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란(文珠蘭)
花白鳳尾翠文珠(화백봉미취문주)-꽃은 희고 잎은 봉꼬리 푸른 문주란
花盆家屬於四十(화분가속어사십)-화분으로 가족이 된지 어언 사십년
知君故鄕濟兎島(지군고향제토도)-그대는 아는가! 제주 토끼 섬이 고향인 것을
耽羅姿態化歌香(탐라자태화가향)-탐라의 아름다움이 노래 향기로 변했네.
농월(弄月)
문주란 가수인생 48년 아침마당에서 말하다
아래내용은 2013년 5월 26일 KBS “아침마당”에서 문주란 자신의 가수인생을 진솔하게 말한 내용을 필자가 메모 한 것이다.
******
나는 목소리 보다는 성격이 좀 급하고 예민한 편이예요
그러니까 “살이 찔 여가가 없어요”
14세 때에 백영호 선생님의 작곡으로 “동숙의 노래”로 데뷔했어요.
그대는 코디도 없어 전부 내 스스로 준비를 했어요.
지금가수들은 참 편한 것이지요.
“동숙의 노래”가 무슨 무엇인지도 모르고 불렀어요.
원래는 영화주제가라고 하던데―
참 나는 그때 말이 많았어요.
뭐 작곡가를 사랑했느니 아무튼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었었어예
나는 “타고난 목소리”가 아주 특이한 것 같애예
나는 스트레스가 쌓일 때 꼭 노래를 부르고나면 많이 풀려요
나에게는 노래가 약이고 치료제였어요.
내 팬들은 제가 라이브 하는데 찾아와서
“문주란씨 노래를 듣고 희망을 얻었어요”
하는 팬들이 많았어요.
화장하는 모습
약 1800여곡을 취입했어요.
많이 불렀죠?
꼭 히트를 안 해도 작가 선생님이 주시는 대로 다 불렀어요.
이번에 48주년 콘서트를 6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 합니다.
콘서트는 2시간 동안에 20곡을 준비 했어요
세종문화회관은 아무나 노래 부를 수 없는 곳이므로 나는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48년 가수인생에서---
나는 문주란 “스캔들”이 어떻고 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요즘은 연예인들이 당당하지만 우리가 노래 부를 시대에는 “스캔들”이라하면 인생 망치는 것이지요.
연예인들은 “스캔들”이 없을 수 없어요.
19세 때는 음독자살을 시도하여 15일 만에 깨어났어요.
그때 의사가 “목소리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했어요.
내 목소리를 살리려고 동료 선배가수들이 더 신경을 썼어요.
배호, 남진, 내훈아 등―
내나이 15세 때 노래를 하니 힘들고 “스캔들”에 시달려서 너무너무 힘이 들었어요.
지금은 프로덕션이 관리를 해주지만 그때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해결했어요.
어린나이에 헛소문에 많이 시달렸어요.
그중에 남진 씨와 박춘석 선생님 스캔들 헛소문도 많았어요.
특히 남진 씨하고는 같은 공연을 많이 하니까 “그냥 갖다 붙이는 것예요”
요즘 같으면 택도 안될 일이지만---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처녀인데 완전히 말도 못할 소문들이 매매일 신문에 났어요.
만일 지금같이 인터넷이 있었으면 나는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에요
그때 내 생활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어요
여기가도 문주란이 어떻고--
저가가도 문주란 이야기고---
내 엄마는 5세 때 돌아가셨어요.
우리형제 6남매를 두고 먼저 갔어요.
서모 밑에 자랐어요.
남잔과 문주란
내 본명은 “문 필연”입니다
죽으려고 약을 먹고 15일 만에 정신이 드니까 옆에 아버지가 보였어요.
나는 깨어나서 울면서 아버지께 빌었어요.
우리아버지는 돈도 많고 생활이 넉넉한 한량이었어요
아버지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악기도 잘 다루었고--
항상 여자들이 줄줄이 따라 다녔어요.
이렇게 살면서 재산을 탕진했어요.
그때는 지금의 재산세를 “호별세”라 했는데
부산에서 “호별세”를 1~2위를 냈어요.
굉장히 재산이 많았어요.
택시운수업고 크게 했어요.
