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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연의 수필세계
- 휴머니즘의 곳간, 사모와 향토적 서정 -
권대근
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 교수
최옥연은 투명하고 지고한 삶의 양태를 가진 작가다. 그래서 그녀가 써내는 수필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하는 생의 가치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가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의 추구에 있고, 그러한 삶의 추구는 반드시 아름다운 정신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바로잡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기 위한 것이다. 수필집 <노도 가는 길>이란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의 한 형태가 아닐까. 최옥연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왔고 또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옥연 수필의 모성적 원리는 삶의 지향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같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와 명제의 해명을 위하여 노력해왔던 기저에는 섬마을에서 시련을 껴안으며 성장하면서 경험한 비운의 가족사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또한 문학의 섬, 노도에 연로한 친정 어머니를 두고 고향을 떠나와 살며 작가로서 작품을 써왔다는 점에서 그녀의 수필은 삶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여기에 더하여 그녀의 수필은 이런 삶을 향한 노력이 미적 형상화 차원으로 고양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좋은 수필이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체험과 세련된 정신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수필의 가치 척도는 여기서 출발한다. ‘공감할 수 있는’의 성질은 문학의 보편성을, 가치 있는 체험은 구체성을, 세련된 정신세계는 날선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학적으로 형상화는 활어로 디자인된 감각적 표현을 뜻한다. 아마도 문학적 성취를 이룬 글이라면 이런 기준을 충족시켜야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창조적 내포를 담고 있는 참신한 의식이 작품 속에 넘실거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옥연의 <노도 가는 길>은 이런 준거를 충족시키고 있는 글들이라고 하겠다. 서른 여섯 편의 엄선된 글들은 모두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절절한 물음에 진실하게 응답하는 수필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최옥연은 삭막한 도시적 기계의 틀 속에서 인간을 구원해 내고자 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작품을 직접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삶의 문제에 맞닿아있는 자아 성찰적 작가가 시간의 길에서 만난 문학혼을 어떻게 수놓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수필의 숲에서 만난 생의 연금술이 지닌 힘이 어떨지 사뭇 궁금하다.
1. 짙은 외로움과 가시지 않을 향기
모든 예술이 그러하겠지만 문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정서가 있다면, 그 것은 ‘외로움’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외로움과 허전함이 없다면 언제나 만족스럽고 꽉 있다는 느낌 때문에 행복할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그 행복 속에서 인간은 지향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욕심이 없어지고 편안해질 것이며 평화로와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러한 만족감을 오래 누리고 있지를 못한다. 편안하다는 느낌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는 심심해지기 시작한다. 편안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끝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정서를 대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가를 위요한 습관화된 환경이 최옥연 문학의 씨앗을 잉태했다고 하겠다.
그녀는 시린 마음으로 한없이 노도를 지켜보는, 고독한 작가다. 고독한 세월의 그늘에서 오늘까지 기다림에 매달려왔다. 최옥연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가장 두드러진 그림자 형상은 존재에 대한 짙은 외로움과 가시지 않을 짙은 향기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그녀만의 독특한 정서라 하겠다. 그러기에 그녀는 스스로를 자처해 ‘노도의 딸’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서른 여섯 편의 수필 중 상당수 작품이 정신적 ‘궁’의 상황에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야말로 눈물의 습기를 통해 황홀한 기적을 만나는 작가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작가는 한 작품이 실존적 불안이나 죽음을 표현하든,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고지 사각의 모서리가 노도의 벼랑 같이 느껴질 정도의 외로움 속에서 그녀는 감각의 촉수를 갈고 닦았으리라 본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가시지 않을 향기’는 공감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어떻든 수필은 공감의 문학이기 때문에 멋과 맛뿐만 아니라 반드시 향기를 지녀야 한다.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해야 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될 때, 향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수필 쓰기를 삶의 한 행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수필이 정보나 사실의 나열이거나 말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안겨오는 생각들을 글로 풀어놓고 나면그나마견뎌온 삶이 허방이기도 해서 많이 아팠다.’는 머리말 한 대목은 최옥연에 있어서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음을 증명한다.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멋을 한껏 우려낸다고 하겠다. 수필 <노도 가는 길>을 보면,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환히 피어나는 피안의 세계를 가진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서포 선생의 유배가 세속의 욕망과 갈등들의 엉킴을 풀지 못하고 현실에서 밀려난 운명이라면, 내가 노도에서 태어난 것은 숙명이다. 선생이 차갑고도 어두운 긴 밤의 가슴앓이를 서책에 풀어낸 것처럼 나는 잃어버린 기억들을 풀어낼 화두를 찾기 위해 어머니를 찾아간다. 어머니는 노도에 뿌리를 박고 사는 나무이며 바위이고, 날개 꺾인 새이며 앵강만의 물고기이고 미역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평생 불러야할 노래이며 흔들림 없이 서 있게 하는 단단한 땅이다. 오늘도 부세밑의 가파른 바위 끝에서 방금 따온 돌미역을 대나무 발에 줄 맞추어 널고 있을 어머니. 당신의 발끝이 언제나 벼랑과 수평을 이루고 있었음은 굳은살 박인 발바닥을 보면 안다. 벼랑은 해초를 키우는 바위 끝에만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 <노도 가는 길>에서 -
노도 가는 길은 그녀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도 짙은 외로움을 동반하고 있는 작품이다. 고독한 향기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수필 <노도 가는 길>에서 작가는 서포 선생의 유린된 삶에 초점을 둔다. 그러면서 서포와 자신의 처지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서포가 노도에 유배된 것이 운명적이라면, 작가는 노도에 태어난 것을 숙명적으로 여긴다. ‘노도에 오면 나는 초옥과 서포 선생의 허묘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노도로 가는 길은 이야기 보자기를 가지고 가는 길이다. 종래 나는 속에 있는 것들을 품고 살 수가 없다. 앉아서 한 해를 보내고 뜬 눈으로 또 천년 같은 긴 해를 넘기고도 모자랐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이 수필에서 서포 선생과 노도에서 살고 계시는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다.그 운명의 사슬이나 속성에 탐닉하며 고독한 정서를 드러낸다.
