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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마이클 조셉 잭슨(Michael Joseph Jackson, 1958년~2009년)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했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 라고 평가했다.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 “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했다. <빌리지 보이스>는 “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최고의 댄서로 평가받는 프레드 아스테어는 모타운 레코드 25주년 공연에서 잭슨의 춤을 보고 감격하여 후계자를 찾았다며 잭슨의 전화번호를 조사하여 전화를 걸었다. 잭슨의 보컬 트레이너였던 세스 릭스는 아침 식사 도중 프레드 아스테어가 전화를 했는데 마이클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병이 날 지경이었다고 회고했다. 퀸시 존스는 자신이 필요없을 정도로 잭슨은 재능이 많았으며 80, 90년대 대스타가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고 한다. 또 "마이클 잭슨은 발소리 나지 않는 고양이 같은 우아함으로 무대를 누볐고, 기록을 갱신했으며, 세계 전역에서 문화의 장벽을 무너뜨렸고 우리는 80년대에 절정기를 누렸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 하리라고 장담한다" 라고 말했다. 미국의 RIAA 회장 힐러리 로슨은 "잭슨은 현재도 미래도 영원한 팝의 황제"라고 말했다.
1984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오른 잭슨
잭슨은 활동하던 동안 뮤직비디오 예술 형태의 변형, 현대 팝 음악의 길을 닦아 놓는 등의 성과로 미디어에서 흔히 팝의 황제(King Of Pop)로 불린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작가 톰 유틀리는 2003년 잭슨을 "극도로 중요한 인물", "천재"라고 묘사했다. 잭슨의 음악과 인도주의적인 공헌은 신세대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 누구와도 비할 데 없는 수준이다.《Thriller》와 같은 음악과 뮤직비디오는 당시 비교적 새로운 채널이었던 MTV의 대중적 인식을 높이는데 기여했고, 채널의 중심을 록에서 팝 음악과 알앤비로 이동시키며 형태를 마련했다. 잭슨의 작품은 수 많은 힙합, 록, 팝, 알앤비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BET에서는 "간단하게 말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예인" 또한 "뮤직비디오의 대변혁을 일으켰고 세계에 문워크 같은 춤을 가져다줬다. 잭슨의 사운드, 스타일, 움직임, 유산은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
《올뮤직》의 스티브 휴이는 잭슨을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 깜짝 놀랄만한 댄스, 굉장한 음악적 다재다능, 순전한 스타로서의 무게감 등 차트를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가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라고 묘사했다. 1990년 《배너티 페어》에서는 연예 공연업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음악가로 잭슨을 꼽았다. 2007년 잭슨은 "음악은 나의 발산 수단이며, 세계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다. 내 음악은 영원히 남을 것이란걸 안다"고 말했다.
《VH1》에서는 2010년 잭슨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로 2위에 뽑았다.《NME》에서는 2013년 독자 대상 조사 결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 1위로 선정되었다. 《롤링스톤》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로 35위에 선정했으며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예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목격한 공연 중 최고는 마이클 잭슨이 문워크로 무대를 가로질렀을 때였습니다. 잭슨 이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엘비스 그리고 비틀즈가 있었습니다. 잭슨은 그들과 위대함을 함께 합니다." 라고 썼다.
1984년《타임》지의 음악 평론가 제이 콕스는 "잭슨은 비틀즈 이후로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가장 인기 있는 단일 현상이다. 정확히 가장 인기가 많은 흑인 가수이다"라고 썼다. 뉴욕타임즈는 "팝 음악의 세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외 모두가 있다.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 그 자체이지. 단순한 팝 뮤직이 아니다.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명 나올까 하는 가수이다. 그는 방송국들의 인종 차별 정책을 돌파하여 인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흑인 음악을 백인 관객들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에너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라고 보도했다. 2009년 AP통신은 잭슨은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정도로 항상 센세이션을 불러온 팝스타였다고 평가했으며 뉴스위크는 잭슨의 추모 특집글에서 "잭슨 이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엘비스, 비틀스가 있었지만 잭슨 이후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며 "커트 코베인도, 머라이어 캐리도, 셀린 디온도, 비욘세도, 마돈나도 잭슨의 위상을 대신할 수 없었다"라고 보도했다.