아버지가 재혼을 했는데 아버지 재산보고 새 엄마가 왔어요.
아버지는 세 번째로 재혼을 했었요
세 번째 엄마는 나에게 매질을 많이 했어요.
나는 아버지가 좋아도 무서웠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외로운 아이였어요.
아마 친어머니를 일찍 여이었던 탓이지요.
남들은 엄마 자랑을 하면 나는 무척 외로웠어요.
나는 슬픔이 많은 편이었어요.
나의 노래 속에는 나의 슬픔을 표현하는 부분이 많아요.
나는 겉으로는 통이 크고 씩씩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잘 울었어요.
나는 남자가 싫어요.
문주란이 노래를 부른다.
-처음에 사랑할 때 그이는 씩씩한 남자였죠
밤하늘에 별도 달도 따주마 미더운 약속을 하더니
이제는 달라졌어 그이는 나보고 다해 달래
애기가 되어 버린 내사랑 당신 정말 미워 죽겠네
남자는 여자를 정말로 귀찮게 하네
남자는 여자를 정말로 귀찮게 하네-
1972년도 “공항의 이별”을 발표했어요.
그때는 우리나라가 살기가 어려울 때였어요.
지금은 영종도 인천공항은 즐거운 곳이지만
이민가고 외국에 취업가고 하니까 항상 김포공항은 슬픈 이별의 장면이었어요.
나도 이민을 간다고 했어요.
한국에서 문주란 이름이 싫어서요.
그때 작곡가 박춘석 선생님이 “공항의 이별”이란 곡을 주었어요.
박춘석 선생님은 나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어요.
패티김 남진 이미자씨에게 선생님은 은인이었어요.
선생민도 독신으로 혼자 사니까 예술에 전부를 바친 것 같아요
항상 나보고
문주란은 외로워도 외롭다 생각하지 말라고 위로 했어요
나는 노래 부리기 싫어서 많이 도망 다녔어요.
나는 계속 숨어 다녔고 선생님은 나를 찾아 다녔어요.
장롱속 등 별별 곳에 다 숨었어요.
그때마다 잡혀 끌려가 연습을 했어요.
소문대로 나는 정신병원에 끌려갔어요.
내가 자주 사고를 일으키니까 정신병원에 보호를 요청한 것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퇴계로에 있는 정신병원이었어요.
약 15일간 있었어요.
정신병원?
말도 마세요.
무섭고 힘든 곳이에요
선생님을 만나 다시는 속안썩힐테니 정신병원에서 나가기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어요.
선생님이 보증을 서고 났어요.
박춘석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 제가 제일먼저 달려갔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지금도 마음이 울적하면 선생님의 묘소에 가서 마음을 달래고 와요
벅춘석 선생님이 만년 총각이잖아요
하루는 내가 응석을 부리고 농담으로 “선생님 우리 결혼해요”
하니까
이게 미쳤나? 하더군요.
참 철딱서니 없었지요.
아무리 농담이라도―
내가 사업을 하다가 손해를 많이 봤어요.
참 바보 같은 짓이지요.
중소기업을 하나 시작했는데 아주 고생을 하고 사기를 당하고 그냥 두었어요.
연예인들이 사업해서 성공하는 예는 드물어요.
나는 지금도 라이브 카페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상당히 신경이 쓰여요
언제 이렇게 나이 많이 먹었는지---
요즘은 10대가 너무 많이 나와서 우리 같은 사람은 나올기회가 없어져요.
겨우 콘서트 디너쇼 정도 뿐이에요
그래도 한 달에 1~2회 정도는 노래를 해요
그래도 팬들이 나를 기억하고 멀리서 찾아주는 것이 너무 고맙지요
나는 체질이 특이한가봐요
10대 20대에는 체중이 39kg 나갔어요.
지금은 43kg 유지해요
연예인은 “보여주는 사람”이예요
노래하는 데도 체중이 많이 나가면 힘들고 좋지 않아요.
결혼?
결혼이나 이성 관계는 전혀 생각이 없어요.
혼자 사니까 얼마나 자유로워요
이금희씨도 결혼하지 마세요.
혼자서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한데―
산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싫어요.
결혼은 해도 고독하고
안 해도 고독하고
자식을 두어도 인생은 고독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분입니다.
