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명월' 제천이 내게서 '분노'를 걷어 내줬다
이철수는 천등산 다릿재와 박달재 사이에 산다.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2리. 4차로 38번 국도가 멀지 않은 곳에 지나는데도 135가구 사는 평장골은 양지 바른 주론산 아래 탈속(脫俗)하듯 오롯이 들어앉았다. 겨울을 털고 일어난 농부들이 아침부터 밭에 거름을 내느라 여기저기서 토속적 냄새가 피어오른다.구불구불 고샅길 따라 들어간 마을 안쪽, 이철수의 집은 벽돌담도 기와지붕도 야트막하다. 처마엔 시래기와 씨옥수수 다발이, 벽엔 나물이며 가지·버섯·칡·대추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말라 간다. '화장실'을 찾았더니 "간단한 볼일이면 뒤꼍에서 보라"고 가리킨다. 뒤뜰엔 달랑 고무 들통만 놓여 있다. 둘 있는 변소도 재래식이다. 퍼다가 밭에 거름으로 준다. "우리 식구들 건데 어떠냐"며 웃는다.
그는 남향 집에 문전옥답(門前玉畓)까지 삼대가 덕을 쌓아야 얻는다는 복(福)을 겹쳐 누린다. 문앞에 쌀 18가마 소출을 내는 논농사를 짓는다. 집을 둘러가며 밭에선 콩·팥·깨·땅콩을 갈고, 쌈채며 과일은 비닐하우스에서 가꾼다. 다 합쳐 2000평쯤에 한 해 작물이 스무 가지가 넘는다. 논밭을 갈거나 가을걷이 할 때만 기계를 빌릴 뿐 모두 부부가 손으로 일군다. 그는 편안한 얼굴로 "분노는 남의 짐이 된 지 오래"라고 했다.
- ▲ 판화가 이철수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1980년대 이철수는 '민중미술가'로 불렸다. 낫을 쳐든 농군, 절규하는 여공, 아기 업은 행상 아낙네를 그렸다. 시위현장엔 그의 판화가 커다란 걸개그림으로 내걸렸다. 판화집은 판매가 금지되고 집도 수색당했다. 감옥 갈 각오로 아침마다 옷을 두툼하게 입고 집을 나섰다.
"민주화운동에 목판화 시대를 열었다"는 찬사를 받던 1983년 그는 농촌으로 갔다. 아내와 갓난아기를 데리고 경북 의성에서 유기농 농사를 배웠다. 잠시 서울로 돌아와 둘째를 낳고 1987년 제천에 뿌리를 내렸다. 그를 불러들여 시골 살림을 권한 이가 원주 살던 사회운동가 장일순 선생이었다. 이철수가 평생 마음에 모신 스승은 "논밭뙈기가 재산이고 농사가 깊은 공부"라고 했다.
지붕이 주저앉은 빈집을 사고 나니 빈손이라 텃밭부터 가꿨다. 논밭은 빚 내가며 조금씩 사들였다. 농번기엔 종일 일하고, 한숨 돌리는 철엔 오전에 판화 작업을 하고 오후에 밭일을 했다. 오전에 일하고 나면 조각칼 쥔 손이 떨리기 때문이다. 겨우내 밑그림을 그려뒀다가 틈틈이 작업했다. 주먹 쥔 그림이 많았던 작품은 삶·자연·선(禪)을 잔잔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0년대 거친 싸움에 나서면서 스스로 미워하던 폭력과 욕심을 배워가는 걸 보고 놀랐다.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이 "이철수 안에 고운 것이 들어있는데 거친 걸 그리느라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겠느냐"고 한 말씀이 고마웠다. 운동권 사람들은 그가 변절했다고 했다. 그는 "삶의 방법이 달라졌을 뿐 세상이 좀더 반듯해지고 착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꽃 풍경으로도 얼마든 세상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으냐"고 했다.
마을에선 웃는 얼굴을 명함 삼았더니 이웃들과도 이내 친해졌다. 2006년엔 뒷산에 들어오려는 콘도를 막아보려고 3년 가까이 조각칼을 놓았다. 시유지 뒷산이 마을 재산이었다는 옛 기록을 찾아내 소유권 소송을 냈다. 다른 재판 서너 건도 진행했다. 100만평 뒷산을 되찾으면 마을을 되살릴 밑천이라는 생각에 뛰어다녔다. 소송에 져 콘도도 못 막고 변호사비까지 치렀지만 마을 환경을 지킬 법적 약속은 받아냈다. "주민세를 확실히 낸 셈"이라고 했다.
마을을 지르는 장작개울을 따라 태양광 안내등도 놓았다. 어두워지도록 밭일 하고 오는 노인들을 위해서였다. 정자·장승·솟대를 세우고 시(詩)들을 써놓았다. 동요 '구슬비'에 노랫말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을 붙인 권오순 선생 시도 있다. 마을 초입 백운성당에서 재속(在俗) 수녀로 고아들을 돌보다 1995년 떠난 분이다.
그는 대소사 다 접고 바깥나들이를 삼가지만 찾아오는 손님은 물리치지 못한다. 법정 스님도 가끔씩 묵어갔다. 그의 집이 참 편하다며 농사일도 거들었다. 스님은 그의 작품세계 변화를 가리켜 "투쟁 아닌 평화, 증오 아닌 사랑, 갈등 아닌 자유에 눈뜸"이라고 했다.
그는 '기적의 도서관' 유치위원장을 맡아 제천에 전국 두 번째로 이 도서관을 들였다. 운영위원장도 지내며 도서관을 알뜰하게 꾸몄다. 음악영화제 같은 제천 행사엔 로고와 글씨도 써준다. 그는 제천(堤川)을 '언덕과 개울'로 풀었다. 산과 물이 흔한 곳. 척박하지만 풍광이 빼어나 청풍호에 유람선이 오가고 천등산엔 등산객이 몰리고 의림지 큰 소나무가 장관이다.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 선생의 봉양 장담 옛집은 제천 시민의 정신적 뿌리다.
그와 함께 '내륙의 바다' 청풍호로 갔다. 그는 멀리 월악에서부터 펼쳐지는 산 첩첩 풍광을 가리키며 새삼 감탄했다. 그는 인연 따라 제천에 온 게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멀리까지 싸우자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가 평장골에 왔을 때 중장년이었던 이웃들은 모두 노인이 됐다. 그도 쉰여섯이다. 60대는 노인정에도 못 들어가고 비닐하우스 쳐놓고 지낼 만큼 마을은 늙었다. 그는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남은 삶을 살 생각이다. 그가 정자 대들보에 써둔 글에 그 마음이 담겨 있다.
"흰 구름 떠도는 맑은 하늘 머리에 이고/ 너나없이 한데 어우러지는/ 참 좋은 사람들의 평장골에서/ 푸른 산 맑은 물과 함께/ 오래오래 복 되게." 이철수는 영락없는 제천 사람, 평장골 농부였다.
첫댓글 아고 축구볼려면 자야하는데,,,대충머물다 갑니다 ㅋ
판화가 이철수님이 제천에 사는군여....그의 사이트에 가끔 가보는데 꾸준히 작품을 올리더군요 잘 보앗습니다....
저에겐 작은 엽서 모으는 작은 욕심이 있답니다. 이철수님의 작품은 엽서 속에서 가끔 만나지요.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그림뿐만 아니라, 자그마하게 쓰여진 글을 통해 읽어내는 아름다움의 감동은 꽤나 진하답니다. 원광님 덕분에 좋아하는 이철수님의 삶을 들여다 보았네요. 감사드립니다. 하시는 일 원만히 이루시고 내내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