유니버설시티 하드 록 카페에 전시되어 있는 《Thriller》 플래티넘 레코드
잭슨이 죽고나서 얼마 후 2009년 6월 25일 MTV는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기념하기 위해 원래 뮤직비디오 형식을 간략하게 돌아봤다. 또한 MTV 유명인과 기타 유명 인사들의 반응을 포함한 실시간 뉴스 특별 방송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에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MTV 프로그램 방송 시간도 임시적으로 변경되었고, 잭슨의 추도식 생중계가 끝난 다음 주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2009년 7월 7일 열린 추도식에서 모타운 레코드 설립자 베리 고디는 "지금까지 없었던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라고 말했다. 2009년 12월 29일 AFI는 "6월 50세이던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계적 관심을 받았고 사후 콘서트 리허설 영화 《This Is It》는 전례없는 국제적 찬사를 받았다"라고 말하며 잭슨의 죽음을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했다. 마이클 잭슨은 미국흑인대학펀드로부터 인문학박사와 피스크대학교로부터 명예 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Bad Tour에서 잭슨
마이클 잭슨은 1980년 더 잭슨스의 멤버로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올랐고, 1984년에는 솔로 경력으로 올랐다. 잭슨은 경력 동안 월드 뮤직 어워드의 베스트 셀링 팝 남자 아티스트 오브 더 밀레니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의 아티스트 오브 더 센트리 어워드, 밤비상의 팝 아티스트 오브 더 밀레니엄 어워드를 포함해 수 많은 영예와 상을 받았다. 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입성했는데, 1997년에는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서 2001년에는 솔로 경력으로 올랐다. 이 외에 1999년 보컬 그룹 명예의 전당(잭슨 파이브의 멤버로), 200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잭슨은 13번의 그래미상(뿐만 아니라 그래미 레전드상과 그래미 평생 공로상도 수상) 수상, 26번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세기의 아티스트"와 "1980년대 아티스트" 포함) 수상하였는데 이는 그 어떤 남성 음악가보다도 많은 기록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4억장으로 추정되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중 한명이 됐다.
세계적 인기
대한민국에서는 1984년 신문 기사를 보면 "한창 인기가 절정이던 조용필의 이름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다던가. 국민학교 어린이까지도 그의 노래에 열광한다"라고 보도했다.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마이클 잭슨이 뽑혔다. 또한, 국민학교 어린이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세계적으로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링컨,레이건,에디슨에 이어 4위로 뽑혔다. 전라남도 다도해라는 먼 시골에서도 섬사람들이 청바지 차림을 하고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불렀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도 유학 시절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 선전용 동영상에다 잭슨과 라이어넬 리치가 작사/작곡한 'We Are the World'의 음을 무단으로 도용했다. 잭슨 열풍은 옆 국가인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잭슨이 '태풍 마이클' 로 불렸으며, 켄 오타케 소니 뮤직 일본 사장은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이후로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엔터테이너이며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남아있는 존재" 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에 까지도 잭슨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됐다. 1984년 이라크와 이란의 전쟁 당시 이라크에서는 '마이클 잭슨 작전'을 세워, 이란 전선을 향해 밤낮으로 쉴틈없이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트는 심리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인도에서도 잭슨의 인기는 엄청 나다. 가장 유명한 서양 아티스트로 잭슨의 인기는 인도 전 지역에 퍼져있으며 어떤 마을로 가도 사람들이 마이클 잭슨을 안다고 한다. 'Ahir Bhairab Borthakur'씨는 잭슨을 대체할 뮤지션은 없다고 말했다. 잭슨이 공연을 한번도 하지 않은 파키스탄에서도 마찬가지로,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코카콜라와 유비쿼터스 같은 존재라고 한다. 폐쇄적인 기조를 유지한 중국에서도 마이클은 많은 인기가 있었다. 45세의 한 중국인은 "80년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개방 시대를 처음 맞은 중국인들에겐 서양 문화를 상징하는 주제곡이었다."라고 말했다.
