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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607. [역경의 열매] 김진수 (1-26) 실수 통해 깨달은 은혜… “도움 필요한 사람 도우라”
美서 아시아 기업인 50인에 들 정도로 성공했으나 2010년 원주민 단기선교서
“자연산 송이 팔게 도와달라” 한마디에 농업회사 ‘긱섬’ 세우고 달라진 인생
김진수 긱섬 대표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실패 경험의 여부를 떠나 잘 실패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실패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실패하기 마련이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실패 경험의 여부가 아니다. 성공한 사람은 실패할 때 ‘잘 실패’하는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은 실패할 때 ‘나쁘게 실패’ 하는 사람이다.
실패가 결과라면 실수는 과정이다. 실수를 잘하는 것이 곧 성공적인 실패를 하는 것이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나도 크고 작은 실수를 많이 했다. 실수를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실수를 숨기면 숨길수록 숨겨지지 않았다. 되레 내가 앞으로 가는 것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1956년 강원도 삼척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92년 미국에서 ‘이미지 솔루션스’라는 1인 기업을 차렸다. 500명 규모의 회사로 키웠다. 성공한 아시아 기업인 50인에 들었다. 하지만 2010년 7월 사업가로 성공했던 내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현재 출석하는 미국 뉴저지 세빛교회에서 북미 원주민 단기선교를 떠나면서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자동차로 15시간 떨어진 기탄야우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토니 원주민 추장은 ‘자연산 송이버섯을 제값에 팔지 못한다’며 도와달라 했다. 고민 끝에 이듬해 기탄야우로 찾아 농업회사 ‘긱섬’을 세웠다. 송이버섯 판매 실패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7년 세월이 지나서야 회사는 흑자로 돌아섰다.
지난 삶의 여정에서 제법 많은 실수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실수를 새로운 시작이 되게 하셨다. ‘은혜’라는 단어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게 하기 위해서다. 내가 만약 이러한 은혜를 나를 위해서만 살았다면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악하고 게으른 사람이 됐을 것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대부분 실수투성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실수를 더 많이 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이 실수를 숨길 때 그들은 실수를 드러내는 용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같이 용기가 있었던 건 그들이 정말 두려워해야 할 존재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려워야 할 존재는 하나님이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를 알았을 때 사람들이 떠나갈 것을 걱정한다. 그러나 자신이 자신의 실수를 드러낼 때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실수를 통해 친밀감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 친밀감이 성공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실수를 드러내는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은 실수를 글로 쓰는 것이다. 글로 쓰다 보면 그 실수는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선명하면 할수록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이번 ‘역경의 열매’ 연재를 통해 내가 어떠한 실수를 했으며 그 실수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됐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나같이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참 자유를 누리기를 바란다.
약력=1956년생, 미국 스티븐슨공과대 기술경영학·컴퓨터공학 석사, 긱섬 대표, ‘비즈니스 선교’ ‘선한 영향력’ 등 저자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 실수 통해 깨달은 은혜… "도움 필요한 사람 도우라"
* [역경의 열매] 김진수 (2) 가난한 농가 살림에도 집안 기대 속 삼척중학교 진학
* [역경의 열매] 김진수 (3) 한국전력 입사 목표로 삼척공전 입학… 첫 신앙생활 시작
* [역경의 열매] 김진수 (4) 학업과 직장 병행 문제로 고민 "하나님 인도해 주세요"
* [역경의 열매] 김진수 (5) 변전소 보수원으로 첫 발령… 휴학 마치고 대학 복학
* [역경의 열매] 김진수 (6) 대학원 도전 실패로 실망… SCADA부서 전산요원에 뽑혀
* [역경의 열매] 김진수 (7) 4개월간 미국 기술연수 후 "나도 할 수 있다" 자신감
* [역경의 열매] 김진수 (8) 가족 모두에게 시련과 고통 준 미국 유학 생활
* [역경의 열매] 김진수 (9)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에 빠져 3학기만에 석사 학위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0) 아내의 반대로 박사과정 포기하고 프로그래머로 취직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1) 하루 15시간 일에만 몰두… 열심히 일한 노력 인정받아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2) 신입사원 시절부터 주인의식 가지고 맡은 일에 최선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3) 회사 그만두고 미국 뉴저지주에서 사업 시작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4) 열심히 일했지만 재정 바닥 나 "하나님 도와주세요"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5) 전 회사와의 계약 위반 문제로 법정 싸움까지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6) 이미지 파일 변환 신기술 개발로 회사 규모 급성장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7) 경영학 공부하며 회사 운영과 리더십에 자신감 생겨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8) 회사 급성장 후 무리한 계획으로 최악의 상황까지
* [역경의 열매] 김진수 (19) 고객에겐 늘 정직… 당장 손해 봐도 신뢰로 보상
* [역경의 열매] 김진수 (20) 고객 만족과 직원 만족을 넘어 지역사회 만족까지…
* [역경의 열매] 김진수 (21) 또 한 번 재정적 위기… 긴축정책 펼쳐 3개월 만에 극복
* [역경의 열매] 김진수 (22) EY 기업인상 수상… "주님 축복과 직원들 노력의 결실"
* [역경의 열매] 김진수 (23) 세계 금융위기에 큰 손실… 회복 어려워져 회사 매각
* [역경의 열매] 김진수 (24) 친구 회사에 투자… 경영까지 맡았지만 뼈아픈 실패 경험
* [역경의 열매] 김진수 (25) "나는 하나님께서 파 놓으신 함정에 빠졌다"… 긱섬 설립
* [역경의 열매] 김진수 (26·끝) 새로운 시작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
정리=김동규 기자 kkyu@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진수 (2) 가난한 농가 살림에도 집안 기대 속 삼척중학교 진학
강원도 삼척 산골 농부의 셋째 아들
세상 물정 아는 아버지, 교육에 열성
논·가축 팔아 학교 근처에 집 마련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에 있는 어렸을 적 지냈던 생가. 김 대표 제공
1956년 나는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주로 밭농사를 하며 먹고 살았다. 생일이나 제삿날, 명절이 아니면 쌀밥을 구경하지도 못했다. 보리 옥수수 감자가 주식이었다. 흉년이 드는 해에는 도토리를 주워 모아 식량으로 보충하기도 했다.
어쩌다가 어머니가 쌀로 밥을 지으시는 날이 있었는데 그때 잡곡을 씻어 먼저 밥솥에 안친 후 그 위에 쌀을 따로 부었다. 연장자 순서로 밥을 담다 보면 나는 잡곡이 많은 밥을 먹었다. 아버지가 간혹 밥을 남기시면 그 남긴 밥은 막내인 내 차지가 됐다. 그 날은 운 좋은 날이었다.
깊고 깊은 산골에서는 쌀밥뿐 아니라 고기도 흔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먹을 수 있었는데 기름진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으레 배탈이 나거나 알레르기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고기 부작용 탓에 거의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육류는 거의 입에 대지 못했을 정도였다.
큰 형님과 나는 스무 살 차이가 났다. 큰 형님은 거의 술과 더불어 살았다. 어느 매서운 겨울날 술에 취해 도끼를 들고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바람에 맨발로 급히 옆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난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됐다. 그때 형님이 그런 행동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장남으로서의 부담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슬하에 딸만 여럿을 뒀던 큰 형님은 당시 국내 정서대로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고 아들이 없는 것에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형님은 일곱 번째 자식으로 아들을 뒀지만 40대 후반이란 젊은 나이에 술로 인해 돌아가셨다. 둘째 형님은 군 복무 중 자살했다고 기록됐다. 의문사 중 하나다. 자살할 이유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고 야학을 통해 한글을 익힌 정도였다.
김진수 긱섬 대표의 학창시절 모습이다. 김 대표 제공
그래서 부모님은 막내인 나에게 많은 기대를 거셨다. 내가 다닌 마읍초등학교는 총학생 수 200여명, 학년별 학생 수 30명 남짓한 작은 학교였다. 졸업생 10명 중 1명만 중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동네 이장까지 지내셔서 세상 물정을 잘 알고 계셨고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나를 중학교에 진학시키기로 했다.
당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만 삼척중학교에 지원했다. 나는 붙을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삼척중학교에 지원하기를 원했다. 떨어질지 모른다는 내 걱정과는 달리 입학 성적 상위 30% 안에 들면서 나는 여섯 반 중 두 번째 특수 반에 들어갔다.
내가 삼척중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우리 집 재산인 논과 소를 팔아서 삼척에 방 세 개짜리 집을 사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삼척에서 친구와 사촌 등 4명을 보살피도록 했다. 내 중학교 생활을 위해 뜻하지 않게 두 분께서 따로 생활하시게 된 것이다.
삼척으로 이사 온 그해 겨울, 가난해서 배추 살 돈이 없었던 어머니는 동네에서 김장하고 버린 배추를 주워 김치를 담그셨다. 얼어붙은 배춧잎으로 담근 김치는 질겼지만 내게는 그 어떤 김치보다 맛있었다. 거기에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헌신과 자식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나는 추운 겨울을 따듯하게 보낼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3) 한국전력 입사 목표로 삼척공전 입학… 첫 신앙생활 시작
대학 진학보다 기술 익히기 위해
5년제 특수직업학교 전기과 입학
교회 방문 후 하나님 궁금해져
신앙생활 가지며 대학 편입 결심
김진수(원 안) 긱섬 대표가 고교 시절 삼척제일교회 친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학창 시절 나는 키가 작은 편이었고 운동을 싫어하는 조용한 아이였다. 체육 시간이 되면 대부분 학생은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가 놀았고 누군가는 남아서 교실을 지켜야 했다. 나는 교실에 남는 것이 좋아 그 역할을 자처했다. 그렇기에 내가 반 학생들을 이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중학교 때 별명은 ‘보바대학총장’이었다. 보바란 바보를 거꾸로 한 말이다. 그랬다. 나는 바보대학총장이었다.
