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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3년 3월 12일 주일 오후 예배 | 주일 오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98편 1,2,3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36편 5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24편 1,4,5 폐회찬송 – 시 105편 17,18 (고정)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 | |
제40주일 | |
성경낭독 : 시 95; 롬 5:1-11 본문 : 창 9:1-7 제목 :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핵심” |
제40주일
105문 : 제6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내가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그들을 미워하거나 해치거나 죽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생각이나 말이나 몸짓으로,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그리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해도 안 되며 오히려 모든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해쳐서도 안 되고 부주의하게 위험에 빠뜨려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살인을 막기 위해서 국가는 또한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106문 : 그런데 이 계명은 살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까?
답 :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금함으로써
살인의 뿌리가 되는 시기, 증오, 분노, 복수심 등을 미워하시며,
이 모든 것들을 살인으로 여기신다고 가르칩니다.
107문 : 앞에서 말한 방식으로 우리 이웃을 죽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이 계명을 다 지킨 것입니까?
답 :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와 증오와 분노를 정죄하심으로써
우리가 우리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여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친절을 보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며,
심지어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핵심
우리는 지난 주일 오전에 시편 88편 설교를 통해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피상적으로 압니다.
1) 불신자에게 죽음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죽음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예를 들어, 우리가 “컴퓨터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할 때, 데스크탑 컴퓨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노트북 컴퓨터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컴퓨터 부품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그저 아이들이 장난감으로 갖고 노는 ‘콩콩이 컴퓨터’라는 완구를 몇 번 다뤄본 다음에 “나는 컴퓨터 쪽에 식견이 좀 있는 편입니다”라고 말하면 우스갯거리가 되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의 핵심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있고, 그렇다면 죽음의 핵심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끊어짐’인데,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모르는 불신자가 ‘비록 자기가 현실적으로 죽음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로 알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자기가 처해 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환상 속에 빠져서 전혀 다른 종류의 지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전혀 자기의 상황을 아는 것이 아닌 것이죠. 바로 이런 이유로 불신자는 죽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장차 완전한 죽음이 찾아올 것이 분명하고, 심지어는 현재 죽어 있기까지 한데, 그 죽음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죽음을 모릅니다.
2) 신자는 죽음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주일에 시편 88편을 통해 보았듯이, 신자는 죽음을 알지만, 그 죽음의 본연을 대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고통들 속에서 이 죽음을 얼핏 맛보기는 하는데, ‘참 죽음’을 겪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완전한 하나님 없음’이 경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철저하게 죽음을 대면하셨고,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그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사실은 죽음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죽음을 알지만 죽음을 완전히 맛볼 수는 없습니다.
3) 그래서 이 두 사실을 종합하면,
불신자는 죽음에 빠져 있고, 주변에 온통 죽음밖에 없지만, 자기가 죽음 중에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을 모릅니다.
반면 신자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를 통하여 죽음의 참혹함도 알지만, 이제 죽음으로부터 생명에 옮겨졌기 때문에, 죽음을 ‘참으로 겪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그리스도께서 모조리 가져가신 후에,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알지만’, ‘겪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요 5:24) 옮겨졌습니다.
지난 주일 오전에 우리가 들은 말씀은 ‘죽음’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오후에 우리가 들을 말씀은 ‘죽임’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섯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히브리어로 단 두 단어로 된 말씀인데 ‘로 티르차흐’, ‘로’가 not이니까, 그냥 “죽이지 말라” 이런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임’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너희가 모두 죽어 있다”(엡 2:1 허물과 죄로 죽었던, 죽어있던, 현재 능동태 분사)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인생이라면 누구나가 죽음에 맞부딪쳐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죽임’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금지 명령’, 곧 “죽이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죽임’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이 여섯째 계명을 숙고해 보도록 합시다.
죽인다는 것이 무엇인가?
