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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주일설교. 성령으로 기도하며 긍휼을 기다리라 (유다서 1장 17~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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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달은 부활절 이후 거룩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유다서 말씀에 나오는 거룩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다서 1절에는 유다서를 누가 썼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아멘.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편지를 썼다고 했습니다. 이 야고보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주변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여러명 있습니다. 먼저. 12제자중에 알패오의 아들 유다(다대오라고도 불림, 작은 야고보의 동생)가 있었고,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가 있었고, 예수님의 4명의 형제들중 한 명의 이름도 유다(나머지 세 명은 야고보, 요셉, 시몬, 마 13:55)였습니다.
이들 중엔 누가 유다서의 저자일까요? 전통적인 연구의 결과로는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저자라는 주장에 대체적으로 동의합니다. 장로교 창시자인 칼빈도 유다가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말합니다.
유다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생각하시면서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유다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였고,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복음전파자, 증인)가 되었고, 지키심을 받은 자들(복음 수호자들 혹은 교회를 지키는 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될 만큼 대단한 믿음을 지닌 유다였지만 그가 예수님의 친동생이었음에도 예수님이 살아계시던 때에는 믿음이 생성되지 않았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5절에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그 형제들은 예수님의 동생들을 의미합니다. “믿지 아니함이러라”, 유다를 포함한 형제들의 믿음 상태가 과거에는 이러했습니다.
굳이 과거를 들추어내서 믿음 없는 민낮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활절 말씀에서 보았듯이, 수제자인 베드로,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 가까이에서 섬겼던 막달라 마리아 조차도 빈 무덤까지 목격 했음에도 믿음이 생성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다 또한 부활의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는 기적의 현장을 아무리 많이 목격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었었도 여전히 믿음이 뿌리 내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유다도 우리와 일반 다르지 않는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성경을 기록할 정도로 강력학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의 친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부활을 직접목격한 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믿음을 지닌 사람은 100%의 믿음이요, 목격하지 못한자의 믿음은 0%라는 극단적인듯한 표현은 사실 진짜로 맞는 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우리도 유다와 같은 강력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유다와 같이 증인(제자)로 부르심을 받아 이 자리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로 서 있고,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 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편지를 쓰면서 거짓 교사들이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4절)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라고도 했습니다.
유다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결국 심판의 날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들이 거짓 선지자처럼 신앙이 변질되거나 타락하거나 배신하는 행위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경고합니다. 유다의 그러한 권면의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4월의 말씀이 유다의 권면 내용들에 전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17~19절을 읽어 드립니다.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아멘.
유다는 가장 먼저 권면하기를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제자들이었고,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가르침의 말씀을 받았던 무리들이었으며,
그리고 전부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았고, 오순절 성령체험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이들보다 예수님을 더 잘아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생생하게 기억하여 전달하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복음의 정수였습니다. 이들이 전달한 내용들이 성경책에 고스란히 담긴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직접 들었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하나라도 허투루 여기지 말라고 권면한 겁니다. 사도들로부터 전해져서 증언되고 믿음으로 고백되어진 압축판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고백하던 내용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사도들에게서 증언(전파)되어오던 믿음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은 그 출발점이 예수님 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는 유다의 권면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반드시 지켜가야할 중요한 권면입니다.
18절에서 “그들”은 곧 사도들입니다. 이 사도들이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사람들을 조심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마지막 때(날)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보다 불건경하고 음란하며 교만(조롱, 거만)한자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지금 세대를 보면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내 주변 환경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불건경, 음란, 교만으로 진하게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접촉하면서 점점 나도 적당히 스며들고,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나도 모르게 익숙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따라하는 행위들이 죄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관계를 제대로 못하는 것처럼 비웃음 당하는 세대입니다. 유다는 이미 이런 세대가 도래할 것을 경고하면서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만 기억하며 굳게 붙들라고 2천년 전에 경고와 권면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 혼자만 타락하거나 일부 다른 사람만 물들이면 그나마 괜찮은데,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이라고 유다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열을 조장하는 자들은 단연코 성령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셨듯이 마귀(바알세블)가 마귀를 쫓아낼 수 없는 것처럼(한 팀이기 때문)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성령으로 하나된 공동체를 향하여 이간질 시키고, 거짓의 씨앗을 뿌리고, 당을 만들어 패거리처럼 행동할 리가 없습니다.
이런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성령이 없기 때문이라는 유다의 지적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마귀는 분열의 영이며, 성령은 평안의 영이라는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믿음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은 부단한 자기 노력, 자기 성찰,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끊임없는 겸손의 자세를 취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자칫 마음이 흐트러지고 다른 것에 빠져들거나, 믿음을 지켜가는 일에 무관심해지면 금세 육에 속한 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성령이 없는 자의 모습처럼 정욕(음란)과 조롱(교만)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증오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룩과 경건으로 살아가려는 수고와 애씀을 혐오하고 증오합니다. 어떻게든 거룩한 언행을 더럽게 만들려고 틈만나면 분열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고 다닙니다.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이라고 평가 했던 대표적인 영어권 설교자 켐밸 몰간(G. Campbell Morgan, 1863~1945) 목사님은 “마귀의 전략은 그와 맞서 싸워야 할 사람끼리 서로 분열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믿음이 더해지면 더해 질수록,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더 격렬해 질 것입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한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고 마귀가 얼마나 우리를 음란과 교만으로 빠트리고 싶겠습니까? 성령을 구하며 거룩하게 살려고 결단하는 자세를 보고 얼마나 벼르고 있겠습니까?