그 별명이 붙은 이유는 이렇다. 중3 때 과학 수업 시작 직전이었다. 한 친구가 다가와 말했다. “진수야, 담임선생님이 너를 찾는다. 어서 교무실로 가봐.” 나는 곧 수업이 시작되는 줄 알았음에도 친구의 말을 듣자마자 교무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는 너 안 불렀는데”라고 답했다. 친구에게 속은 것을 뒤늦게 안 나는 서둘러 교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수업은 시작된 후였다. 과학 선생님과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집중됐다. “너 왜 수업에 늦었어?”
과학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그 자리에서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보바대학총장’이 됐다. 그렇게 친구들 사이에서 생활하다 조용히 중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특수 직업학교인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삼척공전)에 입학했다. 당시만 해도 가정환경이 어려워 대학 진학에 어려운 학생들이 이 학교에 많이 진학했다. 공업고등학교 3년 과정과 전문대 2년 과정을 통합한 5년제 학교였다. 기술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립한 특수학교로 등록금은 일반 고등학교보다 적었다. 나는 이 학교의 전기과에 입학했고 한국전력에 입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삼척공전 2학년 때 나는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기독교를 처음 접한 건 삼척공전 입학 첫해였다. 동아리 소개가 이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기독교 학생회였다. 매일 아침 수업 시작 전, 기독교 학생회 소속 학생들은 교실을 방문해 참석을 권하곤 했다. 그런데 당시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나는 그들이 올 시간에 맞춰 일부러 학교 옥상으로 피하곤 했다.
이듬해 여름 중학교 친구가 다니는 성당을 방문했는데 그때를 계기로 내 안에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계속 성당에 다니기엔 집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래서 같은 반 친구가 다니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나갔다. 그 친구는 모범적이며 성실했다. 나는 친구가 믿는 하나님이 궁금했다. 친구에게 교회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삼척제일감리교회에서 첫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짖으면서 대입을 시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최소한 시도는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 편입의 꿈이 움트기 시작했다. 공전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편입의 뜻을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단호히 선을 그으셨다.
“안 된다. 우리 집 형편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들어간다 해도 비싼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할 거냐.”
“아버지, 첫 편입학금만 도와주세요. 이후부터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대학을 졸업할게요. 번데기 장사라도 할 자신 있어요.”
***[역경의 열매] 김진수 (4) 학업과 직장 병행 문제로 고민 “하나님 인도해 주세요”
매일 10시간 영어 공부 매달린 끝에
바라던 인하대학 전기과 3학년 편입
한전 입사 시험에도 합격해 1년 휴학
김진수 긱섬 대표가 삼척제일교회 교회학교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 대표 제공
삼척공전학교에서 일주일에 한두 시간밖에 영어를 배우지 못한 까닭에 내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나는 하루 10시간 이상씩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방학 동안에도 학교에 가서 텅 빈 교실에 앉아 밤 10시까지 영어를 파고들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공부하다가 자정을 넘기는 바람에 야간 순찰대에게 발각될까 봐 뒷골목으로 귀가한 적도 있었다. 집 근처에는 공립도서관이 있었는데 책 열람실과 독서실로 분리돼 있었다. 아침 일찍 잘 잠겨지지 않은 도서관 창문을 통해 도서관으로 들어가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도서관 직원이 출근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도둑공부를 하기도 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삼척공전 졸업과 동시에 인하대학교 전기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런데 막상 편입학 시험에 합격하고 보니 입학금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당시 입학금은 아버지께서 감당하시기에는 큰돈이었다.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누님과 친구였다. 누님은 당시 요긴한 곳에 쓰려고 정기적금을 들었는데 만기일을 몇 달 앞두고 해지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편입학금을 보태줬다. 그리고 직장생활 하던 친구가 돈을 빌려주었다.
편입학 시험을 볼 즈음 나는 한국전력에 입사시험을 치른 끝에 1차 실기시험에 합격한 상태였다. 최종 합격할 경우 연수원에서 합숙 생활하면서 4개월간 기술연수 기간을 거쳐야 했다. 학업과 직장을 병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국 한전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고 1년간 휴학하기로 했다.
1977년 5월, 한전 연수원에 입소했다. 전국 각지에서 소집된 신입사원들과 함께 생활했다. 나는 인천 지역으로 발령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연수 기간이 끝날 무렵, 신임 근무지는 자신의 본적지 위주로 발령이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본적지는 삼척, 학교는 인천. 두 곳은 극동과 극서였기에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천 발령을 받아야만 했다.
내가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인도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나는 연수원의 교수님 한 분께 자초지종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마침 기독교인이었던 교수님은 나를 돕기를 원했지만 능력의 한계가 있으시다면서 연수원 부원장님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기도한 후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부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기도했는데도 가슴이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는 학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부원장님의 질문에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듣던 부원장님은 흔쾌히 허락했다.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고 했다. 그러나 그 문을 두드리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고 하나님은 그 용기를 허락하셨다.
그 후 나를 잘 알던 한 친구가 어떻게 그런 용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사실 나에게서 용기가 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두려움을 넘어 행동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부원장님의 도움으로 1차 발령은 서울전력소로 났다. 다시 처음 부탁했던 교수님의 도움으로 학교와 가까운 서울전력소 산하 인천 부평변전소로 발령을 받았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5) 변전소 보수원으로 첫 발령… 휴학 마치고 대학 복학
낮에는 일하고 밤엔 학교서 공부
평소 좋게 봐주신 소장님 배려로
학교 가까운 변전소로 옮기지만
일요일 근무로 주일성수에 차질
김진수(오른쪽) 긱섬 대표가 1978년 한국전력 인천 부평변전소에서 동료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한국전력 인천 부평변전소 보수원으로 첫 발령을 받은 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때는 말단 직원이었기에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드디어 1년간의 휴학 기간을 마치고 인하대 전기과에 복학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가 공부했다. 무엇보다 내 힘으로 자금을 마련해 대학에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내 모습을 좋게 봐주신 부평변전소 소장님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소장님은 내게 비교적 자유 시간을 많이 보장해주셨고, 학교와도 가까운 인천변전소에서 근무하도록 도와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있어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주말 근무였다. 전력소 보수원으로 일하다 보면 때때로 적지 않은 일요일(주일)에도 근무를 해야만 했다. 정기적인 사고 방지 보수작업은 전력 수요가 줄어드는 일요일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일요일에 교회 가는 건 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어떤 일이 발생해도, 무슨 일이 생겨도 주일에는 교회를 가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신앙관이었다. 그래서 주일날 일하는 것에 대해 나는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교회를 포함한 단체와 기업, 가정이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받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일요일에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누군가의 희생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일요일에 희생함으로써 교회와 같은 많은 장소에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고 교회는 주일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을 일방적으로 또 단편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주일에 하는 일도 소중하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에서는 합리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상대방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것 또한 피해야 한다는 교훈을 이때 배웠다.
사실 나는 지능지수가 높지 않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중학교 시절 난 처음으로 내 지능지수에 대해 알게 됐다. 그 수치가 평균보다 낮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결괏값이 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4년제 대학교인 인하대 편입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대학 3학년 때 지능지수를 재검사했다. 그러나 테스트를 마친 후 나는 시험 과정을 치렀던 스스로에게 매우 실망했다. 결국 그 결과를 보지 않기로 결정했다. 괜히 결과를 알고 실망하는 것보다 차라리 모른 채 현실에 충실하면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어쩌면 중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능지수가 평균치 이하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지능지수가 오늘날의 내가 있기까지 장애물로 작용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려 했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생각하려 노력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다시 한번 생각하려 했다. 그래서 평균보다 낮은 지능지수는 오히려 나에게 이득이 됐다고 고백한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6) 대학원 도전 실패로 실망… SCADA부서 전산요원에 뽑혀
대학교수의 꿈 안고 일과 공부 병행
대학원 응시했지만 낙방의 고배 마셔
실패 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컴퓨터 지식 없지만 전산요원에 응시
김진수 긱섬 대표가 한국전력에서 근무할 당시 모습. 김 대표 제공
대학에서 나는 한 분의 교수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다. 그분은 가르치고자 했던 내용을 깊이 알고 계셨고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 또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 중 한 분이셨다. 나는 그분과 같은 실력 있는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198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대학교수의 꿈을 안고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공부에 더 박차를 가했다. 퇴근하면 독서실이라는 사설 공부방에서 대학원 진학 준비에 전력을 쏟았다. 취침도 그곳에서 해결했다. 잠을 청할 때는 침낭을 이용해 침대를 대신했다. 다리를 책상 밑으로 뻗어야만 겨우 잘 수 있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5~10명 정도가 함께 공부하며 지냈다.
그런 환경 속에 지내다 보니 제일 큰 문제는 몸이 아프면 편히 쉴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한번 심한 몸살감기에 걸렸다. 땀을 푹 내고 쉴 만한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여관방에서 신세를 져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잠을 줄이면서까지 일과 공부를 병행했던 노력은 오간 데 없어졌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응시했다가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세 번은 서울대 대학원에 응시해봤지만 결과는 역시나 허사였다. 아무래도 실력이 부족했던 탓이 크다.
대학원 도전에 실패해 실망하고 있었던 1982년 봄. 나는 근무 회사인 한국전력의 변전소를 원방에서 감시하는 컴퓨터 시스템 스카다(SCADA) 부서에서 전산요원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직장 동료의 친구를 통해 들었다. 이는 원거리에 있는 설비들을 집중 감시하거나 제어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설비 및 계통의 합리적 운용 및 효율적인 에너지 관리를 가능케 하는데 컴퓨터를 잘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대학에서는 전기공학만 공부했다.
