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육영수 글. 김두영 (전 청와대 제2부속실 행정관)
가족 대신 지만씨 신병 인수해
내가 공직에 있던 지난 89년 2월 하순 어느 날 오후였다. 서울지방 검찰청의 박광빈 검사라는 분이 사무실로 전화를 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 씨가 히로뽕 흡입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데 조사가 다 끝났으니 신병을 인수해 가라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 가슴이 후들후들 떨려 왔다. 차를 타고 오라는 곳으로 찾아가는 동안 갖가지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그 짓을 했을까…. 2월 하순이라고 하지만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소매 깃의 바람이 차가웠다.
서초동에 있는 별로 크지 않은 건물 지하실에 마약 단속반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 앞에는 벌써 신문사 차가 서너 대 와 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표정 한 수사관들이 대여섯 명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지만 씨가 한 수사관 앞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핼쓱한 얼굴에 초라하고 풀죽은 모습이었다. 나는 지만씨와 눈이 마주치자 울컥 목이 메어 와 아무말도 못하고 말았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니 박 대통령과 육 여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박 검사라는 분이 전후 사정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만 씨가 자술 해 왔고 또 모든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뉘우치기 때문에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병인수인으로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나를 부르게 된 것은 지만씨의 요청 때문이었노라고 했다. 신병인수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지만 씨를 데리고 나왔다.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은 누구나 다 같겠지만 만약 박 대통령 내외분이 살아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떠했을까. 5월 16일 새벽, 혁명 기밀이 누설되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됐다는 보고를 들은 박정희 장군 눈앞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세 살배기 지만군의 얼굴이었다고 한다. 자녀 교육에 남다른 사랑과 관심을 쏟았던 육 여사는 아마 그 참담한 심경을 필설로 형언키 어려웠을 것이다.
검찰에서 풀려나온 며칠 후에 지만씨에게 내가 "왜 그런 것에 손을 댔느냐"고 물었더니 지만씨는 "그 동안 너무 괴롭고 미칠 것만 같았다."고 하면서 "술이라도 한잔하고 나면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육영수 여사가 8·15 광복 29주년 경축식장에서 공산주의자의 흉탄에 길지 않은 생애를 마친지 어언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국민의 가슴을 후비고 지나간 그날의 아픔은 세월과 함께 아득히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든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진심으로 그들을 도우려고 애썼던 육 여사,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지성으로 보살피는가 하면 사랑하는 남편의 '밝은 귀'가 되어 국민의 소리를 바르게 전함으로써 국민과 위정자와의 사이에 신뢰의 가교를 놓으려고 노력했던 '청와대 야당'으로서의 육 여사는 많은 이의 가슴에 오늘도 살아 남아 있다.
육 여사의 결벽으로 인한 감사패 소동
육 여사를 알게 된 것은 1968년경 이었지만 내가 청와대 비서로 발탁되어 일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20년 전인 1971년 9월이었다. 첫 출근을 한 다음날 느닷없이 김정렴 비서실장이 비서실 전 직원에게 보내는 지시 공문을 받았다. 내용은 비서실 직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청와대 문구류나 기타 용품 등을 절대로 사적으로 쓰거나 집에 가져가지 말라는 지시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육 여사가 첫 출근한 나에게 주고 싶은 주의사항이었지만 혹 내 자존심이라도 건드릴까봐 김 실장을 통해 전 직원에게 알리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그 다음 해 어느 날 배문 중학에 다니던 지만군이 종이 몇 장을 달라고 해 무심코 내 책상 위에 있던 갱지를 30여장 집어 주었다. 지만군이 종이를 들고 사무실을 나가다가 육 여사와 마주쳤다. 육 여사는 그 종이를 되받아 나에게 돌려주며 나와 지만군을 함께 나무랐다. 사무실 용품을 대통령 가족이라고 해서 함부로 집어다 써도 안 되지만 더구나 갱지를 연습장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파기하는 서류 가운데서 한쪽만 인쇄된 종이를 모아 연습장으로 묶어 아들에게 주었다.
박 대통령 내외분의 근검절약 정신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두 분은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을 아껴쓰는 철저한 수범을 보였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 후에 침실에 있는 변기 물통에서 물을 아껴쓰기 위해 넣어둔 두 개의 벽돌을 발견하고는 그 방을 정리하던 직원들이 함께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내가 1975년 10월 부속실을 떠나 공보비서실로 자리를 옮겼을 때 박 대통령이 그 동안 수고했다는 뜻으로 나에게 약간의 위로금과 '건투를 기원합니다. 1975년 10월22일 박정희'라고 자필로 쓴 메모지를 봉투에 함께 넣어 주었다. 그런데 그 메모지 우측 상단에는 '1974년 월 일' 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은 74년에 쓰다 남은 메모용지를 버리지 않고 75년 10월에도 계속 썼던 것이다.
육 여사는 한복이든 양장이든 외제 옷감으로 옷을 해입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육 여사가 새옷을 입으면 많은 여성들에게 같은 옷감이라도 더 고급스러워 보이거나 외국산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청와대를 방문하는 여성 가운데는 간혹 육 여사에게 옷감 제조 회사를 묻거나 심지어 조용히 옆으로 다가가서 옷감을 만져 보는 여성들도 있었다. 육 여사는 천성적으로 결벽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서도 거의 완벽 주의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꺼림직하거나 의심을 살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를 밝히고 넘어가는 성미였다.