잭슨은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는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1988년 서독의 베를린 Bad Tour를 앞두고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바짝 긴장했었다는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독일은 분단국가로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자유진영인 서독과 공산진영인 동독으로 나뉘었는데 슈타지는 장벽 인근에서 열릴 잭슨의 공연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우려했다. 잭슨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면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슈타지는 고민 끝에 대형 스크린으로 잭슨의 공연을 중계하여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는 것을 막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공연이 열리는 날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다. 결국 청년들은 잭슨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장벽으로 몰려 동독의 경찰들은 이를 막기 위해 진입하는 등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한편 러시아에 대항하여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공화국의 지도자 'Salman Raduyev' 은 체첸 사람들에게 'Michael Jackson' 으로 불렸다. 체첸인들은 그가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Heal the World'의 독립투사 버전이라고 믿었다. 멕시코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하여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1만 4천명이 집결하여 잭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쉬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잭슨은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빌보드 차트
2013년 빌보드에서는 55주년 기념으로 지난 55년간 빌보드 차트를 분석한 결과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잭슨은 8번 째로 가장 상업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둔 가수로 조사됐다. 또한 빌보드 1위에 가장 많은 노래를 올린 가수 3위로 확인됐다.
언론과 루머
잭슨은 평소 팬들에게나 사람들에게 자주 타블로이드 신문을 읽지도 말 것이고 믿지도 말라고 강조했다. 정규앨범 5집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에 수록된 'Tabloid Junkie'라는 노래에서 특히 이런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는 70년대 타블로이드 언론을 통해 잭슨이 게이가 아니냐는 소문이 퍼지게 되는 원인 중 하나였고 80년대 타블로이드 언론은 잭슨을 'Wacko Jacko'로 칭하면서 잭슨의 대중적 이미지를 크게 망쳤다. 1993년 1차 성추행 사건이 터지고 나서 이들의 관계는 완전히 악화 된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이 죽고나서도 여전히 거짓된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마이클 잭슨 유산 관리원 측은 '당신들이 본 타블로이드 기사는 사실이 아니며 마이클로 이익을 얻기 위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매우 혐오한다. 팬들이 우리와 함께 마이클의 업적을 보호하는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 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CNN에서는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직접 반박했다.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기사를 생성하는 과정은 브로커가 개입돼 막대한 돈이 오고간다고 한다. 바레시라는 브로커는 필립 르마르크(1991년 잭슨의 집에서 10개월간 일했다.)에게 접근하여 10만 달러를 줄 테니 타블로이드 언론에게 잭슨이 맥컬리 컬킨의 성기를 만졌다고 말하라고 강요했다. 컬킨은 재판에서 르마르크의 주장을 부정하고 잭슨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내가 르마르크 부부와 거래를 했던 이유는 .. 그들이 받을 돈의 일부를 내게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의를 이끄는 사람이 아니에요. 잭슨이 유죄이건 무죄이건 그건 저와 상관없으며 제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죠. "
— 바레시, 1994 PBS "Frontline"
재산과 빚
잭슨은 인생에서 약 10억 달러 이상(돈의 가치를 고려한다면 현재 가치로 환산시 액수는 더 커질 것이다.) 번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잭슨의 순자산에 대한 추정은 긍정적인 3억 5천만 달러에서 부채로 인한 마이너스 2억 8500만 달러까지 그 범위가 다양하다. 마이클 잭슨의 상당한 빚 때문에 파산한 것이 아니냐 혹은 비틀즈의 판권을 판 것이 아니냐는 루머가 돌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성격
무대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고 한다. "마이클은 너무 수줍음을 타서 등을 돌리고 노래를 불렀다" 라고 시드니 루멧이 증언했으며 프로듀서 퀸시 존스도 잭슨의 내성적인 성격을 보고 걱정을 많이 했다. 2003년 비행기 승객 프로필에 잭슨에 관해 "매우 소심함" 이라고 명시된 것이 확인됐다. 1984년 백악관에 갔을 때 정부 관료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을 보고 겁이 나 화장실로 도망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또한, 마이클 잭슨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마이클은 심할 때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을 만큼 부끄러움을 탔으며 집에서 고독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마이클의 지인은 마이클이 가수를 안 했으면 사탕가게를 운영하며 골방에 박혀 늙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외모, 피부색, 성형
