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해 선생의 글씨병풍을 구경하였다. 팔 폭인데 조선불교유신론이 중심내용이다. 일제치하에서 불교계의 거물로서 독립운동가, 시인으로 활약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업적은 지대하다. 그러나 시집 <님의 침묵>은 읽어보았지만 그 분이 남긴 서예작품은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최근 우리 골동계에는 위작이 너무 많다고 한다. 만해선생의 글씨도 위작이 많다고 한다.그래서 만해가 가지는 서체적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하여야 한다.그리고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원래 한문으로 간행된 책인데 최근 이원섭 선생이 한글로 번역하여 한용운전집(신구문화사, 1973) 속에 들어가 있다. 한편 만해의 글씨 중에는 낙관이 있는 것은 드물다고 한다. 최근 어떤 분의 제보에 의하면 낙관이 없는 것이 많고 낙관이 들어간 것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국대 모교수가 가지고 있는 만해 한용운의 글씨가 바로 낙관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위의 8폭 병풍의 글씨는 종이가 일제시대의 얇은 화선지이고 종이의 상태가 7,80년은 된 것 같다.
만해는 1879년 7월 12일에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용호리 출생이다. 1896년 동학에 입교 가담하여 창의대장 민종식의 막료가 되었으나 운동의 실패로 피신하여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1908년 원흥사에서 원종종교원을 설립하였고 도일하여 일본을 시찰하고,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1927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역임, 경성지회 지회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월간지 <불교> 사장을 역임하였고, 1944년 5월 9일 중풍으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서거하였다.
최근 설악산 백담사에서는 매년 여름이면 만해축전을 거행한다. 많은 예산으로 학술대회를 성대하게 열고 있다. 만해상을 주고 있다.남한에는 만해의 따님이신 한영숙 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에도 월북한 만해의 아들 한보국(韓保國)이 자식을 낳아서 손자, 증손, 고손 등 무려 50여 명의 후손이 존재한다고 한다. 내가 아는 김경식 시인(동두천시 거주)이 충남 홍성 만해생가에 가서 가지고 온 팜플렛 상에 기재된 내용이라고 한다. 한편 만해의 북한 후손들이 북한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안 원각사비 뒷켠에 세운 용운선사비에도 그 아들 한보국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만해가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역임한 것을 보면 진보적인 노선을 걸은 이면에는 분명 그 아들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만해에 대한 기념사업을 성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1991년에 창립된 만해학회에서는 만해학보를 정기적으로 간행하여 10호가 나왔고,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만해축전 (1.2.3)이라는 책도 매년 8월에 간행하고 있다.동국대학교 본관 옆 교정에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그리고 만해의 신장은 적어서 152센티미터 정도였고, 그의 아들 한보국이 한국전쟁 때 홍성에서 인민위원장을 하다가 월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고서: 만해의 글씨8폭병풍, 한용운전집1-6(신구문화사, 1973), 이어령의 한국문학연구사전(우석출판사, 1990), 권영민의 <한국근대문인대사전>(아세아문화사, 1991), 전보삼 관장의 만해기념관(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근처), 만해문학박물관(강원도 인제 백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