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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3년 3월 5일 주일 오후 예배 | 주일 오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25편 1,2,3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36편 5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128편 1,2,3 폐회찬송 – 시 105편 17,18 (고정)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 | |
제39주일 | |
성경낭독 : 시 121; 롬 4:1-5, 13-17 본문 : 잠 6:20-23 제목 : “부모 공경의 이유” |
제39주일
104문 : 제5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나의 부모님, 그리고 내 위에 있는 모든 권위에
모든 공경과 사랑과 신실함을 나타내고,
그들의 모든 좋은 가르침과 징계에 대해 합당한 순종을 하며,
또한 그들의 약점과 부족에 대해서는 인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공경의 이유
제가 종종 말씀드리는 대로, 사람은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당장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일을 한다고 해도 뒤이어 닥치게 될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산업혁명입니다. ‘기계화’ 혹은 ‘자동화’로 대표되는 영국의 산업혁명 당시, 사람들은 이제 모든 삶의 어렵고 고단한 일들은 기계들이 다 해주리라는, 또 압도적인 생산량으로 인하여 이제 인간들은 부유함과 풍족함만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핑크빛 기대감에 가득 젖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누구도, 불과 100년이 되지 않아 유럽 전체가 공장 굴뚝들의 연기로 인하여 시커먼 매연에 가득찬 도시가 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이후에 일어날 모든 결과들까지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지금 좋다고 생각한 일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 되거나 금해야만 할 일이 될지 생각지 못합니다.
이런 예는 많습니다. 퀴리 부인으로 대표되는 원자력과 관련된 과학 분야도 그렇습니다. 방사능 물질들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A. C. 길버트 컴퍼니라는 회사에서는 “아토믹 에너지 랩”이라는 아이들 전용 장난감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장난감을 판매한 이후로 소아 백혈병 환자가 급증했고, 나중에서야 그 원인이 방사능 장난감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방사능에 피폭된다는 것을 몰랐었죠. 이와 비슷한 것으로 현대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비닐봉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썩지 않는 비닐 봉지가 매년 수백 조개씩 생산되는 것으로 인해 자연이 몸살을 앓고 있는 것에 대해 21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대책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들 중 ‘사회 시스템 전체’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일들이 아마도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전 세계에 일어났다고 생각됩니다. 1960년대는 미국에서 ‘반체제 시대’였습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반기업, 반정부, 반군사, 반학교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전근대적이라는 사고가 편만하던 시기였고, 오늘날 아이들이 기성 세대들을 “꼰대”라고 부르는 것처럼, 잠잠히 부모와 어른들에게 순종하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극단적으로 배격되던 시기였습니다. 한 예로, 당시의 10대 소녀들을 위한 잡지의 한 표지에는 “당신은 정말 당신의 부모를 미워하나요? 누군들 안 그럴까요?”라는 표제를 싣고, 거기 “당신이 싫어하는 자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내용이 실렸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이 운동들이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내려 오고 있습니다. 저는 헐리웃 영화들에서 왜 아버지가 항상 아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아내와는 이혼하는 이야기가 일상으로 다루어지는가를 궁금해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이 매우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저는 다이하드 류의 영화, 그러니까 미국의 아버지 영웅들이,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니까, 영웅적 활약을 펼치는 것을 통해서 아버지로서 인정받게 된다......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더 이상 권위는 존중받지 못하고, 권위를 말하는 자체가 금기시된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입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기인했나요? 1960년대에는 “자유”를 기치로 내거는 것이 ‘가정의 파괴’를 불러올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주위에서 종종 겪으실 겁니다. 우리는 십대 청소년들을 조금이라도 억압하거나 압박하는 가정을 보면 “저건 잘못됐어”라고만 생각하는 풍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서너 살 된 아이에게 “식탁에 똑바로 앉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을거야!”라고 말하거나,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이 된 자녀에게 “부모님 말씀에는 순종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부모를 보게 되면, “저 사람은 시대에 맞지 않게 강압적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실제로 이렇게 ‘인권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대중적이 되면서 가정이 박살났습니다. 더 이상 어떤 아이도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당연한,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당연한 문화가 정착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많이 다를까요? 아마 약간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자녀들을 가진 부모님들은 많이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라는 성경의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 일반 사회에서 부모가 자기 자녀들에게 얼마나 영향력이 없으며, 또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지 말입니다.
