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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라면 다 그렇겠지만, 저 역시 김치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런데 맛있는 김치가 되려면 글쎄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고 하네요.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이야기라서 여러분과 함께 나눠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죽음은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은 통배추가 칼로 두 쪽으로 갈라질 때라고 하네요. 세 번째 죽음은 배추가 소금물에 절여질 때요, 네 번째 죽음은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될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죽음은 그 배추가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익혀질 때까지 다시 한 번 죽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섯 번 죽어야 비로소 김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김치가 죽어야 좋은 맛을 낼 수가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나를 드러내기 보다는 낮출수록 좋은 맛과 향기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겸손을 우리는 지향하지 않지요. 그보다는 높은 자리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자리를 지향하면서 스스로의 맛과 향기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맛과 향기를 잃어가게 하는 것을 과감하게 깨뜨려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동네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글쎄 어린아이 하나가 물이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독에 빠진 것입니다. 동네의 수많은 사람들이 발을 구르면서 “아이고 큰일 났다!”면서 야단법석을 떨었지요. 그 어린아이를 구하기에 그 항아리는 너무나 크고 깊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어떤 꼬마가 큰 돌을 가져와서 사정없이 항아리를 쳐버렸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항아리는 깨졌지만, 그 어린아이는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지요.
항아리가 크고 깊다면서 발을 동동 구른다고 아이를 구할 수 없습니다. 과감하게 깨뜨려야지만 생명을 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마음의 항아리를 과감하게 깨뜨려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겸손함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혹시 예수님께서 비판하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만을 일삼는 사람,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사람 등등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만큼 더욱 더 높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기쁨에서 기쁨으로가 아니라 희망에서 희망으로 흐른다(새무얼 존슨).
참신앙의 지표, 겸손
-김민수 신부-
예수님 당대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율법을 가장하여 하느님보다 자신을
드러내고자 교만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만 내세울 뿐
행동이 따르지 않았고, 남에게 존경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내용이 빠진
형식에 집착하였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엄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뜻보다
하느님 말씀을 따르며, 자신의 장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재능이라는 칼이 돋보일 수 있지만 그 칼을 보호하는 칼집인 겸손이
필요합니다. 겸손은 남이 시기해 진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미리 지뢰를 제거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이 사라지는 순간, 재능은 묻혀 있는 지뢰를
터트리고 맙니다. 본당신부의 수호성인인 비안네 신부님의 일화가 흥미롭습니다.
어느 날 당신을 칭찬하는 한 사제에게 비안네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보십시오! 신부님이 같이 계시면 되겠지만, 저 혼자 있을
때에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나는 영(제로)과도 같습니다. 영은 다른 숫자들
옆에서만 가치 있습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존경받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춤으로써 남을 높이는 겸손의 영성이 참신앙의 지표입니다.
천사들의 모범
- 장재봉 –
천사를 만난 인간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땅의 인간에게 하늘의 것이 보일 때
무엇인들 경이롭지 않고
어느 것인들 놀랍지 않은 것이 있겠는지요?
때문에 하늘의 천사들을
인간보다 높은 존재로 여기는 일도 백 번, 이해됩니다.
저는 오늘
천사의 안내를 받는 에제키엘의 모습을 생각하다가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천사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았던 간큰 아가씨를 생각했습니다.
그 날 마리아는
가브리엘천사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말”에 몹시 놀랐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 뿐 아니라
“곰곰이 생각하다” 조목조목 야무지게 따져 묻는
간 크고 담센 아가씨 앞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도리어 쩔쩔맸을 것도 같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시를 읊으면서
하느님께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느님께 “사람이 무엇이기에”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시편 8,5).
이에 더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이며
또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되는 이”
(히브 1,14)임을 밝혀주는데요.
하느님께서 천사를 만든 까닭은
영원히 함께 살아갈 인간들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천사를 만났을 때에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곰곰' 하느님께서 전하신 말씀에만 주목했던 마리아의 자세야말로
참으로 마땅한 모습이라 싶습니다.
진실로 하느님께서는
오직 우리 인간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고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회개의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크고 험한 죄를 짓더라도
다시 돌아서 회개하는 것만으로
말끔히 씻어
다시 새로워지도록 하는 구원의 은혜는
천사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에게만 주어진 이 큰 행복을 느끼시는지요?
이 큰 은총에 감사하며 살고 계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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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께서는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 이들’과
‘사람에게 보이기위해서만 행동하는 이들’과
‘높아지는 것’만 너무너무 좋아하는 이들에게
참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삶을 설명하십니다.
오늘 주님말씀을 실행한다면
세상에서도 존경을 받게 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세상은 스스로 낮추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며
상대를 섬기며 살아가는 겸손한 모습에 감동하기 마련이니까요.
때문에 오늘
그분의 뜻을 살아내기 위해서
곁에 있는
수호천사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천사의 시중을 받게 될
하느님자녀로써의 품위를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잘 따져보기 바랍니다.
나아가
때마다 하느님아버지를 기억하고
일마다
그분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에서나
어디에서나 늘
천사의 시중을 받게 될 윗사람으로써 지녀야 할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분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고 실행하면 좋겠습니다.
천사가 부러워하는 은총의 주인공임을
늘 기억하고
하느님의 자녀의 자존심을 잃지 않아
세상에게만이 아니라
천사들에게도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우리 삶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인천교구의 선배 신부님 중에 자전거 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휴가 때만 되면 항상 자전거를 타고서 부산으로 또 땅끝 마을로 떠나시지요. 그런데 한 번은 대전을 자전거 타고 가시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덤프트럭과 부딪혔다는 것이지요. 저는 깜짝 놀랐지요. 덤프트럭의 크기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큰 차와 부딪혔으면 과연 어떻게 될 지를……. 그런데 제가 보니 그 신부님의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가 않은 것입니다. 얼굴에 가벼운 상처만 있었지요.
