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인물탐험 - 윤경렬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8일 제 187호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에 난 기사내용입니다.)
사실 윤선생님댁을 다녀오고 나서 두달여 동안이나 선생님 소개를 쓰지못했다.
사진원고와 선생님약력등을 얻어나오면서부터 왠지 모르게 선생님의 건강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짙어지면서 그분에 대한 짤막한 소개가 어떻게 네티즌들에게 전달될 것인지에 대해 조심스러워진 때문이기도 하다.
윤선생님을 만나뵌것이 5년전쯤 친구 주례를 부탁하러 가서 뵈었으니 시간이 그렇게 빠른가 하는 마음으로 양지마을을 들어섰다.
우선 동네입구에서 정종한병을 사러 들렀는데 (윤선생님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알듯이 애주가 이시다.)
마침 가게주인 아주머니께서 얼굴모양 수막새를 빚어 말리고 계신다.
어째 고청사에서 하청을 받으셨나 했더니 경주문화엑스포에 쓰일 수막새가 모자라 동네에서 조금씩 나누어 제작하고 있다.
양지마을을 들어서면서부터 햇빛할아버지의 가게가 보이지 않길래 궁금해 하였더니 할머니가 돌아가신뒤로 경주생활을 정리하시고 부산 큰아들에게 가 계신단다.
햇빛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한글운동을 하신분으로 학문적인 깊이가 그리 깊지 않았으나 그분의 한글사랑은 아름아름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리말,우리이름을 강조하셨고 중고등학교 초청강연을 다니실정도로 열성적이셨다.
양지마을이란 이름을 만드신분도 햇빛할아버지셨고 그래서 양지마을이란 이름을 듣는 경주사람들은 두 어른이 살고계시는 동네쯤으로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게를 나와 다리를 건너 윤선생님 댁으로 들어서는데 아차! 싶은 것이 혹 연락도 안드렸는데 계실지 몰라 아랫채에서 작업하시는 분들께 여쭈었더니 오늘 계신단다.
대문을 들어서자 사랑방에서 윤선생님께선 여느때처럼 책이며, 자료들사이에서 무언가를 정리하시다가 이쪽을 건너다 보신다.
할머니께서 계실때만 해도 온기와 수다(?)가 넘친다 싶었는데 집안이 어쩐지 쓸쓸해 보이기만 하다.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여쭈었더니 손수 방석을 내 오신다.
윤선생님께는 독서회 27년 후배라고 소개한 '길잡이'가 여러 녀석들중의 알아보지 못할 한놈이겠지만 독서회 말만듣고서도 반가와 하신다.
오기전에 신라요 유효웅선생님을 뵈었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자초지정을 말씀드리고 선생님 약력을 좀 주십사고 했더니 두껍게 노트된 갱지 한묶음을 건네주셨다.
나신때부터 연도별고 조목조목 기록해놓으신 중간중간 큰아드님생일이며 가족들의 사소한 기념일, 그런것들도 모두 기록해 놓아 혼자 베껴쓰면서도 자잘한 마음쓰심이 좋아 미소를 짓게 만드는 노트였다. 서재앞에서 술잔을 들고계시는 사진 넉장을 건네받고 요즈음도 약주를 하시느냐고 넌즈시 여쭈었더니 그것없으면 무슨낙으로 사느냐고 웃으신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언뜻 최근 나온 '마지막 신라인-윤경렬'이라는 책 때문에 마음을 많이 다치신듯 괴로와 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출판사에다 모든것을 맡기고 신경을 쓰지 않았더니 책이름이 그렇게 나왔더라며...
그것때문에 항간에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중간에도 자주 눈가를 찍어내시는 모습을 보니 짐작하건데 그 사건으로 건강이며 시력까지도 많이 나빠진듯한 느낌이었다.
올해 여든셋의 고령임에도 항상 반듯이 앉아서 말씀을 나누시는 모습이 너무 단아하시다.
하나 오년전 저녁늦게 술을 들고 양지마을을 휘영청 들어서시던 한복차림의 그모습에 비해서는 너무 쇠약해진 모습을 뵈니 '길잡이'도 안스러움이 앞선다.
경주를 위해선 많은일을 하신분이시고 특히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우리문화를 이해시켜주시고 그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신 큰 스승이 아닌가 싶다.
오래동안 건강하셔야 할텐데 하고 일으서서 나오는데 대청기둥을 짚고 서계신 선생님 모습이 양지마을을 빠져나와서도 늘 눈앞에 아른거린다.(1998년 7월)
尹慶烈 선생님
1916년 1월 14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중향동 55번지 출생
1934영 주을 온대진(溫大津)학숙 및 야학 근무
1935년 일본博多 인형수업
1937년 시골신사에 시멘트 석사자 제작
1940년 귀국
1943년 조선 미술전람회 출품(조각부)
1945년 개성 중경학교 근무, 동양인의 예술 발표
1947년 개성 정화여학교 근무
1948년 서울로 옮김(43세)
1949년 경주로 옮김(경주인형연구소 고청사 경영, 경주예술학교 강사)
1954년 경주 어린이 박물관 학교 개설
1958년 신라문화동인회 창회
1959년 근화여중 근무
1961년 독서회 회장
1965년 불교동화집 발간
1971년 문화공보부 장관 향토문화 공로상 (상록상 수상)
1979년 경주남산 고적순례 발간(경주시)
1993년 5월 5일 겨레의 땅 부처님의 땅(불지사) 발간
윤경렬(81)씨는 인형을 만들던 사람이었다. 함경북도 경성군, 온천마을로 이름났던 주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흙으로 만든 토우 인형에 마음을 빼앗겼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조선 풍속을 따 라 인형을 빚어 구운 다음 색칠한 것을 보고 그 기술을 배우러 일본까지 갔다오는 집념의 인형장이였다.