그러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전산요원 선발에 응시했고 그렇게 전산요원에 선발되는 행운을 얻게 됐다. 그리고 이 사건은 훗날 내 인생에 있어 커다란 한 획을 긋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새로운 일에 첫발을 내디딘 나는 컴퓨터에 깊이 빠져들었다. 온종일 프로그램을 분석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작업은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인생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일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러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렇다고 지난 9년 동안 내가 전기공학도의 길을 걸었던 것을 결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았다면 결과가 없더라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낭비 같은 실패가 새 시작이 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전기공학에서 컴퓨터공학으로 바꾼 그때 내 나이는 25살이었다. 많은 사람이 학교에서 배운 학문에 대한 미련으로 길이 막혔음에도 새로운 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내 경험에 의하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의 70%는 써먹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한 해 동안 열심히 하면 다른 사람과 같이 되고 3년만 열심히 하면 전문가가 되는 법이다.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이 있는지를 보고 새 길이 나오면 그 새 길로 가면 된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6) 대학원 도전 실패로 실망… SCADA부서 전산요원에 뽑혀
대학교수의 꿈 안고 일과 공부 병행
대학원 응시했지만 낙방의 고배 마셔
실패 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컴퓨터 지식 없지만 전산요원에 응시
김진수 긱섬 대표가 한국전력에서 근무할 당시 모습. 김 대표 제공
대학에서 나는 한 분의 교수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다. 그분은 가르치고자 했던 내용을 깊이 알고 계셨고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 또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 중 한 분이셨다. 나는 그분과 같은 실력 있는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198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대학교수의 꿈을 안고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공부에 더 박차를 가했다. 퇴근하면 독서실이라는 사설 공부방에서 대학원 진학 준비에 전력을 쏟았다. 취침도 그곳에서 해결했다. 잠을 청할 때는 침낭을 이용해 침대를 대신했다. 다리를 책상 밑으로 뻗어야만 겨우 잘 수 있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5~10명 정도가 함께 공부하며 지냈다.
그런 환경 속에 지내다 보니 제일 큰 문제는 몸이 아프면 편히 쉴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한번 심한 몸살감기에 걸렸다. 땀을 푹 내고 쉴 만한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여관방에서 신세를 져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잠을 줄이면서까지 일과 공부를 병행했던 노력은 오간 데 없어졌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응시했다가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세 번은 서울대 대학원에 응시해봤지만 결과는 역시나 허사였다. 아무래도 실력이 부족했던 탓이 크다.
대학원 도전에 실패해 실망하고 있었던 1982년 봄. 나는 근무 회사인 한국전력의 변전소를 원방에서 감시하는 컴퓨터 시스템 스카다(SCADA) 부서에서 전산요원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직장 동료의 친구를 통해 들었다. 이는 원거리에 있는 설비들을 집중 감시하거나 제어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설비 및 계통의 합리적 운용 및 효율적인 에너지 관리를 가능케 하는데 컴퓨터를 잘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대학에서는 전기공학만 공부했다.
그러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전산요원 선발에 응시했고 그렇게 전산요원에 선발되는 행운을 얻게 됐다. 그리고 이 사건은 훗날 내 인생에 있어 커다란 한 획을 긋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새로운 일에 첫발을 내디딘 나는 컴퓨터에 깊이 빠져들었다. 온종일 프로그램을 분석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작업은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인생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일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러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렇다고 지난 9년 동안 내가 전기공학도의 길을 걸었던 것을 결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았다면 결과가 없더라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낭비 같은 실패가 새 시작이 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전기공학에서 컴퓨터공학으로 바꾼 그때 내 나이는 25살이었다. 많은 사람이 학교에서 배운 학문에 대한 미련으로 길이 막혔음에도 새로운 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내 경험에 의하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의 70%는 써먹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한 해 동안 열심히 하면 다른 사람과 같이 되고 3년만 열심히 하면 전문가가 되는 법이다.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이 있는지를 보고 새 길이 나오면 그 새 길로 가면 된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7) 4개월간 미국 기술연수 후 “나도 할 수 있다” 자신감
연수 동안 컴퓨터에 대해 배우면서
이 분야 더 깊이 연구하고 싶어져
틈나는 대로 미국 유학 준비 병행
스티븐스 공과대학 입학 허가 성공
김진수(오른쪽 첫 번째) 긱섬 대표가 1984년 미국 플로리다주 해리스사에서 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김 대표 제공
컴퓨터 일을 워낙 좋아하고 거기에 몰입하다 보니 주변의 다른 직원들에 비해 일의 성과 면에서 점차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한국전력 연수원에서는 해외 기술연수 준비과정의 하나인 영어 연수과정이 있었는데, 회사 부장님은 나를 추천했다.
1984년 나는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해리스(Harris)사에서 4개월간 기술연수를 받는 행운을 얻었다. 언어장벽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나는 컴퓨터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곳의 직원들은 기술유출을 우려했는지 우리를 경계하는 눈길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기술 연수는 내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고 한 단계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했다. 연수를 받는 동안 컴퓨터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학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험은 우리 인생에 있어 중요하다. 그것이 새로운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내게 미국 기술연수가 없었다면 아마 미국에 이민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술연수 기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함께 연수를 받은 동료들과 미 서부를 관광하기로 했다. 우리는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었기에 플로리다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이틀 동안 밤낮을 달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른 두 명의 직장동료와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그 당시 나는 신용카드가 없어서 현금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를 분실하지 않기 위해 몸에 간직하고 다녔다. 내 딴에는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고안해낸 숨길 만한 장소가 바로 신발 밑창이었다. 현금 400달러를 휴지로 감싸서 밑창에 단단히 숨겼다. 그래도 나의 불안은 사라질 줄 몰랐다. 수시로 몰래 숨겨놓은 돈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LA를 떠난 지 약 두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작은 마을에 들렀다. 그때 나는 밑창에 넣어둔 돈을 꺼내어 사용하기 편하도록 잠시 바지 주머니로 옮겼다. 점심을 먹은 후 쓰레기를 치우면서 나는 호주머니에 든 잡동사니를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곳을 출발한 후 두세 시간이 지나서야 문득 휴지에 쌓인 내 비상금이 떠올랐다. 순간 난감했다. 혼자라면 차를 되돌려 가기라도 하겠지만 일행과 동행하고 있던 상황에 차마 돌아가자는 제안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내 어리석은 행동을 그들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사건은 타인을 향한 불신으로 인해 내가 판 함정에 내가 스스로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 좋은 경험이 됐다.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심한 것이 불찰이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기술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내게 부산전력관리본부에 새로 들어오는 스카다(SCADA) 시스템을 설치하는 업무가 내려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공급회사에 고액의 비용을 내면서 설치했기 때문에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 설치 작업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한 달간의 고생 끝에 나는 시스템을 제대로 설치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자신감을 갖게 됐다. 패기에 찬 젊은 내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지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회사에 첫 보답을 한 셈이었다.
한국전력으로 복귀한 후로도 나는 스카다 시스템 분야에서만큼은 최고 기술자가 되기 위해 여전히 박차를 가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겠다는 목표 아래 유학 준비도 병행했다. 2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스티븐스 공과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8) 가족 모두에게 시련과 고통 준 미국 유학 생활
기숙사 생활로 부득이 가족과 별거
아내는 생선가게서 12시간씩 노동
아이는 엄마 기다리다 지치기 일쑤
언어와 금전적 문제도 고충에 한몫
김진수 긱섬 대표가 1986년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사진은 김 대표의 아내와 아들이 뉴욕 지하철에서 함께 있는 모습. 김 대표 제공
1986년 8월 15일 나는 아내와 다섯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 존에프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앞에 펼쳐질 새로운 삶에 대해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당연히 우리 가족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 줄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부득이하게 아내와 아들은 장모님 댁에, 나는 학교 기숙사에 살았다. 주말이 되면 나는 빨랫감을 가방에 챙겨 들고 대중교통을 몇 차례 갈아타고 2시간에 걸쳐 아내와 가족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이면 다시 가족을 떠나 일주일 치 식량을 준비해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런 생활을 1년간 이어갔다.
예상을 벗어난 힘든 미국 생활은 내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럴수록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내와 아들에게 당당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아내는 생선 가게에서 12시간씩 일을 해야 했고 난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유치원을 다니던 어린 아들은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잠에 빠지기 일쑤였다. 한국어를 거의 사용할 기회가 없다 보니 1년이 지나자 한국어를 대부분 잊기도 했다. 가족 간의 대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가족 모두에게 시련의 시간이요 고통의 시간이었다.
또 외국어도 하나의 고비였다. 영어로 대학원 강의를 수강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인이 돼 외국어를 접해본 사람들은 그 고충이 얼마나 큰지 능히 짐작할 것이다.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아서 강의를 기록하는 데 치중하다 보면 내용을 놓치기 일쑤였다. 듣기에 집중한다 해도 어차피 이해하기도 어려우니 어느 쪽이든 난관에 봉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칠판에 기록된 강의 내용을 일일이 노트에 기록하던 시절이었다. 영어로 강의를 듣는 게 어설픈 수준이라 수업이 끝나면 쉽게 연결되지 않는 수업 내용 때문에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는 마치 졸면서 영화를 보는 것과 유사하다. 영화가 끝나도 이야기가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 결국 학교 도서관에서 그 연결 작업을 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침에 도서관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갔다가 도서관 문을 닫는 새벽 1시가 돼야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다. 미국 유학의 기회를 잡기는 했지만 나는 그때까지 몸 바쳐 일하던 한국전력에 사표를 제출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미국에서의 꿈이 좌절될 경우를 대비해 일단 2년 동안 휴직하기로 하고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이 같은 우유부단한 결정으로 퇴직금이 훗날 절반으로 삭감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2년 후 석사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한전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 당시 월급은 기본급과 수당급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둘 다 거의 같은 금액이었다. 퇴직금 규정은 퇴직 시점에서 이전 6개월의 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잡고 있었다. 휴직했기에 월급을 수령하지 않아 기본급만을 기준으로 퇴직금을 받았다.
