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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3년 3월 5일 주일 오전 예배 |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89편 1,2,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38편 1,2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107편 1,2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36편 5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88편 2,3,5,7 성찬식 찬송 – 시 92편 6,7 (고정) 폐회찬송 – 시 105편 17,18 (고정) * 아멘찬송은 해당 시편으로 할 것 |
시편 설교 : 시편 88편 | |
성경낭독 : 창 12:1-4; 요 3:1-17 본문 : 시 88:1-18 제목 : “죽음의 본질을 대면하다” |
죽음의 본질을 대면하다
병은 무엇입니까?
“병은 무엇입니까?” 일반인으로서는 몰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라면 이 질문에 대해 답할 것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병은 ‘죄의 산물’입니다.
물론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이 “병 걸린 사람은 죄인이냐?”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볼 때 병이 죄로 인해 이 세계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죄 상태의 인간에게 병이 있었을 수 없고, 실제로 성경이 죄의 산물로 대표적으로 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이사야의 메시아 본문인 53장 말씀입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개역 한글판 번역이 일관되지 않아서 이해가 어려움이 있었는데, 개정판에서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원래 이 번역은 신약성경과 일체를 이루어야 하는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씀할 때는 “연약”과 “병”이라고 번역합니다.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태복음의 “연약”이 이사야의 “간고”(3절)와 “슬픔”(4절)(왜 바로 그 다음 절인데 다르게 번역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음)이고, 마태복음의 “병”이 이사야의 “질고”로 번역된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이사야를 고치든 마태복음을 고치든 해서(직접 인용이니까) 단어를 통일시켰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이사야가 말하는 메시아가 짊어질 것,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짊어지셨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병”과 “연약”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계에 오셔서 하신 주된 사역이 이 “병과 연약을 짊어지시는 일”이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을 기억한다면 “병과 연약을 짊어지셨다”는 말은 “죄를 짊어지셨다”는 뜻입니다. 곧 성경의 관점에서 “병”과 “연약”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 삶에 일어난 대표적인 일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병자들’을 많이 고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한 병의 특성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단순히 ‘병’을 ‘나를 괴롭게 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병을 우리의 ‘죄’와 연관시킬 때, 병이 가진 특성이 현저해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통상 걸리는 병들은 ‘내가 죄를 지어서’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병은 죄의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기 위하여 이 세계에 있는 것이므로, ‘병의 양상’을 관찰할 때 ‘죄의 특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자의 관점에서’ 병이 가진 특성을 두가지만 생각해 보십시다.
1) 첫째, 병은 항상 ‘고통’을 수반합니다. 이는 죄가 고통의 원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종류의 고통을 만납니다. 병으로 인한 고통 외에도 다른 많은 고통들도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오는 고통도 있고,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오는 고통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병은 아주 직접적으로 ‘고통’입니다. 병은 그야말로 인생 중에 죄가 들어왔을 때, 고통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아주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병에 걸리면 힘듭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아프고 괴롭게 됩니다. 이것은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직접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죄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인 우리는 병을 통해 그 배후에 놓여 있는 ‘죄’라는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병에 걸렸을 때, 몸의 고통을 통해 이 생각을 하도록 합시다. “아, 죄라는 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구나!” 이것이 병에 걸렸을 때 몸이 고통스러운 것을 통해서 죄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배우는 좋은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2) 둘째, 첫 번째와 약간 비슷해 보이기는 좀 더 궁극적으로, 병은 ‘죽음’을 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때의 죽음이란 단순히 ‘몸의 죽음’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에 걸쳐 넓게 퍼져 있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드리워진 악의 영향력을 말합니다. 삶의 힘듦, 노동의 고단함, 인간 관계의 어려움, 자존감의 망가짐,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함,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죄가 가져오는 ‘죽음의 그림자’, 이것을 우리는 병을 통해서 복합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말이고, 죄를 지었을 때 우리 삶에는 이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가장 행복해 보이는 순간에도 죄의 장악력 아래 있습니다. 여러분이 숨을 쉬고 있는 모든 순간, 죄가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즉 말할 때에도, 생각할 때에도, 일할 때에도, 사람을 만날 때에도, 우리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내 삶이 죽음의 그림자 아래 있구나”라는 것을 현저히 깨닫습니다. 약간이라도 중병에 걸려 보신 경험이 있는 분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을 것입니다. 병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전체 삶에 걸쳐 죽음의 영향력 하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상기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병에 걸렸을 때, 우리 인생 전체가 ‘죽음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병’을 보는 방식입니다.
