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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4:1-8 하나님이여 : 칼빈
먼저 이 시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황폐한 교회 형편을 성령의 조명으로 인식합니다.
다음에 그들은 성령의 감화로 이스라엘의 이름이 거의 멸절되어 가는 것을 슬퍼합니다
그 다음에 자기들이 당한 재난을 자신들의 죄의 탓으로 돌리며 겸손히 간구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그 간구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특별한 백성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택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구원하심에서 지난날의 행하신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며 자비로운가를 회상합니다.
그들은 이 위로를 통해 스스로 용기를 얻어 하나님께서 마침내 자기들의 도움이 도시고 그토록 비참하고 어려운 처지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계속해서 간청합니다.
1. 본 시편의 표제는 “아삽의 마스길, 곧 아삽의 교훈” 입니다.
משכיל(마스길) 이라는 표제는 이 시편 주제와 잘 어울립니다.
이 말이 45편에서처럼 기쁨을 노래하는 시의 주제에 적용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말은 사람들이 자신을 겸손히 복종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도록 자신의 죄악들을 밝혀내는 하나님의 심판을 주제로 다루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의 내용을 보면 다윗이 쓴 것이 아닌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윗 때에는 교회가 황폐하고 곤경에 빠진 처지에서 신음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 저작 주장자들은 예언의 영으로 일을 말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죽은 후 다른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시편이 많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타당성이 있다고 볼 때 이 시는 그들 중 하나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재난이 어떤 것인지는 명확히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에는 두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과 성전이 패망하고 백성들은 느브갓네살 왕에게 바벨론 포로로 붙들려 갔었던 유대 역사의 기간을 가리킨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전이 더럽혀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통치 시대를 말한다고 봅니다.
이 견해들은 모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실한 자들이 지금은 표적이나 이적들이 없음을 불평한 사실을 볼 때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포로로 붙잡혀 갔을 때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성소가 불타 잿더미가 되고 조각품이 부서져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한 말은 안티오쿠스의 잔인하고 포악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기 어렵습니다.
진실로 그는 성전을 수치스럽도록 더럽혔으며 그 안에 이방 우상들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건물은 상처 입지 않고 남아 있었고 나무나 돌들은 불에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소들’은 예루살렘 뿐 아니라 다른 유대 성읍들에서 자기들의 거룩한 모임을 유대인들이 계속했던 ‘회당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 역시 타당성 있는 것 같습니다.
안티오쿠스에 의해 성전이 무참히 모독당하는 것을 바라보는 신실한 자들은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볼 때 성전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타버렸을 당시를 돌이켜 생각해 보고 이 두 재난을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추측들은 이 시편이 안티오쿠스 시대에 지어졌음을 더욱 뚜렷이 해줍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교회에 예언자들도 없었는데 이 시를 바벨론 포로 시대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모순점은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이 살아 있었지만 다니엘이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얼마 전에 가련한 포로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도록 또다시 용기를 북돋아 줄 때가지 그들이 마치 자기들의 소명 과정을 다 마치기라도 한 것처럼 얼마동안 잠잠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이사야는 40장 1절에서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 하나님이 말씀하시리라 - 칼빈) 라고 말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여기 쓰인 동사는 미래 시제로 당시 선지자들은 잠시 평화를 누렸음을 보여줍니다.
2. 본문 1절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입니다.
만일 이 하소연이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있을 시대에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면 예레미야가 비록 70년의 포로 생활 이후에 구원의 때가 오리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매우 쓰라린 환난을 그토록 오랫동안 견디며 매일 신음하는 날들이 오래 계속되어 마치 영원한 것처럼 보여졌으리라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안티오쿠스의 잔악함 때문에 특히 원수들의 잔인함이 매일매일 더 가중하여 해방될 소망이 없어지는 것과 점점 자기들의 처지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으로 불평할 이유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이전에도 그들은 이웃들이 하나씩 차례로 자기들에게는 수많은 비참한 전쟁을 하므로 말미암아 크게 저하된 바가 있기에 그들은 이제 거의 완전한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습니다.
신실한 자들이 이방 민족들에게 핍박당할 때 자기들이 당한 모든 재난들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 임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자기들의 눈을 든 사실은 우리가 주의해 살펴봐야 합니다.