‘어두운 긴 밤의 가슴앓이’나 ‘벼랑과 수평을 이루고 있었던 굳은 살 박힌 발바닥’, 작가의 ‘잃어버린 기억 찾기’는 모두 고독한 시간 속의 운명적인 삶을 표백한다. ‘날개 꺾인 새’로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를 기억하는 작가는 노도에다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노도의 딸로 태어난 것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작가는 투사를 통해 짙은 외로움의 근원을 노도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다. 유배의 섬, 노도는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 수필은 자기 응시의 경로를 통해 견뎌온 삶의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서포의 우수와 모녀의 삶을 연결시켜 정서적으로 풀어낸 것은 최옥연 작가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런 이미지의 결합이 문학적 성과를 거두는 이유는 뭘까. 어머니라는 벼랑 끝 궤적을 연상케 하면서 섬에 태어난 까닭으로 뜻하는 바대로 될 수 없었던 유년시절의 아픔과 성장 과정의 상처를 불러내어 치유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미세한 파도에도 흔들리고 아파했던 자신이지만 흔들림 없이 커왔던 자신의 삶을 어머니의 아린 삶을 통해 길어 올리고 있어 감동을 준다.
일생을 농부로, 또 어부로 살았던 당신. 바다를 떠나면 살지 못할 것 같던 아버지는 결국 아픈 몸이 되어서야 섬을 떠났다. 나는 길지 않았던 당신과의 부대낌 속에서 물 위의 기름처럼 스며들지 못했던 딸이었다. 남의 것을 내가 먹으면 안 되고, 내 것이라도 혼자 먹으면 더더욱 안 된다고 했던 아버지의 머리맡에는 그간의 인심들이 수북이 쌓였었다. 그런 성품의 아버지를 나는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속절없어서 아프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겠지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더 서럽고 조목조목 고통스럽다. 살갑게 다가서지 못한 것이 그렇고, 훔쳐낸 그리움 때문에 그렇다. 내 중년의 눈빛이 이리도 시린 것은 내가 당신의 딸이었던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그 어디서도 불러 볼 수 없기에 더 그립고, 바다처럼 울지 못해 아프다.
- <폐교>에서 -
모든 것이 구족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 법이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를 입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정서가 생겨나는 것이다. 작가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는 눈물의 범벅인 것이다. 그녀는 폐교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다. ‘퉁퉁 부어올라 있던 아버지의 발등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아직도 낯설다. 팽팽한 발등은 조금만 충격이 가해져도 금방 터져 버릴 것 같이 아슬아슬했다. 그것은 질곡의 시간들을 버티고 온 것에 대한 최소한의 항의가 아니었을까.’로 회억되는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해를 넘기는 긴 투병 끝에 곡기를 끊은 사흘을 빼고는 일손을 놓지 않았다는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부곡이 되어 작가의 가슴에 남아 있다가, 최옥연으로 하여금 ‘궁’의 상황에서 얻은 ‘한’의 정서로 수필을 쓰도록 요구한다. 무릇 작가는 무지개를 쫓아가다가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폐교의 분위기를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모습으로 의미화시킨 수법이 대단해 보인다. <폐교>는 시궁이후의 상황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병마로 고통스럽게 간 아버지를 추도하는 글이다. 자식에게 죽는 순간까지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자 도끼자루를 놓지 않았던 모습을 성스럽게 그려내면서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자의 바람직한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효가 희미해져 가는 시대에 자식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인지를 반성적 성찰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심리적 불안과 애환을 어찌 위 인용문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절제된 감정으로 비통하기 그지없는 슬픔을 잘 다스려 서글픈 정조를 아프게 터치하고 있는 부분이 공감을 자아낸다. 인간적 향기가 묻어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폐교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생기는 아버지에 대한 상념은 인간사의 허망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신변 소재가 문학수필로 승화된 이유다.