마이클과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 조지프 잭슨에게 가혹한 학대를 지속적으로 당했음을 주장했고, 조지프는 폭력을 했음을 인정했다. 조지프는 마이클이 잠든 밤 창실 창을 통해 공포 마스크를 착용함으로써 비명 소리를 질러 놀라게 했다. 이 후유증으로 잭슨은 납치에 대한 두려움과 악몽을 겪었다. 2003년 잭슨은 Living with Michael Jackson에서 아버지 조지프가 자신에게 큰 코(Big nose)를 가졌다고 놀렸고 그러한 얼굴은 자신의 유전자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지속적 학대로 외모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됐고 의사들은 마이클이 신체이형장애를 앓고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잭슨은 코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져 성형을 고민했지만 수술 사고를 두려워 해 망설이다 1979년 복잡한 안무 도중 코가 깨지는 사고가 발생해 이로인해 코 성형수술을 하게 된다. 성공적인 수술은 아니였고 후유증으로 자신의 경력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호흡 곤란을 앓는다. 이후 의사 스티븐 호플린을 찾아 코 성형수술을 다시 받았다. 잭슨은 자신의 자서전 'Moonwalk' 에서 2번의 코 수술과 턱에 홈을 팠다고 인정했으며 2003년 인터뷰에서도 이같은 입장을 고수했는데 10번의 성형 수술을 더 했다는 주위 증언이 있다. 친어머니인 캐서린 잭슨은 자신의 아들은 성형중독이었다고 인정했다. 갑작스런 외모 변화는 나이를 먹어감에 인한 노화 현상도 있었으며 심한 체중 감량도 요인이었다. 심할 때는 몸무게가 48kg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피부색이 변화한 이유로 흔히 언급되는 백반증은 1986년 공식적으로 진단을 받았으며, 사후 부검 결과에도 이같은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됐다. 백반증의 구체적인 발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체 인구의 1-2%가 걸리는 흔한 질병이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 자신은 탈색제를 바르지도 않았고 병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일 뿐이라며 부정했다. 1993년 잭슨의 주장 이후 피부과 의사들은 백반증에 의해 피부색이 변할 수 있지만 잭슨처럼 완전히 하얘지려면 탈색제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실제로 백반증 치료에는 백반증이 심하게 진행될 경우 완전히 하얀 피부로 착색시키는 시술이 존재한다. 마이클 잭슨의 친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2011년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의 아들은 병으로 피부가 알록달록 변하는 게 싫어 탈색제를 발랐었다고 말했다. 마이클 잭슨 사망 이후 그의 침실에서 피부 미백크림이 발견됐다. 잭슨의 피부과 주치의 아놀드 클레인은 백반증으로 고생하는 잭슨에게 자신이 탈색제를 추천했었다고 증언했다.
1988년 마이클 잭슨은 사진작가 'William Pecchi Jr'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배웠고 항상 그렇게 믿는다. 난 모든 사람들이 피부 색깔로 인해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지구상의 모든 인종을 사랑해요."
잭슨은 자신의 자서전 'Moonwalk'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젊은 시절 많은 여드름으로 인해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사람들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 했다고 한다. 이를 고치기 위해 식단을 채식으로 바꿨다고 한다.
가족 관계
아버지인 조지프 잭슨과 사이가 좋지 않다. 조지프 잭슨은 2010년 그의 아내인 캐서린 잭슨과 이혼을 했다. 이혼 이유는 조지프 잭슨이 마이클 잭슨의 유산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잭슨은 총 3명의 자식을 낳았다.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 이중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는 백반증에 걸린 듯한 사진이 보도되어 화제를 모았다. 형제들과도 문제가 많았는데 친형 저메인 잭슨이 1991년 발표한 음반 'You Said'에 수록된 곡 'Word To Badd'는 마이클 잭슨의 변화하는 외모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큰 충격과 논쟁을 불렀다. 친누나 라토야 잭슨은 플레이보이 잡지에 나오기 위하여 잭슨의 스릴러 분장을 한 뒤 누드 사진을 찍었는데 이 또한 큰 파장을 몰고왔으며 잭슨이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힘들어 할 때 거짓 증언을 함으로 잭슨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라토야는 50만 달러를 제시하면 성추행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겠다는 발언도 했다. 당시 이 거짓 증언으로 잭슨은 엄청난 분노를 토로했다고 다큐 프로그램 'The Life of an Icon' 에서 측근이 회고했다. 후 라토야 잭슨은 자신의 남편이었던 '잭 고든'의 협박으로 인해 자신은 노예같은 삶을 살았으며 어쩔 수 없이 누드 사진을 찍었고 돈을 얻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었다고 뉘우쳤다. 잭슨의 팬들에게 잭슨의 형제는 이러한 일들 때문에 크게 비난당하고 있다.
