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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장 15-18절.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문안함
15절.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fter these days we got ready and started on our way up to Jerusalem.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Μετὰ δὲ τὰς ἡμέρας ταύτας, ἐπισκευασάμενοι, ἀνεβαίνομε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after now the days these, having packed the baggage, we started on our way up to Jerusalem
‘여장을 꾸려’(ἐπισκευασάμενοι)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packed the baggage) 서둘러 여장을 꾸린 모습을 가리킵니다.
‘올라갈새’(ἀνεβαίνομεν)는 미완료과거로서(we started on our way up) 올라가기 시작하여 계속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올라갈새’란 뜻입니다.
1.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 집사의 집에 여러 날 머물렀습니다.
(1) 여러 날이라고 한 것은 고대에 어떤 집에 머물 때 3일까지는 허락이 되어 있었으나 3일을 초과하면 ‘여러 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속사도 시대에 기록된 디다케(Didache: 열 두 사도의 교훈집)에는 복음 전도자라도 어떤 성도의 집에 3일 이상 머물지 못 하게 했습니다.
만일 3일을 초과하여 머물면 그를 거짓 전도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전도 여행자가 한 집에 3일까지 머물렀는데, 바울 일행은 3일을 초과해서 여러 날 머물렀다는 말입니다.
21장 4절에 두로 교회에서 일 주일간 머문 것을 5절에서 <여러 날>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아, 바울 일행이 빌립의 집에 아마 일 주일간 머물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일날 함께 예배드리고 떠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바울은 여장을 꾸려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여장을 꾸렸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배로 항해해 왔는데 이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육로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짐을 꾸리고, 특히 구제헌금을 단단히 챙기고, 아마 나귀 같은 것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10킬로로서 삼 일이 걸리는 거리였으므로, 먹을 것과 물도 충분히 준비했을 것입니다.
16절.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me of the disciples from Caesarea also came with us, taking us to Mnason of Cyprus, a disciple of long standing with whom we were to lodge.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συνῆλθον δὲ καὶ τῶν μαθητῶν ἀπὸ Καισαρίας σὺν ἡμῖν,
went along then also the disciples from Caesarea with us
직역하면 ‘그 때 가이사랴의 제자들도 우리와 함께 갔다’는 뜻입니다.
‘함께 갔다’(συνῆλθον)는 부정과거로서(went along) 함께 간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ἄγοντες, παρ’ ᾧ ξενισθῶμεν, Μνάσωνί τινι Κυπρίῳ,
bringing, with whom we would be lodged, Mnason certain Cypriot
‘데리고 가니’(ἄγο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bringing) 데리고 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는 직역하면 ‘우리가 함께 머물려고 한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이사랴의 제자들과 함께 갔다)’는 뜻입니다.
‘머물려함이라’(ξενισθῶμεν)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we would be lodged) ‘우리가 머무르기 위함이라’는 뜻이고, 원형(ξενίζω)은 ‘손님으로 받다’(receive as a guest)는 뜻입니다.
한 오랜 제자
ἀρχαίῳ μαθητῇ.
an early disciple
1.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 가이사랴 교회의 몇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으로 있어 온 <나손>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 <나손>이라는 성도는 사도행전 1장에 마리아의 집에서 기도하던 120명 성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이 바나바와 똑같은 구브로 출신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이 나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간에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오랜 성도인 나손이 바울과 예루살렘 교인들 사이에 좋은 분위기 속에서 만나도록 중재하도록 바울과 함께 간 것입니다.
원래 예루살렘 교인들은 바울이 무지막지하게 핍박을 했기 때문에, 바울이 예수 믿은 다음에도 별로 친밀한 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율법주의 신자들이 있어서 사도행전 15장에 기록한 대로 바울의 신학 사상과 대립적인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오랜 신자인 나손이 바울과 함께 감으로써 바울과 예루살렘 교인들 간에 화목한 관계를 이루도록 중재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손은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풍부한 성도였기 때문에, 바울 일행이 나손의 집에 머물려고 나손과 함께 갔던 것입니다.
17절.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fter we arrived in Jerusalem, the brethren received us gladly.
예루살렘에 이르니
Γενομένων δὲ ἡμῶ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having arrived now we in Jerusalem,
직역하면 ‘이제 우리가 예루살렘에 이르니’란 뜻입니다.
‘이르니’(Γενομένων)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arrived)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을 가리킵니다.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ἀσμένως ἀπεδέξαντο ἡμᾶς οἱ ἀδελφοί.
gladly received us the brothers
‘영접하거늘’(ἀπεδέξαντο)은 부정과거로서(received) 반갑게 영접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 교회에 도착하니까, 예루살렘 교인들이 바울 일행을 반갑게 영접했습니다.
이 말씀이 평범한 말 같지만, 바울에게는 참 놀랍고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믿고 예루살렘 교회에 방문했을 때는 예루살렘 교인들이 바울을 상대도 안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행 9:26).
