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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감정적이고 이방적인 행동을 취할 때 실패하게 된다. <후르시쵸프>란 책이 있다. 소련의 수상이었던 니키타 후르시쵸프(SikitaKhrushchev)가 쓴 회고록인데 그 회고록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치열했을 때 니키타 후르시쵸프는 정체장교로 전선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군이 소련국경을 넘어서 쳐들어갔으나 워낙 방대한 땅이라 감당을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되었다. 그때 소련군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서 전진을 하는데 70만의 대병력을 투입했다. 아무리 전진을 계속해도 독일군과는 접전이 없었다. 소련의 야전 사령관은 더 이상 전진하다가는 오히려 작전의 실패를 가져올까봐 정치장교인 후르시쵸프를 통해서 모스크바에 연락을 했다. 그때 소련의 수상은 스탈린(Stalin)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전진을 계속하라고 일방적인 명령을 내렸다. 야전군 사령관의 작전 의사를 무시한 다분히 감정적이요 일방적인 전진명령이었다. 후르시쵸프 자신도 그 일을 감정적이고 충격적인 명령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면 그 당시 감정적이고 일방적인 작전명령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해서 70만 가운네 30만의병력을 잃어버리는 참사를 당했던 것이다. 충격적이고, 감정적이고, 일방적 태도는 실패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감정을 잘 다스리고 있습니까? [창 4:5-8]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1. 2023년이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하루 하루의 시간을 소중히 아끼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향하여 기도하며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새해에도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속에 잘 이루어지고 지경을 넓혀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 창 4:1-8; 롬 5:12-19 제목: 아벨을 쳐죽이니라 동서고금을 통틀어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살인자는 '베흐람'이라고 하는 인도 사람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다고 합니다. 1700년대 후반 인도가 터키의 종교집단에 의해 지배되고 있을 때, 인도인의 암살 단원에 속해 있던 베흐람은 1790년부터 50년 동안 무려 931명을 죽였습니다. 히틀러, 스탈린은 정치적 지도자로서 베흐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명령을 내렸던 사람들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죄는 살인입니다. 남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 살인에 대한 기록을 창세기 4장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본성을 받아 에덴을 쫓겨난(창 3:24) 아담과 하와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바로 가인(Cain)과 아벨(Abel)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은 이미 죄의 본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12-19에서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고,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고, 정죄에 이르렀으며,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48에서도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흙에 속한 자"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담의 후손을 의미합니다. 가인과 아벨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부모가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인생들은 그 본성에 있어서 부패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것은 모든 인생이 죄로 이미 오염되었기 때문에 이미 누구나 죄인이며, 더 큰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태어났으며,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히틀러, 스탈린, 폴 포트 등은 그 죄성이 잔인하고 극대화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선을 행치 않으므로 가인과 아벨은 같은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에게 나아가는 길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생들은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2-5에서는 아담의 두 아들을 통해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미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생은 누구나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과의 교제의 길을 닫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기초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얻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가인의 살인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제사에 대한 말씀은 다음 주에 말씀이 준비되어있습니다. 가인은 자신과 자기 동생인 아벨의 제사 중에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하셨지만 자신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치 않으시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분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가인은 자신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 처음 단계는 분하여 참지 못하고 얼굴 색이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굴에 그 감정이 표현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면 얼굴을 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살인에 이르는 범죄의 첫 단계는 그가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이란 히브리어로 (야타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에 근거한 변치 않는 실천'을 의미하고, 인간 편에서는 '철저한 회개와 결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말할 때 (야타브)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기 뜻대로 드렸고,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잘못은 자기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오히려 화를 참지 못하였고, 그 감정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부패한 본성을 아담으로부터 가지고 태어난 가인은 심한 분노로 인하여 제물의 열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벨에 대하여 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치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에 엎드리다'는 것은 마치 굶주린 사자가 사냥할 대상을 앞에 놓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상태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히브리어의 (rabats, 라바츠)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죄를 짓게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선을 행하지 않아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죄인의 본성에 대하여 고백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드린 땅의 소산으로 드린 제물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편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것을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하여 오히려 화를 내고,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였을 때, 그에게 죄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그를 공격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여지없이 죄의 공격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죄의 소원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자신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화를 내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 두 가지의 경고를 하셨습니다. 