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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6 주일오전예배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
성경/ 롬1:1
누구, 그 무엇의 노예
오늘은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노예’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오래 전 뉴스 기사(2014년 전남 신안)에서 장애인을 염전에서 수년동안 노예로 부린 ‘염전노예’사건이 보도 되어 아주 떠들 썩 한 적이 있습니다. “너는 나의 노예야”라는 말은 인권유린의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꼭 노예가 아니라도 학교폭력, 직장갑질, 지위를 이용한 여러 가지 부당한 요구들이 그동안 사회 이슈화 되었습니다. 누구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누구에게도 반갑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나는 누구의 노예도 아니야, 나는 자유인이야!”라고 당당히 외치는 사람이 멋있어 보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요즘 넷플릭스 시리즈 중에서 우리나라의 “오징어게임”이 큰 유행을 끌고 있습니다. 9월 17일에 공개된 시리즈인데, 한국 시리즈 최초로 미국 넷플릭스의 ‘오늘의 Top 10’에서 1위에 올랐습니다. 현재 전 세계 83개국에서 방영 중이며, 50여 개국에서 1위, 2위를 다툴 만큼 대단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은 465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 참여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에 도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 사람이 얼마나 돈 앞에서 나약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고 악해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게 됩니다. 게임의 상금으로 내걸린 465억 원은 사람의 목숨 값입니다. 나대신 사람이 많이 죽어야 상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최후의 승자가 되면 혼자 그 돈을 모두 가지게 됩니다. 이 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대하고 속이고 죽입니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흥밋거리로 구경하는 갑부들이 있습니다. 모두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서도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의 분투가 그려지기도 합니다. 여하튼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잘 부각시켰다는 생각과 함께 보는 내내 씁쓸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이런 돈의 노예뿐 아니라 명예와 권력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것들에 중독되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중독이란 “습관적으로 열중하거나 몰두하는 것”을 말하며 매우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중독이라는 영어 단어 ‘애딕션(addition)’의 라틴어 어원인 ‘아디케네(addicene)’는 ‘동의하는 것’, ‘양도하는 것’, ‘굴복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고대에 감금되거나 전쟁에서 패해 노예가 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현대 중독자들을 묘사하는 데 매우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중독자는 집착 대상에게 노예가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중독을 검색해 보니까 다양한 중독들이 있습니다. “쇼핑중독, 게임중독, 인터넷중독, 스마트폰중독, 도박중독, 알코올중독, 흡연중독, 에너지음료중독, 카페인 중독, 약물(마약)중독, 일중독, 섹스중독, 종교중독, 투자중독(주식 등), 정치(권력)중독, 수집중독(우표, 그림, 골동품, 책 등)” 무엇의 노예가 된다는 것, 그것의 종노릇 한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노예
그런데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부정적인 의미에서 노예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노예에 대해서 말합니다. 강압적인 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인 노예요, 그 안에 감사와 감격과 즐거움이 있는 노예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1절 말씀입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제일 먼저 자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에서 찾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인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내 자유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 예수에 중독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고백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보낸 편지의 첫 문장입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대제국 로마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 교회에 보낸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어떻게 로마에 교회가 생겨났는지, 그리고 바울은 왜 그 지역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있는지를 배경적으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 교회의 시작
로마교회는 사도바울이 전도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심지어 다른 사도들이 세운 교회도 아닙니다.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 중에 몇몇이 예루살렘에 순례여행을 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가 생겨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갔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유대인들은 자기가 살던 로마로 돌아가서 원래 하던 대로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자기가 들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또 로마 지방을 여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도움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교회는 이렇게 해서 사도들의 주도적인 사역을 통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자체적으로 교회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복음을 듣게 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생겨났는데, 점차로 이방인 중에서도 유대교에 관심이 있었던 경건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겨난 교회는 예수의 복음을 배척하는 유대인과 큰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종교문제로 유대인들끼리 서로 충돌하다가 자칫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유대인들을 한동안 로마에서 모두 추방시켜버렸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이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도 쫒겨 나와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떠나게 되자 남아있는 로마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유대인들을 추방했던 황제가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터를 잡고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교회의 주축을 이룬 상태에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들어오게 되자 서로 여러 가지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간의 갈등을 해결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직접 복음의 핵심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직접 방문하려고 했지만 여러 차례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에 직접 이렇게 말합니다. “(롬 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로마에 직접 갈 수 없게 된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써 보내게 됩니다. 상황이 원하던 되로 안 되고 막혀서 어쩔 수 없이 차선으로 선택한 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인 로마서는 복음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로마교회 뿐 아니라 2000년 가까이 지난 우리들에게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정말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성경말씀과 같습니다.