죽인다는 것이 무엇인가? : 예들
그러면 ‘죽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죽음’이 ‘생명이 없는 것’이라면, ‘죽임’은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모든 성격들은 이 정의 안에서 숙고되어야 합니다. ‘죽이는 것’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생명을 빼앗는 일로서의 살인’이라는 맥락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만나게 되는 주변의 어떤 사람들의 예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1) 첫째는 ‘여호와의 증인’류의, 혹은 ‘재세례파’류의 평화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가 핵심에 있다는 점에서 둘째로 말씀드릴 사람들과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이유, 특히 성경 말씀의 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모든 종류의 살인들’을 금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대표적으로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아미쉬’나 ‘메노나이트’로 대표되는 ‘재세례파들’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모든 종류의 살인’에는 무엇이 포함되는가 하면
전쟁에서 군인이 군인을 죽이는 일과
국가 기관에서 사형을 언도하는 것을 통하여 범법자를 죽이는 일 까지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신념 때문에 군대에 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입영 거부가 큰 사법적 문제로까지 비화된 적이 있었죠. 보통 ‘양심적 병역거부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또 이것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여호와의 증인도 아닌데 군대에 가기 싫어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한다고 거짓말을 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재판부에서 그 사람이 집에서는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게임을 하곤 했다......라고 밝혀내어, 한참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군인이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단순히 ‘살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성경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집총 거부를 하고 군대 입영을 거부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재세례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 둘째는 이런 종교적인 성격과는 약간 다르게, ‘정부의 공적 위치’를 고려하지 않는 차원에서, 또 인권의 입장,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정부가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형폐지론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정부건 사법부건,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어떤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이것을 아주 강경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현대의 세계 거의 대부분이 이 생각에 잠식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거든요. 우리나라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수십 년 동안 사형 ‘언도’만 하고 ‘집행’은 안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게 된 제일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강력하게 활동해 왔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사형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회가, 이런 인권 운동가들의 활동에 의하여 “사형제도는 없어져야 마땅하다”, “정부 기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어떤 사람의 생명을 뺏을 수는 없다”라는 생각이 전반적으로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가진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답을 먼저 말하자면, 첫 번째의 종교적인 입장에서 살인을 거부하는 사람도, 두 번째의 반정부적, 혹은 인권의 입장에서 살인을 거부하는 사람도, 모두 성경의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살인하지 말라”를 읽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은 ‘사적 살인’과 ‘공적 살인’을 전혀 같은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을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어의 의미
우리가 먼저 말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살인하지 말라”라고 했을 때, 그 말이 정말로 앞의 두 예의 사람들의 주장을 정당화해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성경이 “살인하지 말라”라고 명령한 것은 여호와의 증인이나 재세례파, 심지어는 불신자들 중 인권주의자들과 생각이 똑같은 것일까요? 하나님의 명령은 그런 의미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모든 종류의 살인은 균등하게 금지된 것입니까?
이 주제에 대하여는 십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할 때, 우리말로도, 영어로도 정확하게 번역되지 않지만, 정확하게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쉽게 말해보자면,
성경은 여섯째 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할 때의 단어와
앞의 두 그룹이 싸잡아서 말한, ‘공적 살인’이라 할 수 있는 죽이는 행위에 사용하는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1)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라고 할 때 성경은 ‘라차흐’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죽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성경은 공식적인 공권력으로 어떤 사람을 죽인다거나,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등의 장면에서는, 이 단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법정에서 판결을 통하여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할 때는 전혀 다른 단어를 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출 21:14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출애굽기의 이 말씀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사회법 중 사형이 언도되는 예의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통상 ‘죽이다’에 사용되는 단어가 두 개 사용되었습니다(히브리어에서 ‘죽이다’라는 단어는 대략 8개 정도의 단어를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죽였다”할 때 ‘하라그’를 사용했고, 그를 벌 줄 때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이라”고 할 때에는 ‘무트’를 사용했습니다. 두 단어 모두 성경에 자주 나오는 ‘죽이다’라는 단어입니다.
십계명에서 사용되는 ‘라차흐’는 이런 상황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구형되는 ‘사형의 법’인데, 사법적으로 어떤 사람을 죽일 때는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에서 금지된 그 “살인”이 ‘사법 시스템 안에서 범죄자를 사형시키는 것’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둘은 다릅니다.