그들은 확신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에게 분노를 발하시지 않으셨고 이방 민족들은 자기들을 해칠 권한을 허락받은 바가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단지 혈과 육으로만 핍박 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공정하신 심판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기들의 생각을 모든 재난의 진정한 원인이 되는 것에 집중시킵니다.
이전에 그들이 즐겼던 번성하고 복된 생활 여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쫓고 더 이상 자신의 양무리로 여기지 않으신 사실을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ונח (자나호) 라는 동사는 ‘미워하다’ ‘싫어하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을 멀리 집어 던진다’는 뜻을 나타낼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떠한 의미를 취하든 별로 문제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내용을 간략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마다 이 재난은 우리의 나아갈 길에 내던져진 우연이라고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고도 신비스러운 섭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채찍이나 회초리로 우리의 죄악을 벌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요, 또 사용하시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버리시나이까”와 “진노” 는 육신적 이해력, 혹 판단력을 따라 사용된 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자기 택하신 자들에게 진노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고질병이 의사에게 치료 받는 것처럼 환난으로 치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진노”라는 말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경험하게 하여 신실한 자는 영원한 순결앞에서 자기의 허물을 깨닫게 권고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노를 우리 위에 내리신다고 할 때는 우리가 마땅히 그 진노를 받아야 할 자임을 진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은 진노의 감정에 굴복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진노가 우리에게 불붙지 않는 것은 죄로 심히 하나님께 대항했던 우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긍휼을 베푸시지 않음에 대한 탄원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택해 주신 언약에 대한 회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주의 치시는 양” 이라 부름으로 이방인들과 구별되어 값없이 택함 받은 자들인 사실을 찬미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구절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납니다.
3. 본문 2절은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입니다.
여기서 주의 백성들은 자기들이 자신들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양자로 택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그들의 자랑은 조상들이 한 방법과 비슷합니다.
즉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지 않던 자였지만 그들에게 유업의 권리를 주셨던 방법과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들의 믿음은 점점 더 확고해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선포합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이래 계속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 속에는 또 구속이 택함에 대한 인증(認證)이 된다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의 임금이요, 보호자가 되신 사실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이 구속이 이루어지는 때의 행위로도 보여주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이런 은혜들은 하나님을 의지함에 용기를 갖게 해줍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버리지 말라는 논증으로 저버리시지 않을 은혜를 열거합니다.
동일한 은혜로 확신을 갖게 된 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주의 기업의 막대기’ (칼빈, 지파 - 한글) 라 부릅니다.
이 말은 이 기업이 하나님이 직접 허락해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줄이나 선(線)으로 하는 것처럼 막대기로 땅의 경계를 측량하거나 가려내는 습관이 유행하였음을 암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막대기’로 번역한 שבט(세벳)을 ‘지파’로 번역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막대기’ 라 번역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측량하는 막대기로 하시는 것처럼 자신의 기쁜 뜻에서 나오는 은밀하신 예정으로 이스라엘을 자기의 고유한 땅으로 다른 백성들과 구별하셨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하반절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성소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성소는 그 안에 하나님의 본체가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거기 하나님이 가까이 계셨고 자신의 능력과 은혜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음을 백성들이 경험한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백성들이 이 기도에서 얻어 내는 확신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그들의 확신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택과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요, 그들 가운데 세우셨던 거룩한 예배에서 나온 것입니다.
4. 본문 3절은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주의 타격을 가하사 - 칼빈)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입니다.
한편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원수들이 주의 성소에 행한 잔악함에 부합하도록 치명적인 상처를 그 원수들에게 입혀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들은 악하고 하나님을 모독한 맹렬한 행위에 온건한 형벌은 충분치 않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소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격렬한 원수가 되는 자들은 그들의 악함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철저히 부서져야 한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이런 형태의 기도를 기록하셨기에 우리는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을 매우 엄하게 벌하시기를 즐겨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고 계시는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둘째는 성소를 거스르는 자들을 그토록 엄하게 몰아 내실 때 하나님은 자기를 섬기는 자들이 자신의 신적 엄위에 복종하는 예배를 유지하신다는 차원 높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타격’ 으로 번역한 פעמים(프아밈)을 어떤 사람들은 “발” 혹 ‘발걸음’ 으로 번역하면서 교회는 주께서 그의 발을 드시사 교회의 원수들을 신속하게 내리 치실 것을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망치’라고 번역하는데 잘 어울리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은 때리는 행위, 즉 자기들을 때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사람들의 견해를 따르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원수가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더럽혀 버렸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받아들일 만큼 타당치 않습니다.
