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Gyeongbokgung Palace,景福宮]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글.사진: 廉正義염정의, 參照.引用.轉載: 네이버백과사전, 다음백과사전
어느 가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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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기취이주 旣飽以德기포이덕 君子萬年군자만년 介爾景福개이경복)
.... 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도전... 대단한 사람이군!
01.

장자를 빌려-원통해서 - 신경림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나갈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_______1936. 4. 6.(충북 충주)~2024.5.22.
______노령노래: 함경도 지방의 민요.
_______『莊子』 秋水篇에 ‘大知觀於遠近’이라는 글귀가 있다.
_______1990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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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탑마다 이름이 있고 출처가 안내 되어 있으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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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저기가... 내 젊은 시절... 청춘을 보냈던 사무실

43. 아침 출근. 저녁 퇴근... 거의 말마다 지나던 길

44. 여기는 사직공원

45.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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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철없이 피어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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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경복궁이 위치한 한양은 북쪽에 주산(主山)인 백악산(북악산)이 자리를 잡고 있고,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남산, 동쪽에 낙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의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우측에는 사직단을 두었고, 좌측에는 종묘를 두었다.
경복(景: 볕 경, 福: 복 복)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시집인 《시경(詩經)》의 ‘君子萬年 介爾景福(군자만년 개이경복,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지었다.
경복궁의 창건
1392년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기로 하였고, 이를 위해 1394년(태조 3) 9월 신도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로운 궁궐 조성을 착수하였다. 원래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현 종로구 궁정동 일대) 자리에 궁궐터를 잡으려 하였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궁궐의 터를 잡았다. 1394년 10월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고, 이듬해인 1395년 9월에 경복궁이 완공되었다.
경복궁 창건 이후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기어 경복궁을 비우게 되었다. 제3대 임금인 태종 때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였으나, 태종은 주로 창덕궁(昌德宮)에서 생활하였고, 경복궁은 국가의 주요 행사를 여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제4대 임금인 세종은 재위 기간 주로 경복궁에 머물며 정사를 돌보았다. 세종은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던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었고, 경복궁의 여러 건물을 확장하여 고쳐 지었다. 경복궁 밖에 위치했던 동궁(東宮: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하는 공간)을 경복궁 안으로 옮겼으며,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혼천의(渾天儀),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는 혼상(渾象) 등의 천문관측기구를 경복궁에 설치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흠경각(欽敬閣) 세웠다.
제6대 임금인 성종 때에 근정문·흥례문·광화문 등에 청기와를 올리자는 논의가 대두되었으나 반대에 부딪혀 중지하였고, 경회루를 개축하는 과정에서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등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1543년(중종 38)과 1553년(명종 8)에 경복궁의 큰 화재가 발생하여 동궁·강녕전·사정전·흠경각 등의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554년(명종 9)에 복원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경복궁의 소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을 포함한 창덕궁, 창경궁(昌慶宮) 등 한양 안에 있던 모든 궁궐이 소실되었다. 의주로 피난을 떠났었던 선조는 한양으로 환궁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 오늘날 덕수궁)에서 머물렀고, 선조와 광해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는 대신 창덕궁과 창경궁을 우선 중건하였다.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을 중건하지 않은 이유는 경복궁이 다른 궁궐들에 비해서 규모도 크고, 격식도 엄격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중건하기에는 재정적인 부담이 있었고, 당시 경복궁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선조와 광해군 이후 현종, 숙종, 영조 등 여러 대에 걸쳐 경복궁 복원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실제 중건으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270여 년간 경복궁은 공터로 남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의 중건
