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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어탈조(遊魚脫釣)
물고기가 낚싯바늘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역경을 벗어남을 이르는 말이다.
遊 : 놀 유(辶/9)
魚 : 고기 어(魚/0)
脫 : 벗을 탈(月/7)
釣 : 낚시 조(金/3)
출전 : 삼국연의(三國演義) 第048回
이 성어는 적벽대전시 서서(徐庶)가 조조(曹操)의 진영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적벽대전시 주유(周瑜)는 방통(龐統)을 조조의 진영으로 보내 조조가 연환계(連環計; 배를 묶어 대선단으로 만드는 것)를 시행하게 했다.
서서(徐庶)는 어머니의 편지(물론 가짜였다)를 받고 유비 진영을 떠나 조조가 있는 허도로 갔고, 떠날 때 제갈량을 추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마음에 없었으나 하는 수 없이 적벽대전 당시 조조 진영에 머물고 있었다.
방통이 임무를 마치고 강변에서 배를 타려고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 움켜쥐고서 말했다. "너는 참 대담하구나! 황개는 고육계를 쓰고 감택은 항서를 바치고, 너는 또 이곳에 와서 연환계를 올리지만 아마 다 불태우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이 이런 독수(毒手)를 써서 조조는 속일지 몰라도 나를 속이지는 못할 것이다."
방통이 놀라 돌아보니 서서(徐庶)였다. 서서는 전쟁을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방통에게 자신이 조조의 진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묻자, 방통은 귓속말로 계책을 말해주었다.
서서는 진중에 '서량의 한수와 마등이 모반하여 허도로 몰려오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그 말은 즉시 조조에게 보고되었다. 조조는 놀라 모사들을 모아 상의했다.
서서가 나와서 말했다. "저는 승상께서 거두어 주셨지만 작은 공이라도 세워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3천군만 주시면 당장 북쪽 산관으로 달려가 요충지를 지키고 만약 긴급한 일이 생기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徐庶進曰: 庶蒙丞相收錄, 恨無寸功報效. 請得三千人馬, 星夜往散關把住隘口. 如有緊急, 再行告報.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3천마보군을 내어 주며 북으로 당장 가라고 허락했다. 이것이 방통의 묘책이다.
후일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曹操征南日日憂
馬騰韓遂起戈矛
조조가 남정 중 떠나지 않은 걱정은, 마등한수의 창날이 아니더냐.
鳳雛一語教徐庶
正似游魚脫釣鉤
봉추(방통)가 서서에게 가르쳐준 한마디, 바로 낚시에 걸린 고기를 풀어 주는구나
■ 서서(徐庶)
서서(徐庶)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자는 원직(元直), 초명(初名)은 서복(徐福), 예주 영천군 사람으로 어머니는 서모이다. 서서에 대한 기록 중에 본단가자(本單家子), 즉 단가의 자식이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단가(單家)란 친척이 없는 단독 가구를 의미하며, 친족 간에 상부상조가 굳건하던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 보면 서서는 매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된다.
또한 젊은 시절에는 임협; 용감함)(擊劍; 검술)을 좋아하며 불량하게 살았다. 실상은 시장바닥에서 패거리를 지어 칼 휘두르고 다니던 건달이었다는 뜻이다. 대략 189년 정도에 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원수를 갚아준 후 얼굴에 하얀 흙을 바르고 머리를 흩트려서 얼굴을 숨긴 채 달아나다 관원에게 붙잡혔다.
관원이 그의 이름을 물어도 서서는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다. 이에 관원이 그를 수레에 태우고 기둥에 묶고는 북을 치며 저자 거리를 돌아다녔으나 감히 그를 식별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일당들이 그를 풀어줘 죽을 뻔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마음을 고쳐먹은 서서는 무기를 버리고 학문을 닦기 시작했다.
처음에 학사에 나오자 여러 유생들은 그가 예전에 도적질했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서서는 늘 성실하고 겸손하게 행동하였고 마침내 동향인 석도(石韜)와 친애하게 되었다. 중원에 전란이 일자 석도와 함께 남쪽으로 와서 형주에 의탁했다. 도착한 후 또한 제갈량(諸葛亮)과도 서로 친하게 지냈다.
정사(正史) 상랑전(向朗傳)에 주석으로 달린 양양기(襄陽記)에 따르면 상랑(向朗)은 젊어서 사마휘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서서, 한숭(韓嵩), 방통(龐統) 등과 친하게 지냈다. 제갈량전(諸葛亮傳)에 따르면 제갈량은 늘 자신을 관중(管仲), 악의(樂毅)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최주평(崔州平), 서서만이 참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했다.
제갈량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은 형주에 있었는데, 건안 초, 석도, 서서, 맹건 등과 함께 타향에서 공부했다. 이 세 명은 정밀하고 세세하게 공부했으나 제갈량은 홀로 전체의 큰 내용을 살피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매양 새벽부터 밤까지 차분하고 침착하게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크게 읊조리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경(卿) 세 사람이 벼슬하면 가히 주자사나 군태수까지 오를 것이오." 세 사람이 제갈량 자신은 어떠한지 물었으나 제갈량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유비 휘하에서
제갈량전에 주석으로 달린 양양기에 따르면 신야에 머물던 유비가 사마덕조(사마휘)에게 세상 일에 관해 물었다. 사마휘는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라 모른다며 시무를 아는 준걸은 복룡과 봉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유비가 묻자 사마휘가 말했다. "제갈공명(제갈량)과 방사원(방통)입니다."