5. 본문 4절은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입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대적들을 사자에 비유하여(암3:8) 심지어는 하나님의 성소에서까지 저지른 잔악함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이 유대인들의 회당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 것으로 압니다.
또 여기에서 성전을 가리켜 종종 다른 구절의 경우처럼 복수로 말하는 것은 성전이 세부분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당을 가리킨다고 본다 해도 우리는 반론을 펴지 않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성별하신 모든 지역에 적용된다 해도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는 성전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때 가장 강조됩니다.
이와 같이 대적의 맹렬함은 억제되지 않았고 또 자제시킬 수 없어서 하나님의 성소의 영역까지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라는 말은 그들의 무례하고도 오만한 행위, 즉 자기들의 기(旗)를 세워 하나님까지도 이겼다고 하는 교만한 행위를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느브갓네살이 새가 날아가는 것과 그 소리를 듣고 점괘를 얻어 내려던 것을 말하는 에스겔서의 증거와 같은(21:21, 22) 주술적인 점이었다고 해석하지만 이 해석은 그 의미가 너무 한정되어 우리 해석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룩한 땅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특별한 성격을 불러일으켰고 세상 어떤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표시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통하여 마치 깃발을 흔드는 것처럼 자신의 권위와 통치 아래 백성들을 붙잡고 계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표시들로 택함을 받은 지파들이 이방민족과 구별되었는데 선지자는 여기서 이것들을 그들의 대적이 성소 안에 가지고 들어온 모독적인 깃발들과 대조시킵니다.
시인은 “기”라는 말을 반복해 대적들의 행위의 지독한 성질을 더 악화시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의 표시와 깃발들을 내던져 버린 후 그 대신 이상한 표시들을 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6. 본문 5-6절은 “(5)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6)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입니다.
시인은 또다시 자기와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의 원수들이 야만적이고도 금수와 같은 잔악함을 한층 더 실예를 들어 말합니다.
즉 그들은 그토록 막대한 아름답고도 거대한 경비를 들이고 갖은 수고와 기술을 다 동원하여 건축한 건물을 잔인하게 무너뜨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약간 애매한 점이 있긴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의미는 성전이 건축되던 즈음에는 성전을 짓기 위해 나무를 잘라 준비하는 사람들이 높은 평판과 명성을 얻었던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사 מביא(메비)를 능동적인 의미로 보고 이 말은 마치 하나님께 희생을 바친 사람들처럼 인기가 있고 잘 알려진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삼림은 품위있는 대들보와 상반되는 것으로 거칠고 다듬지 않은 재목을 정교한 기술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형태로 만드는 것을 보다 분명히 보여줍니다.
만약 저자가 이것을 의미하지 않았다면 그 의미는 삼림에는 매우 많은 나무들이 있어 각별히 유의해서 나무를 선정해야 하고 질이 좋지 않은 나무는 아무도 자르지 않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해석이 더 옳다고 생각됩니다.
또 도끼로 잘라 낸 이 삼림의 나무들은 사람들에게 이미 우수한 나무로 잘 알려져 있었음을 의미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시인은 이 구절에서 성전을 위해 선택된 재목의 우수함과 또 그 정교함으로 인해 보는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과 찬사를 발한다고 말하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없습니다.
“조각품” 이란 말을 봐도 이 구절은 탁월한 기술로 다듬어진 건물의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갈대아 사람들이 그토록 우아한 건물을 무너뜨림으로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발로 짓밟기라도 한 것처럼 무모하게 이 찬란한 건물을 그들의 도끼로 부서뜨렸다는 것입니다.
7. 본문 7절은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입니다.