오늘 시편
오늘 시편 88편은 직접적으로 ‘병’을 다루는 시편입니다. 조금 폭넓게는 ‘삶의 고통’에 관한 것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한 주석가는 이 시편을 “모든 시편 중 가장 슬픈 노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시편을 ‘병중에’ 쓴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내용도 물론이거니와 표제도 한 몫을 합니다. 가지신 성경에 아마 다들 표제의 “마할랏 르안놋에 맞춘 노래”에 각주가 붙어 있으실 겁니다. “병의 노래”라고 되어 있으시죠? 그래서 안의 내용도 물론이거니와 표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 이 시편은 시인이 병에 걸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쓴 시편이구나!”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시를, 시인이 임종 직전에 쓴 시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리고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시에는 ‘소망’은 없습니다. ‘찬양’도 없습니다. 이 시는 그야말로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 가장 암울한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고통이나 고난이 나와도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시편은 적은데, 가장 대표적인 시편이 이 88편입니다. 이 시에는 ‘고난만’ 있습니다. 그 다음의 것이 안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88편은 참 드문 시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편이 중병에 걸린 이의 마음 상태를 묘사하는 데 올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병에 걸린 이가 겪는 일, 또 그의 마음 상태를 상상해 보시면 충분히 이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말기 암 환자가 항암 치료를 받을 때의 고통을 상상해 보곤 합니다. 겪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 고통은 칼에 손이 베거나, 망치로 손가락을 때리는 것과 같은 종류의 고통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일 것입니다. 단순한 통증이 아니라, 몸 전체에 밀려드는 참을 수 없는 힘듦, 견딜 수 없는 싫음의 연속, 하지만 빠져나갈 수 없고 계속해서 닥치기 때문에, 진통제나 모르핀 같은 것이 아니면 견딜 수가 없는 정도의 고통의 계속 됨......그런 것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이가 가지게 되는 참을 수가 없는 마음의 고통......이런 것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살피기
내용을 찬찬히 한 번 살펴봅시다. 제가 아이들한테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은 짧게 스토리만 요약해 놓은 유튜브를 보지 말라고 하는데, 한 작품은 그 사이사이의 호흡들조차 모두 작품을 느끼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순한 스토리, 서사만 작품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멈춰 있는 순간들, 카메라가 응시하고 있는 각도, 배경에 흐르는 음악들까지 모조리 감독에 의해 의도된 것들입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보지 않고 스토리만 재빨리 넘겨 보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를 읽거나 미술 작품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그 속에서 스며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시편 88편 같은 시는 ‘병’과 ‘죽음’을 다루고 있는 무거운 시편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구절구절마다의 무게를 느끼면서 음미하듯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 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울림이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고통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몇 군데 살펴봅시다.
1) 3절 앞부분
3절에서 시인은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다”라고 말합니다. “재난이 가득하다”라고 하니까 어디 홍수가 났거나, 태풍이 불어서 집이 무너졌거나, 이런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번역이지만, 이 말의 본질적인 어감은 ‘고통’입니다. 시인은 지금 자기 영혼에 고통이 가득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병상에 누운 환자의 심정을 생각해 보시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혹 실제 이런 경험을 해 보신 분들도 계시지요. 그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여기에서 “가득하다”는 것은 그릇에 물이 찰랑찰랑하게 차 있는 것을 연상하면 됩니다. 고통이 그야말로 인생의 끄트머리까지, 내가 인내할 수 있는 정도의 끝까지 가득 차 있습니다.