나는 이미 미국에 있었고 영주권도 없는 상태여서 귀국할 수도 없었다. 회사의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절반으로 줄어든 퇴직금을 받았다. 미지의 세계에 도전할 때 생길 수 있는 위기는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너무 안정을 고려해 소심하게 행동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9)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에 빠져 3학기만에 석사 학위
늦은 나이 석사 과정 시작했기에
1학기 당겨 마치겠다는 목표 세워
성적도 한번 제외하곤 모두 만점
김진수 긱섬 대표가 스티븐스 공과대학 대학원 시절 살다시피 했던 도서관의 현재 모습. 대학 홈페이지 캡쳐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직업 이전에 내겐 취미였다. 나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깊이 빠져들었다. 교수가 프로젝트를 배정해주면 되레 신바람이 났다. 나는 곧바로 프로젝트에 착수해 대부분 마감 일주일을 앞두고 마쳤다. 점수도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만점을 맞았다. 그 한 번도 답안이 틀려서 점수가 깎인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에 충분한 설명이 누락됐다는 이유로 20점 만점에 19점을 받은 것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보내도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한 학기가 지나가버렸다. 첫 학기는 네 과목 모두 A학점을 받았는데 그 성적은 내 학교 생활을 통틀어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 그대로 성적에 반영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두뇌가 좋은 사람은 1등을 한다. 이 이야길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상위권에는 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학교 생활에서 1,2등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상위권에는 대부분 들었다. 삶은 벼락치기가 아니라 오픈북이다. 학교에서는 벼락치기가 통하지만 삶에서는 벼락치기보다 꾸준한 노력이 통한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보통 4학기가 소요되는 석사 학위를 3학기에 마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석사 과정을 서른 살이 지나 시작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마치기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 좀 무리수를 두었다. 일반적으로 두 학기를 요구하는 과목은 가을 학기에 파트 1을, 봄 학기에 파트 2를 수강하도록 구성돼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수학 1을 1학기에 들으면 수학 2를 2학기에 들어야 한다. 그러나 세 학기 만에 학위를 마치기로 결심하니 졸업을 가을 학기에 하게 됨으로써 정상적으로 수업을 전부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담당 교수님께 두 번째 학기인 봄 학기에 두 과목을 들을 수 있도록 요청했다. 교수님은 특별히 허락해주셨고 오히려 파트 1을 수강하지 않고 곧 바로 파트 2를 듣도록 도와주셨다.
공부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주당 20시간씩 교수의 일을 도와주는 조교 일을 맡았다. 내가 할 일은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학사 과정에 있는 대학생들의 과제물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구직을 준비했다. 구직에 필수적인 컴퓨터 언어 중 하나인 C언어를 독학으로 배우는 것이었다. C언어는 석사 과정이 아닌 일반 학부 과정에서 배우는 과목이다. 하지만 나는 학부 과정이 컴퓨터공학이 아니라 전기공학 이었기에 C언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취직을 위해서는 반드시 C언어를 알아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에 나는 모든 프로그래밍 프로젝트를 C언어로 수행키로 했다. 물론 C언어는 독학해야 했다. 그래서일까. 내 성적은 첫 학기에 비해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3학기 내에 석사 학위를 마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여름학기에 한 과목을 더 들어서 나는 3학기만에 석사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10) 아내의 반대로 박사과정 포기하고 프로그래머로 취직
교수가 꿈이라 박사 과정 원했지만
가족 생활에 대책 없이 고집한다면
귀국하겠단 아내 불만에 취직 결정
김진수(왼쪽) 긱섬 대표가 박사 과정을 접고 LRS사에 취업했다. 사진은 한 전시회에서 김 대표가 설명하고 있는 모습. 김 대표 제공
공부를 하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바로 질문의 중요성이다. 그래프 이론이라는 강의를 담당했던 교수로부터다. 교수님은 프로그램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질문만 잘하면 필기시험과 무관하게 A학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프로젝트에 열중했다. 최소 5회 이상 연구실을 방문해 프로젝트에 관해 질문했다. 물론 질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현명한 질문을 통해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까다롭고 어려운 프로젝트였음에도 나는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학기말 시험은 적지 않게 실수했다. 성적표를 받아 보니 B학점이었다. 프로젝트만 잘하면 A학점을 주겠다는 교수님의 말과 달랐다.
나는 교수님을 찾아가서 학점을 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교수님은 그 자리에서 A학점으로 정정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서 질문의 중요성을 느꼈다. 나는 질문을 통해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그 교수님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교수님과의 개인적 유대관계도 더 돈독히 다질 수 있었다. 질문한다는 건 상대방의 실력을 인정하고 그를 존중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교수가 꿈이었기에 박사 과정을 원했다. 2학기를 마치고 아내에게 계획을 말했다. 그러자 아내는 반대했다. 가족의 생활을 해결하는 방안 없이 박사 과정을 고집한다면 자기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지난 1년간의 생활이 그만큼 아내를 힘들게 만들었다. 아내의 반대로 나는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취직하기로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박사 과정 포기는 좋은 결정이었다. 만약 박사 과정을 고집했다면 교수는 됐을지언정 사업가는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큰 꿈을 꾸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그 꿈이 현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물거품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그렇기에 때때로 꿈을 포기하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취직을 결단하고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영주권도 없는 데다 언어 장벽까지 겪고 있는 상태에서 취직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석사 과정 마지막 학기를 시작할 때 회사 50여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대부분 면접조차 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 뉴저지주 스파타라는 작은 시골에 있는 LRS라는 회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창업한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회사로 전 직원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처음부터 크고 안정된 회사에 취직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작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도 장점이 있다. 첫째는 어떤 한 분야만 아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노력의 대가가 즉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크고 안정된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면 나중에 그 회사의 중역은 됐을지 몰라도 훗날 회사를 창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능성이 있는 회사에 취직하라. 근사한 회사와 좋은 회사는 다르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11) 하루 15시간 일에만 몰두… 열심히 일한 노력 인정받아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고
저녁 먹고 자정까지 두 배 이상 근무
6개월 후 면담 통해 연봉 인상 받고
4년 후엔 8만 달러까지 크게 인상
김진수 긱섬 대표가 아들과 함께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나는 졸업하기 두 달 전부터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회사는 가능한 이른 시일 내에 일을 시작하기를 원했다. 나도 그랬다. 무엇보다 내게는 가족을 부양할 직장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3시간씩 운전하며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가는 바쁜 시간이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피곤한 탓에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졸기 일쑤였다.
석사과정을 마침과 동시에 나는 직장 부근에 침실 하나와 부엌과 거실이 붙은 스튜디오에서 월세를 살기 시작했다. 일에 몰두했다. 아침 7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한 뒤 저녁 8시에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밤 12시까지 일했다. 토요일도 없었다. 하루 15시간, 주당 일반인보다 두 배 이상을 일했다. 이런 생활을 거의 2년간 계속했다.
내 연봉은 2만 5000달러에서 시작했다. 당시 석사 학위 소지자치고는 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봉급이 아니라 직장이었다.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도 일할 수 있는 직장이 먼저 필요했다. 그리고 6개월 후 봉급을 재조정한다는 조건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주는 봉급보다 훨씬 많이 일했다. 6개월이 지난 후 봉급 재조정 협상에서 매니저는 사장에게 내 연봉을 3만 달러로 인상해줄 것을 건의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내게 사장과의 직접 면담을 통해 연봉 인상을 요청해보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매니저의 권유대로 나는 사장과의 면담을 통해 연봉 3만 달러를 제시했지만 사장은 그 중간선인 2만 8000달러로 제안했다. 나는 사장에게 “사장님은 제가 왜 그동안 매일 15시간씩 일한 줄 아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사장은 “회사에서 오버타임도 주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일했는가” 하고 말했다.
“저는 이 회사에 프로그래머로 고용됐습니다. 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매일 15시간씩 일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 일을 충분히 한다고 생각합니다. 3만 달러로 올려주십시오.”
사장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연봉을 3만1000달러로 인상해 주고 6개월 후 다시 봉급 조정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열심히 일한 노력의 결과는 매년 봉급 인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4년 후에는 8만 달러가 됐다.
많은 사람이 회사에서 주는 봉급 이상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마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회사도 일한 것 이상 봉급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회사도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더 많은 봉급을 받기 원한다면 봉급 받는 만큼만 일해서도 안 된다. 먼저 손해를 보지 않고 처음부터 이익을 보는 것은 없다.
또한 많은 사람이 회사 일과 개인 생활의 균형을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나처럼 뒷배경 없이 불균형하게 시작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이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면 안 된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삶을 희생하면서 성공하는 사람들에게 공평하지 못하다. 회사 일에 치우친 나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분명히 없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12) 신입사원 시절부터 주인의식 가지고 맡은 일에 최선
중요한 프로그램 개발 사업 따냈지만
온전히 나에게 맡기긴 위험부담 높아
컨설팅 회사 직원과 함께 일하는 도중
혼자 처리할 수 있으니 맡겨달라 요청
김진수 긱섬 대표가 근무했던 LRS 회사 건물. 2층의 일부만 연구실로 사용했다. 김 대표 제공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주인의식이란 주인과 같이 생각하고 주인과 같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을 가진 자만이 주인이 될 수 있고 주인이 됐을 때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다.
미국 LRS 회사에 입사한 지 6개월쯤 되던 무렵이었다. 회사는 중요한 프로그램 개발 사업을 고객으로부터 따냈고 그 일을 마치기 위해 컨설팅 회사를 선택했다. 당시 초보인 나에게 그 사업을 온전히 맡긴다는 것이 회사 차원에서는 위험 부담이 높아 컨설팅 회사에 의뢰한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컨설팅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사업에 관한 일을 하면서 그들로부터 기술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 회사와 함께 일을 시작한 지 2주일이 지난 후 나는 혼자서도 그 사업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직속 상사에게 컨설팅 회사에 대한 비용 지불 방법을 물었다.
만약 시급제라면 나 혼자서도 능히 처리할 수 있으니 내게 맡겨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 컨설팅 회사와 함께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시급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사에게 그 사업을 나에게 맡겨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그 일을 맡아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나는 당시 한낱 고용인에 불과했고 단 한 주의 회사 주식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직원을 발견한다. 그들은 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인처럼 생각하고 일한다. 신입사원 시절 나 자신도 주인 같은 자세로 최선을 다했기에 오늘날 주인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라고 믿는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게 되면 일을 해도 피곤한 줄 모른다. 가끔 미국 프로골프 선수들의 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관람한다. 한번은 구경꾼들과 같이 몇 홀밖에 걷지 않았는데 벌써 다리가 아파지고 피곤해졌다. 내가 골프를 칠 때는 무거운 골프 가방을 등에 지고 18홀을 마쳐도 별로 피곤한 줄 몰랐는데, 이상하게 구경만 하는 데도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게임은 그들의 게임이었지 나의 게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인의식은 그들의 게임을 나의 게임으로 만들어준다.