시인은 이제 전쟁의 도구들로 절반 정도만 무너졌던 성소가 불에 탔기에 이제는 완전히 파괴되고 무너져 버렸음을 하소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의 히브리어 단어 순서가 뒤바뀌어 어떻게 정확한 의미를 찾아야 될는지 알 수 없다고 하여 ‘저희가 주의 회중에게 불을 던졌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취한 의미가 확실하다고 봅니다.
비록 악센트에 대한 문제가 있지만 정확하고도 자연적인 의미는 성소가 불에 타서 그 높이가 땅과 같아졌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우리의 해석은 성소가 ‘회중’이라는 복수로 불리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해석해 줍니다.
성전은 가장 깊은 지성소, 성소, 바깥뜰의 세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이어서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이라는 표현이 따라 나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실체는 성전 안에 제한되거나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으로 성전 안에 거하심으로서 백성들이 성전에서 더욱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도록 해주심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8. 본문 8절은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입니다.
교회의 대적들의 극도로 잔악함을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선지자는 그들이 피차 말하면서 제한이나 그침없이 진멸하기를 서로 자극한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말 속에는 그들이 마치 피해를 입히는데 충분한 용기를 갖지 못했던 것처럼 자기 이웃을 충동하여서 그들 중에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시키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 끝 부분에서 저자는 모든 회당들이 다 불살라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어 מועדים(모아딤)을 ‘회당들’ 이라는 의미로 선뜻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저자가 모든 회중, 또 모든 땅에 있는 이라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원수들이 자기들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를 해치거나 거스릴 수 없음을 발견하고 자기들의 분노를 유형적인 성소 혹은 회당으로 돌이키고 있다고 하는데 이 해석은 별로 의미 없는 해석입니다.
저자는 단순하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워버리려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격렬한 손의 흔적이 없는 곳이 어느 한 구석도 남겨있지 않고 있음을 불평합니다.
מועדים(모아딤)은 일반적으로 ‘성소’ 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그 어원을 고찰해 보면 이 말은 선지자들의 말씀을 읽거나 설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회집(會集)한 거룩한 모임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적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악한 자들은 유대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섬멸시키기 위해 자기들의 온갖 힘을 다 기울입니다.
시74:9-12 우리의 표적이
암흑 시대(暗黑 時代)에 처한 성도는, 미래를 다 이해할 수 없음을 탄식합니다(9-12).
성도들이 암흑 시대에 있어서 앞날을 잘 내다보는가?
그것은 9절 말씀대로 그 성도들도 잘 모른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성도라고 미래의 일을 자세하게 모두 다 헤아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그런 지식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성도도 자기의 별세할 날짜를 모릅니다. 그런 무식은 도리어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자기 미래에 대해 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그런 높은 지식을 가지면 교만해지기 쉬운 까닭입니다.
그런 높은 지식은 우리 인간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런 지식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높은 지식,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 속성으로 하신 일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나 구원의 서정들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로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과 같은 것을 알게 하시고, 다른 것은 감추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말씀 하셨습니다(마6:34).
1. 본문 9절은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입니다.
1)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구절에서 자기들의 괴로움을 보다 가볍게 해줄만한 위로를 받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그 괴로움이 더욱 가중된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진노하실 때에도 자신의 인자하심을 기억하시라고 약속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들과 화목하리라는 소망을 품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자녀들을 격려하는 능력의 수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 나오는 “표적”이란 말을 제한적인 의미로 보고 옛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심으로 증명하신 바가 있는 이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시편 74 편
그러나 거룩한 자들은 오히려 자기들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들이 없어지고 마치 하나님의 얼굴이 자기들에게 가리워진 것과 같다고 탄식합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주 하나님이여 어찌 주의 낯을 우리에게 비추지 않으시고 주께서 늘 그와 같은 것처럼 하시나이까!’ 로 말한 것 같이 흑암으로 압도됩니다.
