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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 현장. 당시 전국적 시위를 주도했던 전대협은 아직도 1980년대식 친북(親北)·반미(反美의 좌파적 사고에 절어,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주도하고 있다. |
‘한국 정치의 중심’이 된 전대협
전대협의 신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1987년 6월 투쟁을 선두에서 이끌었고, 민주화의 진전을 이뤄낸 주역으로 평가되었다. 연일 계속되는 학내시위와 가두시위는 수많은 학생운동의 투쟁영웅과 지도부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6월 투쟁 과정에서 노련한 대중선동가이자 대중투쟁의 지도부로 성장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는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민련) 지도부에 그들의 이름을 내걸고 있다. 새민련 지도부뿐만이 아니다. 국회의원, 당료, 실무자, 보좌관 등 새민련 곳곳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학생운동 지도부가 대한민국 야당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한국 정치의 중심으로 진출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제 변방의 소수가 아니다. 언론계, 출판계, 문화계, 법조계, 여성계, 시민운동 단체, 노동운동계, 농민운동계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지지 그룹을 가진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했다.
전대협 출신의 학생운동 그룹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라고 평가해도 과장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이 과연 어떤 사상과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행로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문제다.
전대협 출신들의 정치적 지향점과 특징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들이 활약한 소위 진보정권 시대서부터 한미동맹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우리 국민들 사이에 남북 분단의 원인을 미국이 제공했다는 터무니없는 날조된 망발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오늘날 남북한 간의 갈등의 배경이 미국의 강경정책 탓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의 수가 과거에 비해 급증했다. 만연된 반미(反美)감정은 우리 국력이 성장한 만큼 우리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인식하기에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반면에 북한 정권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론이 주도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북한 핵에 대해 두둔하기까지 했다. 노무현 정부 이후 현재까지 전대협 출신이 북한 핵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발언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전대협 세대의 특징은 북한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관대하다. 국제사회가 그 심각성을 공감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문제에 어느 누구하나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촉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북한 인권문제는 북한 내부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반면에 미국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적대적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오욕과 굴절로 얼룩진 수치의 역사라는 좌파들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우리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이들의 이런 관점과 태도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들의 현실 인식은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좌파적 사회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고, 30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 근본이 바뀌지 않은 채 곳곳에서 집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이들에 대해 권위주의적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며, 사회가 선진화를 위해 치르는 대가 정도로 생각하여 관대하게 바라봤다. 좌파적 사회운동에 대한 주류사회와 지식인 사회의 안이하고 무사 안일한 대응으로 인해 이들은 우리 국민들의 인식의 혼란을 효과적으로 이뤄 냈다.
다수 국민들은 좌파적 사회운동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잘 깨닫고 있지 못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핵심에는 아직도 1980년대식 좌파적 사고에 절어 있는, 이제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된 세력의 편향된 인식에 그 원인이 있다. 이글은 그 편향된 인식의 현장으로 시계를 되돌려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대처 방안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전대협의 탄생과정
1) 전사(前史)
1980년대 학생운동은 그 이전의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과는 내용면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1970년대 학생운동은 서울대 중심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인권과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소박한 차원의 학생운동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학생운동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적극 받아들이고,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주체사상과 혁명론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 이전에도 소수의 서클 차원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학습했으나, 1980년대처럼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주도적 그룹인 전대협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진행되어온 학생운동 내부의 논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1980년대 중반에서부터 이뤄진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 계열의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① 깃발-반(反)깃발 논쟁
전두환 정부는 1983년 말, 이전의 시위로 구속되었던 학생들을 석방하고 반(反)정부 인사들에 대한 사면 복권을 단행했다. 1984년 2월에는 정치활동 피규제자에 대한 2차 해금(解禁)과 학원에 상주하던 경찰 병력을 철수하고, 학생회의 부활을 허용하는 학원자율화 조치를 단행했다.
1984년 상반기부터 1985년 상반기까지 수도권의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는 정부 당국의 조치에 대한 학생운동의 방향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지속되었다. 이것을 깃발-반(反)깃발 논쟁 혹은 ‘MT-MC논쟁’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1983년 12월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석방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온 복학생들을 중심으로 ‘깃발’이라는 팜플렛을 통해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그룹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연유한다. 논쟁은 1985년 상반기 정치투쟁조직 건설 문제를 놓고 이론적 대립을 계속하면서 MT-MC논쟁으로 이어갔다. MT란 민주화투쟁위원회의 머리글자를 지칭하며, MC란 Main Current, 즉 주도세력이란 뜻이다.
