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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인들이 다윗의 출전거부
삼상 29:1-5
1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2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3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4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5 그들이 춤추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니니이까 하니
삼상 29:1-5 / [블레셋 왕들에게 의심받는 다윗] 블레셋 족속이 아직도 욥바에서 가까운 해안 평원에 있는 아벡에 전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을 때였다. 이스라엘 백성도 길보아산에서 가까운 이스르엘의 샘 곁에 진을 치고 있었다. 2) 그리고 블레셋 족속의 다섯 왕들은 거기서 각 부대의 사열을 받았는데, 수백 명, 수천 명씩 열을 지어 선 블레셋 군인들이 그들 앞으로 행진을 하였다. 가드 왕 아기스의 군대와 다윗의 군인들은 그 행렬의 맨 끝에서 행진하였다. 그런데 사열받던 지휘관들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보고 3) 아기스에게 항의하였다. `도대체 저 히브리 사람들이 여기 와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아기스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저 사람 다윗이 전에는 이스라엘 왕 사울을 섬겼지만 지금은 여러 해 전부터 나를 섬기고 있소! 게다가 내게로 망명해 온 날부터 오늘까지 아무 흠 없이 나를 받들 뿐만 아니라 나 또한 그에게서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소!' 하고 해명하였다. 4) 그러나 블레셋 족속의 지휘관들은 다윗에 대하여 화를 내면서 아기스에게 이같이 주장하였다. `그 사람을 당장 돌려보내시오! 당신이 그에게 거주지로 정해 준 곳이 있으니, 당장 그리 보내시오! 그는 절대로 우리와 함께 싸움터에 나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가 우리와 함께 나가 싸운다면 그가 한창 싸움이 치열할 때에 적진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그가 우리 군인들의 머리를 잘라다가 자기 왕의 발 앞에 바치는 것보다 더 좋은 기회를 어디서 얻어 섬기던 왕과 화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5) 이미 `사울은 수천을 죽였지만 다윗은 수만을 죽였다네!' 라고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찬양받던 자가 아닙니까?'
다윗은 아기스 왕의 요청으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방백들은 다윗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1-2) 블레셋에 망명한 이후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삼상 27:8-12). 이것이 다윗에게 올무가 됐습니다. 다윗을 믿고 있던 아기스는 블레셋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다윗에게 출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의 안위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는 다윗으로서는 아기스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을지 모릅니다(삼상 28:1-2). 결국 다윗은 아기스 휘하에서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다윗에게 찾아온 위기였습니다. 이대로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경우 동족상잔의 비극과 함께 조국의 배반자, 이스라엘의 원수가 될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는 데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위기 가운데 들어가고 있는 다윗은 세상과 타협하는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3-5) 블레셋의 방백들은 전쟁에 출전하기 위해 나오는 다윗과 그의 군사들을 보고 의심하며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며, 어떤 도움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블레셋 방백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방백들 앞에 아기스가 다윗을 변호합니다. 당시 블레셋은 5개의 부족이 연합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도시 내에서는 방백들은 독자적 통치력 행사가 가능했으나 대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방백 회의의 결정에 따라야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기스가 다윗을 옹호하자 방백들이 화를 낸 것입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이스라엘에서 부르는 노래를 인용하여 다윗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삼상 21:11). 방백들은 다윗이 전쟁 중에 갑자기 돌변하여 자신들을 공격하고 사울과 화해를 도모할 것을 경계합니다. 이런 이유로 다윗이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방백들은 아기스와는 달리 다윗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아기스와 방백들의 대화를 통해 난처한 입장에 있던 다윗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명분이 생깁니다. 다윗은 이 과정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적 용 : 세상 사람들의 요구에 손해 보는 것이 두려워 순응하고 따라간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평소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영적인 준비를 합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것인가 잊지 맙시다.
어릴 적 아버지는 나에게 “오늘은 무슨 실패를 했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날 실패한 것이 없다고 하면 아버지는 실망스러워했습니다. 반대로 “오늘 이걸 못하고 말았어요.”라고 하면“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훨씬 잘했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스팽스 CEO 및 창업주 사라 블레이클리). 실패할 줄 모르고 자란 사람은 좌절 앞에 더 힘들어하고 다시 일어서길 두려워합니다. 반대로 실패가 학습된 사람은 웬만한 실패는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을 본으로 삼아 성공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29:1
본 절의 내용은 28:1, 4에 대한 또 다른 각도에서의 언급이다. 블레셋 사람들은...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 블레셋 사람들의 1차 군사 집결지는 '아벡'(Aphek)이었다. 블레셋 족속은 특별히 다섯 방백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부족 연합 성격의 정치 체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5:8), 이처럼 집결지를 정해 그곳으로 각 부족의 군사들이 총집결했던 것이다. 한편 '아벡'은 '요새'란 뜻으로, 이와 동일한 지명이 팔레스틴 여러 곳에 있다. 혹자들(Keil, Fay, Conder)은 여기 '아벡'을 잇사갈 지파에 속하는 오늘날의 '엘 아풀레'(el-Afuleh)로 추정하여, '수넴'과 멀지 않은 곳이라고 보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어쩌면 엘리 제사장 시절,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블레셋 족속에 의하여 이미 병력 집결지로 사용되었던 '에벤에셀' 근처의 '아벡'일 가능서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4:1).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 '이스르엘'(Jezreel)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림'이란 뜻인데, 헬라식 이름으로는 '에스드라엘론'(Esdraelon)이다. 이곳은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28:4), 기손 강의 영향으로 토지는 비옥하고, 길게 평원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여기의 '샘'(* , 아인)은 '이스르엘' 동남쪽 약 2.8km 지점에 있고, 길보아 산지 북쪽에 수원(水源)을 갖고 있는 우물로서, 오늘날의 '아인 잘루드'(Ain Jalud, '골리앗의 샘'이란 뜻)와 동일 지역으로 인정되고 있다(Robinson). 그런데 이 우물은 화강암 절벽에서 흘러 내려온 물에 의하여 형성된 큰 웅덩이의 모양으로 되어있다고 한다(Conder). 한편, 70인역(LXX)은 여기 '샘'을 '엔돌'(* )로 번역하고 있는데 타당성이 없다(Keil, Smith, Fay).
=====29:2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 - 여기서 '장관들'(* , 세렌)은 본서의 다른 부분에서는 '방백'으로 번역된 단어이다(5:8, 11;6:4, 12, 18;7:7). 즉 이들은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을 그들의 수도 곧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수 13:3)을 중심으로 다스리는 최고 지도자들을 가리킨다(5:1-12).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 이것은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 밑에는 천부장과 백부장이 있어서, 병력이 그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이같은 언급은, 블레셋의 군대가 병력도 많을 뿐만 아니라 제법 규모가 잡혀 있었음을 강력히 암시해 준다. 한편 여기의 '영솔하여 나아가고'(* , 오브림)는 '건너가다', '목적지를 향해 어느 곳을 통과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바르'(* )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블레셋 군대의 행진이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Davidson). 그런데 여기의 '영솔하여'는 원문에는 없는 말로서 문맥상의 의미를 보강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이다. 그렇다면 이때 블레셋의 군대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중이었을까 ? 이때 블레셋 군대는 자신들의 1차 집결지인 '아벡'<1절>을 떠나 자신들의 진(陳)칠 곳인 '수넴'<28:4>으로 가는 중이었다. 우리가 이같이 보아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나아가고'(아바르)라는 동사는 먼 거리를 진행하는 행동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며(창 33:3;민 13:32;신 29:16), (2) 다윗이 '아기스'를 제외한 다른 블레셋 방백들의 거부에 의하여 회군(回軍) 하였을 때, 그당시 그 자신이 위치했던 지점에서 '시글락'(27:6)까지 삼일만에 도착했다는 사실(30:1) 때문이다. 만일 다윗이 그당시 '수넴'(Shunem, 28:4)에 있었다면, 자신의 거주지인 시글락까지 결코 삼일만에 도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Smith). 그러나 '아벡'에서 '시글락'까지는 약 75km 정도이므로, '아벡'에서 '수넴' 쪽으로 조금 진행한 지점에서 다윗의 군사가 다시 시글락까지 회군(回軍)하는 데 삼일 걸렸다는 사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윗...아기스와 함께...나아가더니 -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다윗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던 아기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28:1). 가드 왕 아기스는 그 때 다윗을 자신의 영원한 사역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27:12). 그 뒤에서 - 다윗과 그의 일행은 아기스의 후군(後軍)이 되어 본전투에 참여하였음을 암시한다.