우리는 자기 사람이나 미움의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시 구름이 덮인 흑암의 시대였던 것을 탄식할 뿐 아니라 자기들이 심히 두꺼운 흑암으로 봉쇄되어 단 한줄기 빛으로도 나타나지 않음을 탄식합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에 의해 앞날에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표적 중 하나였음을 알았기에 재난의 끝을 예언해 주는 선지자가 없음을 슬퍼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위로를 나누어 주는 직분이 선지자들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과 선지자들은 슬픔으로 닫혀진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소망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얻게 해준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선지자들은 완악하고 배반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고 또 그 진노에 대한 증인이 되어 위협과 공포를 일으켜 회개하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저주만 아무 제한 없이 선포하는 자라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의도하고 세운 교훈은 한낱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따라서 미래에 감추인 재난을 예언하는 것은 선지자들의 임무 중 하나입니다.
일시적 형벌은 하나님의 채찍이며 이를 조금만 생각하면 슬픔을 가볍게 합니다.
그러나 계속된 고난은 가련하고 비참한 죄인들을 절망에 주저앉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연단하시는 손길 아래 있을 경우에 인내에 대한 문제나 위로에 관한 점을 찾아내려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면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서 용기를 얻고 선한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비록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신 중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를 중단하시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안식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구원을 주기 위한 징계는 완벽한 슬픔을 주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슬픔을 낳는 것은 기쁨과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이런 의도를 자기들이 전한 교훈 속에 내포시키기 위해 힘썼습니다.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서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자기들의 반역을 깨뜨리고 겸손해지도록 매우 가혹하고 엄한 말로 백성들을 다루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겸손해질 때에는 언제든지 그 즉시 위로의 말을 전파했습니다.
그 위로는 백성들이 미래의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용기를 가지지 않는다면 전혀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74 편
2) 여기서 질문은 하나님이 가하신 징벌 때문에 생기는 슬픔을 완화시키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그 징벌이 지속될 햇수와 날수를 항상 정하셨는가 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선지자들은 항상 정한 때를 밝히고 또 규정해 주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종종 구원이 임박했음을 백성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뿐 아니라 선지자들은 한결 같이 미래 교회의 회복에 대해 말했습니다.
또 고난 당한 사람들이 모든 세대의 공통 복이 일반적인 분명한 약속들을 자기들에게 적용시키지 않음으로 이 생각은 잘못이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더 깊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통 사용하시는 방법은 모든 고난 당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자들을 보내시기에 특별히 그런 목적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라도 자기들이 지금까지 누려오던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을 빼앗겼다고 이유없는 불평을 늘어놓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매시대마다 약속된 구원에 대한 기억을 다시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기들이 어떤 고난 속에 빠졌다 할지라도 주님은 계속 보살펴 주시며 장차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2. 본문 10절은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악한 자들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형태를 빌어 영감받은 저자가 목적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고자 하는 열심히 불붙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괴로움을 견디는데 심히 연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모든 고난보다도 하나님께서 오만한 자들에게 멸시당하는 것을 더욱 슬퍼하고 불안해 하는 것은 순전한 경건심의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가련한 유대인들이 가장 잔인한 폭군 밑에 있는 것과 야만 족속들 가운데 있는 것보다 더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없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전체 교회의 몸 안에서 말을 함으로서 사람으로 말미암은 비난은 하나님을 향한 저주스러운 모독과 거의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69편 9절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는 말씀용을 따른 것입니다.
시편 74 편
또 “영원히” 가 첨가된 것은 악한 자들이 오래도록 형벌을 받지 않으면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더욱 파렴치하게 해 주는 것이 되고 특별히 하나님을 향해 욕설을 퍼부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못 본 체하시고 지나가시는 것은 더욱 그렇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곧이어 11절에 이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3. 본문 11절은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입니다.
저자가 이 구절에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주석가들은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 차이를 가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앞에 나오는 “손”이라는 말씀이 ‘왼손’을 가리킨다고 보고 뒤에 나오는 “오른손”과 구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한낱 경박한 해석에 불과합니다.
저자가 “오른손”이라는 말을 했을 때는 단순히 자기가 흔히 사용하던 방법대로 동일한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두시나이까” 라는 동사 כלה(칼라)를 ‘가리다’ 혹 ‘제한하다’ 로 번역하고 저자는 하나님이 지나치게 오래도록 그의 품속에 품어 주셨던 하나님의 손을 마침내 펴시게 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허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유없이 하나님께 배상을 요구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또 이 말을 ‘진멸하다’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은 “주의 품에서”를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성소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는데 우리는 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구절 끝에는 질문이 계속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즉 ‘주여 어느 때까지 주의 손을 거두시려나이까?