제갈량전에 따르면 유비가 신야에 주둔 중일 때 서서는 유비를 섬겼다고 한다. 유비는 서서와 만나고 그를 중히 여겼다. 서서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천거하며 말했다. "제갈공명은 와룡(臥龍)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쓰지 않으십니까?" 유비가 말했다. "그대가 데리고 오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만나볼 수는 있으나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의당 몸을 낮추시고 방문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유비가 제갈량을 직접 방문했고 세 번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유표에게 빌붙어 사는 객장 신세라지만 유비는 한나라의 좌장군(左將軍)에 의성정후(宜城亭侯)요, 당금 천하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유비더러 누구인지도 모를 유생을 찾아가라는 서서의 발언은 참으로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유비의 행동은 더욱 놀라웠다. 그는 서서가 말한 대로 직접 제갈량을 찾아간다. 그것도 세 번이나 연달아서 그만큼 인재를 갈구한 것이고, 동시에 그만큼 서서의 안목을 믿었던 것이겠다.
갑자기 유표가 죽고, 유종은 조조가 형주를 정벌한다는 것을 듣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유비는 번성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갔다. 제갈량은 서서와 함께 유비를 뒤따랐다.
서서가 유비와 작별한 것은 장판파의 도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시점이다. 한진항을 향해 도주하던 유비군은 장판교를 지나 벌판에 이르자 조조군 기병대의 추격에 의해 행렬이 붕괴, 유비를 따르던 민초들이 학살당하고 물자가 실린 치중대는 물론 유비와 중신들의 가족들이 타고 있는 마차 또한 조조군에게 크게 노획되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서서의 모친이 타고 있던 차량 또한 조조군에게 탈취되었기에 서서의 모친이 조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모친이 붙잡히자 서서는 유비에게 "당신을 따른 것은 가슴이 시킨 일이었으며 지금 어머니가 조조군에 붙잡혀 버리셔서 어머니를 구하고자 당신을 떠나는 것도 제 가슴이 시킨 일이므로 이해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조조군으로 가서 항복했다. 제갈량은 유비와 남쪽으로 떠났고, 서서는 석도와 함께 북쪽으로 갔다.
이 상황의 문제는, 당시 조조 입장에서는 서서가 일부러 노리고 붙들어야 할 만큼 대단한 인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친이 붙잡혔어도 누구 모친인지 알았을지는 의문이며, 서서가 모친에게 갔다가 같이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후로 그냥 조조 진영에 뿌리를 내렸다.
사실 흥미로운 것은, 충(忠)이 효(孝)보다 우선시되는 후대와는 달리 당대의 인물들은 이러한 선택에 대해 딱히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강유는 어머니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기조차 했다. 그러니 당대 시각으로는 서서의 이런 선택도 크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조차 흔쾌히 서서를 보내준 유비의 배포도 인정해 주어야겠지만.
위나라에서
조조에게 투항한 뒤 서서는 팽성상(수경주(水經注) 권23)을 거쳐 황초 연간(220~226년)에 우중랑장을 거치고 어사중승 같은 주로 감찰관 직을 맡았다. 여기서 우중랑장은 황제를 모시는 일을 담당하는 광록훈 휘하에 있는 비2000석 관직이고, 어사중승은 관리와 백성들을 감찰하는 직책이다. 상당히 높은 고위직으로 삼공의 일원이자 최고 감찰관인 어사대부 바로 밑의 관직으로 꽤나 높은 직위에 오른 것이다.
서서는 어사중승에 오르기까지 이름을 서복으로 하다가 서서로 개명했다고 여겨진다. 즉, 개명을 여러 번 하지 않았을 가정하에 유비 수하 시절의 이름은 줄창 서복이었다.
여기서 우중랑장, 어사중승은 겸직이 아니라, 역임한 순서로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기록을 살펴보면 '至黃初中, 韜仕歷郡守, 典農校尉, 福至右中郎將, 御史中丞'이라 하여 석도는 군수와 전농교위를 역임했다고 하며, 서복(서서)는 우중랑장,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한다. 이것은 우중랑장 어사중승을 겸임한 것이 아니라 우중랑장을 거쳐 어사중승에 이르렀다고 봄이 타당하다.
'至' 이후 역임한 관직을 나열하는 것은 일반적인 기록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홍이손의 '삼국직관표'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으로 홍이손은 우중랑장 항목에 역임한 이에 서복(서서)을 둠으로써 서서가 우중랑장과 어사중승을 각각 역임했음을 밝히고 있다.
동화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후에 승상이 되어서, 아랫사람들에게 가르치며 말하였다. "진실로 서원직(서서)의 십분의 일과 동유재(동화)의 힘써 부지런함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라에 충성함은 물론이요, 나도 가히 잘못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당신들이 서서의 1/10 정도만 해줘도 내가 편하겠다'는 뜻이다. 과로사한 본인이 하는 말이라 설득력이 엄청나다
또 제갈량은 "모름지기 관리들은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한데 모으고 유익한 충언을 널리 받아들여야 한다. 서로 작은 의견 충돌조차 피하려고 하여 자유로운 토론을 거리낀다며 나라의 손해가 클 것이다. 토론을 통해 서로를 뜻을 공유하면 이는 마치 해진 짚신을 버리고 구슬과 옥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란 참으로 어려우니 이러하기가 쉽지 않은데 오직 서원직만이 이렇게 처신하면서 미혹되지 아니했다"고 말했다.
제갈량의 발언으로 미루어보건대 서서는 여러 사람들과 의견을 자유로이 교류하면서 좋은 방안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걸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은 나라에 이로움을 가져다 주었으니 제갈량은 그만큼 서서를 진심으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나중에 제갈량이 북벌하고 있던 태화 연간(227~232년)에 공명의 학우였던 서서, 맹건, 석도 등이 위나라에서 맡고 있던 직책을 알게 되자 그가 말하기를, "위(魏)에는 선비가 너무 많구나! 어찌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쓰인단 말인가?"하고 탄식하였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서서의 직책이 그렇게 낮은 지위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명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으니 서서는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였을 듯하다. 서서는 몇 년 뒤에 병으로 죽었는데 위략에 따르면 서주 팽성에서 제갈량이 죽던 그해인 234년에 죽었다고 한다.
