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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년~647년)
신라의 제27대 왕. 기록 상으로 확인되는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다. 연호는 인평(仁平).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인 태종 무열왕의 이모이기도 하다.
사실 역사서에서는 모두 '선덕왕'으로 기록하는 데도 선덕여왕으로 부르는 것은, 37대 왕인 선덕왕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될 것이다. 삼국유사 기이 제1의 '선덕왕지기삼사'에서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라는 표기도 나오는데, 같은 내용에 '善德王'이라는 표기도 혼재돼 있다. 다만 삼국유사의 '대왕'이란 대단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존칭 같은 건 아니다. 삼국유사는 진성여왕의 이야기에도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하나 그 안에는 '위홍, 잡간 등 서너 명의 총애 받는 신하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부려서 정치가 흔들렸다. 그러자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등 말기의 혼란상을 묘사하는 부정적인 기록만이 남아 있고, 고려에 항복한 마지막 왕 경순왕의 경우에도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고 표기하며 '대왕'의 칭호를 사용하는 등 왕의 업적과는 무관하게 '대왕'이라는 표기를 사용하였다.
불교를 대단히 밀어줬던 왕으로, '선덕'이라는 시호도 불교적인 호칭이다. 선덕왕지기삼사 등의 설화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왕실과 밀접한 불교 세력이 왕즉불 사상을 전파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퍼뜨린 일종의 프로파간다 등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선덕여왕을 상대로 일반 대중이 곧잘 떠올리는 일화들과 더불어 '지혜로운 여왕', '성군'이라는 이미지들은 대개 이러한 설화들로부터 비롯된다.
서동 설화의 내용을 생각해보자면, 조카가 계속 신라를 침략하는 바람에 싸워야 하는 구도가 성립하는데, 설화에 따르면 선화공주의 아들인 의자왕은 선덕여왕의 조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동 설화 역시 신빙성 논란에 휩싸여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로망 때문인지 선덕여왕이 여러 매체에서 젊은 여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30대의 이요원이 선덕여왕 역으로 나온다든지. 사실 선덕여왕은 즉위 당시에 젊은 여왕이 아니었다. 아버지 진평왕은 김동륜의 아들이었는데 김동륜은 572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에겐 아우 국반 갈문왕이 있었으니 572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고 632년 승하할 당시 춘추는 최소 62세라고 봐야 한다. 그 점을 고려하면 선덕여왕은 즉위 당시엔 최소 40대 초반의 중년 여성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사촌 동생인 진덕여왕도 마찬가지다. 한국 역사 속에서 젊은 여왕은 10대 후반 ~ 20대 초반에 즉위한 51대 진성여왕 단 1명 뿐이다.
2. 즉위 과정
삼국사기에서는 진평왕의 장녀였다고 전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와의 위아래가 뒤집혀 차녀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차피 이건 이미 주류 사학계에선 환단고기와 마찬가지인 위서 즉 소설인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난 상태이므로 무시해도 좋다. 남편은 삼국유사에서는 음갈문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화랑세기에는 김용춘, 흠반, 을제 3명의 남자가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써 있다. 다만 화랑세기는 앞서 언급 했듯이 역사적인 가치는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신라는 골품제의 나라였으므로 다른 골품 및 외부의 혈통이 전혀 섞이지 않은 성골들만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성골이 계속 줄어들다 보니 성골끼리의 근친혼으로 겨우 대를 잇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 이미 다른 남성 성골들이 모두 대가 끊긴 상황에서 진평왕마저 아들이 없어서, 남성 중심 사회였던 고대 동아시아 환경에서 여성이었음에도 성골이란 이유로 그녀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신라가 개방적인 사회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골품제가 심한 폐쇄적 사회였기 때문에 발생한 여왕 즉위라는 특수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년인 진평왕 재위 53년의 여름 5월에 대규모 반란 기도가 있었는데, 바로 칠숙·석품의 난이었다. 이 시도는 진평왕에게 적발당해 칠숙은 동쪽 시장에서 목이 베어졌고 구족을 멸족당했다. 아찬 석품은 백제로 도망가다가 처 자식을 보고 싶다며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오던 중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헤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는데 들통나서 붙잡히고 역시 처형당했다.
이것이 단순히 진평왕에 대항한 반란인지 아니면 여성인 선덕여왕이 즉위하는 것을 반대한 반란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있은 후 진평왕이 세상을 떠난 것을 보았을 때 이미 고령의 진평왕이 몸이 좋지 않았고, 후계자로 선덕여왕이 지목된 상황이라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632년, 진평왕이 붕어한 뒤 덕만공주가 보위에 오르니 곧 선덕여왕이다.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선덕여왕은 선왕이자 부왕인 진평왕이 딸인 선덕여왕을 위해 준비한 왕권 강화 및 안정 정책들을 토대로 안정된 왕권이라는 유산을 바탕삼아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었다는 평을 받으며, 바지사장이나 얼굴마담이라는 식의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3. 즉위 이후
선덕여왕이 정확히 몇 살에 왕위에 올랐는지를 기록한 것은 없다. 다만 선왕이자 아버지인 진평왕이 굉장히 오래 재위한 것과 조카인 태종 무열왕이 603년생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를 역산하여 보았을 경우,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를 아무리 젊게 잡아도 50대 이상의 장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위 당시 국인들이 선덕여왕에게 바쳤다는 '성조황고(聖祖皇姑)'에서도 선덕여왕을 칭송하는 미칭에 굳이 '할머니'를 뜻하는 姑자를 쓴 것을 지적해서 이 칭호도 선덕여왕이 즉위했을 때 고령이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이 있으며, 이를 두고는 단순히 존경의 의미에서 굳이 姑자를 썼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밖에도 삼국사기의 편찬 총책임자 김부식 역시 선덕여왕 기사의 사론에서 선덕여왕을 '늙은 할미'로 묘사했으므로, 그런 소리 들을 정도의 고령이었다는 주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실제 즉위 당시 선덕여왕은 주보돈, 서영교 등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고령으로 묘사되는 편이다.
주보돈에 따르면, 진평왕 말년 '신라 최초의 모반사건'인 칠숙의 난은 선덕여왕의 즉위를 저지하려는 시도였다.