불행 중 다행인가 보다 했지요. 하지만 나중에 그 이유를 알고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글쎄 정차되어 있는 덤프트럭을 보지 못하고 뒤에서 부딪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그 큰 덤프트럭을 보지 못할 수가 있냐면서 놀렸지요.
그런데 남 이야기할 필요가 없더군요. 글쎄 이번 자전거 여행에서 저 역시 똑같은 일을 체험했거든요. 첫날 65Km 정도 자전거를 타다보니 꽤 힘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시선을 앞에 두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자전거를 탔는데, 길가에 서 있는 차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지요. 눈에 잘 띄는 흰색 무쏘 차인데 말입니다.
우리들은 남에 대해서 판단을 쉽게 합니다. 그러나 내가 판단하면 나 역시 판단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즉, 판단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겸손하게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여기서 감동 하나……. 자전거로 정차 했던 차에 부딪히면서 차의 후미등을 박살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차 옆으로 뒹굴었지요. 저의 부딪히는 소리를 들은 운전자가 금방 달려오면서 제가 예상했던 말이 아닌 다른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치지 않았어요?”
사실 제가 예상했던 말은, “아니, 이 사람이 얌전히 서 있는 남의 차를 왜 들이 박는 거야? 당장 물어내!” 식의 말이었지요. 그런데 그분은 먼저 저의 안부를 물었고, 그리고는 제가 다치지 않았으면 되었다면서 그냥 가라는 것입니다. 후미등의 가격도 만만치 않을 텐데 말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 분과의 만남이 있은 뒤, 제주도에서의 자전거 여행이 너무나도 기분 좋았습니다. 제주도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였지요. 풍경도 또 사람도 그밖에 모든 것들이 저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운전자가 한몫 챙길 욕심을 부리면서 저를 힘들게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제주도는 다시 오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안 좋은 기억을 안게 되었겠지요.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 그 마음은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물론,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모슬포 근처에서 저로 인해 후미등 박살 난 무쏘 아저씨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를 위해 배려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어릴 때 내 꿈은
-김정임-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중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강원도 첩첩산골에서 보냈다. 그 시절의 추억은 내 삶의 한쪽에서 아릿한 그리움과 따스함을 주는 평화로운 안식처다. 겨울엔 눈이 억수로 내리고, 한여름엔 청아한 매미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버드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맑고 깊은 물속에서 더위를 식히며 노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정말 선생님이 되었다.
어제는 시골에서 함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친한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선생님인 멋진 남자와 결혼해 속초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다. 남편의 직업과 내 직업이 같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만나지 않아도 뭔가 통하는 좋은 친구다. 이제 오십이 다 되어가는 친구 남편은 곧 ‘교감’이 된단다. 그러면서 친구는 “넌 언제쯤 될 것 같으니?” 하고 물었다. 난 언제쯤 ‘교감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교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리 녹녹하지 않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 위에 서려면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하며 남들과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교감·교장 선생님이 되려면 그만한 인품을 지녀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친구와 통화를 끝내고 곰곰이 내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앞으로의 나의 모습을 위하여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의 스승이시며 주관자이신 그분께 여쭈어 본다. “전 언제쯤 될까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 흙이 되고 싶어요’(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중에서)
"매력적인 사람들"
- 이수철 신부-
겸손한 사람들이 매력적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겸손한 사람들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아래로 흘러 바다에 이르고
겸손한 사람들은 아래로 흘러 하느님께 이릅니다.
진정한 영적여정은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버리고 비우며 떠나는 겸손의 여정입니다.
어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하게, 부드럽게, 또는 매섭게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며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한다.
소위 말하는 리더십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최고의 리더십은
모든 사람들이 다 수긍할 수 있는 낮아짐의 리더십이다.’
낮아짐의 리더십, 그대로 섬김의 리더십, 겸손의 리더십입니다.
진정한 권위 또한 섬김의 권위, 겸손함의 권위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진다.”
높아질수록 섬김으로 낮아지는 이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으로 낮아질수록 높아진다는 것은 영원한 역설적 진리입니다.
평생 겸손히 섬김의 삶에 충실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만날 때 진실이요 겸손입니다.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환시를 본
겸손한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들려 온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주님께서 영원히 계신,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이 거룩한 성전에서의 매일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남으로 진실해지고 겸손해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진실과 겸손이지만
반대로 진실과 겸손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마음이 깨끗해 주님을 뵙지만,
반대로 마음이 깨끗해야 주님을 뵙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해 허영과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해박했을지 몰라도 하느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우리 모두들 향한 말씀 같기도 합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 참 내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허영과 교만의 어둠이 그들을 덮치기 마련입니다.
진정 주님을 만날 때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없고, 야비함이나 비열함도 없습니다.
허영과 무지, 교만의 어둠도 없습니다.
참 매력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겸손한 이들,
모두가 한 분이신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자각에,
모두가 스승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요 형제들이라는 자각에
참으로 투철합니다.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하늘 아버지와 스승 그리스도를 제외한
일체의 우상을 배격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모두가 평등한 하느님의 자녀들이요
스승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자 형제들이라는 자각에 투철할 때
진정 겸손한 사람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주님은 겸손히 내려오시어
당신의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섬기십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주님 앞에서 넘치는 기쁨을 누리리이다.”(시편16,11).
아멘
오체투지의 마음
- 한은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높아진다며, 우리가 하고 싶은 것과는 반대로 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도대체 뭔가? 그러다가 소중한 글을 하나 발견했다. 조선시대 고전수필 중 이곡이란 이가 쓴 ‘차마설(借馬設)’이라는 글이다. 작가는 말을 빌려 탄 경험으로 글을 시작한다.
