플로지스톤설을 깨고, 근대 화학의 기초를 구축한 위대한 화학자이다. 그러나 세금 징수원이었다는 이유로 프랑스 혁명때 체포되어, 1794년 5월 8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정밀한 측정에 힘쓰다>
파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젊었을 때부터 모든 것을 정확히 재는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주의 깊게 물체의 무게와 치수를 재고, 그것을 자세히 노트에 기록하였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을이 보기에 그것은 참으로 바보스러울 정도의 정확성이었다.
과연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물건의 무게나 치수를 잴 필요가 있는가. 하면서 사람들은 의아해하였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올바른 실험과 정밀한 측정이 있어야만 과학이라는 학문이 튼튼하게 뿌리내린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물리학에 있어서 갈릴레이가
실증한 근대 과학적 방법이었다.
1768년, 아직 25세밖에 되지 않았던 라부아지에는 그리스 시대부터의 4원소설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다. 4원소설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불,물,공기,흙의 4원소로 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4원소설을 믿은 화학자들은 물을 장시간 끓이면 침전물이 생긴다는 점에서 가열된
물은 결국 흙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던 라부아지에는 유리 용기에 물을 넣고 101일 동안이나 가열해 보았다. 확실히 침전물이 생겼다. 그러나 실험 전과 후에 유리 용기의 무게를 정확히 측정한 라부아지에는 유리 용기가 가벼워진 바로 그 무게만큼의 침전물이 생겼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결과는 4원소설을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이 변화하여 침전물이 생긴 것이 아니고, 유리가 변화하여 생겼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었다. 이로써 그는 그리스시대 이래 사람들이 믿어왔던 4원소설을 타파했던 것이다.
<플로지스톤설에 도전>
라부아지에는 또 그가 자신 있게 재어왔던 정밀 측정으로, 당시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믿고 있던 플로지스톤설(Phlogiston theory) 즉 연소설에도 도전하였다. 원래 공공심이 강했던 그는 야간에 시가지의 도로를 밝게 하는 실용적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때 램프에 사용하는
연료 문제와 관련하여 물건이 타는 연소나 금속에 녹이 스는 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플로지스톤설에 의문을 가지게 하였다.
그렇다면 플로지스톤설이란 무엇인가. 지금은 연소도 금속의 녹도 모두 어떤 것과 산소와의 화합 즉 산화로 보고 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 시대에는 이들 현상이, 약 70년 전에 독일의 의사 슈탈(E.Sthal 1660 1734)이 제안한 플로지스톤설에 의해 다음처럼 설명되고 있었다.
나무가 타고 나면 재가 남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금속이 타고 난 후 남는 금속재가 곧 녹이다( 여기까지는 슈탈의 생각이 옳다). 이때 금속은 플로지스톤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물질과 금속재로 되어 있는데, 금속을 가열하면 그 플로지스톤이 달아나고 금속재만 남는다고 슈탈은 생각하였다. 즉 현대식으로 말하면 금속 과 산소 가 결합하면 금속산화물 (녹) 로 표시되어야 할 변화를 슈탈은 금속 은 플로지스톤 과 금속재, 또는 금속 에서 플로지스톤 을 빼면 금속재 (녹)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슈탈의 플로지스톤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플로지스톤설에는 누가 생각해도 곧 깨닫게 될 하나의 결점이 있다. 그것은 금속재(녹)가 금속 그 자체보다도 무겁다는 사실을 플로지스톤설로 설명하려고 하면, 금속에서 달아난 플로지스톤이 마이너스의 무게를 가졌다고 생각해야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참으로 기묘한 결론이 아니겠는가.