경복궁은 고종 대에 와서야 중건될 수 있었다. 1865년(고종 2) 4월 2일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가 흥선대원군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본격적인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었고, 이를 위해 흥선대원군은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고 최고 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 자리에 조두순(趙斗淳, 1796~1870)과 김병학(金炳學, 1821~1879)을 임명하였다.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조선 왕실은 경복궁 중건에 들어가는 비용을 원납전(願納錢)과 당백전(當百錢)으로 충당하였다. 원납전은 경복궁 중수를 위하여 강제로 거둔 기부금으로, 관원이 능력에 따라 기부하고, 백성들은 스스로 기부금을 납부하되 그 액수에 따라 벼슬과 상을 주었다. 1865년 첫해에는 약 500만 냥의 원납전이 납부되었으나, 1866년 147만 냥, 1867년 11만 7,000냥으로 원납전의 액수가 매년 감소함에 따라 흥선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하였다. 당백전은 당시 유통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의 100배에 해당하는 화폐로, 당백전 발행 결과 통화량이 크게 늘어나 1866년 7∼8냥에 지나지 않았던 미곡 1섬의 가격이 1∼2년 사이에 약 6배로 오르는 등 물가가 폭등하였고, 조선의 경제는 급속히 악화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백성이 경복궁 중건에 강제로 동원되어 노역에 시달렸는데, 이에 무리한 경복궁 공사를 풍자하는 '경복궁 타령'이라는 노래가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1868년(고종 5) 6월 10일 경복궁 재건공사가 사실상 끝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임금의 이어(移御)에 대비하여 병조에서 입직(入直)을 준비하였고, 7월 2일에 드디어 임금은 대왕대비를 모시고 새 궁궐에 이사하니 비로소 경복궁은 정궐(正闕)로서의 위엄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1873년(고종 10) 고종은 본인의 내탕금(內帑金: 임금의 개인 재산)을 들여 경복궁 후원 영역에 건청궁(乾淸宮)을 건립하였다. 1873년은 고종이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식하고 친정을 선언한 해인데,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고종의 의지를 건청궁 건립을 통해 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고종의 서재로 사용된 집옥재(集玉齋), 서양식 2층 건축물인 관문각(觀文閣), 서양식 시계탑 등 이국적인 형태의 건축물들이 건청궁 주변에 들어섰고, 1887년(고종 24)에는 조선 최초의 전등이 건청궁에 설치되어 불을 밝혔다.
하지만 경복궁은 30년도 채 사용되지 못하였다. 1895년(고종 32)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였고, 이듬해 1896년(고종 33)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더 이상 조선의 궁궐로 사용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와 경복궁의 훼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경복궁은 본격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한다. 1915년에는 일제가 조선 식민 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라는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궁궐의 많은 전각이 훼철되거나 팔려 갔고, 이후 경복궁 동궁이 있던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건청궁 영역에는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들어서게 된다.
남아있는 경복궁의 전각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경복궁 수정전의 경우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관으로 활용되었고, 경복궁 함화당과 자경전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917년에는 창덕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창덕궁의 내전 영역이 소실되었는데, 이를 복원하고자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을 이건하여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의 부재로 사용하였다.
1926년에는 근정전 앞마당에 조선총독부의 청사가 설립되었고, 이에 따라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경복궁의 북동쪽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의 경복궁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는 미군정의 청사로 사용되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국회의사당 건물로 사용되었다. 6·25전쟁 이후 1953년부터 1982년까지 대한민국 정부 청사로 활용되었고, 1986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6·25전쟁 도중 폭격으로 광화문과 천추전 등의 전각이 크게 훼손되었다. 훼손된 광화문은 박정희 정부 때에 중앙청 앞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였으나,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로 문루를 복원하였고, 위치도 원래의 자리에서 뒤쪽으로 밀려지고 각도도 틀어져서 세워졌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수도방위사령부 제30경비단이 경복궁의 북서쪽 지금의 태원전 자리에 주둔하였는데, 30경비단은 12·12사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지휘소 역할을 하였다. 1972년에는 경복궁의 북서쪽 선원전 영역에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이 건립되었다. 선원전은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선원전 영역에 일부 전각이 남아 있었으나 이를 모두 철거하고 박물관 건물을 새로 지었다.
경복궁 복원사업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경복궁은 고종 때 중건 당시 모습의 약 10%만이 남게 되었고, 199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경복궁 복원 사업이 진행되었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으며, 경복궁 북서쪽에 주둔하던 30경비단이 철수하였다.
경복궁 1차 복원 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총 21년 동안 이루어졌다. 총사업비는 1,571억 원으로, 경복궁의 침전 영역, 동궁 영역, 흥례문 영역, 태원전 영역, 건청궁 및 광화문 영역이 차례대로 복원되었다. 2011년부터는 경복궁 2차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며, 궁중 생활 영역과 오위도총부 영역, 궐내각사 영역, 선원전 영역 등이 복원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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