=====29:3
이 히브리 사람들 - 다윗과 그의 휘하 병력을 가리킨다. 여기서 블레셋 방백들이 이들을 이같이 '히브리 사람'(* , 이브림)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방백들이 이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7).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 - 아기스의 이 말은 다윗이 전에는 사울의 신하였으나 지금은 그와 원수가 되어 아기스 자신의 신하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블레셋 사람들까지도 다윗이 사울과 원수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아기스는 자신의 말이 다른 방백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나와 함께 있은지 여러 날 여러 해 - 여기서 '여러 날 여러 해'란 표현은 다윗이 충실한 신하로서 아기스 자신과 함께 오래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독특한 표현이다. 실제로 다윗이 아기스와 함께 한 기간은 '일 년 넉 달'이었다(27:7).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 이는 아기스가 그때까지, 다윗이 자신 몰래 그술, 기르스, 아말렉 등 이스라엘 적대 세력들을 침노했던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27:8, 12). 그리고 사실 다윗은 이러한 남방 민족들을 아기스 몰래 침노한 사실 이외에는 아기스에게 충성을 다하여 큰 신임을 얻었던 것 같다(Smith).
=====29:4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 이는 다윗을 두둔하는 가드 왕 아기스에 대한 블레셋 방백들의 반발이다. 즉 블레셋의 다른 네 방백들은, 아기스가 자신들의 말보다 다윗을 더 신뢰하는 데 대하여 이같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한편 여기의 '방백'(* , 사르)은 '군주', '우두머리', '지휘관' 등의 의미로서, 왕보다는 낮은 계급의 소유자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창 12:15;출 1:11;삼하 2:8). 아무튼 본절은 블레셋 방백 회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당시 블레셋에는 5인의 방백이 있었으며, 그 방백들 중에서 한 명이 블레셋 연방 체제(聯邦體制)를 대표하는 왕이 되었다(6:4, 16;수 13:3;삿 3:3). 하지만 이 왕은 절대적 왕권을 갖지 못하고 방백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따라야 했으며, 방백들의 제의를 무시하고 자의(自意)로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6:1-16). 여기서 아기스는 가드의 방백이면서 위와 같은 제한적 왕권을 지닌 블레셋의 왕이었다. 따라서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의 참전 문제에 거세게 항의하면서 아기스 왕의 뜻을 꺾고 다윗을 되돌려 보내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블레셋의 독특한 통치 체제게 기인한다. 그러나 다윗이 길보아 전투에 참전할 수 없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때문이었다. 왕이...정하신 그 처소 - 즉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식읍(食邑)으로 부여한 '시글락'(Ziklaq)을 가리킨다(27:6).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 이 말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군대가 진치고 있는 곳의 맞으편 언덕에 위치할 자신들의 진지에서, 전투를 위하여 이스라엘 군대와 자신들의 군대 사이의 계곡 혹은 들판으로 내려가는 행위를 가리킨다(Keil, Smith, Fay).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 이 말은 다윗이 막상 싸움에 임하여서는 블레셋을 배반하고 사울의 편에 서서 오히려 블레셋을 역공격하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블레셋 방백들은 이전에 믹마스에서 이스라엘과 전투할 때(13:5)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투항하였지만, 그들이 다시 블레셋에 대항했던(14:21) 뼈아픈 경험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대적'(* , 사탄)은 정관사(* , 하)와 더불어 고유 명사로 쓰일 때는 악령의 두목 '사단'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대상 21:1;욥 1:6;시 109:6;슥 3:1). 그러나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평강을 방해하는 자', 혹은 '은밀하게 대적하는 자'란 뜻이다(Hertzberg). 그가 무
사해 준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아기스가 다윗을 자신의 '영원한 사역자'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과는(27:12) 크게 대조된다.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아니하겠나이까 - 이것은 다윗이 사울과 화해하기 위하여, 즉 사울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많은 블레셋 병사들의 머리를 그에게 예물로 바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전에 다윗은 사울의 사위가 되기 위하여, 즉 사울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 이백을 그에게 바친 일이 있었다(18:27). 아무튼 블레셋 방백들의 이같은 언급은 그들이, 만일 다윗을 전쟁터로 데려가면 그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손실을 입힐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29:5
본절은, 다윗이 전에 골리앗을 꺾은 엘라 골짜기 전투(17장)에서 사울과 함께 블레셋에게 군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혔던 장본인이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언급이다(21:11). 이전에도 가드 왕 아기스는 바로 이같은 언급을 부하들로부터 전해 들음으로써, 자신에게 망명왔던 다윗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었다(21:12). 아무튼 다윗의 무공을 칭송하는 이스라엘 여인들의 이 노래는 당시의 민심(民心)이 반영된 채 이스라엘 인근 지역의 국가들 사이에도 익히 알려졌던 것 같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 18:7 주석 참조.
< 설 교 >
도우시는 하나님
삼상 29:1-5
인간의 관계를 보면 손해와 이익의 여부를 따라 형성되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뜻이 일치하여 친구가 되고 한 집단으로 형성되었다가도 그 관계 유지로 인해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주어질 것이 예상되면 가차 없이 뒤돌아서고 오히려 적이 되는 경우를 수없이 볼 수 있으며 또 우리 자신들도 그러한 모습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벗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있나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 또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결심이나 각오도 주변 여건과 상황에 의해서 얼마든지 포기해버리고 자신의 생계와 생존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믿을 수 없는 인간을 불러다가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인간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만큼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살아갈 것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믿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믿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스스로의 신실하심을 따라 일하시는 것이지 인간을 의존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주변 여건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택하여 부른 인간이 설령 불의한 행동으로 나아간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손길을 포기하거나 거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방해물일 뿐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수시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무너뜨리는 모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쇠하거나 중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으로 날마다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의지하고 소망하고 바라볼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이지 어떤 사람의 도움이나 세상의 도움을 받고 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그를 세우신 분이 계심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결코 사람을 바라볼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울에 대해 다시 살펴보면 사울은 무당의 도움을 받아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는 지금의 난국을 해결할 수 있는 도움의 말을 듣고자 합니다. 사울의 이 모습이야 말로 철저하게 사람을 의존하고 있는 불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내쳤던 무당에게까지 찾아가서 부탁의 말을 하는 이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의 법도와 말씀이 살아있는 힘과 기준이 되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불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결코 사울을 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게서도 사울의 모습은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둔 위기상황에서 무당을 찾아가고, 죽은 사무엘을 다시 불려내고자 하는 사울의 행동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최선으로 살아가기에 사울을 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택함 받은 다윗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윗 역시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울로 인하여 망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블레셋에 거짓으로 투항합니다. 그리고 아기스의 충성한 신하로 행세합니다. 결국 사울이나 다윗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블레셋 편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 노력이 오히려 자신을 위기의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29장의 내용입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다윗은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의 다윗의 모습을 본다면 다윗 역시 사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방인이며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을 의지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가까운 사람을 쳤다는 거짓말도 합니다(27:10). 분명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돕고 계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며 도울 만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자를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하여 방종으로 나아간다면 또 다른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블레셋 편이 되어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에 처한 다윗에 대한 도우심은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이 다윗을 신임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3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가로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기스는 다윗에 대해 전폭적으로 신임을 하지만 그의 방백들은 다윗을 의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에 대해 열심히 변호하였지만 방백들은 오히려 아기스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5절의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라는 말을 보면 뱅백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다윗이 혹 전투 중에 이스라엘과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군중에 출입하는 것이 나의 소견에는 좋으나 장관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6,7절)는 말로써 아기스는 다윗을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것으로 다윗은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와 갈등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돌아가라는 아기스의 말에 대해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8절)라고 말하면서 아기스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보이는 척 행합니다. 이러한 다윗에게서 예전에 골리앗을 무너뜨린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사울에게 도망쳐 다니면서 하나님을 의지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살려주는 다윗을 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각오도 다짐도 아니고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소유물도 아닌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오직 불신앙의 속성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인간을 다스리시고 고치시면서 믿음으로 행하게 하시는 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잊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신자에게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고 행하신 결과임을 고백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어던 믿음의 행위도 결코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신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믿음을 지켜온 것이 아닙니다. 우린 다만 내 자신을 위해 힘쓰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신앙의 속성은 우리를 얼마든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심으로 인해서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힘쓰고 노력하지만 사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지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말고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계획을 세우고 힘쓰고 노력한다고 해도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믿음에서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계획한 일이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신자는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단지 교회를 출석하고 있으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무엇을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위를 보지 마시고 다윗을 지키시고 도우신 분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다윗의 행함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행위를 기준 삼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짐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잊어버린 모습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잊게 하고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간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복의 자리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세력과 훼방에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의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삶에서 두려워 할 것도 두려워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뜻대로 자기 백성을 도우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갈등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 까 열심히 궁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홀로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하면서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지키시는 일을 실행에 옮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도우심이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의 반발로 인해서 자신의 고민과 갈등이 해소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더욱 더 강력히 아기스의 신실한 신하 행세를 합니다. ‘왜 돌려보내는가?’라고 거짓된 항의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철저하게 아기스 편임을 보이기를 힘쓸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 아래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어려움이 해소되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무지함을 깨우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지키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세워서 일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포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에도 하나님의 뜻은 방해받지 않고 하나하나 시행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한 도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도우시고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 아래 있는 그가 복 있는 자입니다.
