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지시
요동지시(遼東之豕)는 본디 ‘요동(遼東)의 돼지(豕)’라는 뜻이다. 현실에서는 ‘식견이 좁은데다가 오만해 별것도 아닌 일이나 공(功)을 엄청난 것처럼 부풀리고 떠벌리며 자랑’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경험이 일천하고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까닭에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언뜻 정저지와(井底之蛙), 월견폐설(越犬吠雪)*, 옹리혜계(甕裏醯鷄)*, 선부지설(蟬不知雪)* 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성어의 출현 배경과 의의 및 참뜻과 조우이다.
이는 후한(後漢)을 건국한 바로 뒤 대장군 주부(朱浮)가 나라에 이심을 품고 그릇된 행동을 획책하던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에게 보냈던 책망(責望)의 글에서 비롯된 성어이다. 관련 고사(故事)를 전하고 있는 출전(出典)은 ⟪문선(文選)*⟫의 ⟨주부서(朱浮書)⟩와 ⟪후한서(後漢書)⟫의 ⟨주부전(朱浮傳)⟩으로 알려졌다. 이들 출전에서 적시하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한편 줄임말로 요시(遼豕), 유의어로 요동백시(遼東白豕), 동의어로 요동시(遼東豕)가 있다.
후한의 광무제(光武帝)인 유수(劉秀)가 즉위하고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정한 뒤에도 전란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아 세상은 어수선해 여기저기서 제위(帝位)를 칭하며 나서던 때였다. 그 무렵 유주(幽州) 목사(牧使)으로 일하던 대장군 주부가 여러 군(郡)에 자리한 곡창(穀倉)을 개방해 현사(賢士)를 모으고 천하를 안정시키려는 시책을 펼쳤다.
그 때 어양태수인 팽총이 ‘군량(軍糧)을 확보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곡창 개방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는 광무제를 도왔던 공훈자라는 사실을 앞세우며 오만하고 욕심이 과도한 위인으로 암암리에 세력을 키워 난(亂)을 획책하려고 했다. 이에 주부는 곡창 개방을 반대하여 금령(禁令)을 내린 팽총의 부당성과 불온한 동정 따위를 조목조목 발고하는 동향 보고서를 낙양으로 보냈다. 이 사실을 인지한 패총이 분기탱천해 군사를 이끌고 주부를 치려고 했다. 이 때 주부가 패총의 비(非 : 잘못)를 책(責)하는 글을 써서 보낸 내용의 요약이다.
공(公)은 기껏해야 군량에 집착하지만 본관(本管)은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해야할 장수로서 현사(賢士)가 필요하며, 이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중차대한 나랏일이다. 아울러 본관이 황제께 공을 참언(讒言)* 했다고 의심이 되면 직접 천자를 찾아뵙고 확인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오.
물론 지난날 공이 천자를 도왔던 사실을 잘 알고 있소. 공은 천자가 반군(叛軍) 토벌을 위해 하북(河北)에 포진하고 있을 때 3천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도운 적이 있었소. 그리고 천자가 옛 조(趙)나라 도읍인 한단(邯鄲)을 평정하던 전투에서 중책을 출중하게 수행해 좌명지신(佐命之臣)이 되었다는 점도 잊지 않고 있답니다. 그런 공적을 인정받아 상곡태수(上谷太守) 경황(耿況)처럼 성은(聖恩)을 입고 있음에도 유독 공만이 공공연히 드러 내놓고 자랑하며 높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공에게 이런 옛 얘기를 알고 있는지 묻고 싶소!
/ 요동의 어떤 돼지가 흰머리(白頭)의 새끼를 낳았다(往時遼東有豕 生子白頭 : 왕시요동유시 생자백두) / 주인이 왕에게 바치려고 하동(河東)에 갔다가(異而獻之 行至河東 : 이이헌지 행지하동) / 그곳 돼지가 모두 흰(白) 것을 보고 부끄러워 돌아왔다(見羣豕皆白 懷慙而還 : 견국시개백 회참이환) /
변방인 요동에 살면서 돼지 털이 까만 것만 봤기 때문에 흰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다. 그렇게 식견이 좁고 아둔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많이 배우고 많이 구경해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한편 위 얘기에 이어 주부는 이렇게 야멸치게 몰아치고 있다. “만일 모든 공적을 조정에서 다시 세세하게 논한다면 보다 큰 공적을 세운 군신(君臣)들이 하도 많아 공의 그것은 그야말로 ‘요동지시’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오.” 그런데도 보잘 것 없는 어양 고을을 발판으로 감히 천자와 맞섬은 천부당만부당하오니 여기서 멈추시오. 그렇게 진솔한 충고를 했건만 쇠귀에 경 읽기로 쓸데없는 참견이었던가 보다. 어리석은 팽총은 끝끝내 스스로 연왕(燕王) 이라고 칭하고 조정에 항거했다가 종국에는 두 해 뒤에 패망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요동지시’는 결국 다른 사람이 볼 때 별것 아닌 일이나 공적을 잔뜩 부풀리는 어리석음을 조롱할 경우에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 선거 때만 되면 힘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 당선시킨 뒤에 아무런 지식도 없는 처지에 높은 자리를 궤 차는 ‘어공’*인 정치 백수(白手)들이 자기 공을 부풀리는 전형적인 부류가 아닐까. 한편 자칫하면 자기가 아는 게 전부이고 자기가 맡은 일만이 최고라고 착각하는 우매함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무궁무진하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해야 한다. 보편적으로 인격 도야가 된 이는 자기 공을 가능한 줄이려 하는데 비해 덜 떨어진 위인들은 할 수 있다면 한껏 부풀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기 공을 축소하려 드는 게 능사는 아니다. 반대로 별 것도 아닌 공을 풍선처럼 부풀리는 짓은 가볍고 품위가 없는 하수(下手) 중의 하수로 평가 절하됨을 잊지 않아야겠다.
=========
* 월견폐설(越犬吠雪) : 남쪽지방 월(越)나라 개는 본적이 없는 눈만 오면 이상하게 여겨 짖는다.
* 옹리혜계(甕裏醯鷄) : 술독에 갇힌 초파리.
* 선부지설(蟬不知雪) : 여름 한 철을 사는 매미가 겨울의 눈(雪)을 알 수 없다.
* 《문선(文選)》 : 중국 양대(梁代)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簫通)에 의해 진(秦)과 한(漢) 이후 제(齊)와 양(梁) 시대의 대표적인 시(詩) • 서(序) • 부(賦) 등을 수록한 시문집으로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소명문선(昭明文選)》이라고도 한다.
* 참언(讒言) : 거짓으로 꾸며서 남을 헐뜯어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침.
* 어공 : ‘어쩌다 공무원’이 줄어든 말이다. 주로 공무원시험을 거치지 않은 전문 임기제 또는 선거 보은용으로 임용된 공무원 따위를 이른다.
《수필과비평》, 2026년 6월호(통권 296), 2026년 6월 1일
2024년 10월 5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