그가 경주 사람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인형 때문.
“일본에서 돌아온 뒤 풍속 토우를 만들었지만 팔 길이 막막했어요.
1943 년 아는 이 소개로 개성으로 나가게 됐고, 이듬해에 당시 개성박물관 관장이시던 고유섭 선생을 뵙게 됐지요.
고고미술학의 선구자이신 선생께서 는 내가 일본에서 3년 동안 공부했다니까 일본놈의 독소를 빼기 전에는 조선 것은 해볼 생각도 말라고 혼을 내셨지요.”
윤씨는 독소를 빼기 위해서 역사가 깊은 곳으로 터전을 옮겨야겠다고 작정했다.
부여, 공주, 하다가 선뜻 경주를 골랐다. 운명이지 싶다.
경주에 턱 들어서는 순간, 그는 ‘경주에 내 뼈를 묻으리라’ 결심했다.
계림숲과 무령왕릉에서 그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힘차고 명랑한 예술이 있는가, 새삼 목이 메었다.
“경주에 있으면 고분 발굴 현장을 많이 보게 돼요. 몸은 다 썩었어도 그 사람들이 입었던 옷, 쓰던 그릇, 갖고 있던 무기, 온갖 장신구류가 베갯머리에 모여 있지요.
그걸 현장에서 하나하나 스케치를 했습니다. 사진기 로 툭툭 찍는 것하곤 달라요.
정확하게 관찰해서 그리게 되니까 옷주름 하나도 놓칠 수가 없어요.
지금 텔레비전 사극에 나오는 옷들은 대개 중 국풍이 많아요. 고증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거지요.”
풍속 토우를 만들려면 옛 사람의 얼굴과 의복 일습을 알아야 했다.
그는 얼굴을 찾아 경주 일대를 헤매기 시작했다. 경주 남산에 들어가게 된 데 는 이런 내력이 있다.
남산을 한달에 두번꼴로 한 6백번쯤 오르내렸다.
수없이 눈과 마음에 새긴 이 현장답사 덕에 그가 쓰고 그린 <신라이야기> (창작과비평사 펴냄)는 동화책임에도 그 안에 담긴 삽화들이 신라시대의 풍속을 가장 적확하게 복원한 것으로 이름높다.
“경주 남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지요.
신라 사람들은 그 바위 속에 부처 님이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전통적인 바위신앙과 불교신앙이 합쳐진 거지 요.
부처님 얼굴에 바로 신라 사람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고구려의 억세고 엄격함, 백제의 부드럽고 섬세함이 만나 빚어낸 한국인의 얼굴이 지요.”
그는 한국 사람 얼굴의 특징을 ‘꾸밈새가 없는 표정’이라고 했다.
시골 파파 할머니의 익살스런 얼굴, 고향 누님처럼 인정 듬뿍한 얼굴, 한마디 로 생겨먹은 대로 구수하고 정겨운 얼굴이라는 것이다.
부지런히 마을들 을 돌아다니며 그 얼굴에 얽힌 이야기들을 모아 펴낸 <경주 남산 고적 순 례> <겨레의 땅 부처님 땅> 등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시절 그가 발로 읽어낸 남산의 육성이다.
‘경주 어린이 박물관학교’도 열어
“처음 남산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땐 나무꾼하고 나물 캐는 아낙밖에 없 었어요.
저를 아는 이들이 한다리 건너 얘기들을 전해듣고 서울에서 내려 올 때마다 앞장서라고 해서 남산 답사가 시작된 거지요.”
요즘이야 문화 답사나 박물관학교 같은 행사가 유행처럼 전국으로 번졌지만 30여년 전만 해도 드문 일이었다.
윤경렬씨가 “내 평생 보람된 일은 우리의 풍속 인 형을 만든 일과 경주 남산을 조사하고 소개한 일, 그리고 경주의 어린이 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가르친 일”이라고 말하는 까닭 이다.
1954년 10월, 당시 경주 박물관장이던 고유섭씨와 힘을 더해 열었 던 ‘경주 어린이 박물관학교’는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에도 있듯, 아이 들에게 ‘겨레의 고운 얼을 길러준 뿌리’였다.
윤경렬씨가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한 건 그가 쓴 <마지막 신라인 윤경 렬―윤경렬 평생이야기>(학고재 펴냄) 때문이다. 윤씨가 마다했음에도 후 학들이 마련한 출판기념회가 12월5일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렸다.
모처럼 먼 걸음을 한 그를 보러 찾아온 벗들에 둘러싸여 그는 술과 정에 곱게 취했다.
지금도 그는 경주시 양지마을의 인형공방 ‘고청사’(古靑舍·0561-772-9114) 문턱 낮은 집에서 한국인의 멋을 생각하고, 남산을 가고자하는 손 들을 맞으며 산다.
고청은 그의 자호. 원래 나만 홀로 익지 못해 아직 푸 르다는 뜻으로 고청(孤靑)이라 했으나, 이제는 옛날 속에서 푸르게 산다 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동무처럼 손잡고 남산을 오르내리던 부인 ‘순이’를 3년 전 먼저 보낸 요즘 그의 나날은 고즈넉하다.
적적할라치면, “꼴꼴꼴” 술 떨어지는 소리가 좋은 상감청자 술병에 고량주를 받아놓고 남산을 친구 삼아 홀로 권 커니 받거니 대작하는 멋을 안사람 삼았다. 가끔 지구상에서 가장 먼 곳, 고향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지만 자신이 경주 사람이 된 것은 필경 부처님 의 뜻이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