비루한 말을 빌려 탔을 때는 조심조심 몰았으나, 준마를 몰았을 때는 의기양양해져 함부로 몰아 위태롭기까지 했던 경험을 말한다. 그는 이어서, 남의 것을 빌렸을 때도 이럴진대 하물며 내 것이라 생각하는 물건에 대해서는 마음이 어찌 바뀔까 하는 성찰을 보탠다. 그러면서 임금은 백성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비복은 상전에게 권세와 힘을 빌린 것이니 이 세상 어느 것도 빌리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맹자를 인용해 ‘남의 것을 빌려 쓴 지가 오래되면 마치 자신의 것으로 안다.’면서 무소유의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또 우리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생명체일 뿐이고, 하늘·땅?·?공기?·?물 모두 우리의 후손들이 쓸 공동 재산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착각 속에 산다. 이것들은 우리 것이며 이것과 더불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초여름의 문턱에 들어서는 어느 날, 오체투지 순례단에 참석했다. 아스팔트에 가려 흙과 풀냄새조차 맡을 수 없는 맨바닥에 하루 동안 납작 엎드리며 순례를 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이게 웬 미친 짓이지? 햇빛은 머리에 온몸에 꽂혀 간다. 그러나 나의 오체(五體)가 땅에 납작 엎드려지는 게 점점 편해질 무렵 동작을 알리는 징소리만 들린다. 나는 나 자신을 잊어간다. 생각이 없어진다. 절하는 나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
이름 없는 풀포기, 먼지 하나만한 존재인 나, 거대 자연의 한 조각일 뿐인 나. 아, 바로 이거였구나! 어쩌자고 그런 내가 최고라고 우기느라 소중한 힘을 소진한거냐? ‘주님, 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 앞에 납작 엎드려 다른 사람을, 온 우주를, 당신을 섬기고 낮은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아멘.
겸손의 학교
-전삼용신부-
어제 저희 교구에 사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사제서품식을 모 실내 체육관에서 했는데 제가 자리에 앉으려고 걸어가자 신자 석에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저는 ‘도대체 누굴 보고 저리 난리지?’라고 생각하고 그 곳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서품식이 끝나고 제가 보좌를 하던 성당의 신자들이 저를 우연히 보고는 “왜 우리가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쳐다보시지도 않았어요?”라고 약간 서운하다는 듯이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저한테 그러는지 몰랐어요...” 하면서도 은근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 분들이 저에게 환호해 주어서가 아니라 그 환호가 저에게 오는지 모를 정도로 겸손하다는 제 자신에게 대한 만족 때문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동기 신부들과 차를 두 대로 나누어 타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였습니다. 중간 쯤 와서 다른 차가 어디쯤 오는지 궁금하여 전화를 해 보았습니다. 위치를 들으니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 차는 아반떼였고 두 동기 신부가 타고 있었습니다. 마침 우리 차 앞쪽에 보니 흰색 아반떼에 남자 둘이 타고 있고 모습이 틀림없는 우리 동기 신부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더 신중하기 위해 얼굴을 자세히 보고는 그들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창문을 내리고 “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이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앞을 보며 자기들끼리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못 들었는지 알고 또, “야~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다시 뒤돌아보고는 조금 가다가 다른 길로 빠져버렸습니다. 순간 ‘저 차가 아닌가?’하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식당에 도착하여 동기 신부가 타고 온 차를 보니 그 차는 회색이었습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거리에서 창문을 내리고 건달들처럼 소리를 지르고 손가락질을 하였던 것입니다. 분명히 얼굴까지 똑같았었는데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판단하면 다 옳다고 생각해버리는 교만함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가끔 겸손하고 대부분은 교만한가봅니다. 그런데 사제가 되면 특히 더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어른들까지 고개를 숙이고 또 직업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신자들의 아버지로서 그들에게 훈계를 하고 그들이 고백하는 죄를 용서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겸손해지기 어려운 삶이 어떤 삶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곧바로 ‘사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우리 종교에서는 어쩌면 가장 비가톨릭적으로 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사제들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시의 모세를 대신하는 사제들이나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광을 추구한다고 질책하십니다. 그들이 했던 일들을 지금은 사제들이 도맡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높아지려고 하면 낮아지니 교만하지 말고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해 져야 함을 잘 알면서도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몸 안에 교만이 너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키우시는 방향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교만을 깨닫게 하여 겸손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처럼 수많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게 하시며 그들에게 참 겸손이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고 닭이 울 때마다 눈물을 흘려 얼굴에 눈물 흐르는 골이 생겼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사람이 되려면 결국 모든 이들보다 가장 약하고 죄 많은 인간임을 고백하게 될 정도까지 되어야 합니다.
저의 동기 신부 하나가 어머니가 차 사고가 났다고 해서 집으로 곧장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리 큰 사고는 아니었습니다. 톨게이트에서 앞 차가 떠났는지 알고 돈을 찾으며 앞으로 나가다가 앞 차를 박은 것이었습니다. 저의 동기신부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한눈팔고 운전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신부가 자전거를 타고 힘들게 페달을 밟다가 너무 지친 나머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서 있는 차를 받았습니다. 차의 후방 등 한 쪽이 다 깨졌습니다. 그런데 그 차 주인이 나와 넘어져있는 신부를 일으키더니 괜찮냐고 물어보고는 몸만 괜찮으면 됐으니 배상은 안 해도 된다고 친절하게 대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도 자신이 어머니에게 한 행동과 대비되는 그 아저씨의 너그러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 많은 일이 일어나도록 섭리하십니다. 죄를 짓도록 허락하시는 것도 바로 겸손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기까지 겸손의 학교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임을 잊지 말고 매 순간 일어나는 것들을 통해 겸손해지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서로 스승처럼 겸손하게
-박대남 신부-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 교수 신부님들께서 한결같이 말씀하신 것이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같은 동료 사제와 끈끈한 형제애를 유지하라.