진실로 주께서는 주의 품에서 주의 손을 거두시려나이까?
심히 교만하게 주를 멸시하는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소서’ 입니다.
이 말씀을 기도로 보고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은 노력하지도 않으시며 공개적으로 자기 손을 드시는 분도 아니기에 느릿느릿하신 분이요 게으른 분이시라고 확신하므로 하나님은 많은 손가락을 움직이시지 않고 막대기 하나만으로도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이심을 그들에게 알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보는 것도 타당합니다.
시편 74 편
4.본문 12절은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기도로 바꾸어 믿음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힘을 추구하며 자기들이 기도해야 할 의무 안에서 보다 더 진실해 집니다.
우리는 모든 의심을 초월하여 자유롭고 제한없는 기도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압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사역에 대한 증거들을 기억함으로서 계속되는 세대의 연속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택하신 백성의 왕이요, 또한 보호자이셨음을 증명합니다.
이 예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입술로 기도할 수 없고 믿음으로 기도할 수 없을 경우에 항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증으로 주신 복을 기억해야 하며 이것들을 수많은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의 증거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왕이라는 칭호가 하나님께 적용된 것을 단지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매우 명백합니다.
하나님이 이 명칭으로 불려진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존하시고 유지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정부를 자신이 맡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라는 말씀 속에 내포된 의미는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땅 가운데서’(칼빈 ; 인간에게 -한글)는 유대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곳이 거주가 가능한 지역 가운데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틀림없는 것은 이 장소가 뚜렷이 보인 곳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말 속에 하나님이 바로에게 고하라고 모세에게 주신 의미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니라”(출8:22).
이 말의 단순하고도 자연스런 의미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많은 구원들은 마치 선명한 주장에서 상영된 것과 같이 드러나 계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74 편
시74:13-17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주재(主宰)하신 모든 권능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현재의 암흑 중에서도 그 하나님 때문에 소망을 가집니다.
1. 본문 13-15절은 “(1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 리를 깨뜨리셨으며
(14)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15)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입니다.
저자는 이제 오래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련의 구원을 한 곳에 모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구원들은 처음 구원,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의 학정(虐政) 밑에서 풀어 주신 것에 속해 있습니다.
또 저자는 온 세상에 펼쳐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의 보증인이 되어 주시는 특별한 은혜에서 모든 인류들을 향해 나타내시는 선하신 뜻을 말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앞부분에서 저자는 ‘주께서 바다를 나누셨다’ 혹은 ‘쪼개셨다’ 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뒷부분은 앞부분에서 말한 결과에 결부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다를 마르게 하사 고래와 다른 큰 물고기들을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말씀은 바로와 그의 군대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이런 표현 방식은 선지자들에게 매우 흔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선지자들은 많은 물고기로 풍성한 바다를 이루고 있으며 나일강으로 갈려진 애굽을 말할 때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바로가 ‘리워야단’ 으로 불리는 것은 일리 있습니다.
바로는 바다의 이점을 가진 나라를 가졌고, 비옥한 땅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양(大洋)의 물속에 안이하게 오르내리는 고래에 비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던 당시 자신의 권세를 행사하셨던 것처럼 언제든지 교회의 보호자와 교회의 복을 지켜 주는 자가 되실 것을 교회에 확신시켜 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 구원이 한 시대에만 행사된 것이 아님을 확신시켜 용기를 주십니다.
시편 74 편
그러므로 바로 그 옛날 사람의 후손들에게는 이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자기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고 돈독히 하는 수단으로 좋은 근거가 됩니다.
저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 하나님이 행하셨던 모든 이적들을 셈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일부만을 말함으로서 모세가 길게 말했던 모든 것들을 비유적 제유법으로 이해합니다.
저자는 ‘리워야단’을 이스라엘 백성과 광야에 있는 자에게까지 ‘먹이로’ 주었다고 하는데 이 말 속에는 바로와 그의 무리의 멸망을 암시하는 아름다운 바유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다윗이 그때에 풍성한 음식물이 그 백성들의 양육을 위해 쌓여 있었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의 원수가 멸망당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결과로 기쁨을 누리면서 평안하고 안전해지는 것은, 자기들의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예비된 음식과도 같습니다.