대부분 사람은 자기가 주인의식을 가졌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성공한 후에서야 자기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해 왔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주인의식 자체가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습득된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성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인처럼 열심히 일했는데도 주인이 알아주지 않으면 나만 손해 보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만약 주인이 당신의 노력을 몰라주면 당신이 주인이 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러나 주인의식이 없으면 주인이 될 수 없다. 당신에게 주인의식이 있는지 여부를 점검하는 방법이 있다. 만약 지금 당신이 주어진 일만 하고 있다면 주인의식이 없는 것이다. 주인이라면 일이 계속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13) 회사 그만두고 미국 뉴저지주에서 사업 시작
자본도 없고 경영 지식도 없었지만
자신감만으로 퇴사하고 회사 설립
한국의 기업으로부터 큰 수주 기대
다른 회사로 넘어가 처음부터 곤경
김진수 긱섬 대표는 1992년 8월 미국 뉴저지주에 이미지솔루션스(ISI) 회사를 설립했다. 사진은 당시 회사로 사용했던 그의 주택 모습. 김 대표 제공
내가 일하던 LRS사는 장래의 성장과 자금조달을 위해 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그러나 상장회사가 되면서 회사 분위기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매 분기 실적에 치중했고 이에 직원들의 불만도 높아가기 시작했다. 또 주식을 배당해줄 것처럼 말하던 일도 없던 일이 돼버렸다.
사업을 시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 어떤 여건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자본도, 경영지식도 없었다. 하지만 모르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기회는 때가 있다. 그때를 놓치면 기회가 다시 오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만약 사업에 실패할 경우 내가 가진 기술이면 재취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업에 앞서 나는 회사 부사장에게 먼저 계획을 알렸다. 그는 내게 계속 직장에 다니면서 개인 사업을 준비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너무 안전만 고려해서는 안 된다. 배수진을 쳐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일을 하려면 200%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1992년 8월 20일 나는 미국 뉴저지주에 이미지솔루션스(ISI)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라고 해봤자 우리 집 2층 방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한국에 있는 한 대기업으로부터 제법 큰 프로젝트가 수주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가 맡기로 했던 프로젝트가 다른 회사로 넘어가는 바람에 내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처음부터 곤경에 빠졌다.
창업한다는 것은 광야의 삶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다. 퇴로가 막힌 홍해를 건넜다는 이야기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다음엔 아마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돌아갈 길이 없어진 것이었다. 육로로 왔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만 바닷물이 갈라졌기에 그렇다. 나 역시 돌아갈 길 없는 홍해를 건넌 셈이다. 이제는 광야에서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창업한 회사와 대기업은 큰 차이가 있다. 대기업은 철저하게 계획하고 그 계획을 실천한다. 그런데 창업 기업은 그렇지 않다. 많은 것이 계획한 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철저한 계획이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발생한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일은 벌어지게 돼 있다. 그것이 계획한 일이든 계획하지 않은 일이든 상관없다. 시작하기로 할 땐 완벽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어느 정도 확신만 생기면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싶으셔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믿음은 일단 움직이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14) 열심히 일했지만 재정 바닥 나 “하나님 도와주세요”
기도드린 지 이틀 만에 전에 근무하던
회사 문제 해결하고 컨설팅 제공 시작
한 독일회사의 프로그램 개발 요청에
컨설팅 그만두고 개발에 전력
김진수(오른쪽 두 번째) 긱섬 대표가 이미지솔루션스(ISI)를 설립하고 개업 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대표 제공
시간이 갈수록 그동안 저축해둔 돈이 바닥났다. 나는 당시 재물을 위해 기도하는 건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리고 주위에 돈을 잘 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노력하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라 단정하기도 했다. 노력의 결과가 확실히 나타나는 미국 직장에서의 경험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을 접하면서 비로소 너무 일방적인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놀랍게도 그 기도를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전에 근무하던 회사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큰 문제가 발생했는데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와서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곧 해결됐다. 그러자 회사는 나에게 다시 복귀하기를 권했다.
나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대신 그 회사에 컨설팅을 제공하기로 했다. 컨설팅을 시작했지만 시간당 얼마를 요구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1시간당 70달러를 요청했고 회사는 선뜻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 달이 지난 후 나는 그 액수가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 측에 시간당 50달러로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회사에서 먼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액수를 줄인 것이다.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컨설팅에 의존하며 생활하던 어느 날, 나는 한 독일회사를 통해 다모스(DAMOS)라는 단체에서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전에 일하던 회사에서 그 프로그램을 개발해주기로 했는데 다른 중요한 사업으로 그 약속이 계속 연기되고 있다고 설명했고 결국 경험이 있는 내게 그 작업을 요청한 것이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자 회사를 차린 만큼 나는 내가 하는 컨설팅 일을 그만두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 프로그램 개발에 들어갔다. 당장 자금이 필요했기에 나는 차후 개발할 상품 소유권을 그 독일회사가 소유하는 조건으로 10만 달러의 개발비에 대해 선불을 요청했다. 그러나 독일회사는 위험 부담을 지려 하지 않았다. 결국 프로그램 소유권은 내가 가지되 판매액의 절반씩을 각각 나누는 조건으로 계약했다.
사실 그 프로젝트를 통해 발생한 이익은 10만 달러를 훨씬 능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때 개발한 프로그램이 훗날 회사 발전의 초석이 됐다. 4개월간 개발에 전력을 쏟은 후 1993년 독일의 베를린으로 가서 그동안 진척 상황을 고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매우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고 이를 계기로 프로젝트 개발은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순풍에 돛단 듯 개발이 진행됐으나 갑자기 장애물이 생겼다. 내가 전에 일하던 회사의 변호사로부터 한 통의 경고장을 받은 것이다. 그 회사 취업 당시 작성한 고용 계약서에 ‘퇴사할 경우 고용일로부터 3년간 어떤 경쟁도 하지 않겠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독일회사의 의뢰로 착수한 프로그램 개발은 이 계약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15) 전 회사와의 계약 위반 문제로 법정 싸움까지
이전 회사가 개발 포기했던 프로그램
독일회사 요청으로 개발에 착수했지만
고용 조건에 위반된다며
받아들이기 힘든 일방적 제안하는데…
김진수(왼쪽) 긱섬 대표가 자신이 설립한 이미지솔루션스(ISI) 부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나는 이전 회사가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았던 관계로 독일회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개발에 착수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내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소하겠다고 협박했고 나는 협상을 원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까지 개발했던 프로그램을 전 회사에 보여주자 그들은 그것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의 제안은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방적 제안이었다. 프로그램의 원천인 소스코드를 그들에게 제공하고 판매 금액도 아닌 판매 이익금의 30%만 내게 주겠다는 것이다.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안을 거절하자 그들은 나를 고소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법정 싸움으로 번지게 됐다. 나도 변호사를 고용해 맞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임 변호사는 3년간의 무경쟁 고용 조건은 지나치지만 보편적인 조건은 대략 1~2년에 불과하다고 했다. 내 경우는 그 사건이 발생한 무렵 겨우 1년 반 밖에 경과되지 않았기에 내가 재판에서 불리하다는 내용이었다.
법원 출두 날짜가 1993년 8월 18일로 결정됐다. 이제는 하나님께 모두 맡기고 기도하는 길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소환일 이틀 전에 전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옛 동료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 회사가 당면한 복합적인 문제로 완전히 문을 닫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고소 건도 자동적으로 해결됐다.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 일이다. 전 회사가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이전에 같이 근무하던 부사장과 직장동료 한 명이 새로운 내 회사에 합류하기 원했다. 마침 내게도 자금이 필요한 상태였기에 합류하기를 원하는 그들로부터 1인당 1만 달러씩의 투자를 받고 나중에 회사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각각 25%의 회사 지분을 주기로 했었다. 그러다 전 회사가 나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밟기 시작하자 그들은 자기들이 소송에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나와의 계약을 해지하기 원했다. 그들은 회사 지분 할당은 없었던 일로 하고 돈은 꾸어준 것으로 하자고 했다. 나중에 빌렸던 돈은 그들의 요구대로 이자까지 포함해 모두 돌려주었다. 결론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전 회사와의 소송 건은 내 회사 지분 모두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셈이 되었다. 이후 이전 회사의 고객 중 일부가 나의 고객이 되었다. 그 회사가 완전히 문을 닫았기에 추후 고객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운도 좋았다.
회사가 이윤을 창출하면서부터 나는 세금 문제로 고민했다. 주위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세금을 제대로 내고는 돈 벌 수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회사 소득세 비율이 30% 이상이었기에 이익금 상당액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우리 회사는 C법인이라 회사 소득과 개인 소득을 하나로 합쳐서 세금 신고를 하는 S법인과는 달리, 개인 소득세는 물론 회사도 별도로 소득세를 내야 했다. 세무사는 수입을 전액 보고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16) 이미지 파일 변환 신기술 개발로 회사 규모 급성장
PDF 파일 포맷으로 신약 신청을
원하는 한 제약회사의 요청받은 후
이미지 파일 변환 기술 자체 개발
식약청 최초 전자 신약 신청 성공
김진수(왼쪽) 긱섬 대표가 신약 신청시 식약청에 제출하는 각종 서류 앞에서 촬영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제대로 비즈니스를 하고 싶었다. 출석하던 에리자베스한인교회 목사님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 그때 목사님은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장지 구입 이야기를 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자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소유지를 팔 것을 권했다. 에브론은 무상으로 주겠다고 했으나 아브라함은 정당한 대가를 주고 자신의 소유지로 만든 일화다.