1970년 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개관식 때의 일이었다. 서울 시내 국민학교 교장과 어린이 대표들이 초청된 가운데 개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고 있었다. 식순에 따라 어린이회관 건축에 협조한 20여 명에게 육 여사가 직접 감사패를 전달하게 되었다. 사회를 보던 내가 감사패 문안을 읽고 육영재단 상임이사 였던 정모 씨가 감사패를 육 여사에게 넘겨줬다. 그런데 감사패를 잘못 집어서 받을 사람과 상패의 이름이 달랐던 것이다. 그냥 전달했으면 식이 끝나고 나서 서로 바꾸어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육 여사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이름이 다르다고 정 이사에게 되돌려 주었다. 당황한 정 이사가 이것저것 감사패를 찾느라 마구 건드려 놓는 바람에 계속 감사패 이름과 사람이 틀려 나갔고 차곡차곡 쌓아든 감사패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식장안에 있던 어 린이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KBS-TV가 그 행사를 중계했으니 개관 첫 날 어린이 회관은 크 게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아버지 (육종관 씨)는 후덕한 분이 아닙니다
1972년 10월25일자 모 경제신문에 대한 공론사에 재직했던 김봉기씨가 육여사의 가친 육종관씨에 관한 짤막한 글을 기고한 일이 있었다. 그 내용은 충북 옥천의 토호인 육 씨는 천성이 착하고 후덕하여 같은 마을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늘 보살피고 도와주어 인심을 크게 얻었다는 것이었다. 신문기고를 읽은 육 여사가 나를 불러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아버지는 결코 후덕하고 인심 좋은 분이 아니었어요. 남의 사정을 이해하고 조그만 도움이라도 주셨던 분은 어머니였어요. 아버지를 잘 아는 옥천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무어라고 하겠어요. 김봉기씨에게 전화를 해서 글을 써주셔서 고맙지만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고 바로 잡아드려요." 나는 즉시 김씨에게 전화를 걸어 육 여사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아무리 아버지의 일이라 하더라도 틀린 것은 바로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육여사였다. 나는 그 후 나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은 김봉기씨가 그때 육 여사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1972년9월 29일 부산 어린이회관 기공식 때의 일이었다. 육 여사는 그날 기공식에서 어린이들에게 축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 멀미를 몹시 한데다가 그날 따라 연설 원고도 없이 요지만 몇자 적어 갔을 뿐이었다. 연설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생각처럼 그렇게 조리있게 연설이 나오질 않았다. 육 여사는 그날의 연설이 실패였다고 단정했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에게 미안했다. "내가 온다고 잔뜩 기다렸을 텐데…"하며 육 여사는 내가 보기가 민망 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그 날 대통령 부인을 수행한 내가 보기에는 연설이 흠잡힐 만큼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원고를 읽어나갈 때처럼 유창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육 여사의 심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옆에서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였다. 어린이들에게 실망을 주었다는 사실이 못내 육 여사를 괴롭혔다. 박 대통령이 육 여사를 위로했다. "가정 주부가 대중 앞에서 연설을 잘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너무 잘 해도 이상하지 않아." 하면서 도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저렇게 괴로워하느냐고 나에게 묻기도 했다. "웃고 뛰놀자. 그리고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
육 여사는 부산 어린이회관 준공을 앞두고 위와 같은 어린이 예찬 비문을 붓글씨로 써서 보내며 몇 차례나 다짐하는 것이었다. "준공식 때는 부산 어린이들에게 멋진 선물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육 여사는 그처럼 벼르던 부산 어린이회관 준공식에 참석치 못하고 타계했으며 이 글씨는 마지막 휘호가 되고 말았다.
육 여사는 늘 국민들과 청와대와의 거리를 가급적 좁혀 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시중의 여론을 굴절없이 박 대통령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육 여사는 틈나는 대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루에도 수십 통씩 날아드는 갖가지 사연이 담긴 편지를 열심히 읽고 그것을 통해 민심을 파악하기도 했다. 육 여사는 특히 권력 기관이나 고위 공직자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한 국민들로부터 편지를 받으면 끝까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육 여사는 본인 앞으로 오는 편지는 일체 민원 비서실에서 뜯어보지 못하게 했으며 그것은 최고회의 때부터 불문율이었다.
1973년 가을, 김숙희라는 이름의 한 여인이 육 여사 앞으로 애절한 사연을 진정서를 보내 왔다. 내용인즉 정보부 직원이 남의 재산권 문제에 개입하여, 자신의 남편을 정보부 지하실로 끌고가 마구 구타하여 거의 성불구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 해있다는 것이었다. 김 여인은 편지에서 "중앙정보부는 공산당 잡으라는 곳이지 죄없는 사람을 잡아가서 나이 30대 초반에 병신이 되도록 하는 곳이냐"며 대통령을 원망했다.
정보부 상대로 억울한 민원해결 해주어
편지를 읽고 난 육 여사는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울었어"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육여사는 그 진정서를 박 대통령에게 주었고 박 대통령은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철저한 진상 조사를 지시했다. 며칠 후 이 부장이 박 대통령에게 조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김 여인의 남편인 이희규(가명)씨가 정보부원을 사칭하고 다닌다는 정보가 있어 불러 조사 하던중 평소 심장 질환이 있는 이씨가 졸도하여 현재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 병원에 입원 가료 중이라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이씨가 썼다는 자술서와 이씨가 타고 다녔다는 비상 라이트가 달린 자동차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믿을 수 밖에 없는 완벽한 보고서였다.
