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것들은 가볍거나 무거웠다 / 마경덕
땅속 물속 가리지 않는 지하철은 수륙양용이다. 힘차게 도시를
가로지른다. 창밖으로 한강이 지나가고 남산타워가 지나가고
63빌딩이 스쳐간다. 한량 두량 세량… 칸칸이 만원이다.
도시의 외곽까지 혈관처럼 뻗어있는 선로(線路)들, 심장으로
돌아오는 혈액처럼 지하철은 노선을 따라 돌고 돌아나간다.
길을 바꾸는 환승역, 전동차는 바통을 받아 쥐고 달리는
릴레이경주처럼 끊어진 길을 이어 달린다. 지하철은 도시의
심장이다. 덜컹덜컹,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 심장이
멎는다면 금세 길은 엉키고 발이 묶여 도시는 마비가 될 것이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쇳덩어리 심장이 쿵쿵 달린다.
1. 울음소리
어느 날 열차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이이잉---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는 끔찍하고 애절하고 서러웠다. 당고개행 막차를
타고 안산에서 서울로 건너오다가 졸음에서 깨어나 그 울음의
출처에 대해 생각했다. 바람이 갈가리 찢어지는 소리,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들이 바퀴에 깔리는 소리… 무심히 흘려보낸
소리들이 어둠을 타고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맨 앞 칸 앞좌석에
앉은 사람에게만 들려주는 울음을 그때 처음 들었다. 달리는
열차의 머리에 부딪치는 바람소리를 열차가 우는 소리라고
믿었다. 평생을 선로에 갇혀 살아야 하는 열차, 바퀴가 헐도록
달려도 끝이 없는 길, 속도에 부딪히는 그 소리는 열차의
막막한 울음이었다.
2. 껌팔이 무명용사
전쟁터에 가보지 못한 저 젊은 용사는 왼팔이 없다.
빈 소매가 나풀거린다. 어쩌면 왼팔은 저 검은 옷 속에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 오른 팔이 껌 한통을 졸고 있는 무릎마다
놓고 간다. 목에 매단 때 절은 코팅종이에 장애아라고 적혀 있다.
그의 손이 날렵하다.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듯, 익숙하게
껌을 배달한다. 그러나 그의 사격솜씨는 형편없다.
대부분 불발탄이거나 오발탄이지만 승산 없는 싸움에 그는
지치는 법이 없다. 다시 수거를 해가는 덤덤한 손은 절망도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자일리톨, 쥬시후래쉬, 은단껌, 풍선껌이
그의 품으로 돌아간다. 수없이 퇴짜를 맞은 껌, 수없이 거절을
당한 상처, 수많은 지문이 묻은 껌 한 통이 지금 내 무릎에
앉아 있다. 그는 오랫동안 삶의 현장에서 팔 하나로 살아남은
용감한 현역이다.
3. 칼갈이 아저씨
지하철은 달리는 시장. 가방을 든 상인들이 줄을 잇는다.
그중 내가 만난 칼갈이 아저씨의 입담이 가장 빼어났었다.
흉기소지는 불법이라며 스텐으로 만든 팬 뒤지개를 칼처럼
갈아온 남자 손에서 신문지가 추풍낙엽처럼 잘려나갔다.
칼, 가위, 모두 잘 갈린다는 숫돌 가격은 단돈 천 원, 일분 만에
맞은 편 아주머니의 지갑이 열렸고 다음 역에 닿기도 전,
서너 개의 지갑이 열렸다. 바퀴처럼 생긴 작은 숫돌 사이에
가윗날을 넣고 가위를 갈던 칼갈이는 재빨리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집에 돌아와 가르쳐준 대로 가위를 갈았더니 멀쩡하던 가위가
말을 듣지 않았다. 갈아서는 안 될 것을 갈아야 한다고
떠들던 사내를 며칠 후 만났다. 그의 구성진 입담에 여기저기
지갑이 열리고 있었다.
