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여자프로농구가 20주년을 맞아 선정한 ‘GREAT 12’였다. 정규경기 300경기 이상 출전에 2,000득점 이상 선수가 대상이 됐다. 수상 이력과 국가대표 경력도 조건이 됐다. 38명의 후보자 중 12명은 전·현직 감독과 기자, 해설위원 투표로 결정됐다.
빠져서 아쉬운 이름도 있지만 정은순을 시작으로 정선민, 전주원 등을 거쳐 24일 박혜진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선수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은 선수들이다. 지도자 및 선·후배들이 그들 이름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점들을 돌아봤다.
은퇴할 때까지도 전주원은 플로어에서 가장 믿음직한 가드 중 한 명이었다. (사진=점프볼)
베테랑의 자기관리
2011년, 우리나이로 39살에 은퇴할 때까지 전주원은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엄격한 자기 관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KB스타즈 안덕수 감독은 포인트가드 전주원을 이렇게 기억한다. “내가 일본(상송)에 있을 때였다. WKBL 팀들이 일본에 오면 늘 우리 팀과 연습경기를 했는데 신한은행도 왔었다. 그때 전주원 코치를 눈여겨봤다. 최고참이었는데도 어린 선수들 못지않게 경기 준비를 열심히 했고, 오히려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아, 저래서 최고의 선수라고들 하는 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신한은행에서 ‘선수’ 전주원과 다섯 번, ‘코치’ 전주원과 한 번 우승했던 임달식 전 감독의 평가도 다르지 않았다. “함께 해서 너무 편했던 선수”라는 것이다. “기술도 훌륭했지만, 전주원의 인성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나이를 먹었어도 열정이 대단했다. ‘행동으로 이끈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귀감이 되어줄 수 있는 선수였다. 그 정도 되면 ‘오냐, 오냐’하며 타협해야 하는 선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전주원은 달랐다. 감독 입장에서 너무 고마운 선수였다.”
커리어 자체를 비교하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코치’ 전주원과 5년째 함께 정상을 맛본 임영희는 그런 면에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선수다.
‘할머니’라 놀림을 받지만, 여전히 임영희의 점프슛은 알면서도 내주는 그녀만의 시그니쳐 무브다. 우리은행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위성우 감독이 틈날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하는 선수다. “지금도 팀 훈련을 후배들과 다 해낸다. 쓴소리도 받아냈다. 그러니 후배들도 안 할 수 없다.”
베테랑으로서의 솔선수범과 자기 관리는 후배들도 보고배울 수 있을 것이다. 김영옥은 “프로에 좋은 선배들이 남아있는 것도, 보고 배우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힘주어 말했다.
승부욕
“명색이 핵심멤버인데 3점슛 성공률이 30%가 안 된다. 동료들한테 미안해서라도 연습해야 하는 성공률이다. 그런데도 연습에 매진하지 않는다. 남자농구 박찬희는 자신의 슛 성공률이 부족한 걸 알고 그래도 연습에 매달리고 스트레스도 받는데, 그런 직업의식이 부족한 선수들이 더러 있다. 전체적으로도 자발적으로 하는 훈련이 부족하다.” 한 여자농구 관계자는 선수들의 승부욕과 경쟁의식이 줄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그레잇12’에 먼저 선발된 10명의 은퇴선수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승부욕에 있었다.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던 선수들이다.
정은순은 자타가 인정하는 '승부욕 갑'이다. 지는 것을 누구보다 용납하지 못했던 선수로 기억된다. (사진=점프볼)
특히 정은순은 당장 눈앞의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했던 선수였다. 해설위원이 된 지금도 정은순은 “경기에서 지고도 웃으면서 집에 가는 선수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
‘블록슛 여왕’으로 불렸으며, 아쉽게도 ‘그레잇12’에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이해는 안 가지만) 이종애는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 승부욕이 있었던 선수”라고 정은순을 기억하기도 했다. 농구선수 정은순에 대해서는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유영주도 잘 기억하고 있다. 오래 전 점프볼에 연재됐던 「올드스쿨」 이라는 코너의 인터뷰에서 유영주는 정은순을 이렇게 돌아봤다. “걔는 진짜 악바리였다. 선생님이 지적한 것이 안 되면 엄마한테 도시락 싸오라고 해서 될 때까지 계속 할 정도였다. 그런 노력을 했기에 큰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것을 보고 배우고 따라하면서 늘었다.”