육 여사는 나에게 그 보고서를 내주면서 병원에 찾아가서 단단히 주의를 주고 오라고 했다. 매우 섭섭하고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았다. 나는 이씨가 입원해 있는 적십자 병원을 찾아가 병실에 있는 이씨와 김여인을 호되게 나무랐다. 그러자 김여인은 그 동안 청와대 민원반, 검찰, 경찰, 정보부 등에 수 차례 진정을 했지만 그 때마다 "그런 사실없다"는 어처구니없는 회신을 받고 억울해 마지막으로 희망을 갖고 육여사에게 진정을 한 것인데 "결국 육여사도 별 수가 없군요"하면서 매우 실망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김여인의 항변을 그대로 육 여사에게 보고 했다.
이 씨의 진술에 의하면 비상등을 자동차에 달고 다닌 것은 사실이지만 정보부원 행세를 한 일은 없으며 더구나 심장병을 앓거나 간질을 앓은 병력도 없다고 했다. 병원에 비치된 기록에도 이씨가 쇼크 상태로 입원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박 대통령과 육 여사에게 내가 조사한 대로 보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 부장과 나를 부르더니 정보부 보고서와 내 보고를 놓고 진위를 직접 체크했다. 부하들의 완벽한 보고서를 믿는 이 부장의 의견과 나의 의견이 일치 할 리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서울시경 국장과 수사과장을 불러 사건 조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경찰은 정보부 직원이 관련된 사항을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수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막연하게 구타당한 것으로 심증이 간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사필귀정이라고 할까, 며칠 동안 직접 내가 뛰어다니며 조사를 한 결과 그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단서를 잡았다. 그 날밤 육 여사가 집으로 전화를 해왔다. 그 내용을 보고했더니 매우 만족해하면서 내일 아침 곧바로 대통령께 보고 드리라고 했다. 이튿날 나의 보고를 들은 박 대통령은 확신이 선 듯 일사천리로 그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육 여사는 이 사건 조사 때문에 내가 혹시 정보부로부터 해를 입지나 않을까 무척 염려해 주었다.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집무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경호원들을 통해서 경호실장에게 보고가 되고 또 정보부에도 내가 보고했다는 것이 알려질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육 여사는 나를 뒷 정원으로 나오라고 해서 정원으로 나있는 대통령 집무실의 뒷문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육 여사가 먼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와 있다가 내가 정원으로 나가면 집무실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다음 해인 1974년 8월, 육 여사가 서거했을 때 청와대 비서실 광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울며 분향을 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낯익은 남녀가 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김여인 부부였다. 창백한 얼굴의 이씨가 김여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분향을 했다. 나는 저 만치서 몸을 숨기고 그들의 슬픔을 헤아리며 바라보았다.
경호원 없이 각계각층 국민들과 접촉해
박 대통령마저 세상을 떠난 2년후, 1981년 어느 봄날이었다. 말쑥하게 차린 중년의 신사가 청와대 비서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 신사는 자신을 이 아무개라고 소개했지만 나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모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지난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는 금방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73년 늦가을, 이씨는 육여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씨는 성균관대 학 구내에 있는 유도회(儒道會) 건물에서 기거하면서 그 회의 일에 관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유도회 총무라는 사람이 이씨에게 좋은 사람을 한 사람 소개 해 줄 테니 만나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씨는 유도회와 관련된 일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약속 장소인 미도파 백화점 내에 있는 다방으로 나갔다.
그 날 이씨가 만난 정명악(가명)이라는 사람은 이씨보다 나이가 몇 살 위로 보였는데 그는 엉뚱하게도 정부를 비방하면서 은연중에 북한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의 말을 했다. 이 씨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명악은 이씨에게 자기가 하는 일에 협조와 동참을 요구했다. 겁이 난 이씨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고 돌아왔는데 며칠후 중앙정보부에서 이씨를 연행해 갔다. 그 날 정명악과 이씨와의 대화 내용은 모두 녹음되어 있었으며 계속 그를 미행해 오던 정보부 직원들에게 정명악은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다.
그 후 이씨는 수차례 조사를 받았고 정명악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어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일이 있은 후 이씨는 요시찰 대상에 올라 관할 파출소로부터 항상 감시를 받았으며 대통령의 외부 행사가 있을 때면 경호실 지시라며 경찰관들이 찾아와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취직이고 뭐고 되는 게 없었다. 더구나 그를 보는 주변의 차가운 눈초리도 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씨는 요로에 수십번 진정서를 냈다. 그러나 매번 허사였다. 그러다가 누구한테 들으니 육여사에게 편지를 내면 바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래서 이씨는 모든 사연을 적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육여사에게 편지를 냈던 것이다.
이씨의 사연을 읽은 육 여사는 즉시 나에게 경호실에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나는 경호실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의 내용과 담당자의 의견을 물었다. 자기들의 판단으로도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억울한 일을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내버려 두었느냐고 했더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육 여사는 나의 보고를 듣고 나서는 이런 일이 한두 가지 겠느냐면서 경호실장에게 연락해서 대통령께 말씀 드릴테니 그 사람을 즉시 구해 주라고 지시했다. 이씨는 그 후 자유롭게 되어 어느 골프장에 과장급으로 취직이 되었는데 나를 찾아왔을 때에는 사장까지 올라가 있었다.