“사막”이라는 말은 비록 건조하고 메마른 땅을 가진 나라라고 할지라도 해안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에 있는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다음 구절에도 똑같은 문제가 취급되고 있는데 ‘샘들이 쪼개졌다’ 혹은 ‘갈라졌다’(칼빈 ;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 한글) 고 하는 말은 백성들의 갈함을 채워주기 위해 하나님이 바위에서부터 물줄기를 흘러나오게 하셨을 때를 가리킵니다.
끝으로 ‘힘센 강들(길이 흐르는 강 - 한글)을 말리우셨다’ 는 말씀은 하나님이 요단강 물들을 흐르지 못하게 하사 자기 백성들이 건너도록 길을 여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강한” 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איתן(에탄)을 고유명사로 보고 ‘에단의 강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하지만 이 해석은 전혀 근거 없습니다.
2. 본문 16절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입니다.
저자는 이제 온 인류에 공통으로 확대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데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택한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직접 나타내시는 특별한 복을 찬양한 후에 저자는 이제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나타내신 은총을 재빨리 말합니다.
저자는 낮과 밤이 서로 규칙적으로 계속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라고 가르칩니다.
뒷부분에서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양에게 땅을 비치는 권세와 직분을 부여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빛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태양을 덧붙입니다.
시편 74 편
그 태양은 자신을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나타나는 수레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류를 향한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이 아름다운 도구 가운데서 분명하게 비춰지고 있으므로 저자는 마땅히 이것으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고 견실하게 만들어 주는 논리를 이끌어 냅니다.
3. 본문 17절은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에 정한 경계나 한계나 해마다 여름과 겨울이 규칙적으로 연속되는 것은 앞 절에서 말한 것과 동일한 것을 가리킵니다.
저자가 세상의 맨 끝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각 나라를 구별 짓는 특별한 경계를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나라간의 경계가 비록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경계선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항상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과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격렬함에 의해 자주 무너지고 깨드려지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각 민족들에게 경계를 정하여 주사 자기네 영토 안에서 살도록 해주시는 단순한 인자하심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사람의 의지로 혼란시킬 수 없는 경계로 이해합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땅의 공간을 살기에 충분할 만큼 허락해 주셨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규칙적으로 아름답게 계속되는 여름과 겨울은 인류의 필요한 것을 위해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의 보살피심과 은총을 명백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 구절에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무리나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소홀히 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이는 정당합니다.
시74:18-23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고려하실 네 가지 일로 구원을 애걸(哀乞) 합니다.
(1) 원수들이 주님을 비방하여 능욕함을 가만히 둘 수 없는 사실을 말합니다(18절).
(2) “멧비둘기” 같이 약하여 강한 자의 밥이 되기 쉬운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짐승 같은 원수에게 주지 않으시리라는 사실을 말합니다(19절).
(3)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영원히 세우시기로 언약하신 고래(古來)의 계약(契約)을 지 키시리라는 사실을 말합니다(20절).
(4) 하나님이 빈핍한 자들을 구해 내사 그들에게서 찬송을 받으시리라는 사실을 말합 니다(21절).
이 네 가지는 옛 부터 하나님이 본성으로 하시는 일들입니다.
이 성도는 그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마지막 22, 23절은 이 시편의 전체를 요약한 결론입니다.
1. 본문 18절은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자하심을 찬송함으로서 거룩한 자들에게 용기를 갖도록 한 후, 이제는 본래의 기도로 돌아갑니다.
저자는 먼저 자기 백성의 원수들이 하나님을 비방함에도 지금까지 형벌을 받지 않은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탄원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소서” 라는 어법은 강조형 입니다.
저자의 처지로는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오만하게 취급하는 것은 큰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오만히 하나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무익한’ , “우매한 백성” 이라 했습니다.
נבל(나발)은 ‘어리석은 사람’ 뿐 아니라 ‘악하고 악명 높은 사람’이란 뜻도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악하고 무가치한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2. 본문 19절은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 입니다.
