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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노니, 비발디 외 Karajan compilation (Albinoni, Vivaldi, Bach, Pachelbel, Gluck, Mozart)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1908 - 1989)
연주:프로이센 슈타츠카펠레 사용판본: 1887/90년 절충판, Hass 편집 1935년 녹음일자: 1944.6.28.(2,3악장) &9.29.(4악장) |
카라얀의 생애 |
카라얀은 1908년 4월 5일 일요일에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바로 모차르트 이후 잘츠부르크에서 또 한명의 음악의 위인이 탄생한 날인 것이다. 카라얀의 조상은 그리스 출신이었지만 오스트리아에 정착하여 귀족의 칭호까지 얻게 되어서 카라얀 가의 성에는 귀족 앞에만 붙은 von이 보태진다.
유년 시절 카라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그의 형이었다. 카라얀은 유난히 작은 몸집이었기에 큰 덩치의 형에게 항상 열등감을 가졌으며 음악을 시작한 계기도 형에게 피아노를 뒤지지 않겠다는 단순한 경쟁의식에서 시작된다. 그가 스스로 인터뷰에서 터 놓은대로 그는 어릴 적부터 친구를 사귀기 힘들어하는 성격이었으며 누구에게도 자기의 본심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런 그의 고독감은 바로 음악이라는 도피처에 미치도록 몰입하게 만든다. 14세때는 여름방학동안 영국으로 가서 3개월간 머물며 영어를 막힘없이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고 음악교육과 학교공부를 병행하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비록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카라얀은 형을 따라 공대에 입학했는데 결국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반면 형은 후에 공학 교수로 이름을 날릴 만큼 성공하게 된다. 카라얀이 쉽게 공학을 포기한 것도 그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이 부족함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분야에서도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차 8세부터 10년동안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콘서바토리에서 음악 교육을 받을 때부터 은사였던 파움가르트너 (Bernhard Paumgartner)의 조언으로 마침내 지휘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1929년까지 1년반동안 빈에서 집중적으로 지휘 공부를 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엔 많은 행운이 잇따르는데 다름 아니라 당시 빈 국립가극장의 건물 관리자 겸 감독관이었던 사람이 바로 카라얀의 숙부였다. 이 숙부는 조카인 헤르베르트에게 유명한 지휘자의 연주회나 비공개 연습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국립가극장에는 수석 지휘자인 브루크너의 제자 프란츠 샬크, 리하르트 슈트르우스, 필릭스 바인가르트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클레멘스 크라우스등이 자주 연주를 열었기에 지휘 공부중인 카라얀으로서는 하늘이 내린 행운이었다. 마침내 1928년 12월 27일 분델러 교수의 클라스의 연주회에서 롯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을 지휘하게 된다. 이 연주회를 통해 그는 지휘가 자신의 천직임을 확실히 깨닫게 된듯하다.
빈 아카데미를 졸업한 카라얀은 부픈 가슴을 안고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가족과 파움가르트너등 지인들을 총 동원해 1929년 1월 22일 모차르트테움 대강당에서 데뷔 연주회를 열게 된다. 아직 만 21세도 채되지 않은 지휘자가 이날 택한 곡목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주앙"이었다. 이 날 공연을 지켜보던 독일의 지방도시 우름 (Ulm) 시립극장의 지배인 디트리히는 카라얀의 재능을 인정하여 연습 지휘자의 자격으로 카라얀을 우름에 채용한다. 그래서 카라얀의 경우, 경력의 출발점은 우름이 된다.
이 지방의 허름한 오페라 극장의 악조건은 카라얀으로 하여금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해주었다. 우름에 취임한 3개월 후인 1929년 5월에 그는 빈으로 가서 국립가극장에서 토스카니니가 이끄는 밀라노 스칼라좌의 초청공연을 듣는다. 이 때 베르디의 "팔스타프"와 도니제티의 "람메르모르의 루치아"였으며 당시 최고의 전성기에 있던 토스카니니는 카라얀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된다. 또한 여름휴가 기간엔 잘츠부르크의 음악제을 참관하여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의 음악을 피부로 접하게 된다. 또한 1930년부터 2년간 토스카니니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 초대되어 바그너의 오페라를 지휘하게 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카라얀은 자전거를 타고 바이로이트로 가서 이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다시 한번 토스카니니가 카라얀에게 끼쳤을 영향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연주: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사용판본:1987/90년 절충판,Haas 편집(1935)/1957.5.23-25.녹음 |
1930년대초부터 독일은 나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1933년 4월 8일,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나찌의 박해가 시작행해진지 1주일후, 카라얀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 (나찌)에 입당하게 되고 바로 같은 해 5월 1일 확인적 행위로서 두번째 나찌에 입당 절차를 밟는다.