1973년 그 해도 저물어 가는 성탄전야였다. 평소 일체 경호를 하지 못하게 했던 육 여사는 그날도 나만을 데리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쓸쓸하게 지낼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육 여사가 찾아간 곳은 영등포 근로자 합숙소였다. 그 당시 서울에는 영등포 합숙소 이외에도 남대문과 동대문 근로자 합숙소가 있었다. 육 여사는 명절 때나 연말이면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았으며 근로자들도 그런 육 여사를 매우 반갑게 맞이했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막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노동자들과 육 여사는 난로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근로자들의 애로사항, 정부에 대한 요망 등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고시 공부를 하다가 시험에 실패해 날품을 팔고 있다는 손근숙이라는 청년이 정부 시책에 대해 신랄한 비평과 불만을 털어놓았다. 태도가 매우 도전적이었으며 자포자기에 가까운 언행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길만 넓힌다고 되느냐, 공무원의 부패는 얼마나 심한지 아느냐는 등 육 여사로서는 답변하기 곤란한 문제들을 집요하게 들고 나왔다. 특히 서울시 민원창구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불친절을 사정없이 규탄했다. 사명감과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을 민원 창구에 배치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육여사는 끝까지 웃으면서 그외 불평을 들어주었다.
이서구·박목월 씨 등과 가까웠던 육 여사
이튿날 이른 아침에 육 여사가 집으로 전화를 해왔다. 지금 곧 합숙소 세군데를 들러서 손 청년과 근로자 몇 사람을 청와대로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9명을 데리고 들어갔더니 양택식 서울시장이 들어와 있었다. 육 여사가 부른 것이었다. 육 여사는 준비한 만두국을 일행에게 대접하면서 어젯밤 손 청년이 한 이야기를 양 시장에게 했다. 그리고는 "이 청년에게 맡겨 볼만한 자리가 없을까요" 하고 의견을 물었다. 육 여사의 뜻은 단순히 취직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불만으로 가득찬 그에게 민원창구 공무원들의 고충을 경험시켜 줄 기회가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양 시장은 손 청년을 다음날 서울 시장실로 불러서 본인이 희망한다면 그를 임시직으로 채용할 용의가 있음을 일러주었다. 1974년 1월4일자로 손근숙 청년은 임시직으로 채용되어 관악구청 민원봉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민원창구에 앉은 그는 자신이 주장한 대로 열과 성을 다해 일을 했다. 그러나 그가 밖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박봉에 힘겹고 고달팠던 것이다. 얼마 후 그는 결국 사표를 내고 관악구청을 떠나고 말았다.
육 여사는 작가인 이서구 씨나 박목월 씨 같은 분들과의 대화를 무척 좋아해 그 분들을 가끔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1973년 늦은 봄, 어느 날 오후였다. 이서구 씨가 육 여사의 초대로 청와대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와대는 경호관계로 영업용 택시가 들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와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가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차가없는 경우에는 부득이 남의 차를 빌려 타고 와야 했다. 아니면 효자동이나 삼청동에서 본관까지 걸어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가끔 비서실 차를 입구에 대기 시켰다가 손님을 모시기도 했지만 운전사들이 손님 얼굴을 몰라 실수를 저지르는 예가 있었다. 육 여사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겪는 이런 불편에 대해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다. 이서구 씨도 자가용이 없어서 차를 빌려야 했는데 그날 따라 잘 안 된다고 연락이 왔다. 육 여사가 나에게 지시를 했다. 경호 실장실에 이서구 씨가 타고 오는 택시를 본관까지 올려보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육 여사는 "시내에 돌아다니는 택시를 아무거나 타고 올텐데 그 택시 기사가 청와대로 올 줄 어떻게 알고 나쁜 짓 할 준비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도 동감이었다.
이서구 씨가 탄 택시가 본관 현관까지 올라왔다. 입구에서부터 경찰관이 동승해서 안내를 해 왔다. 아마 그 택시는 청와대 본관까지 올라 온 전무후무한 택시가 될 것이다. 요사이 나는 김포공항에 가끔 가게 되는데 경찰관들이 자가용은 검색을 하면서도 영업용은 하지 않는 경우를 보면서 '이서구 씨의 택시'를 생각하곤 했다.
육 여사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일에 지성이었다. 성장기에 후덕했던 어머니 이경령 여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남편이 거사한 혁명에 대한 공동의 무한 책임감이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남편이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황천의 객이 될지도 모를 혁명에 뛰어든 것은 누가 무어라고 하든 이 민족의 가난 때문이었다고 육 여사는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이 나라 백성을 구해내는 일은 박 대통령과 육 여사의 사고와 행동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1972년 9월6일, 날씨도 맑은 수요일이었다. 육 여사는 이날 전북 익산군 함열면에 있는 음성 나환자촌인 상지원을 방문했다. 그 전부터 육 여사는 전국에 있는 나환자촌을 여러곳 방문했으며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71년 6월 경, 상지원 대표자의 부인이 그곳에 '부모 때문에 사회의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자라는 미감아들이 60여명 살고 있다'는 소개와 함께 한번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육 여사에게 보냈다. 육 여사는 시간을 내어 꼭 한번 가보겠다는 친서를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청와대의 여러 가지 행사와 바쁜 일 때문에 차일피일하다가 몇 달이 지나가고 말았다.