4. 중국산 수동 재봉틀
내가 만난 상품 중에 최고였다. 손만 놀리면 척척 바느질을
해주는 신기한 손재봉틀, 바짓단도 문제없다고 큰소리치는
늙은 사내는 청바지 조각을 재봉틀 사이에 넣고 박음질을
하고 있었다. 침목 위를 달리는 열차처럼 재봉틀이 철컥철컥
소리를 냈다. 손놀림을 따라 미싱에 박은 듯이 미끈한 박음선이
나타났다. 신제품이라고 떠드는 소리에 귀가 솔깃 이천 원을 주고
수동재봉틀을 샀다. 떨어진 단추도 달기 싫어하는 나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늘, 실전에 돌입하면 사정은 달랐다.
고리처럼 달린 실을 꿰는 구멍으로 실을 밀어 넣는 순간, 툭
고리가 끊어졌다.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손재봉틀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내가 만난 상품 중에 최악이었다.
5. 휴대용 매직크리너
영등포에 도착했을 때 중년남자가 하얀 셔츠 몇 벌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까만 매직펜으로 흰 셔츠에 죽죽 금을 그었다.
그의 손끝에서 동그라미와 세모가 나타났다. 소싯적에
남의 담벼락에 낙서 꽤나 한 모양이었다. 사내의 손놀림을
따라가며 물감을 코에 묻히며 놀던 공작시간을 떠올렸다.
손끝에서 태어난 사자, 호랑이, 독수리… 찰흙이 묻은 옷소매와
물감이 엎질러진 치마를 비벼 빨던 어머니의 눈초리를 생각하는
순간, 사내는 셔츠에 그린 낙서에 작은 플라스틱 병에 든
액체를 붓고 살살 문질렀다. 순간 매직펜으로 그린 낙서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말 놀라운 마술이었다. 녹물, 핏물, 잉크,
모든 얼룩은 다 빠진다고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수많은 얼룩을 다 지운 마술사였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마술을 쉽게 믿지 않았다. 지하철 손잡이에 걸린 새하얀
셔츠가 가볍게 흔들렸다. 얼룩 한 점 없어 보이던 사내의 얼굴에
금세 얼룩이 지고 말았다. 백지를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
사내는 살고 있었다.
6. 지팡이 천사들
내가 아는 그들은 모두 천사이다. 눈을 감고도 다 볼 수 있는
그들은 날개 잃은 천사들이다. 험한 세상 그들을 인도하는
것은 지팡이와 찬송가. 그들은 줄기차게 찬송가를 부르고
발보다 큰 신을 신고 느릿느릿 걸어간다. 어떤 남자 천사는
아들이 대학을 다니는데 대학을 마칠 수 있게 학비를 보태달라고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 진심은 통하지 않았다.
그 자리엔 대학문턱도 가보지 못한 아들 딸을 둔 부모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배부른 그 자랑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사내는 늘 빈 바구니였다. 말없이 찬송가만 흘리고 지나가는
가난한 천사들에게는 동전이나 지폐가 주어졌다. 어느 날
다시 만난 그 사내도 말없이 내 앞을 스쳐갔다. 자식이 무사히
대학을 마쳤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안식일에도 바구니를 내미는
천사들, 한 번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팔아먹고
사는 천사들, 부처님보다는 하나님이 더 잘 팔린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7. 지하철 카페
어디선가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온다. 그리운 목소리다.
Simon & Garfunkel의 ‘El Condor Pasa’가 흘러나오고
‘Yesterday Once More’를 부르던 Carpenters가 걸어 나온다.
John Travolta와 Olivia Newton이 신나게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Mariah Carey가 ‘Whitout You’를 애절히 불러댄다.
이어 70년대 통기타 가수들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지하철은
분위기 좋은 카페로 변하기도 한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지나간
노래를 다시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세월을 훌쩍 건너
밤새 팝송을 외우던 단발머리 소녀가 되어 잠시 추억에 젖는다.
흘러간 노래들이 손바닥만한 CD한 장에 다 들어있다.