"이미 진평왕 말년 신라 최초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유력한 귀족인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은 선덕의 왕위 계승 추진에 불만을 품고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다. 사전 발각으로 실패하였지만 이는 여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뜻한다."
선덕여왕은 즉위 직후 대사면을 단행하여 자신이 왕이 된 것을 널리 알렸다. 또한 모든 주와 군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주는 등 선정을 베풀겠다는 나름의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선왕인 진평왕은 딸인 선덕여왕의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생전에 여러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즉위 직후 주군의 조세 1년 면제라는 건 선덕여왕의 치적에 바탕을 둔 것보다는 부왕이 그간 쌓아 올린 국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일 테니 그 역시 진평왕 나름의 딸을 위한 최후의 노력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남성 중심 문화는 여왕의 권위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국왕의 권위는 이전보다 약해졌고 내외적으로는 음해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주보돈 등 학자들은 선덕여왕의 권좌가 재위 초부터 불안했다는 해석을 한다. 이렇듯 정치적으로도 그다지 좋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개인적으로도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 고령이었기 때문인지 즉위 5년(636) 3월에 병이 들었는데 의약과 기도가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재위 3년에(634)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하였다. 재위 4년(635)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책봉 받으며 국제적으로도 그 권위를 일단은 인정받았다.
그러나 국경의 상황도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정치, 군사적인 압박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신라는 선덕여왕 시대에 들어 상당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고구려와의 충돌은 백제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다. 선덕여왕 시대 15년동안 기록 상으로 드러나는 고구려의 공격 기사는 세 번 뿐인데, 재위 7년(638)에 칠중성(오늘날의 파주 적성면) 공격이 있었으나 알천이 막아내었고 선덕여왕은 다음 해(639)에 고구려와 접한 하슬라주(오늘날의 강원도 강릉시)를 북소경으로 삼고 군사를 배치하는 등 북부 전선을 보강하였다. 그러나 재위 13년(644), 연개소문이 직접 나선 공격을 받아 끝내 성을 2개 탈취 당했고 회복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고구려가 백제만큼 공세적으로 나오지 못한 이유에는 딱히 신라에 대한 호감 같은 것보다는 문자 그대로의 백만대군을 맞아 싸웠던 고수전쟁의 후유증이나 당나라의 불온한 정세, 그리고 곧 이은 고당전쟁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백제였는데 그 공세가 가히 파상공세였다. 재위 3년(633)에 백제 무왕이 서곡성을 침공하였고 13일만에 함락하였다. 이곳은 무주의 나제통문을 넘어 현재의 경북 성주로 이어지는 산악지역이었는데, 백제의 영토인 전북 무주에서 신라왕경 경주로 이어지는 최단거리 코스의 첫 단추가 되는 전략 요충이었다. 이렇듯 흉한 조짐이 나타나며 초기부터 분위기가 좋지 못하였고 특히 재위 11년(642)에 그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시기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으로 미후성을 비롯한 40여개의 성들을 빼앗겼고,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 공격을 계획하여 당항성으로 진격하는 당나라와의 외교 라인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는 특히 낙하산 인사인 대야주 도독 김품석의 실책이 맞물려 윤충에게 대야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이 해의 가야 전역은 최대 50개에 육박하는 성들과 서부 최대 핵심 요충지 대야성이 걸린 전역이었으므로 신라에 상당한 타격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대야성이 함락당한 이후로는 압독주가 대야성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결국 이제 신라의 수도인 경주가 압독주 하나만 두고 적에게 위태롭게 노출되었다는 문제는 여전했다. 대야주가 뚫리면 압독주가 있지만 압독주가 뚫리면 그대로 수도 직공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신라가 백제 멸망 이후 거의 가장 먼저 진행한 행정조치 중의 하나가 바로 그때껏 회복하지 못했던 대야주에 압독주의 도독부를 다시 옮겨 설치하고 기존의 악화된 수도 방위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선덕여왕 시대에서도 특히 중대한 위기로 여겨지는 사건이다. 당장 이 당시 신라 본인들의 기록에서조차 이런 기록이 나타난다.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를 여러 차례 하여 수십 개의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제 두 나라가 군대를 연합하여 기필코 우리나라를 빼앗고자 이번 9월에 크게 병사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이리 되면 우리나라의 사직은 보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보려 하오니, 약간의 병사라도 빌려주어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임금은 일의 사정이 궁하고 계책도 다하여, 오로지 대국에게 위급함을 알려 나라가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라본기 선덕왕 12년(643)
주보돈 교수 등에 의하면 귀족들을 견제하며 그때껏 위태롭게 유지되던 여왕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무너져버린 사건으로서 역시나 신라의 상당한 위기였음을 재확인하였다. 여왕은 물론이거니와 그 지지 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을 위시한 가야계 세력의 입지도 위기에 내몰렸고, 더 나아가 국토 방위 실패의 책임이 심각하게 제기되며 여왕으로서의 권위에 심대한 타격이 가는 등 그 기반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선덕여왕의 시대 전반을 위기의 시대로 해석하는 학계 인사들의 해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족이지만 백제의 공세는 선덕여왕의 다음 대로도 계속되어 다음 대인 진덕여왕 시대에 신라가 빼앗긴 성의 수는 총 20개나 되었고, 그 다음 대인 무열왕 시대에 빼앗긴 성의 수는 총 33개나 되었는데, 선덕여왕을 포함하여 신라 국왕 3대 내내 무려 1백개의 성이 무너져내렸던 것이고, 그것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백제 최후의 왕 의자왕이었다.
