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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접한 여인을 찾는 사울
삼상 28:3-14
3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4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5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7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8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9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10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1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13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삼상 28:3-14 / [무녀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울] 사무엘이 죽어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된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는 예언자도 없다.'고 탄식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시에는 사울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무당을 죽여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4) 바로 이런 때 블레셋 족속이 전군을 모아 가지고 이스르엘 골짜기까지 올라와 수넴 성읍을 점령하고 그곳에 진을 쳤다. 사울도 즉각 이스라엘의 전군을 집결시켜 길보아산에 진을 쳤다. 5) 그런데 북서쪽을 가로막으며 진을 친 블레셋 군대를 건너다본 사울은 너무 놀라서 싸울 힘을 잃고 말았다. 6) 그래서 사울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여호와께 여쭈어 보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꿈으로도 예언자를 통해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전멸시킬 때에 제사장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갔기 때문에 사울에게는 그 우림이라는 제비도 없었다. 7) 사울은 결국 신하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죽은 사람을 불러 올릴 수 있는 무녀를 한 사람 찾아보아라. 그런 여자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내가 가서 물어 보겠다' 신하들이 즉석에서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엔돌에 그런 무녀가 한사람 있습니다!' 사울이 그토록 철저하게 귀신 부르는 자들을 제거하였어도 엔돌의 무녀는 왕궁 사람들에게 알려진 채 버젓이 행세하고 있었다. 8) 사울이 즉각 다른 옷으로 변장하여 남들이 알아볼 수 없게 꾸민 다음 신하 둘을 데리고 진영을 나섰다. 그들은 이미 점령된 지역의 북쪽에 위치한 엔돌에 이르기 위하여 깜깜한 밤에 산속을 걸었다. 사울은 그 밤에 엔돌의 무녀를 만나 이렇게 간청하였다. `그대는 죽은 사람의 망령을 불러 올릴 수 있으니, 부디 내 앞날을 점쳐 주시오! 그대가 누구를 불러 올려야 할지는 내가 곧 알려 주겠소.' 9) 그러나 그 무녀는 이렇게 거절하였다. `그런 일은 이미 왕명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을 당신이 더 잘 알 것이오. 망령을 불러 올리거나 미래를 점쳐 주던 무당과 박수들은 사울왕이 이미 이 나라에서 죄다 죽여 버리지 않았소. 지금 당신은 그저 내 신세를 망쳐 놓으려고 내 목에 올가미를 씌우고 있소' 10) 무녀의 말에 더욱 애가 탄 사울은 서슴없이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이렇게 맹세하였다. `여호와께서 확실히 살아 계시는 한 이 일로는 그대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겠소.' 11) 무녀는 그제야 안심하고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누구를 불러 올릴까요?' 사울이 대답하였다. `사무엘을 불러 주시오!' 12) 그 무녀는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듣자 사무엘과 사울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즉각 사울을 알아보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 임금님께서 나를 속이셨습니까? 나는 이제 죽었습니다!' 13) 그러나 사울은 그녀를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네게 보이는 것만을 내게 알려 주어라!' 무녀가 보이는 대로 말하였다. `땅속에서 올라오는 유령이 보입니다.' 14) 그러나 사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물었다. `그 유령이 누구의 모습으로 보이느냐?' 그녀가 유령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는 아주 늙은 남자인데, 예언자의 겉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사무엘의 유령이 올라와 있음을 알아 차리고, 무녀가 바라보는 쪽을 향하여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려 절을 하였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신접한 여자를 찾습니다.
신접한 자를 쫓아낸 사울 왕(3) 여기서부터는 사울 왕의 가장 어두운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의 어두운 영적 상태가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은 곧 있을 사울 왕가의 몰락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그것이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죽자 사울 왕은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내었습니다. 이는 율법대로 순종한 조치였습니다(레 20:6). 하지만 뒤이어 신접한 여인을 찾은 것을 볼 때(7) 그가 순전한 마음으로 율법을 준수한 것이 아니였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는 사무엘의 죽음을 애도했던 온 이스라엘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율법을 준수하는 척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율법보다 백성의 인기를 더 선호한 자였습니다(삼하 21:1-2).
신접한 자를 찾는 사울 왕(4-10)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태세를 갖추자 사울 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두려움은 여호와께서 이미 그를 떠났다는 증표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그를 버리셨기 때문에(삼상 15:23, 26) 사울이 물어도 전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여호와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구합니다. 곧 자신이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다시금 찾아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자가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변장을 하고 블레셋 진영을 지나 블레셋 진영의 동편에 위치한 엔돌에 갑니다. 그곳에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신접한 술법으로 초혼행위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신접한 여인이 자신을 죽이려고 그런 명령을 내린다고 하자 사울 왕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녀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신접한 여인을 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사울 왕은 또 다시 그 뜻을 어깁니다. 게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은 죄이자 신성을 모독한 죄였습니다. 사울 왕은 점점 더 멸망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초혼(11-14) 사울 왕의 명령을 받고 여인이 사무엘의 혼을 불러올렸습니다. 이때에 사울 왕이 사무엘의 혼을 직접 본 것이 아니며 다만 여인의 입을 통해 그 모양을 전달받았을 뿐입니다. 여인이 전한 사무엘의 모습은 노인인데다 겉옷을 입었습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의 겉옷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인지(삼상 15:27-28) 겉옷 이야기를 듣자 진짜 사무엘이 나타난 줄 알고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적 용 :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 원리에 의해 귀결됩니다. 그런 면에서 나의 영혼의 상태는 미래의 나의 모습을 예고합니다. 현재 당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말해 보세요.
삶은 늘 갈림길입니다. 하나는 살 길이고 또 하나는 죽을 길입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자.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 것이다.” 성웅 이순신의 웅변에 답이 있습니다. 삶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두려움을 용기로, 절망을 희망으로, 아픔을 치유로 바꾸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살 길입니다.
호크마 주석
=====28:3
사무엘이 죽었으므로...장사하였고 - 이 사실은 이미 25:1에서 언급되었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이같은 사실을 여기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사울이 이미 죽은 사무엘의 혼(魂)을 불러내려는 노력을 한 사실과 연결시킨다(8절).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쫓아내었었더라 - 이같은 종교적 숙정(肅正) 행위는 분명히 사울의 집권 초기에 이뤄졌을 것이다(Smith). 이 같이 볼수 있는 까닭은 (1) 사울은 왕위에 오르는 예식이 행해질 때에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좇을 것을 명령받았으며(12:14), (2) 무당과 박수를 쫓아내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에게 강력히 요구되던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인 바, 처음 사울은 율법 준수에 대한 열심으로 이러한 일을 시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의 `신접한 자'(* , 오보트) - 에 대해서는 어원학상의 여러 이론(異論)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즉 (1) `오브'(`오보트'의 단수)를 비히브리어계의 단어 `아브'에서 온 것으로 보고, 어떤 `제의적(祭儀的) 구멍'에서 유출되는 영혼 혹은 유령이라는 해석(Hoffner), (2) `오브'를 어원학적으로 `조상' 및 `아버지'의 의미가 있는 `아브'(* )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불러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형상' 및 `도구'라는 해석(Lust), (3) `오브'를 `가죽 부대'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오브'(* )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귀신이 들어가서 볼록하게 튀어나온 `복화술사의 배'를 가리킨다는 해석(Smith), (4) `오브'를 `어리석은', `공허한'이란 의미를 갖는 히브리어 `우브'(* )에서 온 말로 보고, `공허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해석(Lange)등이 있다. 그런데 이같은 여러 견해 중 첫째, 본절의 `쫓아내었더라'(* , 헤시르)란 말은 우상과 같은 유형적 형상의 제거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며(왕하 18;4; 23:19; 대하 17:6; 30:14; 사 3:23) 둘째7절의 `신접한 여인'은 문자적으로 `오브를 다스리는 여자'란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 등에서 볼 때, '오브'는 (2)의 견해처럼 죽은 사람의 혼(魂)을 불러내는 데 사용되는 어떤 '형상'이나 '도구'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러한 미신적 도구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 사후(死後) 세계와 교통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레 19;31). 박수(* , 이드오님) - 이것은 `알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야다'(* )에서 파생된
=====28:4
브레셋 사람이...수넴에 이르러 - 여기서 `수넴'(Shunem)은 `두 개의 휴식처'란 의미이다(Gesenius). 그 위치는 침공해 오던 블레셋 군을 및이하여 사울이 진을 쳤던 `이스르엘'(29:1; 수 19:17, 18)의 북쪽 약 5.6km 지점으로, 바로 이 지점은 `모래 언덕(창 12;6)의 남서쪽 기슭이었다. 즉 이스르엘 계곡에 의해 분리되는 길보아 산 맞은편의 소(小) 헬몬산 서쪽 경사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Conder, Robinson). 아마도 이때 블레셋 군대는 `아벡'(4:1; 29:1)에서 소집되어 `수넴'은 가나안 정복 후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며(수 19:18), 동녀(童女) 아비삭의 고향이고(왕상 1:3), 또한 엘리사를 영접한 귀한 여인의 고햐이기도 하다(왕하 4:8-10). 그리고 현재의 지명은 `술렘'(Sulem)이다(Eusebius). 사울이...길보아에 진 쳤더니 - '길보아'(Gilboa)는 사마리와와 갈릴리 사이의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지 동쪽에 있는 길이 약 12.8km, 그리고 폭 약 8km 정도의 산악 지대이다. 그곳 중 가장 높은 지대는 해발 약 565m 정도이다. 이 길보아 산악지대의 특징은,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해발 약 10m의 에스들렐론 평지에 다다르며, 반면 북쪽과 동쪽은 급격한 경사를 이루어 요단강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때 사울은 바로 이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이스르엘'(Jezreel)에 진을 쳤다(29:1).