이 기묘함이 과연 어디서 오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라부아지에는 1772년경부터 연소실험을 시작하였다. 그는 정밀한 측정을 하기 위해 모든 실험을 밀폐된 유리 용기 안에서 하기로 하였다. 또 유리 용기 안의 것을 태우는 데에 큰 집광렌즈를 사용하고, 태우고자 하는 것을
렌즈 초점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많은 돈을 지불하여 다이아몬드를 사고, 태양빛을 모아 그 다이아몬드에 쬐었다. 그러자
다이아몬드는 완전히 타고 용기 안에는 탄산가스(이산화탄소)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다이아몬드가 탄소 또는 탄소의 화합물이라는 것, 그리고 다이아몬드의 연소가 나무의 연소와 완전히 같은 현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어서 그는 밀폐된 용기안에서 주석(Sn)을 마찬가지로 가열하였다. 주석의 일부분은 금속재가 되었지만, 유리 용기를 포함한 전체 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용기의 뚜껑을 열었더니 외부에서 공기가 용기 안으로 흘러들어가 그 양만큼 무게가 늘어났다. 다시말해 주석과 같은 금속을 가열하면 금속안에서 플로지스톤이 달아나기는커녕, 공기중의
무엇인가를 금속이 흡수하여 금속보다도 무거운 금속재로 바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말하면 그 무엇인가는 산소이고, 금속이 공기중의 산소와 화합하여 금속 산화물인 녹(플로지스톤설에서 말하는 금속재)으로 바뀐 것이다. 이때 금속이 흡수한 산소의 무게가 있으므로, 그 양만큼 금속산화물은 금속보다 무거워진다. 한편 용기 안은 밀폐되면서 산소를 빼앗겼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진공 상태가 된다. 용기의
뚜껑을 열 때 공기가 그 안으로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라부아지에에 의한 정밀 측정은 이들 현상을 모두 명확히 함과 동시에, 약 7 0년 동안 세력을 떨치고 있던 플로지스톤설을 그 근본부터 뒤집었다.
<프리스틀리와의 만남>
금속을 가열하여 금속 산화물을 만들때도 또 다이아몬드를 태워 이산화탄소를 만들 때도, 유리 용기를 포함한 전체의 무게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화학반응에 있어서의 질량 보존의 법칙이다. 즉 화학반응으로 물질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물질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할 뿐이다.
이러한 생각은 화학반응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반응 전의 물질의 무게(질량)의 합은 반응 후의 물질의 무게의 합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라부아지에가 발견한 이 질량보존의 법칙이야말로 모든 반응 방정식의 기본적 근거이며,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밀 측정의 의의도 여기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774년에 라부아지에는 파리를 방문한 영국의 목사이자 화학자인 프리스틀리(J.Priestley 1733 1804)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프리스틀리는 기체의 연구자로서 산소를 발견하여 유명해진 사람이다. 라부아지에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소에 있어서 산소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리 용기 안에서 금속을 가열하여 금속재로 만들 때 용기안의 공기는 일부분만 사용되고, 용기 안에는 연소에 참여하지 않은 기체가 남는다. 공기 중에 있으면서 연소에 도움을 주는 기체야말로 프리스틀리가 말하는 산소가 안을까하고 라부아지에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공기 중에 있으면서 연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또 하나의 기체(오늘날에는 질소)를 아조트라 불렀다. 그것은 그리스어로 생명이 없다라는 뜻이다. 이로써 라부아지에는 공기가 산소와 질소로 형성된다는 것을 밝히고, 또 연소나 금속에 녹이 생기는 것이 산소와의 화합 즉 산화라는 것을 밝혔다.
어쨌든 플로지스톤설은 완전히 타파되어 다시 소생하지 못했다. 질량보존의 법칙의 발견과 플로지스톤설의 타파 이것만으로도 라부아지에는 근대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그의 빛나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 공기 외에도 기체는 있다>
기체의 대부분은 무색이고 더욱이 발생한 기체는 곧 공기 중으로 달아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기체 특히 무색의 기체는 모두 공기라고 생각하였다. 모든 것이 불, 물, 공기, 흙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 4원소설은 그 무렵의 사고 방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17세기 초에 네덜란드의 의사이자 연금술사였던 헬몬트(J.B.van Helmont 1579 1644)는 질산 안에 작은 은덩어리를 넣으면 은이 녹으면서 붉은 증기 거품이 발생함을 관찰하였다. 더욱이 초(식초)안에 석회석을 넣었을 때 발생하는 기체에 불붙인 양초를 갖다 대었더니 불이 꺼진다는 것도 알았다. 이들 기체는 오늘날 말하는 이산화질소 및 이산화탄소이다. 이로써 공기외에도 기체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헬몬트는 이들 기체를 가스(gas )라 부르기로 하였다. 가스라는 것은 그리스어로 혼돈이라는 의미의 카오스(khaos)에서 유래한다.
요컨대 기체라는 것의 정체가 당시에는 그만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후 영국의 목사이자 화학자였던 헤일즈(S.Hales 1677 1761)는 발생하자마자 금세 달아나서 공기와 섞이는 기체를 붙잡는 방법을 생각해 내려고 하였다. 먼저 유리 용기 안에서 발생한 기체를 관을 통해 끌어 낸다. 그관을 물속에 거꾸로 서 있는 병속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관을 통해 병속으로 들어간 기체는 병속의 물을 밀어 내고 바닥 부분에 괸다. 이로써 공기와 섞이지 않은 기체를 붙잡게 되었다.