이렇듯 외침이 이어지는 가운데 자연재해도 끊이지를 않았다.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여러 재해가 끊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 11년(642) 가을에 있었던 가야 전역의 참패와 그 위기를 타개하고자 선덕여왕은 바로 그 해 겨울에 먼저 고구려에 김춘추를 파견하여 백제를 치도록 군사를 빌려달라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그 대가로 죽령 이북의 땅 즉 진흥왕대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했는데, 본인들도 그 땅을 정말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동맹을 거부하고 김춘추를 욕보이고자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김춘추는 이런 제안에 "차라리 나의 목숨을 가져가라"며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며, 보장왕은 김춘추를 별관에 유폐하였다. 김춘추가 위기에 빠지자 선덕여왕은 김유신에게 명을 내려 구출하도록 하였고 이에 김유신이 3천 내지 1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남쪽에서 무력시위를 하였다. 그러던 중 김춘추는 구토지설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다음 보장왕과 연개소문에게 땅을 주겠다 거짓말하고 빠져나왔다. 물론 발언을 꺼낸 당사자인 고구려조차도 별 기대를 안 했던 일이니만큼 실제 땅을 돌려주는 일은 없었으며, 다음 해에 연개소문이 마치 너희가 알아서 주지 않으니 우리가 직접 가져가겠다고 말이라고 하는 듯 직접 신라의 두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사실 죽령 이북의 문제도 문제거니와 고구려가 이렇게 나오는 게 그다지 이상한 결정은 아니었던 것이, 다름 아닌 바로 그 해 가을에 백제한테 대야성까지 무너져 난리가 난 것을 고구려라고 모를 수가 없는데 불과 석 달 정도 지난 그 해 겨울에 찾아와서는 백제를 치도록 군사를 부탁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니 땅을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무리한 부탁을 해 내쫓아버린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셈.
아무튼 당나라는 후에 고구려에게 신라를 치지 말라고 상리현장으로 하여금 교섭하게 했는데(644), 연개소문은 으레 김춘추에게 말한 것처럼 "수나라랑 전쟁할 때 신라가 가져간 땅 5백 리를 내놓으면 가능하다." 라는 대답을 했다. 신라를 버림으로써 양면전선이라는 부담이 남게 되기는 하지만 신라 정도는 백제가 맡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 당나라의 개입 직전까지 나제 양국 간 분쟁에서 백제가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기는 했다. 선덕여왕 이후에도 당나라의 지원군을 애타게 기다리며 사직의 명운을 두고 근심하는 무열왕 김춘추의 모습은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이러한 여-제-왜의 협력 관계는 여제 양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에 마지막 수단으로 다음 해인 643년에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군사를 빌리는 데에 또다시 실패한다.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가 간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어리석고 못난 자' 정도로 기록된 사신이 당나라에 가서 위와 같이 사직을 구해달라며 읍소하였던 것인데 여기에 당태종은 "나의 사촌을 보낼 테니 신라의 국왕으로 받아 섬겨라."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며 비웃었고 사신은 그 앞에서 당황한 나머지 다만 "예."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걸 보고 당태종이 '어리석고 못난 자'라고 또 비웃어서 기록에도 이름 대신 '어리석고 못난 자'라고 남게 된 것.(...) 다만 선덕여왕의 친당 외교는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실제 당면한 적성국 고구려라는 국제적인 문제도 있었던 관계로 나당 양국은 그나마 우호 관계로는 남을 수 있었다. 다만 선덕여왕 시대에 김춘추가 입당하거나 대당 외교 행보에 나선 적은 없다. 나당연합의 신라 측 주도자로 평가 받는 김춘추는 다음 왕인 진덕여왕 시대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당 외교 행보를 밟기 시작한다. 삼국사기 외에도 구당서 고려전 정관 18년조(644)에는 '신라가 수 차례에 걸쳐 원조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걸 보면 신라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에 걸쳐 군사를 빌려달라고 요청했음이 확인이 된다. 다만 당은 끝내 군사를 빌려주지는 않았다.
이렇듯 나라가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선덕여왕은 나름의 자구책을 내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김유신이었다. 선왕인 진평왕 시대 낭비성 전투에서 이미 이름을 떨쳤던 김유신을 재위 11년의 가야 전역 이후 김춘추 감금 사건 등을 기점으로 중용하기 시작하였고 김유신은 선덕여왕 시대에 본격적으로 유력한 차기 왕위 계승자인 김춘추와 더불어 조정의 양대 거물이 되었다. 실제 선덕여왕 13년(644년) 가을에는 백제 변경 7성을 빼앗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의지할만한 구석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듯 그나마 실적도 내어주니 "나라의 존망이 그대(김유신)에게 달려 있다"는 칭찬을 하면서 더 열심히 굴린다(...). 실제 이 말 했을 때가 언제냐면, 재위 14년(645) 3월에 백제가 한 번 쳐들어왔다가 김유신에게 격퇴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직후 또다시 쳐들어오자 집에 아직 가지도 못했던 김유신에게 명을 내려 도로 나가 싸우도록 명령을 내리던 때의 일이다. 아무튼 김유신은 이렇게 조정 거물로서의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해 5월에 선덕여왕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3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협공하였는데, 이 틈을 타서 백제가 신라의 7성을 빼앗음으로써 그나마 챙겼던 그 군사적 성과마저 고작 1년을 채 못 버티고 무색하게 만든 모양새가 되었다. 참고로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침공해오는 적군을 저지하는 것 외에 선덕여왕이 치세 15년 내내 거둔 영토적 성과는 이 해의 7성이 전부다. 게다가 고당전쟁은 나당 연합의 패배로 막을 내렸는데, 선덕여왕은 3만의 대군을 파병하고도 국내에 내놓을만한 성과가 없었다. 이것이 또 선왕인 진평왕과 비교가 되었을 것이 자명한데, 선왕인 진평왕은 고수전쟁 당시 선덕여왕이 그랬듯이 수나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협공하여 5백 리의 영토를 빼앗는 성과를 거두는 등 고구려의 침공이라는 위기를 보란듯이 타파하는 명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바가 있었기 때문. 