=====28:5
사울은 불과 수 마일 거리에서 진치고 있는 블레셋의 엄청 많은 군대로 인하여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보고(* , 라아) - 미세한 것을 들여다 보듯이 세심하게 탐색하는 행동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16:6; 23:23; 25:15; 왕하 7:13). 두려워서(* , 야라) - 이 말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점층적으로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사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8:29). 본 저자는 바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블레셋의 많은 군대를 보고 사울이 얼마나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를 강력히 시사한다. 떨린지라(* , 하라드) - 이 단어는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의 기습 공격으로 인하여, 모든 블레셋 사람들이 나타냈던 당혹스럽고 어쩔줄 모르는 심리적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4:15). 바로 이같은 단어는 사울의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13:7; 사 32:11). 아무튼 사울은 과거 대(對) 블레셋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14:21-23, 31, 47; 17:53), 금번 길보아 전투를 맞이하여 `두려워 크게 떨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울은 엘라 골짜기 전투(17:1-3) 이후 가장 대규모의 전투인 이번 전투를 맞이하여, 힘의 원천이요 전쟁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더이상 자신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패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Keil, Clericus).
=====28:6
사울이...묻자오되 - 여기서 '묻자오되'(* , 솨알)는 '요구하다' 혹은 '문의(問議)하다'란 의미로서, 사울은 이때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15:26; 16:14)을 잘 알면서도, 이처럼 사울이 허둥지둥 여호와를 찾는 모습은 블레셋 군대로 인한 사울의 두려움과 공포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대답지 아니하시므로 - 이같은 결과는 말할 나위없이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희귀는 어느 인물 또는 어느 시대의 사악성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3:1). 꿈으로도 - '꿈'(* , 할롬)은 사람이 자의식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잠을 잘 때, 외부의 벼노하 없이 인간 내면(內面)의 사고 작용 및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구약 시대의 계시(啓示) 방편이다(창 20:6; 민 12:6 ; 단 2:4).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꿈, 우림, 선지자 등 3가지 계시 방편은 저급한 단계에서 보다 고급한 단계의 순서인 것 같은데(Fay), 꿈은 그 전달 방법이 간접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비점진된 최하급의 계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Erdman).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이 직접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라도 계시적(啓示的)성격의 현몽(現夢)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을 것이다. 우림으로도 - 여기의 '우림'(Urim & Thummin)의 약칭이다(출 28:30 주석 참조; 민 27:21). 그런데 사울이 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은 철저히 사울의 자업 자득(自業自得)이었다. 즉 사울은 우매한 판단으로 놉(Nob)의 제사장들을 몰살시킴으로써,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아비아달'로 하여금 `우림과 둠밈'이 들어있는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로 피신하도록 한 것이다(22:18-20; 23:6). 그러나 당시 사울에게 '우림과 둠밈'이 없었고, 또한 '우림과 둠밈'을 사용할 대제사장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추측컨대, 사울은 놉(Nob) 제사장 대학살 사건(22:18,1 9) 이후 성막을 기브온 자기 궁성(宮城)으로 옮긴 다음 엘르아살 계열의 아히둡의 아들 '사독'(Zadok)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던 것 같다(대상 16:39). 그리고 이에 덧붙여 본래의 것을 본뜬 모조(模造) '우림과 둠밈'도 만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망명객 다윗에게로 도망을 쳤다(22:5).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선지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뜻을 얻을 수 없었다. 아무튼 꿈과 우림과 선지자는 모든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저냐 받는 방편이었다(15:10, 11; 23:9-12). 하지만 사울은 그 어는 것으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15:1-23).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만날 만한 때에', 즉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기회가 지나가지 전에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교훈을 절실히 암시해 준다(사 55:6; 고후 6:1, 2).
=====28:7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 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 - , 바알라트 오브)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 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Keil, 레 19:31). 물으리라(* , 다라쉬) - '자세히 묻다'란 의미이다(신 13:14; 시 9:12; 111: 2). 엔돌에...있나이다 -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 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28:8
사울이...변장하고 -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 같다(Fay).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울이 위와 같이 철저히 변장을 한 까닭은 신접한 여인이 살던 엔돌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은, '엔돌'이 블레셋의 진영과 인접한 곳이었으므로, 혹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한 것이다. 즉 만일 변장을 하지 않는다면,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경우 그 의복에 의하여 그가 이스라엘 왕 사울임이 밝혀지고, 이에 따라 그들의 맹렬한 공격 목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왕상 22:30). 밤에...이르러 - 사울은 변장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일부러 밤 시간을 택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이렇듯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신접한 술법으로 -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 , 카삼)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 레 19:31; 20:27). 사람을 불러 올리라 - 즉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참조.
=====28:9
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어찌하여...올무를 놓아...죽게 하려느냐 - 이 말은 신접한 그 무녀(巫女)가 변장한 사울을 몰라봤음을 말해 준다. 즉 이때 그녀는 사울 일행을 자신과 같은 점치는 사람들을 적발하여 죽이기 위하여(출 22:18; 레 20:27; 신 18:11) 왕의 명을 받고 그곳으로 온 왕의 사신들로 알았던 것이다. 이같은 그녀의 판단은 (1) 이전에 사울이 복술 행위를 엄히 금지시켰으며(3절), (2) 사울 일행은 무녀의 눈에 매우 낯설었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한편, 비록 밤늦게 방문한 낯설은 사울일행에 대해서는 그 무녀(巫女)가 이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라도, 그당시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통한 복술을 베풀어 유명한 무녀로 통했을 것이다.
=====28:10
본절에서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싸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여호와께서 사시는 것처럼, 또는 여호와께서 살아 존재하시는 한 맹세한 사항이 확실이 이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짐할 때 사용하는 히브리 맹세의 전형적인 표현 방식이다(25:26).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8:11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욥 26:5-14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 참조).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 사울이 많은 사람 중 하필 사무엘의 혼을 요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사무엘은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사람으로서, 계속적으로 자신의 조언자 역할을 담당했었으며(10:1; 15:1), (2) 또한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7:10-12),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고민하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울은 그때 이같이 사무엘을 부름으로써, 그로부터 블레셋과의 싸움과 관련해서 자신이 취할 행동에 대하여 조언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사울은 다윗과 관련된 자신의 미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즉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28:1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즉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 Henry, Grotius, Patrick), (3) 본문의 '사무엘'(* , 쉐무엘) 앞에 '이름'(* ,쉠)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등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네가지의 견해 중 (1)의 견해는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3)의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또한 (4)의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그 무녀가 본 것은, (2)의 견해대로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큰 소리로 외치며...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 이같은 무녀(巫女)의 언급은, 그녀가 그때까지는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한 인물이 사울인 줄 몰랐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비록 사울은 거구의 소유자여서(10:23) 타인의 눈에 쉽게 띄일 여지가 많았으나, 그래도 당시 사울은 밤에 변장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8절), 무녀의 눈에 의해서 간단히 분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여기서 어떻게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사울인 줄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추측컨대, 그때 그 무녀(巫女)는 사울이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할 때까지만 해도 그가 사울인줄 몰랐으나, 사무엘의 형상
=====28:13
왕이...이르되 두려워 말라 -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무당과 박수를 축출시켰던 장본인이다(3절). 따라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현장을 그 사울에게 목격당한 그 무당 여인으로서는 큰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9절).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은 그 무녀(巫女)에게 '두려워 말라'라는 말로 안심 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卜術) 행위 조차도 서슴없이 독려하는 자아 모순적인 작태를 드러내고 있다.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 이 질문은, 그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Smith).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 여기의 '신'(* , 엘로힘)은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Hertzberg, Klein),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Keil, Smith).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위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
=====28:14
그 모양이 어떠하냐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 사무엘이 83세에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25:1 주석 참조), 사단적 유령이 이같이 '노인'의 모습으로 무당에게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 여기서 '겉옷'(* , 메일)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망토식 가운으로서,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구별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입었던 옷이다(출 28:4; 레 8:7; 삼하 13:18; 대상 15:27), 사무엘도 생전에 선지자의 외투로서 이같은 겉옷을 입었었다(15:27). 결국 그 무당은 자기가 본 형상의 주인공이 '노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이같은 '겉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가 사무엘임을 넉넉히 느꼈을 것이다(Hertzberg).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절하니라 - 이것은, 그때 사울이 사무엘의 형상을 직접 봤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울은, 그 접신녀가 '노인'과 '겉옷'을 언급한 사실로 인하여, 그녀가 실제로 사무엘을 본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사울은 무녀가 사무엘이 올라온 곳이라고 암시하는 곳을 바라보며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넙죽 절을 한 것이다.