아카시아 꽃을 쌀밥 대신 먹는 가난한 이웃
육 여사가 오신다는 친서를 받은 상지원에서는 그 소문을 자랑삼아 이웃마을과 군청, 면사무소 등에 알렸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육 여사가 오지 않자 인근 부락에서는 공연한 헛소문을 퍼뜨렸다고 비웃기까지 했다. 상지원에서 다시 육 여사에게 편지가 왔다. "여사님께서 이곳에 오신다는 것을 이웃 마을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대통령 부인이 나환자촌에 어떻게 오시겠느냐며 우리들을 놀려대기까지 합니다."
육 여사는 그 편지를 받은 이튿날 떠나기로 하였다. 극작가 이서구 씨, 나협회장 차윤근 씨, 양지회 총무 권옥순 여사 그리고 나 이렇게 가기로 되었다. 박 대통령의 배려로 헬리콥터를 타게 되었다. 상지원에도 급히 연락을 했다. 상지원에서는 국경일도 아닌데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학생들은 학교 마당에 줄을 서서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육 여사를 환영했다.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최대의 환영과 애정의 표시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환영 대열 속에는 아기를 들쳐업은 아낙네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새마을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있었다. 육 여사는 환영나온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비록 얼굴 모습과 손이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순수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육 여사는 믿고 있었다. 육 여사는 상지원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부엌안 까지 살펴가며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었다. 1971년 12월 전국의 나환자 정착촌 가운데서 37개 정착촌을 골라 양지회 회원들이 4백70여마리의 새끼 돼지를 사서 나누어준 일이 있었다. 상지원도 그 중의 하나였다.
육 여사에게 오는 편지 가운데는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것이 많았는데 취직 부탁을 하거나 은행융자를 받도록 도와 달라는 편지 같은 것은 육 여사에게 보여드리지 않고 대개 비서실에서 잘 타이르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그 이외의 편지는 내용을 불문하고 모두 육 여사가 직접 보았으며 일일이 편지마다 처리 지침을 적어 부속실로 내려 보냈다.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해 늦은 봄날이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가정 주부가 편지를 보내왔다. 80이 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데 행상을 하던 남편이 병이 들어 몇 달째 장사를 못해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도 예외없이 쌀을 싣고 그 곳을 찾아갔다. 찌그러질 듯한 집을 찾아 방문을 열고 들어 갔더니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온 가족이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샌 할머니가 누가 찾아 온 것도 모르고 수북히 담은 밥 한사발과 국 한그릇을 놓고 차례로 한 숟갈씩 입에 떠 넣고 있었다. 밥은 흰 쌀 밥이 었다. 나는 굶는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잡곡을 사서 먹을 일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앉아 있으려니까 어둠침침했던 방안이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 할머니가 먹던 하얀 쌀밥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밥이 아니고 밥그릇에 수북히 담은 아카시아꽃이었다. 나는 그 후로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을 보면 가난했던 어린 시절 함께 꽃을 따먹던 옛 동무들과 그 할머니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1968년 여름 호남은 가뭄으로 허덕이는 때에 서울 경기는 폭우로 인한 수해가 컸다. 집중 호우로 영동지구는 탁류가 바다를 이루었다. 잠원동 일대가 홍수로 고립되고 주민들은 인근 국민학교로 대피했다. 마을 대표 세 사람이 나룻배를 타고 동작동으로 빠져나와 긴급구호를 호소했다. 그날 밤 어둠이 깃든 한강은 여전히 황토물이 불어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교실안에 모여 있는데 물이 차 넘치는 운동장에 어떤 부인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방 한 칸이어서 밤이 올까봐 두려워요
그 부인이 비를 흠뻑 맞은 채 교실에 들어섰다. 육 여사였다. 그곳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육 여사를 수행했던 박 모 비서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박목월 씨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기록해 놓았다.
그 날 오후 늦게 육 여사가 비서 한 사람만을 데리고 구호품을 실은 짚차를 타고 제1한강교를 건널 땐 이미 전깃불이 들어와 있었다. 동작동 국립묘지 앞을 지나자 마자 강물이 넘쳐 차를 몰 수가 없었다. 잠원동으로 가려면 나룻배를 타야 했다. 위험하니 청와대로 돌아가시자고 권하고 싶었으나 되돌아 설 분이 아니었다. 나룻배를 불렀으나 선뜻 배를 띄우려 하지 않았다. 비서가 달래어 지금의 반포동 어귀에서 배를 타고 잠실 쪽으로 1km쯤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사위의 강물은 밤에는 허옇게 보였고 잠원동 일대만 거북이 잔등처럼 시꺼멓게 드러나 있었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배에서 내렸다. 물에 떠내려온 나뭇가지들이 널려 있는 흙탕길은 발목까지 빠졌다. "사모님 돌아가시지요…"수행했던 비서가 건의를 했다.