다윗의 망명생활 ‘위기와 회복’
삼상29장 01절(삼상 29-30장, 봉독 29:1-11) / 곽창대목사
지난주일에 보았듯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가 내어준 시글락에서 1년 4개월을 제법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려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그의 공동체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이 이스라엘과 전쟁하려고 군사들을 아벡에 집결시키기로 했습니다(29:1). 아벡은 가드에서 북쪽으로 40km가량 떨어져 있는 샤론평원의 성읍으로서 블레셋의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때 교두보 역할을 한 곳입니다.
그때 가드의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자신과 함께 이스라엘을 치는 전쟁에 참전할 것을 명령합니다(28:1).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가야 하므로 아주 난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애매하게 답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종이 이 전쟁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지 알 것입니다(28:2 상반절).” 아기스는 다윗의 대답에 참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합니다. “그러면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시위대장)로 삼겠다.”
어쩔 수 없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출전합니다. 시글락에서 가드까지 약 40km, 가드에서 아벡까지 약 40km, 총 80km를 행군했습니다. 이틀은 꼬박 결렸을 것입니다. 부하들을 이끌고 집결지 아벡으로 행군하면서 다윗의 심사는 정말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치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이 부하들을 이끌고 자기 동족을 친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왕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기스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아기스에게 충성하는 척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국면에서 발을 뺀다면 자기 사람들의 안전과 생계는 가드로 망명하기 전보다 더 힘들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산으로 출전했다고 보입니다.
이어지는 28장의 나머지 이야기는 사울 왕과 관련된 기사인데 다음 주일에 살펴보겠습니다. 29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29장
1절: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이 자기들의 군사들을 이끌어 아벡에 집결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이스르엘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르엘은 아벡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쯤 떨어진 곳으로 길보아 산의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곧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의 전면전이 벌어질 태세입니다.
2절: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진군합니다. 수령들이 앞장서고 그들의 부하들이 뒤따랐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도 아기스의 뒤를 따라 나아갑니다.
3절: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블레셋의 방백들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이 히브리 사람들”이라는 어구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인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의 뜻과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략 유프라테스 강이나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 나라 없이 근동지역을 떠돌던 하층민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학자들을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블레셋의 방백들이 다윗의 사람들을 가리켜 “이 히브리 사람들”이라고 한 것은 경멸조의 말이었습니다. “저 히브리 사람들이 이 중대한 전쟁에 무슨 일로 참전했는가?” 즉 “저 친구들이 왜 여기에 와 있는가?”라는 뜻입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변호하여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인데 오래 전에 내게로 망명하여 와서 지금까지 내게 충성을 다하였소! 그러니 그와 그의 군사들이 금번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소!”
4-5절: 방백들이 아기스에게 노하여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돌려보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말합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우리를 배반하여 사울 편에 세게 되면 우리가 크게 곤혹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6-7절: 아기스가 다윗에게 시글락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방백들의 심기를 자극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8절: 다윗이 은근히 항변합니다. “나를 그렇게도 믿지 못하겠습니까?”
9-10절: 아기스가 다윗을 달랩니다. “나는 너를 신뢰하지만 방백들이 달리 생각하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 내일 새벽에 동이 트면 시글락으로 돌아가라.”
11절: 다윗은 마지못해서 귀환하는 양 꾸몄지만 실상은 쾌재를 올렸을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쳐서 죽여야 할 큰 위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방백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동족을 살상하는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진퇴양난에서 건져내셨습니다.
30장
1-3절: 다윗 일행이 사흘 만에 시글락으로 귀환합니다. 80km의 거리를 행군하느라 얼마나 지쳤을까요? 왕복으로 따지면, 5-6일 동안 무려 160km를 행군했으므로 지칠 대로 지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큰 위안을 삼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곤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군사들이 전쟁에 출전한 틈을 타서 비어있는 시글락에 아말렉 사람들이 침략하여 불을 지르고 가축들과 재산을 약탈해갔고 부녀자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잡혀갔습니다(5절). 얼마 전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아말렉을 침노하여 아말렉의 군사들을 죽이고 가축들과 의복을 약탈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아멜렉이 복수를 한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10여년의 세월 동안에 숱한 시련을 겪었지만 금번의 시련이 단연 최고의 시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절: 시글락이 초토화된 것을 보고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울 기력이 다할 때까지 울었습니다.
6절: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다윗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지도자의 책임은 무겁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다윗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힘입어 시련을 헤쳐 나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7-8절: 다윗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지고 오라고 했고 에봇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아말렉 군대를 추격하라. 그리하면 빼앗겼던 모든 사람들과 가축과 재산을 되찾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9-10절: 다윗의 군사 600명이 시글락에서 남쪽으로 약 24km에 위치한 브솔 시내에 이르렀을 때에 지쳐서 뒤처진 자들 200명을 거기에 머물게 하고 400명만 데리고 아멜렉의 뒤를 추격합니다.
11-15절: 그때 거의 죽어가고 있는 애굽 소년 하나를 만납니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어 기력이 회복되었을 때 다윗이 그에게 묻습니다. “네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아말렉 사람의 종인데 병이 들어 주인이 그를 버리고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소년이 며칠 전에 아말렉이 벌였던 전쟁들을 소상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아말렉의 군사들이 유다의 남방 지역들을 침노하고 시글락도 불살랐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아말렉의 군대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아말렉의 손에 넘기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16-20절: 그 소년의 인도로 아말렉의 군대를 따라잡았고 그 다음날 새벽부터 저물 때까지 아말렉의 군사들을 쳐서 거의 섬멸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겨우 400명만 도망을 쳤습니다. 빼앗겼던 모든 부녀자들과 가축과 재산을 되찾았습니다. 아말렉 군사들이 남방 지역들을 침노하여 빼앗은 전리품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대역전입니다. 전회위복입니다.
21-24절: 다윗은 전쟁에 출전한 400명만 아니라 기진하여 브솔 시내에서 머물렀던 200명에게도 전리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악한 자들과 불량배들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자들에게 전리품까지 나누어줄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셔서 아말렉을 도륙하여 처자들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전리품까지 풍성하게 얻었으므로 전리품을 똑같이 나누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전리품 분배에 관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가 되었다고 25절은 밝힙니다.
26-31절: 그렇게 분배하고도 전리품이 많이 남아서 유다의 장로들과 남방지역의 주민들에게 보냈습니다. 10년간 도피생활을 할 때 도움을 주었던 이들에게 선물을 보낸 것입니다. 선물을 보낸 지역들이 상당합니다. 벧엘, 라못, 얏달, 아로엘, 십못, 에스드모아, 라길,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 겐 사람의 성읍, 홀마, 고라산, 아닥, 헤브론 등으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곳들입니다. 여기에 열거된 지명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네겝 지역 즉 남방지역에 있는 유다 지파의 성읍들입니다. 얼마 후에 다윗은 이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옹립 받아 왕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1)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동족과 싸우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간섭하셨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하신 것입니다.
2) 아말렉을 추격하는 도중에 애굽 소년을 만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3) 아멜렉의 엄청난 대군을 도륙할 수 있었던 것도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30:16-17, 23).
다윗도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인하여 믿음과 인격이 이전보다 더 성숙해졌습니다.
1) 큰 시련 앞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2) 기진한 군사들 200명을 브솔 시내에서 쉬게 했습니다.
3) 처자들을 빨리 되찾아 와야 할 위급한 때에 죽어가고 있는 애굽의 한 소년이 회복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4) 전쟁에 출전한 군사들과 중도에 뒤처진 형제들에게 전리품을 똑같이 분배함으로써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했습니다.
5) 분배하고 남은 전리품들을 그간에 자기들에게 도움을 베풀었던 유다 지파 성읍들의 주민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선물로 보냈습니다.
