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각장(외 1편)
안지은
사라져야 한다면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에서부터
얼음이 녹는다 밖은 여전히 춥고
알몸의 우리
얼음에게 체온을 나눠주는 것이 미워하는 마음이라 생각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사람들의 정수리를 헤아리는 것이
이해의 전부인 줄 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현수막이 휘날리면
우리를 읽어주세요
옹알이 하며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고
착한 아이가 될게요
앵벌이를 하면
그때부터 세계는 흑백 텔레비전
어른들은 무성영화를 사랑하지
어머니 아버지 우리를 손에 끼고 구연동화를 해 주세요
우리에겐 목소리가 없으니
노래를 꿈꾸지 않겠습니다
연필 뒤에 달린 지우개를 씹으면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지
우리는 우리의 수많은 방청객
손을 잡아주세요
온도계가 터지면
수은으로 가득 찬 어항에서
예쁜 관상어가 될게요
바람이 불면 커튼이 흔들리고
부풀어 오르는 거미줄, 우리의 손금,
쉽게 떠오르지 않는 어머니 아버지
무단투기금지
그런데 왜 우리를
—《열린시학》2016년 여름호
장례
편지를 불태우며 달리는 기차가 만들어지고 있다. 당신은 틀린 맞춤법을 사랑하지. 나는 글자를 거꾸로 쓰는 연습을 한다. 내가 쓴 편지가 불타지 않는다.
장마가 오고 있어. 예감은 쉽게 예언으로 바뀐다. 모든 거짓말은 진실이 될 수 있다. 편지봉투에 가명을 쓴다.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
애초에 둘로 나뉜 적이 없잖아.
당신과 나는 쉽게 우리가 된다. 유언장에 내 이름을 써 줘. 당신은 유리창에 엑스를 그어놓고 구원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유리조각을 나눠 먹는다. 서로의 이름에 구멍을 내며 돌림노래를 부른다.
청각이 통각으로 변한다. 기차는 곧 출발할 것이다. 기관실은 오른쪽에 있으나 당신은 왼쪽으로 들어간다. 돌림노래인 적 없다는 듯 노래가 끊긴다. 문을 닫기 전 찰나의 표정.
내게 당신의 표정이란 평생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맞다.
편지가 불타기 시작한다.
가명 위에 가명을 덧쓴다.
개에게는 개의 혀가 필요하듯
—《시산맥》 201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