나는 목사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회사는 이익이 나지 않으면 세금을 내지 않는다. 세금을 낸다는 말은 이익이 났다는 것이다. 세금을 많이 낸다는 것은 이익이 많이 났다는 이야기다. 빨리 이익 내는 것을 포기한다면 세금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약품을 허가하는 세계 각국의 식약청은 신약(新藥) 신청시 엄청난 양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한 약품을 개발하는데 소요하는 시간은 5년에서 10년 이상 소모되고 임상시험 자료를 포함한 관련 서류는 수십 만장의 분량에 이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식약청은 전자문서를 원했지만 어떤 문서 형식으로 제출해야 하는지를 놓고 유럽과 미국은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을 주축으로 한 유럽에서는 TIF 파일 형식을 선호했다. 반면 미국 식약청은 새로운 형식인 PDF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내가 처음 PDF 포맷을 알게 된 건 1994년 무렵이었다. 어도비(Adobe)사는 1993년 종이 서류를 대신할 전자 서류의 대안으로 PDF 파일을 선보였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했다.
그러나 이는 나의 사업에 있어서 중대한 위협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PDF 포맷이 이미 구축해 놓은 TIF 파일 포맷을 기본으로 한 이미징 프로그램과 경쟁하는 포맷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가운데 97년 노바티스 제약회사로부터 PDF 파일 포맷으로 식약청에 신약 신청을 하기를 원한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 프로젝트를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신기술 개발을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프트웨어는 스캔본의 이미지 파일을 PDF 파일로 변환시키는 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특히 수십만 장의 서류를 단시간에 변환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TIF 파일을 PDF 파일로 변환하는 기술을 자체 개발했다. 약 6개월이란 노력 끝에 회사는 20만장의 종이 서류를 PDF 파일로 전환시켰다. 그렇게 여섯 장의 CD에 저장해 미국 식약청 최초로 PDF 파일 포맷으로 된 신약 신청을 성료시켰다.
이 새로운 시도는 미국 식약청으로 하여금 종이문서 대신 전자문서로 신약 신청을 하도록 지침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1년 후 우리가 했던 최초의 PDF 파일 신약 신청은 미국의 스미스소니언협회로부터 98년 기술혁신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회사는 급성장을 탔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새로운 PDF 파일 포맷을 원했고 그 해결책을 우리 회사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97년 10명이던 직원은 1년 후 30명, 그 다음 해는 90명으로 증가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17) 경영학 공부하며 회사 운영과 리더십에 자신감 생겨
회사 급성장하면서 경영 미숙에서 나온 여러 문제 생기며 뒤처진 나 자신 발견
체계적으로 회사 경영 배울 필요 절감 스티븐스 공과대 경영학 석사과정 등록
김진수(왼쪽) 긱섬 대표가 스티븐스공과대학 졸업식에서 알렌 긴스버스 경영학 교수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회사는 급성장을 했지만 나 자신은 그 성장에 비례해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모두 경영 미숙에서 온 일들이었다. 나는 체계적으로 회사 경영을 배울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침 스티븐스공과대학에서 경력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개설된 특수 경영학 석사 과정에 바로 등록했다.
수업은 내 부족한 면을 충족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토요일에도 강의가 적지 않았고 여름 방학 기간에도 수업을 받아야 했다. 경영 지식이 많지 않다고 해서 사업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일단 사업을 시작했으면 이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지식은 꼭 습득해야 한다. 이 과정 없이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경영학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부족한 것을 배웠다. 나는 이를 회사에 즉시 적용했다.
회사 운영과 리더십에 조금씩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새롭게 배운 경우는 드물었다. 확신이 없었던 것들에 대한 확신을 심는 과정이었다. 사업 경영은 전혀 새로운 것을 하는 게 아닌 상식으로 하는 것이다. 상식은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
1999년 1월의 일이다. 회사는 미국 보스턴 아스트라(Astra) 회사의 합병에 따른 전자서류 변환 작업을 맡았다. 이는 그때까지 우리 회사가 수주한 모든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일이 마무리될 무렵 제품의 품질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주문받은 방대한 양의 일을 단시간 내에 처리하기 위해 갑자기 고용을 늘린 데다 기술도 제대로 습득시키지 못한 채 작업에 투입한 결과 문제는 여러 곳에서 노출됐다.
특히 문서 스캔에서 한꺼번에 두 장 이상 스캔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모든 서류를 다시 손으로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미 작업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라 더 이상 인원을 충당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비스 부서가 아닌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내가 그 일에 자원했다. 판매부와 프로그램 개발 담당자, 심지어 직원 가족들까지 자원자가 생겼다.
우리가 할 일은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각 서류가 몇 장으로 돼 있는지 수작업을 통해 세는, 매우 단순한 일이었다. 자정이 되면서 몰려오는 졸음과 싸워야 했다. 자정을 넘으면 몇 장을 세었는지 잊어먹고 다시 세기도 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팔을 걷어붙이고 밤낮으로 일하자 다른 직원들도 힘을 얻기 시작했고 그 프로젝트를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리더는 때로는 낮아질 수 있는 한 최대로 낮아져야 진정한 리더가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리더는 군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기에 자신이 편하려고 사업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리더가 되는 순간 편한 것은 포기해야 한다. 예수님은 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18) 회사 급성장 후 무리한 계획으로 최악의 상황까지
매출액 1억 5000만 달러, 이익률 30%
회사 중역과 향후 5개년 장기전략 수립
매출 없이 지출 늘어 100만 달러 적자
김진수(왼쪽) 긱섬 대표가 지인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1999년 회사 중역 간부와 향후 5개년 장기 전략을 수립했다. 회사의 급성장을 경험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5년 후 계획을 매출액 1억5000만 달러, 이익률 30%라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세부적인 전략 수립 없이 계획에 근거해 회사 자본을 지출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인터넷사업의 버블로 회사들이 비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야심에 찬 계획은 새 천 년이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벽에 부딪혔다. 계획했던 매출 희망은 보이지 않고 지출만 늘어나기 시작했다. 5개월이 지나자 누적된 적자는 1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은행의 신용 대출 액의 한계치에 도달했다. 불과 5개월 전인 99년 말까지 100만 달러 보너스를 직원들에게 지급했던 상황과는 사뭇 다른 최악의 상황이었다.
극약 처방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냉철한 현실을 접하고 직원의 10%를 감축해야 했다. 나를 포함한 회사 부사장의 봉급 인상분을 절반으로 삭감했다. 그리고 그동안 같이 일하던 영업 담당 부사장을 권고 해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회사가 필요한 희생을 원하지 않았다. 서로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은 피해를 보지 않겠다는 사람과는 같이 일할 수 없었다.
직원 모두 한 마음으로 노력한 끝에 연말 회사 운영은 점차 회복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회사의 급성장에는 많은 위험이 뒤따른다는 걸 깨달았다. 또 이 어려움을 통과하면서 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동안의 급성장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었다는 것임을.
어느 날 신명기 8장을 읽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전하여 주는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눈물이 터져나왔다. 나는 그때 좋은 집을 짓고 있었고 재산이 늘어나 있었다. 더구나 내가 이룬 성공이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할 때 나도 멸망할 수 있음을 예언했다.
회사의 급성장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PDF 파일 포맷 때문이었다. 그 아이디어는 내가 낸 것이었나. 아니다. 나는 TIF 포맷으로 가기를 원했으나 고객의 요청에 밀려 PDF 파일 포맷을 선택했다. 급성장이 나를 착각하게 했고 어려움이 비로소 나를 바로 보게 했다. 고난은 인생에서 필요하다. 우리 자신을 바로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만약 어려움 없이 계속해 잘 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에게는 어려움이 5년마다 다가왔다. 축복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19) 고객에겐 늘 정직… 당장 손해 봐도 신뢰로 보상
먼저 문제 인정하고 미리 보상도
정직은 단기적으로 손해 보지만
금전적 손해는 마음을 준다는 것
마음 받은 사람은 언젠간 돌려줘
이미지솔루션스(ISI) 직원들이 김진수 긱섬 대표의 자택에서 전략회의를 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우리 회사는 회사의 핵심 가치를 ‘정직 만족 기술혁신’으로 정했다. 그리고 정직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운영해왔다. 1999년 제약회사 ‘화이자’로부터 임상 서류를 전자 문서로 변환시키는 300만 달러 상당의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그 프로젝트는 당초 다른 경쟁 회사에 낙찰됐지만 품질 문제 때문에 우리 회사가 그 작업을 따냈다. 그러나 이번 프로젝트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선 기존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실수로 서비스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연이은 사태로 나는 고객을 직접 만나 문제의 발생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양해를 구했다. 회사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실수를 고객에게 사실 그대로 알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행동에 옮겼을 때 그 프로젝트 담당자는 되레 내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 후 무사히 프로젝트를 끝냈고 그때부터 화이자는 우리 회사의 최대 고객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 한번은 애보트 제약회사로부터 신약 신청 서류 변환 작업을 수주받았다. 이미 미 식품의약처(FDA)와 잦은 교류가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프로젝트 중간에 고객사로부터 회사가 처음 요구한 방법대로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의 실수 때문에 추가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소통이 안 돼 문제가 발생했다. 시간 지연으로 발생한 손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손실액에 해당하는 금액을 수표를 가지고 고객사에 방문했다. 우리 실수를 인정하고 수표를 전달하면서 프로젝트가 끝난 후 다음을 위해 리뷰 미팅 자리를 부탁했다. 그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한 적이 없었지만 우리가 먼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배상했다. 결국 그 이후 그들 또한 우리의 중요한 고객이 됐다.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문제에 대한 자세다.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만약 필요하다면 그들이 보상을 원하기 전에 미리 보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까지 정직하게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면 고객은 분명히 당신을 신뢰한다. 이것이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의 방법으로 플러스를 만드는 법이다. 손해가 그들이 우리를 신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정직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정직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직하다는 것은 단기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당장 손해를 보지 않고 정직할 수 없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는 것은 마음을 준다는 것이다. 마음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언젠가는 돌려주려고 한다. 정직에도 손익분기점이 있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3년 정도다. 3년 전에는 손해이지만 3년이 지나면 이익으로 돌아선다.