둘째, 교우들을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두 가지는 제게 힘든 숙제처럼 느껴집니다. 게다가 오늘 복음 말씀은
사제인 제게 하신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더욱더 긴장하며 살라는 말씀처럼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사제이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기에
더욱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사제들이 잘못 살면 교우들이 힘들어집니다.
숱하게 들어온 이 진리를 오늘 복음에서 다시 느낍니다. 동시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스승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를 보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신앙인이 아닌 사람은 신앙인들에게, 제자들은 선생님께,
서로 스승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갑니다. 때문에 우리의 모습,
특히 신앙인의 모습은 항상 누군가에게 하느님을, 예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그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 신앙인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을 보여주는 신앙인의 삶이란 자기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
-상지종신부-
"신부가 되면 변한다."
"신부가 되면 본성이 드러난다."
겸손을 배우고 겸손하게 생활했던 신학생이 신부가 되면 교만해지고 권위적이 되는 경우를 비아냥거리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말이 현실로 드러나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신부가 된 후 마치 자신이 하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신자들을 지배하려는 모습은 같은 사제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눈꼴 사납기 그지 없습니다. 이쯤에서 과연 제 자신의 지금 모습은 어떤지 돌아보게 됩니다.
"앞으로 신부 생활하기 어려워질거야."
자기 입맛대로 신부를 좌지우지하려는 잘 난 신자들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선배 신부님들께서 자조적으로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로서 애정어린 충고와 비판을 던지는 신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신부를 마치 자신들의 주치의처럼 생각하고 교회 안에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신부를 소유하려고 드는 교만한 신자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러한 안타까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 교회 안에서 신부와 신자 사이의 갈등과 반목보다는 화해와 일치가 더욱 넘쳐나기에 낙관적입니다. 그렇지만 혹시나 앞으로 자기 밥그릇 챙기기 식으로 행동하다가 서로에게,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게 상처를 내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엄연한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원칙만 지켜진다면 저의 이러한 걱정은 단순한 기우에 불과할 것입니다. "너희 중에 으뜸 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원칙말이지요. 우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우리는, 신부든 수도자든 신자(저는 개인적으로 '평'신도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든 모두 형제라는 것을 기억하며 형제로서 서로를 섬기면서 살아간다면, 분명 우리 교회는 지배와 복종, 갈등과 반목이 일상화되어 있는 이 세상을 복음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벗들과 함께 이런 교회를 일구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자신부터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말처럼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차근 차근 한 걸음씩 내딛으려고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그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임문철 신부-
주교님을 뵈러 온 의대 교수들을 제 차로 모시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동료 의사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의사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이제는 으레 그런 것이려니 하고 많이 둔해지기도 하고 또 체념해버린
문제이지만, 제가 사제로서 가르치는 바와 실제 삶의 괴리는 사제생활의
가장 큰 십자가로 다가왔습니다. 한번은 제의를 입고 미사를 드리는 제 모습이
너무 위선적이어서, 차라리 지금 이대로 제단에서 내려가야 옳은 일이 아닐까
한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자기가 설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자기가 사는 대로만 설교한다면 그것은 더 큰 비극이다”라는 우습지도
않은 유머를 떠올리며 위안을 삼아보지만, 여전히 그 십자가는 무겁기만 합니다.
자녀들도 부모들이 말하는 대로 크지 않고, 보는 대로 큰다고 하지요.
우리 신자들이 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로 양성된다고 생각하면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그런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죽은 강의
-한명수 시인-
20대 후반 무렵부터 나는 초청 강의나 강연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강의를 해왔지만 잊혀지지 않는 강의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박수를 여러 번 받고 훌륭한 강의였다는 칭찬을 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신임 교리교사들을 대상으로 세 시간 동안 ‘교리교사론’에 대해 이론이 아닌 실천을 중심으로 강의를 했다. 휴식 시간마다 후배 교사들은 나에게 와서 좋은 강의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고, 여러 가지 칭찬과 함께 다음 기회에 또 강의를 듣고 싶다는 말을 남기곤 했다. 마침내 강의가 끝나고 큰 박수를 받으면서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큰 박수가 주는 뿌듯함은 잠시,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몹시 괴로웠다. 평소 내가 실천하지 못한 일을 남에게 실천하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 온 터라, 그날 강의에서 나는 행하지도 못하면서 그들에게는 ‘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율배반적인 나의 언행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강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실행하지 않은 일을 마치 실행한 것처럼 말하는 강의는 아무리 크고 오랜 박수를 받아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 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강의를 하려고 무진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강의는 곧 그 강사의 인간 됨됨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강의는 죽은 강의라고 생각한다.
태양초 고춧가루
-양승국신부-
요즘 저희는 빨간 고추 수확에 여념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흐뭇한 마음으로 기쁜 얼굴로 녀석들을 땄었는데, 요즘은 돌아서면 빨갛게 익어대는 녀석들 때문에 정말 괴롭습니다.
고추만 따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속히 건조시키기 위해 일일이 가위로 반을 자릅니다. 햇살이 좋을 때를 골라 마당에 ‘쫙’ 깝니다. 비라도 오면 즉시 걷어야지요. 오랜 손길과 정성 끝에 잘 건조된 녀석들만 골라 방앗간으로 들고 갑니다. 드디어 태양초 고춧가루가 탄생되는 것입니다.
넓은 수도원 마당은 요즘 수도 없이 널어놓은 새빨간 고추들로 인해 벌써 가을의 정취가 완연합니다.
참으로 기특한 고추농사입니다. 올봄 저희가 밭에 심은 것은 분명 여리고 가냘픈 고추 모종이었는데, 어느새 키가 허리까지 올라왔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탐스런 결실이 계속됩니다.
