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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3-20
작지만 큰 복 / 김창인 목사
오늘은 열왕기하 3장 13절에서 20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작지만 큰 복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8절을 보면 ‘이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오히려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붙이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작은 일이지만 우리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큰 일이요, 큰 복이라는 뜻으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18절 말씀은 하나님께는 작지만 우리에게는 큰 복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개미의 생활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개미는 모두 같은 종류로 무리 지어 사는 것 같지만 왕 개미가 있고, 싸움만 하는 병사 개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만 하는 일 개미가 있습니다. 개미들이 개미 구멍으로 출입을 하는데 커다란 돌이 가로막고 있어서 불편이 많습니다. 그래서 개미들이 모여 의논을 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개미들은 아무리 힘을 모아도 그 돌을 옮길 재간이 없습니다. 옮기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것을 아주 쉽게 한 손으로 치워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기적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하면서 개미들 세계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개미들은 전부 달려들어도 돌을 옮길 수가 없지만 사람은 손가락 두 개만 가지면 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요, 작은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일이지만 개미들에게는 아주 큰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는 작지만 우리에게는 큰 복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체면의 복 (13-14)
이 말씀을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의 체면을 세워 주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두고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때 하나님이 체면을 세워 주신다는 것은 아주 큰 복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을 받고 아말렉과 더불어 전쟁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명령이 아말렉을 진멸할 때에 기식 즉 코로 숨쉬는 것은 사람을 비롯해서 짐승까지라도 전부 처리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쟁에는 아주 보기 좋게 승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때 사무엘 선지자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군 진영을 방문했더니 거기에서 양과 소들이 울면서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을 보고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묻자 “너무 살이 찌고 좋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죽이지를 않고 끌어 왔습니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얼마나 경고를 하고 야단을 했는지 모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면 죽일 일이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들은 척 묵살해 버리고 그 짐승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 압니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왕의 자리에서 축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
이 때 사울이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아주 위기에 처했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사울이 사무엘을 붙잡고 “내 체면 좀 봐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 백성들과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내가 이 지경이 되면 내가 왕을 그만 두는 날까지 얼마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치리 하겠습니까? 내 체면을 살려서 송아지나 양을 끌고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하는데 동참해 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체면을 세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적에는 시답지 않고 마땅치 않은 일이 있었지만 자기가 세운 종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 주시고, 체면을 세워 주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체면이 말이 아닌 경우가 없습니까?
그 때 ”하나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해야 하는데 내 체면을 좀 봐 주십시오. 내 체면이 밟히고 땅에 떨어진다면 하나님의 체면은 또 무엇이 되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부탁해 보십시오. 그래서 체면을 세워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는 작은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큰 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3절에서 14절을 보면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유다 왕 여호사밧의 체면을 살려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려서 복 왕국을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남 왕국을 유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남 왕국의 여호사밧 왕이 북 왕국에서 아주 악하기로 유명한 아합 왕가와 정략적인 결혼을 합니다. 이것이 첫째 실수입니다. 그리고 아합 왕이 죽자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이 때 북 왕국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조공을 잘 바치던 모압 나라가 배반을 합니다. 조공을 바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만히 놓아두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군대를 동원하여 모압과 더불어 싸우러 나가는데 자기들 군대만으로는 이길 승산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친척 관계에 있는 남 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출전하여 도와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여호람을 비롯해서 아버지 아합 왕이 얼마나 우상을 많이 섬겼는지 하나님이 괘씸하게 여겼던 왕들입니다. 그럼에도 택한 백성이 아닙니까? 남 왕국 여호사밧은 또 얼마나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지 모릅니다. 여호람 왕의 출전 요청에 군사를 거느리고 참전을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실수입니다. 그 때 에돔이 남 왕국 유다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조공을 바쳤습니다. 북 왕국에는 모압이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모압에서 반역이 일어나서 성공하면 에돔도 반역이 일어날 것 같아서 “이 때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라고 생각되어 출전을 합니다. 이 때 에돔의 군사들까지 동원하였습니다. 세 나라 왕의 세 나라 군사가 연합을 한 것입니다.