노력하는 것이 덧셈이라면 정직은 곱셈이다. 아무리 많은 수가 있어도 영(0)을 곱하면 영이다. 즉 그동안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쌓아 놓은 것이 있다 해도 정직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유명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경우를 보곤 한다. 능력이나 리더십이 없어서가 아니다.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20) 고객 만족과 직원 만족을 넘어 지역사회 만족까지…
고객사 방문 의견 듣고 고객과 친밀 유지
일대일 면담 통해 직원들 애로사항 파악
필요할 땐 문제해결… 직원도 섬김의 대상
이미지솔루션스(ISI) 직원들이 지역사회 아동시설에 방문해 봉사하고 있다. 김진수 대표 제공
회사의 핵심 가치 가운데 하나가 만족이다. 고객의 만족은 중요하다. 고객 없는 비즈니스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이란 고객에 머물지 않는다. 직원의 만족 역시 중요하다. 만족한 직원이 만족한 고객을 만든다. 지역사회의 만족 또한 염두에 뒀다.
내가 열심히 한 것 중에 한 가지는 고객 방문이었다. 고객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 제약회사였다. 그리고 대부분 영업사원은 백인이었다. 동양인의 얼굴에다 영어도 완벽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객을 방문했다가 혹시나 회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고객사를 방문해 내가 한 첫 이야기는 “여러분의 의견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십시오”였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됐다. 그들의 의견을 듣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잠언에도 말이 적으면 지혜롭게 보인다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긴급한 문제가 있으면 사장인 나에게 직접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고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고객에게 알렸다. 이 같은 방문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때때로 한계를 정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스스로 정한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는 목표를 확실하게 정하고 자신을 코너로 몰고 가는 일이다. 내가 내 시간 3분의 1을 고객 방문에 쓰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고, 또 그 목표를 부사장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고객 방문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원 목소리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 직원도 어찌 보면 내 고객이기 때문이다. 고객을 섬김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직원도 섬김의 대상이다. 마치 현재 내게 고사리와 송이버섯을 공급하는 원주민을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1년에 한 번씩 일인당 약 20~30분씩 일대일 면담을 했다. 회사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회사가 더 성장할 수 있을지 등 의견을 들었다. 면담을 통해 직원들의 애로사항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문제를 해결해줬다. 대부분 직원은 사내의 가족적 분위기를 잘하는 일이라 말했다. 직원 목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들은 후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하지만 듣는 것 자체로도 충분하다.
지역사회의 만족을 위해 회사 이익 10%를 기부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회사 선언문에다가 넣고 직원은 물론 고객에게도 알렸다. 한 고객이 내게 기독교인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회사 선언문 내용을 보고 짐작했다 했다. 이익의 10%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개인의 십일조가 쉽지 않듯 회사의 십일조 또한 쉽지 않다. 이 내용을 회사 선언문에 넣은 이유는 혹시나 내 마음이 나중에 변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가끔 개인적으로 기부 요청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는 기부 단체 선정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선단체 그레이스채리티재단을 설립했다. 나중에 회사를 매각하고 나온 일부 금액으로 선교와 교육을 돕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21) 또 한 번 재정적 위기… 긴축정책 펼쳐 3개월 만에 극복
고통 분담하기 위해 월급 40% 삭감 솔선
中 톈진에 현지인 15명 고용 지사 설립
큰 사업 성공… 3년 만에 직원 200명으로
김진수 긱섬 대표가 중국 지사 직원들과 개인 면담을 마치고 함께 사진을 촬영했다. 김 대표 제공
2005년 또 한 차례 회사의 위기를 맞이했다. 과도한 투자로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혔다. 프로그램 개발의 장기간 투자에 비해 이익이 발생하지 않은 데다 상대적으로 매출액이 적은 계절과 맞물렸기 때문이었다. 간부 회의를 소집해 긴축 정책을 논의했다. 사장인 나는 30%, 부사장은 20%, 이사는 10%, 그리고 과장급은 5%씩의 월급 삭감을 제안했고 동의를 얻었다. 나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모임을 소집했다. 회사의 어려움을 알리고 월급 삭감에 대한 회의 결과를 공유할 목적이었다.
직원들의 입장을 고려해 간부 회의 결정과는 조금 다른 수정안을 발표했다. 사장인 나는 월급의 40%, 부사장은 10%, 그리고 나머지 간부와 직원은 월급을 삭감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지도자가 더 많은 희생을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대신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비용 절감 안을 제시했다. 아내는 내 월급을 20%만 삭감해도 괜찮지 않았냐고 했지만 긴축이 회사를 회생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망하면 가장 큰 손해는 결국 내 몫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10살 된 딸이 회사의 어려움을 눈치채고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봤다. 나는 딸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나무의 나이테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은혜야, 이 나무의 짙은 색과 옅은 색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알고 있니. 짙은 색은 겨울에, 연한 색은 여름에 자란 것을 말해준단다. 추운 겨울이 있기에 나무는 이렇게 아름다운 나이테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아빠도 여름을 꿈꾸면서 이렇게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거야. 이제 곧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아빠 회사도 이 나무처럼 멋지게 다시 성장할 거야.” 딸은 그 일이 있던 직후부터 아침 기도시간만 되면 회사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회사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휴가도 반납했다. 이런 노력 끝에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회사는 위기를 완전히 극복했다. 그리고 부사장들에게 삭감했던 월급도 돌려줄 수 있었다.
2004년 여름 단기선교 때였다. 우리 교회가 지원하던 중국 옌볜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두 주일 동안 조선족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항상 함께하신 하나님의 경험을 공유했다. 그 일을 계기로 중국에 지사를 설립할 것을 고려했다.
회사 간부들에게 이를 설명했다. 그리고 옌볜의 고등학교 선생 한 분과 웨이하이시에서 사업하는 친구를 초청했다. 그곳 현황을 소상히 들었다. 처음엔 다소 소극적이던 부사장들도 결국 2005년 3월 장소 물색을 위해 톈진을 비롯한 중국 도시들을 방문했다.
2005년 6월 1일. 우리는 톈진에 15명의 현지인을 고용해 지사를 설립했다. 2006년 7월 드디어 중국 지사의 위력을 나타내는 결정적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100만 페이지 분량의 서류를 7주일 이내에 끝내야 하는 사업이 우리에게 낙찰됐다. 맡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함으로써 처음 15명 직원에서 출발한 톈진 지사는 3년 만에 200명 규모로 급성장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22) EY 기업인상 수상… “주님 축복과 직원들 노력의 결실”
세 차례 걸쳐 최종 후보가 됐지만 고배
네 번째 도전 만에 면접 후 최종 선발
김진수 긱섬 대표가 2008년 언스트앤영에서 시상한 기업인상을 받고 소감을 전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언스트앤영에서는 해마다 비전·리더십·성취도·도전정신 등을 고려해 기업인상을 시상한다. 각 지역에서 10여개 분야별로 여러 회사를 방문해 최종 3~4개 회사를 최종후보로 선발한다. 이후 심사관들과 면담을 통해 최종 승자를 선정한다. 이 상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열정으로 기업을 성장시킨 기업가에게 주는 상이다.
나는 2000년 2005년 2006년 세 차례에 걸쳐 뉴저지주에서 최종 후보가 됐지만 한 번도 수상을 못 했다. 2008년은 나의 네 번째 도전이었다. 그해 5월 최종 후보가 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5월 16일 심사관들과 전화로 면담했다. 원래는 대면으로 면담을 해야 하는데 유럽 방문 일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전화로 면담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의 한 고객사를 방문한 후 호텔로 향하는 차에서 통화했다. 약 10분에 걸쳐 여러 질문을 받았다. 그 중에선 앞으로 비즈니스 계획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나는 당시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분홍빛 전망을 말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우리 회사의 가장 큰 목표는 외형적 성장이 아닌 고객의 만족입니다. 그렇게 만족한 고객을 가졌을 때 회사는 저절로 성장할 것이라 믿습니다.”
면담을 마친 후 나는 수상에 자신이 없었다. 시상식 날이 다가왔다. 지난해 수상자 중 한 사람이 심사관이었는데 그는 전화 면접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최종 선발자가 한 명씩 소개됐다. 마침내 내 이름이 호명된 것이 아닌가. 그토록 바랐던 일이었지만 막상 이름이 불리니 당황스럽고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영어로 수상소감을 말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긴장됐다.
앞으로 나가 수상소감을 전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번이 저에겐 네 번째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내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녀는 내가 처음 회사를 시작했을 때 함께 모험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회사의 성공을 위해 개인 생활을 희생한 회사 간부들과 직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시간만 주시지 않고 힘든 고난의 시간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난을 통해 지금의 성공이 저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많은 회사 직원들의 노력으로 이룬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 회사를 더 좋은 회사로 성장시켜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숨은 목적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봄의 환희를 위해서는 추운 겨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왜 회사가 잘 나갈 때 상을 받게 하지 않으시고, 어려울 때 이 상을 받게 하신 것일까.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네가 만약 지난해와 같이 잘 나갈 때 이 상을 받았다면 얼마나 교만했겠느냐.”
수상한 다음 해 나는 심사위원으로 봉사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했다. 이 상의 후보자 대부분이 나와 같은 이민 1세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았다. 이민 1세에게는 선택할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를 선택하면 끝을 볼 때까지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빈손으로 시작해서 잃어버릴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쉽게 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은 쉽게 결정을 할 수 있다. 속된 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23) 세계 금융위기에 큰 손실… 회복 어려워져 회사 매각
회사 위해 헌신한 주요 직원들에게
회사 주식의 40% 정도를 나눠주고
매각하며 생긴 금액의 상당 부분은
자선단체 그레이스채리티재단 기부
이미지솔루션스(ISI) 직원들이 제약회사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김진수 긱섬 대표 제공
2008년 금융 위기는 우리 회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회사의 주 고객층은 대부분 제약회사였는데 그들이 금융 위기에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두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것과 다른 종류였다. 그해 회사는 매출액 10% 정도 손실을 봤다. 이는 평균 20~30%의 이익을 낸 지난해에 비하면 큰 손실이었다.