군사상의 실정이 위와 같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국가에 사직의 존망이 입에 오르내릴 정도의 심대한 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또다시 이어진 이 3만 대군 파병의 실패는 귀족들의 분노가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 강도 높은 숭불정책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각지에 수많은 사찰들이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남아서 확인되는 바로만 여왕 재위기간 내내 무려 25개나 되었다. 참고로 신라 중고기 때 창건된 절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와 금석문 등 여러 자료들을 통틀어서 전해지는 것들의 숫자가 약 45개 정도임을 고려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인 셈이다. 가령 재위 3년(634)의 분황사 건립, 재위 4년의 영묘사 건립, 재위 14년의 황룡사 9층 목탑 등. 사찰을 짓는 것 외에도 본인의 병에 차도가 없자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어 승려를 모아 인왕경을 강론케 하고 1백 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거나 신라십성 중 하나로 추앙 받는 자장법사를 후원하여 당나라로 유학 보내는 등 불교 후원에 아낌이 없었다. 이러한 정책은 기본적으로는 국난을 맞은 여왕이 왕권 강화, 대민 통제, 민심 안정, 내부 결속 강화 등을 이루기 위한 의도 하에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위 9년(640) 경에 당태종이 국학을 1천 2백 칸으로 늘려 짓고 학생 수를 늘려 3260명으로 채우는 등 유학생 받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에서까지 자국의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키는 중이었는데 선덕여왕이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신라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때 당나라 서울에 이러한 여러 나라의 자제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4. 비담의 난과 죽음
말년인 재위 15년(646)이 되자 귀족들의 반발이 더이상 억누르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해진 듯, 선덕여왕은 그 해 겨울 11월에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하지만 불과 2개월 뒤인 16년(647) 정월에 비담이 염종 등과 더불어 난을 일으키고, 이때 내건 명분이 바로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라 정계에 한 바탕 물갈이가 벌어지고 이후 정국을 무열왕계가 장악하게 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 사건이지만 정작 기록은 적고 따라서 논란도 많다. 원문의 '여주'가 선덕여왕 개인을 말하는지, 여성이라는 성별 자체를 말하는지, 아니면 진덕여왕을 말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고, '여주'의 해석 문제를 넘어서서 비담과 염종 등 귀족들이 난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많이 있다. 가령 이도학 교수는 당태종의 '여왕 폐위론'이 비담의 난에서 똑같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들어 당태종의 여왕 폐위론에 자극 받은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해석을 하는데 다른 학자들 사이에서도 확인이 되는 학설이고, 주보돈 교수는 진덕여왕의 즉위에 반발하여 벌어졌다는 해석을 하기도 하고, 노태돈 교수는 고당전쟁 당시 파병이 또다시 신라의 패배로 막을 내리는 등 군사상의 실정이 귀족들을 자극하는 데에 일조하였다는 해석을 하기도 하고, 후술할 '부정적 평가' 항목에 나오다시피 선덕여왕의 숭불정책을 비판하는 경우에는 무리한 숭불정책이 일조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하는 등. 어쨌든 상대등 이하 귀족들이 선덕여왕의 정치에 반발을 품은 결과로 일어난 일임은 분명하다. '여주'가 무엇이고 난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선덕여왕의 정치가 인정을 받았다면 나올 이유가 없는 구호이자 벌어졌을 일도 아니기 때문. 그런데 심지어는 아예 처음부터 비담의 반란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선덕여왕의 후계자로 사촌 승만을 세워 성골 계승 원칙을 유지하려던 김춘추, 김유신 세력이 구 귀족 세력의 완전한 제거를 위해 선수 치고 나선 친위 쿠데타이고 여기에 비담에 반발하여 '여주불능선리'의 명분을 내걸고 대치하였던 것이라는 설까지 있을 정도다.
아무튼 보통 반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반란의 주동자가 여느 귀족이 아니라 화백회의 수장인 상대등이었고, 왕성을 둔 공방전이 10일 이상 지속되었으며, 유성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선덕여왕이 근왕군이 패배할 것이라면서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는 묘사가 나타나는 등 근왕군이 상당히 위기에 몰려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 반란은 김유신이 연을 띄우는 기지를 발휘하여 전세를 뒤집고 진압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것이 바로 한국사상 최초로 연(장난감)이 문헌 상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선덕여왕은 1월 8일에 죽었는데, 반란이 그 1월에 일어난 이래 왕성을 둔 공성전이 분명 10일 이상 지속되었다 한다. 따라서 기록 상으로 그저 '봄 정월'에 시작되었다는 이 반란이 가장 이른 1월 1일에 시작된 반란이라 해도 선덕여왕이 반란 와중에 세상을 떴다는 계산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실제 반란을 일으킨 비담에 대한 처벌이 선덕여왕 본인이 아니라 다음 왕인 진덕여왕의 손으로 행해지고 그 날짜는 그 달 17일이다. 이때 비담 이하 관련자 30인의 목이 떨어졌다. 선덕여왕이 반란의 진압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그 와중에 세상을 떴다는 것은 이렇듯 기록 상으로 확인이 가능하며, 실제 주보돈 교수 등 학계 인물들 역시 선덕여왕이 반란 와중에 죽었다고 보는 등 전반적으로 이견이 없어 보인다.
이렇듯 어수선한 정국을 정리하지 못한 와중에 죽었으니 그 원인 대해서도 여러 설들이 존재하는데, 반군에 의해 피살 당했다는 피살설, 이미 병중에 있었으므로 병으로 죽었다는 병사설, 반란의 충격으로 인해 죽었다는 쇼크사설 등이 있다. 반란을 거쳐 즉위하고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반란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니 참으로 혼란한 시대를 살다 간 군주였던 셈이다.
긍정적 평가
즉위 직후 나라 안의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이 없는 노인, 그리고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조세를 1년 간 면제해주었다.