병마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오래 지켜봐야 했던 최옥연에게 아버지의 부재가 아픔으로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신의 몸에서 잘라내지 못하는 통증을 쌓듯 적당하게 팬 장작을 꼭꼭 쟁였다.‘는 표현은 폭발적인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서러운 심사를 간결한 문학어로 처리한 대목에서 작가적 역량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의 진술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문학적 광기가 느껴지게 하는 대목이다. ’폐교의 외벽에 금이 가고 떨어져 나간 시멘트는 아버지의 늑골처럼 철근을 드러내고 있다. 언젠가는 그 흔적조차 없어질 폐교는 아직 아버지를 향한 내 기억을 불러낸다. 무너져 내리고 있는 아버지의 의자 옆에 앉아 몸을 웅크린다. 등이 따뜻해진다.‘고 쓴 부분에서 현상의 추상성을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구체화로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다. 언어의 디자이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최옥연의 글은 실감과 함께 상상력을 주면서 손맛을 느끼게 한다. 격정의 순간에도 감정의 절제를 통해 품격을 갖추려고 한 것도 좋았다. 그녀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신선한 바람을 채워주는 작가인 것이다.
2.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의 가쁜 숨결
최옥연은 영롱한 빛살들로 가득 찬 그리움의 세계를 가진 작가다. 최옥연 문학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어머니로의 지향성이다. 그 그리움의 귀착지는 노도의 벼랑 끝, 어머니다. 이 책은 어머니에 바치는 글이라고 분명히 작가가 밝혔을 정도로 작품 하나하나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절절한 사모곡이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수필들이 귀소본능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 한 정성, 모정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따뜻한 적막> 이 입증한다. 궂은 운명의 장난이나 가부장제의 허위성에 대해 비난하는 것 같은 인상이 강한 작품이나 주제의식은 모정에 있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최옥연의 수필적 정서는 이러한 휴머니즘에서 비롯된 인간적 향기라 하겠다.
독자였던 아버지와 결혼한 이유만으로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핍박의 대상이었다. 아들내외가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는 오남매를 두고도 달라지지 않았다. 성향이 순하고 효자였던 아버지는 할머니의 등쌀에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에게 바람막이가 되지 못했다. 결국 부모님은 둘만의 합의하에 잠깐의 별거에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 조금은 나아질 기대를 한 것 같았다. 서탑처럼 굳건한 아버지와 오빠들을 남기고 할머니를 피해 막내인 나를 데리고 나온 어머니의 별거. 그러나 그 잠깐의 별거가 10여 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한 솥밥을 먹는 식구도 둘이었고,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가족도 둘이었다. 단칸방에서도 동기간에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늦은 봄날 우기에 죽순처럼 북적북적 자라던 친구들이 부러웠다.
- <따뜻한 적막>에서 -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적막이라도 따뜻하다면, 차라리 괜찮은 것이다. 이 역설의 낯설게 하기가 주는 미학은 그녀를 무한한 포용성의 얼굴을 가진 작가로 부각시킨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한 가족이 두 가족으로 갈라지는 상항 제시를 통해 어머니의 삶을 다시 반추한다.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일상사에 담긴 추억이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인생관과 버물어져 탄생한 것이어서 공감을 준다. 일상사의 비극에서 출발된 슬픔들이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혈연의 연대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순수한 연모와 향기 나는 모성애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늦은 봄날 우기에 죽순처럼 북적북적 자라던 친구들이 부러웠다’는 멘트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여운의 맛을 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나는 처음보다 수의를 보는 것에 많이 담담해졌고 이제는 어머니의 수의를 생각해도 마음에 동요가 일지 않는다. 속설처럼 당신이 수의를 곁에 두고라도 오래 살 수 있으면 하고 바람이다. 산다는 것은 내일을 모르는 오늘의 반복이 아닐까. 가끔은 지친 마음들을 내려놓고 또 다른 오늘을 생각해 볼 일이라 여겨지는데 어린 날의 꿈결 같은 베틀소리가 돋을새김으로 들려온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
- <베틀소리>에서 -
이 수필에는 눈물보다 끈적한 모정의 향기와 그리움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모성과 그리움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여성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인하여 파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움은 언어적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모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모성 체험과 같은 자녀와의 관계성은 여성의 도덕적 인식을 구성하는 요체다. 여성에게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모성성을 요구하는 어머니라는 위치가 가장 확실하게 그녀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의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위치는 가정이며 여성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최옥연은 어머니가 이제는 전통적 지위와 역할을 거부해서라도 새로운 삶을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다. 모정의 원리가 뜨겁게 솟구치는 대목이다.