☺농월
문주란(文珠蘭)
花白鳳尾翠文珠(화백봉미취문주)-꽃은 희고 잎은 봉꼬리 푸른 문주란
花盆家屬於四十(화분가속어사십)-화분으로 가족이 된지 어언 사십년
知君故鄕濟兎島(지군고향제토도)-그대는 아는가! 제주 토끼 섬이 고향인 것을
耽羅姿態化歌香(탐라자태화가향)-탐라의 아름다움이 노래 향기로 변했네.
농월(弄月)
문주란 가수인생 48년 아침마당에서 말하다
아래내용은 2013년 5월 26일 KBS “아침마당”에서 문주란 자신의 가수인생을 진솔하게 말한 내용을 필자가 메모 한 것이다.
******
나는 목소리 보다는 성격이 좀 급하고 예민한 편이예요
그러니까 “살이 찔 여가가 없어요”
14세 때에 백영호 선생님의 작곡으로 “동숙의 노래”로 데뷔했어요.
그대는 코디도 없어 전부 내 스스로 준비를 했어요.
지금가수들은 참 편한 것이지요.
“동숙의 노래”가 무슨 무엇인지도 모르고 불렀어요.
원래는 영화주제가라고 하던데―
참 나는 그때 말이 많았어요.
뭐 작곡가를 사랑했느니 아무튼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었었어예
나는 “타고난 목소리”가 아주 특이한 것 같애예
나는 스트레스가 쌓일 때 꼭 노래를 부르고나면 많이 풀려요
나에게는 노래가 약이고 치료제였어요.
내 팬들은 제가 라이브 하는데 찾아와서
“문주란씨 노래를 듣고 희망을 얻었어요”
하는 팬들이 많았어요.
화장하는 모습
약 1800여곡을 취입했어요.
많이 불렀죠?
꼭 히트를 안 해도 작가 선생님이 주시는 대로 다 불렀어요.
이번에 48주년 콘서트를 6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 합니다.
콘서트는 2시간 동안에 20곡을 준비 했어요
세종문화회관은 아무나 노래 부를 수 없는 곳이므로 나는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48년 가수인생에서---
나는 문주란 “스캔들”이 어떻고 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요즘은 연예인들이 당당하지만 우리가 노래 부를 시대에는 “스캔들”이라하면 인생 망치는 것이지요.
연예인들은 “스캔들”이 없을 수 없어요.
19세 때는 음독자살을 시도하여 15일 만에 깨어났어요.
그때 의사가 “목소리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했어요.
내 목소리를 살리려고 동료 선배가수들이 더 신경을 썼어요.
배호, 남진, 내훈아 등―
내나이 15세 때 노래를 하니 힘들고 “스캔들”에 시달려서 너무너무 힘이 들었어요.
지금은 프로덕션이 관리를 해주지만 그때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해결했어요.
어린나이에 헛소문에 많이 시달렸어요.
그중에 남진 씨와 박춘석 선생님 스캔들 헛소문도 많았어요.
특히 남진 씨하고는 같은 공연을 많이 하니까 “그냥 갖다 붙이는 것예요”
요즘 같으면 택도 안될 일이지만---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처녀인데 완전히 말도 못할 소문들이 매매일 신문에 났어요.
만일 지금같이 인터넷이 있었으면 나는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에요
그때 내 생활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어요
여기가도 문주란이 어떻고--
저가가도 문주란 이야기고---
내 엄마는 5세 때 돌아가셨어요.
우리형제 6남매를 두고 먼저 갔어요.
서모 밑에 자랐어요.
남잔과 문주란
내 본명은 “문 필연”입니다
죽으려고 약을 먹고 15일 만에 정신이 드니까 옆에 아버지가 보였어요.
나는 깨어나서 울면서 아버지께 빌었어요.
우리아버지는 돈도 많고 생활이 넉넉한 한량이었어요
아버지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악기도 잘 다루었고--
항상 여자들이 줄줄이 따라 다녔어요.
이렇게 살면서 재산을 탕진했어요.
그때는 지금의 재산세를 “호별세”라 했는데
부산에서 “호별세”를 1~2위를 냈어요.
굉장히 재산이 많았어요.
택시운수업고 크게 했어요.