당연히 과거에는 결함이 있었습니다. 강압적이고, 권위적이고, 그래서 아이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부모의 권위 앞에 숨도 못 쉬게 하는 그런 부작용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의 반대가 된 지금은 어떤가요? 과연 부모님께 또 어른들께 순종하고, 인사 잘하고, 말씀을 잘 새겨듣는 아이들을 모조리 잃어버렸을지라도, 어쨌거나 ‘아이들의 자율’을 얻었으니 마냥 좋아할 일인가요? 정말로 과거는 아이들에게 강압적이었기 때문에 나쁘기만 하고, 현대는 아이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좋기만 합니까? 어떤 부모가 “우리 집은 아이들을 좀 엄하게 키웁니다”라고 했을 때, 존중되지 않고 경찰서에 신고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다섯째 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에서 처음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여기 “공경하라”에 사용된 말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무겁다
첫째, 이 말은 원래 단어의 뜻으로 말하자면 “무겁다”입니다. 그렇다면 문자적 의미를 살려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를 읽으면, “네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가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자녀를, 또 내가 자녀로서는 부모님께, 그리고 더욱 나아가서는 우리보다 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부모가 무겁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가볍게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모로서는 자녀들을 교육할 때, 엄마/아빠를 아이들이 가볍게 여기지 말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제가 간혹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우선적으로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는 “아이들과 친구가 되겠다”가 아닙니다. 친구처럼 친근한 부모가 되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위를 가진 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주변 세상 부모들 중에서 “마냥 친구같은” 부모들도 보게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얼마 전 제가 읽은 어떤 기사에서는 한 대학교 교수가 언어와 관련된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 반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반말을 하도록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학생들이 교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이, 김 교수, 지난 번 강의는 꽤 괜찮았어!” 실제로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그 교수가 학생한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어, 그래! 고마워! 내 강의를 칭찬해주니까 기분이 좋은데!”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들과 ‘친구가 되기 전에’ 먼저 ‘무겁게 여기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 “네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고 가르쳤지, “네 부모와 친숙해져라”를 먼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추세에 맞추기 위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폐기처분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녀들과 친숙한 관계를 형성하십시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권위를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친구처럼’까지는 괜찮지만 ‘친구가’ 되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겁게 여기라”이지, “친근해져라”가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2)
동시에 우리는 부모로서 뿐 아니라 자녀로서, 혹은 자기보다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동일한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들을 ‘무겁게’ 대해야 합니다.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의를 갖추고, 격식을 차리고, 최대한 부모님이나 위에 있는 분들이 나의 행동으로 인하여 대우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자녀로서 부모를 존중해야 하고, 부모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소외되기 쉽다는 것을 생각하고 권위를 높여 주어야 합니다. 부모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항상 나보다 더 ‘어른’인 분들이 있고, 또 직장 등에서는 ‘상사’도 있습니다. 나라로 볼 때는 ‘위정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자신보다 위에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들 모두를 향하여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가볍게 여기고 홀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어떻게 해서는 모든 것을 가볍게 만드는 시대입니다.
2. 영광
그리고 둘째, 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에 사용된 “공경하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무겁다’라는 의미의 말이지만, 이 단어가 바로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단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가 바로 ‘부모 공경’이라는 인간 관계가, 어떻게 ‘하나님 섬김’과 연결되는지 중요한 연결점이 나타나는 지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의 영광에 사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가 바로 ‘카바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카바드’는 일차적으로는 ‘무겁다’는 의미이지만, 그 다음 의미가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하나님은 영화로우시다”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쓰면 “하나님은 무거우시다”가 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면 이런 식입니다.