마이클과 형제들끼리의 문제는 마이클이 죽고나서도 이어지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엄청난 유산과 마이클 잭슨의 이름으로 발생하는 향후 수입 때문이다. 2002년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서 내용은 잭슨의 형제자매들에게 있어서 큰 충격과 같았다. 유서에는 자신들에게 지급하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잭슨의 유산을 담당하는 변호사를 비난하며 유서가 조작됐으니 유산집행 변호사가 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잭슨의 자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이 약물을 과다 복용하고 칼로 손목을 베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잭슨의 유가족들이 그의 소속사였던 'AEG라이브'를 상대로 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증언을 하기로 한 데 따른 중압감이라고 언론들은 추측했다.
기부
39개의 자선단체를 도와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노숙자들을 보면 내버려 둘 수 없어 차를 멈추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제공했다. 'Heal The World' 재단을 통해 전쟁 난민들을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그 외에 많은 자선콘서트에 참가하여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활동했다.
음악 스타일
잭슨은 주로 R&B와 팝, 솔, 록을 다뤘다. 그는 제임스 브라운, 다이애나 로스, 재키 윌슨, 프레드 아스테어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 가창력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윌 아이 엠에 의하면 잭슨은 5초 파트를 녹음하는데 1시간의 워밍업을 했다. 잭슨이 스스로 밝힌 바에 의하면 작곡을 할 때 악보를 쓰지 않고, 떠오르는 멜로디를 녹음한 뒤 작업한다. 대표곡인 'Billie Jean'에서 선보이는 문워크는 흑인 빈민가 소년들에게서 힌트를 얻은 것이며 'Smooth Criminal'에서 45도의 기울기를 선보이는 '린댄스'는 신발에 특정 기능을 장착하여 선보이는 것으로 특허를 취득했다. 마임 배우 마르셀 마르소는 잭슨은 타고난 마임 아티스트라고 말했다. 그의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솔로 마지막 정규 음반까지의 음악적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다. 모타운 시절에는 댄스, 소프트 락, 재즈, 발라드를 주 장르로 했지만,Off the Wall을 발매하면서, 펑크, 팝 발라드, 재즈, 소울 등의 성숙한 음악을 장르로 했다. 80 ~ 90년대에는 거기에다 R&B, 뉴 잭스 윙 적인 음악을 했으며, 2001년에 발매한 Invincible에서는 마이클 잭슨 스타일로 알려진 독특한 어번 R&B 음악에에 그가 지향하던 미래적인 사운드를 첨가했다. 잭슨은 장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악에 여러 메시지를 두고 제작했다. 'Beat it'은 싸움이 날 것 같으면 도망쳐서 화를 피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잭슨은 이 곡을 만들 때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있으면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했다고 한다. 'Man in the Mirror'는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자신부터 바뀌어야 하며 불우 이웃들을 도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Smooth Criminal'은 성폭행과 살인 같은 범죄를 환기시키고 있다. 'Bad'는 나쁜 길로 빠지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Leave Me Alone'은 자신을 향한 언론들의 공격적 보도에 그만둘 것을 권유하고 있다.