그러나 기체 중에는 물에 녹는 것도 있고, 그러한 기체에 대해서는 헤일즈의 방법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낸 사람이 프리스틀리이다. 그는 물 대신 수은을 사용해 보았다. 기체는 수은에는 녹지 않으므로 어떠한 기체도 모을 수 있다. 프리스틀리는
이렇게 하여 기체의 하나인 이산화탄소를 모으고 그것을 물에 녹이면 시원한 음료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소다수의 시작이다.
물로 이 이산화탄소는 나무와 다이아몬드를 태웠을 때에 발생하는 기체와 완전히 같은 것이다.
1783년 영국의 물리학자 캐번디시(H.Cavendish 1731 1810)는 수소를 태우면 물이 생긴다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하였다. 4원소설에서 말하는 물이 원소가 아니고,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임이 밝혀진 것이다. 원소의 중요성에 눈을 뜬 라부아지에는 수소에 대해서도 많은 실험을 시도하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원소 발견자의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위대한 과학자였던 라부아지에도 결국 그 소망만은 이루지 못하였다.
<원소를 표로 정리하다>
라부아지에는 1743년 8월 26일 부유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떤 어려움도 없이 최고의 교육을 받고 법률학 학위를 딴 그는 루이 왕조하에서 정부를 대신하여 국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원래 화학에 흥미가 있어서 세금 징수원이라는 직업을 가지고도 늘 화학
실험에 열중하였다.
그는 징세로 번 돈과 모친의 유산을 써서 자신만의 훌륭한 실험실을 만들었다. 그림에 재주가 있었던 그의 부인은 그가 쓴 책에 삽화를 그려 넣고 또 실험 노트를 기록하여 그의 연구를 도왔다.
1786년에 라부아지에는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연소에 관한 노문을 썼다. 이 논문중에서 그는 생명 현상이 연소와 비슷하다고 언급하였으며 동물이 먹은 먹이(그 대부분이 탄소와 수소로 형성)와 호흡으로 얻은 산소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와 물이 된다고 서술하였다. 라부아지에는
현재 생물 화학이라 불리는 분야를 개척한 것이다.
또 1787년에는 다른 세 사람의 화학자와 협력하여 화학물질의 명명법이라는 책을 출판하고 모든 물질을 그 구성원소에 따라 부른다는 규칙을 세웠다. 이것은 명확하고도 논리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후 명명법은 급속히 퍼졌다. 식염을 염화나트륨으로 부르는 식의 명명법은 바로 라부아지에의 규칙에 따른 것이다.
더욱이 1789년에는 화학요론이라는 교과서를 출판하여 그때까지의 그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근대 화학의 최초의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속에서 그는 당시 알려져 있던 모든 원소를 표로 작성하였다. 이 표는 대체로 정확하였다. 그러나 원소의 산화물이 표에 들어 있거나 빛과 열도 원소로 보는 등 부분적으로는 불완전한 곳도 있었다. 이 가운데 열에 대한 원소는 칼로릭 즉 열소라 불렸고, 이는 무게가 없다고 되어 있었다. 플로지스톤설을 타파할 정도로 천재인 라부아지에가 칼로릭을 원소로본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운명의 장난이 천재를 죽이다>
화학요론을 출판하고 또 그의 일이 절정에 달한 마침 그해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1792년 초에 라부아지에는 실험실에서 쫓겨나고 마침내 체포되었다. 세금 징수원이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정치에 관여한 바가 없고 징세로 얻은 수입은 모두 화학 실험에 썼다."나는 그저 과학자일 뿐이다"라고 주장한 그에게 그를 체포하기 위해 온 지휘관은 태연히도 공화국에는 과학자가 필요없다고 대답했다 한다.
1794년 5월 8일 겨우 수시간의 심판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그날 오후 그는 다른 많은 귀족들과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그의 처형 후 약 10주일 만에 이번에는 그를 단두대에 올라서게한 과격 분자들이 처형되고 마침내 공포 정치는 끝났다. 겨우 10주일 차이로 세계는 당시 최대의 보배를 잃은 것이다.
유명한 프랑스의 수학자 라그랑주(J.Lagarange 1736 1813)는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머리를 치는 일은 순간의 시간밖에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와 같은 두뇌를 낳게 하려면 1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한 프랑스인들은 그가 죽은 지 2년후에 그의 흉상을 세우고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렸다.
월간 과학 Newton 1995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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