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략의 성은 부(傅)씨이며 북쪽땅 이양(泥陽) 사람이다. 진(晋)나라 때 하간(河間)의 낭중령(郞中令)을 지낸 부하(傅遐)의 맏아들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면서, 홍각 법사(弘覺法師)의 제자가 되었다.
홍각 법사 역시 한 시대의 빼어난 사문이다. 승략은 처음 그를 따라 수업하다가, 후에 청사(靑司)ㆍ번(樊)ㆍ면(沔) 지방으로 노닐었다. 육경과 삼장에 통달하였다. 율행을 맑게 삼가하여 불법을 바로잡고 떨칠 수 있었다.
요장(姚萇)ㆍ요흥(姚興)은 일찍부터 그의 이름난 풍모에 고개 숙여 평소 알고 존중하였다. 그들이 황제를 참칭하여 관중을 소유하자, 깊이 서로 머리 숙여 공경하였다. 요흥이 삼보를 받들어 드높게 믿자, 불법의 교화가 널리 성대하였다.
그 후 동수(童壽, 鳩摩羅什)가 관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먼 곳의 승려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비구와 비구니가 많아지자 허물과 과실이 간혹 있었다. 요흥이 말하였다.
“범부가 승가를 배우더라도 괴로움을 참는 단계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찌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느냐? 허물이 있어도 이를 삼가지 않으므로, 마침내 허물이 많아지는 것이다. 마땅히 승려의 우두머리[僧主]를 세워, 불법의 크나큰 바람을 맑게 하리라.”
이어 조서를 내렸다.
“불법이 동방으로 옮겨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크게 성해져 비구와 비구니가 너무 많아졌다. 마땅히 여기에는 기강이 필요하다. 원대한 규칙을 내려 무너진 실마리를 구제하는 것이 좋겠다. 승략 법사는 젊을 때부터 배움이 넉넉하였다. 늙어서는 덕이 꽃다우니 나라 안의 승주(僧主)로 삼을 만하다. 승천(僧遷) 법사는 선정(禪定)과 지혜를 아울러 닦아서 곧 대중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러니 법흠(法欽)과 혜빈(慧斌)과 함께 승록(僧錄)을 관장하라.”
수레와 가마와 관리를 공급하였다. 승략은 시중(侍中)의 자리에 준하여 조서를 전해 받아, 양이 모는 수레에다 각각 두 사람을 거느렸다. 승천 등에게도 모두 후하게 공급하였다. 이들은 함께 일하면서 순수하고 검소하여, 넉넉히 당시의 여망에 들어맞았다. 오부대중이 엄숙하고 맑아져서 어느 때 할 것 없이 게으름이 없었다.
홍시(弘始) 7년(405)에 이르러 칙명으로 친히 믿음을 더하여, 몸을 부축하고 말씀을 알리는 종자(從者)를 각각 30명씩 두게 하였다. 승정(僧正)이란 제도가 생긴 것은 승략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승략은 몸소 걸어 다니고, 수레와 가마는 늙고 병든 승려들에게 공급하였다. 얻은 공양과 구휼품은 대중의 용도에 충당하였다. 비록 늙은 나이였지만, 경전과 계율을 강설하여 대중을 돕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홍시(弘始, 399~416) 말년에 장안의 대사(大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