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사 대성사 / 전통사찰이 아님
- 경북 포항시 북구 용흥동
대성사는 근래 세워진 절인 것 같다. 이곳에 문화유산 2점이 있어 들렀다.
대성사 소장 금동여래좌상 /경북 유형문화유산
건봉사(乾鳳寺) 낙서암(樂西庵)에 있었던 불상임이 1912년에 촬영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유리원판으로 알려졌다.
불상 내부에서 사명대사 유장(惟政, 1544∼1610)의 원장(願狀)과 후령통 등의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여래상은 재료분석을 통해 구리에 아연을 합금한 황동제임이 밝혀졌으며 제작시기는 대략 15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군에 있다. 이 불상은 건봉사에 있었으나 지금은 포항 대성사에 있다. 그 사유는 알 수 없다.
어느 전각에 봉안되어 있는지 몰라 직접 보지는 못하였다.
이런 비석에 왜 여기에 세워졌는지 알 것 같다.
대성사 석조관음보살좌상 / 경북 문화유산자료
대좌와 보병, 보관까지 한 개의 돌로 조성한 관세음보살좌상이다.
상호는 원만상(圓滿像)이며 백호를 수정으로 감장(嵌裝)하였다. 보관은 간결하고 소박하나 법의(法衣)의 유려함이 돋보인다.
두 손은 큼직한 보병을 받들고 있어 관세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는데 조선후기 불상으로는 보기드문 예이다.
크기가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하고 조각양식이 다소 미흡한 점이 있으나 발원문을 통해 확실한 조성연대(1736년)를 알 수 있다.
(인터넷 위키백과 인용)
봉비산 죽림사 / 전통사찰
- 경북 포항시 북구 용흥동
도심 속의 전통 사찰인 죽림사는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1929년 기록된 죽림사 상량문에 따르면, 신라 때 원앙부인이 수행한 도량으로 그 아들 안락국이 크게 깨달은 곳이라 한다.
1927년에 주지 김노성(법명/용연)과 그때 면장 권전근이 뜻을 세우고 신도 여섯 명과 함께 절을 세웠다.
(인터넷 대한민국구석구석 인용)
대성사에서 가깝다. 11시 30분쯤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무료로 국수를 준다. 나이 드신 많은 분이 공양간으로 몰린다.
신라 때 창건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고 일제강점기 때 처음 세웠을 것으로 느껴진다. 아님 포교당으로.
도음산 천곡사(禱陰山泉谷寺) / 전통사찰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천리
영곡사(靈谷寺)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피부병으로 고생하여 좋다는 약은 모두 써보았으나 효력이 없었다.
어느 신하의 권유로 동해안 천곡령(泉谷嶺) 아래 약수인 석천(石泉)으로 며칠간 목욕한 뒤 완쾌되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감복하여 서라벌로 돌아와서 자장율사에게 절을 짓도록 하고 이름을 천곡사로 명명하였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고, 조선 후기에 박장원(朴長遠 1612년~1671년)이 흥해에 유배 중이던
1653년~1654년 경에 천덕사에 머물며 사승(寺僧)에게 지어준 시가 그의 문집인 『구당집(久堂集)』에 있다.
6·25 이전까지는 13동의 건물이 있었던 큰 사찰이었다.선덕여왕이 목욕한 우물이라 전하는 석천(石泉)이 있다.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조선 초기 세조가 피부병을 알았다. 그 설화가 떠올랐다. 석천은 탄산이 거의 없는 광천수다. 물맛은 그런대로 괜찮다.
종무소 건물 뒤에 만든 부도밭엔 조선시대 승탑이 여러 기가 있다. 경내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 부재가 보인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법맥을 이었을 것인란 생각이 든다.
자연석 같은데 돌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뒤에 것은 우주선 같다. 외계인이 타고 다니는.
종무소
삼성각
관음전
천곡사 관음전 석조보살좌상 / 경북 문화유산자료
몸체나 옷 표현 등에서 18세기 초반의 시기적 특징을 갖고 있는 불석재(佛石材)의 보살상이다.
머리 위에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두건을 쓴 일반적인 지장보살상과 다른 점은 머리카락이 있다는 점이다.
도분(塗粉) 대신 도금(鍍金)이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복장 발원문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제작시기와 조각승을 알 수 없지만, 18세기 경상도에서 제작한
독특한 도상의 보살상으로서 경북지역의 조선 후기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인터넷 위키백과에서)
절엔 문화유산 안내문이 없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본 것이 문화유산인 줄 알았다.