< 설 교 >
엔돌의 무당
삼상 28:4-15
금주는 설 주간입니다. 연초에 새해 운세 보신 분 계십니까? 토정비결이나 사주 보신 분 안 계십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가히 점술공화국입니다. 무속인과 역술인이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인터넷 점 사이트 회원은 이미 1200만이 넘어섰다고 합니다. 요즘 수치로 말하면 기독교 신자보다 그 숫자가 많습니다. 도통이라는 운세 사이트는 회원이 40만인데 90%가 10-20대라고 합니다. 사주닷컴은 회원이 40만 명인데 주로 20-30대라고 합니다. 전에는 구세대가 보던 점을 인터넷이나 케이블 TV나 시내 중심가 사주카페에서 젊은이들이 점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물론 문화사적, 사회학적으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유례없는 악령의 역사로 보고 있습니다. 역사 말기적인 현상입니다. 올 것이 온 겁니다. 귀신이 정말 있습니까? 귀신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한을 품고 죽거나 험하게 죽어 구천을 떠도는 영혼입니까? 굿할 때 보면 실제 그런 사람의 혼이 강신해서 무당을 통해 그 사람과 똑같은 목소리로 울기도 하면서 자손들을 나무라기도 합니다. 정말 죽은 사람의 혼이 나타난 겁니까? 사랑과 영혼이란 영화를 보셨지요? 샘으로 나오는 패트릭 스웨이지가 불량배에게 살해당합니다. 그런데 약혼녀 데미무어를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돕니다. 그게 가능한 얘깁니까?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군의 침공을 받고 안절부절 못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사울을 떠나신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무리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며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를 통해서도 아무런 계시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울이 얼마나 다급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엔돌의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 무당에게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달라고 합니다. 이걸 무속에서는 초혼이라고 합니다.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요구대로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올립니다. 과연 그 영혼의 모습이 사무엘과 똑같았습니다. 본문 마지막 대목을 보면 외모나 목소리, 입은 옷까지 사무엘이었습니다. 왜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했을까요? 사무엘이 사울의 멘토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등극시켰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올려 코치를 받고 싶었던 겁니다.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올리자 사울이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통 굿판과 똑같습니다. 당시 엔돌의 무당이 불러올린 그 영이 사무엘의 영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요 기만입니다. 성경은 죽으면 그 순간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서 이 지상의 사람들과 소통하거나 교통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무당이라 해서 영혼을 함부로 이 땅에 불러올 수 없습니다. 성경은 초혼 자체를 부정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기만일 뿐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 얘깁니다.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습니다. 그 두 사람은 죽자마자 나사로는 천국으로 갔고,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가 지옥의 고통이 너무 심해 나사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적셔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청하자, 아브라함이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 서로 오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 살아있는 형제에게 그들만큼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전해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산 자의 말을 안 믿으면 죽었다 살아나서 전한다 해도 안 믿는다며 그것도 거부합니다. 어떤 이는 믿지 않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세상을 떠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아닙니다. 모든 영혼은 죽는 즉시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무당이 부른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제삿날도 안 됩니다. 사람들이 속으니까 마귀가 사람들의 무지를 역이용해서 제멋대로 속이는 겁니다. 자기가 제사상을 받는 겁니다. 마귀가 귀신행세를 하는 겁니다. 소를 섬기는 종교, 태양을 섬기는 종교, 곰이나 원숭이, 쥐를 신으로 섬기는 종족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마귀의 기만입니다. 마귀가 사람의 코를 꿰어 자기에게 꽁꽁 묶어두는 겁니다. 키텔이라는 성서사전을 보면 신약성경에 100회 이상 귀신 얘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의 공생에서 귀신 쫓아내는 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그런 능력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귀신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총각이 죽어 몽달귀신, 처녀가 죽어 처녀귀신이 되는 게 아닙니다. 마귀가 죽은 사람 행세를 하는 겁니다. 한 개인과 한 집안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해서 제멋대로 이용하는 겁니다. 귀신은 절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닙니다. 마귀입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면 귀신 노릇하는 마귀는 누구입니까? 신약성경의 디아블로스는 그들의 우두머리 사탄의 졸개들입니다. 사탄은 누구입니까? 천사장 루시퍼가 자기가 지휘하던 천사를 이끌고 하나님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실패합니다. 미가엘 천사에게 진압을 당합니다. 그래서 그 루시퍼와 그의 추종세력이 하늘에서 쫓겨납니다. 그 루시퍼가 사탄이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단수이고, 마귀는 복수입니다. 마귀가 온 세상을 휘젓고 다니며 사람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사악한 영입니다. 사람을 속이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씁니다. 마귀는 변장의 귀재입니다. 마귀는 영이기에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자연적인 능력과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과거와 지금의 처지와 미래를 훤히 다 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수인을 내세워 점도 치고, 굿도 하고, 병도 약도 주면서 사람들을 자기에게 묶어 둡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주로 무속이나 미신으로, 우상숭배나 타락한 문화로, 무신론이나 잘못된 신념으로 망하게 하고, 믿는 자에게는 끝없이 미혹하여 주일성수, 기도생활, 말씀 읽는 것을 방해하고, 세상과 타협하게 하고, 어떻게든 신앙생활에 실패하게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하는 꼴을 못 봅니다. 어떻게는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게 합니다. 주님과 괴리가 생기게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9절 이하에서는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하고, 또 에베소서 4장 27절에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마귀가 우리에게 악한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주님을 은 30에 판 가룟 유다도 마귀에게 정복당해서 그런 일을 벌인 겁니다. 사실 마귀의 주요 타깃은 우리 믿는 자들입니다. 안 믿는 자들은 어차피 자기의 수하에 있습니다. 믿는 사람을 실족하게 하려고 온갖 악랄한 짓을 다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디모데전서 4장 1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말세에는 많은 사람이 믿음을 버리고 귀신을 좇는다는 겁니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사탄과 마귀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마귀가 바로 우리의 원수입니다. 이 세상 모든 악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고,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점이나 사주보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점이나 사주가 미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주나 점이라는 게 귀신의 힘을 빌려 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역술의 기본인 괘를 보면 통계학의 산물의 하나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신자 중 30-35%가 점집을 찾는다고 합니다. 아마 그 사람들도 그렇게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여 점집을 드나들 겁니다. 우리나라 유명한 무당 중 정에스더라는 역술인이 유명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단골이고, 여전도사 출신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를 찾아가는 신자들도 그렇게 합리화할 겁니다. 미신이 아니라 통계학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점이나 사주가 통계학이라는 말은 위장에 불과합니다. 기만 술책입니다. 그것도 다 마귀의 도구입니다. 마귀가 사람을 속여 지배하는 수단입니다. 성경은 점이나 굿에 대해 매우 부정적입니다. 레위기 19장 31절입니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위기 20장 6절은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라고 합니다. 여기 나오는 신접한 자는 여자 무당을 말하고, 박수란 남자 점쟁이를 말합니다. 그들을 찾아가지 말라는 겁니다. 그들은 다 마귀의 사제라는 겁니다.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제사도 마찬가집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0절입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제사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도 아니고, 조상에게 절하는 것도 아닙니다. 조상의 혼을 가장한 마귀에게 절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제사 지내지 말라는 겁니다. 대개 나는 귀신이 아니라 우리 부모에게 절한다고 합니다. 그 뜻은 가상하나 실제 그 절을 받는 존재는 마귀입니다. 차라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게 백 번 낫고 옳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최후 심판 때 유황 불못에 들어갈 사람의 목록이 나옵니다. 거기에 살인자, 술객,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여러 차례 나오는 살생부에 그들은 한 번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예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등산 가다 절간 기왓장에 돌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어지럽고 혼탁한 때 여러분의 믿음의 정절을 지키셔야 합니다. 마귀의 손짓에 놀아나거나 틈을 보이지 마십시오. 심심하다고 점보고, 장난으로라도 사주보지 마십시오. 이삿날 택일하지 마십시오. 결혼한다고 궁합보러 가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믿음으로 처리하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침묵
사무엘상 28:3-10 / 최인근목사
잉거솔(Ingersoll)이라는 독일의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강연에서든지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무신론 강연에 열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연이 절정에 이르자 갑자기 자기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더니 하나님에 대한 도전장을 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당신에게 5분이라는 시간을 주겠소. 나는 5분 동안 당신을 저주할 것이오. 만약 당신이 살아있다면 나를 저주하고 형벌을 내리시오.” 그리고 그는 5분 동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모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5분이 지났는데도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자 그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저를 보십시오. 이만하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때 그의 강연장 뒤편에 있던 한 노인이 서서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러우면서도 감히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한 그리스도인이오. 내가 감히 당신의 연설에 대해서 평가를 한다면 오늘 당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단지 당신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명했을 뿐이지요. 내가 믿고 경험한 하나님은 내가 그분을 떠나서 거스를 때 책망하시고 때로는 징계까지 하셨던 분이시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서 침묵하셨소. 그분의 침묵은 곧 당신이 그의 자녀가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오.”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침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노신사의 그 말은 백번 옳고 바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잘난 인간이 없다 한다고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그 스스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버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고귀한 말씀을 남겨두었습니다.