"여기까지 와서 주민들을 안 만나고 갈 순 없잖아요"
육 여사는 비서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을 가까이 이르렀을 때는 손전등으로 앞을 비춰야 할만큼 어두웠다. 마을 사람들은 감격했다. 대통령 부인의 용기도 놀라웠다. 돌아오는 길을 마을 사람들이 안내해 주었으나 길이고 뭐고 모두 물바다였다. 기다리고 있던 뱃사공은 위험하니 다른 방도를 택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룻배를 타고 반포동에 도착한 것은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1972년 연말, 근로자 합숙소 몇 곳을 밤에 들러 본 육 여사가 청와대로 돌아오는 차 중에서 갑자기 나에게 '김 비서 사는 집으로 가자'고 했다. 쌍문동 구석에 있는 나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통금이 가까운 자정 무렵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지역은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아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먹었고 전화도 들어오지 않았다. 육 여사는 부엌에 들어가 아궁이를 들여다보고 또 방안에도 들어와 둘러보았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던 것 같았다. 육 여사는 내가 전화가 없어 일요일 같은 때 볼 일이 있으면 차를 우리집으로 보내어 연락할 정도로 불편했지만 한번도 전화를 빨리 설치하라고 독촉하는 일이 없었다. 당시는 전화를 신청하면 최소 1년은 걸려야 가설이 되던 때였다.
박 대통령은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국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말단 공무원들에 대해 항상 고맙게 여기면서 미안해했다. 육 여사도 마찬 가지였다. 육 여사는 근로자 합숙소 같은 곳을 방문했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때에는 상점에서 알사탕 같은 것을 사서 청와대 경내에 보초를 서고 있는 순경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1972년 2월 초였다. 서울 서부 경찰서에 근무하는 한 말단 순경의 아내가 육 여사에게 색다른 호소를 해왔다. "남편이 말단 공무원이라서 박봉이지만 내일에의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칸 셋방에서 시아버지와 어린 아들 그리고 두부부 이렇게 3대가 함께 먹고자고 하기 때문에 밤이 올까봐 두렵습니다. 방 한 칸을 더 얻을 수 있도록 30만 원만 도와주시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내용이었다.
더구나 남편이 야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부엌에서 쪼그린채 밤을 지새우기 일쑤이며 시아버지는 시아버지대로 그냥 밤을 앉아서 새는 일이 많다는 것이었다. 육 여사는 나에게 돈을 30만 원 준비해 주면서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2월 4일 밤 그 집을 찾아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던 그 여인은 너무 고마워 말을 잊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나는 그 편지를 보냈던 이숙희 라는 여인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 경찰관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은 때가 가끔 있다.
박 대통령 가족들과 식사를 해 본 사람들은 대통령 가족의 평범한 식단에 대개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가족들과 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더러 있었는데 두 분은 나를 무척 편하게 해 주었다. 막걸리 반주를 즐겼던 박 대통령은 손수 막걸리를 나에게 따라 주었으며 시간이 좀 지나면 내 술잔에 남아 있는 술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서 다시 권하곤 했다. 언젠가는 박 대통령이 젓가락 대신 손가락으로 꽁치를 집어들고 맛있게 드시던 시골 농부 같은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지만이 어머니예요" 라고 전화 대답한 육 여사
육 여사는 다른 사람에게 대통령을 지칭할 때 각하라고 하지 않았으며 그냥 '대통령께서…' 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남편을 각하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고 적합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육 여사는 대통령과 함께 행사에 참석할 때는 항상 두 발쯤 뒤에 떨어져서 걸어갔으며 손을 들어 대통령과 같이 흔드는 일이 없었다. 대신 허리를 약간 굽혀서 인사했다. 육 여사는 행사장에서나 차안에서도 등받이에 기대지를 않고 꼿꼿하게 앉아있었다. 보는 사람들이 여자가 거드름 피운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민정비서실에서는 육 여사 앞으로 온 민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고 할 때 '영부인' 결재란을 만들어 서류를 가져 왔었는데 육 여사는 그 서류를 다 보고 나서도 그 난에 결재를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결재권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보니 민정비서실에서는 부속실 직원이 제 멋대로 결과 보고토록 지시한 것이라는 오해가 생겼다. 부속실 민원처리를 맡았던 나로서는 육 여사에게 건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정비서실에서는 열심히 조사해서 보고를 했는데 사인을 안하시니까 제가 중간에서 장난치고 있는 줄 알고 있으니 그저 보셨다는 뜻으로 사인을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했다. 그 후부터는 마지못해 하면서도 결재란에 사인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통령부인은 공식 직함이 없다. 그래서 육 여사는 이점에 대해서 매우 세심한 배려를 했다. 육 여사는 자신의 친서 말미에 항상 '청와대 육영수'하고 쓰고 서명을 했다. 하기야 본인이 '대통령부인 육영수' 이렇게 쓸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육 여사는 자신을 직접 남에게 소개해야 할 경우란 없었지만 만약 있었다고 한다면 그 분은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일요일에 육 여사가 총리부인과 통화를 하기 위해 총리공관으로 전화를 직접 걸었는데 남자 직원이 받았다고 한다. 내가 육 여사에게서 들은 그날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적어본다.
"여기 청와대예요. 총리부인 계시면 좀 바꿔주세요."
"누구십니까?"
"누구신지 성함을…"
"오늘이 일요일인데 가족 이외에 누가 있겠어요."
"가족 누구신지요?"
한참을 머뭇거리다
"나 지만이 어머니에요."
"지만이 어머니…? 아, 예, 알겠습니다. 바꿔드리지요"
육 여사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 육영수예요, 또는 나 대통령부인이에요 라고 할 수도 없고, 총리 공관직원이면 내가 청와대 가족이라고 했으면 누구인지 알아차릴 정도의 센스는 있어야지…"하면서 웃는 것이었다.