2) 3절 뒷부분
그런 면에서 3절의 앞부분과 뒷부분은 잘 대응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말기 암 환자의 고통처럼, 이렇게 인생에 고통이 가득 차게 되면, 그때 사람은 즉각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3절의 뒷부분에서 “내 생명이 스올에 가까웠다”, 곧 지옥 문턱에 다다라있다고 한 것입니다. 병증의 고통이 격렬할 때, 사람은 지옥 문턱까지 왔음을 느끼게 됩니다. 시인은 지금 그런 상황 속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3절을 읽어보면 시인이 어떤 정황 속에서 이 시를 쓰고 있는지 잘 그려볼 수 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3) 4절
4절은 3절의 마지막 부분을 한 번 더 반복합니다.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다”, 그러니까 ‘곧 죽을 것 같다’는 뜻입니다. 병세가 위중해지면 고통이 극심해지고, 그런 고통이 반복되면 이제 지옥 문턱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참으로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습니다!”라고 시인은 소리칩니다.
4) 5절
이것을 5절에서는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다”와 “죽임을 당해 무덤에 누운 자 같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앞부분의 “죽은 자 가운데 던져졌다”는 것에서도 시인의 비참한 상황을 느낄 수 있지만, 뒷부분의 “죽임을 당해 무덤에 누운 자 같다”는 것은 좀 더 참혹한 영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개역 한글판에서는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다”였는데, 왜 그런지 몰라도 개정판에서는 순화하여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원래의 이 표현은 “전쟁에서 대량으로 죽임을 당하고 유기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살륙을 당했다”가 훨씬 더 좋은 번역입니다.
즉 이 5절의 내용은 사람들의 죽음을 묘사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임종을 맞은 사람이 평범하게 무덤에 묻히는 방식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떼로 살육당한 후에, 묘지도 없이 한 군데다 땅을 파고 한꺼번에 갖다 묻어버린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비참하다는 의미입니다.
느낌
어떤 사람은 이 시편 88편을 읽을 때, 시인의 ‘시적 허용’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 실제로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 병을 겪어 본 사람은 “내 마음을 읽는 것 같다”고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면 실제 인생이 영화보다 더 극적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고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크린에서는 사람의 고통을 리얼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하지만, 실제로 병상에서 죽음과의 사투를 벌여 본 사람이라면, 그런 영화나 드라마의 묘사는 ‘오히려 가벼운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병의 고통은 위중하고, 사람을 낙망하게 만들며, 하루 이틀 정도의 병증에는 “그래 좋은 경험이 될 거야!”라고 생각했더라도, 이것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절망을 향해 갈 경우, 그런 쾌활함은 오래 가지 못하게 됩니다. 인생의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인 병을 통하여 겪게 되는 이 고통은 이렇게 깊고 무겁게 인생을 내리누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88편을 읽을 때, “진짜 깊은 병을 만나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지경”을 보게 됩니다. 그 심리 묘사나, 방황의 정도, 마음속으로 느끼게 되는 생각 같은 것에서, 아마도 이 시는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의 마음을 이보다 더 훌륭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싶을 정도로, 하지만 매우 간결하게,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망과 주의 관계
그런데 우리가 이 시에서 아주 주목하여야 할 점은 이 시가 그리고 있는 ‘단지 고통’은 아닙니다. 물론 이 시는 매우 현실적으로 이 고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를 접하고, 또 자신의 병을 바라보면, 그리스도인은 매우 격렬한 병의 고통 속에서 누구나 갖게 되는 마음이 있는데, 이 시는 그것을 함께 적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포인트를 두고 이 시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격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신자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경험해 보신 분들은 자신의 병고 때를 상기해 보십시오. 혹 자매님들은 출산 때의 고통을 다시 회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이런 격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심지어 “지옥의 문턱에 있는 것 같다”는 마음을 느낄 때, 신자인 우리들은 항상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니까,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인도 그렇게 합니다. 시인도 격렬한 고통 속에 있으니까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때의 시인의 하나님은 ‘행복한 감정’으로 떠올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도 고통스러울 때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으니, 많은 분들께 공감되실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떠올리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지금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주의 손에서 끊어졌나보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구나!