숭불정책을 통해 황룡사 9층 목탑으로 상징되는 불교 문화를 융성시켰다. 경주라고 하면 떠오르는 첨성대, 분황사, 영묘사 등이 바로 선덕여왕 대의 작품이다. 영묘사를 비롯하여 여왕의 재위 15년동안 현재 확인되는 바로만 무려 25개의 절들이 신라 각지에 건립되었다. 신라 중고기에 창건된 절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와 금석문 등 여러 자료들을 통틀어서 전해지는 것들의 숫자가 대략 45개 정도이니, 선덕여왕 15년 동안에 지어진 사찰의 수가 그 중 절반 가까이 해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덕여왕은 신라십성 중 하나로 추앙 받는 자장율사를 후원하여 당나라로 유학 보내는 등 불교 후원에 아낌이 없었다. 이러한 불교 후원은 왕권 강화와 대민 통제, 민심 안정, 내부 결속 강화 등을 위한 작업으로서 예로부터 행해진 일들의 연장이자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된 일이었다. 그러한 의도가 있었음에 대해서는 하단 부정적 평가 등에서도 인정 받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선덕여왕의 모습을 본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주장과는 별개로 선왕인 진평왕은 똑같은 모양의 목상을 당시 여성 군주 스이코 덴노가 즉위한 일본으로 보냈는데, 그것이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고류지 반가사유상이라는 해석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불교 문헌들은 전반적으로 선덕여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실제 삼국유사 등에 남은 선덕왕지기삼사를 비롯한 불교계 설화들에서 선덕여왕은 지혜롭고 신비로운 여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지귀 설화에서는 선덕여왕이 미녀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선덕여왕이 불경이나 주역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려주는 측면도 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이러니 삼국유사를 근거로 선덕여왕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다. 삼국유사 연구가 등으로 알려진 고운기 교수는 삼국유사 속 선덕왕지기삼사 등을 근거로 선덕여왕은 천성이 맑고 지혜로운 여왕이자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통일신라를 건설한 영웅으로 평가 받는 김춘추와 김유신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며 중용되기 시작한 것도 선덕여왕 시대의 일이다. 선덕여왕은 외교적 고립 상태를 당나라와의 친선 관계 유지 및 강화로 대응해 나가고자 하였으며, 당나라 국학에 유학생 입학을 요청하고 파견했다.
5.2. 부정적 평가
선덕왕지기삼사 같은 불교발 설화들은 그 비과학적인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다시피 프로파간다, 용비어천가일 가능성이 높다. 선덕여왕의 치적을 논하는데 선덕왕지기삼사와 같은 일화가 평가의 근거가 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도리어 지기삼사의 내용을 제하고 보면, 선덕여왕의 치세, 특히 말년은 신라 최악의 내우외환의 시기 중 하나였다. 시대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해석할 여지는 있을지언정 ‘태평성대의 지혜로운 명군’ 등으로 볼 근거는 없다.
선덕여왕의 시대 전반이 내우외환의 시대였음에는 본문 등에서도 나온 바와 같이 주보돈, 노태돈, 서영교, 이도학 등 여러 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또한 본격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전근대에는 평가가 나빴는데 이는 주로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편찬 총책임자인 김부식은 선덕여왕의 치세 말미에 사론으로 "여자가 왕이 됐으니 나라가 망하지나 않은 게 다행이다." 라는 혹평을 하고 있다. 신라가 이러한 위기에 처한 이유로 선덕여왕이 여자였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하는 것인데 물론 이것은 현대에 선덕여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전근대적인 여성관에 기반한 편협한 평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한 전근대적인 여성 비하와는 별도로, 학계의 선덕여왕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적지 않다. 이는 선덕여왕의 단순히 위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이나 전쟁에서 거둔 성과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국가적 위기를 마주한 상황에서의 태도에 대한 평가이다.
후술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기를 마주한 상황에서 본인이 그 위기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본인 스스로 더욱 키워나갔다'는 것이다.
우선 서영교 교수의 경우, 저서인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2015) 등에서 선덕여왕을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는 데에 실패한 채 자신의 현실도피를 목적으로 불사에만 치중한 암군으로 평가하였다. 다음은 저서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의 관련 내용.
젊었을 때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그녀의 모습도 초췌한 노파가 된 당시에는 빛을 잃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쏟아부어야 할 경제력을 불사에 탕진했다.
그녀는 신앙에서 고난을 견디는 힘을 빌려 오고 있었고, 영혼은 이미 부처의 경이로운 세계에 가 있었다. 그녀의 정신을 담고 있는 몸도 건강하지 못했다.
늘 아팠고, 잔병에 걸려도 잘 낫지도 않았다. 즉위 5년이 되던 해에 병이 들었다. 어떠한 의술과 기도도 효과가 없었다. 황룡사에서 백좌법회를 열고 10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는 4개월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그녀는 부처의 영험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더욱 굳게 믿게 됐다.
현재 우리가 경주에 가면 여왕이 남겨 놓은 분황사의 탑과 첨성대를 보고 로망에 젖는다. 하지만 그녀의 화려한 사찰과 탑도 수많은 신라인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 641년 백제의 공격으로 낙동강 서안의 모든 지역을 상실했다. 신라가 절명의 위기에 처했지만 그녀는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에 비용을 쏟아부었다. 각 층마다 신라가 정복할 나라의 이름을 붙였다.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은 그 전란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대신 ‘공상적인 기대’로 주관적인 세계를 머리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냈다.
서영교,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중
선덕여왕의 군사적 실정을 비판함과 동시에, 숭불정책으로 묘사되는 무리한 사찰 건립의 연속에 따른 국력의 탕진 등을 비판하는 모습이다. 선덕여왕의 숭불정책이 단순히 정치적 목적 외에도 여왕 개인의 현실도피성 정책이었음은 후술할 주보돈 교수 등도 지적하고 있으며, 황룡사 목탑 사업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박승범(2014)조차도 대규모 토목공사에 대한 당대인들의 불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우려는 후술하는 삼국유사에서도 감지된다.
선덕여왕의 숭불정책은 단순히 정치적 목적 외에도 여왕 개인의 현실도피성 정책이었음은 후술할 주보돈 교수 등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측면은 '불교 문화의 발달'로 해석 되기도 하지만 명백히 안정기는 아닌 시점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반복한 것이 과연 당대를 살았던 민중들에게 좋게 해석 될 수 있는지를 지적하는 것이다.
사찰 건립이라고 해봤자 결국은 토목공사이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토목공사의 연속이 일각에서는 '불교 문화의 발달' 정도로 묘사가 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과연 당대를 살았던 민초들이 그렇게 여겼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바로 그 난세의 와중에 그 정도의 규모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서영교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의 화려한 사찰과 탑도 수많은 신라인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
이 외에도 이도학 교수 역시 정치적 실패와 무능에도 불구하고 정변 최종 승리 세력인 김춘추 세력의 사후 옹호 때문에 '현명한 군주'로 추앙된 지도자라고 평가하였다.