모압과 더불어 싸우러 나갈 때 몇 일을 가는 중에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군사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싸움도 한 번 못하고 목이 말라서 죽겠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그 때 두 왕 즉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에돔 왕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남 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자문을 받으려면 선지자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선지자가 없느냐?”라고 묻자 이스라엘의 신하 중의 하나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세 왕이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엘리사가 여호람에게 “지금까지 바알신, 아세라신을 섬기면서 그 선지자들을 떠받들던 당신이 무엇 때문에 나한테 왔소? 당신의 선지자들에게 가시오. 나는 당신을 상대도 하고 싶지 않소. 그러나 남 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의 체면이 봐 주지 않는다면 당신과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소”라고 야단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사밧의 체면 때문에 자문을 해 주었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서 온갖 도움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호사밧이 실수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정략적인 결혼을 합니까? 그리고 그렇게 우상을 섬기기로 천하에 제일 가는 이스라엘 왕을 도움러 나갑니까? 나가야 하지 않을 전쟁에 나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남 왕국 유다 왕으로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지라 그 체면을 세워서 골짜기에 물을 내 주고 모압을 이겨 승리하도록 체면을 세워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할 때는 체면 상할 일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혹시 실수해서 또는 잘 못 해서 체면 상하는 일은 없으십니까? 체면이 말이 아닐 때 “하나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번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실수가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믿음을 보시고 체면을 세워 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주시기를 바랍니다.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 체면이 서야 되지 않습니까? 회사에 가면 여러분이 맡고 있는 자리의 체면이 서야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체면이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체면을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작지만 우리에게는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감동의 복 (15-)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감동이 된다 하는 것은 큰 복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맹숭 맹숭하고 냉랭하며 전혀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다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괴롭고 답답한 일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은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감동을 받는 사람에게는 아주 큰 일이요, 큰 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가 나옵니다. 또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 두 설교를 비교해보면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훨씬 좋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많은 백성들은 이를 부득 부득 갈면서 돌을 가지고 달려들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설교에 전혀 감동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감동을 못 받는다는 것이 믿는 사람으로서는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서 “그러면 우리는 어찌하면 좋습니까?”라고 하면서 통회 자복하고 전부 주께로 돌아오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감동이 이렇게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자리에서 제 설교를 전부 똑 같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구를 감동시키느냐? 이 시간에 그 말씀에 대해서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큰 복입니다. 감동이 없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여러분들이 예배하는 시간 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뜨겁게 부딪혀 와서 때 마다 감동을 받는 큰 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5절을 보면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시간 첫 순서에 부른 성가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땐 나는 만족 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 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였네”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좋은 오르간을 마련해 놓았는데 오르간을 탈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르간 탈 사람을 데려 오라 하였습니다. 오르간을 잘 탈 사람을 데려다가 예배 시간 첫 시간에 부른 그 찬양을 연주하게 했더니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동이 오는지 눈물이 납니다.
여러분들 중에 광성교회 방명록에 올라와 있는 글을 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글은 어느 학생이 목요찬양에 나와서 함께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는데 가만히 보니 다른 학생들도 눈물을 흘리지만 나도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찬송을 통해서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감동이 이렇게 복된 것입니다. 감동을 받을수록 믿음이 풍성해 지고 믿음이 잘 되는 것입니다. 감동이 없을수록 도무지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심령을 메말라 가고 남는 것은 악밖에 없고 나오는 것은 원망과 불평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사가 “거문고 탈 사람을 데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거문고 타는 사람이 무엇을 연주했겠습니까?
아리랑을 연주했겠습니까?
아니면 갑돌이와 갑순이를 연주했겠습니까?
분명히 찬송이 아니겠습니까?
그 찬송을 부를 때 엘리사에게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여러분들에게 이런 뜨거운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접할 때 뜨거운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때에도 뜨거운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하는 시간 시간 순서마다 이런 하나님의 뜨거운 감동은 하나님께는 작은 일이지만 우리들에게는 큰 복입니다. 이 복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그런 모임에 잘 가지 않는데 오래 전에 서울에 있는 목사들이 모이는 모임에 한 번 간 적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와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 당시 사회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 사회학 교수가 초청된 것입니다. 강연을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교수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이런 질문 저런 질문이 오가는 중에 그 교수를 잘 아는 분이 일어나더니 “교수님 한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교수님의 아버지는 제가 다니던 교회 장로님이요, 어머니는 권사님이셨습니다. 그 때는 교수님이 교회학교에 열심히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즘 교회에 나가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본질을 떠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그 교수님이 교회에 안 나가는 것을 알고 물은 것입니다. “교회에 안 나가고 있습니다” “교회학교에 열심히 다니고 가정이 그런 가정인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가십니까?” “나도 안타까워 죽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가면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하거나 설교를 듣거나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니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는 한 시간이 그렇게 고욕입니다. 누가 나를 감동시켜 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그 때 그 말과 답변에 제가 얼마나 공감을 했는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 모습과 그 말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성령의 교통이 없기 때문에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감동이 없고 찬송을 아무리 불러도 감동이 없다면 이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미칠 노릇입니까? 그런데 찬송을 부르니 엘리사에게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즉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3천명의 가슴이 전부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교통 때문입니다. 감동은 우리 성도들에게 그런 큰 복입니다. 이 복이 여러분들의 복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붙임의 복 (16-20)
하나님께서 네가 먹어라고 붙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는 작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는 우리에게는 큰 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는 작지만 우리에게는 큰 복입니다.