시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사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저런 “영광”에 바로 이 ‘무거운’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무게 있다’, ‘위엄 있다’는 것이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는 시각적 언어, 그러니까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할 때가 종종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무거우심”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런 방식의 대표적 예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이 무겁고, 중하십니다. 그분의 위엄은 권위 있으시기 때문에, 아주 무겁습니다. 이런 종류의 무거움을 성경은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를 이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읽어봅시다. 우리가 첫째 부분에서는 “네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라고 하였지만, 이 ‘무거움’이 ‘영광’과 연결된다는 것을 안다면 “부모 공경”이란 이런 식으로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대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영광을 대하는 것과 비슷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네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그 권위를 무게 있게’, ‘진중하게’ 여기라는 의미이고, 이것은 다른 말로 ‘영광’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세워두신 ‘부모’라는 지위, 혹은 ‘권위’라는 것은 그야말로 ‘무거운’ 것이면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다섯째 계명을 배우면서 이 ‘영광’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 관계에서 나보다 더 위의 권위에 있는 사람을 ‘진중하게 대한다’고만 여길 것이 아니라, 이런 인간 관계에서의 존중과 존경 속에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존중과 존경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 질서’를 향한 우리의 태도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용적 세계와 성경의 가르침
그러면 이것을 우리의 일상의 삶과 접목시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오늘 읽은 잠언 말씀을 이 부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담화 내용이었는데요, 전반적인 내용은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경험이 많다는 착각을 벗어날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주장의 주된 논지는 20년 전의 세계와 지금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50대인 사람이 20대에게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할 때, 그때 50대가 말하는 세계와 지금 20대가 사는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이지요. ‘전혀 다른 세계’이니까 통할 리가 없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20대가 50대에게 무얼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50대가 말하는 20대의 삶은 30년 전의 삶이고, 따라서 이것은 지금의 20대에게는 전혀 상황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공감이 되십니까 반감이 생기십니까?
아마도 성도들 중에 어떤 분들은 “그래 맞다, 내가 살았던 시대와 요즘 젊은이들이 사는 시대는 다르지. 스마트폰도 하나 제대로 다루기 어려운 내가 젊은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겠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고, 또 다른 어떤 분들은 “아니야, 그래도 어른이 젊은이들이나 청소년들한테 무언가 가르쳐 줄 것이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 담화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실용적 세계와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 부분을 한 번 다루어 봅시다.
1. 테크놀러지의 세계
첫째, 이런 생각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테크놀러지’에 취약해지기 마련인데, 현대 세계는 테크놀러지의 세계니까요. 저 정도 나이만 되어도, 아무도 학교에서 코딩 같은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하지만, 아마 10년만 지나면,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도 간단한 프로그래밍은 식은 죽 먹기로 하는 그런 시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시대라면 노인이 되어갈수록 ‘사회에 거치적거리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른들이 조언을 해 주는 건, 부족 국가, 족장 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이야! 그때에야 농사 기술이나 수렵, 채집을 위한 기술을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었겠지! ‘경험’이 더 풍부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은 ‘경험’의 시대가 아니고 ‘정보’의 시대이며, 그 ‘경험’조차도, 구시대들이 가졌던 경험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이 보편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큰 함정이 하나 있는데, ‘현대 세계가 테크놀러지의 세계’인 것은 맞지만, 그러면 정말로 현대 세계가 ‘테크놀러지의 세계이기만 한가’라는 문제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우리는 혹시 TV나 인터넷의 광고,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현대화된 전자 제품들을 팔아먹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최신의 제품들을 쓰는 최첨단의 사람들이야”라는 마인드에 현혹된 것은 아닌가요? 정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테크놀러지의 세계일 뿐인가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의 발언들’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 인생을 찬찬히 둘러보면, 사실은 ‘기술’이라는 부분만 제외하면, ‘삶에서의 편리성’ 같은 부분들만 제외하면, 우리 인생에는 ‘과거와의 접점’이 ‘과거와의 단절’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간이 천년이 지나가도 사람의 삶에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는 부분은 가족, 친구, 직장동료, 이웃입니다. 성도인 우리들에게는 ‘교우’도 포함되겠지요. 그러면 이런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정말로 ‘테크놀러지’로 작동합니까? 천년 전에는 아이와 엄마의 유대가 ‘인간적’이었지만, 천년이 지난 지금은 아이와 엄마의 유대가 ‘전자식(electronic)’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어쩌면 속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장년이나 노년이 스마트폰을 잘 다루지 못하고, 지하철을 어떻게 타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 비록 크게 보일 수는 있을지라도, 인간 세계는 그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근면과 성실이 결국에는 최후 성공의 보장이다”라던가, “선을 베푸는 사람은 결국에는 사람들로부터 평이 쌓여 결국에는 좋은 대가를 얻게 될 것이다”라는 식의 진리는 천년이 지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생각해보면 이런 류의 진리가 세상에 많지만, 이런 류의 진리들이 수렵, 채집, 농경의 시대에만 진리였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우리는 ‘물질 문명’ 중심주의 세계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더 첨단의 제품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현명한 사람들이다”라는 거짓 선전들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재테크 수단이 되는 주식이나 파생 상품들을 잘 다루는 사람이 더 사회에서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라는 거짓 선동들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했던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가 있었죠. 이 영화에는 맷 데이먼이 주연했던 ‘윌 헌팅’이라는 청년이 나옵니다. 젊고, 천재입니다. 제대로 된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지만, 대학 교수가 대학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내놓은 아무도 풀지 못한 수학 문제를 그 자리에서 외워 집에 돌아와서 다음날 학교 게시판에 답을 적어내 버릴 정도의 대단한 천재입니다. 나중에 윌이 물의를 일으켜서 로빈 윌리엄스(숀 맥과이어)를 만나게 됩니다. 둘은 거칠게 다투게 되지만 나중에 숀은 윌에게 너는 천재이지만 아직 어린애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면서, “인생의 희비나 타인의 감정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그저 남의 약점만 파고드는 애”라고 하면서 그의 멘토가 되어 줍니다.