위기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회사가 큰 수익을 남겼을 때 나는 이익 40%를 직원들에게 상여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회사 성장을 위해 재투자한 상태여서 가진 현금이 별로 없었다. 이런 위기가 올 것이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2009년 노력 끝에 더 이상의 손실은 없었지만 지난해의 손실을 회복할 수 없었다. 회사를 팔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2010년 봄이었다. CSC(Computer Science Corporation)에서 우리 회사를 사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회사가 제안한 금액은 내가 생각했던 금액에 미치지 못했다. 나는 제안 가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전했다. CSC 측은 전략적 가치를 추가한 가격을 제시했고 결국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합병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 6개월 정도로 생각했던 기간에 3개월이 더 걸렸다. 제일 큰 문제는 회사를 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직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 시간은 내게 고통의 시간이었다. 나는 수석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고 나는 최고경영자(CEO) 업무만 담당하기로 했다. 합병 이후에는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했다.
드디어 2010년 12월 23일. 18년 이상 지내온 이미지솔루션스(ISI)는 그렇게 마지막을 맞았다. 나는 회사 주식 40% 정도를 회사를 위해 헌신한 주요 직원에게 나눴다. 총 74명이 합병을 통한 혜택을 받았으며 그중 6명은 100만 장자의 명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회사 주식으로 인해 조금의 혜택도 받지 못한 직원을 상대로 감사의 엽서와 함께 특별 상여금을 지급했다. 직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인사였다.
회사를 판매하면서 생긴 금액 상당 부분은 앞서 설립한 개인 자선단체 그레이스채리티재단에 기부했다. 우리 가족 소비 패턴으로 보아 그 돈을 다 쓰고 죽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선교와 교육을 지원하기로 했다. 지난 10년간 이전 회사에 근무한 직원들의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내가 회사를 매각한 시기는 50대 중반이었다. 어찌 보면 조기 은퇴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내게 최적의 상황이었다. 경제적인 여유뿐 아니라 육체적인 힘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충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선 집중력이 요구되는데 그 힘이 아직 남아 있었다. 회사를 설립하고 정상 궤도에 오르기까진 10년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최소 15년은 내가 할 일이 충분히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은퇴를 80세까지 연기한 셈이다. 실수가 실수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24) 친구 회사에 투자… 경영까지 맡았지만 뼈아픈 실패 경험
친구 인품과 회사 가능성만 보고 투자
수입 없는 상황에서 투자금만 줄어들어
사장직 사임하고 의무감으로 추가 투자
김진수 긱섬 대표와 이미지솔루션스(ISI) 중국 톈진 지사 직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한번은 대학교수인 친구가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 투자를 요청했다. 친구의 인품과 회사의 가능성을 믿었기에 나는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미지솔루션스(ISI) 회사의 매각이 마무리되자 친구는 내게 회사 사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분야에 관해선 별로 지식이 없었지만 회사를 키운 경험이 있었기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회사 연구에 들어갔어도 번번이 실패했다. 회사 기술진이 생각하는 것과 고객이 생각하는 것 사이에 간극이 있었지만 이를 좁힐 수 없었다. 수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투자 자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추가 투자하기로 한 사람이 투자를 망설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투자의 위험 부담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인식했다. 더 이상 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사장직을 사임했다. 그럼에도 회사의 파산을 마냥 놔둘 수는 없어 수차례 추가 투자했다. 재정적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실패를 통해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첫째 창업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한다는 점이다. 배수진을 치지 않으면 안 된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돈을 투자해 시작한 회사와 남의 돈으로만 시작한 회사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신의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일에 집중하기 쉽지 않다. 실패해도 잃어버릴 게 없으면 꼭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만약 스스로 자본이 없어 자금을 끌어들여야 한다면 회사가 안정궤도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보수를 받지 않거나 받아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예정된 목표에 이르지 못할 경우 잃어버릴 것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실패해도 아프지 않으면 실패는 반복된다. 그 아픔이 크면 클수록 다시 실패하지 않는다.
둘째 창업자인 사장은 상품 생산부터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고객들의 반응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고객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다. 만들어진 상품과 고객이 원하는 상품의 차이를 감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수한 품질을 위해 노력하고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문제 발생 시 일꾼은 충분한 이유만 찾으면 되지만 주인은 해결책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셋째 상황에 맞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많은 경영 서적은 큰 회사를 위해 만들어졌다. 모든 회사에 무조건 이를 적용하려고 하면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회사 실정에 맞게 일을 수행해야 한다. 큰 회사를 흉내 내서는 안 된다. 즉 경영에 관한 책을 밑줄 쳐 가면서 읽은 후 그것을 회사에 반드시 적용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점진적인 적응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내 생각의 변화였다. 지금까지 교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직 나는 비즈니스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아픔은 꽤 오래 지속됐다. 매일 100달러짜리 저녁을 먹어야 137년 걸리는 자본을 손해 봤는데 어찌 아프지 않겠는가.
***[역경의 열매] 김진수 (25) “나는 하나님께서 파 놓으신 함정에 빠졌다”… 긱섬 설립
알코올 중독, 높은 자살률, 저학력 등
원주민들의 문제가 내 형제들 문제와
일치함을 알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오셨음을 깨닫게 돼
김진수 긱섬 대표와 교회 성도들이 2010년 캐나다 기탄야우 원주민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회사를 매각하기로 한 2010년이었다. 나는 당시 캐나다 서북쪽 기탄야우라는 원주민 동네로 교회 단기선교를 떠났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파놓은 함정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 시기는 회사를 매각하는 과정에 있었고 회사를 팔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원주민 추장 토니를 만났다. 나는 비즈니스맨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는 자연산 송이버섯이 많이 나고 있는데 가격이 자주 폭락해 이를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문뜩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고향 강원도 삼척에는 송이버섯이 나는 지역이었기에 나름 송이버섯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먹은 송이의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민이었다. 그곳은 내가 살고 있던 미국 뉴저지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에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12시간씩 운전해도 5일이 걸리고 비행기를 타도 연결 시간을 고려하면 1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 내 마음은 이미 그곳에 쏠리고 있었다. 같이 선교여행을 갔던 딸이 내 마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나는 아빠가 필요해요”라고 말했다. 당시 내 딸은 고등학생이었다. 더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중간 기착지인 프린스조지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날 버스에서 한 청년을 만났는데 우연히 다음 날 아침 다시 만났다. 그리고는 내게 이런 말을 전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인가를 결정하지 못해 망설이는 게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의 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전에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민을 계속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기도하며 질문했다. 그때 하나님은 에스더에게 주셨던 말씀을 내게 주셨다. “왕후께서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 그러면서 어렸을 적 일이 생각났다. 큰 형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고 둘째 형은 군대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누나는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 내 형제들의 문제가 바로 원주민들이 처한 문제와 일치했다.
원주민의 가장 큰 문제는 알코올 중독과 높은 자살률, 저학력 등이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오셨음을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파 놓으신 함정에 빠졌다.
회사를 팔고 그 이듬해인 2011년 6월 15일. 나는 그곳에 Gitx Mushroom(GITXM·긱섬)이라는 회사를 원주민 두 명과 함께 설립했다. 처음 이미지솔루션스(ISI) 회사를 설립했을 때 나는 비즈니스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긱섬도 그 분야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다. 농산물과 무역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다. 내가 만약 제대로 알았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으리라. 자세히 몰랐기에 가능했다.
***[역경의 열매] 김진수 (26·끝) 새로운 시작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
송이버섯 수출 사업 처음엔 실패 연속
주의 일 한다고 무조건 잘 풀리지 않아
인생은 점 같은 사건으로 연결된 선
하나님 신뢰하면 낙망할 이유 없어
김진수 긱섬 대표가 고사리와 송이버섯을 채취하고 있다. 김 대표 제공
처음 회사를 시작하고 미국에 송이버섯 수출을 시작했다. 내 직업은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였기에 무역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다. 미국으로 처음 수출한 송이가 통관에 걸려 일주일 이상 머물렀고 다 썩어버렸다. 배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첫 송이는 폐기 처분됐다고 연락을 받았다.
다시 시도했다. 주말인 금요일이었다. 송이가 미국에 도착했는데 주말이었다. 그래서 배달은 바로 안 되고 그다음 날이 돼서야 배달이 됐다. 절반 이상이 썩었다. 그러면서 송이 수확 철이 끝났다. 스스로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면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은 나를 광야에 팽개치셨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원주민을 돕기 위해 회사를 차려 놓고 원주민을 돕는다고 떠벌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스스로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일에 집중했다.
어느 날 주민 지역에 고사리가 많이 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이듬해 봄철 고사리를 생산하기로 했다. 고사리는 삶아서 말리면 언제든지 나중에 팔 수 있고 통관에 문제가 생겨도 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고사리 생산을 잘 마친 그 해였다. 가을 송이 철을 맞아 다시 마을을 방문했다. 그런데 근처에 사는 한국인이 “다 못 먹으면 말리면 되니 송이를 많이 사 달라”고 요청했다. 옳거니. 송이를 말려서 팔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고사리 때문에 좋은 건조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일을 잘 풀리게 해주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선 내 실수를 사용하셨다. 실수가 없었다면 가을에 싱싱한 송이버섯 비즈니스만 했으리라. 그렇게 원주민과 마음을 열고 동고동락한 지 어언 10년이 지났다. 원주민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내 원주민 이름은 ‘딜 딜럭 스카니스트’다. 영어로 샤이닝 마운틴(Shining Mountain), 빛나는 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곤 한다. 흔히 죄를 용서하고 축복해 준 것을 하나님 은혜로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내게 하나님의 은혜는 실수하고 잘못해도 그것을 실패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시작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은 점(點) 같은 사건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과거를 되돌아보면 이 점들이 하나씩 이어져 선(線)을 이루었다. 우연 같았던 사건들에게 그 이유가 분명해지고 이야기로 변했다.
나는 우연히 시골에서 태어난 줄 알았다. 우연히 큰형이 알코올 중독이 된 줄 알았다. 그리고 우연히 캐나다 단기선교에 가서 추장을 만난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연 같았던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었다. 내가 보기에는 우연히 생긴 점 같았지만 다시 과거를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은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수많은 계획된 일의 연속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망할 이유는 없다.
그동안 내 실패 이야기 들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린다. 여러분의 삶도 실수가 실패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