<수덕여관>라는 작품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정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수필이다. 현대인들은 자식들에게 능력되면 대학까지 보내주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불편 없이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부모만이 베풀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최옥연은 이런 진리를 작품을 통해 잘 보여준다. ‘이제 무엇이 아닌 누군가의 마음 안에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가끔은 스스로에게도 그림자가 되어주며 때론 해탈의 저 노송처럼 미명의 등불로도 서 있고 싶다.’는 마지막 문구는 모정의 신비함이다. 어머니와 자식간에 오고가는 사랑의 화음이 감동을 준다. 수덕사를 보고 내려오는 마음이 무겁고 뭉클한 감동에 젖는 것은 그녀의 어머니와 자녀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혈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최옥연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 모습에는 모성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적 자책감이 반성적 성찰의 원리로 승화되어 순진무구한 인정의 미학으로 구축되기 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인정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최옥연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3. 자연친화와 향토서정의 노래
최옥연 수필의 세 번째 큰 물줄기는 향토서정과 휴머니즘의 추구라는 사상성으로 집약될 수 있다. 고향의 추억을 통해 보편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최옥연 문학의 본령이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이와 함께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과거에 대한 추억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귀소성이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본능적 속성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던, 또는 오랫동안 살아오던 고향에서 계속 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다. 특히 도시 문명의 확산과 산업 사회 진입 이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다. 작가는 찬란한 유년의 고비에 결혼을 하면서 남편을 따라 생태도시 울산으로 나온 경우다.
최옥연은 군불의 온기가 남아있는 방 안을 그리워하는 작가다. 자연의 그 작은 몸짓과 숨소리에 귀 기울이고 눈여기는 작가다. 수필 속에는 식물성적인 고향 노래의 향연이 다채롭다. 향수에 대한 지향성이 높은 작품들이 수필집에 많은 것은 작가의 시야가 밖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삭막한 콘크리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의 마음 속에는 떠나고자하는 심리와 함께 자연에 대한 동경이 싹트게 마련인 것이다. 더욱이 생활이 윤택해 지면서 가족의 여가 생활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면서 많은 도시인에게 이웃과 같이 고향의 추억은 가장 가까운 벗으로 자리 매김되는 것이 상례다. 고향과 멀어져 있는 생활 공간은 자연스럽게 작가를 고향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고향 속에서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소품들은 어쩌면 무료한 시공의 공백을 메워주는 매개로 안성맞춤이기에 작가는 타향살이의 결과로 얻은 향수를 염소라는 제재로 해서 수필화했다고 볼 수 있다.
어머니는 염소 한 마리의 죽음으로 남은 염소를 모두 처분했다. 살림이 나아진 이유도 있었지만 염소를 계속 키우는 것은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녀석의 죽음은 내 기억 안에 참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물을 싫어하고 바위를 유난히 잘 타서 언제나 내게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살게 했던 녀석들, 그 기억의 상흔들이 어제 일처럼 고스란히 떠오른다. 여우비가 내린다. 잃어버린 오솔길을 찾아 나섰던 긴 고요의 기억들이 젖어든다. 추억의 뒤안길, 그 앞에 나는 여전히 동심의 시골 소녀다. 먼 과거로 키를 낮추었던 시간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풀밭을 뛰어다니던 아기 염소 몇 마리가 뒤를 돌아본다.