(롬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시는지 여러 방면으로 그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를 공부하면서 우리 하나님께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은총을 누려보려고 합니다. 복된 말씀에 귀 기울이시고 풍성한 축복으로 빈 가슴을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불순종 하는 자들에게 침묵하십니다
(삼상28:4-6)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시는지에 대한 가장 분명한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환경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의 두려움이 닥쳐 올 때는 사람이든 하나님이시든 찾게 되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적군이 쳐들어와 큰 두려움에 빠졌을 때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모양으로든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삼상28:4-6)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조금이라도 그 두려움과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점쟁이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삼상28:7-9)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게 또 너무나도 웃기는 장면인데 사울은 왕이 되어 친히 그와 같이 신접하거나 무당 짓을 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신접한 자들을 잡아 죽여 놓고 이제 와서는 자신이 한 짓이 있으니 자신이 사울 왕이 아닌 것처럼 변장을 하고 그 신접한 자를 찾아갔으니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면 인간이란 게 이렇게도 비참하고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면 그 자체가 바로 지옥과 같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28: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시30: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과연 지금 블레셋 군대 앞에서 떨고 있는 사울의 모습이 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적군을 코앞에 공격해 오는데 의지하고 도와 주셔야 할 하나님은 가만히 침묵하고 계시니 사울의 마음이 그 얼마나 위급하고 불안하였겠습니까? 오죽하면 자신이 잡아 죽였던 그런 신접한 자를 찾아가 그 앞에서 왕이 아닌 척 변장하고 굽실거리며 부탁을 다 하였을까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을 이처럼 비참하게 버려두시고 침묵하고만 계셨을까요?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상15:24-27)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아주 명확하게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려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도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결단하여야 하겠습니다. 평생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결국 사울왕은 그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고 자신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과 군사들 또한 대패하여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서시고 침묵하시면 우리 인생은 그 날로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을 성경은 사울왕을 통하여서 이렇게도 명확하게 증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 하는 자들에게 침묵하십니다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3:10-14)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우리는 사무엘상 3장에서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늙을 때까지 제사장으로 사용하셨던 엘리 보다는 아직도 어려서 하나님의 음성인지 사람의 소리인지 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3장 1절에서 설명해 두셨습니다. 엘리제사장 때에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결국 하나님은 엘리도 그 아들들도 다 저주거리가 되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그 어린 사무엘에게 친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생을 통해 하나님을 섬겼던 고귀한 직분자 엘리를 왜 하나님은 이렇게도 독하게 돌아섰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 때문이었습니다.
(삼상2:22-25)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참으로 두렵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시려면 결코 옳은 길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제고집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잘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있고 스승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옳은 가르침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복이 되겠지만 흡니와 비느하스처럼 제고집대로 하고 깨닫고 돌아오지 못하면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던 것처럼 악한 흡니와 비느하스의 마음을 고집불통이 되게 하셨음은 결국 그들을 망하게 하시려고 하심이라는 사실은 실로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집쟁이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의 최후는 비참한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더 이상 죽이기로 결단하신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으며 하나님의 때가 되매 그들을 한결 같이 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삼상4:16-18)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육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 년이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면 인간의 모든 만사가 이렇게도 비참하게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흥망성쇠를 통치하시는 인생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 큰 축복을 주시려고 침묵하십니다
(막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행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구약에서 두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침묵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이 모든 심판을 상징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의 침묵은 더 풍성한 축복을 주시기 위한 연단이라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말씀 중에 특별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셔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천지창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왜 나를 버리셨느냐?”고 울부짖으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하셨겠습니까? 당장에라도 그 악당들을 바람처럼 쓸어버리시고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그 모진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하실 수가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끝내 독생자의 외마디 부르짖음을 외면하시고 끝까지 못 들으신 척 침묵하셨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하나님께도 예수님께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 고통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흘 뒤에 십자가에서 끝내 목숨이 끊어져 무덤으로 내려가신 독생자 예수님을 도로 살려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전화위복의 기적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 바로 우리들의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빌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침묵만 하시는 무관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픈 만큼 보상하시고 희생한 만큼 채워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예수님처럼 순종하고 복종하며 맡기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온 몸으로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대에 보상 받지 못한다면 대를 이어 자손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은 더 풍성하고 더 넘치게 채워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도들은 그 마음이 너무 조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급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리지 못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잠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만물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참으로 복된 계절을 맞았습니다. 우리들의 영혼도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침묵에 관한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결코 그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도록 우리들의 작은 신음에도 달려오시는 그런 하나님이 되실 수 있도록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믿음의 문제다
이한규목사 / 삼상 28장 3-14절
문제는 믿음의 문제다
< 버림 받은 자의 모습 >
살다 보면 힘든 상황이 생긴다. 그때 하나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면 더 힘들어진다. 구체적으로 믿음을 잃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1.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당시에 사무엘은 죽어서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된 상태였고 사울은 집권 초기에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기에 이스라엘에는 신접한 자와 박수가 없었다(3절). 그때 블레셋 군대는 수넴에 진 쳤고 이스라엘 군대는 길보아에 진 쳤는데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크게 두려워하며 떨었다(5절). 블레셋과의 많은 전쟁에서 연승을 거뒀던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크게 두려워한 것은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믿음을 잃으면 받으면 공연히 두려워진다. 그 두려움에 지배되면 자신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수준 이하의 삶을 살면서 문제 극복 능력도 약화되고 성공 가능성도 줄어든다. 두려워하면 사탄과 사탄의 하수인이 우습게 안다. 그처럼 사기를 잃으면 처음부터 지고 들어간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용기도 중요하다.
미국 야구 메이저리그에서 1971년 타자의 헬멧 착용을 의무화했을 때 타자들은 불편한 헬멧 때문에 실력이 저하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실력이 향상되었다. 헬멧이 공을 머리에 맞고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투수가 두려워하는 타자나 타자가 두려워하는 투수가 되면 그 존재감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 그런 존재감 있는 인생이 되려면 실력과 믿음을 겸비하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나아가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복과 승리는 저절로 따라온다.
2. 이중적인 행동을 보인다
사울이 두려워하며 여호와께 어떻게 할지에 대해 물었지만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어떤 대답도 주지 않으셨다(6절). 그러자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묻겠다고 했다(7절). 그때 신하들이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다고 해서 사울이 평복을 입고 변장한 채 두 사람과 함께 밤에 그녀를 찾아갔다. 왜 변장했는가? 집권 초기에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방했으면서 다급하다고 신접한 자를 찾는 이중적인 행동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중적인 속성이 있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고 동업도 주의하라. 동업을 꼭 해야 하면 배신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동업하라. 때로는 좋은 일을 위해 동역할 때도 배신 상황을 겪는다. 그때의 충격과 상처는 더 크다. 사명을 따라 동역하는 사명형 동역자는 배신하지 않지만 생계를 위해 동역하는 생계형 동역자는 배신 가능성이 높다는 현실도 감안하고 지혜롭게 동역하라.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순수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더 순수해지면서 정치적인 태도를 멀리했다. 그는 정치를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의 자리 투쟁이나 존재감 투쟁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의 순수함을 이용해 뒤통수를 많이 쳤다. 그러면서 그가 점차 인간관계에서 바른 정치도 꼭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관계나 작은 공동체에서도 적절한 정치는 필요하다. 사람은 온전히 믿을 수 없고 누구에게나 잠재된 이중적인 속성이 방심하면 금방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실한 사람에게도 이중적인 속성이 있고 내게도 있음을 인정하라.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 사람을 의존하는 것은 더욱 피하라. 부모도 의존하지 말라. 나중에 자녀를 의지하려고 하지도 말라. 내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천국으로 갈 수도 있다. 그때를 대비해 독립적인 성품과 의지와 능력을 기르라.