서서가 정사에서도 지략가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개인 열전이 없고 사적은 촉서 제갈량전의 주석을 통해서만 간략하게 전해지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 미비하기 때문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힘든 것이다. 서서가 맡은 직책이나 제갈량의 말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행정 능력은 뛰어났던 걸로 보인다.
그러나 시대의 명재상 제갈량이 높이 평가하기도 했고,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건달 노릇이나 하면서 심지어 남을 대신해서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던 밑바닥 인생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국가의 고위직에까지 오른 서서의 재능이나 노력은 결코 함부로 깎아내릴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조비가 건국한 위나라는 가문과 집안의 힘이 무척이나 중시된 국가였는데도 서서는 오직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그런 제약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서서는 한 시대의 인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처럼 뛰어난 지략가로 나온다. 정사에서는 그냥 제갈량이 인정한 친구로 유비에게 한 것이라곤 제갈량을 천거한 것밖에 없는데 나관중은 여기에 살을 덧붙여서 행정가에 가까운 그를 일류 책사 중 하나로 만들었는데 이게 엄청난 열광을 받은 것이다. 물론 제갈량이나 방통보다는 한 수 아래인 것으로 나온다.
이는 서서의 뛰어난 책략을 보여주고, 그가 위나라로 가면서까지 천거한 제갈량의 등장을 독자들을 기대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다. 마침 정사에서도 서서는 제갈량이 동화와 비견하여 높게 평가한 인물이고 어머니가 위나라에 포로가 되어 본의 아니게 유비를 떠난 인물이며 위나라에 가서 책사로 활동하진 않았으니 끼워 맞추기에도 적당했을 것이다.
나관중은 단가(單家)라는 단어를 '선(單)씨 가문'이라고 잘못 해석하여, 서서의 다른 이름인 복(福)과 합쳐 서서가 선복(單福)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는 내용을 연의에 첨가하였다. 그리고 이는 서서가 친구의 원수를 죽이고 도망다니던 시기에 사용한 것이라는 것과 더해져서 왜 가명을 사용했는지도 설명해놨으니, 하여간 나관중의 짜맞추는 실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한국 번역본에서는 '단복'과 '선복'이 비슷하게 쓰이는 편이다.
첫 등장은 유비가 채모의 계략에 빠져 도망치다가 적로 덕분에 단계를 뛰어넘고, 수경선생 사마휘의 집에서 잠시 머물 때 나온다. 이 때 서서는 유표를 찾아갔으나 실망하고 유비를 찾아가고 있다가 사마휘의 집에 잠시 들른 것으로, 서로 만나지 못하고 엇갈린다. 그리고 정사와 달리 사마휘는 복룡과 봉추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후 신야에서 서서는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 유비의 이목을 끈 뒤, 자신을 '단복(또는 선복)'이라고 소개한 뒤 그의 군사가 된다. 그리고 여광, 여상 형제를 계략으로 격파하고, 이어서 조인이 친 '팔문금쇄의 진'을 깨고 조인과 이전을 격퇴시킨다.
조인 등의 보고를 들은 조조가 서서의 재능을 탐내자 정욱이 꾀를 쓴다. 정욱이 서서의 어머니 서모를 후하게 대접하자 서모가 정욱에게 감사의 편지를 쓴다. 정욱은 그녀의 필체를 흉내내 서서에게 허도로 오라는 거짓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 속은 서서는 유비와 헤어지면서 조조를 위해서는 어떠한 계책도 주지 않겠다고 말하고 제갈량을 천거한다. 이때 복룡과 봉추가 각각 제갈량과 방통을 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어머니를 만나기는 하였으나, 서모는 기뻐하기는커녕 어진 군주를 버리고 허도에 왔다면서 "네 이놈!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느냐?"라면서 호되게 꾸중하면서 한탄하였고, 마침내는 자살을 한다.
이 일화에서 서모가 "여자가 글씨를 안다는 것부터가 걱정을 낳게 한 근본 원인이다(女子識字憂患)"고 한탄하면서 식자우환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가능성은 적다. 이후 유비에게 항복을 권유하라는 조조의 명령을 받고 유비에게 찾아오지만, 정작 서서는 유비에게 절대로 항복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
정사에서는 그냥 유비랑 함께 도망치다가 어머니가 사로잡히자 어머니를 따라 갔다고만 나오는데, 유비의 인품과 덕치를 강조하는 연의에선 유비의 부하가 가족이 사로잡혀서 배신하고 도망갔다고 하기엔 애매해서 좀 더 각색해 유비의 덕치에도 어쩔 수 없는 배신 사유를 만들기 위해 어머니의 편지와 함께 그 배신이 잘못 되었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 서모까지 자살시킨다.
이후 제갈량이 본격적으로 유비 진영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자 조조에게 제갈량이 매우 뛰어난 인재임을 설명한다. 조조가 "서서 그대도 뛰어난 인재인데, 그대와 비교하면 어떤 수준인가?"라고 질문하자 서서는 "저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반딧불이라면 제갈량은 보름달입니다"는 비유를 한다.
적벽대전 직전, 방통이 연환계를 퍼뜨리고 조조의 진영에서 탈출하기 직전 외딴 곳에서 "연환계를 써서 우리 조조군을 몰살시킬 셈이구나!"라고 떠봐서 방통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방통이 "이 책략은 우리 강동 81주 백성들의 목숨이 달려 있네"라고 말하자 "그럼 이 80만 장병들의 목숨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란 대화를 나눈다.
다행히 서서는 연환계를 깨트릴 생각은 없었고, 방통에게 자신이 몸을 피할 계책 하나만 알려달라고 한다. 그리고 방통의 계책대로 서량의 마등이 쳐들어 온다는 헛소문을 군중에 널리 퍼트린 뒤,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조조에게 허도를 지키며 후방에서 뒤처리를 하겠다고 나선다. 조조는 이 계책에 넘어가 서서에게 군사 3천을 주고, 서서는 장패와 함께 전장을 떠나 멀리 피하게 된다. 이것이 연의에서의 마지막 등장이다.