- <염소>에서 -
고향은 삶의 근원이며 인간이 마지막으로 귀착해야 할 영원한 요람이다. 최옥연은 작품<염소>를 통해 동심의 시골소녀가 되어 유년시절, 어머니와 얽힌 추억을 제재를 통해 음미하고 있다. 추억 더듬기를 ‘잃어버린 오솔길을 찾아 나선 것으로 묘사하는 데서 문학적 역량이 드러난다. 추억의 뒤안길에서 만나는 아기 염소 몇 마리에 중요한 의미를 주면서 메타포로 작용하게 하는 수법도 대단히 전략적이다. 맑은 관조의 세계를 지닌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서구에서는 주로 자연을 도전과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했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자연을 어디까지나 신뢰와 조화의 대상으로 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고향은 한마디로 질서의 융합체다. 선명한 지향점을 향해 나름의 운행을 반복하는 것이 고향이다. 고향의 질서 안에는 단순한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는 실천덕목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절대자인 주체가 불완전한 인간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최옥연의 수필적 지향이 일상의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고향의 숨소리와 그의 맥박, 의도를 점철해 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수필의 문학성을 더하는 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고향에 사는 동안에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삼촌의 산소에 벌초와 성묘를 했다. 처음 몇 해는 어머니와 함께 하기도 했고 이웃 어른들과 같이 가기도 했다. 새파랗게 날이 선 낫질도 점점 익숙해졌다. 아주 가끔은 혼자 갈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공동묘지는 초입부터 무서웠다. 뗏장도 입지 않은 새 무덤이 눈에 들어오고 꽃상여를 태운 잔해가 보이면 섬뜩해서 삼촌이 있는 곳까지 앞만 보고 달려갔다. 하지만 무덤 앞에 다다르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 <불>에서 -
고향에 대한 작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한 작가의 출생이나 성장에 대한 개인사적인 사실만이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진짜 돌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애향적인 소재의 발견은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 최옥연 수필에서 발견되는 고향을 소재로 하는 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치는 작가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삶을 만나러 간다는 데 있다. 오랜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땅을 시집이라는 이름으로 등지게 됨으로서 그 기억들이 고향과 어머니를 환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에 대한 완고할 정도의 애정이며,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라고 볼 수 있다. 최옥연은 자신을 껴안아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모습으로 수필집 속에 서있다. 현실이 각박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짙은 그리움의 향기가 서려 있다. 그 시간과 공간에는 어머니가 아끼고 아꼈지만 비운에 간 삼촌의 모습도 빠질 수 없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또는 오랫동안 살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 상실에 대한 허무와 고독은 인간의 생득적인 감성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향과 고향에서의 추억은, 타인들의 눈에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그 당사자에게는 마냥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고향에 관한 근래 수필들 중에서 이처럼 진지하게 글쓰기와 삶의 관계를 천착해 보인 수필이 있었던가. 고향노래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다 잡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가의 모습이 신성한 구도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고향의 그리움에 대한 진정성 때문이리라. 더욱이 고향과 고향에서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휴머니즘의 추구다. 고향이란 원래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것이며, 우리의 삶과 인간성을 성숙시켜 주는 곳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그리움마저 상실한다면 그것은 곧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쯤이면 고향 초입은 절로 부산스럽다. 마을 언저리에서 와불로 누워서는 겨우내 꿈쩍도 않던 천수답들이 몸을 풀기 위해 꿈틀거리지 싶다. 어디선가 꽃향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불어오면 금단 같은 마늘잎을 풀어놓은 논배미들이 야릇한 춤사위를 준비할 때다. 봄바람의 유혹에 몸을 맡기고 다채롭게 일렁이던 봄볕도 살가운 마늘 곁에 가벼운 몸을 부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떠나리라. 생명이란 이렇게 부드럽고 푸른 것인가. 순일한 정감의 파장을 일구는 이 식물들의 빛깔부터 초봄에 어울릴 정도로 은은하다. 그렇게 봄은 찾아온다. 그러나 봄의 들머리에 서성이는 해풍은 차다.
- <봄이 오는 소리>에서 -
최옥연의 수필 <봄이 오는 소리>에서 우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참신한 인식의 힘이요,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이다. 수필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수필은 제재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통해 문학적 방식으로 쓰여야 할 글이다. 그것이 문학적 방식인가 아닌가는 이 수필 ‘봄바람의 유혹에 몸을 맡기고 다채롭게 일렁이던 봄볕도 살가운 마늘 곁에 가벼운 몸을 부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떠나리라.’처럼 구체적 형상을 통해 자기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는 표현인가 아닌가하는 점에 따라 구분된다. 옛날의 선인들은 자기 성찰적인 글쓰기를 중시하였으며, 수필적인 방식을 통해 선비 정신을 길렀다. 작가는 봄의 행진곡에 힘입어 자신도 찬란한 비상을 꿈꾸어 본다. 그 근거, ‘봄의 징후가 어찌 시장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에서만 오랴. 가자미국에서 묻어나오는 순한 쑥 향에도 봄은 묻어 있지 않는가.’라는 항변이 자뭇 문학적이다. 여기서 쑥은 자신의 의식이다. 최옥연의 수필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얻은 감동과 반성을 ‘쑥’이라는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미적 감동을 준다.
삶의 바다에 낚시 바늘 같은 물음표를 던지지 않고서 어찌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의 수필을 쓰겠는가. 최옥연 역시 어느 여성 작가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신선함과 신비를 느끼는 마음이 있는 작가이기에 그녀에게 천수답은 와불로 누워있는 성스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풍성하고 마음도 넉넉했고 옹기종기 작은 초가지붕들의 낮은 담장 사이 정감이 오가는 평화로움 그대로였다. 이러한 애향적 정열은 가정사의 단조로움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가슴에 지니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은 한다. 고향은 그러한 의미에서 최옥연에게 위안의 장소다. 시장에서 오는 봄의 활기를 논밭 언덕에 매달려서 쑥을 뜯는유년시절의 생동감으로 환치시키면서 작가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삶의 열정으로 승화시켜 놓고 있다. 삶의 자양분을 키워 준, 궁핍한 시대의 은혜로운 모정과 우정이 깃든 곳임을 잊지 못한다. 이는 최옥연이 귀소적 회귀 심리 속에서 고향을 못 잊어 그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 작품집은 휴머니즘적 차원에서 향토서정을 한 세계 속에 담아낸 수필의 집합체다. 생동하는 서사와 묘사로 인해 수필은 안정감과 중량감을 준다고 하겠다.