하지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만 차리면 됩니다. 근신하며 기도하는데 힘쓰면 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 충만으로 싸움에 나가기 때문에 완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에 속한 자가 아니요, 성령 없는 자가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 아니라 평안으로 함께 하는 자들임을 명심하십시오. 거룩과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내 믿음을 확증하며 살아가는 자들임을 명심하십시오.
십자가와 부활이 항상 내 마음과 머리와 입술과 행동에서 나타나도록 의식하며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성령 충만한 자요, 거룩한 자의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충만한 임재하심이 날마다, 때마다, 일마다, 삶의 자리에서 풍성하게 역사하셔서 믿음의 사람으로, 거룩의 사람으로 주님과 아름다운 동행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유다는 거룩으로 살아가기 위한 다음 권면으로 기도를 이야기 합니다. 20~21절을 읽어 드립니다.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아멘.
유다는 짧은 두 구절 말씀에서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세우라, 성령으로 기다리라, (예수 그리스도의)사랑안에 자신을 지키라, 영생에 이르도록 긍휼을 기다리라”는 여러 가지 권면을 한꺼 번에 했습니다.
저는 이 권면들을 “성령으로 기도하며 긍휼을 기다리라”는 한 가지로 압축해 봤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은 일상에서 기도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 있을 때 가능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친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항상 의식한다는 것이고, 예수님과 무엇이든지 바로 바로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압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폭력과 모함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거짓과 술수에 참여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사명과 순종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의 말과 돈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이러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방향이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기도는 오직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말과 행동을 주장(다스리심)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앞에 두려움으로 선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앞에 겸손함으로 엎드린다는 것이고, 성령님의 진리 앞에 나의 자아를 굴복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는데 두려움도 없고, 겸손함도 없고, 자기를 부정하지도 않고 오만하고 교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은 결코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기 뜻을 구현하고, 기도함으로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위선자들은 기도가 곧 자기 믿음이라고 대단한 착각을 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느냐 안하느냐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언행이 거룩한가, 말과 행동이 올바른가 하는 것으로 다 드러납니다. 이 땅에서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거룩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심판대 앞에서 그 언행들이 성령으로 기도한 결과로 인정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유다는 성령으로 기도하면서 긍휼을 기다린다고 했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영생(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직 은혜(십자가와 부활)로만 가능 하며, 그 은혜가 작동되는 경우는 오직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불쌍(긍휼, 자비)히 여겨 주실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기도할 때에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집중해야 하는 간구가 “나의 몸과 마음을, 나의 말과 행동을, 나의 생각과 의지를, 나의 연약함과 불순종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항상 간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며 긍휼을 기다리는 사람은 거룩함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거룩함으로 살아가서 예수님 앞에 서는 날 정말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순결한 세마포를 입은 신부의 모습으로 환대를 받고 싶으시죠. 그렇다면, “성령으로 기도하며 긍휼을 기다리라”는 이 말씀이 오늘 하루만 선포 되는 말씀이 아니라, 내 삶의 전 영역에서, 내 인생의 전 시간 안에서 행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셔야 합니다.
제가 전에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산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관론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하여 승리하시고 1점의 점수를 획득하는 것, 이것에만 집중하다보면 어느 새 내 점수가 10점 20점 100점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1점 못 채우면 내일은 없습니다.
하루 하루 성령으로 기도하며 긍휼을 기다리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에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변화되어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날이 올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 하십시오. 그리고 긍휼을 기다리십시오. 이것이 영생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이 두가지를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셔서 당당하게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시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유다가 전하는 마지막 권면의 말씀, 22~23절을 읽어 드립니다.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아멘.
권면을 마친 유다는 미혹되어 거룩하지 못하게 사는 다른 사람(성도나 이웃)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의심하는 자들은 분열을 조장하는 누군가의 말에 휘둘려서 덥석 그들과 동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이러한 의심하는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모른체하고 봐주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하여 다투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서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의심하여 동조하는 차원이 아니라 분열에 앞장서고 다른 사람까지 동참하도록 선동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적극적인 배신자들을 말합니다. 유다는 이들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끝까지 예수님의 진리를 따라 돌이키라는 권고를 멈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셋째,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 미워하라는 말씀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되 그들이 지은 죄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마음과 동일하게 절대로 봐주지 말고 미워하라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죄는 죽기까지 미워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며 긍휼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잘 실천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을 공격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을 이와 같은 세 가지 마음으로 상대해야 합니다. 배신자라고 욕하고 저주하거나 언쟁과 다툼으로 물리적 충돌을 하지 말고 그들이 끝까지 돌아올 수 있도록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미워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일합니다. 우리는 내 자신 스스로가 성령으로 기도하며 긍휼을 기다리는 가운데, 다른 연약한 자들, 심지어 분열을 일으키고 조장하며 공격을 가하는 자들까지도 품을 수 있는 성숙한 믿음에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오늘 유다서 말씀은 거룩함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성령으로 기도하며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는” 실천 방법을 알려 주었고, 연약한 자들, 공격하는 자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도 잘 알려 주었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유다가 권면하는 이 가르침을 잘 받아서, 부활이후 내 믿음을 온전히 지켜가고, 말과 행실이 항상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기도하며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섬겨가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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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성령으로 기도하며 긍휼을 기다리라고 선포하신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 들이게 하시고 삶의 습관으로 실천해 나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를 거룩한 발걸음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