이로써 다윗은 더더욱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부제는 “위기와 회복”입니다. “위기와 회복”이라는 주제를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는 대목이 30:3-6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보면서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큰 재앙은 사람을 최선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최악으로 만든다. 시글락에 닥친 재앙은 우선 사람들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광야생활 동안 이들 600명은 다윗의 지도하에서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알아보는 법을 배우고 기도하는 삶을 익혔으며 함께 구원과 섭리의 길을 따라 걸었고,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던 상태에서 서서히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로 변했다. ... 그런데 이번 아멜렉 재앙은 그들의 집과 가족뿐 아니라 그 동안 서서히 형성되어온 그들의 신앙마저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재앙은 다윗에게서 최선을 끄집어냈다. 비탄과 분노와 쓰라림이 휘몰아치고 살인 폭풍우가 몰려오는 와중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구절(30:6)을 만난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
저는 오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다윗이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전화위복의 은혜를 경험했는지, 그 회복의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세 단계를 회복의 시작, 회복의 징조, 회복의 확장이라고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1. 회복의 시작
다윗의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다윗에게로 돌렸습니다. “너 때문에, 네가 가드로 망명했기 때문에, 네가 우리를 이끌고 동족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출전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다윗은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구나. 믿었던 자들, 생사고락을 같이하겠다고 다짐했던 자들도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저렇게 변할 수 있구나. 원수처럼 포학한 자들이 될 수도 있구나.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시다! 내게 적지 않은 잘못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날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시고 늘 함께하시는구나!”
(30:6 하반절)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이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대로 번역하면 “다윗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 자신을 강하게 하였다.”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다윗이 하나님 안에서 새 힘을 얻어 일어섰다.”는 뜻입니다. 외톨이가 된 다윗을 하나님께서 품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재난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자는 다윗이었습니다.
여러분, 외톨이가 되어 봐야 하나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을 품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하나님은 실패의 때에, 위기에 때에 더 가까이 계시는구나! 결코 날 버리시거나 떠나지 않으시는구나!” 그래서 그 하나님을 힘입어 위기를 딛고 일어서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세계의 신비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체험한다면, 그 위기는 변장된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술로만 찬송하던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찬송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에 각인된 신앙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체험, 두고두고 기억하여 감사의 제목이 되는 체험입니다.
다윗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체험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30:7-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이것이 역전의 순간입니다. 다윗은 지난 1년 4개월 동안 평안한 삶에 길들여져 기도를 하지 않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다시 기도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기도하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하셨습니다(30:8 하반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참 자유자가 됩니다. 사람과 환경에 매이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확신하며 전진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전화위복의 기회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최고의 별칭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러하기에 위기를 만난 성도는 먼저 함께하시는 하나님 안으로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 품에 안겨 기도해야 합니다. 위기를 만난 가정을 살리려면 가족 중에서 내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이 나아가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위기를 만난 부부는 남편이든 아내든 한 편이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위기를 만날 때에도 누구든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성도야말로 가정과 교회를 위기에서 구출할 일꾼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시는 은혜가 회복의 기초요 시작입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사람입니다. 한 번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면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위기를 만나도 언제나 회복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우리를 회복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이 힘겹습니까? 앞이 캄캄합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품고 계신 것을 느낀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 기도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회복의 시작이 바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2. 회복의 징조
지금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아말렉 군대가 어디로 갔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앞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시가 급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추격을 중단했습니다.
1) 다윗은 지친 형제들 200명을 브솔 시내에서 쉬도록 배려했습니다(30:9-10).
왜 쉬게 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 지친 형제들을 계속 데리고 간다면 추격의 속도가 늦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친 그들이 전쟁에 참전한다고 해도 전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전쟁 중에 그들이 상해를 입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지친 그들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육신의 회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브솔 시냇가에서 휴식하게 한 것입니다. 따뜻한 배려입니다.
2) 병이 들었을 뿐 아니라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애굽 소년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30:11-12).
다윗의 군사들이 그 소년을 다윗에게로 데려왔습니다. 아말렉 사람의 종으로 병이 들어 버림을 받아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그에게 떡을 주어 먹게 했고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무화과 한 덩이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습니다. 넉넉한 자비입니다.
이처럼 배려와 자비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응답은 앞서 확인한 대로 사로잡혀 간 모든 처자식들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때 조급한 마음이 사라지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깁니다. 그게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빌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자리 잡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최선의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빌 4:8-9)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선의 생각과 행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사랑의 적극적인 실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성도는 지금 실천해야 할 사랑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곤고한 형제들의 형편을 깊이 헤아리게 됩니다. 자비를 베풀려는 넓은 마음이 생깁니다. 심지어 이방인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6.25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가득했던 부산에 무료진료기관인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평생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섬기셨던 장기려 박사님께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북에서 피난 오셔서 결혼도 안 하시고 평생 가난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돌보시며 사랑의 인술을 펴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장 박사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제가 고상해서 그리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잘 보살피면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하나님께서 그 누구를 통하여 잘 돌보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회복이 시작되면 회복의 징조들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나타난 회복의 징조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자비와 긍휼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가족들과 이웃을 향한 연민의 정이 꿈틀거리고 있습니까?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이 여간 버겁지 않은데도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무척 안쓰러워 마음이 아픕니까? 그래서 그 이웃을 향해 무엇이라도 하려고 애씁니까? 조그마한 사랑을 안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영적으로 회복되고 있다고 믿어도 좋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품지 않고는 회복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회복하고 있다면 반드시 이웃의 고통에 동참합니다. 그 이웃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경감되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사랑을 기꺼이 베풉니다. 그게 영적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확실한 징조입니다. 지금 자신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3. 회복의 확장
이미 살펴본 대로(30:17-20) 다윗과 그의 사람들 400명이 아말렉 군사들을 거의 섬멸했습니다. 처자들과 소유물 전부를 되찾았습니다. 아말렉의 소유물까지 전리품으로 수거했습니다. 그로써 다윗은 다시 지도력을 회복했습니다.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고 브솔 시내에 머물러있던 형제들에게도 전리품을 똑같이 분배했습니다(30:21-25). 앞서 말씀드렸지만 다윗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를 파기하고 새로운 관례를 세웠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30:21을 보면, 브솔 시내에서 휴식하고 있던 200명의 형제들이 다윗과 400명의 군사들을 영접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아말렉을 추격한 형제들이 승전보를 갖고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참전하지 못한 것, 못내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후방에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며 기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그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200명의 형제들이 몸으로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참전했다고 다윗이 본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 정신입니다. 다윗의 주된 관심은 잃었던 처자들과 재물을 찾아오는 것보다도 그의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하고 감사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참된 회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리품을 똑같이 분배했습니다. 전방에서 전쟁을 수행한 자들이나 후방에서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한 자들 모두가 승리를 위해 함께 수고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전리품을 똑같이 분배함으로써 자기 사람들로 하여금 한 단계 더 성숙한 공동체로 발돋움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통합의 지도력입니다. 그래야 다윗의 공동체가 앞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통합하는 기초공동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전리품을 유다지파의 형제들에게도 보냈습니다(30:26-31). 그러면서 다윗은 선포했습니다(26절).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그렇게 함으로써 유다 성읍들에까지 다윗의 지도력이 확대되었습니다. 선물을 받은 유다지파의 사람들은 다윗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소망했을 것입니다.
큰 위기로 인하여 다윗은 물론 다윗의 공동체 전체가 와해될 뻔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한 사람 다윗에게서부터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회복이 다윗의 공동체를 회복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로 그 회복이 확장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회복의 시작, 회복의 징조, 회복의 확장에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회복의 단계로 나아가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섬세한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이 같은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위기를 만난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세계의 회복은 대부분의 경우, 한 사람의 회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의 회복에서부터 다윗의 공동체가 회복되었고 그로써 이스라엘 전체가 회복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이 회심함으로써, 즉 영적으로 회복함으로써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들로 인하여 세상이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속의 역사요 교회의 역사입니다.
2년 넘게 코로나로 인하여 세계가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여파로 전 세계의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전반에 성한 곳이 별 없습니다. 교회의 활동과 선교사역도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어하는 성도들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다음세대들의 믿음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사업도 버티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정경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총체적인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인생살이에서 위기가 아닌 때가 있었습니까? 늘 위기의 연속입니다. 문제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위기의 극복은 내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성도들에게 이미 부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은혜의 비를 맞지 않으려고 우산을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내 힘으로 내 지혜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걸 자신의 자존심으로 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우리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주 안타까워하십니다. “왜 나의 도움을 거절하느냐? 네 속에 있는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느냐? 너와 함께하고 있는 나를 왜 외면하느냐?”