2) 또한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에도 이 단어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민 31:8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신 1:4 그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주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 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주하는 바산 왕 옥을 쳐 죽인 후라
앞의 재판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전쟁 상황에서 쓰는 ‘죽이다’라는 말에서도, 성경은 여섯째 계명의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의 그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여섯째 계명의 “살인하지 말라”할 때의 사람을 죽이는 것을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앞의 두 부류의 사람들이 ‘개인적 살인’과 ‘공적인 살인’ 모두를 싸잡아서 한꺼번에 ‘살인’이라고 규정하는 것과는 달리, 둘을 날카롭게 구분합니다. 사법적 살인이나 전쟁에서의 살인에서는 여섯째 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의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므로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은, 성경적 의미 하에서는 사법적 시스템 속에서 죄를 범한 사람을 사형으로 죽이는 것과,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 상대를 죽이는 것과 같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이 둘을 혼합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여섯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라고 할 때의 핵심은, 앞서 말씀드린 두 그룹의 사람들이 혼동한 것처럼 ‘사람을 죽이다’라는 개념을 가장 핵심에다 두지 않습니다. 이 혼동하는 사람들은 ‘뭐가 되었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중심 개념이다’라는 생각으로, 그래서 군인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국가가 범죄자를 사형으로 처벌하는 것까지 모조리 ‘똑같은 살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여섯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의 핵심은 ‘사람을 죽이다’는 것에 있지 않고 ‘불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있습니다.
단지 ‘사람을 죽이는 모든 행위’가 여기 “살인하지 말라”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불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 ‘하나님이 금하시는데 사람을 죽이는 일’, 이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영어 성경이 “Thou shalt not kill”(KJV)이라 하여 여기 “살인”에 kill을 쓰거나, 혹은 “You shall not murder”(ESV)라고 하여 “살인”에 murder를 쓰는 모두가 이 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어 단어에서도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kill을 쓰든 murder를 쓰든, 그 단어 안에는 ‘불법적으로 죽이는지, 합법적으로 죽이는지’ 같은 개념은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정리하면 그렇습니다. 여섯째 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핵심은 ‘단지 죽였느냐’가 아니라, ‘불법적으로 죽이는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데 사람을 죽이는 것’에 있다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의 살인을 금하셨습니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자,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를 이렇게 읽을 때, 어떤 주제가 떠오르게 됩니까? “살인하지 말라”를 우리가 바르게 읽으려면, 어디에다 초점을 두고 읽어야 제대로 읽은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이런 단어 사용 방식을 통하여,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에게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 그 자체에 초점이 있지 아니하고,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초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제가 약간은 도발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해 보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사법적 사형 제도’의 예 몇 가지를 성경에서 가져와 보겠습니다.
1)
출 21:14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이 말씀은 ‘설령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와중이라 할지라도 끌어내려’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아주 강경하게 말씀하신 본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고의로” 죽인 것입니다. 이전 번역에서는 “짐짓 모살하였으면”이라고 하였는데, 과거 번역이 더 좋습니다. “고의로”는 너무 어감이 약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실수로가 아니라, 모살, 그러니까 계획적으로 살인을 했다면, 그 사람은 예배당에서 예배하고 있는 와중에서라도 끌어내려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율법, 곧 하나님의 법입니다.
2)
출 21:15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 말씀은 “부모를 때리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율법입니다.
그리고 우리말 번역에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하였는데, 강조가 잘 나타납니다. 히브리어로 읽어보면 “죽이고 죽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정녕 죽으리라”라고 한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히브리어는 이렇게 같은 말을 붙여 말함으로써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아무리 대상이 아버지나 어머니여도,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폭행 죄’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때리더라도 ‘사형’을 구형하기에는 오늘날 우리들이 보기에는 이상합니다. 벌이 너무 과하다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류의 성경의 형법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 이런 류의 벌이 더 무거운가 하면, ‘하나님 신앙’의 근간을 깨부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다섯째 계명을 배웠는데, 기독교 신앙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는 단순히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부모’라는 대상은 인간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투영해 보여주는 대상입니다. 따라서 “부모를 치는 자”는 무거운 벌을 받았습니다. 무려 사형에 처해지도록 율법은 명령합니다.