3. 바른 판단력을 상실한다
사울은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대답하지 않는지에 대해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성을 작동시켜 사유하려고 하지 않고 불안해하면서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전쟁에서의 승리 방법을 물으러 찾아갔다. 유대 사회에서는 영매와 무당을 찾는 것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는데 그런 행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의 판단력은 이미 흐려진 상태였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했다. 그때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했다. “당신이 왜 나를 속였습니까? 당신은 사울이십니다(12절).” 그녀가 실제로 사무엘의 영을 보았겠는가? 죽은 사람의 영이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아마 그때의 사무엘의 영은 사무엘의 영을 가장한 귀신이었을 것이다. 그 귀신이 그녀에게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사울인 줄 알려주었는가? 귀신이 알려주기보다 그녀 자신이 빠른 눈치로 사울 왕인 줄 알아맞혔을 가능성이 크다.
대개 점쟁이와 영매는 눈치가 백단이다. 그 눈치로 용함과 영성을 과시한다. 아마 그녀는 앞에 선 사람이 두 사람을 대동한 것을 볼 때 신분이 높은 사람인 줄 알았고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사무엘을 불러올릴 사람이 사울밖에 없고 자기 앞에 선 사람이 엄청난 거구였기에 사울 왕이라고 눈치 챘을 것이다. 만약 사울 왕이라는 자신의 말이 틀려도 상대가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을 줄 알고 “당신이 사울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거짓 종교인은 용함과 영성을 과시하려고 거짓말에 능하다. 또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데 능숙하다. 요새는 자신의 이단성을 감추려고 정치적인 진영 논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범죄학에서는 본질을 흐리는 자가 범인이라고 추정한다. 진실은 명확하고 단순하다. 진영보다 진실이 중요하다.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믿으면 진실과 정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 진실을 위해 기도하면서 진실을 위한 탐구와 관찰을 포기하지 말라. 때로는 지금까지 믿었던 인간적인 말과 정보를 언제든지 버릴 각오와 개방성을 갖춰야 진실에 가까워진다.
4. 헛된 우상숭배에 빠진다
사울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그녀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그녀가 말했다.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영혼은 세상과 지옥과 천국을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영은 사무엘의 영을 가장한 귀신이다. 결국 신접 행위는 귀신에게 이용당하는 사악한 행위인데 사울은 신접한 여인의 말만 믿고 그 노인이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했다(14절).
죽은 사람의 가짜 영 앞에서 절하는 모습은 일종의 우상숭배다. 왜 기독교에서 제사를 금하는가? 제사를 드릴 때 죽은 부모의 영이 진짜로 제사상 앞에 있다면 존경의 의미로 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사상에는 죽은 부모의 영 대신에 부모의 영을 가장한 귀신이 나의 절을 받는 것이다. 결국 성도가 제사상에서 절하는 것은 부모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 되기에 하나님은 제사 자체를 금하신 것이다.
우상은 거짓된 신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것은 우상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을 더 앞세우는 것이나 하나님의 시각을 잃고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것도 우상숭배 행위다. 왜 환난과 문제가 생기는가? 근원적인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큰 참사가 생길 때 가장 책임을 느끼고 회개해야 할 사람은 성도와 기독교 리더다. 사고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시각을 회복하고 우상이나 환상에 빠진 삶에서 깨어나 진실에 눈뜨고 자기 사명에 충실하라.
누군가의 불의를 덮어 주는 종교적 합리화의 이용 도구가 되지 말라. 세상 권력자들은 불의와 타협하는 종교인을 좋아하지만 불의를 합리화하는 우상숭배적인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이다. 돈과 권력을 선한 영향력으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믿음과 정신을 동시에 타락시킨다. 돈과 권력과 세상적인 이익의 우상에 매몰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몰입되라. 특히 두려움을 심고 자신을 우상화시키는 이단 교주로부터 내 영혼을 믿음으로 지켜내라.
< 문제는 믿음의 문제다 >
사람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사울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또한 내적인 분열 현상일 일어나 정신과 육체가 따로 놀면서 이중적인 삶이 나타나고 바른 판단력을 잃고 세상적인 우상숭배에 빠진다. 결국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믿음의 문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가 믿음을 잃는 일이 없게 하라. 심지어는 대단한 기적이나 신앙 행위도 눈에 보이는 것은 너무 믿지 말고 경계하라. 대단한 신앙 행위가 영성의 증거는 아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대결한 바알 선지자들이 하늘의 불을 내려달라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기도했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제단 주위에서 뛰놀며 방무를 추었다. 정오쯤 되어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기도하고 심지어는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면 방무와 방언과 자해를 앞세운 대단한 신앙 행위가 영성의 증거가 아님을 명백히 알려준다.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하다. 바알을 믿는 우상숭배적인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믿음만이 능력의 원천이다. 모든 문제는 믿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믿음으로 더 물질을 가지려는 탐욕과 더 권력을 얻으려는 야욕을 이겨내라. 또한 내가 못살아서가 아니라 남이 잘 살기에 싫어하는 질투심과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나타나는 분노와 혈기와 교만을 이겨내라. 늘 굳건하고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올인하라
삼상 28장 3~8절 / 조상호목사
한국의 모 방송국에서 "올인"이라는 드라마를 방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굉장히 인기가 있어서 시청률이 무려 40퍼센트나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 드라마는 노승일 씨가 쓴 <올인>이라는 소설을 각색한 작품인데,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두 주인공이 각기 다른 파란만장한 삶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삶의 전부를 걸고 최후의 승부를 벌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의 제목인 "올인"이라는 말이 시중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올인(All in)"이라는 말은 도박할 때에 사용되는 용어로서, ‘모든 것을 다 건다.’는 의미입니다. 드라마가 도박판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약간의 말들이 있었지만, 정치권에서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 올인 한다.’는 말을 만들어내고, 스포츠 경기에서는 ‘월드컵 축구 아시아 예선에 올인 한다’는 말을 만들어내는 등, 현재 이 단어는 사회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단어가 도박판에서 나온 용어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올인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귀에는 아무 들리는 것 없어도, 손에는 아무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올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고, 여러 가지 직분을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올인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시간에 아무리 ‘주님을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찬양한다 할지라도,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세상을 의지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올인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올인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상에 올인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저는 이 시간에 세상의 방법을 추구했던 사람과 하나님께 올인 했던 사람,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세상의 방법을 추구했던 사람
첫째로 세상의 방법을 추구했던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오늘 본문 28장을 보면 그의 인생에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사울 왕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고, 그 동안 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영적지도자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가장 껄끄러운 나라인 블레셋 군대가 몰려와 수넴에 진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즉시로 이스라엘 군대를 동원하여 블레셋 군대가 머무르고 있는 수넴에서 약 6Km 떨어진 길보아에 진을 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두려워했습니다. 얼마나 그가 두려워했는지 사무엘상 28장 5절에는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 왕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릴 만큼 그는 공포에 휩쌓이게 되었습니다. 6Km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완전히 중무장을 한 블레셋군대를 보고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때 사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8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두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변장하고’라는 단어와 ‘밤’에라는 단어입니다. 사울은 백성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변장을 하고 밤중에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체면 때문입니다.