여러분,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지혜로운 길은 다윗처럼 함께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가정과 기업과 교회와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함으로써 회복의 은혜를 누리고 나누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끝) 찬송 391장
요약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자신과 함께 이스라엘을 치는 전쟁에 참전할 것을 명령합니다(28:1).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치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아기스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군대가 아벡에 집결하여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진군할 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도 아기스를 따라 나아갑니다(29:1~2). 그런데 방백들의 거센 반대로 인해 다윗이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갑니다(29:3~10). 하나님께서 블레셋 방백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동족을 살상하는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 일행이 시글락으로 귀환하자, 시글락에 아말렉 사람들이 침략하여 가축들과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사로잡아간 광경을 목격합니다. 다윗의 두 아내도 잡혀갔습니다(30:1~5).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책임을 물으며 다윗을 돌로 치려 하자, 다윗이 제사장 아비아달의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추격하라고 말씀하십니다(30:6~8). 추격하던 중에 만난 애굽 소년의 도움을 얻어 아말렉의 군대를 쳐서 거의 섬멸하고 빼앗겼던 모든 것들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전리품까지 얻게 됩니다(30:9~20). 일행들에게 전리품들을 분배하고도 많이 남아서 10년간 도피생활을 할 때 도움을 주었던 이들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그러고 얼마 후에 다윗은 이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옹립 받아 왕이 됩니다(30:21~31).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동족과 싸우지 않게 되었고 애굽 소년을 만나 아말렉을 추격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멜렉의 엄청난 대군을 도륙할 수 있었던 것도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30:16~17, 23).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인하여 믿음과 인격이 이전보다 더 성숙해졌고, 이로써 더더욱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되어갔습니다.
다윗이 절체절명의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전화위복의 은혜를 경험했는지, 그 회복의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1) 회복의 시작: 다윗의 사람들이 모든 책임을 다윗에게로 돌렸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30:6~8). 이것이 역전의 순간입니다. 기도하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하셨습니다(30:8).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확신하며 전진합니다. 이처럼 위기를 만난 성도는 먼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야말로 가정과 교회를 위기에서 구출할 일꾼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합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성도는 위기를 만나도 언제나 회복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이 힘겨우실 때 기도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회복의 징조: 다윗은 지친 형제들 200명을 브솔 시내에서 쉬도록 배려했습니다(30:9~10).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애굽 소년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30:11~12). 이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로잡혀 간 모든 처자식들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응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때 조급한 마음이 사라지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깁니다. 그게 하나님의 평강입니다(빌 4:6~9).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성도는 지금 실천해야 할 사랑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자비를 베풀려는 넓은 마음이 생깁니다. 영적으로 회복이 시작되면 회복의 징조들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다윗에게 나타난 회복의 징조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자비와 긍휼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이었습니다. 영적으로 회복하고 있다면 이웃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경감되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사랑을 기꺼이 베풉니다. 그게 영적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확실한 징조입니다.
3) 회복의 확장: 브솔 시내에서 휴식하고 있던 형제들이 다윗과 400명의 군사들을 영접합니다(30:21). 그들은 함께 참전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며 기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읽은 다윗은 전리품을 똑같이 분배합니다. 전방에서 전쟁을 수행한 자들이나 후방에서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한 자들 모두가 승리를 위해 함께 수고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전리품을 똑같이 분배함으로써 자기 사람들을 한 단계 더 성숙한 공동체로 발돋움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리품을 유다지파의 형제들에게도 보냄으써 유다 성읍들에까지 다윗의 지도력이 확대되었습니다(30:26~31).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한 사람 다윗에게서부터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복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난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세계의 회복은 대부분의 경우, 한 사람의 회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는 늘 위기의 연속입니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이미 부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내 힘으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다윗처럼 함께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가정과 기업과 교회와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함으로써 회복의 은혜를 누리고 나누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곤경에 빠진 다윗
양인국목사 / 삼상 29:1-11.
1. 오늘 본문은 다윗이 잘못된 결정으로 인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곤경에 빠졌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곤경에서 벗어난 내용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교훈 받을 수 있고, 또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은혜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큰 곤경에 처해 있던 것처럼 다윗도 동일한 전쟁으로 인하여 곤경에 빠져 있었다.
사울은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하여 크게 두려워했고 이 두려움에서 자유하기 위하여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지만 그의 불길한 신탁으로 인하여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동일한 때 다윗도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블레셋의 가드왕 아기스는 자신에게 정치적 망명을 한 다윗을 신임하여 이스라엘을 침략하려는 전쟁에 그를 참여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이 이 전쟁에 참여하여 이스라엘과 싸운다면 한다면 그것은 자기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가 되고, 아기스의 명을 거역하여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받아준 아기스를 배신하는 행위가 되었다. 물론 다윗이 아기스를 배반한다면 그는 더 이상 블레셋에 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까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은 때 다윗이 직면한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를 찾는다면 그것은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는 말일 것이다.
다윗이 이와 같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현실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릇된 결정을 했다. 다음은 다윗이 그릇 결정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삼상27:1,2)” 언급한 것처럼 다윗은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블레셋 땅으로 가서 가드왕 아기스에게 자신을 의탁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면 정치적 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으로서 특히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은 받은 자로서 이와 같이 결정 한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다윗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가운데 거했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지켜 주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윗이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고 있었을 때 사울에게 쫓기어 여러 번 위기에 처한 일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고통스러울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전에 대한 보장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현실은 언제나 우리에게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이와 같은 현실에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은 더 나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고 있을 때 사울의 추격으로 인하여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던 것처럼, 보다 나은 환경을 택하여 블레셋으로 피해갔을 때도 고통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다만 환경에 따라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의 양상만 다를 뿐이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은 안다면 다윗처럼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범한 어리석음이란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더 나은 환경을 택함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현실적인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더 나은 환경이 우리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곳에서 하나님을 안전에 대한 보장으로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의 말씀이 없는 한 어떤 결정을 하든지 이 원칙에 따라 결정한다면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이처럼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처지에서 동일한 전쟁에 직면하여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신 사울은 넘어졌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다윗은 곤경으로부터 구원 받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넘어짐과 일어섬은 전적으로 은혜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위기에 직면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3절의 말씀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 군사들을 점검할 때 블레셋의 방백들은 다윗이 아기스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다윗이 아기스와 함께 있는 것에 대하여 아기스에게 강력하게 이의(異意)를 제기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전장(戰場)에서 다윗의 마음이 변하여 블레셋을 배반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기스는 다윗을 신임하여 방백들에게 그를 위하여 변명해 주었지만 그들의 반대가 너무 커서 결국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29:7,8). 여기 “그가 나와 함께 있은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라는 말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의 아기스에게 망명해 있는 동안 아기스에 대하여 성실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아기스는 블레셋 방백들에게 거절당한 다윗을 위로해 주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윗이 아기스에게 사정해도 소용없을 일을 오히려 아기스가 다윗을 위로해 주게 하심으로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불가능하게 보이는 문제조차 모두에게 선이 되도록 해결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여기 우리가 잠시 주목해 보아야 할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아기스가 다윗에 대하여 증거한 말이다. 그의 말을 생각해 보면 다윗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사람,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기스는 비록 다윗이 적국으로부터 망명해 온 장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했던 것이다(27:12). 다윗이 이처럼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흠 없는 삶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다윗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하여도 그로부터 흠을 찾을 수 없었다. 다윗의 이와 같은 삶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은 열매였다. 그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또한 하나님의 기쁘심을 위해 행하기를 원했다. 이처럼 신앙이 인격화 된 다윗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했다.
하나님은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를 통하여 다윗을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해 주셨다.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구원하심이 없었다면 다윗은 일생 동안 치유할 수없는 큰 상처를 입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여 블레셋을 위하여 이스라엘과 싸웠다면 민족에 대하여 배반자가 되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그는 결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레셋을 배반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웠다고 할지라도 상처 받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고난 중에 자신을 보호해 주고 신뢰해 준 사람을 배신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와 같은 처지와 환경을 아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해 주신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 넣기 원하는 것이 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세상 어느 곳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은 낙원이 아니고 고난의 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안전을 구하려하는 순간부터 오히려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이다. 우리의 안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삶의 여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안전이 보장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쉬운 길을 택하지 않을 것이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할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안전임을 믿는 믿음과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있어서는 안 될 자리
삼상 29장 1~5절 / 김진홍목사
들어가는 말
오랜만에 ‘사무엘상’의 말씀을 다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사무엘상 28장을 마치고 한참 쉬었습니다.
오늘 읽은 삼상29장은 설교하기 어려운 본문입니다.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메시지를 발견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저도 지난 한 주간 동안 본문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떨어진 문짝을 수선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두면,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두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부담 없이 거기다가 쓰레기를 버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휴지도 버리고, 양심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집의 쓰레기도 내다 버릴 것입니다.
쓰레기가 모여 쓰레기더미가 될 것이고, 이내 그 집은 폐가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요?
작은 부분을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마찬가지로 영적인 문제도 작은 부분을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다루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이 바로 그런 지경에 처했습니다.
1.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기다 못해 적국인 블레셋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망명이지요.
삼상27장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삼상27:1-2절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분위기를 보십시오.
다윗은 블레셋 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아주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십시오.
삼상29장에 이르러 블레셋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아벡’이란 곳에 모여 진을 쳤고, 이스라엘 군대는 ‘이스르엘의 샘’ 곁에 진을 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일행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처신을 했습니까?