아버지가 재혼을 했는데 아버지 재산보고 새 엄마가 왔어요.
아버지는 세 번째로 재혼을 했었요
세 번째 엄마는 나에게 매질을 많이 했어요.
나는 아버지가 좋아도 무서웠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외로운 아이였어요.
아마 친어머니를 일찍 여이었던 탓이지요.
남들은 엄마 자랑을 하면 나는 무척 외로웠어요.
나는 슬픔이 많은 편이었어요.
나의 노래 속에는 나의 슬픔을 표현하는 부분이 많아요.
나는 겉으로는 통이 크고 씩씩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잘 울었어요.
나는 남자가 싫어요.
문주란이 노래를 부른다.
-처음에 사랑할 때 그이는 씩씩한 남자였죠
밤하늘에 별도 달도 따주마 미더운 약속을 하더니
이제는 달라졌어 그이는 나보고 다해 달래
애기가 되어 버린 내사랑 당신 정말 미워 죽겠네
남자는 여자를 정말로 귀찮게 하네
남자는 여자를 정말로 귀찮게 하네-
1972년도 “공항의 이별”을 발표했어요.
그때는 우리나라가 살기가 어려울 때였어요.
지금은 영종도 인천공항은 즐거운 곳이지만
이민가고 외국에 취업가고 하니까 항상 김포공항은 슬픈 이별의 장면이었어요.
나도 이민을 간다고 했어요.
한국에서 문주란 이름이 싫어서요.
그때 작곡가 박춘석 선생님이 “공항의 이별”이란 곡을 주었어요.
박춘석 선생님은 나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어요.
패티김 남진 이미자씨에게 선생님은 은인이었어요.
선생민도 독신으로 혼자 사니까 예술에 전부를 바친 것 같아요
항상 나보고
문주란은 외로워도 외롭다 생각하지 말라고 위로 했어요
나는 노래 부리기 싫어서 많이 도망 다녔어요.
나는 계속 숨어 다녔고 선생님은 나를 찾아 다녔어요.
장롱속 등 별별 곳에 다 숨었어요.
그때마다 잡혀 끌려가 연습을 했어요.
소문대로 나는 정신병원에 끌려갔어요.
내가 자주 사고를 일으키니까 정신병원에 보호를 요청한 것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퇴계로에 있는 정신병원이었어요.
약 15일간 있었어요.
정신병원?
말도 마세요.
무섭고 힘든 곳이에요
선생님을 만나 다시는 속안썩힐테니 정신병원에서 나가기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어요.
선생님이 보증을 서고 났어요.
박춘석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 제가 제일먼저 달려갔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지금도 마음이 울적하면 선생님의 묘소에 가서 마음을 달래고 와요
벅춘석 선생님이 만년 총각이잖아요
하루는 내가 응석을 부리고 농담으로 “선생님 우리 결혼해요”
하니까
이게 미쳤나? 하더군요.
참 철딱서니 없었지요.
아무리 농담이라도―
내가 사업을 하다가 손해를 많이 봤어요.
참 바보 같은 짓이지요.
중소기업을 하나 시작했는데 아주 고생을 하고 사기를 당하고 그냥 두었어요.
연예인들이 사업해서 성공하는 예는 드물어요.
나는 지금도 라이브 카페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상당히 신경이 쓰여요
언제 이렇게 나이 많이 먹었는지---
요즘은 10대가 너무 많이 나와서 우리 같은 사람은 나올기회가 없어져요.
겨우 콘서트 디너쇼 정도 뿐이에요
그래도 한 달에 1~2회 정도는 노래를 해요
그래도 팬들이 나를 기억하고 멀리서 찾아주는 것이 너무 고맙지요
나는 체질이 특이한가봐요
10대 20대에는 체중이 39kg 나갔어요.
지금은 43kg 유지해요
연예인은 “보여주는 사람”이예요
노래하는 데도 체중이 많이 나가면 힘들고 좋지 않아요.
결혼?
결혼이나 이성 관계는 전혀 생각이 없어요.
혼자 사니까 얼마나 자유로워요
이금희씨도 결혼하지 마세요.
혼자서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한데―
산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싫어요.
결혼은 해도 고독하고
안 해도 고독하고
자식을 두어도 인생은 고독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분입니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