◼ 유어탈조(遊魚脫釣)
적벽대전 직전 '유어탈조'의 지략으로 서서를 구해준 방통
유비가 형주 자사 유표를 찾아가 형주 변방의 신야 고을을 맡고 있을 때, 유비는 유표의 후계자 문제에 충고한 것이 화근이 되어 유표의 후처 채씨 부인 세력에 쫓겨 도망치다가 우연히 수경선생으로 불리는 사마휘를 만났다.
이때 유비는 사마휘로부터 그의 밑에서 학문을 익힌 서서(徐庶)를 추천받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책사를 맞을 수 있었고, 또 그를 통해 제갈량과 방통(龐統)도 형주 땅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제갈량을 와룡에 비유했고, 방통은 봉추라고 비유했다. 방통은 얼굴이 못생겼다. 그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재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이 스승 사마휘다. 사마휘는 오나라의 주유와 노숙에게 방통을 추천하여 손권을 만나게 해주었다.
손권은 방통의 외모만 보고 그를 등용하지 않았고, 방통 역시 그런 손권이 싫다며 조조한테로 떠나려 했다. 이때 노숙은 조조보다는 유비가 낫다고 하며 유비에게 추천서를 써 주었다. 유비는 방통을 보고 지방의 작은 고을을 맡겼다가 나중에 방통의 재능을 알아보고 조정에 불러다가 그를 중용했다.
방통은 유비와 짜고 적벽대전 바로 직전에 조조를 찾아가 연환계를 건의했다. 즉 조조에게 위나라 군사는 주로 보병 출신으로 수중전에 약하고 배멀미가 심하니 배들을 쇠사슬로 엮어 매면(연환계) 육지처럼 보행하기도 쉽고 배멀미를 줄일 수 있다는 묘안을 제의한 것이다. 조조는 이 계책을 받아들였다.
당시 조조 밑에 있던 서서는 원래 사마휘의 천거로 유비의 책사로 있었는데 조조가 그의 모친을 인질로 위나라로 오도록 한 가짜 편지에 속아 지금은 본의 아니게 조조의 수하가 된 인물이다.
서서가 연환계를 건의하고 돌아가는 방통을 찾아왔다. 서서 역시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화공책을 쓸 것을 예상했으며, 연환계를 쓰면 조조가 대패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방통을 찾아 간 것이다. 방통은 조조 진영에 있는 서서를 생각해서 한 가지 계책을 일러주었다. 그것은 '유어탈조'의 지략으로 서서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어탈조(遊魚脫釣)란 물고기가 낚싯바늘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역경을 벗어남을 이르는 말이다.
유어탈조의 계략을 위해 방통과 서서는 조조의 남방원정을 틈타서 서량의 마등과 한수의 군사들이 조조의 본거지 장안을 공격할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낸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조조는 서서로 하여금 이들을 막기 위해 후방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서서는 적벽대전 바로 직전에 후방으로 빠져 나왔으니, 이것이 낚시에 걸렸던 물고기가 바늘에서 벗어난 것과 같다고 해서 유어탈조라는 고사성어가 유래 되었다. 이로써 서서는 방통의 도움으로 적벽대전을 피했기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 연환계(連環計)
적벽대전에서 방통의 '연환계'에 속아 참패한 조조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이 동탁과 여포를 엮어 동탁을 주살한 연환계에 이어 두 번째 연환계는 방통이 적벽대전에서 연합군을 위해 조조에게 쓴 계책이다.
방통의 '연환계'란 방통이 조조를 찾아가 조조군의 취약점인 배멀미에 대한 대책으로 많은 배들을 서로 쇠사슬로 엮도록 진언하여 조조의 군선(軍船)이 쉽게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놓고, 화공책으로 군선에 불을 놓아 크게 무찌른 계책이다.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은 가장 치열하고 규모가 컸던 전투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백만 가까운 대군의 위용을 내세워 무섭게 남하하던 조조의 군대를 연환계로 묶어놓고 화공으로 대파해 유비와 손권이 삼국정립의 기틀을 마련한 전투이기도 하다.
연합군이 적벽대전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바로 방통의 연환계 덕분이었다. 적벽에서 조조군과 연합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방통은 주유를 회유하기 위해 온 조조의 첩자 장간(蔣幹)을 역이용해 조조의 진영으로 찾아갔다. 방통이 연환계를 조조에게 건의할 때 유비와 상의했다는 설과 주유와 상의했다는 설도 있다.
방통이 북방 출신의 조조 병사들이 수중전에 약하고 배멀미가 심해 제대로 싸울 수 없으니 쇠사슬로 배를 연결해 배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해 배멀미를 막는 연환계를 제안하자 조조는 좋은 대책이라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조조가 연환계로 배들을 얽어매는 것을 본 연합군은 화공(火攻), 즉 불로 공격할 계책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배에 어떻게 불을 붙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때 오나라 대도독 주유와 그의 부장 황개가 거짓 투항을 하는 사항계(詐降計)를 쓰기로 하고 또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황개가 곤장을 맞는 고육지계를 썼음을 앞에서 언급했었다. 결국 조조에게 투항하러 가는 척하면서 황개는 배를 몰고 가서 불을 놓겠다고 자청했다.
주유는 조조가 오나라에 위장 투항시킨 채중과 채화를 역이용하는 반간계와 황개를 위장 투항시키기 위한 고육지계를 사용했다. 한편, 주유는 화공에 필요한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은 다음 동남풍이 불기만을 기다렸다.