4. 시련으로 피어나서 객관화된 자아
최옥연 수필이 거처하는 공간은 자화상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아의 영토에서 낮추는 작가다.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춘 작가다. 인생을 칼칼하게 씻어내기 때문이다. 모든 수필이 지녀야 하는 공통적 요건 중에 하나가 대상을 바라보는 심미적 안목이다. 심미적 안목이란 화려하거나 현란한 언어 구사와 거창한 주제와 경이로운 소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필 작품을 통해 이르는 효과에 중요한 조건이 되지만, 인간의 흥건한 정이 배어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자리하며,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유발할 때, 문학적 미학은 완성된다. 수필은 어떤 문학보다 미학적 정서를 요구하는 글이므로 수필가는 정이 풍부한 사람이라야 한다. 무심한 사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정은 인간의 심리 중에서 가장 원시적 요소다. 그러나 그것이 물상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가 존재론적 차원에서 소재에 접근하고 잇다는 점이다.
수필의 소재를 ‘생활’과 ‘자연’에서만 찾으려 하는 작가가 있다면, 소재의 빈곤과 작가의식의 부재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뿐이다. 수필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수필 쓰는 일은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을 상상력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문학적 경로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그 소재가 어찌 ‘생활’과 ‘자연’뿐이겠는가. 그 표현 방식이 어찌 ‘고백’뿐이겠는가. 수필가들은 폭넓은 소재를 통하여 그 작품세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수필이 "인간학"이라는 새로운 틀에 맞추어 좀더 그 지평을 넓혀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수필가도 문학인이기 때문에 뚜렷한 자신의 문학관을 가져야 한다. 수필이 생활인의 애환만을 크게 받아들인다면, 작품세계를 스스로 좁히게 된다. 최옥연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절차탁마>라는수필이 이루는 작품 세계의 한 축에는 예리한 작가의식이 투과된 문학정신과 세태 비판이 자리 잡고 있어 평자를 안도하게 했다. 최옥연 수필이 이처럼 수준 높은 문학적 향취를 띠는 이유도 자신의 수필관을 확실히 세워둔 데 기인한다고 하겠다.
나는 지금 어디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 글이 대가들의 작품처럼 두고두고 읽히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힘들게 쓴 글이 읽혀지지도 못하고 외면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나 또한 글을 잘 쓰지는 못해도 좋은 글 보는 눈이 생겨서 가끔은 읽고 싶지 않은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수필이 문학이냐며 비아냥거리는 대단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글을 쓴다고 해서 모두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늘 공부하지 않으면 겉멋만 가질 수 있는 길이 이 길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보며 배우려 마음을 다잡는다.
- <절차탁마>에서 -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작가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온기의 총체여야 한다.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의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은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 발견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수필이 문학 장르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히기 위해서는 기쁨을 주는 높은 차원의 교시성을 가져야 한다. <화장>은 교시성이 잘 드러나 있어 좋다.
평생을 빈농의 아내와 엄마라는 무거운 이름으로만 살았던 안타까운 삶이지만 화장을 한 어머니는 편안해 보였다. 삶에 지쳐 힘들어하거나 아픔에 고통스러워하던 얼마 전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게 고운 모습이다. 짓눌리고 있던 육중한 무게의 짐을 다 내려놓고 한결 가벼워졌기 때문이리라.
그 편안한 얼굴만큼이나 성향이 따뜻한 분이셨다. 고부 사이에 서로가 말이 별로 없어서 다정다감하게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 적은 없지만 언제나 나에겐 좋은 시어머니였다. 그래서 낯선 시집살이에 어머님과는 고부갈등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미련한 것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오늘에 미친다. 그 마음 다 헤아리지 못하고 바보처럼 살아왔다. 돌이켜 보니 나처럼 붙임성 없고 못난 며느리가 또 있을까 싶다.