잭슨의 사회 비판적 메시지는 Dangerous 음반부터 강해졌다. 'Heal the World', 'We Are The World' 는 전쟁 반대, 화합과 자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They Don't Care About Us'는 극우주의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 기사를 담고 있다. 이 노래는 'Jew'라는 가사로 유대인 비하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잭슨은 결코 유대인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 Gone Too Soon은 에이즈로 사망한 라이언 화이트를 추모하기 위한 곡이다. 'Earth Song'은 지구환경에 대한 경고, 'Childhood'는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만든 곡이다. 'Stranger in Moscow'는 모스크바에서 고독함을 느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것이며, 'D.S'는 1993년 자신을 수사한 검사 톰 스네던을 인종차별 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Tabloid Junkie'는 자신을 공격하는 타블로이드 언론에게 분노를 표출했으며 그런 신문을 사는 것은 그들을 정당화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You are not alone'과 'Will you be there'는 사랑과 고독의 의미를 강조한다. 또한 잭슨의 노래에는 여자들이 자주 나오는데 그의 자작곡 'Billie Jean'은 잭슨 본인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한다. 잭슨의 아이를 가졌다며 협박하는 한 여자 정신병 환자 때문에 잭슨은 무척이나 두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보컬스타일
음역은 4 옥타브까지 이른다. 한편 남자답지 않게 높은 목소리는 잭슨이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목소리를 조절한다는 루머가 퍼지게 된 원인이었는데 그의 본래 목소리에 대해 잭슨의 보컬 트레이너였던 세스 릭스는 "마이클 잭슨은 아이처럼 남고 싶어 의도적으로 고음의 목소리를 냈다"라고 말했으며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잭슨은 항상 고음으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으며 라이오넬 리치는 일본 TV 프로그램에 나와 "잭슨은 자신의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늘픈 고음의 목소리를 낸다. 그는 저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2005년 재판 당시 잭슨과 함께 작업한 음악인은 "잭슨은 화를 낼 때는 중저음으로 말했다"라고 증언했다. 이같은 사실들을 토대로 할 때 마이클 잭슨은 어릴 때부터 고도의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점을 고려하면 자신의 본래 저음의 목소리를 노래를 부를 때는 고음으로 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Invincible에 수록된 '2000 Watts'는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기에 디지털 방식으로 가공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가공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불렀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성과 보컬 스타일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1971년과 1975년 사이 그의 목소리는 보이 소프라노로 높은 테너였다. 잭슨은 노래를 부를 때 특유의 딸꾹질 가창(윽-억,히히 등)을 사용하는데 이는 1973년 "It's Too Late to Change the Time" 노래로 처음 시작했으며 "Get It Togethe" 앨범에서 잘 드러난다.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은 마이클 잭슨의 보컬을 스티비 윈더와 비교했으며 잭슨의 음성에 대해 슬픔으로 물든,아름다운 테너의 목소리라고 평가했다.
마이클 잭슨은 노래를 부를 때 "Come on"의 발음을 고의적으로 "C'mon" , 'Cha'mone" , "Shamone"으로 잘못 발음한다.
뮤직비디오 및 안무
잭슨은 자신의 노래와 춤답게 뛰어난 뮤직비디오도 선보였다. 복잡한 스토리 라인과 특유의 댄스 효과 등이 돋보인다. 'Thriller' 뮤직비디오는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인 뮤직비디오로 선정돼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그의 뮤직비디오 안무는 필리핀의 한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춤을 추며 패러디 하여 5400만이라는 조회수를 기록했다."Thriller" 만화 영화인 슈렉에도 응용됐다.'Billie Jean'의 안무는 그가 존경하는 많은 댄서들의 안무를 응용하여 만들었으며,'Beat it'은 맨 처음 잭슨이 소리를 지르며 장치를 통해 관중들 위로 올라와 봉을 잡고 위험한 동작을 연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독무로 후반부는 군무로 진행된다.'Thriller'는 HIStory World Tour부터는 마술을 활용했다.'Human Nature'는 발라드로 공연마다 안무가 계속해서 바뀌었다. Dangerous World Tour때부터는 한 여성팬을 추첨하여 무대 위로 올라오게 하여 잭슨과 껴안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마틴 스콜세지와 협력하여 만든 'Bad'의 뮤직비디오는 총 19분으로 그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성적 이미지와 안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I Just Can’t Stop Lovin’ You' 에서는 잭슨은 때때로 여자의 신체 부위를 직접적으로 만지는 장면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가랑이를 잡는 특유의 행동을 보였는데 1993년 오프라 윈프리쇼에서 그런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계획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Man in the Mirror'에서는 스핀 동작이 자주 활용됐다.'Smooth criminal'의 뮤직비디오는 45도 각도로 기울어지는 춤을 선보이며 단편영화 'Moonwalk'에서도 제작돼 뛰어난 안무를 보여줬다. 