208년 동짓날, 밤이 되자 제갈량의 신기묘산한 재주로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이때 황개는 어둠을 틈타 기름을 바른 마른 볏짚을 가득 실은 배를 이끌고 투항하러 가는 척하면서 위나라 대군선단에 불을 질러 조조군의 선박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는 첩자를 적에게 보내 계책을 꾸미게 하고, 그 사이에 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얻은 경우로, 연환계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 장계취계(將計就計)
적벽대전에서 주유의 '장계취계'로 대패하고 만 조조
적벽대전을 앞두고 주유는 제갈량을 만나 조조군을 섬멸시키는 방안을 얘기하던 중, 두 사람 다 화공책(火攻策)을 이용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방통을 통해 조조군의 선단을 묶어놓는 데 성공한 이후, 최선의 전략은 화공법임을 알지만 그 실행수단이 간단치가 않았다. 하나는 동남풍이 불어주어야 하고, 또 하나는 거짓 투항선을 이용한 불을 어떻게 방화시킬 것인지가 문제였다.
계절적으로 동남풍이 불 때가 아니고, 거짓 투항선을 조조가 믿도록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유와 제갈량은 역할 분담을 하기로 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동남풍을 불어 공격할 수 있는 날짜는 제갈량이 맡고, 화공법을 쓸 수 있는 전략은 주유가 맡기로 했다.
조조 역시 대전을 앞두고 주유를 회유하기 위해 주유의 죽마고우인 장간을 첩자로 보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주유는 이 계략을 역이용하여 장간을 통해 반간계 작전을 썼다. 즉 주유는 조조의 수군 총사령관 채모(蔡瑁) 장군과 몰래 내통하고 있는 사이로 조작하여 장간을 속여, 결국 조조는 장간의 거짓 정보로 채모만 억울하게 죽이고 말았다.
조조는 늦게 속은 것을 알고 채모 장군 동생 둘을 회유하여 오나라로 거짓 투항시켜 첩자로 활용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주유는 각종 작전회의에 채 씨 형제를 참석시켜 그들이 보는 가운데 자신들의 작전을 노출시켰다.
주유와 그의 부장 황개는 이번 전투에 화공책을 이용하기 위해 적을 속일 수 있는 고육책을 쓰기로 했다. 이튿날 채 씨 형제가 있는 작전회의에서 황개는 주유에게, "지금이라도 조조한테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다"고 주장했다.
이에 화가 난 주유는 황개를 형틀에 묶어 곤장 백 대를 치는 고육책을 썼다. 그날 밤 만신창이가 된 황개는 심복 감택을 통해 조조에게 투항서를 보냈다. 조조는 처음에는 황개의 투항이 고육지계일지도 모른다고 반신반의했으나 직접 현장을 목격한 첩자 채 씨 형제의 보고에 따라 투항을 믿게 되었다.
이처럼 주유는 조조의 계략을 역이용했다. 거짓 투항선을 이용한 화공책으로 대승을 한 주유의 이 계책이 바로 '장계취계(將計就計)'다. 장계취계란 상대방의 계책을 미리 알아채고 그것을 역이용하는 계책을 이르는 말이다.
주유는 연합군을 치밀하게 배치하고 화공에 필요한 만반의 준비를 해 놓은 다음 동남풍이 불기만 기다렸다. 계절적으로 동남풍이 불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의 신기묘산한 재주로 동남풍이 불었다.
황개의 거짓 투항선이 접근하니 조조군으로서는 속수무책으로 화공책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조조는 연합군의 고육지계, 반간계 등 장계취계로 적벽대전에서 치욕스런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 반간계(反間計)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첩자 장간을 역이용한 주유의 '반간계'
반간계(反間計)란 간계를 반대로 이용하는 계책이다. 여기서 '간계(間計)'란 적(敵)끼리 서로 의심하게 만들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으로, '반간계'는 아군을 이간질시키려는 적의 간계를 오히려 역이용하여 적의 내부를 이간질시키는 계략이다.
적벽대전 때 오나라의 대도독 주유가 이 '반간계'로 대승을 이룬 사건은 유명하다. 조조는 원소와 유표를 격파한 그 위세로 208년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장강 동쪽 적벽에서 손권과 유비 연합군과 장강을 마주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북방 출신인 조조의 위군은 육지전에는 능했지만 수전에는 약했다. 채모와 장윤(張允)은 원래 형주 자사 유표의 부하 장수로, 유표의 아들 유종이 유비에게 항복할 때 함께 투항했으며, 수전에 능하여 조조의 군대에서 수군 훈련을 총책임진 중요한 인물이었다.
주유가 조조군 진영에서 수전에 능한 채모 장수가 있는 것을 내심 걱정하고 있던 차에 조조의 참모로 주유와 동문수학한 장간이 항복을 권유 하기 위해 주유를 찾아왔다. 주유는 장간이 조조의 첩자임을 알고 역이용하기로 했다.
주유는 오랜만에 만난 옛친구 장간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 자기 방에서 같이 잤다. 일부러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진 척한 것이다. 이때 장간은 몰래 일어나 주유의 책상 위를 훔쳐 보니 군사기밀문서 외에 서신들이 있었다.
그 서신 중에 채모와 장윤이 주유에게 보낸 서신도 있었다. 내용을 보니 조조을 죽여 주유에게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또 한밤중에 주유가 다른 장수와 채모와 장윤에 대하여 밀담하는 것도 엿들었다.
장간은 이 모든 것이 주유가 꾸민 계략인 줄도 모르고 서신을 몰래 품에 넣고 조조 진영으로 돌아와 조조에게 보고했다. 조조는 장간의 보고가 사실인 줄 믿고 채모와 장윤을 오나라의 첩자로 오인하여 그들을 죽였다.
주유는 조조의 '간계'를 간파하고 '반간계' 책략으로 위군의 채모가 마치 오나라의 첩자로 오해하도록 일부러 거짓 서신을 써 두었고 자는 척하는 장간을 역이용해 밤중에 몰래 부장을 오도록 해 채모와 장윤의 이름을 밀담으로 거명했던 것이다. 이렇게 반간계로 장간을 속이고, 장간의 잘못된 정보에 따라 조조는 채모를 참수한 것이다.