이것이 5절 뒷부분과 6절의 내용입니다.
‘고통’이라는 주제에서, 우리가 꼭 되짚어보아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격렬한 병의 고통과 같은 이런 류의 삶의 고난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만, 이때의 하나님은 주로 ‘나를 향하여 등을 돌리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보시지 않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가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5절부터 12절까지 내용을 보십시오.
5절 주께서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입니다!
6절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군요!
7절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릅니다. 주의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합니다!
8절 외로움입니다. 고통 속에 있으면 외로워지죠. 주께서 내 가까운 자들을 모두 떠나 보내 버리셨습니다!
9절 내 눈이 쇠하였습니다. 내가 주를 종일 부릅니다.
10절, 11절, 12절은 주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생명’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갖고 노래한 것입니다.
주께서는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유령이 주를 찬송하리이까?
주의 인자는 무덤 중, 곧 죽음 중에서는 선포될 수 없습니다.
흑암 중에서,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는 알려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니까요. ‘죽음’에 처해 있으면, 그 ‘생명의 하나님’과는 가장 멀리 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외롭고, 서럽고,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는 ‘생명의 하나님’이 원래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데, 나는 정말로 아무런 빛도, 아무런 생명도 없는 가운데 있으니까 말입니다.
사망과 주
이 시편을 이렇게 읽을 때, 우리는 시인이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앞부분에서는 단순히 ‘고통’, 그 자체에 집중했는데, 시가 점점 더 심화되어 갈수록, 이 시인은 자신의 삶에 몰아치고 있는 이 고통과 죽음이란 것에서 ‘하나님’이라는 대상을 더욱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을 더욱 떠올릴 때, 이 ‘죽음’이라는 주제와 ‘하나님’이라는 주제의 관계라고 하면 그것은 ‘없음’입니다. 시인은 계속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망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입니다. 그것은 ‘관계 없음’입니다. 주는 생명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므로, 시인은 죽음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거의 주제구에 가까운 10절부터 12절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주께서는 죽은 자에게는 기이한 일을 보이지 않습니다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은 무덤에서, 멸망 중에서는 선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흑암 중, 그리고 잊음의 땅에서는 주의 공의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인이 ‘죽음’ 가운데서는 ‘생명의 주’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지켜 봅니다. 시인의 결론부에 다다르게 되면, 하나님은 죽음 가운데는 계시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그토록 외로움을 느낀 이유, 죽음이 코앞에 다다르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했던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생명의 주’이시므로, ‘죽음 가운데는 주께서는 계시지 않으십니다’인 것입니다.
아! 그리스도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거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앞에서 시인의 고통, 특히 병중에서 곧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느끼는 고통에 대해서 ‘계속 공감하는 방식으로’ 이 시를 다루어 왔습니다.
그가 느끼는 심정, 그가 경험하는 심리적 우울감, 그가 말하는 괴로움과 외로움......이것을 우리는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큰 고통 속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우리가 차차 느끼게 되는 것은 ‘거리감’, 곧 ‘이질감’인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고통과 죽음에 더욱 더욱 가까이 가게 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버팀목이 되게 되는 데 반해, 이 시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인 우리와 이 시편의 시인과의 이질감’, 다른 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고통에 더욱 깊이 내려갈수록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죽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의 생명의 원천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는 죽음 그 자체만 대면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무엇인가요? “사망 가운데는 주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시인은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습니까? 왜 시인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문답의 주제에 도달하지 않을까요? “사나 죽으나 나의 유일한 소망, 곧 내가 이토록 죽음을 겪고 있더라도,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라는 종착점에 왜 도착하지 않을까요? 왜 시인은 죽음을 깊이 들여다 본 후에, 그 죽음 속에 파묻혀 버립니까? 왜 여러분과 제가 늘 겪는 것처럼, 격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우리를 건져주시는 분이신 생명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길로 가서 ‘죽음 그 자체만’ 보게 되는 것입니까?