승부욕에서는 변연하(전 KB스타즈)도 빼놓을 수 없었다. 승부처에서 물러섬이 없었다. 그에게는 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지기 싫다는 강한 경쟁의식이 있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뒤 위성우 감독이 “믿음에 보답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한 선수도 변연하였다. 사기꾼이 뛴 KEB하나은행과의 플레이오프 마지막 경기(2016년 3월 13일)에서까지 변연하는 승부욕을 불태웠다. 지친 상황에서도 3점슛을 꽂으며 의지를 보였던 그날 경기는 ‘농구 좋아하길 참 잘 했다’고 느끼게 했다(안타깝게도 변연하가 농구선수로서 치른 마지막 경기였던 그날의 경기는 더 이상 기록 조회가 되지 않는다).
궂은일에 대한 의지
공격이 안 될 때는 기본적인 궂은일부터 하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코칭스태프가 지적하기 전에 궂은일과 수비에서 최선을 다해 분위기를 끌어오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전투적인 몸싸움과 ‘이 공은 내가 잡겠어’라는 근성을 보이며 동료들 의욕을 고취시키는, 그런 선수 말이다. 누구나 다 해야 하지만, 정작 한 시즌을 치르고 보면 아무나 할 수 없었던 일종의 ‘특허’가 되어 있다. 신정자는 그런 특허가 있었던 선수였다. 사실 처음부터 리바운더가 되겠다고 꿈꾸는 이는 없다. 말로는 “1분, 1초를 뛰더라도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겠다”고 하지만, 실제 경기와 연습에서 이를 위해 노력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많았다면 지금 농구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기회를 잡고자 애썼던 것이 지금의 신정자를 만들었다. 초창기 주로 받아먹는 점수를 많이 올렸던 신정자는 구력을 갖추며 피딩까지 훌륭한 빅맨이 되어있었다. 3경기 연속 트리플더블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올스타가 되고 국가대표가 되어도 본분은 충실했다. 신정자를 지도했던 이상윤 감독은 “박스아웃과 리바운드는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습관이 안 되어있는 것이다. 신정자는 달랐다. 의지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신정자 역시 “(리바운드를 잘 잡게 된 것에 대한)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못 잡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몸싸움을 계속 하고 날아가는 슛을 유심히 지켜보고 더 빨리 잡으려고 움직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근성, 책임감 그리고 애정
커리어에 위협을 줄 큰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미선은 코트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레전드다운 기량을 보이며 삼성생명의 세대교체를 도왔다. (사진=점프볼)
커리어를 보내면서 이미선은 두 번의 큰 부상이 있었다. 그것도 큰 살림밑천이라 할 수 있는 무릎을 두 번이나 다쳤다. 2005년 7월, 오른쪽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됐고 1년 뒤에는 왼쪽 십자인대를 다쳤다. 두 번째 부상은 더 가슴 아팠다. 2006년 여름리그 개막을 겨우 3일(5월 21일) 앞두고 남자고등학교와의 연습 경기 중에 반대쪽 무릎을 다쳤기 때문이다. 복귀 준비 중 반대쪽 무릎 부상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소식을 받아 적는 기자도 놀랐는데 당사자의 좌절감은 오죽했을까. 나이 서른을 향해가던 이미선을 두고 주위에서는 비관적인 전망도 많이 내놓았다. 그랬던 이미선이 다시 코트에 선 건 2007년 3월 19일이었다. 악몽 같던 재활이 계속된 20개월을 잘 견뎌냈다.