이로써 조조의 군대는 수전의 약점을 보완하지 못하여 결국 수전 중심의 적벽대전에서 대패하게 되었다. 이처럼 주유는 첩자로 온 장간을 역이용하는 반간계 책략으로 열 배 이상 우세한 조조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간계'나 '반간계' 책략은 적과 대치 중인 전쟁에서 병법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략이지, 우리 일상적 인간관계에서는 절대 금기해야할 처세술이라 하겠다.
◼ 고육지계(苦肉之計)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오나라 장수 황개의 '고육지계'
조조의 백만 대군을 목전에 둔 연합군의 총사령관 주유는 오랜 고민 끝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계책을 장수 황개와 함께 꾸민다.
조조의 진영에는 수군 총사령관 채모와 그의 동생 채중, 채화 형제가 있었다. 조조가 주유의 반간계 계략에 빠져 그들의 형 채모를 죽인 후 늦게 속은 사실을 알고 크게 후회한 나머지 조조는 채모의 두 동생을 설득, 회유하여 거짓으로 오나라에 항복시켜 첩자로 활용하였다. 물론 주유는 그들이 첩자인 줄 알지만 역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모른척하고 있었다.
주유는 그의 부장인 황개와 함께 이번 전투에서 고육지계를 쓰기로 했다. 고육지계(苦肉之計)란 제 몸을 상해가면서까지 꾸며내는 계책으로, 이는 일반적으로 어려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으로 고육책이라고도 한다.
주유와 황개는 이런 고육지책을 성공시키기 위해 채중, 채화 형제도 참여하는 참모회의를 열었다. 이때 황개는, "누가 보아도 조조를 이길 수 없으니 항복하는 편이 낫지 않느냐"며 주유의 약을 올렸다.
싸움을 눈앞에 두고 항복하자는 황개의 말에 대도독 주유는 버럭 화를 냈다. 그런데도 거듭 항복을 권하자 주유는 황개를 형틀에 묶어 곤장 백 대를 쳤고 황개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른바 고육지계를 쓴 것이다. 주유와 황개는 이 고육책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고 실제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리고 맞았다.
그날 밤 황개는 그의 심복인 감택을 시켜 조조에게 투항서를 작성해 조조에게 전달했다. 황개가 억울하게 주유로부터 곤장을 맞았다는 사실을 채 씨 형제의 보고로 알고 있었던 조조는 황개의 위장 투항에 속아 투항선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한 그날 밤 황개는 기름을 잔뜩 실은 위장 투항선단을 이끌고 조조의 대선단 앞에 나타나 빠른 속도로 거대한 위군 전투함 선단을 들이받고 기름에 불을 붙여 조조의 대함대를 불태웠다.
이때를 노려 오(吳)와 촉(蜀) 연합군의 수군들이 총공격하여 조조의 나머지 군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적벽대전을 대승리로 이끌었다.
고육지계로 적벽대전을 승리한 손권은 강동의 땅 대부분을 차지했고, 유비는 형주를 얻어 촉 왕조를 세우는 데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처럼 전쟁에서 적이나 상대를 속이기 위해 제 몸을 상해가면서까지 꾸며내는 고육책에 자원하는 부하나, 또는 자기가 속한 조직이 위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감수하고 헌신을 자원하는 구성원은 투철한 충성심과 사명감이 불타는 사람이다.
과연 여러분은 국가를 위해, 속해 있는 조직을 위해 이런 고육책에 자원할 수 있는 충성심과 사명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遊(놀 유)는 ❶형성문자로 游(유)의 본자(本字), 逰(유)는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斿(유)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斿(유)는 기가 펄럭이고 있다, 물건이 흐르는 모양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遊자는 '놀다'나 '떠돌다', '여행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遊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斿(깃발 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斿자는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을 그린 㫃(나부낄 언)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것으로 '깃발'이라는 뜻이 있다. 斿자에는 '놀다'라는 뜻도 있는데, 斿자가 마치 깃발 아래에서 어린아이가 놀고 있는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아이가 노는 모습으로 그려진 斿자에 辶자를 결합한 遊자는 '길을 떠나 놀다' 즉 '떠돌다'나 '여행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游(유)는 물위를 흘러가다, 헤엄침, 어슬렁어슬렁 산책하다, 나다니다, 놂 등의 뜻으로, ①놀다 ②즐기다 ③떠돌다 ④여행하다, 유람하다 ⑤사귀다 ⑥배우다, 공부하다 ⑦사관(仕官)하다, 벼슬살이하다 ⑧유세(遊說)하다 ⑨놀이 ⑩유원지(遊園地) ⑪벗, 친구(親舊) ⑫유세(遊說) ⑬까닭, 이유(理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희롱할 희(戱)이다. 