주보돈 교수도 선덕여왕에 대해 동정을 하면서도 그다지 좋은 평가는 하지 않고 암군으로 묘사하였다. "상당히 불행한 개인사와 정치사 속에서 회피, 도피의 수단으로 불교를 믿고 사찰을 지으며 침잠했다.", "선덕여왕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리더십이 없었다. 오히려 나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희진, 은예린 등 역시 공저 '그들은 어떻게 시대를 넘어 전설이 되었나'(2014) 등에서 선덕여왕에 대해 최초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에 가려진 무능한 군주로 평가하였다. 수세에 몰린 채로 거듭되는 패전에 대한 비판에 더해, 그 숭불정책에 대해서는 법흥왕 때부터 계속되던 것이었으므로 새삼스럽게 의미를 가질 상황도 아니었고 특히 사찰 건립 등에 대해서는 이미 지어진 다른 시설들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데도 위기 상황 속에서 오히려 쓸데없는 공사를 벌인 것, '신라 시대판 전시행정'으로서 무리한 불사에 대한 집착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현대 대중 사이에서 선덕여왕이 유독 태평성대의 명군 등으로 묘사된 이유에 대해서는 현대에 대두한 페미니즘 세력의 정치적 필요를 그 이유로 들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이다. 그러니 여성 통치자도 남성 못지않은 능력을 보였다고 하는 편이 이른바 '페미니즘'의 논리를 정당화시키는 데에 중요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최초'가 아닌 여성 통치자라고 이런 이미지가 필요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최초'가 가지는 의미와 인상은 강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덕여왕의 업적을 최대한 포장하려는 성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는 이른바 '페미니즘'적 필요에 의해 과대포장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의 권리'를 찾는 거야 나무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역사를 만들어내거나 왜곡시키면서까지 여성 통치자의 위상을 높이려 하는 것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희진, 은예린 공저, 그들은 어떻게 시대를 넘어 전설이 되었나 중
실제 선덕여왕은 학계와는 별개로 여성 리더십, 우먼 파워를 강조하는 여성계에서는 유독 후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여왕이 안팎으로 위기상황에 직면한 상황에서 행했다는 그 숭불정책이라는 것에는 이밖에도 아래와 같은 비판이 따른다.
조원숙(2009)은 선덕여왕의 당초 의도와는 별개로 숭불정책의 결과가 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립 목적이 아니라 건립 후의 상황 변화일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황룡사구층목탑의 건립 배경이나 과정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지만 실제 그것이 조성된 이후의 상황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된 바가 없다. 당시 신라가 외침에 시달리고,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종의 토목공사를 수행하는 것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즉 거듭되는 토목공사는 민심을 이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박순교(2000)역시 국난을 극복하고 민심을 달래고자 하는 의도와 달리, 무리한 불사 조영 사업을 추진한 결과, 지배층 내부는 물론이고 기층민들의 불만까지도 키우며 여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확산시켰으며, 비담과 염종의 난을 불러일으키는 계기의 하나로까지 작용하였을 가능성을 묻는다. 이인철(1999)역시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안한 선덕왕대의 대내외적인 주변 환경은 탑을 세우는 행위를 낭비적인 사안으로 인식하게끔 했을 개연성이 크다. 선덕왕은 진평왕대로부터 이어지는 대외 전쟁으로 인해 파탄된 민생 경제를 배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영 사업을 시행했기 때문에 기층민의 불만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선덕왕은 여왕 통치가 갖는 정치적 허약성을 극복하고 외침을 방어할 수 있다는 예언적 신념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분황사를 창건했고 그 외침 방어의 효험이 떨어져 다시 백제의 침략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황룡사구층탑을 건립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질적인 대책이 되지 못함으로써 여왕통치의 모순만 드러낸 채 여왕의 즉위와 통치에 반대 입장을 견지해왔던 귀족 세력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노태돈 교수는 선덕여왕의 군사적 실정이 비담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사찰을 짓고 탑을 올려서 나라의 결속과 왕권을 공고히 한다는 당초의 취지는 결국 무색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사찰 정책은 정치적으로 실패작이었다.
난은 비록 진압되었다고 하지만 난이 진압되었으니 문제가 없다는 평가는 상당히 결과론적인 평가다. 사찰을 짓고 탑을 올려서 나라의 결속과 왕권을 공고히 한다는 당초의 취지는 결국 무색해진 것이다. 물론 그 난을 진압한 게 선덕여왕이 중용한 김유신이기는 했으나 역시 선덕여왕의 인사에 대한 평가라면 모를까, 숭불정책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식의 변호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술한 선덕여왕 시대의 위기로 말미암아 현실 정치에서 정치, 군사적인 실패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짐으로써 여왕이 그와 같이 힘을 기울였던 숭불정책조차도 그 효험을 잃게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선덕여왕 시대에 그렇게 열심히 사찰을 지은 이유가 여왕의 정치적 허약성을 극복하고 부처의 힘으로 외침을 방어할 수 있다는 예언적 신념을 신민에게 심어주기 위한 행보였다면, 마냥 사찰만 올려서 끝날 일이 아니라 정말로 외침을 막아내는 실질적인 성과를 냄으로써 군주의 위엄을 드러내고 백성들과 지배층에게 그 소위 숭불정책이라는 것의 효험, 부처가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다는 예언적 신념에 대한 증명을 해냈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덕여왕은 기록 상으로 보이다시피 현실에서 연전연패를 면치 못하였던 탓에 그런 위엄을 세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재위 3년(633)에 서곡성이 무너지고 나니 백제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겠다며 분황사를 세웠음에도(634) 백제는 다음에 기어이 가야 40여성과 대야성을 무너뜨렸고, 그리하여 "사직이 무너지겠다" 라는 비명이 터져 나오는 위기 상황 속에서 다시 그러한 외침을 불심으로 극복하겠다며 황룡사 9층탑을 올렸는데도(645) 고당전쟁이 나당연합의 패배로 막을 내리고 신라의 정세가 호전될 기미가 끝내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이러니 기존에 '불심으로 외침을 극복한다'는 슬로건이 나라 사람들에게 더는 통하지가 않게 되었고, 이렇듯 실질적인 대책이 전혀 제시되지 못하면서 여왕 통치의 모순만을 드러내, 여왕의 즉위와 통치에 반대 입장을 견지해왔던 귀족 세력에게 더욱 불만을 사는 한편 여왕 폐위의 명분만을 더욱 던져주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학자에 따라서는 정말로 그 사업이 '왕권 강화, 민생 안정' 등의 목적으로 진행된 사업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가령 주보돈 교수의 경우에는 그러한 목적이 있었음을 긍정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덕여왕이 본인의 불행한 인생으로부터의 현실도피처로서 불교를 이용한 측면이 있으며 본인이 거기에 침잠했다는 평가를 한다. 이는 서영교 교수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황룡사 9층탑의 실상이란 숭불정책이라는 명분에 앞서 선덕여왕이 자장의 허술(許術)에 속아넘어간 결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무언가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자장이 자신이 가져온 불사리의 거국적인 봉안을 통해 자신과 불교계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도모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위해 평소 여왕의 콤플렉스였던 여성이라는 성별을 이용하여 '여주에게 위엄이 없다'면서 여왕을 자극하였고 그렇게 선덕여왕을 허술로서 조종하는 데에 성공한 결과가 바로 황룡사 9층탑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자장의 권유를 받아들이려던 선덕여왕이 건탑 의지를 밝혔을 때의 기록도 주목할만 하다. 해당 삼국유사 기록 속의 '신하'들은 적어도 이러한 사탑 조영 사업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해석이다.