알량한 체면 때문에
사울은 알량한 체면 때문에 변장을 하고 그것도 대낮인 아닌 컴컴한 밤중에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왕으로서 무당을 찾는 행동이 부끄러운 행동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가 무당을 찾아간 것을 만약 백성들이 알게 된다면 왕으로서의 그의 권위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도 자신의 체면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몇 년 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른 적이 있는 한 책이 있습니다. 바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입니다. 바로 유교문화의 폐해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유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서 예로부터 체면이라는 문화 속에 깊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안 해도 될 일을 해야 하고, 체면 때문에 형편이 안 되고 할 능력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또 한국인의 의식 구조라는 책을 쓴 이규태씨는 '체면이란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성이 몸을 다 벗게 되었을 때, 사람들마다 가리는 곳이 다르다고 합니다. 유럽의 여성들은 제일 먼저 자신의 부끄러운 치부를 가리고, 중국 여자들은 발을 가리고, 사모아 사람들은 배꼽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여자들은 어디를 제일 먼저 가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상한 곳에 갔다가 경찰에 잡혀온 여인들이 방송 카메라 앞에서 어디를 가리던가요? 얼굴입니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은 얼굴을, 다른 말로 말하면 체면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용하는 표현 중에 <얼굴>에 대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야, 너 때문에 내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뵐 낯이 없습니다.” “이 녀석아! 제발 좀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아라.” “그 사람 얼굴 한번 넓다.” “선생님, 제 얼굴을 봐서라도 잘 부탁합니다.” 다 이러한 표현이 체면문화로부터 출발한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체면문화 때문에 한국 사람들처럼 손해 많이 보는 민족이 없다고 합니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애들아! 이 문제 다 이해하니?”라고 물으면 학생들은 일제히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네”몰라도 체면 때문에 어지간하면 모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됩니까? 모르는 것을 배우지 못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과 함께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할 때, 어떤 음식을 주문합니까? 연세 드신 분이 주문하는 음식을 똑같이 주문합니다. 요즘에야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함께 식당에 간 아저씨가 곰탕을 시키면, 자기는 곰탕 먹기 싫으면서도 곰탕을 시킵니다. 커피숍에 가서 몸에 좋다고 하는 쌍화탕을 마시고 싶어도, 함께 동행한 연세 드신 분이 커피를 시키면 마시기 싫은 커피 시켜놓고 마시지도 않고 나오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체면 때문에 어떻게 비싼 것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마시지 못하고 그냥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알량한 체면이 우리를 손해 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알량한 체면 때문에 영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급장을 떼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깊이 잠길 수가 있는데, 체면을 앞세워서 사회의 계급장을 떼지 못하고 은혜의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아람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려 고치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지만, 엘리사는 나타나지도 않은 채 사환을 보내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이스라엘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대국인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 찾아왔으면 얼른 마중 나와야 하는데, 마중은커녕, 사환을 통해 더러운 요단강에 몸을 담그라고? 그것도 한번이 아닌 무려 일곱 번씩이나 요단강에 몸을 담그라고? 나아만은 자기 몸의 문둥병을 고치는 일보다 알량한 체면 때문에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는 종들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왕기하 5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요단강 물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기의 신분을 상징하는 당당한 마차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계급장을 떼었습니다. 자존심의 계급장을 떼어 버렸습니다. 그의 신분을 의미하는 군복도 벗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피부는 변하지 않고 여전히 문둥병 그대로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많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또 다시 요단 강물에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여전히 변화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곱 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다가 그가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둥병에 걸린 그가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하게 치료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알량한 체면을 다 던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나아만이 자신의 체면을 내세우고 요단강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의 문둥병은 고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체면을 던져 버렸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또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 하나를 만나셨습니다. 그 여자는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서 강청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5장 2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님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가나안 여자를 무시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이 여자가 소리 지르며 강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고 하시며 인종 차별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도와 달라고 계속해서 강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가나안 여자를 개 취급 하시며 그녀의 자존심과 체면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완전히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 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며 예수님께 애원을 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태복음 15장 28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체면만을 내세우다가 은혜의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깊이 잠길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계급장을 떼지 못한 채 알량한 체면을 내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아람나라의 군대 장관 나아만처럼 세상의 모든 계급장을 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깊이 잠기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체면을 다 던져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 왕은 백성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변장을 하고 밤중에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도 자신의 체면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올인 하지 않고 무당에 올인 했습니다. 물론 과거에 그가 하나님께 올인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3절 하반절에서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사울은 나름대로 하나님께 올인 하려고 약간의 노력을 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겠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마음으로 무당을 쫓아낸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잘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무서운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자 그의 마음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평안할 때는 무당을 쫓아내고 하나님께 올인 했지만, 어려움이 닥치자 하나님을 멀리하고 무당에게 올인한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기
그는 양다리 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환한 대낮에는 무당을 쫓아내었지만, 밤에는 자신이 쫓아낸 무담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낮과 밤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올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올인한 것처럼 보였을 뿐, 진정으로 그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올인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무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것입니다.
일본의 식품회사 ‘카고메(Kagome)’라는 회사 이름을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회사는 토마토 주스에서 출발했습니다. 1899년에 창립된 이후, 장장 90년 동안 카고메는 토마토 주스에 올인 했습니다. 그러다가 종합식품회사로 도약하고 싶은 마음에 1990년대 초부터는 다양한 제품 개발에 나섰습니다. 토마토 주스 외에 커피, 홍차, 우롱차, 과일 주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까지 이런 다각화 전략을 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적자만 늘어갔습니다. 주력 업종인 토마토 주스마저 판매량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카고메는 종합식품회사로의 꿈을 접고 다시 토마토에 회사의 모든 돈과 에너지와 인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카고메는 토마토 주스를 우유와 같은 국민 건강음료로 키운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우고 또 다시 토마토 주스에 올인 했습니다. 결국 카고메는 여러 가지 실험 끝에 토마토 주스에 소금을 전혀 넣지 않고, 한층 선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첨가제도 넣지 않는 제품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품 개발뿐만 아니라 종자 개량에도 박차를 가하여 지구상에 있는 8,000종의 토마토 중에서 무려 6,500종이나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토마토 주스뿐만 아니라 우수한 품질의 토마토까지 직접 재배해서 팔고 있습니다. 이제는 카고메를 아무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지난 2001년 닛케이 비즈니스 브랜드 조사에서 카고메는 쟁쟁한 식품회사들을 다 따돌리고 당당히 선두 자리를 차지할 만큼 ‘작지만 강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저는 일본의 카고메 회사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고메는 그 회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토마토에 올인 함으로 ‘작지만 강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핵심에 올인 하면 우리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까?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인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잘 풀릴 때나 잘 풀리지 않을 때나,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형통할 때나 고난당할 때나, 변함없이 항상 하나님께 올인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은 하나님께 올인하지 못하고 세상의 방법을 추구했습니다. 결국 무당의 인도를 받으려했던 사울의 인생은 무서운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상황이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사무엘상 31장을 보면 처참하게 무너지는 사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31장 6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한 가문이 망했습니다. 하루에 아버지와 아들 셋이 다 죽었습니다. 사울의 시체는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목이 잘려진 후, 벧산이라고 불리 우는 성벽에 높이 매달리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2) 하나님께 올인 했던 사람
둘째로 하나님께 올인 했던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오늘 본문 30장을 보면 다윗의 인생에 말할 수 없는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이 처한 상황은 영적인 리더였던 사무엘 선지자가 죽고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서 어려움을 겼었던 사울의 위기보다 더 큰 위기였습니다.
큰 위기 속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 어디에서도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서 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를 따르는 600명을 데리고 블레셋 나라로 넘어가 가드 지역의 아기스 왕에게 붙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블레셋 나라와 자기의 조국인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윗은 가드왕 아기스의 편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잘못하면 동족끼리 전쟁하게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이 다윗이 자기들과 함께 전쟁에 나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과거에 다윗이 블레셋 장수인 골리앗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방백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도중에 다윗이 자기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배반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기 조국으로부터 쫓기던 다윗은 피난살이하는 블레셋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따르던 6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삼일 만에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시글락에 돌아와 보니 기가 막힌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군대가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시글락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집들은 전부 불타 버렸고, 부인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전부 잡혀갔습니다. 소도 양도 다 끌고 갔으며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 출전했다가 돌아온 다윗의 부하들은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 4절을 보겠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그들은 그저 목을 놓아 대성통곡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부하들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말렉 군대에 부인들과 자녀들을 빼앗겨 버린 부하들의 눈이 뒤집혔습니다.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각오로 따르던 부하들이 이제는 태도를 바꾸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한 부하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조국인 이스라엘에서 살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고, 새로 이민 간 블레셋에서도 왕따 당하고, 전혀 예상치 않았던 아말렉으로부터 뒤통수 맞아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믿었던 부하들로부터 배신당하여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여기 '군급하였다' 라는 말은 '답답하다', '곤란하다'란 의미입니다.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게 되는 답답한 감정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윗은 군급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울이 처했던 상황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8장 15절 중반절을 보면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사울이나 다윗이나 비슷하게 군급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사울처럼 밤중에 무당을 찾아갔습니까?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위기를 맞은 사울은 세상적인 방법을 추구했습니다. 밤중에 변장을 하고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바라기 신앙
다윗은 해바라기가 항상 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당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주바라기였습니다. 8절을 보면 그가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제가 아말렉 군대를 좇아가면 따라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좇아가라, 네가 반드시 그들을 추격하여 너희들이 빼앗긴 것들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흘 동안 전쟁터에 나갔다 오느라 피곤한 상태에 있는 200명은 남아 있게 하고 나머지 400명을 이끌고 아말렉을 추격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전쟁터에 있다가 사흘 만에 막 돌아왔기 때문에 많이 지쳐 있었지만, 새벽부터 그 다음날 저녁때까지 쉬지 않고 아멜렉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니까 꼬박 이틀 동안 적들을 추격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18절부터 20절에 그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의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또 양 떼와 소 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올인한 다윗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사울과 달리,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빼앗겼던 것들을 다시 찾아왔을 뿐 아니라, 빼앗기지 않은 아멜렉 군대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와서 그 전리품을 선물로 나눠주었습니다. 다윗은 승리했을 뿐 아니라, 그 승리를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는 축복도 경험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올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극한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다윗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올인 한다면 마침내 회복과 넘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멕시코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멕시코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자기 나라는 못사는데 반해, 이웃하고 있는 미국이 잘 살게 된 이유를 기자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God을 찾아왔고 자기들은 Gold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God과 Gold의 영어 글자를 보면 비슷합니다. God에 'l'라는 스펠링 하나 더 있는 것이 바로 Gold입니다. Gold를 찾았던 멕시코는 Gold도 놓치고 God도 놓친데 반해, God을 찾았던 미국은 God도 찾고 Gold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God에 올인 하면 God도 놓치지 않으면서 Gold을 얻을 수 있지만, Gold에 올인 하면 Gold도 얻지 못하고 God도 놓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Gold에 올인 하면 실패합니다. 사울처럼 세상에 올인 하면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올인 하면 결코 실패 보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도박판에서는 올인 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 승부수를 던져 올인 하는 사람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처럼 세상의 방법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께 올인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올인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방문한 사울
삼상 28:1-14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입과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에,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군대를 모집하면서 사울 왕이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당시, 블레셋은 엘라 골짜기 전쟁(17장)에서 이스라엘에 크게 패한 이후로는 전면전을 피하고 국지적인 약탈만을 일삼고 있었습니다(23:27).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에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며 군사력을 키우다, 어느 정도 군비가 준비되자 블레셋의 모든 방백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함으로써 길보아산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로부터 전쟁에 참전할 것을 제의받게 됩니다. 그러자 2절에,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했고, 아기스는 다윗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그 공로에 대한 보답과 신뢰의 표시로 평생동안 자신의 호위대장으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기스의 입장에서는 매우 큰 호의를 베푼 것이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모욕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쫓기던 다윗’과 ‘쫓던 사울’이 동시에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음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아기스의 명령으로 동족과 싸워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서게 되었고, 사울은 블레셋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국가 존립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처한 위기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 자초한 위기’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이방 왕을 의지했고,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의 대가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위기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반면, 사울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전쟁에서 비참하게 전사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다윗이 사울보다 더 의로웠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죄는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구원받고 사울은 실패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신 까닭입니다, 물론, 이는 사울은 범죄하고도 끝까지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은 반면, 다윗은 범죄한 사실을 깨달은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개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볼 때, 다윗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새벽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열심도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결코 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며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 깊이 고백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에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이 죽었으므로’라는 말은 ‘사무엘이 죽은 직후’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낸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마음에서라기보다는 사무엘의 죽음으로 동요하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 일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낸 것은, 겉으로 볼 때는 그의 신앙이 회복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매우 감정적이고도 정치적인 행위의 일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어지는 본문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겔 18:23). 그리고 7절에, 사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스스로 신접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수소문하여 찾아갔습니다. 만일 사울의 믿음이 진실한 것이었다면,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애통하며 회개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의 믿음은 그야말로 형식적이며 거짓된 믿음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욥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의 때에,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의 믿음은 위기로 인해 더욱 빛이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거짓 믿음은 위기가 닥치면 쉽게 믿음을 저버립니다.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생각의 한계 내에서만 신뢰합니다. 자기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버립니다. 예를 들면, 지난 주일 예배 때에 언급한 데마와 같은 사람이 그러합니다.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로마 정부와 유대인들의 박해가 점차 거세지자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딤후 4:10).