추억을 파는 남자는 미사리 카페 차 한 잔 값도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낭만보다는 배가 더 고픈
얼굴들이다. 달콤한 선율에도 표정이 없다. 곧 음악이 그치고
기라성 같은 가수들은 사내를 따라 퇴장한다. 사내가 대형카세트를
끌고 사라지면 나는 달콤한 환상에서 깨어난다. 눈을 뜨는 순간
무지갯빛 꿈은 사라지고 나는 펑퍼짐한 중년의 여인으로
돌아온다.
8. 통증을 삽니다
허리보호대 무릎보호대까지 두른 젊은 여인이 가방을 끌고
들어선다. 쭉쭉 늘어지는 탄력을 자랑하는 보호대는 해를 넘기자
만 원에서 반값으로 가격이 떨어졌다. 자석이 첨부되어
허리 통증은 끝이라고 한다. 무릎이 약하신 분은 무릎보호대를
착용하면 계단이나 등산도 거뜬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어
키토산 파스가 지나가고 젤 타입의 관절염치료제가 지나간다.
인천행이나 병점행인 1호선은 늘 다리와 허리가 부실한 노인들로
북적거린다. 무료승차권을 애용하는 노인들은 신창행을 타고
온양까지 가서 온천을 즐긴다. 승객의 절반이 공짜손님이다.
노인인구는 늘어만 가고 노약자석은 턱없이 부족하다.
허리와 무릎이 쑤시는 분들은 다 말만 하라고 거짓말처럼
통증을 없애준다고 호언장담하며 수시로 들락거리는 장사꾼들,
그러나 파스도 보호대도 별로 효력이 없음을 몸으로 알아버린
노인들은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피둥피둥한 젊은 여자는
허리 병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리보호대가 만병통치인양
큰소리를 치고 있다.
9. 대박 상품
살다보면 대박은 있다. 지하철 베스트는 뭐니뭐니 해도
자외선차단 팔 토시. 작년부터 꾸준히 팔려나간 냉장고보다
시원하다는 팔 토시는 여름철 장기 베스트 품목. 운동선수들이
다 낀다는 토시는 시중 가격의 절반에도 안 되는 삼천 원,
워낙 구입자가 많다보니 올해 다시 등장했는데 너도 나도 판매자가
넘치는 바람에 이천 원으로 값이 내렸다. 흰색, 보라색, 소라색,
검정색, 색색의 토시들이 팔려나간다. 그 많은 토시는 누가 끼었나?
토시를 파는 상인들 외엔 토시를 낀 사람을 보지 못했지만
토시는 효자품목, 당분간, 꾸준히 팔려나갈 기세이다.
10. 잡(雜)
‘여러 가지가 뒤섞인’ ‘자질구레한’의 뜻을 지닌 잡(雜).
지하철은 잡상인들의 천국이다. 볼펜접착제, 일회용밴드, 파스,
실, 바늘, 손톱깎이, 굳은살 제거기, 라이터, 라디오, 혁대,
손전등, 양말, 스타킹, 손수건, 배수구청소기, 치약, 천자문,
장갑, 오이 채칼, 부채, 깔창, 돗자리, 칫솔, CD, 우산, 보풀제거기,
밤 깎는 가위, 옷걸이, 전자팽이, 만득이 인형, 휴대폰케이스,
야광요요, 비닐밀봉기, 돋보기, 보온 보냉 주머니, 비옷, 청소장갑,
만보기… 비가 오면 어디선가 우산장수가 나타나는 지하철,
계절에 맞춰 오만가지 상품들이 쏟아진다. 물건을 파는 잡상인들,
신문지 수거 노인, 껌팔이, 맹인, 복음을 전하는 사람, 광고지를
붙이는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지하철은 장터 분위기이다.
시끌벅적한 장터에 가면 볼거리, 먹거리가 풍성했다.
우리는 ‘장터’라는 말만 들어도 흥이 나는 민족이다. 화를 잘 내고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도 잡상인이 떠드는 소리는 잘 참아낸다.
오늘은 또 무엇을 만날 것인가? 지하철에서 내가 만난 것들은
너무 가볍거나 혹은 무거웠다.
[출처] 마경덕 시인 26|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