수학 문제를 잘 푸는 여섯 살짜리 천재가, 이전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60먹은 할아버지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둔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물질 문명 중심의 세계가 ‘사람이 진정으로 다루어야 할 부분들’ 전체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계는 단순히 테크놀러지보다 훨씬 더 많은 ‘지혜’를 필요로 하고, 여기 ‘인생을 더 오래 산’ 사람들의 조언은 중요합니다. 앞에서 말한 그 담화의 주인공은 세계를 ‘지독히 테크놀러지의 눈으로만’ 본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우리 인생에는 ‘공통의 부분’, ‘겹치는 내용’, ‘과거와 지금 모양이 약간 바뀌기는 했어도 인생에는 항상 동일한 종류의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른에 대한 공경’, ‘무거움’이 필요합니다.
2. 잠언의 핵심은 무엇인가?
둘째, 그래서 이런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부모를 공경하라”라던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라고 가르칠 때, 거기 ‘단서’가 달려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나이 값을 해야 나이 대우를 해 주지”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되, 부모가 부모 다울 때 공경해라” 이렇게 단서를 다느냐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단서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저 단조롭게 말합니다.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 “위에 있는 권세에는 복종해야 한다” 여기에는 단서가 없습니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혹 부모가 잘못 하더라도, 권세는 여전히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을 104문답에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104문답 중반 이하를 보시면
그들의 모든 좋은 가르침과 징계에 대해 합당한 순종을 하며
는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지만,
또한 그들의 약점과 부족에 대해서는 인내해야 합니다
라는 말씀은 의아한 것입니다.
이것은 “실용적 세계”의 마인드와는 정반대되는 것이거든요. 말하자면 “실용적 세계”의 마인드에서는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은 존경 받을 만한 무언가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 곧 테크놀러지를 많이 갖고 있어야, 정보를 많이 갖고 있어야, 효용이 있어야,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교리문답의 가르침은 ‘그 밖의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효용이 있어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효용이 없는데도, 심지어는 잘못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수하고서도 존경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존경의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효용’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른을 존경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뛰어나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원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 잠언 6장 20절을 보면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라고 하였습니다.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을 지키고 머물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을 보면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어디서 많이 보던 문구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주신 쉐마, 곧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신 6:6-9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잠언이 “아비의 명령”과 “어미의 법”을 말하는데 신명기의 쉐마를 언급하는 것은 굉장히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잠언의 이 말씀의 의미는
첫째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이나 가르침이‘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뜻이고
둘째로는, 이것이 쉐마에서는 ‘자녀 교육’에 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언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잠언 말씀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부모님의 가르침 안에서 사는 것”을 자녀들이 가져야 할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태도’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가르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 속에 사는 것은, 22절입니다.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잠언은 ‘부모의 가르침의 질’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들의 격차’, 곧 현명한 부모도 있고 지혜롭지 못한 부모도 있다......라고 차등을 두지 않습니다. 일괄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모든 부모가 다 하나님 같다는 의미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중요한 사실을 전달합니다. 비록 우리 부모들이 부족하고 어리석더라도, 하나님께서 이 부모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권위의 통로로 여전히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 말입니다.
정 리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권위의 세계’에서 살고 있고,
그 ‘권위의 세계’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부모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지만, 인간 대리자인 부모는 실수도 합니다.
하지만 실수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실용적 세계의 가르침’에 사로잡히지 말고, 부모님을, 또 나의 위에 있는 권세들을 ‘무겁게’ 여기고, 또 ‘영광이 거기에 있다고’ 여기도록 합시다. 둘째 돌판의 첫 계명인 이 부모 공경이라는 가르침이 사실 나머지 둘째 돌판 전체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부모들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 속에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