카라얀의 공식적인 입장은 2년뒤인 1935년에 입당한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는 조금이나마 늦게 입당해서 얼마간 연합국의 판결에서 형이 가벼워지기 위한 술책으로 들어났다. 그러나 1934년 봄 카라얀의 우름에서의 계약은 끝이난다. 당시 독일은 수많은 실업자가 있었으며 카라얀도 그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됐던 것이다. 직업을 구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상경한 카라얀은 수개월간을 궁핍하게 지내다가 마침내 아헨 (Aachen)에서 제 1지휘자를 모집하는 기회가 온다.
한 지인이 그를 하헨 주립극장의 새 지배인에게 소개시켜주게 되고 결국 지휘 시연을 할 기회를 잡는다. 결국 초반에 나이 많은 단원들의 카라얀이 너무 젋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누군가 카라얀을 강력히 추천하여서 결국 아헨의 교향곡과 오페라 부문의 지휘자가 된다. 그의 나찌경력에 대해 카라얀은 이때 아헨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원이어야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입당했노라고 말하지만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미 2년전부터 카라얀은 나찌당원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많은 실력있는 유태인 음악가들이 추방되고 있던 터라 독일내에서 카라얀은 쉽사리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마침내 카라얀은 1935년 27세의 나이로 독일내 최연소 음악 총감독에 취임한다. 이후 카라얀은 기꺼이 나찌를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1938년 7월에 카라얀은 아헨에 와서 알게된 미모의 오페레타 가수 엘미 호르가레프와 첫번째로 결혼한다. 그녀는 카라얀보다 11년 연상이었고 4년후 카라얀이 두번째 결혼한 후에도 재혼하지 않는다. 이 당시 카라얀은 당대 독일 최고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와 라이벌 관계로 발전되가고 있었는데 마침내 이해 4월 8일 처음으로 베를린 필을 지휘하게 된다. 이 첫 만남에서 언젠가 이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카라얀은 키웠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독일 그라모폰과 함께 음반작업도 시작한다. 카라얀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참석한 가운데 "엘렉트라"를 연주하는 등 지휘자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카라얀은 아헨의 수석 지휘자 자리를 그만 두게 되는 1942년 이혼녀 아니타 귀터만과 재혼하게 된다. 그녀는 카라얀보다 9세 젊고 '4분의 1의 유태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라얀은 후에 이 이유로 해서 나찌당에서 탈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카라얀은 끝까지 나찌당원이었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좀 더 정확한 진실은 그가 전시중 제국의 노선에 충실히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집명령을 받게 되었다가, 국립가극장의 지휘로만 활동이 제한되어 종전까지 활동이 뜸해지는 정도다. 이 때는 바로 푸르트벵글러가 나찌 정권으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던 때인데 카라얀의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를 카라얀은 종종 와서 어디선가에서 듣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사람들이 보지 않도록 조심해 하면서. 그러므로 푸르트벵글러 역시 토스카니니 못지 않게 그에게 영향을 줬다고 할 것이다. 다만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선임자였던 푸르트벵글러와 음악 외적인 라이벌일 수 밖에 없었다.