3)
출 31: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앞에서 말한 ‘부모 공경’의 이유로 죽이는 것보다 더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법이 여기 나옵니다. 쉽게 말하자면 주일에 교회 빼먹고 일하러 가는 사람은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너무 심해 보입니다. “아니, 아무리 예배가 중하다 해도, 예배 빼먹었다고 사람을 죽이라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현대인들은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지금 다루는 것은 아니니 일단 그냥 이렇게 두도록 하고,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안식일을 어기고 일을 하러 간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사형을 명령하셨다.
자, 이 정도로 합시다. 세 가지 예를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 예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셋 모두 ‘사법적 살인’에 해당하는 예들입니다. 이 율법들을 어기면, 해당 사람은 성문 앞의 장로들이나 위정자들에게 불려가게 되고, 거기서 재판을 통해서 사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그러면 다스리는 이들은 이 사람들을 공적인 신분으로 살인, 곧 그를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자, 이 상황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이러한 법들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도발적인 사실 한 가지는 “하나님은 살인하신다”라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인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십니다.
이 계명들을 두고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여기 ‘사법적 살인’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범죄자들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에’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살인의 중추요 핵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앞에서 ‘인권주의자들’은 형법을 집행하는 위정자들을 두고 “너희들이 무슨 권한으로 한 사람의 목숨을 이랬다 저랬다 할 권리가 있느냐?”라고 했지만, 이스라엘 나라에서 생각해 보자면, 위정자들에게는 사실상 책임이 없습니다. 이것을 정하고 실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니까요. 결국은 하나님이 살인하십니다. 범죄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뿐인가요?
조금 더 세밀하게 따져 보십시오.
세상에는 사람들이 ‘자기 실수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고 생각할 만한 것도 많지만, 이유 모를 사고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사람의 목숨을 수명 혹은 수십 명씩 앗아가시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살인자입니까?
사실상 사람의 죽음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기보다는 ‘죄로부터’ 온 것이 사실이지만(하나님이 죽음을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위하여 어떤 경우에, 어떤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십니다. 제일 쉬운 예로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충이 먹어 죽었다”(행 12:33)는 말씀이나, 심지어는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하룻밤에 집단 살해하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살인하시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앞서 말한 인권주의자들 중,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도 많고, 사형 제도 폐지를 외치거나, 범죄자의 인권을 위해 앞장 서서 노력하는 이들도 많은데, 그러면 이 사람들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살인자로’ 기소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들을 모두 감안해야만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두 가지 주제를 동시에 기억하면서 이 주제를 생각하십시오.
첫째, 여섯째 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그 초점이 ‘죽이는 것’에 있지 않고 ‘불법적으로 죽이는 것’에 있다.
: 이 말은 “살인하지 말라”할 때, 결국은 단순히 ‘사람의 존엄성’을 침해하기 때문에 금한 것인지, 아니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금한 것인지, 그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의 두 부류의 사람들은 ‘생명’이 ‘그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침해하면 안 된다고 보았지만, “살인하지 말라”가 ‘불법적으로 죽이는 것’, 곧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는 방식으로 죽이는 것’에 초점이 있다면, 여기서 핵심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있다기보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다’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둘째, 결국 사법적 사형 제도 안에서 생각해 보면 ‘생사여탈권’을 근본적으로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삼상 2:6)니다. 신명기 32장 39절 말씀은 생명의 주권이 누구한테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이 사실을 잘 생각해 보면, “살인하지 말라”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이 계명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데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사람의 목숨이 중하니까 죽이지 말라’는 계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섯째 계명을 가지고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생래적인 귀중함’ 같은 주제를 이끌어내는 것은 근본적으로 틀렸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귀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조차, ‘생명 그 자체’에 귀중함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 그 자체가 의미를 가져버리면, 그 역시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핵심은
모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니, 너는 이 모든 생명들에 대하여 그 어떤 권리도 없다. 오직 생명을 주고 뺏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만 달린 것이다
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다 : 이 권리
형상을 죽인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
1)
그래서 제가 과거에 창세기 9장을 가지고 이 부분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9장 말씀은 “사람이 피를 흘려서는 안 되는 이유”, 곧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창 9: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금하시는 불법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죽인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을 죽였다”는 말의 엄밀한 뜻은, ‘그 사람에게는 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어찌저찌할 권리가 전혀 없고, 오직 그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할 권리는 하나님께만 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내가 맘대로, 내가 원하니까, 내가 보기 싫으니까, 하나님이고 뭐고 개의치 않고, 저 사람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이십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이 권리를 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이것을 중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만이 온 우주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주인이십니다.
