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소설 -일루전;ILLUSION
제1부 폭동 전후
1. 고백 수기 ‘미망(迷妄)’
1954년 봄.
“어무이요. 중근이 어무이가 이 책을 읽으면 안 되겠심더.”
남득순(南得順)이 재봉틀을 열심히 밟고 있는 방으로 들어선 윤호(允鎬)가 손에 교정지를 들어 보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윤호는 막 중학교 이학년이 되었다.
그의 손에 든 것은 곧 출판하게 된 ‘미망(迷妄)’이라는 고백수기의 교정(校訂)지였다.
황현준(黃鉉俊)은 정전이 되자 육본 종사에 종지부를 찍고 개인 사업으로서 출판사를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의 출판사는 고작 책 한 권 찍어내고는 문을 닫았다. 그의 살림을 거덜낸 이 한 권의 책, 그 출판사의 유일무이한 출판물이 된 그 책이 이른바 ‘미망’이라는 수기였다.
그때 펴낸 수기 ‘미망’은 공산주의자 곽양수(郭亮洙)의 정부(情婦)인 전매리(全梅里)가 곽가와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대한민국 국민으로 전향(轉向)하면서 쓴 수기였다.
펴낸 책을 어떻게 소비하지 못하고 창고에 썩히다가 고본점에 휴지값으로 넘겨줘버렸다. 그것도 사업이라고 투자한 것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고. 그 바람에 그의 유일한 재산인 왜옥 주택을 날려버렸다.
당시 대구가 지방이기는 하지만 아직 환도가 다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서울이라야 제대로 전국을 카버할 수 있는 영업망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울보다 그때까지도 대구가 차라리 실속 있는 교통의 중심이기도 했고 웬만한 사업체들이 모두 대구에 그대로 있었다.
특히 학교에서 쓰는 출판물은 대구에서 발간되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초-중-고를 망라해서 학생들의 참고서는 전쟁 기간 중에 대구에서 발행되고 있었다.
웬만한 서점을 운영하는 데서는 출판사를 겸했다.
그러한 출판사들은 그대로 하나 없이 성공해서 모두 환도와 더불어 서울로 진출했다.
그런데도 워낙 사업에 대한 비전이나 경험도 없는데다가 워낙 영세한 밑천으로 시작한 것이라 전망이 밝을 수 없었다. 득순은 남편이 사업을 말아먹은 것은 그러한 원인보다 술 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준에게 있어서 거짓말도 과장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술 탓으로 술병이라고 할 간경화로 그로부터 4년 뒤인 마흔 넷에 요절했으니까.
그 수기의 원고는 그 전 해(1953) 겨울, 그러니까 불과 몇 달 전에 입수했었다.
남득순은 김희자 권사와 여자 교우들 몇 사람이 홍신명 목사를 모시고 함께 삼덕동에 있는 형무소로 한 수감자를 면회하러 갔었다.
수감자는 홍 목사에게 목회를 이양했던 전다위 목사의 딸이면서 곽양수와 동거했던 중학교 여교사 전매리였다.
그가 감옥에서, 지난 예닐 곱 해에 걸쳐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버리고 아버지와 가족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좇아 이념의 화신이 되었던 자신의 삶의 역정을 고백한 수기를 집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남득순이 받아서 황현준이 개업하려는 출판사의 첫 출판물로 펴내게 된 것이다.
윤호는 이제 고작 중학교 이학년이지만 첫 한글세대의 학생이었으므로 어떤 기성세대보다도 현재의 맞춤법과 어법에 밝다고 그들 부모가 믿기 때문에 교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일을 맡긴 것이었다. 하기는 그보다 인건비를 댈 형편이 못되어 교정 기자나 편집사원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온당한 변명이 되겠지만.
“와 안 되는데? 나는 이 책이 나오면 바로 중근이 엄마가 맨 먼저 읽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 말이다.”
윤호의 말에 득순은 연탄풍로 위에는 닷되들이 큰 주전자에 보리차를 올려놓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반박에 대해서 아들은 아무 대꾸를 하지 않고 빨간 색연필을 잡은 채 교정지만 넘긴다.
현준도 보던 교정지를 펼쳐 놓은 채 난로 옆으로 돌아앉았다.
“손 안 시리나? 손 좀 녹히고 해라. 그라고 당신은 그만 들어가. 옥애 코가 빨갛다. 봄바람에 얼굴 트겠데이.”
득순은 옥애를 들쳐 업고 포대기를 둘렀다.
윤호는 현재 일남삼녀의 사 남매 맏이고, 옥애는 막내 셋째딸이다. 그런데 또 다섯 째 임신 삼 개월.
득순은 우리나이 서른넷, 현준은 갓 마흔.
황은 아들 교정지에 열중해 있는 준호를 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그런 말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돌아앉았다.
“이 원고를 읽으면서 저의 어린 시절에 보고 듣던 말들의 의미가 새삼 확인이 되네요, 아버지.”-윤호
“윤호야, 나 들어간다. 물 쏟지 않게 조심해래이.”-득순
득순이 문을 열고 나가면서 당부한다. 그러나 두 남자는 잘 가라는 말도 하지 않고 일에 몰린다.
“무슨 말을 들었었는데?”-현준
아들이 원고에 흥미를 보이는 것이 신통하게 여겨진다. 하기는 중학생 아닌가? 독서를 좋아하는 명문 중학생이니까 그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윤호는 더 대답하지 않고 원고에 몰입하는 자세다.
그 아들의 모습에서 현준은 문득 전사한 큰 조카 준호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준호는 당당한 사나이다웠는데 윤호는 키도 작고 몸집이 허약하고 가냘프다. 그런데 어떻게 이 순간 그렇게 닮은 모습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