연주:베를린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 사용판본:1987/90년 절충판,Haas 편집(1935)/1975.1.& 4.녹음/위 음원 |
카라얀은 나찌의 덕택으로 출세를 손에 넣었지만 결국 1945년 5월 독일이 패망하자 결국 나찌의 희생물이 된다. 카라얀 부부는 종전시에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감금된 상태로 지내게 된다. 아내 아니타가 통역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카라얀 자신은 스코어 (오케스트라 총보)를 공부하는 것에만 전념한다. 카라얀은 대지휘자로 변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 (Trieste)에서 전후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아 보지만 같은 해 9월 말 난민 수송차에 실려 조국 오스트리아로 보내진다. 그후 연합국측의 지휘자로서의 활동 금지 때문에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카라얀은 공중의 눈에 띄지 않는 일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뒤에서 도와주기도 했고, EMI의 프로듀서 발터 레게를---
1958년 카라얀은 모델 출신 금발의 프랑스 여성 엘리에트 무레와 세번째로 결혼한다. 무레는 카라얀에게 두 딸을 낳아주고 마지막까지 그의 아내로 남는다. 1959년부터는 카라얀/베를린 필이 DG와 레코딩 계약을 맺고 녹음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1963년에는 전쟁으로 파괴됐던 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카라얀의 입김에 의해 마치 서커스장을 연상시키는 지휘자가 가장 부각되는 모양의 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빈에서의 그의 권력은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빈이란 도시가 가지는 특수성도 있었고 카라얀의 자기 중심적인 극장운영에도 문제가 있어서 카라얀과 빈 국립가극장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 결국 8년만인 1964년 빈 국립가극장의 예술감독직을 내놓면서 조국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겠다는 선언을 한 후 빈을 떠난다. 빈을 떠난 후 카라얀은 본격적으로 레코딩및 영상물 제작에 정열을 기울인다. 레코드와 영상물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남고 싶어했던 카라얀은 스테레오 (60년대), 4채널 (70년대), 디지탈 (80년대)와 같이 음향 기술과 나란히 반복 녹음을 행하면서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연주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고향 잘츠부르크는 카라얀이 빈을 떠나자 쌍 손을 들고 그를 환영한다.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의 정열이 집중되면서 4년뒤 카라얀 자신이 모든 음악과 연출을 감독하는 자신과 베를린 필에 의한 음악제,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를 바그너의 "발퀴레"를 시작으로 탄생시킨다. 마치 바그너가 그의 작품을 위해 바이로이트 축제를 만들었듯이 카라얀은 그가 꿈꾸어오던 바그너 작품의 공연을 위해 부활제 음악제를 만든 것이다. 이는 그가 남은 여생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열심이었던 레코딩 작업들도 이 축제를 위한 자금원으로 쓰였고 레코딩은 축제가 행해지기 전에 완벽한 리허설 차원에서 공연에 앞서 행해졌다. 카라얀의 이런 선녹음 후공연의 패턴은 그후 계속된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차례차례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에 올린 카라얀은 1970년에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그 후 계속해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마이스터징거", "로엔그린"등을 다루었다. 이때가 그의 경력에 가장 높은 정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카라얀 자신의 음악제는 1976년 10주년 기념의 해에 불협화음이 불거져 나온다. 테너 르네 콜로가 카라얀과의 불화로 "로엔그린"의 주연에서 물러나게된 것이다. 르네 콜로는 이미 EMI에서 발매된 "로엔그린" 전곡반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바 있었다. 콜로는 카라얀과 예술적인 견해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견해 차이를 대화로 풀지 않고 일방적인 명령으로 처리하는 카라얀의 태도에 만족할 수 없으며 인간적인 유대 없이 노래부를 수 없다고 했다. 그후 하인리히 왕 역의 베이스 가수 카를 리더부슈 역시 음악제 참가를 거부하게 되고 이 두 가수와의 신경전에 카라얀은 3개월간 병원 신세를 질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때 위험한 척추수술도 하게 되서 이후 그의 활동은 중요한 일로만 제한됐다. 카라얀은 1977년 5월, 13년간 떠나 있던 빈의 국립가극장에서 "일 트로바토레"를 공연함으로써 화려하게 돌아온다. 그 후 카라얀은 부활제 음악제와 성령강림제 콘서트에서 베를린 필을 지휘하고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빈 필을 지휘하는 정도로만 활동범위를 줄이는데 이는 앞선 척추수술후 1978년 9월에 연습중 지휘자용 의자에서 보면대위에 발을 올려놓고 쉬고 있다가 굴러떨어져서 2개의 신경을 다치게 된 것도 큰 이유가 된다. 이후 그는 걷는 데 불편을 느끼게 된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의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 부터로 전한다. 이미 1970년대 중반에 당시 베를린 학술 평의원 슈테른이 카라얀에게 오케스트라와 잘 되어 가냐고 물었을 때 그는 "녀석들은 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답했다한다. 카라얀은 단원들에게 인자하게 대하였고 협력자로서 충분히 대우해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적이 아니라는 것이 뚜렷할 때에 한했다. 구시대 지휘자가 그러하듯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의 자율적인 결의를 존중하지 않았으며 교사가 학생을 대하듯 굴욕감을 주기도 했다한다. 결국 1982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28년의 관계를 파탄으로 이끄는 사건이 벌어진다.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당시 23세의 여류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를 카라얀이 추천했으나 베를린 필의 단원들은 이를 거부한 것이다. 더이상 카라얀에게 단원들은 동지요 협력자가 아니었으며 카라얀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된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의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결국 사태는 마이어의 채용을 1년 동안의 기간에 한해 인정한다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카라얀과 베를린 필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의 골이 생겨버렸다.