'Leave Me Alone'은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단편 뮤직비디오 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여러 시상식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1991년 11월 14일 27개국에서 공개된 그의 싱글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후반부 성적인 이미지와 폭력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논란을 불러왔다. 12분 가량의 뮤직비디오인데 문제의 후반부 장면은 짤리게 됐고, 잭슨은 이에 대해 사과를 했다. 이 뮤직비디오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부분은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바뀌는 모핑 기법이 사용됐다. 안무로는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 위에서 잭슨이 몸을 흔드는 것이 화재가 됐다. 'Remember the time'은 총 9분으로 이집트에서 촬영했으며 잭슨이 가루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획기적인 시각적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In The Closet'은 잭슨의 뮤직비디오 중 가장 성적으로 도발적인 작품이다. 슈퍼 모델인 나오미 캠벨도 출연했다. Dangerous 음반의 첫번 째 트랙인 'Jam'은 잭슨의 공연에서 오프닝을 차지했으며 일명 '토스트 기법'으로 불리는 아래서 위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것은 잭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1995년 'Scream'은 700만 달러를 투자하여 제작하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이 든 뮤직비디오이다. 이로 인해 기네스북에도 등재됐으며 그래미에서도 최우수 뮤직비디오로 수상을 한다. 또한 히스토리 월드 투어에서 그의 오프닝 곡이었다. 'Earth Song'은 환경 테마를 가진 최고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줬다. 또한, 투어에서는 탱크가 동원됐고 전쟁과 관련된 스토리 텔링을 응용해서 보여준다. 'Ghost'의 뮤직비디오는 총 38분으로 가장 긴 뮤직비디오로 기네스북 기록에도 등재됐다. 'They Don't Care About Us'는 교도소에서 촬영한 것과 브라질 빈민촌에서 촬영한 것 총 두가지의 뮤직비디오가 있다. 투어에서 안무는 군인들이 경례하는 것 같은 포즈를 보여준다. 'You are not alone'은 그의 전 아내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상의를 벗은 채 함께 등장한다.
한국과의 인연
1988년 대한민국의 특정 종교가 서울에서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열기 위해 잭슨의 가족들과 접촉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그 종교는 서울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4차례 공연을 갖는 조건으로 잭슨의 형제와 부모들에게 750만 달러를 지불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형제들과 부모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제안에는 잭슨이 한국에서 한복을 입고 애국가와 한국어 노래를 몇 곡 부르는 것도 포함됐다. 잭슨은 공연을 하기 싫었지만 형제들과 부모의 끈질긴 회유 끝에 공연을 하기로 결심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애국가와 한국 가요는 부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1988년 그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은 현재 공개되어 인터넷 등에 많이 퍼져있다. 그런데 공연은 잭슨에게 지급해야 할 출연료 부족으로 무산되고 만다. 이 사실을 밝힌 그의 전기 작가 'J 랜디 타라보렐리'는 이로 인해 잭슨이 한국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생긴 것 같다며 분석했다. 실제로 잭슨의 마지막 세계투어를 했던 곳은 한국 서울과 독일 뮌헨이었다. 당시 일로 고소까지 했던 것이 80년대 한국 언론의 보도에 확인됐다.
1993년 한국에서 공연을 열기 위해 김영삼 정부에게 공연 허가 신청서를 냈지만 정부는 근검절약의 사회 분위기와 맞지 않다고 거절했다.
1996년 10월 11일 잭슨은 서울에서 첫 내한공연을 개최했다. 내한공연은 많은 진통을 겪었는데 기독교 단체들이 중심으로 뭉쳐 시민단체들과 함께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반대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비난을 쏟자 자칫하면 취소될 뻔 했다. 무산위기까지 갔으나 가까스로 공연이 성사됐다. 그러나, 반대 시위로 인해 공연은 청소년 관람 금지가 됐으며 시민단체들이 예매처를 봉쇄하여 표를 판매하지 못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로 인해 잭슨의 공연을 주관한 태원예능이 수작업으로 표를 판매했다.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이 공연은 매진에는 실패했지만 총 좌석 수의 70%를 판매했으며 총 2회 동안 76,881명의 관중들을 동원했다.
1999년에는 마이클 잭슨의 생전 마지막 해외 투어가 한국 서울에서 개최된다.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이 열렸고 이는 SBS에서 생중계를 해줬으며 최고 42.3%의 시청률을 기록한다. 잭슨은 공연 중 통일이 되면 반드시 또 다시 와서 공연을 개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사망함으로 끝내 그 약속은 지키지 못 했다.
첫댓글 본인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마이클 잭슨은 팝에 있어 세계적인 인물이었지만 그가 불렀던 음악에 대해서는 몇 곡을 빼고 별고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노래 보다는 추문이 많았던 마이클 잭슨은 죽음 마저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