반대로 토마토를 잔뜩 심은 하우스는 신경을 별로 쓰지 못한 관계로 건질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근처 다른 토마토 하우스에서는 매일 수많은 출하가 이루어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직접 사가기도 하는 등 분주한데, 저희는 완전 반대입니다. 잎은 무성합니다. 키도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나 열매의 질이 형편없습니다. 다른 집과 게임이 안 됩니다. 완전 꽝입니다. 조금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봤습니다. 여력이 없었던 관계로 순따주기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솎아주지도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잎과 가지만 무성하다보니 영양분이 그리로 다 쏠렸습니다. 열매는 미성숙 단계에서 성장이 멈췄습니다. 크기도 작고, 볼품도 없는 토마토이기에 출하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그저 오며 가며 심심풀이 삼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모습은 정체된 신앙생활, 고착화된 신앙생활, 앞뒤가 꽉 막힌 신앙생활, 유아기적 상태에서, 초보단계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신앙생활, 그로 인해 성장이나 결실이 전혀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한 질타를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신앙생활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연연한 나머지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영성을 상실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사실 당대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 안에서 차지하던 역할은 중차대했습니다. 종교법과 의식에 관한한 독자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형사소송 때 재판관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민사소송 때는 다른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단독재판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동족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신앙의 본질이나 고유한 정신, 영성을 잃어버렸으니, 그들을 믿고 따르며 의지하던 백성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세월이 흐른다고, 세례 받은 연한이 길어진다고 그에 비례해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가 필요합니다. 쇄신을 위한 가지치기입니다. 솎아주기입니다. 철저한 자기 성찰 작업입니다. 부단한 자기 쇄신 작업입니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 헨리 모슬리는 인간이 흘리는 눈물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물한 치유의 물.”
인간은 슬픔과 서러움으로 인해 눈물 흘립니다. 때로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인해 눈물을 흘립니다. 때로 힘겨웠던 지난 세월 앞에 눈물 흘립니다. 그 숱한 죄와 배신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새 삶을 허락하신 하느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 흘립니다. 때로 너무 행복해서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아마도 눈물에 인색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눈물 흘리는 것은 약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감정들도 애써 억눌렀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을 향한 신앙도 점점 메말라갔을 것입니다. 마침내 눈물샘이 말라버린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늘 사람들을 가르치려고만 했습니다. 이웃들의 결함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 투자할 시간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입니다. 총체적인 평가입니다. 세밀한 자기진단입니다.
이런 노력이 계속되지 않을 때,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걷던 길로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참 신랄하게 묘사
-임영숙-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참 신랄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그 우스꽝스럽고 경멸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며 비웃음을 짓다가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자각에서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몰라도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참모습은 숨기고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이지요.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막막했던 것은 내가 참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막연히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구체적으로 뭘 하고 싶은지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그만둔 친지들은 사진을 배운다, 첼로를 배운다, 책을 쓴다며 금방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저는 성서 못자리 강의에 수강신청을 하고 결석하지 않기를 목표로 세운 것 이외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내 삶이 너무 오랫동안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춤을 추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춤추는 내 모습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춤을 못 추는 것입니다. 춤을 출 수 있게 되면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내 소심함이 사라질까 해서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 실천을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 묵상을 글로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벌거벗은 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인 듯싶습니다. 오랫동안 글을 써왔다지만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쓴 글이었습니다. 가면 뒤에 숨은 채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하기 쉬운 말을 그럴듯하게 엮어 내놓은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듯이 ‘글쓰기는 피를 말리는 일’이라는 둥 엄살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지난 열흘 동안의 매일성서묵상을 하면서 제딴은 진솔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어서 부지불식간에 가면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듭니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그토록 익숙한 습관이니까요.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
- 전수홍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몹시 책망하시는 부분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이었고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생활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도 야단을 치셨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모세를 통해서 10계명을 받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세는 이것을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는 판관들에게 물려주었고 판관들은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은 회당의 교사들에게 넘겨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교사들을 율법학자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렇게 등장한 율법학자들은 10계명과 모세 율법의 원칙 아래서 자신들도 지키기 어렵고 불필요한 규칙을 수천 개를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백성들에게 글자 그대로 지켜나가기를 강요했기 때문에 질책을 당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것이 바로 '언행일치'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는 대신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모순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이셨기 때문입니다. 즉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그들의 생각에 있지 않고 그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었고 가르치기도 했지만 행하진 않았던 것입니다. 거룩하게 보이고 칭송을 듣고 싶어하기만 했을 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진 못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위선자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주님의 율법을 가르쳤지만 사랑의 계명을 무시한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들 스스로는 올바르게 살았다고 확신할지 모르지만 결국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자신들만을 위해서 산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해가 되는 일 가운데 하나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만큼 심각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그러다보면 늘 타인에게 우월감을 느끼든지 아니면 열등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 비교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내가 누구보다 잘나보여야 한다든가, 아니면 어느 누구만 보면 주눅이 든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이 비교에서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빠진 것도 자신을 하느님과 비교한데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죄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 때 이후는 더 이상 한 형제가 아니라 경쟁대상이고 이겨야할 대상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들은 같은 동족들 사이에서 항상 비교되고 우월감 속에서 살았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항상 가식적인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지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시장에서 시계줄을 갈면서 리어카 위에서 시계를 고치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온갖 시계 부속품이 다 있는 그 리어카에 있는 아저씨는 너무나 깔끔하게 시계줄을 갈아주었습니다. 하루 열시간 이상 조그만 좌판에 앉아 자신의 일에 충실히 다하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옆에 상점에는 점원이 계속 유리창을 닦고 있었습니다. 몇 푼 되지도 않을 월급에도 성실히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인, 국회의원들이 떠올랐습니다. 큰소리치고 위세 부리며 살지만, 과연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는지, 자신의 생계를 잇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희망과 사랑과 용기는, 세상살이의 가치는 웃어른들이 아니라, 바로 평범하게 일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계속 윗자리를, 더 많은 재산과 더 많은 권력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과연 거기에 무슨 가치가, 무슨 보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며, 생계를 위해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인생의 신비가, 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그리고 꼴찌와 첫째의 이야기도 그같은 일상의 신비를 말해 주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은 얼마나 하느님 안에서 말과 행동을 가지런히 해나가면서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면서 성실히 살아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