사사기 7장을 보면 기드온의 군사가 300명입니다. 그런데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왕들이 연합해서 침입하는 그 군대는 13만 5천명입니다. 싸움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 때 기드온이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기드온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라. 저 왕들과 군사들을 내가 네 손에 붙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이겼다. 네가 먹어라. 네 것이라”라는 뜻입니다. 보기 좋게 300명의 용사가 12만명을 죽이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너에게 붙여 주시면 네가 이기고, 나에게 붙여 주시면 내가 이기는 것입니다. 너에게 붙여 주시면 네가 먹고, 나에게 붙여 주시면 내가 먹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누구를 누구에게 붙이시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붙여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작은 일이지만 붙임을 받는 우리들에게는 큰 복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6절에서 20절을 보면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육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오히려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붙이시리니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과 모든 아름다운 성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아침에 미쳐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편에서부터 흘러와서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유다와 에돔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갔는데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골짜기에 개천을 파라”고 명하셨습니다. 바람 한 점 없고 구름 한 점 없을 때 개천의 물을 가득히 채워주겠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솟아난 생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침이 되어 모압 왕과 군사들이 바라보았더니 해가 떠오르는데 그 물들이 붉게 보이는 것입니다.
저 왕들 셋이 연합해 왔지만 자기들끼리 싸우고 죽여서 피바다가 된 것이라고 모압 왕이 착각을 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노략하자 가서 들고 오면 전부 우리의 것이다”라는 생각에 마음놓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때 숨어 있던 이스라엘과 유다와 에돔의 군대가 들어 치지 않았습니까?
그 때 그네들은 칠백명만 남고 전부 죽었습니다.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생수를 터쳐 주시고 죽을 지경에 있는 그들을 살려 주는 것도 하나님께는 작은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큰 일이었습니다. 모압을 들어 치고 승리하도록 붙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는 작은 일이지만 이스라엘과 유다와 에돔에는 큰 복이었다는 말입니다.
제는 어렸을 때부터 물고기나 짐승 사냥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지가 여섯 형제이기 까닭에 사촌들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형님 한 분이 물고기 사냥을 가자고 하여 해서 따라 가는데 동네에 있는 그 또래들이 함께 갔습니다. 저 보다는 전부 나이가 훨씬 많은 청년들이었습니다. 저는 형님들이 열심히 물고기를 잡으면 그것을 받아서 구럭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잡아 갖고 왔습니다. 이제는 나누어야 되지 않습니까? 한 마리씩 나누겠습니까?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기 때문에 그리 할 수가 없습니다. 그 형님이 몫을 나누어주는데 무더기로 나누어줍니다. 나중에는 작은 무더기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붙여 주던지 간에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런데 저에게 붙여 주면서 “오늘 네가 제일 많이 수고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수고 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붙여 주었기 까닭에 적지 않은 것이 제 몫이 되었습니다. 붙여 주기에 따라서 내 것이 될 수도 있고 네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압 왕과 군사들이 배반을 하고 달려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여 주시니 승리는 이스라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승리를 붙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공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병든 자에게는 건강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약한 분들에게는 믿음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평안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돈을 전부 벌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도 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많은 재산도 뚝 떼어 붙여 주시는 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붙여 주심의 복이 하나님께는 작은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큰 복이라는 말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작지만 큰 복은 첫째 체면의 복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실수 까닭에 체면이 말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여호사밧의 체면을 세워주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체면도 세워 주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감동의 복입니다.
예배하는 순서 순서마다에 감동을 받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는 작은 일이지만 우리들에게는 큰 복입니다. 엘리사가 받은 감동의 복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붙여 주심의 복입니다.
모압이 배반을 하고 반역을 해서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여러분들도 문제가 심각해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유다 왕과, 이스라엘 왕과, 에돔 왕에게 승리를 붙여 주신 것처럼 여러분들에게도 승리를 붙여 주시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