자장법사의 건의를 받아들이려는 선덕여왕에게 이들은 "백제에게 장인들을 청한 이후에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즉 "우리나라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고 외국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라고 해석 될 수 있다. 이는 선덕여왕의 건탑 의지에 우회적으로 우려 내지는 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장인을 부탁하였다.', '소공의 숫자가 200명이었다'는 등의 기록은 건탑에 기울인 경제적 부담을 비롯한 국가의 부담이 컸음을 재확인하는 부분.
서영교는 선덕여왕의 군사적 실정을 비판함과 동시에, 숭불정책으로 묘사되는 사찰 건립에 따른 국력의 탕진 등을 비판한다. 선덕여왕의 숭불정책이 단순히 정치적 목적 외에도 여왕 개인의 현실도피성 정책이었음은 후술할 주보돈 교수 등도 지적하고 있으며, 황룡사 목탑 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박승범(2014)조차도 대규모 토목공사에 대한 당대인들의 우려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 우려는 후술하는 삼국유사에서도 감지된다.
상술하듯 주보돈, 서영교, 이도학 등 여러 학자들이 선덕여왕에게 비판적 평가를 남겼다. 단순히 '선덕여왕이 처한 시대적 배경을 무시했다'고 평가절하하기에는 해당 인사들의 숫자나 면면은 그렇게 양적, 질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그녀의 재위 기간은 안팎으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왕위도 심히 불안정하였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었지만 반란을 거쳐 즉위하고, 마침내 반란 속에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6. 대외적 압박에 대해
“우리 임금께서는 일의 사정이 궁하고 계책도 다하여, 오로지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나라가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2년(643), 신라 사신이 당태종에게 구원병을 간청하며
선덕여왕의 시대가 위기의 시대였다는 부분에는 학계 여러 인사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보돈, 노태돈, 서영교, 이도학 등은 여왕의 시대를 내우외환의 시대, 심각한 위기로 규정하고 있다. 한림대 인문학부 김명준 교수 역시 2013년 논문을 통해 선덕여왕 대를 군사적, 외교적, 내부적 위기의 시기로 규정하고, 여왕이 불교치국책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고 해석하였다.
"선덕여왕 대는 삼국 간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로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군사적 공격을 받았다. 게다가 ‘여성’ 군주가 갖는 한계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한에 이르게 하였다. 당 태종의 꽃씨 선물에 담긴 희롱, 대리 통치 요구와 대내적으로 비담과 염종의 반란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당대 긴장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축적된 위기의 유산과 여성 군주로서의 한계를 가졌던 군왕이라 할 수 있다. 여왕은 이러한 위기와 한계를 ‘불교치국책’으로 극복하려 했다."
선덕여왕 시대를 심각한 위기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국사편찬위원회 측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산하 사이트인 우리역사넷 등은 선덕여왕 시대에 대해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도발을 받아오던 중 특히 백제의 빈번한 침입으로 자국의 國土守護마저 불안하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던 상황이었다." 고 평가한다.
비담이 상대등에 오른 것과 비담의 난을, 사건 4년 전 당태종의 여왕 비하에 이어지는 맥락으로 규정하는 것도 비담의 난을 바라보는 학계의 유명한 설 중 하나이며, 이도학 교수 등도 지지하고 있다. 한편으로 주보돈 교수 등은 이 난을 진덕여왕의 즉위에 반대하여 벌어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노태돈 교수는 선덕여왕의 군사적 실정이 비담의 난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당의 동진이 저지된 상황에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시달리는 형편이었으며, 백제와 연결된 왜의 동향도 우려의 대상이었다. 아울러 신라 내부에선 645년 전쟁에 직접 참전하였다가 실패로 끝난 정책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논란이 조정 내에서 있었던 것 같고, 후사가 없는 여왕의 후계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여성이라는 성별이 주변 각국에 웃음거리가 되어 공세가 더욱 강화되었다는 해석이 존재하는데, 실제 당태종이 신라의 위기를 두고 내린 평가라든가 자장이 황룡사 9층탑을 건의하면서 내놓은 의견 등 기록 상으로도 나타나는 부분이다.
반대로 그러한 해석이 과도하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한성대 한국고대사연구소의 박승범 학술연구원은 2014년 논문을 통해 643년 대야성의 함락을 제외하면 신라의 국가적 위기는 없었으며, 다만 김춘추-김유신의 사륜(진지왕)계-금관가야계의 정치적 실각 위기를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주장하였다.
"황룡사9층 목탑에 대한 기존 인식은 7세기 들어 심화된 국가적 위기에 처한 신라가 이를 타개하고, 신라 중심적 천하관을 더하여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탑이 논의되었던 643년까지도 대야성의 함락을 제외하면 국가적 위기의식을 초래할 만한 상황은 없었다. 위기의 실상은 당대 신라사회를 주도한 사륜계-금관가야계의 정치적 실각의 가능성이었다."