육 여사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부인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비정치적인 인물이었지만 박 대통령은 더없이 큰 정치적 힘이 되었었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이 많다. 정치에 관한 한 국민들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육 여사는 '청와대의 야당'이다. 그것은 국민의 소리를 대통령에게 올바르게 전하는 일을 정성껏 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71년의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난 다음 해 2월 중순경이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박 대통령 내외의 초청으로 서울대학교 수석 졸업생들이 청와대를 방문하여 오찬을 갖게 되었는데 졸업생 학부모, 민관식 문교부장관, 서울대학교 총학장 등이 참석했었다. 화제가 우연히 71년 대통령 선거에 이르자 한 참석자가 '지난해 선거 때 보니 육 여사 인기가 매우 높더라'고 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며 "선거 후 당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내가 얻은 표의 30%가 우리 내자가 얻은 것이라고 하더라"고 소개했다. 당시의 그 보고가 얼마나 공식적인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육 여사에 대한 국민의 호감이 상당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육 여사는 정치에 관한 한 대외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하는 일은 일체 없었다. 누가 그런 이야기라도 꺼내면 '그거야 대통령께서 하실 일이지요'하며 화제를 바꾸곤 했다. 1973년 봄으로 기억된다. 공화당 부녀회가 주최한 바자회에 참석하는 육여사를 내가 수행한 일이 있었다. 그 무렵 공화당의 이효상 당의장이 유신 이후 차츰 정치적인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카톨릭에 대해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려면 간판을 바꾸어 달아야 한다"고 했다가 구설수에 휘말려 카톨릭으로부터 적잖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공화당사에 도착한 육 여사가 바자회에 참석하기 전에 당의장실에서 이 의장 내외와 잠시 환담을 나누었다.
육 여사는 천주교 신자인 이 의장이 같은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안쓰러워하면서 "말씀은 바로 하셨던데…"하며 위로의 말을 했다. 그 날 오후 한 석간신문이 육여사의 말을 가십난에 실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한 당직자가 백만 원군이라도 만난 듯 신문에 그 내용을 흘렸던 것이다. 그 기사를 읽은 육 여사가 "늙으신 분이 하도 딱해서 그냥 한 이야긴데…나도 구설수에 오르게 생겼군…"하면서 걱정을 해 내가 청와대 공보 비서실에 이를 해명함으로써 더 이상 기사화 되지 않았다.
육 여사는 오랫동안 나·정 두사람의 여비서를 부속실에 두었었다. 나씨는 최고회의 때부터 육 여사의 통역을 해 왔었고 정 씨는 육 여사가 고향인 옥천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의 제자였다. 두 사람 다 육 여사로부터 두터운 신임과 총애를 받았으며 육여사가 서거할 때까지 청와대에 근무했었다. 활달한 성격의 나 비서는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까지도 들은 대로 육 여사에게 전했으며 정 비서는 육 여사에게 오는 모든 내용의 편지나 청원을 단 하나라도 자의로 걸러내지않고 그대로 육 여사에게 전해 국민의 여론을 듣도록 했다.
언젠가 한번은 나 비서관이 직접 박 대통령에게 "각하, 시중에 각하께서 모 여배우와 연애하신다는 소문이 났습니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청와대 내에서 어느 누구도 대통령에게 직접 대고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박 대통령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아시아 영화제에 참가한 배우들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그 여배우와 악수해 본 기억밖에는 없는데…"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부부 탁구 시합에서 박 대통령이 이겼다
육 여사는 순수하고 발랄한 젊은이들을 무척 좋아했으며 대학생들의 과외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육여사를 좋아했던 대학생들은 육 여사를 캠퍼스로 초청, 좌담회 등을 가졌는데 육 여사가 방문했던 대학은 고대·외대·숙대·영남대·계명대등이었다. 한 대학에서 박 대통령의 매력이 어디에 있느냐는 학생들의 질문에 육 여사는 강한 의지력이라고 답변한 뒤 웃을 때의 모습이 어린애 같아 더 좋다고 해 강당이 웃음 바다가 되기도 했으며 박 대통령을 점수로 매기면 몇 점쯤 되느냐는 질문에는 남편인데 B학점은 주어야 하니 이해해 달라고 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대통령 부인이 대학 캠퍼스를 찾아가 학생들과 대화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1974년 8월15일 일단의 대학생들이 조국순례 대행진을 마치고 집결지인 대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정오 무렵 도보행군으로 땀에 흠뻑 젖은 그들에게 서울서 내려온 H제과 냉동차에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배급되었다. 육 여사가 그 곳까지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육 여사는 총탄에 맞아 서울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나 육 여사는 면전에서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매우 겸연쩍어했으며, 아부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생일인 9월 30일은 음력이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양력 9월 30일을 생일로 했기 때문에 그날은 국무총리가 청와대로 올라와 인사를 하고 내려 갔다. 어느 핸가 양력 9월30일에 모 장관이 박 대통령 내외분과 저녁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 장관이 9월 30일이 매우 길한 날이며 이 날 태어난 사람은 위인이 많다는 등 사주 풀이를 하고 돌아갔다. 이튿날 육 여사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들은 왜 저렇게 아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육 여사는 혹 부속실 직원들이 육여사를 칭찬하는 말이라도 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속에 없는 말 하지도마"하는 것이었다. 공화당에서는 여성당원들의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총재 영부인 컵 탁구대회'를 창당기념일인 2월 21일에 개최했었다. 1974년 2월21일, 그날은 공화당 창당 기념일이자 서울대학교 졸업식이 있는 날이였다. 박 대통령 내외는 오래 전부터 매년 서울 대학 졸업식에 참석 치사를 했었다. 서울대 졸업식이 끝나고 청와대로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에 이르자 박 대통령이 갑자기 앞에 앉은 경호처장에게 시청쪽으로 차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차가 방향을 바꾸자 가장 놀란 사람은 뒤따르던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이었다. 차안에서 서로 연락을 해봤지만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남산에 차가 들어 설 때 겨우 짐작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과 육여사의 탁구 대결이 벌어졌다. 하프스코어 게임으로 먼저 11점을 따는 쪽이 이기는 것이었다. 두분은 모두 교편을 잡았던 경력이 있는데다 그 전에는 청와대 내에서도 가족끼리 탁구를 가끔했기 때문에 게임이 재미있었다. 11:9인가 8인가로 박 대통령의 승리. 육 여사는 수비형인 반면에 박 대통령은 과감한 공격형이었다. 박 대통령의 스매싱은 실수도 많았지만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말대로 공격형 탁구가 이겼다.
