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으면서 심각한 논리 이야기 -4]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에서 모순이 느껴진다.
왜 그럴까? 결국은 추상적 정의(definition)의 문제다.
그 이유를 '블랙 스완'에서 찾아보자.
"백조는 하얗다"는 항상 참이다.
백조의 '백'은 하얗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예외가 안 생긴다.
그런데 이걸 영어로 바꿔서 보면 다르다.
"Swan is white."
swan 속에는 white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돌연변이 black swan 같은 예외가 나타날 수 있다.
연역논리의 '대전제'로 삼을 수 있는가 없는가의 혼동이 번역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를 가리킬 때 흔히 "회색 코뿔소"라는 말로 표현하고,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리킬 땐 흔히 "블랙 스완"이란 말로 지칭한다.
헌법과 법률 같은 인간이 약속으로 만든 '인간의 법칙'이 있기 전에, '자연의 법칙'이 먼저 있어 왔다.
두 법칙이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혼란과 곤란을 겪게 된다.
기후위기, 환경위기, 에너지위기, 식량위기 등은 우리가 가진 법칙으로도 예측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거기다가 그 법칙마저 스스로 무너뜨리는 한동훈 같은 망나니가 나타나면, 유배를 시키던가 유치장으로 보내던가 해서, 위기를 최소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재미있으면서 심각한 논리 이야기 -3]
법칙에 대한 얘기를 조금만 더 해보겠다.
법칙이란, 법과 원칙을 뜻한다. 그리고 법의 모체, 즉 모법은 헌법이 된다.
법률이란, 법과 격률(준칙)을 뜻한다. 준칙이란, 모법을 기준으로, 헌법에 준하는(준거하는), 즉 헌법을 근거하고 전제하는 것으로, 병렬식으로 퍼지는 것이다.
헌법과 법률은 상하 직렬이지만, 법률과 법률끼리는 병렬 관계로 이해하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원칙 밑에 준칙, 준칙 밑에 규칙이 되겠다.
그러면 법칙은 왜 꼭 필요한가?
그것은 예측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으면 돌발적 상황들이 나타나 많은 제약들로 위축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즉, 자유를 제약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200여개 국가들 중에 법제정이 없는 나라가 거의 없는 것 아닐까?
악법도 법인가?
이것은 요 뒤에 '블랙 스완'에 대해 말하면서 잠시 짜증나지 않을 정도로만 언급하겠다.
[재미있으면서 심각한 논리 이야기 -2]
성경에도 구약과 신약이 있듯이, 논리에도 옛논리가 있고 새논리가 있다.
연역논리는 고대부터 비롯된 옛논리이고, 귀납논리는 근대에 새롭게 체계화되고 정립된 새논리다.
논리는 법칙적이기 때문에 연역법과 귀납법으로 불린다.
'법칙적'이란, 전제를 앞에 두면 반드시 그것에 따라야만 한다는 뜻이다. 전제를 따르지 않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행령은 법률을 따라야 하고, 법률은 헌법을 따라야만 하는 이유다.
연역논리와 귀납논리의 차이는, 예외가 가능한 것이 귀납논리라면,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연역논리다.
그래서 연역논리의 전제는 항상 '모두(all)'가 되고, 귀납논리의 전제는 항상 '어떤(some)'이 된다.
[재미있으면서 심각한 논리 이야기 -1]
※ 하고자 하는 얘기가 길 것 같아서 짧게 끊어서 여러번 나누어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내가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하거나 이해시키는 방법 중에서 가장 평화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바로 논리다.
우격다짐이게 되면, 폭력적으로 변해 말보다 주먹이 앞서고 효과는 즉각적이나 후유증을 동반한다. 3의 지식을 주면서도 동시에 10의 스트레스를 덤으로 주게 되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불합리한 형국이 된다.
감정에 호소하다 보면, 감정 소비가 심해지거나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는 역효과를 가져온다. 화를 내 본 사람은 안다. 화를 식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반면에 논리는, 서로 합의만 하면, 찌꺼기도 남지 않고 평화적으로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다만 논리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자는 약속을 깨니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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