선덕여왕이라는 '개인으로서의 여주'가 아니라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별로서의 여주'가 진짜로 문제가 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가 강해졌다는 부분도 역시 불명확하다. 이미 선대 진평왕 시절부터 드러나는 전쟁 기사들이나, 당나라에도 고구려가 길을 막고서 조공을 못 하게 하며 또 자주 침입한다고 하소연하는 기록 등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신라 조정 내부의 사정과는 별개로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는 선덕여왕의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로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이어지고 있던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기록에 기초한 해석.
당태종의 모란꽃
첫째,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3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는데,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였다.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씨를 뜰에 심도록 명하였다. 그 꽃이 피었다 지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첫째.
앞의 임금 때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덕만에게 보였더니, 덕만이 말하였다.
"이 꽃은 비록 아주 아름답기는 하지만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덕만이 대답하였다.
"꽃을 그렸으나 나비와 벌을 그리지 않았기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것은 분명히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꽃씨를 심어보았는데,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덕만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이를 어떻게 미리 알았는지 대답하는 부분도 있다. 그건 아래의 '옥문지와 개구리' 참고.
옥문지의 개구리
둘째, 영묘사의 옥문지에서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일 ~ 4일 동안이나 울어대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급히 각간인 알천(閼川)ㆍ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 2천 명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어보면 그곳에 반드시 적군이 있을 것이니, 습격해서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숨어 있기에 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우소(亐召)란 자가 남산(南山)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또 포위하여 활을 쏘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병사 1,200명이 왔지만 역시 쳐서 죽였으니, 단 1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둘째.
여름 5월, 개구리가 궁궐의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개구리의 성난 듯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서남쪽 변경에 지명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웃 나라 병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리고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기습하려고 무장한 병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그곳에 숨어 있었다. 알천이 습격하여 그들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5년(636년).
일단 정사인 삼국사기에 실린 이야기가 이렇다. 이 기사를 정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없으며, 여왕이 첩자를 부렸다는 설, 혹은 여왕이 방어에 성공한 다음 불교계가 퍼뜨린 프로파간다라는 설 등이 있다. 어쨌든 막아낸 건 잘한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여근곡', 삼국사기에는 '옥문곡'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 지역을 두고 삼국유사 등을 기반으로, 경주시 근처에 지금도 실제로 있는 지형인 '여근곡'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위치의 문제도 그렇고 당시 나제의 상황도 그렇고 특히 '독산성을 치려고 하였다'는 정황을 보았을 때 경주 근처 여근곡은 말이 안 되며, 그냥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서부 전선의 어딘가로 보는 게 옳다.
신종원 등의 주장에 따르면 '옥문(玉門)'과 '여근(女根)'이 둘 다 여성의 음문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일연이 그냥 여길 여근곡이라고 대충 비정해버린 듯하다고 한다. 실제 이 아래의 기사는 그러한 주장에 신빙성이 더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삼국유사에 따르면, 위의 모란꽃 일화와 개구리 일화를 두고 신하들이 선덕여왕에게, 어떻게 그걸 미리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덕여왕의 대답이 다음과 같았다.
"꽃은 그렸지만 나비는 없었소. 그래서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이것은 당나라 황제가 내가 남편이 없는 것을 비웃은 것이오.
개구리가 화가 난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자의 음부요.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소. 남근이 여근 속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 법. 그래서 쉽게 잡을 줄도 알았소."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왕의 성스러운 지혜에 탄복하였다.
3가지 색깔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것일까?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이들이다. 당나라 황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둘째.
그런데 모란꽃 일화의 경우, 실제 역사 속 당나라에서는 모란꽃과 나비가 같이 그려진 그림을 선물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로 여겨졌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모란꽃을 부의 상징으로, 나비를 '영원하지 못함'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모란꽃과 나비가 한 그림에 같이 그려진 것은 '영원하지 못하고 머지않아 고갈될 부'였으며, 선물을 할 때는 반드시 나비를 뺀 모란꽃 그림을 선물했다. 결국 위의 설화가 사실일 경우, 모란꽃 설화는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니라, 사실 그러한 문화 차이를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서 "저놈이 나 노처녀라고 씹는 거지?" 라고 오해한 이야기라는 것.
그런데 선덕여왕에게는 남편이 있었다는 게 다름 아닌 같은 책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즉위할 무렵에 이미 고령이었다는 점을 보면, 원래 남편이 있기는 했으나 당 태종이 그림을 보낼 당시에는 사별한 상태였을 수도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기록 상의 충돌은 없어진다.
자신의 죽을 날을 예지
셋째, 왕이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여러 신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 지내라."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다시 어디인지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다."
그 달 그 날이 되자 왕은 과연 세상을 떠났다. 여러 신하들이 낭산의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때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셋째.
이 설화는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사기에는 다만 '낭산에 장사지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사천왕천의 위쪽을 이야기한다.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선덕여왕릉 밑에 세웠으니, 선덕여왕릉은 도리천이 되는 셈. 일각에서는 문무왕이 사천왕사의 권위를 높이려고 지어낸 이야기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영묘사 건축과 두두리
조선 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선덕여왕 시대에 영묘사를 건립할 당시 두두리(頭頭里)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영묘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역시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엄청난 규모의 대역사였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편이다.
또한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 마지막 부분에도 영묘사 건축이 언급되는데, "선덕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양지사전은 현대까지 전해지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는 불명이다.
첨성대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 마지막 부분 따르면, 선덕여왕 시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는 것이 별기(別記)에 전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별기 또한 현대까지 전해지지 않아서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한 이유
황룡사 9층 목탑과 관련해서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승려 자장율사가 당나라의 태화지 옆을 지나가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서는, "신라는 여왕이 다스리니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꾀하는 것이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바로 나의 맏아들인데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가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다. 고국에 돌아가거든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워라. 그리하면 이웃 나라들이 모두 항복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장이 그 말을 듣고는 선덕여왕에게 가서 9층탑을 지어야 한다고 했고, 선덕여왕이 이 말을 믿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