2절을 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이 말씀은 다윗이 동족 이스라엘을 치는 전쟁에 블레셋 왕 아기스와 함께 출병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블레셋에 망명하여 아기스 왕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서 다윗은 아기스 왕의 출정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어쩔 수 없는 입장은 ‘그 뒤에서’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납니다.
즉 ‘그 뒤에서’라는 말씀은 출병하는 다윗의 실제적인 대열의 위치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동족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그의 불편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제 꼼짝없이 전쟁에 나가 자기 동족의 원수가 될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만약 이때 다윗이 참전을 거부하게 되면, 아기스 왕의 의심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기스 왕이 다윗을 참전시키려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① 다윗을 전쟁에 참전시킴으로 블레셋의 군사력을 보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② 다윗과 싸우는 이스라엘 군사들은 상대적으로 사기가 꺾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③ 차제에 다윗을 고국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게 함으로써 완전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을 것입니다.
노련한 정치가의 정치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그 때 다윗이 출정하여 동족을 죽였다면,
① 그는 영원히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② 그렇게 된다면 그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여 기름 부은 자입니다.
그러한 그가 동족 이스라엘을 상대로 싸우기 위하여 출정합니다.
어쩌다 다윗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2. 왜 다윗은 이런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적국인 블레셋으로 피난 간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일이 그렇게 큰 올무가 될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한 시절 조용히 블레셋에 있다가 세월이 좋아지면 고국에 돌아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작은 일에 신중했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가서는 안 될 길로 갔던 것입니다.
다윗은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가드 왕 아기스의 참전요구를 거절할 명분이나 방법이 다윗에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져서 스스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블레셋 방백들로 하여금 다윗의 참전을 반대하게끔 역사하심으로써 그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블레셋은 다섯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부족 연합 국가였습니다.
부족을 다스리는 방백들은 블레셋 왕 아기스보다는 적었지만 그에 상응할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 블레셋 방백들은 다윗의 군사들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데리고 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터에서 다윗은 그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도와 자신들을 배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배반하여 이스라엘 군사들과 협공한다면 블레셋은 큰 난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4절 “블레셋 사람의 뱅백들이 그(아기스 왕)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이것이 본문 내용입니다.
저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주목하게 된 것은 다윗의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장에 나가지 않으면 죽게 되고, 전장에 나가면 자기 민족과 원수가 되고.......
다윗은 어쩌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3. 우리도 이런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거라사인의 땅의 귀신들린 사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배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그 무덤지역에 짐승처럼 보이는 한 귀신들린 남자가 예수님을 보고는 허공에 주먹질을 하면서 발광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너무도 비참합니다.
막5:3-5절입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예수님은 그 귀신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귀신 이름이 ‘군대’라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장가 못 가고 죽은 오촌당숙이다’라든가, ‘시집 못 가고 죽은 처조카이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럴듯한데…….
그러면 ‘군대’라고 대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희랍어로 ‘Region’(레기온)인데, 로마 군인이 6,000명이 있을 때의 군대 단위입니다.
로마군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위입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군대귀신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생각을 깊이해보세요.
그렇게 많은 귀신이 한순간에 다 들어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 둘씩 아주 작게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영적인 문제가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아주 작은 영적인 문제가 한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릴 수도 있음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작게 시작된 문제가 이와 같이 얼마든지 커질 수 있습니다.
작은 문제를 소홀히 다루지 마십시오.
아주 작은 섭섭한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아주 작은 미움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아주 작은 불만족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아주 작은 욕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아주 작은 게으름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단 한 번의 발걸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낭패를 당합니다.
그래서 극복하고 싶은 의지는 있지만, 잘못됐음을 아는 지성은 있지만, 후회하는 감정은 있지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끌려가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4. 왜 작은 일이 이렇게 큰 일이 되어 난처한 상황을 맞게 됩니까?
그것은 사탄이 배후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분노, 두려움, 미움, 섭섭함, 원망과 같은 상한 감정을 이용하여 우리를 공격합니다.
사탄이 이런 문제들에 기생(寄生)해서 우리의 인격과 성품을 틀어지게 만들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엡 4:26-27절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이 말씀은 사탄이 어떻게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틈을 주지 말라.’에서 ‘틈’이라는 명사는 헬라어 ‘토포스’인데, 이는 ‘어떤 모임에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분을 품고 있으면 사탄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러한 틈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방에 음식 찌꺼기를 치우지 않으면 하루는 그런대로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음식냄새 때문에 바퀴벌레가 낍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한두 마리가 들락날락합니다.
나중에 보면 그 자리가 바퀴벌레의 아지트가 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가 분을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상처받은 마음을 품고 있으면 이것이 사탄이 들어오는 통로와 거점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이 되지만 나중에는 점점 커져서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의 문제, 상처들, 익숙해진 나쁜 생각들, 고질적인 습관들을 가볍게 보거나 쉽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지만 속에 있는 문제들을 뿌리 채 뽑지 않으면 다시 죄에 넘어지고 사탄에게 휘둘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만이 사탄을 멸하여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사탄의 권세는 예수님의 권세로만 깨집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행10:38절은, 예수님의 사역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막 6:7) 이러한 권세를 12제자에게만 특별하게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견고한 진(陳)과 같은 사탄의 세력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철장권세를 가지고 깨어질 때까지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그것들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한 세력을 물리치십시오.
섭섭한 마음이 들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원망이 생길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욕망이 일어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게을러 질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이기심이 발동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다윗은 작은 일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 결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작은 일을 가볍게 보거나 소홀히 여기지 맙시다.
작은 일에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마음속에 사탄의 아지트가 보이거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깨뜨리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다윗의 위기, 하나님의 해결하심
삼상 29:1-11 / 더온누리교회
블레셋이 모든 군대를 아벡에 집결 시켰다. 다윗도 가드 왕 아기스와 함께 전장으로 출정한다. 대부분의 블레셋 장군들은 다윗을 의심하고 아기스는 할 수 없이 전장에서 다윗을 물러나게 한다. 본문의 이야기는 28:1-2과 연결되는 것으로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는 이야기가 중간에 삽입된 것이다. 28:1-2은 다윗의 위기를 보여주고, 28:3-25은 사울의 위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어지는 29-30장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의 형통함을 보여주고 31장은 사울에게 임한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예언의 성취를 보여준다.
사무엘서의 중요한 주제중 하나는 다윗 왕권의 정당성이다. 사무엘서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윗에게는 사울의 죽음에 조금의 책임도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렇기에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에는 참여해서는 안 됐다. 다윗은 사울과 싸우지 말아야 하며, 사울의 원수인 블레셋 편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다윗은 아기스의 부하로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군대로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블레셋 장군들의 반대로 인해 다윗은 자연스렙게 전장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본문의 이야기는 블레셋이 이스라엘 치기 위해 “아벡”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대항하기 위해 이스르엘 샘 곁에 진을 친다. 블레셋은 삼상 4장에 기록된 엘리제사장이 죽게 되는 전쟁도 ‘아벡’에 진을 쳤다. 기막힌 우연인지 이스라엘 대패가 동일한 장소에서 반복 된다. 엘리의 마지막 전투는 그 아들들과 함께 죽고 법궤가 탈취 당해 아스돗의 우상신전에 전시 되었다. 사울의 마지막 전투도 역시 그 아들들이 함께 전사하고 그의 시체는 벧산의 우상 신전으로 끌려가 전시 되었다. 우연치고는 기막히다.
*한편 하나님의 세밀하신 인도하심이 놀랍다! 사실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망명할 때부터 예상되었던 어려움일 수도 있었다. 블레셋 땅으로의 망명은 언제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블레셋으로 참전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다윗은 이를 피하기위해 남방 경계인 시글락으로 따로 거주하기는 했지만, 남방 경계를 확립한 다윗의 탁월한 전과에 아기스는 매우 만족해 하며 함께 출정을 명령한 것이다. 사울을 피하기 위한 자기 꾀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의 함정으로 내몰았다.
*그런데, 가드왕 아기스와 함께 올라온 다윗을 알아본 장군들은 하나같이 함께 싸우는 것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아기스는 끝까지 다윗을 신뢰하였다. 블레셋 진영에서 때 아닌 불신과 신뢰의 절묘한 줄다리기가 일어났다. 블레셋 대부분의 장군들은 다윗을 향해 불신을… 아기스는 굳건한 신뢰를 주었다.
*진퇴양난의 당혹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기막힌 조정하심에 의해 다윗은 위기의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살다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말끔하게 해결해주시며 나를 위기 가운데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기막힌 상황이다.