석조 부재들
조선 중기에서 말까지, 이 승탑들은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冷水里 新羅碑) / 국보
-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신광면 행정복지센터 야외
1989년 냉수리 밭에서 농부가 발견하였고, 1991년 국보로 지정하였다.
건립 연대는 계미년(癸未年)이라는 간지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는 인명으로 볼 때 443년(눌지마립간 27)
또는 503년(지증왕 4)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의 재산 상속 문제를 기록한 것으로, 공문서(公文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1989년 발견한 비이니까 내가 교과서에서 배웠을 리가 없다. 몰랐고, 이번에 알게 되었다. 울진 신라비와 같은 것일까?
앞면
뒷면
옆면
비학산 전경이다. 면사무소에서 법광사 가는 길에 보인다.
비학산 법광사(飛鶴山法廣寺) / 전통사찰
-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
법광사지(法光寺址) 주위에 있는 절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6년 지어졌다고도 하지만 현재 사찰은 1952년 지었다.
절 입구 전에 옛 절터가 있다. 삼층석탑은 절 뒤편에 있다.
산령각
진영각
보봉당대선사 사리탑과 비, 이 분이 1952년 이곳에 절을 세운 것 같다.
법광사 원통전이나 산령각, 진영각등 안을 보지 않았다. 원통전 밖에 '사진촬영금지' 경고문이 있다.
전각 안에 봐야할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들어서기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절 주위에 석조 부재가 듬성듬성 있다.
나이는 나보다 위인 것 같다. 두 분 가운데 한 분과 10여 분 이상 이야기를 나눴다.
냉수리 신라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분은 말씀은 이 비는 사유재산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포항지역에 옛날에 고구려였다가 신라로 변경, 그 지역에 나라가 바뀌기 전부터 산 사람이 자기 재산을 공표한 것이라고.
이 비 내용을 보면 고구려 때 살았던 사람과 신라 점령 이후 들어온 사람 간에 토지 분쟁이 있었을 것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학계에선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다.
포항 법광사지(法光寺址) /사적
신라 진평왕(재위 579년~632년) 때 왕명으로 원효대사가 지었다.
828년(흥덕왕 3)에 향조사(香照師)와 원적니(元寂尼)가 석가불사리탑을 세웠다.
846년 이 탑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탑 안에 사리 22과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1698년과 1750년에 탑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매월당집, 영남읍지, 산중일기, 범우고 등에 기록이 있고 조선 후기 지도에 법광사가 나온다.
1750년에 만든 석가불사리탑중수비(釋迦佛舍利塔重修碑)는
5칸의 대웅전과 2층의 금당, 향화전 등 525칸의 대규모 사찰이라고 적혔다.
7세기쯤 처음 지어졌고 19세기까지 법등이 이어졌으나 폐사 기록은 없다.
(국가유산청, 한국의 사지 현장조사 보고서에서 내용을 가지고 옴)
법광사지 석가불사리탑중수비(釋迦佛舍利塔重修碑)
법광사지 삼층석탑 / 경북 유형문화유산
전체 높이 3.5m
탑지석 2점과 사리호 2점을 잃어버렸지(도난)만 1968년 찾았다. 이 문화유산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법광사지 탑지석 (국가유산청 /국립경주박물관)
법광사지 납석제와 청동제 사리호(국가유산청 /국립경주박물관)
귀부
좌대
당간지주
사당에 대한 안내문이 없다.
규모에 비하여 남은 온전히 남은 유물이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쉽다.
발굴된 터를 보면 대단한 규모였던 것을 알 수 있지만 1750년 세운 중수비에 적힌 525칸 규모는 의구심이 든다.
2025년 1월 24일(금)
포항 용흥동/대성사, 죽림사.....흥해읍/천곡사....신광면/냉수리 신라비, 법광사, 법광사지.....
흥해읍/임허사, 흥해향교, 칠포리 암각화군....영덕군 영덕읍
2025년 1월 25일(토)
영덕읍/영덕향교, 임진각 가든(친구 아들 결혼 피로연 참석).....포항 죽장면/무학사, 입암서원.......
포항 기계면/기계서숲, 분옥정, 봉강재.....경주 흥덕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