- <화장>에서 -
끊임없는 구도의 길로 자아를 내모는 세계에 대한 정면적 대결로 빚어지는 최옥연의 자기 고백록은 두 가지 측면에서의 의미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하나는 그가 보여준 반성적 자기 성찰이 근래 수필의 한 경향인 내성적 경향을 긍정적인 의미에서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견고한 문학적 장치와 유추를 동반하면서 고백을 ‘고백’ 아닌 것으로 끌어올리는 힘이야말로 최옥연의 문학적 저력을 확인케 한다. 다른 하나는 그의 수필이 행하는 작가적 자기 반성이 문학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돌이켜 보니 나처럼 붙임성 없고 못난 며느리가 또 있을까 싶다.’라는 휴머니즘의 꽃을 피우려는 결연한 자세 없이는 글쓰기에 대한 반성적 통찰 또한 가능하지 않다. 최옥연 수필들은 맑고 잔잔한 샘물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다. 수필 속에는 잔잔한 감동이 있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이 있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느껴질 뿐만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향취가 풍겨나고 삶의 진솔한 모습이 꾸밈없이 담겨 있다. 그녀는 깊은 의식과 상념으로 감성을 체계적으로 정리 압축하고, 다양한 시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간과 삶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다. 이는 평소에 영혼과 마음을 늘상 갈고 닦은 까닭이다.
5. 삶의 흔적, 따뜻한 주체자의 체온
최옥연은 다 태우지 못한 삶의 갈망들이 들끓고 있는 작가다. 심기 속에 전류처럼 정이 따뜻하게 흐르는 작가다. 이 수필집은 일상에서 꽃피우는 인연의 소중함과 정의 노래로 수놓아져 있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최옥연의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웃의 인연과 만남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인간애의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에서 나오는 체취를 음미하는 데 있지 않는가. 바로 인연의 소중함과 만남의 축복이다. 최옥연이 인정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속 모습까지 가감없이 내어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 자아로 세계와 마주 서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최옥연의 <한솥밥>은 현실 속에서 보기 드문 훈훈한 인정을 펼쳐 보이는 직장인의 모습을 접하고, 그 인정의 넉넉함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면 가져야 할 인간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밥을 먹고 나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스터디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가던 교사들이 탁자에 빙 둘러 앉아서 도란도란 묵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선후배가 따로따로 나뉘지 않고 한데 섞여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밝은 모습으로 돌아간다. 밥은 그런 것 같다. 경직되고 얼었던 마음을 데우는 일...... .
- <한솥밥>에서 -
최옥연의 수필을 읽으면, 그녀의 글은 하나같이 삶의 원형, 삶의 진리를 파헤친 지혜서란 생각이 든다. 그녀는 형이하학적 제재의 속성을 잘 파악하여 형이상적인 인간의 우주의 본질로 나아가는 데 참으로 익숙하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것은 논리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다 안다. 인과율에 의해 삶은 계속되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삶의 변증적 법칙을 ‘밥’이라는 메타포로 의미화하였다. ‘밥’은 그 어떤 장치보다도 사람을 하나로 모우고, 경직되고 얼었던 마음을 데우는 역할을 한다고 의미화한 데서, 그녀가 중요시하는 게 무엇인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쩔 수 없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연으로 여기며 사는 길은 주체적 행보라 할 수 있다. 배치나 장치를 만들어 권력을 확고히 하는 것보다는 열린 자세로 아래 선생님들에게 다가감으로써 작가는 튼튼한 도덕적 모럴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삶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진화 발전할 수도 없다. 삶의 법칙에는 몇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과율의 법칙"이다. 이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고 난 이래 이것을 위반하지 않고 현재까지 왔기 때문에 인간은 지금도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작가는 ‘밥’으로 풀이하고 있다.
내 속에도 빈 집이 있다. 텃밭을 일구던 녹슨 호미 자루처럼 낡은 기억만 담아두고 다른 어떤 것도 채우지 못하는 찬 가슴, 그건 내 안의 빈 집이다. 나만의 울타리를 만들어 나를 가두어 둔 스스로의 고립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만이 빈 집은 아니다. 사람이 살아도 빈 집은 있다. 생각이 머물지 못하고 인정들이 들고 나는 시간이 제각각이며 말에 칼날보다 아픈 비수가 실려 가듯 건조한 마음이 바로 빈 집이다. 사람만이 옛 것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들고나는 바람과 햇살도 옛 것이 그리울 때가 있다. 요즘은 사람이 시간보다 더 빠르게만 살아야 하는 집도 있다. 그런 집은 오히려 사람이 살지 않고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집보다 더 쓸쓸한 집이 된다.