바울의 자기소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로마서는 편지형식의 글이면서도 한권의 잘 짜인 논문과도 같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장 1절 말씀은 편지의 시작부분에서 편지를 쓰는 이와 편지를 받는 이를 밝히고 문안인사를 하는 부분입니다. 그중에서도 편지를 쓰는 바울 자신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알리고자 할 때, 가장 나은 나를 소개하려고 할 것입니다. 명함 같은 데도 자랑할 만하고 자기를 어필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것을 쓸 것입니다. 직함 중에서도 자기가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던 것을 씁니다. 어떤 분들은 명함에다가 ‘어디 교수, 무슨 신학박사, 무슨 단체의 회장’ 등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명함에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쓴 것입니다. 그 다음 사도라는 권위 있는 자기 직분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자신을 주님의 종, 더 정확히 말하면 ‘노예’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노예제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 소개를 받았을 때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 당시 ‘노예’는 사람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예시장을 가면 노예들을 반라의 상태로 뒨 위에 올려놓고 마치 시장에서 가축을 경매하듯이 거래했습니다. 당시 전해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가, "노예와 당나귀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 목록 중 하나였고,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했고 여종은 주인의 성 노리갯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노예는 ‘생명이 있는 도구’, ‘말할 줄 아는 짐승’ 정도로 취급되어 가혹한 착취에 시달렸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로서 절대 복종해야하는 존재였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민이 되고, 더 나아가 돈을 악착같이 모아서라도 귀족계급이 되는 것이 성공이고 꿈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스스로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자처합니다. 기꺼이 예수의 노예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
그러면 바울이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바울은 한때 예수를 아주 미워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메시야일리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야,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분인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흉악한 죄수가 메시야일리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그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 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증오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집에 들어가서 끌어내다가 감옥에 넘겼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순교하던 그 현장에 있었고 스데반이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행 7:58~8:3). 예수가 약속하신 메시아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을 이단으로 여기고 소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찾아다닌 것입니다.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해외에까지 쫒아가서 박해하려고 했습니다.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은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죽여 버릴 수 있을 만큼 증오심에 가득 찼던 그가 이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원래 노예는 주인의 말에 마지못해 굴복하는 것인데,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 기꺼이 자기가 예수의 종으로 사는 것은 자원하여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의 변화
그는 예수님을 생생하게 만난 이후 아라비아 사막 지내에 가서 3년여 동안 아주 큰 훈련을 받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 머물렀던 때를 언급합니다. “(갈 1:16-18)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바울은 이 기간 동안 성경을 아주 깊게 연구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자기가 만났던 예수가 태초부터 하나님의 구원계획 가운데 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아브라함의 씨가 바로 예수님이구나,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가 앞으로 올 것이라고 했었는데,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구나. 이사야 선지자가 앞으로 오실 영광스러운 메시야를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고난 받는 종을 예언했는데, 이게 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이 있구나.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 가운데 오셔서 행하신 일이었구나. 에스겔서에서 성전의 영광스러운 회복이 바로 성전이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었구나. 다니엘 예언이 말하는 그 뜨인 돌이 바로 예수님이었구나.” 수백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이 약속해 주셨던 바로 그 복음이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그를 믿는 자들을 잔인하게 핍박을 하되, 스데반 같이 주님께 충성스러운 일꾼을 잡아 죽이도록 사주한 것이 바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바울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중독자
그리스도인을 멸절시키는데 앞장섰던 일이 끔찍하게 잘못된 일인 것을 깨닫고는 자신을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그토록 증오했던 예수가 메시아이신 것을 믿고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주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증오하고 외면했던 바울이 예수님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단지 바울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롬 1: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의 종이 아니면 의의 종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면 죄의 종으로 죄에 사로잡혀 평생을 살아갑니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 맘대로 살 자유와 그것을 주님께 드릴 자유를 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주심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전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우리를 주님께 드리게 하십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핏값으로 우리를 사주셔서 죄의 종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의 것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로서, 예수께 사로잡힌 자로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최선입니다. 물은 물고기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줍니다. 물 안에 있을 때 진정한 평안과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을 때 진정한 자유와 평안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로 사는 것이, 예수에게 중독된 인생으로 사는 것이 나를 가장 나답게,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이거나 두려움으로 주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꺼이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그리스도의 노예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