위에서 이미 보았듯이 첫째는, 죄가 문앞에 엎드리고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죄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시리지 못했습니다. 인간에게 죄의 소원이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원의 히브리어 (테슈카)는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남편을 사모하라"(창 3:16)는 말씀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와가 해산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만족을 갈망하듯, 인생들에게 있어서 죄는, 죄에 대한 엄청난 하나님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게 하는 욕정과 욕망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소원은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분노하고 있는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죄의 본성을 갖고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에 대한 욕망이 항상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을 정복해야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분명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제사를 열납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오히려 화를 내고, 그 분을 참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제사를 드려 의인이라 인정을 받은 동생 아벨이 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고 싶은 욕망에 빠졌습니다.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동생을 들로 불러내어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동생을 죽인 첫 살인자 가인에게서 그 아비 아담보다 더욱 진전된 인간의 속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아벨을 찾으시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라고 하며 자신의 죄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한 저주를 내리자 오히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라고 하면서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후 나무 사이로 숨었다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그 앞에서 변명은 하지만 자신의 죄는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가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리신 죄에 대한 저주에 대하여 너무 무겁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한번 죄로 부패된 인간의 속성은 더욱 악해져 갔습니다. 죄를 짓고도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로 발전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급격히 악해져 가고 대담해 갔습니다. 죄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이 되었고 죄의 열망 앞에 무기력하다 못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그것을 보게 합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도 악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부패성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짓게 되는 죄, 즉 신앙적 불충성에서 오는 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죄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깊은 충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는 죄는 대부분 국법(???÷)으로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역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경시하고 죽이는 것을 가장 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인류는 수없이 많은 목숨을 희생시켰습니다.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한 인생들에 의하여 행해진 만행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저질렀다고 말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도 아담의 후예에 의하여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폴 포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임을 면하라 범죄한 아담을 찾아 그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심으로 구원의 방법을 보여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을 죽인 가인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뒤 그가 벗었음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범죄 후의 가인을 보십시오. 그의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4:14에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의 두려움은 다른 사람에 목숨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범죄의 진전과 함께 인간의 두려움도 깊어졌습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는 한 나라의 수상이나 지도자들이 흔히 대중교통을 일반 시민들과 같이 이용하여 관청에 출퇴근을 한다거나 일상적인 이동도 같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절대권력이 집중된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움직이려면 경호원들이 겹겹이 경호를 해야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거나 정권 탈취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던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습니까? 어떤 두려움입니까? 그 두려움의 원인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먼저 해결하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여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혹 들어가지 못할까하는 두려움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심령속에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영접하였는지를 확인하십시오. 그 전에 인생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십시오. '그 앞에 나도 죄인입니다'라는 고백도 하십시오. 그리고 예수께서 죄인 된 나를 위해 오셨음을 믿고 시인하십시오. 그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적인 풍성함과 능력이 없어 세상의 일에 염려와 두려움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원인은 하나님과의 교제 부족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십시오. 세상의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경호원도 두려움을 막아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어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창 4:15). 여기에서 가인에게 주었던 표가 그의 옷인지, 아니면 얼굴에 낙인을 찍었는지, 아니면 문신처럼 신체의 어느 부위에 표를 해주었는지는 정확히 표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생명을 결코 해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가 우리의 심령 심령에 있습니다. 그 어떤 존재도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설령 부패된 인간의 속성을 가진 폴 포트와 같은 인간이 다시 나타나 육신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사는 영혼은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 영혼에 표를 해놓으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모법으로 삼고 의지하십시오. 그가 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죄의 욕망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오히려 죄를 다스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영원한 "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우리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폴 포트와 히틀러 스탈린과 같은 죄성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과 구별되게 하였습니다. |
첫댓글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영광과 화평과 절제와 희락의 도구로 쓰임받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평안 장로님, 존재 목사님, 만경강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