- <빈집>에서 -
자기 삶에 대해 누구나 쉽게 부끄러움을 내비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 작품은 인간의 체취에서 풍기는 향기를 더해주는 글이다. 수필은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생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자신을 반성대 위에 세우고 자기 성찰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작가의 진술처럼, 자신만의 울타리를 만들어 나를 가두는 것도 스스로의 고립이다.사람이 살지 않는 집만이 빈 집은 아니다. 이런 단언은언제나 가슴 뭉클하게 하는 힘이 있다. 수필은 힘의 문학이다. 그 힘은 작가의식으로부터 나오지만 인간애의 고양으로부터도 나온다. ‘사람이 살아도 빈 집은 있다. 생각이 머물지 못하고 인정들이 들고 나는 시간이 제각각이며 말에 칼날보다 아픈 비수가 실려 가듯 건조한 마음이 바로 빈 집이다.’ 라는 이 대목은 더욱이러한 힘을 느끼게 한다. 주제를 제재에 담아 문학적으로 조리해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최옥연의 역량이 빛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문제를 찾아서 지난 세월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마음의 여유가 존재와 삶에 대한 자각과 잘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준다. 추상의 세계를 서정적 묘사를 통해 구체화하려는 문학적 기법을 통해 나름대로 문학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묻어나서 감동을 준다. 무엇보다도 제재를 통해 주제를 우려내는 솜씨의 탁월성이 수필가 최옥연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하겠다.
오랜만에 명절 음식을 동서들과 같이 만들었다. 형제들과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전도 지졌다. 형제들이 모여 피우는 눈가에도 웃음꽃이 걸린다. 작은 바람이라면 형제끼리 오순도순 사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사람이 그리웠기에 부대끼고 사는 것이 마냥 좋다. 그럼에도 아직 미천한 맏이로 덕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아직은 낯설고 갈 길은 멀다. 설익은 대추처럼 시간이 가면 마음도 영글어지리라 믿으며 다시 돌아올 내년 명절을 기다리련다. 형제들의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 다소 위안이 된다. 다음 명절에는 내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리라.
- <풋대추>에서 -
그녀의 작은 바람이라면 형제끼리 오순도순 사는 것이다.맏이로서 명절을 맞아 동서들과 제사 준비를 하면서 느끼는 심회를 소망으로 의미화한 수필이 <풋대추>다. 남편의 영혼까지도 맑아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내다. 작가는 자신이 부족을 내세우며 내년에는 자신이 좀더 남편 식구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리라 다짐하는 수필이 감동을 주는 것은 자신을 풋대추로 의미화한 대목이다. 가족을 위해, 한 몸 희생하고자 하는 작가에게 박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건강한 가정을 바라는 작가의 건강한 인식이 녹아 있어 뜨거운 감동을 자아낸다. 긴 인생을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향상을 목표로 삼아 자신을 비워내며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려는 정신이 후회 없는 인생을 보내는 방법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갈등을 극복하고 안락을 바란다. 현대적 삶의 어두움은 바로 갈등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치솟는 이 끊임없는 안락을 원하는 이기심과의 싸움에서 지기 때문이다. 아직은 낯설고 갈 길은 멀다고 하면서도, 설익은 대추처럼 시간이 가면 마음도 영글어지리라 믿는 작가는 분명 이 세상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을 가진 작가라 하겠다.
III.
최옥연 수필은 인간적 ‘정’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다”라는 명제에 답하고 있어 성공적이다. 이 수필집의 작품들은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감동적이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을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는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 발견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차원에서 최옥연 수필은 존재 의의를 지닌다. 그녀는 보다 인간적인 향기로 이 세상의 매듭을 만들며, 풀어나가고자 할 뿐이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처럼 최옥연은 득실거리는 사회의 군중 속에서 무엇보다도 추억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는 점에서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내면 풍경을 그림을 그리듯 감각적으로 구체화하는 데서 문학성이 빛난다. 언어의 활용면에서 문학수필의 멋을 한껏 우려내고 있어 읽을 만한 수필집이라 하겠다. 다섯 부류로 나누어지는 수필적 특성이지만 주를 이루는 것이 사모곡이다. 어머니는 존재의 시원이다. 기억해 놓는 일만 해도 가치로운 일이다. 그런 어머니의 삶을 통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최옥연의 수필이 주는 첫인상은 눈물겨운 따스함이다.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주었다고 하겠다.
최옥연의 수필집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이다. 수필은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수필집에는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다. 그래서 유난히 인간적 향기가 짙게 풍긴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큰 감동을 준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수필은 완성의 문학은 아니다. 어쩌면 완성을 향해 가기 위해 우리는 수필을 쓰는지도 모른다. 주제적 양식으로써 수필은 무엇보다도 주제의 내면화를 요구한다. 가족을 다루면서도 가족사적인 문제에 머물러만 있지 않고 시선을 공동체적인 삶에 겨눔으로써 언제나 삶 속에서 작은 행복들을 기대하고 꿈꾼다.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는 작가이기에 우리는 그녀의 다음 작품에 더 기대를 걸 수가 있는 것이다. 최옥연 수필가가 걷는 인생의 길은 자성의 길이니만큼 더욱 더 문학성을 갖춘 작품을 써내리라 확신해 본다. 좋은 수필을 위한 작가의 부단한 노력이 우리들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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