여러분,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은 평상시에는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그 실상은 확연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게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고난의 일이 있습니까? 어떤 고난이든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10절에, 사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신접한 여인에게 맹세하는 또 한 가지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맹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점점 더 깊은 악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사울의 모습을 조명하며, 그가 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넘어서서 그가 자초한 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출 20:7).
그리고 이어지는 12-13절에, 신접한 여인이 사울에게 사무엘의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전 3:21, 눅 16:22-31).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영혼이 어찌 신접한 여인에 의해 불려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사무엘의 영은 진짜 영이 아니라 악령입니다. 악령이 사무엘 생전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사울의 눈앞에 나타나 그를 속인 것입니다. 만일, 사울에게 영적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같은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사탄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오늘, 자신의 영적인 지식을 점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다윗이 구원받고, 사울이 버림받은 것은 다윗이 사울보다 더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회개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 앞에 겸손한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지식이 없으면 점점더 깊은 죄의 수렁에 빠져들 수 있음을 알아 말씀과 기도에, 그리고 선한 삶을 살기에 날마다 힘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침묵에 절망하는 사울
삼상 28장 3-14 / 이윤식목사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침묵에 절망하는 사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가드의 아기스에게 정치적 망명을 하므로 28장 1절과 2절에서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역시 다윗 못지 않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 싸움은 사울의 험난한 과정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장차 그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장면이 28장 이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하나님의 침묵에 절망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28장은 왜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응답에 침묵하셨습니다. 결국은 이 하나님의 침묵이 사울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왜 위험한지를 오늘 사울의 가장 영적인 타락의 장면을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차례 걸쳐 사울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침몰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므로 순종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점치는 죄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로 말미암아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불행입니다. 영이 예민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지 않기를 우리 영이 늘 깨어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의 침묵은 사울을 침몰로 이끌다(3-7절).
(적용 :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더욱 하나님께 돌아가라)
사무엘의 죽임이 25장에 이어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이 죽자 철이 들었는지 신접한 자와 박수들을 쫓아냈습니다. 신접한 자와 박수는 율법이 금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말씀을 보겠습니다.
레 19:31 /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신접한 자는 영매(靈媒)의 일종으로 주술로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내거나 악령들과 교통하여 그 뜻을 알아내어 전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박수는 점을 치는 자나 마술하는 자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같은 자들은 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이들을 쫓아낸 것은 칭찬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아마도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 무당 같은 자들을 쫓아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꺼져가는 촛불과 같은 신세입니다. 밖으로는 블레셋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고 있었고 안으로는 다윗과 같은 내정으로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다윗의 문제로 힘든 상황인데 블레셋마저 사울을 돕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은 평생 사울의 원수였습니다. 사울이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살해함으로 종교적으로 하나님께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을 만회하고자 했을까요? 신접한 자와 박수 등 영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는데 블레셋이 방해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울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왕을 맡아 나름대로 잘 해보려고 했는데 그만 일이 꼬이고 맙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과오였습니다. 무고한 제사장들을 죽인 것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울이 애초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는 이성을 잃었고 하나님의 영 대신에 악령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늘 조금이나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데 그만 블레셋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했습니다. 블레셋의 아기스가 다윗을 전쟁에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삼상 28:1 /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러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자신의 나라인 이스라엘과 싸우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사울 역시 블레셋과의 큰 전쟁을 하게 되는 위기 상황이 오게 된 것입니다. 둘 다 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수넴에 진을 친 블레셋에 맞서 사울은 길보아에 모든 이스라엘을 소집하여 진을 쳤습니다. 이들의 거리는 불과 15km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골리앗이 사울과 이스라엘을 모욕할 때 사울과 이스라엘이 놀라 크게 두려워했던 것처럼 블레셋은 사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블레셋은 사울의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울이 진을 친 곳은 산지입니다. 수넴 평야에 진을 친 블레셋 보다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까지 떨릴 정도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입니다. 사무엘이 있을 때 영적으로 힘이 되어 주었지만 사무엘도 없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군대를 맞서 싸워주었지만 다윗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도 벌써 사라지고 악령만 남은 상태입니다. 어디 한 군데 자신에게 위로를 주고 힘을 주고 상태를 호전 시킬 여건이 하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마음이 크게 떨며 흔들리고 있던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것일까요?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레야 시킬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다급해진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뜻을 묻고 간구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역대상 11장에서는 사울이 죽은 이유 한 가지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상 11:13-14 /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음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정작 사울이 가장 다급하고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침묵하셨습니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응답치 않으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당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계시를 전달했던 방법이었습니다. 꿈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를 보여 주곤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꿈은 주요 하나님의 전달 계시 방법 중의 하나였습니다. 민수기 12장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창세기의 요셉은 형제들에게 의해서 꿈꾸는 자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의 꿈을 꾸고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 받아 결국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림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하였던 제사장의 에봇에 달린 우림과 둠밈으로 계시를 전달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있어서 꿈도, 우림도,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사울이 하나님께 묻고 간구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 응답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은 지금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빠져있습니까? 사울의 마음은 애간장이 타는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애타게 찾고 간구해도 응답이 없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고 갑니다. 심지어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삿대질을 하며 원망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침묵하실 때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사울을 침몰로 몰아갈 뿐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계시가 막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계시해 주시지 않습니까? 성령님과의 교통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잠언서는 돌이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이킬 때 영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잠 1:23 /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 우리 영이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침묵하실 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줄 믿습니다. 사울처럼 신접한 여인을 찾아 그에게 가서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계시가 열리도록 간구하고 뜻을 물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막혔던 계시가 뚫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들려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를 침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영적 깨달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 연약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침묵으로 사울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만다(8-11절).