*믿음을 저버리자니 양심이 뼈아프고, 믿음으로 살자니 고통이 따를 것이 뻔한 상황을 직면할 때, 출구가 보이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견딜 때, 예측 못할 방법으로 나를 구해주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아내도록 반드시 도와 주신다. 살다 보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때에 처할 때가 있다. 지금 다윗이 딱 그 형국이다. 가드 왕 아기스에게 자기의 공동체를 의탁한지 1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블레셋 남쪽 경계를 책임지면서 아기스의 신임을 듬뿍 받았다. 그렇기에 아기스가 다윗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 시킨 것이다. 하지만 블레셋의 장군들은 이를 결사 반대한다. 이 때문에 아기스는 어쩔 수 없이 다윗을 전선에서 배제 시켰다. 다윗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블레셋 장군들의 반대가 반가웠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간섭임에 틀림없다.
*자기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동족과의 전쟁에서 배제되도록 역사 하셨다. 만일 다윗이 이 명분 없는 전쟁에 참전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울이 전사했기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테지만, 다윗의 통치 정당성은 크게 흔들렸을 터이다. 그래서 블레셋 장군들의 격한 반대가 반갑다.
*하나님은 불의에 편승하는 것을 막아주시고, 억지로 악에 가담하는 것에서 건져 주신다. 또한 블레셋의 땅에서 안주하는 것을 격정적으로 흔드셨다. 다윗이 머물 곳은 블레셋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할당 받은 시글락은 본래 유다 땅이 되어야 했지만 실제로 블레셋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다윗이 그곳을 관할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다윗의 시글락에서 유다의 적들을 약탈하여 일부를 유다의 성읍에 보냈다. 이렇게 의적(?) 생활을 하며 얼마든지 시글락에 정착할 수 있겠지만, 다윗은 시글락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할 왕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글락에 잠시 머무는 다윗의 등을 떠밀어 다시 유다 땅으로 들어오게 하신다. 그 첫 단추가 아기스의 용병으로 블레셋의 군대에 편제 되어 이스라엘과의 전장에 참여하게 하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과 싸우거나, 블레셋을 배신해야 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은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전혀 다른 길을 열어 주셨다. 더 이상 블레셋의 눈을 속일 수 없는 다윗을 블레셋의 장군들이 경계하고 전장에서 배제 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문한 것이다. 아기스는 어쩔 수 없이 다윗의 군대를 전장에서 물린다.
*하나님께서는 시글락에서 타성에 젖을 수 있는 다윗을 흔드신다. 다윗 그가 가야 할 길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일깨우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분명한 사명의 길을 벗어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결코 이런 일들이 쉽게 일어나서는 곤란하지만, 혹시 이러한 이도 저도 아닌 길에 빠져 방황하는 이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르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예민한 촉을 늘 세워 놓아야 할 것이다. 지금 있는 땅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땅이 아닌 내가 원하는 땅일 수록 하나님의 손길이 바삐 움직이실 것이다. 블레셋 땅에서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다윗의 공동체를 옮기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삐 움직이는 것 처럼 말이다.
**주님, 끝까지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신비로운 인도하심을 허락하신 줄 믿습니다.
**주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서 있겠습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이곳에서 안주하는 것을 경계하겠습니다.
출전에 빠지게 된 다윗
삼상 29:1-5 / 좋은 군사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몸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피생활이 너무길어지게 됨으로 할 수 없이 블레셋으로 망명하여 블레셋 왕 아기스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글락 변방에 거주하면서 자신은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약탈하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아기스를 속이며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기스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준비하며 다윗에게 그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구 했습니다.
다윗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의 사울왕은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을 알고 당황하고 두려워 하나님께 물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당을 찾아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죽게 될 것을 알고 낙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전쟁은 시작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싸우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기스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그 뒤에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기스가 다윗을 대동하여 전쟁에 나오는 것을 보고 블레셋의 방백들이 말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기스는 방백들에게 말했습니다
저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했다 이는 이제 내 사람이다.
그러자 블레셋 방백들은 다윗은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합니다. 만일 변심이라도 하면 어떻게 됩니까?
다윗이 우리들을 치고 우리들의 머리로 사울과 화합 할 것이 아닙니까? 다윗이 누구입니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닙니까 하며 다윗이 전쟁에 동참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이 말은 지금 다윗은 사울의 미움으로 망명해 와 있는 상태지만 전쟁이 일어나 다윗이 사울과 화해하려고 배반하며 우리들의 머리를 밸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블레셋 방백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다윗이 사울에 대한 충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윗을 시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큰 공을 세우기라도 한다면 다윗이 아기스의 총애를 받고 자기들이 다윗의 밑에 들어갈 수 도 있다는 우려와 시기심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자기들과 함께 출전하여 배반해도 문제가 되고 배반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이겨도 자기들에게는 득이 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한 것입니다.
6-7절
6.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7.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
블레셋의 방백들이 다윗의 전쟁 참여를 결사적인 반대로 인해 블레셋왕 아기스는 한발 물러나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믿을 수 있고 이번 전쟁에 공을 세우고 나의 최고 시위대장으로 삼고 십은데 수령들이 믿지 못하고 좋아하지 않으니 수령들과 괜한 마찰을 일을 킬 필요가 없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기스가 방백들의 반발 이유로 다윗의 출전을 제외 시키겠다고 하였습니다.
8-11절
8.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9.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10.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과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하니라
11.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
이같이 블레셋 방백들의 전쟁 참여를 반대하는 일은 자기 민족의 대적이 되어 싸워야 하는 다윗에게는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자기 동족을 죽여야 하는 할 수 도 없고 안 한다고도 할 수 없는 전쟁인데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의 곤란한 입장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다행스러운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좋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무슨 이유로 전쟁에서 빠져야 되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기스는 다윗에게 블레셋 방백들이 반대하니까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과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못이기는 척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동족을 죽이는 전쟁에서 빠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곤란한 자리에 있는 다윗을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잠16: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의 출전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다윗의 입장을 배려하여 출전을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윗이 출전하게 되어 자기들 말대로 배반해도 문제가 되고 배반하지 않고 공을 세워도 자기들에게 이익이 될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의 이해 관계를 계산하여 반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반대는 다윗으로 전쟁에서 빠지게 함으로 다윗에게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길 수도 있는 곤난한 자리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 동한 다윗은 온랜 세월을 잘 참고 믿음으로 겯디며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다윗도 마지막 한 순간에 절망감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으로 블레셋에 망명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곤란한 일들을 격어야 했고 자기 동족을 해하는 일을 하지 않고 아기스의 눈치를 보며 거짓말을 하면서 불안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생활에서 다윗은 찬송과 기도와 감사가 없는 힘든 생활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불안한 생활에서 벗어날 뾰족한 방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동족을 쳐야 하는 전쟁에 본의 아니게 참예 하지 않으면 않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중심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그 중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전쟁이 참여하게 되었다면 블레셋 방백들의 말대로 배신하여 사울을 도왔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일시적인 화해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울은 여전히 다윗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에 대한 심판을 이미 정하셨고 다윗에게는 자기 민족을 치는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막아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방백들의 의심과 시기심 그리고 이해관계를 따지는 그들이 악한 생각을 통해 다윗으로 그 전쟁에서 빠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윗의 문제를 선한 방향으로 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 권력에만 집착한 사울에게는 하나님은 응답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 무당을 찾아간 사울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이 사울의 심판과 다윗의 구원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회개의 기회를 계속 거부함으로 믿음을 다 소멸함으로 사단에게 돌아가 심판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지막 한순간에 인간적인 잘못된 판단으로 난감한 자리에 빠지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오점을 남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일들이 종 종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을 보아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는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믿음으로 나가다가 어떠한 위기의 상황이 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 모든 일을 선하게 해결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될 사람으로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의로와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요
실수함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피할 길은 주심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윗이 그렇게 된 것은 그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끝가지 견딜 수 있는 강한 믿음이라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물론 다윗의 믿음은 큰 믿음이었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치는 큰 믿음이었고 10여년 세월의 도피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을 지킨 큰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한순간 블레셋으로 망명을 선택하는 나약함을 보이고 마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중심에 결코 하나님을 배반할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불씨를 가지고 있는 다윗을 실수 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마10:22절에 우리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마지막 시대에 어떠한 핍박과 박해를 받아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약해지지 않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자기생 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것 같이 믿음을 지키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막13:2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나중까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가 구원을 받는데 우리들의 믿음은 항상 강하고 담대 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불의 제단을 쌓고 바알 선지자를 850명을 무찌르는 승리를 하는 믿음의 사람이요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엘리야도 낙심하고 두려움에 뻐져 죽기를 구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얼마나 담대하게 믿음을 지켰습니까
그러나 그는 한순간 낙심하게 됨으로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실수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우리의 결심이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긴 세월 고난과 어려움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의 믿음의 열정은 소진될 수 밖에 없고 지쳐 넘어지고 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중까지 믿음을 지키는 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과 보호하심의 손길이 없다면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 받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음의 열정이 소진되어 낙심되고 연약함 속에 넘어지는 실수가 있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택한 사람을 위해 그 고난의 날들을 감해주심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고난의 때를 감해주시는 은혜와 도우심으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빠질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긍휼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충성되게 사는 것도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요 내가 의롭게 살은 것도 우리가 의로와서 의롭게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가 아무리 온전해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온전한 의에 이를 수 없고 우리들의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온전한 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감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때문에 죄에 빠지지 않고 의롭게 살 수 있고 마지막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우리 성도들은 이 사실을 바로 이해하여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 겸손이 주님에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우시는 하나님
삼상 29:1-11