학원자율화 조치 초기인 1984년 초, 당시 학생운동 주도그룹은 곧바로 반정부 투쟁에 나설 것이 아니라 전두환 정부의 허용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먼저 학내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학원자율화 투쟁을 이끌고, 투쟁 성과를 바탕으로 단계적으로 전두환 정부에 대한 정치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이전의 단계적 투쟁론인 이른바 ‘무림’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반면 깃발 혹은 MT그룹은 학생운동의 선도적 투쟁과 이를 통해 광주 투쟁에서 보이듯이 전(全)민중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학림’의 입장을 계승하여 사상과 이념을 보다 분명히 하는 투쟁위원회가 학생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때 NDR(Na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혁명론) 이념을 수용한 이 그룹은 지하의 ‘중앙투쟁위원회’ 산하에 반(半)공개 투쟁조직인 삼민투(민중민주화와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위원회) 건설을 시도했다.
이에 대하여 MC그룹은 절충안을 내놓아 1985년 5월 7일 서울대에서 양 진영 연합으로 삼민투가 결성되었다. 곧 이어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서강대 등에서도 결성이 이뤄졌다. 이후 삼민투는 5월 23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서강대 등 5개대 73명의 학생이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을 감행했다.
1985년 여름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MT그룹 지도부가 대거 검거된 후 MT그룹의 잔여세력과 MC그룹이 통합을 추진하여 소위 ‘깃발-반깃발’논쟁은 일단락되었다.
②C-N-P 논쟁
1984년 겨울에서 1985년 봄에 걸친 기간 동안 재야 운동권과 학생운동권 내에서는 정부의 자율화 조치에 대한 정세인식과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에 입각한 한국 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 모순구조와 혁명의 대상, 혁명 주요 동력의 설정과 역량편성 등을 놓고 소위 C-N-P 논쟁을 벌이게 된다.
C-N-P란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 시민민주혁명론), NDR (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혁명론),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혁명론)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용어다.
C-N-P 논쟁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공개기구 운동가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처음부터 완전한 이념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으며, 논의가 확산되면서 CDR, NDR, PDR 등의 용어로 집약되어 갔다.
이상 세 가지 입장을 좀 더 도식화하면서 CDR, NDR, PDR 개념으로 공식적인 논의가 진행된 것은 1984년 4월경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운동론 세미나’ 과정이었다. 이 세미나에서 당시 민청련 정책실장이던 이을호는 주제 발표를 통해 세 가지 운동론을 소개했다.
‘CDR론’은 당시 종속이론을 근거로 한국 사회를 주변부 자본주의로 보았다. 한국 자본주의는 종속성과 파행성이 관철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모순을 느끼는 계층은 노동자 등 기층민중뿐만이 아니라, 영세 자영업자, 민족자본가 등 다양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세와 군사독재 권력과 다양한 계층 간의 대결이 현 단계 운동의 성격이다. 민주적 민간정부를 수립하고, 그 과정에서 기층민중운동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PDR론’은 한국의 사회구성체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초기의 파행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산업자본의 확립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적 발전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한국혁명운동의 주력은 노동자, 농민 등 기본대중과 혁명적 지식인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은 독점자본을 물적 토대로 하는 제국주의 및 군부 파쇼세력과 보수 야당을 한편으로 하고, 기층민중과 혁명적 지식인을 한편으로 하는 양자 간에 형성된 모순으로 보고 있다. 이 입장에서는 당면과제를 독점자본 및 그 유지세력인 군사독재 권력의 타도에 두고, 그 후 기층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중권력을 수립해야 한다고 봤다.
‘NDR론’은 한국사회구성체를 신식민주의적 독점자본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입장에서는 한국의 자본주의는 스스로 발전을 하기도 전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깊숙이 편입됨으로써 신식민주의적 종속성이 심화되었으며, 그 상태에서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발전했고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이뤄져 독점자본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주요 모순은 민족적 모순과 국가 파쇼적 모순이 중첩되었다고 본다. 여기서 기층운동이 강화되는 조건에서 중간계층과 연대하여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범 세력 연합권력을 창출한 다음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현 단계 한국변혁이론으로 NDR론이 주류를 이루면서 CDR론은 우익 기회주의 이론으로, PDR론은 좌익 급진주의 이론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우세했다.
서울대 학생운동의 배후 인물로 민주화추진위원회를 주도했던 문용식은 자신의 최후진술에서 NDR론이 자신들의 지도 이념이며, 한국혁명운동의 민족적 성격을 표현한 개념으로 운동의 주체적인 면에서 PDR이라고 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NDR론에서 민중은 기층민중 뿐만 아니라 청년 학생, 진보적 지식인, 중간층 일부까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층민중만을 지칭하는 PDR의 민중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 진행된 학생운동의 논의과정은 한국의 학생운동이 사회주의 사상과 이론의 수입과 모색기를 거쳐 본격적으로 한국사회혁명운동 이론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좌파 학계에서 진행되던 사회구성체 논쟁과 맞물리면서 초기의 초보적 수준에서 벗어나 한층 발전된 형태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