이미선은 그 부상이 없었다면 오히려 더 농구를 일찍 끝냈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아파서 쉬는 동안 다시 갖게 된 농구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그녀를 롱런하게 만들었다. 2011-2012시즌 중 한 번 더 부상(발등 인대)을 입긴 했지만, 2012-2013시즌 이후 마지막 3시즌 동안에는 단 1경기만을 쉬는 강한 내구성을 보였다. 물론 안 아픈 곳이 없을 리 없었다. “훈련을 하다가 다치는 것이 걱정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박정은이 은퇴하고 남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마지막까지 소화했다. 2013-2014시즌 막판에는 경기 중 충돌이 일어나 치아 2개가 함몰되는 부상도 있었지만 이미선은 쉬지 않고 경기를 소화했다.
덕분에 은퇴 전, 이미선은 WKBL 역대 최초로 단일팀 통산 500경기에 나서는 대기록(전체로는 역대 4번째)을 만들었다. “농구를 오래 한 덕분에 기록을 하나 세운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한 팀에서 500경기를 뛴 것은 처음이라 나름 의미가 있다”라고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한편 유영주의 근성도 유명했다. 시원하고 파워풀한 농구가 장점이었던 유영주는 프로보다는 농구대잔치 시절에 더 빛났던 선수였다. SKC 해체 후 삼성생명에 합류, 정은순과 우승도 일궜지만 오히려 팀의 주역으로서 더 빛났던 시기는 SKC 시절이었다. 농구대잔치 사상 한 경기 최다득점(55점)을 기록했으며, 포워드 포지션에서는 최초로 통산 1,000리바운드를 넘긴 선수이기도 했다. 전투적인 플레이스타일만큼이나 부상도 뒤따랐다. 그러나 정해일 전 감독을 비롯해 유영주를 지도했던 감독들은 끈기와 집념이 대단했던 선수라고 치켜세웠다. 긴 부상을 입었을 때도 코트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며 근성과 열정을 보였다. 선수로서, 그리고 팀 동료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자신감
적어도 코트 위 박정은과 변연하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34경기(2009년 10월~2010년 2월) 연속 3점슛을 성공시켜 이 부문 역대 1위에 올라있는 박정은은 “항상 내 슛이 들어갈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언젠가부터 명품슈터라는 수식어가 같이 하면서 슈터 이미지로 남았지만 박정은은 올-어라운드한 플레이가 더 강점이었다).
변연하도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현역시절 인터뷰에서 3점슛 비결에 묻자 “처음에 안 들어간다고 해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물론 자신감의 원천은 피나는 훈련이었다. 그들에게 ‘실전’은 노력과의 정면승부였다. 덕분에 박정은과 변연하(1,014개)는 차례로 3점슛 1,000개씩을 돌파하며 커리어를 마쳤다. WKBL 역사상 3점슛 1,000개를 돌파한 선수는 둘 뿐이며, 당분간도 그럴 것이다.
‘자신감’은 정선민도 빼놓을 수 없다. 워낙 승부욕이 강했고 센스와 기술이 좋은 선수였지만, 감독들은 물러서지 않는 자신감 역시 정선민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라 말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세계’라는 팀을 결승에 올려놓고, 더 나아가 우승까지 시키면서 정선민의 시대가 열렸다.
정선민 스스로도 “그때 팀 전체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에너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라고 돌아봤다. 그렇게 해서 얻은 자신감은 ‘최고’였던 정선민의 위상을 더 높여주었다. 그렇지만 박정은, 변연하와 마찬가지로 정선민의 자신감도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선민은 그 과정을 ‘몸부림’이라 표현했다. “너무나도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다”며 말이다. 상대가 외국선수이든, 장신이든 어떻게든 승리할 방법을 연구하고, 찾아냈다. 역대 최다득점자이자 최다 트리플더블러로 은퇴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변연하는 은퇴 시즌까지도 해결사 그 자체였다. (사진=WKBL 제공)
핸디캡 극복
‘총알낭자’ 김영옥(168m)과 ‘탱크가드’ 김지윤(169cm)은 그 때 기준으로 봐도 큰 편에 속하는 가드는 아니었다. 그러나 김지윤은 은퇴할 때 7,020득점(역대 3위)을 기록했고, 김영옥은 6,154득점(역대 5위)을 남겼다. 김지윤은 한 경기 30+득점 11회, 김영옥은 30+득점 8회로 한 번 ‘감’이 왔을 때의 폭발력도 무시무시했다. 이쯤 되면 여자농구선수들은 ‘단신 가드’ 사례를 찾을 빼 굳이 머나먼 땅의 아이재아 토마스를 찾을 것이 아니라 김영옥과 김지윤부터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두 선수의 플레이스타일은 차이가 있었다. 김지윤은 “(김)영옥 언니와는 스타일이 서로 달랐다. 언니는 3점슛이 좋았다. 나는 돌파와 점프슛을 즐겼다”라고 돌아봤다.