뿐만 아니라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회들을 설립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온 율법주의 신자들이 바울의 복음을 대항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을 때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고린도 교회로 온 반바울파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추천서도 받지 않은 거짓 사도라고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 간에는 커다란 구렁텅이가 놓여있어서, 바울은 이 간격을 극복해보려고 이방인 교회들에게서 구제헌금을 거두어다가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 사도의 의도가 적중하여, 3차 전도 여행을 마감하고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갔을 때, 놀랍게도 예루살렘 교인들이 바울 일행을 기꺼이 반갑게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인들은 교리적으로는 바울을 비난하고, 바울이 설립한 이방인 교회들마저도 적대시해왔는데, 바울이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구제헌금을 가져오자, 이로 인해 예루살렘 교인들은 바울과 이방인 교회의 대표자들을 반갑게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선물인 <구제헌금>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간의 장벽을 허물고, 반갑게 영접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과 이방인 교인들은 원수같이 자기들을 대적하는 유대인 성도들을 오히려 사랑으로 구제했을 때, 원수 같은 유대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녹아져서 서로 화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였던 사이였으나,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화목하게 된 것과 같은 비결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교인들이 바울과 이방인 교회를 미워했으나, 바울과 이방인 교인들의 <구제헌금>이라는 사랑의 선물로써 그 미움이 해소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더욱 사랑의 선물을 줌으로써 관계를 개선해야 하겠습니다.
18절.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 following day Paul went in with us to James, and all the elders were present.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τῇ δὲ ἐπιούσῃ, εἰσῄει ὁ Παῦλος σὺν ἡμῖν πρὸς Ἰάκωβον,
on the now following (day), was going in the Paul with us unto James
‘들어가니’(εἰσῄει)는 미완료과거로서(was going in) 계속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장로들도 다 있더라.
πάντες τε παρεγένοντο οἱ πρεσβύτεροι.
all and were beside the elders
‘있더라’(παρεγένοντο)는 부정과거로서(were beside) ‘곁에 있었다’는 뜻이고, 원형(παραγίνομαι)은 ‘곁에 있다, 도착하다’(to be beside, to arrive)는 뜻입니다.
1. 처음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 일행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1) 이것만 봐도 예루살렘 교회가 아직도 바울과 이방인 교회 지도자들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이방인 교회 같으면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나와서 바울 일행을 영접했을 것입니다(행 28:15).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먼저 일반 교인들이 바울 일행을 영접했으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튿날이 되어서야 바울 일행을 만나주었습니다.
(2) 여기서 <야고보>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가리킵니다.
사도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서 헤롯 아그립바 왕에게 칼로 오래전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서 <의인 야고보>라고 호칭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야고보가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총회에서 의장직을 맡았던 야고보입니다.
직분은 사도가 아니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보다 더 지도적인 위치에서 교회를 다스렸습니다.
이 야고보를 장로 야고보라고 하는데, 이 야고보가 바로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유대교의 율법을 잘 지키고 경건 생활을 열심히 해서, 안 믿는 유대교인들에게도 ‘의인 야고보’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늘 기도함으로써 무릎이 낙타 무릎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낙타 무릎>이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야고보는 성도들이나 불신 유대인들에게서도 존경받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성격은 바울과 같이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지 않고, 그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참된 믿음이라고 행위를 강조한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3) 야고보와 함께 장로들도 다 있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하는 야고보 장로와 함께 야고보 장로를 추종하는 장로들도 다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은 골수분자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로들이 사도행전 15장에서 예수 믿는 이방인들도 할례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이 갈라디아 지방 교인들에게 찾아가서 할례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참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 사람들이 게바파 사람들에게 추천서를 써주어서 고린도 교회에 파송하고, 이 게바파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바울은 추천서도 받지 않은 거짓 사도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은 바울의 은혜의 복음을 대적하고,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주장했던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이 율법주의 지도자들은 바울을 절대로 만나주지 않을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이 이방인 교회에서 <구제헌금>을 가져오니까, 그 헌금 때문에 바울을 만나준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고린도 교회에 문제를 일으킨 율법주의의 배후 세력자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구제헌금>을 가지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랬더니 절대 안 만나줄 것 같던 율법주의 지도자들이 구제헌금을 가지고 찾아온 바울을 만나준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바울과 율법주의자의 문제가 말로써가 아니라 구제헌금으로써 해결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경제적 도움을 준 <햇볕정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율법주의 지도자들은 바울과 이방인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구제헌금을 받아먹은 이상 더 이상 비난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 지도자들이 바울과 이방인 교회를 비난하려면, 바울 일행을 만나주지 않고, 구제헌금도 받지 않았어야 자기들의 교리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상대를 안 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율법주의 지도자들이 이단으로 지목했던 바울 일행을 만나고 구제헌금조차 받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바울을 이단으로 정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4) 오늘날도 목사가 문선명이나 신천지나 안상홍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려면, 이단자들의 돈을 받아먹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목사들이 문선명의 돈을 받고, 일본 여행을 하고서, 이단 정죄를 더 이상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이처럼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을 설립한 후에, 바울을 이단시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 지도자들에게 구제헌금을 들고 찾아가서, 이단 시비하는 문제를 잘 해결했습니다.
그 방법은 원수 시 하는 사람에게 구제헌금을 주는 방식으로였습니다.
(6) 바로 예수님의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신 말씀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대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방법이었습니다.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리고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으라는 행동이었습니다.
로마서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우리도 이런 적극적인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바울이 자기를 원수시 하는 예루살렘 교회 율법주의자들에게 ‘구제헌금’을 전달함으로써, 화목한 관계를 회복한 모습을 본받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사랑의 선물로 화목한 인간관계를 맺어서,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