인간의 관계를 보면 손해와 이익의 여부를 따라 형성되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뜻이 일치하여 친구가 되고 한 집단으로 형성되었다가도 그 관계 유지로 인해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주어질 것이 예상되면 가차 없이 뒤돌아서고 오히려 적이 되는 경우를 수없이 볼 수 있으며 또 우리 자신들도 그러한 모습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벗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있나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 또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결심이나 각오도 주변 여건과 상황에 의해서 얼마든지 포기해버리고 자신의 생계와 생존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믿을 수 없는 인간을 불러다가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인간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만큼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살아갈 것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믿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믿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스스로의 신실하심을 따라 일하시는 것이지 인간을 의존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주변 여건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택하여 부른 인간이 설령 불의한 행동으로 나아간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손길을 포기하거나 거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방해물일 뿐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수시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무너뜨리는 모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쇠하거나 중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으로 날마다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의지하고 소망하고 바라볼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이지 어떤 사람의 도움이나 세상의 도움을 받고 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그를 세우신 분이 계심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결코 사람을 바라볼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울에 대해 다시 살펴보면 사울은 무당의 도움을 받아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는 지금의 난국을 해결할 수 있는 도움의 말을 듣고자 합니다. 사울의 이 모습이야 말로 철저하게 사람을 의존하고 있는 불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내쳤던 무당에게까지 찾아가서 부탁의 말을 하는 이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의 법도와 말씀이 살아있는 힘과 기준이 되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불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결코 사울을 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게서도 사울의 모습은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둔 위기상황에서 무당을 찾아가고, 죽은 사무엘을 다시 불려내고자 하는 사울의 행동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최선으로 살아가기에 사울을 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택함 받은 다윗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윗 역시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울로 인하여 망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블레셋에 거짓으로 투항합니다. 그리고 아기스의 충성한 신하로 행세합니다. 결국 사울이나 다윗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블레셋 편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 노력이 오히려 자신을 위기의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29장의 내용입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다윗은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의 다윗의 모습을 본다면 다윗 역시 사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방인이며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을 의지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가까운 사람을 쳤다는 거짓말도 합니다(27:10). 분명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돕고 계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며 도울 만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자를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하여 방종으로 나아간다면 또 다른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블레셋 편이 되어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에 처한 다윗에 대한 도우심은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이 다윗을 신임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3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가로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기스는 다윗에 대해 전폭적으로 신임을 하지만 그의 방백들은 다윗을 의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에 대해 열심히 변호하였지만 방백들은 오히려 아기스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5절의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라는 말을 보면 뱅백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다윗이 혹 전투 중에 이스라엘과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군중에 출입하는 것이 나의 소견에는 좋으나 장관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6,7절)는 말로써 아기스는 다윗을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것으로 다윗은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와 갈등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돌아가라는 아기스의 말에 대해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8절)라고 말하면서 아기스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보이는 척 행합니다. 이러한 다윗에게서 예전에 골리앗을 무너뜨린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사울에게 도망쳐 다니면서 하나님을 의지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살려주는 다윗을 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각오도 다짐도 아니고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소유물도 아닌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오직 불신앙의 속성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인간을 다스리시고 고치시면서 믿음으로 행하게 하시는 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잊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신자에게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고 행하신 결과임을 고백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어던 믿음의 행위도 결코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신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믿음을 지켜온 것이 아닙니다. 우린 다만 내 자신을 위해 힘쓰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신앙의 속성은 우리를 얼마든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심으로 인해서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힘쓰고 노력하지만 사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지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말고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계획을 세우고 힘쓰고 노력한다고 해도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믿음에서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계획한 일이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신자는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단지 교회를 출석하고 있으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무엇을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위를 보지 마시고 다윗을 지키시고 도우신 분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다윗의 행함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행위를 기준 삼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짐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잊어버린 모습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잊게 하고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간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복의 자리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세력과 훼방에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의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삶에서 두려워 할 것도 두려워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뜻대로 자기 백성을 도우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갈등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 까 열심히 궁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홀로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하면서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지키시는 일을 실행에 옮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도우심이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의 반발로 인해서 자신의 고민과 갈등이 해소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더욱 더 강력히 아기스의 신실한 신하 행세를 합니다. ‘왜 돌려보내는가?’라고 거짓된 항의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철저하게 아기스 편임을 보이기를 힘쓸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 아래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어려움이 해소되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무지함을 깨우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지키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세워서 일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포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에도 하나님의 뜻은 방해받지 않고 하나하나 시행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한 도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 아래 있는 그가 복있는 자입니다.
사무엘상 29:1-11 강해
삼상 29장 1-11절 / (작성: 이동규)
찬송가 520장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
사무엘상 29장은 다윗이 동족 이스라엘과의 전쟁 직전 시글락으로 다시 돌아간 말씀입니다. 1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다윗이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 블레셋 땅으로 피한지 일 년 사 개월이 더 지났을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다시 전쟁을 위한 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블레셋군은 아벡에 이스라엘군은 이스르엘에 진을 쳤습니다. 28장에 이어 블레셋과 이스라엘간에 전쟁이 임박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거의 천적과 같은 원수지간입니다. 내가 죽든가 네가 죽든가 해야 하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원수 사이입니다. 대표적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을 비롯해 구약성경은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 치열한 영적 전쟁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무런 내적 갈등도 고민도 없고, 절망과 좌절과 실패도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저항하며, 끝까지 참고 견디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끊임없이 보이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으로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공격하고, 타협하게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말씀을 약화시키며 진리를 거스르게 하고, 구원과 생명과 소망의 말씀을 부정하고 대적하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태복음26:41)고 말씀하시고, 사도는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니 “근신하라 깨어라”(베드로전서5:8)라고 말씀합니다. 실로 지금은 영적 싸움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을 평가절하 시키고 왜곡시키며 교묘히 사람들의 영적인 안목과 필요를 외면하게 만드는 극히 현세적인 어둠의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사람들과 시대를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2-3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위해 지휘관들의 인솔아래 블레셋군이 행군해 나아갔고,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와 다윗의 군대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본 블레셋 지휘관들이 아기스에게 항의를 했고, 이에 아기스는 블레셋에 대한 다윗의 충성심을 변호했지만, 결국 다윗과 다윗의 군대는 다시 블레셋 땅 시글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곧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살아온 삶의 부정적인 전력을 가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성적으로 웬만해선 사람을 잘 인정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중요하게는 사람이 개인과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사람들 스스로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기억되는 자신의 이력과 이미지에 크게 신경을 쓰고 가능한 좋고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자신의 바람대도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인심이고 평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듣고 말씀을 믿고 말씀을 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으로 말씀을 존중하는 자를 존중하시고, 말씀의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혹 말씀 때문에 오해를 받고, 인생의 고난을 겪게 될지라도 반드시 말씀의 사람을 책임지시는 말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처럼 “오직 성경”, 철저하게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도 함께 하시며 구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분명 동족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출정하는 다윗의 심경은 말할 수 없이 착잡했을 것입니다. 당장 블레셋 땅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아무리 사울 왕이 두렵고 원망스러워도 다윗은 애초부터 사울 왕과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블레셋 땅에 거주하는 다윗의 입장에서는 아기스 때문에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출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출정이 취소된 것입니다.
세상을 살며 때때로 믿지 않는 친구들이나 지인들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믿는 친구나 지인들보다 더 큰 도움을 받고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내 믿음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쩌면 아기스로부터 출정 통보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다윗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따라 철저하게 말씀을 듣고 말씀을 믿고 말씀을 좆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삶 가운데 개입하셔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어떤 유라굴로 광풍 속에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며, 우리를 아름다운 소망의 항구에 이르게 하십니다. 말씀이 가져오는 큰 능력이며, 깊은 비밀이며, 놀라운 축복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치열한 영적 전쟁 한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말씀에 대해 치열한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치열하게 말씀을 듣고, 치열하게 말씀을 믿고, 치열하게 말씀을 좆아 큰 능력과 깊은 비밀의 살아있는 말씀을 경험하는 하루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2. 오늘 내가 기도해야할 사람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고 기도합시다.
3.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4. 말씀에 대한 철저함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