(적용 : 하나님의 침묵에도 뜻이 있음에 기다려라)
사울이 자신의 손으로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내었으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자 그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사울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돌이키지 못하고 자신의 손으로 한 일을 거두어 신접한 여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 변장을 하고 찾아 갑니다. 위태위태한 사울의 신앙이 드디어 낭떠러지를 향하여 치닫고 있습니다. 눈앞의 현실에 대한 불안으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도록 사울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내 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침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멀어지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실망하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음으로 사울처럼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눈앞에 위기는 다가오지만 하나님께서 행동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내 몰고 있지는 않은지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침묵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저는 아침 시간에 차안에서 극동방송을 자주 듣습니다. 지난 12월 달 방송의 CEO 칼럼 난이 있는데 한국 FKM의 대표의 칼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금융자동화 기업으로 은행에서 사용하는 ATM을 한국형 ATM을 처음으로 개발한 분입니다. 당시 은행의 ATM기기(현금자동입출금기)는 일본 것을 많이 사용했는데 일본에서 수입한 CD기는 카드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불편함을 본 이분이 통장과 카드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한국형 ATM기기를 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가 부도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다니던 회사의 연구원으로 있던 이분과 사장을 위로하러 온 사람이 용하다는 점집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장은 전화번호를 적었지만 자신이 비록 선데이 크리스천이지만 그 날 만큼은 내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종종 점집이나 토정비결을 봤다고 합니다. 사장 앞에서는 점집 전화번호를 안 적었지만 밖으로 나서 외운 점집 전화번호를 메모하고는 찾아갔다고 합니다. 빨간 깃발을 단 점집이 보였으나 차마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유명하다는 점집 앞에서 갈등을 하다 아내가 새벽기도에 나가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자신은 나가지 않고 아내를 새벽에 깨워주고 다시 잠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내가 몸살이 나서 나갈 수 없자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아 자신이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벽기도회가 쉽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잘 들어오지 않고 힘들었으나 살던 집이 차압이 들어오면서 정말 위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진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니던 회사는 IMF때 부도났지만 ATM기기를 공급하던 일본의 한 기업이 그에게 사장직을 권유했습니다. 회사의 직원들이 그에게 CEO를 맡으라고 데모까지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결국 회사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운 상황이 많이 있었지만 결국 기도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지폐가 나올 때마다 기기를 공급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이 업계에서 시장 점유율이 50%까지 되었습니다. 심재수 대표가 주인공인입니다. 그 당시 앞날의 불안감 미래의 불안감이 이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산 자의 하나님을 왜 죽은 자에게 묻는 어리석음을 취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 8:19 /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죽은 자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산 자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길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바심을 내며 인내하지 못하기에 잠시 하나님께서 침묵하는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말씀하신 분입니다. 어제도 말씀하셨고 오늘도 말씀하시며 내일도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도 고요히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할 줄 믿습니다. 침묵하며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일 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줄 믿습니다. 작은 손바닥만한 구름이 이내 큰 구름을 몰고 와 폭포수와 같은 은혜의 단비를 내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다 보면 하나님의 침묵은 절대 길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살아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침묵을 깨시고 말씀하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더라도 아주 침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의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사신을 찾으며 헛된 것을 찾게 되므로 영혼이 핍절되고 말 뿐입니다. 이런 모습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탄식하고 계십니다. 내 주는 살아 계십니다. 날 위해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마땅한 줄 왜 모르고 있습니까? 욥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 19:25 /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할렐루야!
나를 구속하신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십니다.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헛된 신을 찾지 말고 우리 주님께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 내 주는 살아 계시고
내 주는 살아 계시고 날 위해 비심을 그 주신 사랑 인하여 나 알게 되었네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두고 죽은 자들처럼 아무 힘이 없고 사람을 미혹하는 헛된 죽은 자의 신들을 찾아서는 안 될 줄 믿습니다.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헛된 신은 대답이 없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므로 영원히 침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깨시고 계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사울은 자신을 돌이켰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심으로 우리를 깨어쳐 주기를 원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 요동치 않음으로 나를 발견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을 기울일 줄 믿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았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큰 실망을 하여 그다지 할 말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사울을 만날 필요도 말씀할 필요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기도 하지만 한 번 그 뜻을 돌이키시면 그 누구도 변개할 수 없으신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사울의 영은 이미 사탄에 의해 점령당하여 헛된 신에게 헛된 일을 할 뿐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얼어붙은 하나님의 침묵에 사울은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사울 왕임을 알지 못한 그 신접한 여인이 사울에게 말하였습니다.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는데 어찌 나를 찾아와 나를 죽게 만드느냐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신접한 여인을 안심시킨 사울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사울에게 응답하지 않자 사울이 사무엘을 찾은 것입니다. 신접한 여인을 통하여 죽은 사무엘이라도 불러내고자 했던 사울의 다급함과 비참한 상태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더욱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거역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사울은 점치는 죄를 더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생전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던 이유를 기억했어야만 합니다.
삼상 15:23 /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에 처해있어도 결코 점치는 일이나 박수 무당 등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을 자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에 절대적으로 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침묵은 길지 않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나아갈 때 그 침묵이 오히려 유익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삶속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신실하신 주님을 믿고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침묵은 사울의 가장 영적인 타락을 보여준다(12-14절).
(적용 : 하나님께서 침묵하지 않도록 내 영의 통로를 열어두라)
사울이 신접한 여인으로부터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하였고 사무엘을 본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로 사무엘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에 너무 놀란 여인이 사울에게 나를 속였다 하며 사울의 정체를 알아냅니다. 이 부분은 예로부터 많은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저도 어느 것이 정확한 사실일까 할 정도로 혼란을 겪고 있는 문제이기고 합니다. 문제는 선지자의 환영인가 아니면 사무엘로 변장한 사단이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처럼 사무엘도 영광 받은 영의 실체인가? 아니면 사울을 속이기 위한 어떤 술책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이 보았던 보지 못했던 간에 신접한 여인이 그대로 한 말을 적었다는 주장입니다. 이와 같이 보통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여인이 불러 올린 사무엘의 영은 실제라고 주장하는 설명입니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요청에 따라 사무엘을 불러올렸을 때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나타났다는 주장입니다. 이 여인이 사무엘을 대신할 어떤 영을 불렀는데 실제 사무엘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인도 사무엘의 영이 나타나자 그 충격으로 비명을 질렀지 않느냐 하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사울과 사무엘의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무엘이 여인이 불러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나타난 것은 여인이 사무엘의 영을 불러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메튜 헨리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경우에 죽은 선지자의 영혼이 하늘로부터 증인으로 와서 그가 지상에서 했던 말을 확증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사무엘의 영혼은 가짜라는 주장으로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죽은 후에 점쟁이에 의해서 불려 나올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인 사무엘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허용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13절에 여인이 사울에게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접한 여인이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본 그 영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이라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는 하나님과 같은 신들이나 어떤 영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지상적인 어떤 존재를 의미한다고 카일과 델리취(Keil & Delitzsch)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본 것은 사무엘의 영이 아니라 어떤 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영으로 가장한 거짓된 영을 사무엘의 영이고 본 것입니다.
성경에는 죽은 자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짐승은 땅으로 내려감을 전도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전 3:19-21 /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이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짐승들은 죽으면 땅속으로 묻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은면 땅속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하늘로 올라갑니다. 인생들의 혼은 영을 말하는데 하늘로 올라가서 심판을 받게 되고 이후에 음부와 낙원-천국으로 갈리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에서도 봅니다. 부자가 죽은 후 불꽃 가운데 너무 고통스러워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라도 물을 찍어 자신의 입에 축일 수 있도록 아브라함에게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눅 16:24 /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그러나 부자의 이 소원은 들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사후 세계 음부와 낙원으로 나눴고 큰 구렁이 있어서 오고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왔고 보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인이 본 사무엘은 악령의 속임수라는 주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한 것은 말씀드린 것과 같이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 10 : 13-14).” 이처럼 역대기 저자는 사울의 영적인 타락이 직접적인 원인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토록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신접한 여인에 의해서 사무엘을 불러올리는 이런 영적인 혼란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죽은 후에 하찮은 점쟁이들에게 그의 영혼이 불러 나올 정도로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그녀가 불러낸 사무엘은 주관적인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나왔을 뿐이고 사무엘이 아닐 수 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신접한 여인만 사무엘을 보았을 뿐입니다. 몹시 두려워하는 여인에게 사울은 두려워 말라 안심시켰고 땅에서 올라온 영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여인이 본 것은 한 노인으로 겉옷을 입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생각하기에 노인이고 겉옷을 입은 사람은 사무엘이라 직감하고 땅에 절을 하고 문안한 것입니다. 사울의 영적인 최악의 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했을 때 흔히 내 눈에 뭐가 씌워서 그랬다고 말들 합니다. 신접한 여인을 찾는 것조차 하나님을 가증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행하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엄히 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그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신 18:10-11 /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한 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은 가장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죽은 어떤 악한 영혼을 보고 땅에 엎드려 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죽은 영혼에 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사울은 왕이 되고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범하기 시작했고 그로 말미암아 왕권을 다윗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영적인 상태는 악화되고 오늘 것 잡을 수 없는 타락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사탄 마귀에 의해 미혹 받아 혼탁하면 성령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영혼이 타락하면 무엇으로 다시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영혼이 타락하면 하나님을 가증히 여기게 됩니다. 사울이 쫓아야 할 것은 신접한 자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증히 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형성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십니까?
성령님께서 늘 나와 함께하며 내 영혼이 보호 받고 있습니까?
우리 영혼이 맑고 깨끗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기를 축원합니다. 내 영이 막힘이 없도록 하나님의 계시가 만연하도록 내 영의 통로를 열어 두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