우리가 “들짐승” 로 번역한 חית(하야트)는 ‘영혼’ , ‘생명’ 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뒷부분에서도 다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시편 74 편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분명히 “들짐승” 또는 “무리들”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어떤 의미로 보든지 이 말의 뜻은 나약하고 겁이 많은 새의 생명과 사람의 힘센 군대, 혹은 잔인한 맹수를 매우 적절하게 비교합니다.
교회가 “멧비둘기”로 비유된 것은 교회가 신자들로 구성된 훌륭한 지체들을 가지고 있지만 원수들과 싸우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들의 먹이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뒷부분에서는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라고 쓰여 있습니다.
히브리어 חית(하야트)가 또 사용되었는데 이 말이 가진 애매함 때문에 한 구절 안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두 차례 쓰여진 운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목숨”이라기보다 ‘회중’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적은 양무리들을 그들의 강력한 원수들의 무리로부터 보살펴 주시고 또 보호해 주시기를 기뻐하실 것이라는 기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20절은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입니다.
하나님이 더욱 긍휼을 베풀어 주시도록 하기 위해 저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합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가장 극심한 위험에 빠져 있음을 발견했을 대에도 항상 피난처로 자기들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언약을 맺으시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들의 기도가 상달되리라고 확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이 값없는 선택으로 우리를 백성으로 택해 주신 점에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또한 이 구절을 볼 때 우리가 기도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그 약속을 드리는 것인데 이것을 어리석고 조롱거리가 되는 것으로 여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추잡한 개와 같은 세르베투스의 망령됨이 얼마나 죄악된 것인가 하는 점이 드러납니다.
거룩한 유대인들은 또 자기들이 겪는 압제와 포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들의 주위는 모두가 마치 살인자들의 소굴이나 강도의 굴혈과도 같았습니다.
“땅 흑암한 곳” 이란 말은 하나님이 자기 얼굴을 감추시는 것처럼 보이는 곳은 어느 곳이든 악한 자들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할 수만 있는 대로 자기들의 악행을 모두 가리울 수 있는 곳을 찾기 때문입니다.
4. 본문 21절은 “학대 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입니다.
‘돌아간다’ 는 하나님께로 가는 것으로 ‘빈손으로 떠나가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시편 74 편
그러므로 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손에 거절 받는 고통을 당하여 부끄럽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마치 하나님의 은총이나 긍휼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학대받은 자” “가난한 자” “궁핍한 자”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들이 무성의하게 한 말도 아니고 자기들의 재난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도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토록 많은 재난들로 천한 신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세상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도 더 이상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실예로 우리가 배울 것은 우리가 헤어나기 힘든 궁지에 몰렸을 때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부르짖음 속에는 항상 우리의 비참을 위해 예비된 치료약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5. 본문 22-23절은 “(22)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23)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를 항거하는 자의 훤화가 항상 상달하 나이다” 입니다.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또 하나님께서 자기 심판대로 오르실 것을 간구합니다.
오랫동안 관용을 베푸신 후에는 “일어나사” 심판주로서의 직분을 결코 잊어버리시지 않았음을 행위로서 직접 보여주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쉽게 이 원통함을 푸시도록 그들은 하나님께 권리를 주장하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것은 마치 지금 당면한 문제는 특별히 주님 자신에 관한 것이므로 주께서는 소극적으로 가만히 게실 때가 아니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이것이 어떻게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원통함이 됐는가를 말합니다.
그것은 우매한 자들이 매일 주님을 비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우매한 자” נבל(나발)을 ‘무익한 자’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악한 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형편이 점점 더 악화되어 한번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지 않고 계속 거침없이 비웃음과 비방을 터뜨립니다.
이로 인해서 성도는 결론짓기를 단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비방하는 파렴치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맹렬하고도 포악하게 하나님을 향해 자기들의 비방을 퍼붓는 사람들에게도 하늘의 형벌을 내리시는 일을 잊지 마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작태를 간접적으로 행한 것 같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함으로 고대의 거인들처럼 뻔뻔스럽게도 무모하게 “주를 항거” 했으며 그들의 오만함은 극에 다달았다는 사실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