-박기흠 신부-
한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보고 제자들에게 “그들은 눈먼 길잡이들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진다."(마태 15, 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행동하는 신앙이 없다면 눈먼 소경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사들이며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치는 율법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은 정치와 종교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 저변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생명과 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율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위해 내려주신 본래부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행동이 없는 믿음은 마치 죽은 믿음이듯 율법 준수에 있어 그 율법이 의미하는 근본정신을 가지고 지키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황량하고 메마른 삶을 체험할 때가 많지만, 삶이 귀감이 되신 분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삶을 모방하면서 활력을 되찾습니다. 저는 삶의 활력을 되찾게 해주시는 분이야말로 참된 교사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일무이한 참된 교사이십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우리 자신이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실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행위가 존재를 규명한다.’는 그리스도교에 윤리 명제가 있습니다. 이 명제는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명제입니다. ‘애덕’을 시작하는 것도그리고 완성하는 것도 바로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상에 관계없이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권력(權力)과 권위(權威)에 맹목적으로 굴복하는 자가 아니요, 물질적 욕망에 약(弱)한 자가 아니며, 세속(世俗)의 영예나 명성에 무릎을 꿇는 자도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세속적(世俗的) 유혹의 도전(挑戰)에 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모르는 것은 솔직히 시인(是認)할 줄 아며, 자신의 학식의 천박함을 느끼며, 덕(德)이 부족함을 겸허하게 인정할 줄 압니다.
자아만족(自我滿足)에 도취한 사람은 참된 생명을 쉽게 잃고 말지만, 겸손한 사람은 결코 무조건 자기를 내보이지 않고, 무조건 제 뜻을 주장하지 않고, 또 무조건 스스로를 감춘다는 말이 아니기에 선이 작다고 해서 방심하지 않으며, 악이 작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행하는 경솔함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높은 기술의 습득이 아니라 높은 자기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덕이 무엇이냐고 대답한다면 첫째도 '겸손'이요, 두 번째도 '겸손'이며 세 번째도 '겸손'이다 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인생 덕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바다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넓은 까닭은 그것이 어떤 강이나 냇물보다도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드럽고 온화하게만 느껴지는 물이 단단한 바위를 닳아 없앱니다. 스스로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활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교만하지 않게 세상을 밝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안겨 주기도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무리가 따르지 않습니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기에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도우려 듭니다. 겸손한 생활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낮은 곳에서 스스로를 살찌우는 바다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물처럼 겸손하게 하루하루를 맞는다면, 세상은 한결 밝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을 것입니다.
- 최종수 신부-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가네.”
스승의 날이면 수업시간마다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처럼 가르침을 주는 모든
분들은 삶의 스승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선생님은 많은데 스승이 없다고
합니다. 스승의 첫째 덕목은 어떤 가르침에 있어서 스스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삶을 가르치기보다는 지식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는 왜소해지는 반면 학원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음을 보기도 합니다.
성직자들은 같은 지식을 가르치지만 삶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삶의 지혜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 가르침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사제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르친 삶의 지혜를 스스로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나누지 못할 때가 있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로만 떠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저 역시 행실이 따르지 않는 언행불일치의
삶을 살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바담풍’ 하더라도 자식은 ‘바람풍’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사제가 설사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실천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어쩌면 이 희망이 간절한 기도가 되는 이유도
제 삶이 부족한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제와 위선
-김광태 신부-
신자들보다는 사제인 우리 자신에게 더 해당되는 구절이다보니 이 부분의 강론은 대개 자아비판으로 끝납니다.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신자들을 이끌어야 하는 자신의 꼴이 예수님께서 비난하셨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듯 느껴져서 의기소침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때는 잘 살든 못살든 산 속에서 암자 하나 지어 홀로 지내는 스님들이 자유로워 보여서 부럽기도 합니다. 혼자 사는데도 불구하고 삶이 참 무겁게 느껴집니다.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요청받는 내 역할도 그렇고,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이들이나, 정신적으로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신자들, 나에게 교육 받고 신앙의 활력을 되찾은 이들까지 많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원의와 상관없이 이미 내 존재는 그들의 신앙을 지탱하는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 처지가 정말 불편하고, 또 모순된 나 자신이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려서도 안 되고, 함부로 처신해선 더욱 안 됩니다.
이미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나를 불러 도구로 삼아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도망치지 못하게 나를 꼬옥 붙들고 있습니다.
스승은 오직 한 분
-강영구신부-
요즘 사람들은 제가 잘 나서 사람 구실을 하는 줄 알고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가르쳤습니다.
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
세상에 태어나 세 사람 때문에 인간구실을 하게 되었으므로 셋은 똑같이 모셔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아버지는 나를 낳고, 스승은 나를 가르치고, 임금은 나를 먹여 살립니다.
아버지와 스승과 임금 중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내가 사람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와 좋은 임금을 만나야 하지만,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복(福) 중의 복입니다.
부모와 임금과의 만남은 필연(必然)이지만 스승과의 만남은 우연(偶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선생(先生)들이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났으면 다 선생(先生)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나보다 나중에 났어도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스승이 될 수도 있고,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나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들꽃도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바른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무엇이나 스승이 됩니다.