결국 만년의 카라얀은 베를린 필 보다는 빈 필과 더 많은 활동을 갖게 된다. DG에서의 만년의 녹음들은 대부분 빈 필과 행해졌으며 1985년 6월 29일에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행해진 교황 요한 바우로 2세가 집전한 미사에서 빈 필과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연주하게 되고 그가 스스로의 영상물을 위해 창설한 텔레몬드리알에 의해 녹화됨은 물론 전세계 TV로 중계되기도 했다.
1987년 1월 1일엔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의 나이 80이 되는 1988년에는 그의 아내가 음반 표지를 그린 100장의 기념음반이 DG에서 기획되기도 했다. 그해 4월엔 예정된 연주회를 최소하고 베를린 필과 함께 일본, 같은 해 10월엔 마지막 유럽 순회 공연을 떠난다. 1989년 2월에 빈 필과 함께한 미국 공연은 그의 마지막 공식 연주가 된다. 그해 7월 16일 잘츠부르크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 무도회"의 오전 리허설을 끝낸 카라얀은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카라얀의 음악 |
카라얀의 생애를 지나치게 자세히 들여다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제는 그의 음악에 대해서 얘기해볼 차례다. 카라얀은 흔히 완벽주의자로 통한다. 또한 그는 상업주의에 젖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카라얀이 인류 최고의 지휘자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혹자는 카라얀을 싫어한다고 서슴없이 밝히면서 그의 음반들을 비하하는 데 열을 올리기도 한다. 과연 어느쪽이 진실일까?
카라얀에 대한 비판은 많은 부분 그가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부를 누렸다던가, 그의 미숙한 인간관계 등에서 기인한다. 그런 선입견에서 나온 비판외에 순수하게 음악적인 면에서 그에 가해지는 비판은 두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한가지는 그의 연주에서 그 '어떤 것'이 부족함으로 인해 곡의 본질을 빗겨나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카라얀이 곡의 본질을 너무도 정확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카라얀도 만능일 수 없었기에 단순히 그의 연주가 신통찮은 경우를 말함이요, 후자의 경우는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것을 싫어하는 일부 평론가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오해에서 나온 말이다. 카라얀을 비판하는 말중에 그가 지나치게 대중의 기호에 편승했다는 지적이 있다. 일단 이 말이 맞으려면 지휘자의 기호가 대중의 기호와 흡사하다라고 고쳐져야할 것이며 무엇보다 대중의 기호는 수준 낮은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시작하고 있다. 필자 판단에는 카라얀에 어떤 비판이 가능하다면 거꾸로 카라얀이 확실히 대중의 기호에 편승하지 못하고 후기 낭만주의의 구습을 답습했던 그의 실패작들 때문일 것이다.