근혜 씨 결혼 소문에 전전긍긍 했던 육 여사
박근혜 씨는 서강대학 전자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우수했으며 사려가 깊고 성실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근영 씨는 성격이 매우 쾌활했으며 누구보다 바른 말을 잘했다. 서울 음대 작곡과 출신인 근영 씨는 박 대통령 작사·작곡의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을 옆에서 도운 장본인이다. 근영씨는 얼굴이 알려지지않아 청와대에서 사는 동안에도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73년 경 박근혜씨가 당시 서울시장 아들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파다했었다. 어디서 흘러 나왔는지도 모를 소문에 대해 육여사는 아무 말 없이 그 소문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소문이 호사가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옮겨 점점 퍼져 나가자 육 여사도 나중에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서울시장 부인을 전화로 불러서 나무랐다. "남자야 그런 소문이 나도 괜찮지만 여자쪽은 곤란하지 않느냐. 누가 시장 부인에게 그런 소문을 물어 왔을 때 그냥 '아니다'고 웃으면서 대답을 하면 그것은 겸양으로 받아들여져 소문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쉬우니 정색을 하고 부인해야 된다"고까지 일러주었다.
박 대통령 내외분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 한때 그 분들을 모셨거나 흠모했던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유자녀들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자녀들이 은둔하다시피 하고 때로는 신문이나 잡지에 유자녀들에 관한 이런저런 불미스런 소문들이 실린 것을 접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과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육 여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안부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청와대로 초청해 만나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는 프란체스카 여사 생일 때 청와대로 초청해 생일 축하 오찬을 베푼 일도 있다. 육 여사는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과도 연락하고 싶어했지만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1973년 봄 육 여사는 여비서를 시켜 윤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 댁으로 전화를 해서 청와대에 목련꽃이 곱게 피었는데 꽃구경이나 한번 오셨으면 좋겠다고 완곡하게 초대를 했으나 공여사가 바쁘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1971년 국회의원 선거 때 김대중씨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육 여사는 병원에서 간호를 하고 있는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몇차례 전화를 걸어 진심으로 쾌유를 빌고 위로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김대중씨의 측근 비서를 했던 사람으로부터 얼마 전 들은 일이 있다.
육 여사는 흰 목련을 좋아했다. 그래서 청와대 경내에는 백목련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이른 봄 북악의 잔설이 자취를 감추면 청와대 경내에는 그윽한 향기와 함께 하얗게 피어나는 목련의 자태가 어우러져 청와대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이라해도 여러 가지 장식품으로 아름다움을 돋보이려고 하지만 목련은 아무런 꾸밈없이 그리고 잎새 한 장의 도움없이 앙상한 가지 꼭대기에 꽃만 홀로 피어 은은한 향기를 발산할 뿐 아니라 꽃잎이 지는 것을 보면 때로는 외경스럽기까지 하다."
육 여사의 백목련 예찬론이다.
1974년 8월 15일 꽃잎이 채 시들기 전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떨어지는 목련처럼 육 여사는 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비통함을 되새겨 무엇하겠는가.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해 삼남매가 어버이날에 카드와 카네이션 세송이를 박 대통령에게 드렸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었다. 얼마 후 집무실에 카드와 꽃이 없어진 것을 안 삼남매가 그것을 찾아보니 박 대통령 침실에 걸려 있는 육 여사의 사진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고 한다. |
첫댓글 많은 감동과 감화를 받고 글을 퍼갑니다. 이 글을 쓰신 김두영선생님! 꼭 한 번 만나뵙고 싶은데....연락처를 알 순 없나요.
좋은글 감사합니다.잘읽고감니다...
좋은 글입니다. 내용이 좀 길지만...^^
삼~사십분 읽었나 봅니다. 아련히 고 육영수여사의 날카로운듯 잔잔한 미소가 생각 나네요.....그저, 30년만 더 살아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안타까운 마음분 입니다.....ㅠ.ㅠ(이 게시물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