눈과 귀가 열려 깨친 제자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스승입니다.
그러나 참 스승은 한 분 뿐입니다.
삶의 지혜를 넘어서 죽음의 지혜까지 가르치는 분
죽음을 넘어서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분이 유일한 스승입니다.
그러나 미망(迷妄)에 빠진 어리석은 제자에게는 좋은 스승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도 앞장 서 가시는 스승 예수님을 따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 이재희 신부-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채(蔡)나라로 가던 도중 양식이 떨어져
채소만 먹으며 일주일을 버텼습니다다.
걷기에도 지친 그들은 어느 마을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습니다.
그 사이 공자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제자인 안회는 몰래 빠져 나가 쌀을 구해와 밥을 지었습니다.
밥이 다 될 무렵 공자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공자는 코끝을 스치는 밥 냄새에 밖을 내다보았는데
마침 안회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집어 먹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안회는 평상시에 내가 먼저 먹지 않은 음식에는 수저도 대지 않았는데 이것이 웬일일까 ?
지금까지 안회의 모습이 거짓이었을까?’
그때 안회가 밥상을 공자 앞에 내려놓았다.
공자는 안회를 어떻게 가르칠까 생각하다가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 지내라고 하더구나.”
공자는 제사 음식은 깨끗하고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안회도 알기 때문에
그가 먼저 밥을 먹은 것을 뉘우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회의 대답은 오히려 공자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스승님, 이 밥으로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흙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서 제가 그 부분을 이미 먹었습니다."
공자는 잠시 안회를 의심한 것을 후회하며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는 구나.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너희들은 알아 두거라.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진실 된 사람을 거짓된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거짓된 사람을 진실 된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인정은 그 사람의 실제 모습과 잘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흔히 가난하고 존귀한 가치를 지닌 사람은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잘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의심스럽고 쓸모없는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존경받으며 살아갑니다.
한 사람의 외적인 모습은 그의 참된 내면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내면 속에는 거짓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눈이 진상을 꿰뚫어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 눈의 한계입니다.
예수님은 그릇된 이론적 가르침과 실천으로 백성을 속이는 위선자들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그들이 위선자니깐 착한 백성들이 오해하는 것입니다.
위선자란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겉으로만 착한척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위선자를 구별하기란 싶지 않습니다.
위선자의 특징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삶을 살면서, 잘난 체 하길 좋아하고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고 높아지고 싶어하며, 회개할 줄 모르고,
자기들이 옳다고 고집 부리기를 좋아하고, 꼭 얌체처럼 행동합니다.
누구나 빠져들 수도 있는 함정이 위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대표적인 위선자로 손꼽히는 사람들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살았던 위선적 삶이 얼마나 나빴으면, 예수님은 이들에게만큼은 어김없이
싸잡아 뱉으시는 욕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무섭고 끔찍한 경고에 따르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얼마나 구원에서 멀어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말과 행동이 일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겉과 속이 일치하는 투명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그래서 오해와 불신도 없애고, 이웃에게 보다 진지하고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겠습니다.
† 말은 실행하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
-박상대 신부-
마태오복음 2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보도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즉시 성전정화(21,12-17)를 통하여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예수의 이런 권한을 놓고 심하게 논쟁을 벌이셨다(21,23-27). 이어서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21,28-22,14) 등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지도층 인사들을 단죄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세금논쟁(22,15-22)과 부활토론(22,23-33)을 통하여 그들의 감탄을 받아냈으며,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 또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서 사랑의 이중계명이 새롭게 선포되었다.(22,34-40) 예수께서는 자신이 육(肉)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영(靈)으로는 다윗이 이름 불러 칭송했던(시편 110,1) 주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유다교의 공적 지도자들 앞에서 계시하셨다.(22,41-46) 이 계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계시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메시아 그리스도로서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최후의 격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유대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총체적으로 책망하는 대목이다. 그그러나 청중은 갈릴래아 활동기에서와 같이 군중과 제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새로운 정의를 선포하셨다. 오늘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잘못된 정의를 책망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의가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표하신다.
그들이 예수의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는 모세의 율좌(律座)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막중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위선자(僞善者)’들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예수님의 입술에 ‘위선자’라는 단어가 오르게 될 것이며, 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이 선포될 것이다.(23,13-33)
‘위선자’는 원래 연극용어로서 배우들을 지칭한다. 배우들은 자신의 실존을 철저히 가면 뒤에 숨기고 각본과 배역에 따라 연기한다.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배역이 주어지면 각본에 따라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행동은 관객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 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이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마나 팔에 성구(聖句)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도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며, 잔치에서 맨 윗자리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즐겨 찾고, 거리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스승이다, 지도자다 하는 말을 즐겨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교회 안에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이 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정한 스승과 지도자는 그리스도 당신 한 분뿐이시며 믿는 이들은 모두 한 형제자매임을 가르치신다. 예수님만이 가르치시는 선생(先生)이며 우리는 모두 배우는 학생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계속 전해야 하고 다시금 가르쳐야 하는 사도직을 수행해야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그들 또한 스승이신 예수님 앞에 늘 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11-12절)는 오늘 복음의 역설을 지워지지 않는 글씨로 마음에 써 넣어야 하는 것이다.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거나 남 앞에 자주 서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위선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고, 말이 많으면 행동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동료로부터 신부(神父)와 조폭(組暴)의 세 가지 공통점을 듣고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세 가지 공통점인즉, 첫째는 ‘검은 옷을 주로 입고 다닌다.’는 것, 둘째는 ‘밥 먹고 돈을 내지 않는다.’는 것, 셋째는 ‘아무한테나 반말한다.’는 것이었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오늘복음은 말만 번드르게하면서 실제로는 행동을 하지 않는 외식주의자,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꾸지는 말씀이 핵신내용입니다. 본문 2절에서 4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달랐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은 하느님보다도 사람의 눈을 의식했습니다.