카라얀의 위대함은 그가 자신있어했던 곡들은 예외없이 곡의 핵심을 짚어주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카라얀 스스로가 탁월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높은 표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연주를 평가해가며 만족스러울 때까지 계속 다듬어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만 그는 위대한 '장인'이었을지언정 훌륭한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20세기 초중반의 후기 낭만파 스타일의 연주를 20세기 후반까지 그대로 계승했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새로운 해석을 창조해낸 경우는 바그너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다. 모차르트나 그보다 더 이전의 작곡가의 곡들을 정격연주로 재해석해보려는 시도들은 카라얀 스타일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의 해석은 60년대초 이후 죽기전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이 말은 그가 곡의 이상을 세워놓고 줄곳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을 더욱 갈고 다듬는데 노력했다는 뜻이다. 그가 죽고 없는 현재의 음악계를 돌아보면 여기저기에서 '혁명가'는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작품의 이상을 향해 매진해가는 카라얀과 같은 높은 식견을 가진 '장인'이 부족하기에 그의 부재가 더욱 커보인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연주들을 살펴보도록하자. 카라얀은 근본적으로 교향곡과 오페라 지휘자였다. 그가 협주곡 녹음에 인색했던 것은 협주곡의 성격상 독주자가 지휘자보다 더 부각되는 경우가 많은 데 이를 카라얀은 용납치 않았다. 협주곡 음반이 적고 있다하더라도 그의 입김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중 실내악이나 협주곡을 즐겨 들으시는 분들껜 카랴얀은 누군가의 우스개 소리처럼 "헤어스타일만 완벽한" 지휘자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모차르트 이전의 바로크 음악에도 소홀했다. 이는 단순히 그가 후기 낭만주의 전통에 바로크 음악에 대한 것을 물려받은 것이 많지 않기 때문으로 전통에 충실했던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먼저 교향곡 지휘자로서 카라얀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보자. 그의 연주중 후대 지휘자들이 넘보기 힘든 높은 경지를 보여준 곡들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 베토벤의 홀수번호 교향곡들, 브루크너의 후기 교향곡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들 정도다. 또한 카라얀 스스로 차이콥스키 교향곡에 대한 열정이 높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필자는 6번 교향곡을 베스트중에 포함시켰다. 위에서 열거한 곡들은 교향곡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곡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치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곡들이며 오케스트라의 명인예와 지휘자의 카리스마적인 통솔력이 없이는 높은 완성도를 보이기가 힘든 곡들이다. 이에 비록 카라얀의 모차르트가 혹은 그의 하이든이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들릴 지라도 그를 최고의 지휘자로 높이 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카라얀은 또한 교향곡외의 관현악곡에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그가 지휘하는 춤곡, 오페라 서곡과 간주곡들은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울만치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것이라 후배 지휘자들이 음반을 내놓기가 버거울 정도다. 이러한 곡들에선 카라얀이 곡의 재미를 완벽하게 청자에게 전달해주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음을 뚜렷히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러나 카라얀 스스로는 오페라 지휘자로 추앙받기를 더 원할 것이다. 그것도 가수들의 역할이 지휘자 못지 않게 중요한 이탈리아 오페라들 보다 - 물론 카라얀이 지휘한 훌륭한 이탈리아 오페라는 매우 많다 -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독일 오페라 지휘자로 기억되길 원할 것이다. 이는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발의 목표가 바로 바그너의 오페라들을 상연하는 것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카라얀의 바그너 오페라를 강한 개성 때문에 싫어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가 지휘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라인의 황금", "발퀴레", "로엔그린", 그리고 "파르지팔"에는 카라얀의 연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정갈함, 아름다움, 그리고 열정이 있다. 그의 바그너는 푸르트벵글러나 크나퍼츠부쉬등 선배 지휘자들의 해석에서 완벽히 벗어나있어서 교향곡이나 이탈리아 오페라 작품들의 해석이 토스카니니등의 스타일을 일부 계승하고 있다는 것과는 구별되는 업적으로 그의 바그너 오페라 작품들만으로도 카라얀은 능히 그의 이름을 불멸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Sinfonia Nr. 9 Op. 125 - Ludwig van Beethoven (Legendado) : https://youtu.be/JOaI93Ob2B4
Beethoven "Symphony No 6" Karajan : https://youtu.be/fNXCZXrlX7I
Ludwig van Beethoven 5th Symphony By Herbert Von Karajan : https://youtu.be/D-_wqx76mpc
글쓴이: 모은
첫댓글 Dvorak: Symphony No. 9, "From the New World" - Karajan, Berlin Philharmonic :
https://youtu.be/HrJ-zmg0EgI
드로르작 '신세계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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