어떤 사람, 어떤 피조물이든, 타인의 생명을 ‘내 맘대로’ 취해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왜 중요한 문제가 되는가? 왜 살인죄가 “반드시 죽일” 죄가 되는가? 그것은 ‘생사여탈의 권리’라는 것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것을 내가 내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이십니다. 하나님 바깥에는 ‘죽음’밖에 없지요. 그 죽음들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이 생명의 주를 무시하는 것이 바로 ‘위법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2)
바로 이 점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짐승을 먹을 것으로 삼더라도,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창세기 9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방금 바로 앞에서는 6절을 보았습니다만(“사람이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앞부분도 보십시오. 2절과 3절, 그리고 4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후에 사람들에게 땅의 모든 짐승들까지도 사람의 ‘먹잇감’으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동물들을 ‘죽일 권리’까지도 주어졌습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것인데, 적어도 먹기 위해 동물들의 생명을 취하는 권리까지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무엇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은 먹기 위하여 동물들의 ‘생명을 취하는 권리’까지도 사람들에게 주셨지만, ‘생명의 권리 그 자체가 하나님께 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함께’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잡아서 먹되, 곧 생명을 취하되,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권리까지도 사람에게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제약’을 거셔서, “그러나 그 생명은 네가 주인이 아니야”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피를 먹지 말라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하셨나요? “피는 생명이니, 피를 먹지 말라” 그래서 이어지는 5절과 6절을 읽어보시면, 피와 생명의 관계가 거기 나옵니다. 이를 함부로 침범하는 자는 ‘자기 피로써’ 하나님의 권리를 침범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신명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 12: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실천적으로 : 주님의 의미 확장
그렇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에게 단순히 ‘윤리적 가르침’을 주는 계명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은 죽이는 것을 싫어하셔!”라고 가르치는 것만도 아닙니다. 여섯째 계명은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데, 바로 “오직 하나님께만 생명이 있으므로,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실천적으로 생각할 때, 이 말씀의 핵심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경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1)
예를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회사 사장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정부가 주 69시간을 넘어 80시간 이상도 근로가 가능하게끔 법을 만든다고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산재 기준 과로사 기준이 주 60시간 이상 근무인데,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고, 만약 정부가 법을 추징하여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어떤 회사의 사장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회사나 공장의 일이 바쁠 때마다 주 80시간씩 일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법이 그렇게 정했으니까’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이것이 “살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리문답에 보면 심지어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해쳐서도 안 되고 부주의하게 위험에 빠뜨려서도 안 됩니다.
여섯째 계명의 핵심은,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므로’, ‘타인의 생명을 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명조차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나를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은 건물 꼭대기에서 뛰어다니는 ‘파쿠르’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사장이기 때문에, 또 자본주의 사회가 허용한다고 해서, 타인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2)
심지어 주님께서 이것을 확장하셔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까지 적용하셨을 때,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미워하면 살인!”이라고 기록해서 벌을 주기 위해서겠습니까? 아무도 이 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예수님은 단지 죄책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 곧 상대방의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배워 알고 있는 학생이 ‘학폭’같은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 심지어는 미움받게 될 때의 그 사람의 생명에 해가 되는 이런 류의 행동들을, 과연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겠습니까?
정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