김영옥과 김지윤은 각기 다른 스타일로 코트를 휘저은 단신 스타들이었다. (사진=점프볼)
단신 핸디캡을 이겨내고 ‘그레잇 12’에 오를 수 있었던 비밀공식은 따로 없었다. 오로지 그의 기사마다 붙은 ‘악바리’라는 표현이 걸어온 길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김영옥은 “은퇴할 때까지 비시즌 운동을 소홀히 해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영옥은 고참급 선수들에게는 자율권이 주어졌던 야간훈련까지도 솔선수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연봉이 오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집중하고 열정을 발휘했다.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 탓이었다.
김지윤 역시 “내가 타고났던 스피드는 있었던 것 같다(웃음)”며 가볍게 넘겼지만, 함께 시대를 뛰었던 농구인들은 “힘에서 절대 밀리지 않은 것이 비결”이라고 포인트를 잡아줬다. 김지윤 역시 “스피드와 힘을 앞세운 가드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웨이트 트레이닝에 주력했다. 하체 훈련은 은퇴하는 시즌까지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손가락 인대, 족저근막염, 무릎 반월판 등 부상에도 불구 물러섬이 없었다.
가장 많은 퇴장을 당했던, 파울도 많이 기록했던 이종애였지만 수비에서는 상대를 가장 위협했던 선수도 이종애였다. (사진=점프볼)
WKBL 역사상 5반칙 퇴장을 가장 많이 당한 선수는 양지희(62회)와 이종애(57회)였다. 은퇴할 무렵, 양지희는 우리은행의 기둥이자, 국가대표팀에서 후배 박지수를 이끄는 든든한 선배가 되어 있었다. 이종애는 블록슛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냈다. 파울을 두려워했다면 결코 만들어지지 못했던 기록일 것이다.
3점슛을 가장 많이 실패한 선수는 박정은과 변연하다. 무려 1,997개와 1,980개를 놓쳤다. 그렇지만 승부처에서 동료들이, 감독들이 가장 많이 찾고, 고마워했던 선수도 바로 둘이었다.
WKBL 역사상 실책이 가장 많았던 세 선수는 변연하, 김지윤, 정선민이다. WKBL 역사상 1,000개 실책을 기록했던 선수는 이 세 명뿐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이 이런 기록을 세웠다는 걸 알지 못한다. 실수에 위축되고 물러서고 눈치를 볼 선수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영광 뒤에는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 WKBL 역사상 득점을 가장 많이 올렸고, 자유투를 가장 많이 넣었으며 우승도 9번이나 했던 정선민은 2점슛을 가장 많이 실패(3,394개)한 선수였지만, 역사는 정선민을 승리자이자 MVP로 기억한다.
실패와 실수, 부상 등 많은 고난이 있었음에도 불구,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났던 승부 근성, 이를 극복하겠다는 강한 의지, 그리고 기꺼이 자신이 떠맡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을 지 상상해보라.
전설이 남긴 유산은 바로 우승, 득점, 금메달과 같은 숫자가 아닌 정신이었다. 그 정신이 더 잘 이어져 더 나은 프로리그가 될 수 있길, 다음 20년간 등장할 세대들도 팬들에게 존중받고 존경받는 리그가 될 수 있길 기대한다.
글=손대범(점프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