이유 :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편 88편이 말하고 있는 ‘고통’과 ‘죽음’의 면모가, 우리가 겪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시편 88편은 ‘고통과 죽음의 그 본질과 직접 맞대면’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고통이나 죽음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로, 그리스도께로 피하게 되는데, 시인은 ‘죽음 그 자체’를 만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편 88편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여기에서 ‘죽음 그 자체를 완전하게 맛본 이의 완전한 절망’, 곧 우리로서는 결코 도달하지 않을,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결코 도달하지 않을, 그 궁극의 죽음의 공포, 생명이신 하나님이 완전히 계시지 않는 철저한 어둠을 맛본 자의 진정한 흑암......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 이 고통, 이 공포는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정말로 시편 88편의 궁극이 ‘신자를 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139편이 말씀하듯, 우리 하나님은 음부에도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139:11-12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시 139:8-10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고통’과 ‘죽음’에 완전히 함몰되는 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의 순간에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장 격렬한 병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느끼지, 여기 시편 88편에서처럼 ‘하나님은 사망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시편 88편의 ‘완전한 죽음 그 자체’에 내맡겨진 이는 누구입니까?
죽음의 본질 그 자체의 고통, 하나님이 더 이상 거하시지 않는 완전한 죽음 자체에 휘말려버리신 분은 누구십니까?
이것이 바로, 부활절 직전의 그리스도, 곧 고난 주간의 암흑을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고통입니다!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하여, 완전한 죽음 그 자체, 그러니까 우리들처럼 고통과 죽음이 닥칠 때 우리를 건져주시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에 사로잡혀 버리신 분의 고통!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운명’이며, 그것이 바로 이 시편 88편의 궁극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죽음의 본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상상력은 빈약합니다. 그래서 고난 주간을 맞아도,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을 손에 못이 좀 박히는 정도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인생이 가장 큰 풍파를 맞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가장 큰 병의 화’를 만났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는 큰 빛’, ‘하나님이라는 큰 소망’조차, 완전하게 꺼져 빛을 잃어버린 상태를, 인생은 경험할 수 있습니까?
아니오, 우리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지옥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불신자들조차도, ‘공상의 지옥’을 상상할 수 있을 뿐, ‘하나님이 참으로 계시지 않는 진정한 지옥’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 없음’, 그 ‘하나님 없음’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시는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 길을 걸어가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만난 가장 암울한 절망을 아주 살짝 표현한 정도가 바로 이 시편 88편입니다. 우리가 가장 심각한 병을 만나, 이제 곧 임종을 앞두고 있고, 어떤 약도 듣지 않고, 어떤 진통제도 고통을 덜어낼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그야말로 아주 약간 느낄 수 있는 ‘생명 없음’, ‘하나님이 없으므로 생명이 없음’, ‘하나님은 생명 가운데 계시므로 죽음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 이것을......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온몸으로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프실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여러분께 자주, 장례식장에 가게 되면, 그분이 비록 천국을 가셨더라도, 몸과 영혼이 이격되는 현상 자체가 죄의 결과임을 깨달으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비슷하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아플 때 무슨 생각을 해야 합니까?
실제로 저는 언젠가 우리 성도들 중, 어떤 자매님이 출산의 고통을 겪을 때 ‘죄를 생각했다’고 하신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병은 무엇이며, 인생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가장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는 가장 어려운 고난의 순간에 아버지가 계시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어려운 고난의 순간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이요 슬픔’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88편을 통해서 ‘죄의 본질’, ‘죽음의 본질’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최후의 본질을 맞대면하셨던 분! 바로 그 일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분! 이분을 생각하고 찬양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