그리고 6,7절을 보면 그들은 지나친 명예욕과 교만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책망으로만 끝난다면 성경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야 할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 꾸짖음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 가정의 지도자들 아니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회당에 설치된 돌좌석인 모세의 계승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돌좌석에는 주로 율사와 같이 학식과 권위를 겸비한 선생이 앉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자리에 앉은 것은 모세의 권위를 계승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가르침을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오늘 예수님께 준엄한 꾸증을 듣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세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
첫째는 진실성의 부족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지적한 가장 중요한 첫째 항목이 외식주의, 즉 진실성이 부족한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율법의 가르치기는 잘 했지만, 행동은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위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 말은 연극배우라는 말입니다. 연극배우는 자기 마음속에 아무리 슬픔이 있어도 그 시나리오대로 웃어야 하듯이 자기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마음의 중심과 겉이 불일치할 때에 그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또 그들은 허영심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 외식주의는 겉으로 보면 아주 경건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적인 생활은 이 가르침과 전혀 부응되지 않고 너무나 진실성이 부족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고, 바로 저와 여러분의 문제점이고, 우리 모두의 문제점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부족입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남에게 짐만 지운는 자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무거운 짐'이라고 했는데 때때로 종교가 무거운 짐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울타리 율법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구약성서로부터 613개의 율법을 찾아내고도 마치 우리가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쳐 놓듯이 율법마다 전부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안식일 율법에다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의 규정을 또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사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잔뜩 만들어 놓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면서 교인들을 달달 볶았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겸손의 부족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경건을 밖으로 나타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머리에 네모난 상자 같은 경문이라고 하는 것을 붙이고 다녔습니다. 옷에는 613개의 율법을 늘 기억하고 지킨다는 뜻으로 옷술을 크게 만들어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이나 경건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들은 전혀 겸손이 없었음에도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 싶어서 기도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네거리에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또 자선을 할 때는 나팔을 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들은 존경받는 자리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이나 결혼식에 가면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고 또한 랍비나 아빠와 같은 영광스러운 칭호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이라는 말인데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선생님하고는 다른 굉장한 칭호입니다.또 이들이 좋아하는 '아빠'입니다. 우리 가톨릭에서 사제를 신부라고 하는데 그 부자가 아버지 부(父)자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부를 때는 아버지(father)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영적인 자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생이나 아빠와 같은 참 모습과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속과 겉이 다른 이중적인 삶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지금의 우리 종교계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사탄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가 바로 교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최초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대등해지려고 하는 교만입니다.
정통 교회와 정통 실천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분명히 정통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리만 정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를 실천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정통이어야 합니다.
2. 오늘복음이 주는 교훈
첫째로 종교의 거짓된 허울을 벗기지 않으면 종교는 인간에게 있어서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종교인이 된다는 것이, 다시말하면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이 너무너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된 허울을 벗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꾸 무엇을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고달픕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남이 보든 안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우리에게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위로가 되고, 우리에게 힘이 되고, 정말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종교적 삶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교회안에서 높은 칭호를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나 부제나 평협회장이나 무슨 단체의 장...이것은 교회안에서 높은 칭호라면 높은 칭호죠. 그러나 그것은 다 봉사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봉사하기 위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존경받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그래서 그 칭호를 좋아할 때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그것을 욕심을 내어 너무 탐하면 안됩니다.
셋째로 행함없는 교훈을 위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은 말과 입(혀)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통해서, 행동함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야고 2,14-26). 저와 여러분은 항상 행함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말과 행위가 일치되고 그래서 은밀히 하느님만 아시도록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늘에서 풍성한 상이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율법의 목적은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하는데 있습니다.
율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이웃과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바르게 가질 수 있느냐는 방법의 제시(가이드, 길잡이)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보아도 제1계명에서부터 제4계명까지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갖는 비결입니다. 또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인간관계를 바르게 가질 수 있느냐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후견인(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은총의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처럼 사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함과 기쁨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겸손해야 됩니다.
이 겸손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 주실 때에 그 사람의 마음 그릇을 보고서 그만큼 축복을 주십니다. 마음 그릇이 큰 사람은 하느님께서 많은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 마음 그릇을 다른 말로 하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본연의 위치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율법의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바오로가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즉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는 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항상 하느님 앞에서 살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꼈고 그런 그에게 하느님은 은총을 주시고 또 주시고 또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보면 조금만 은혜를 받고도 팔딱팔딱 뛰며 막 휘젓고 다닙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덕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성서를 보면 상을 받았다가 교만해서 그것을 다 빼앗긴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벨사살 왕,그리고 사울 왕과 헤로데 왕이 그 대표자입니다.
벨사살 왕의 일화는 아주 유명하지요? 어느날 벨사살이 교만하게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성전기명들로 술을 마시며 손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할 때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므네 므네 드켈.' 그 다음은 '브라신'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드켈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저울에 달아보니 당신이 부족하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다니엘의 해석대로 그날 밤에 벨사살은 죽임을 당하고 메대사람 다리오가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하느님의 저울에 달아보고 우리의 부족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할 때에는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의 그릇이 다른 어느 사람들 보다도 더 커서, 다시 말해서 더 겸손해서 하느님의 귀한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이제 복음산책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십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영광의 상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느님의 저울에 우리를 한번 달아봅시다.
내게 진실성이 정말 있는가, 내가 정말 사랑이 있는가,
내가 혹시나 교만하지는 않는가, 나의 부족은 무엇일까,
내 가정의 부족은 무엇이며 우리 교회의 부족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저울에 우리 자신을 달아보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풍요롭게 받아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쓰고, 베풀고, 나눠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