용례로는 각처로 돌아 다니며 자기 또는 자기 소속 정당 등의 주장을 설명 또는 선전함을 유세(遊說), 일정한 방법에 의하여 재미있게 노는 운동을 유희(遊戱),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함을 유람(遊覽), 따로 떨어져 있는 것 또는 그 일을 유리(遊離), 타향에 가서 공부함을 유학(遊學), 거처를 정하지 않고 물과 풀을 따라 이주하며 소나 양이나 말 등의 가축을 기르는 일을 유목(遊牧), 흥취 있게 놂을 유흥(遊興), 휴식 삼아 거닒을 유보(遊步), 물 속에서 헤엄치며 놂을 유영(遊泳), 유람차 각처로 다님을 유행(遊行), 운행이나 기능을 쉬고 있음을 유휴(遊休),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를 유금(遊禽), 공중이나 물 위에 떠 다님을 부유(浮遊), 멀리 가서 놂을 원유(遠遊), 물고기가 알을 낳기 위하여서나 또는 계절을 따라 정기적으로 떼지어 헤엄쳐 다니는 일을 회유(回遊), 공부 또는 유람할 목적으로 외국에 여행함을 외유(外遊), 서로 사귀어 왕래함을 교유(交遊), 두루 다니면서 놂을 여유(旅遊), 하는 일 없이 편안하고 한가롭게 잘 지냄을 우유(優遊), 유람을 하며 즐겁게 놂을 오유(娛遊),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제멋대로 놂을 일유(逸遊),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람하는 것을 주유(周遊), 이곳저곳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놂을 경유(經遊), 거문고 소리가 하도 묘하여 물고기마저 떠올라와 듣는다는 뜻으로 재주가 뛰어남을 칭찬하여 이르는 말을 유어출청(遊魚出聽), 먼 곳에 갈 때는 반드시 그 행방을 알려야 한다는 뜻으로 자식은 부모가 생존해 계실 때는 멀리 떠나 있지 말아야 하고, 비록 공부를 위해 떠나 있을지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머물러야 함을 이르는 말을 유필유방(遊必有方),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놀고 먹는다는 말을 유수도식(遊手徒食), 하는 일없이 놀고 먹는 백성이라는 말을 유식지민(遊食之民), 하는 일없이 놀면서 입고 먹는다는 말을 유의유식(遊衣遊食), 편안하고 한가롭게 마음대로 즐긴다는 말을 우유자적(優遊自適), 하는 일없이 한가롭게 세월을 보낸다는 말을 우유도일(優遊度日), 고기가 솥 속에서 논다는 뜻으로 목숨이 붙어 있다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을 비유하는 말을 어유부중(魚遊釜中), 느긋하고 침착하여 서둘지 않는다는 말을 우유불박(優遊不迫), 촛불을 들고 밤에 논다는 뜻으로 경치가 좋을즈음 낮에 놀던 흥이 미진해서 밤중까지 놂을 이르는 말을 병촉야유(秉燭夜遊) 등에 쓰인다.
▶️ 魚(고기 어)는 ❶상형문자로 漁(어)의 고자(古字), 鱼(어)는 통자(通字)이다. 물고기 모양을 본뜬 글자로, 한자의 부수로서는 물고기에 관한 뜻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魚자는 '물고기'를 그린 글자이다. 魚자는 물고기를 그대로 그린 상형문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魚자를 보면 물고기의 주둥이와 지느러미가 잘 묘사되어 있었다. 이후 해서에서 물고기의 몸통과 꼬리를 田(밭 전)자와 灬(불 화)자로 표현하게 되면서 지금의 魚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魚자는 물고기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활용될 때는 주로 어류의 종류나 부위, 특성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魚(어)는 성(姓)의 하나로 ①물고기 ②물속에 사는 동물의 통칭(通稱) ③바다 짐승의 이름 ④어대(魚袋: 관리가 차는 고기 모양의 패물) ⑤말의 이름 ⑥별의 이름 ⑦나(인칭대명사) ⑧고기잡이하다 ⑨물에 빠져 죽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생선을 가공해서 말린 것을 어물(魚物), 물고기 잡는 그물을 어망(魚網), 물고기를 잡거나 기르는데 쓰이는 항아리 모양으로 만든 유리통을 어항(魚缸), 물고기의 알을 어란(魚卵), 물고기와 조개를 어패(魚貝), 생선 파는 시장을 어시장(魚市場), 물고기의 종류를 어종(魚種), 낚시로 고기잡이하는 데 쓰는 배를 어선(魚船), 물고기를 기름 또는 기른 물고기를 양어(養魚), 말린 물고기를 건어(乾魚), 미꾸릿과의 민물고기를 추어(鰍魚), 청어과의 바닷물고기를 청어(靑魚), 멸치과에 딸린 바닷물고기를 행어(行魚), 퉁가리과의 민물고기를 탁어(馲魚), 은어과의 물고기를 은어(銀魚), 가오리과에 딸린 바닷물고기를 홍어(洪魚), 가물치과에 딸린 민물고기를 흑어(黑魚), 학꽁치과의 바닷물고기를 침어(針魚), 멸치과의 바닷물고기를 약어(鰯魚), 동자개과에 딸린 민물고기를 종어(宗魚), 잉어과의 민물고기를 타어(鮀魚), 철갑상어과의 바닷물고기를 심어(鱘魚), 제사 상을 차릴 때에 어찬은 동쪽에 육찬은 서쪽에 놓음을 이르는 말을 어동육서(魚東肉西), 어魚자와 노魯자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몹시 무식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어로불변(魚魯不辨), 물고기와 물처럼 친한 사이라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의 친밀한 사이 또는 서로 사랑하는 부부 사이를 일컫는 말을 어수지친(魚水之親),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이 매우 친근한 사이를 일컫는 말을 어수지교(魚水之交), 고기 대가리에 귀신 상판때기라는 뜻으로 괴상 망측하게 생긴 얼굴을 형용하는 말을 어두귀면(魚頭鬼面), 고기가 솥 속에서 논다는 뜻으로 목숨이 붙어 있다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을 비유하는 말을 어유부중(魚遊釜中), 잉어가 용으로 화한다는 뜻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 양명함을 이르는 말을 어룡장화(魚龍將化), 물고기의 눈과 연산의 돌이라는 뜻으로 두 가지가 옥과 비슷하나 옥이 아닌 데서 허위를 진실로 현인을 우인으로 혼동함을 이르는 말을 어목연석(魚目燕石), 물고기는 대가리 쪽이 맛이 있고 짐승 고기는 꼬리 쪽이 맛이 있다는 말을 어두육미(魚頭肉尾), 물고기 떼나 새 때가 흩어져 달아난다는 뜻으로 크게 패망함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어궤조산(魚潰鳥散),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었다는 뜻으로 어릴 적에는 신통하지 못하던 사람이 자란 뒤에 훌륭하게 되거나 아주 곤궁하던 사람이 부귀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어변성룡(魚變成龍), 글자가 잘못 쓰였다는 뜻으로 여러 번 옮겨 쓰면 반드시 오자誤字가 생긴다는 말을 어시지혹(魚豕之惑), 용과 같이 위엄 있는 모양을 하고 있으나 실은 물고기라는 뜻으로 옳은 듯하나 실제는 그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어질용문(魚質龍文) 등에 쓰인다.
▶️ 脫(벗을 탈, 기뻐할 태)은 ❶형성문자로 脱(탈)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육달월(月=肉; 살, 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제거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兌(태, 탈)로 이루어졌다. 살에서 뼈를 제거하다의 뜻이 전(轉)하여 빠지다, 벗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脫자는 ‘풀다’나 ‘벗어나다’, ‘나오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脫자는 ⺼(육달 월)자와 兌(빛날 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兌자는 兄(맏 형)자 위로 八(여덟 팔)자를 그린 것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을 표현한 글자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린 兌자에 ⺼자가 결합한 脫자는 육체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크게 기뻐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脫(탈, 태)은 ①벗다 ②벗어나다 ③벗기다 ④사면하다 ⑤풀다 ⑥나오다 ⑦빠지다 ⑧떨어지다 ⑨거칠다 ⑩소홀하다 ⑪잃다 ⑫혹시(그러할 리는 없지만 만일에) ⑬만일 ⑭전부 ⑮매우 그리고 ⓐ기뻐하다(태) ⓑ허물을 벗다(태) ⓒ느리다(태)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몸을 빼쳐 도망함을 탈출(脫出), 당원이 당적을 떠남을 탈당(脫黨), 밖으로 빠져서 새는 것을 탈루(脫漏), 빠져 버림을 탈락(脫落), 관계를 끊고 물러남을 탈퇴(脫退), 파충류나 곤충류 등이 성장함에 따라 낡은 허물을 벗는 일을 탈피(脫皮), 북한을 탈출함을 탈북(脫北), 법망을 교묘히 뚫거나 벗어남을 탈법(脫法), 납세자가 납세액의 전부 또는 일부를 포탈하는 일을 탈세(脫稅), 기차나 전차가 선로에서 벗어남을 탈선(脫線), 옷을 벗음을 탈의(脫衣), 들인 물색을 뺌을 탈색(脫色), 벗겨 버림을 탈거(脫去), 물질 속에 들어 있는 수분을 제거함을 탈수(脫水), 우리를 빠져 도망하는 토끼의 기세라는 뜻으로 매우 신속하고 민첩함을 이르는 말을 탈토지세(脫兔之勢), 모자를 벗어서 정수리를 드러낸다는 뜻으로 예의에 구애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탈모노정(脫帽露頂), 물고기가 그물에서 벗어나 연못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다행히 재난을 면하고 기뻐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탈망취연(脫網就淵), 몸을 빼쳐서 달아남을 일컫는 말을 탈신도주(脫身逃走), 뾰족한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는 뜻으로 뛰어나고 훌륭한 재능이 밖으로 드러남을 이르는 말을 영탈이출(穎脫而出), 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능력이나 재질이나 역량 따위가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이르는 말을 족탈불급(足脫不及), 매미가 허물을 벗는다는 뜻으로 껍질은 그대로 있고 몸만 빠져나가는 것처럼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허세를 꾸며 벗어남을 이르는 말을 금선탈각(金蟬脫殼) 등에 쓰인다.
▶️ 釣(낚을 조/낚시 조)는 형성문자로 钓(조)는 간자(簡字), 鈟(조)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쇠 금(金; 광물, 금속, 날붙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勺(작, 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釣(조)는 ①낚다 ②낚시하다 ③유혹(誘惑)하다 ④탐(貪)하다 ⑤구(求)하다 ⑥낚시,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낚시를 조침(釣針), 낚싯대를 조간(釣竿), 낚싯줄을 조사(釣絲), 물고기의 새끼를 낚는다는 뜻으로 지방의 아전들이 백성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들이는 일을 이르는 말을 조곤(釣鯤), 낚시질하는 동지 낚시꾼을 조도(釣徒), 낚시질하는 노인을 조부(釣父), 낚싯배로 낚시로 고기잡이하는 데 쓰는 배를 조선(釣船), 물고기를 낚음을 조어(釣魚), 낚시터로 낚시질하는 곳을 조대(釣臺), 배를 저음을 조주(釣舟), 물건을 걸어 둘 수 있도록 작은 갈고리를 달아 매어 드리워 놓은 줄 또는 물고기를 낚을 때 미늘을 달아서 바다나 강물 속에 장치하는 줄을 조승(釣繩), 낚싯밥으로 낚시 끝에 꿰는 물고기의 먹이를 조이(釣餌), 낚시질을 하는 물가를 조저(釣渚), 거짓으로 명예를 탐하여 구함을 조명(釣名), 사원의 종루에 달아 놓은 큰 종을 조종(釣鐘), 조리로 쌀을 이는 데 쓰는 기구를 조래(釣乃), 물고기를 낚기 위하여 물 속에 낚시를 드리움을 수조(垂釣), 얼음이 풀린 뒤 처음으로 하는 낚시질을 시조(始釣), 고기를 낚음을 어조(魚釣), 임금의 은혜를 차지하여 벼슬을 얻으려고 꾀한다는 말을 조은매작(釣恩媒爵), 낚시질은 해도 그물질은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무슨 일에나 정도를 넘지 않는 훌륭한 인물의 태도를 이르는 말을 조이불강(釣而不綱),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음을 이르는 말을 상화조어(賞花釣魚), 바늘로 잉어를 낚는다는 말을 이침조리(以針釣鯉), 새우 미끼로 잉어를 낚는다는 뜻으로 적은 밑천으로 큰 이득을 얻는다는 말의 속담을 이하조리(以鰕釣鯉), 산에는 밭을 갈고 물에서는 물고기를 잡는 생활을 한다는 뜻으로 소박하고 속세에서 떠난 생활을 영위함을 이르는 말을 경산조수(耕山釣水)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