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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AI 317. 2011. 9월30일 14:16인천 출발 21:10 델리 착 여행자의 거리라는 빠리건스의 누추한 골목길에서 눈을 부치다
2일차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다시 공항. 07:50 델리에서 박도그라(Bagdogra)행09:35 2시간여 히말라야의 준령을 보면서 도착.
"히말라야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차의 원산지 다르질링(Darjileeling)으로 이동 .
해발 3,000m가 넘는 골짜기 산속 숲길을 따라 후줄하고 낡아빠진 작은 봉고에 짐들을 싣고
하염없이 덜컹거리며 올라갔다.
내려다보면 직 낭떠러지 비좁고 비포장이 이어지는 그 길을 이미 눈과 마음은 아랑곳없이 차창밖
그 아름다운 산속 집들이 띄엄 띄엄 박혀있는 그곳들에 시선이 머물러서 맨 뒷좌석에 꾸겨있듯
올라타고 있어도 내 영혼은 다르질링의 魂속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햇살은 따뜻하고 공기는 맑고 구름은 쾌청하고 숲은 이제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저 고요하고.
우리같은 여행자들의 덜컹거림을 주눅들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르질링의 홍차숲과 가난한 여인들이 차를 따는 모습이 간간히 보이고 새카만 피부와 얼굴을 가린
때묻은 머리수건이 전부인 그들의 손짓이
그래도 아름다워보임은 그들에게는 미안함일 뿐이었다.
길가에 모아둔 그들의 짐보퉁이가 꼬질하고 남루함이 ,그 곁에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이 뙤약볕에
앉아 있음이 안쓰러워 하늘을 보기도 하면서 숙소에 도착. 방문을 열고 나오면 온통의 다르질링집들이
아래 아래 이어져 있고 멀리보면 그 산골짝집들의 낭만이 열려있는 난간위에 줄을 치고 우리들은
이미 숙소의 눅눅한 이불과 침대보를 걷어 죄다 널고 마을 아래아래로 내려와 이름도 생소한 음식들을
찿아 시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어디하나 말끔하지 않아 길은 좁고 집들은 허름하고 편리하지도 않지만 아이들은 커다란 눈망울과
잘생긴 얼굴로 부끄럼을 타고 순진하게 웃고 여행자에게 친절한곳.
'뗀뚜(수제비비슷)'니 '뚝바'니 '모모(만두)'라는 한국인 입맛에 그래도 맞다는 음식들을 서툴르게 외우고
어디서 들은 이름난 식당들을 찿아내지도 못한채 디행히 'New city'라는 여행자의 전설이라는
부탄왕국의 주방장이 경영하는 곳에서 '뚝바(잔치국수정도)'나 각기 나름의 음식들을 시켜먹고
여기저기 시장을 내내 돌아 다니며 그들의 삶의 현장속에 두리번대다 되돌아 왔다.
new city에서 먹은 뚝바( 잔치국수랑 거의 비슷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빠드미자 나이드 히말라야 동물원과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등산가 양성소인
히말라야 등산학교를 택씨를 대절하여 갔다.
시간이 5분 늦어 문을 닫고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사정사정하고 애원해도 안된다는것을 세번이나
부탁했고 한국에서 왔고 여기까지 택시대절하여 부지런히 뛰어왔고 내일은 한국으로 되돌아가야되서
그런다고 다시 지긋히 말하니 열어주었고 우리는 여기저기 등산박물관까지 친절히 열어 준
그들의 배려로 다 되돌아 보고 나서니 (우리 바로 후에 온 여행자들은 결코 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
벨을 울리며 신호를 보내면서 여기저기 문들을 닫고 있었다. 고맙다고 몇번을 조아리고
손을 흔들고 나서며 사람은 서로 人情으로도 통함을 알고 기뻤다.조로아스터교광장이 있는곳에서
택시를 내리고 '볼리니'라는 연고를 사려고 죄다 약국들을 둘러서 몇개씩 사들고 집으로 되돌아 왔다.
볼리니는 처음 인도여행에서 가이드의 권유로 몇개씩 갖어갔으나 그 효능이 좋다는 나름의
구매의욕들이 집성하여 근 열개이상씩을 가는 곳마다 약국에 들려서 샀다.
일행중 한명이 발을 접질러서 병원을 갔는데 거기서도 처방약이 볼리니연고라는 바람에
다른 일행들까지 죄다 사서 가방들마다 들어가고 말았으리라. 가격도 무지 싸지만 참 좋은 약임은
나도 사용해보고 알아서 나 역시 샀고.
난간에 널어둔 침대보를 이불을 깔고 씌워서 그나마 눅눅함은 가신곳에서 깊은 산골에서 맛보는
서늘함이 잠자리를 걱정하게 추웠고 ,
침랑을 챙겨가라는 말을 무시하고 그냥 온 나는 두터운 잠퍼하나만 두르고 그런대로 비비고 잠을 잤다.
물을 갖다주는 남루한 청년도 숙소의 더운물도 샤워하기엔 너무 차가워서 겨우겨우 흘러내린 물로
그나마 씻어도 다 깨진 창들과 짖어대는 산속개들의 찌렁찌렁한 울부짖음이 스산한 산골의 밤을
스산하게하고는 그래도 밤하늘에 기대했던 별들은 거의 보이지가 않았고 ...
간간히 눈수술을 했던 딸이 부작용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혼자 덜렁 밥을 차려먹었을 남지기도 스치고
아들도 용돈을 준다고 여행떠나기전 기다리라는걸 그냥 왔는데 식구들이 스쳐가고 ...
이름모를 풍뎅이들이 유리창에 빽빽히 박혀있는 산속의 밤이 그래도 감사하고 가방을 숙소로 올려다 준
청년이 1불을 받고 너무나 좋아하던 그 눈빛이 내내 시야에 머무는 밤.
잠자기가 아까워서 다시 난간에 나와 먼 먼 산골짝 작은 집들을 바라보면서 도시에서 부족함없이 살아왔구나....
그래도 늘 욕삼이었던 나를 끔찍히 여기고 억척으로 살아온 그 虛象을 잠시 묵상하면서 잠을 청했다.
옆에 방동무인 벨라언니는 침낭에서 푸근히 잠을 쌕쌕이고 있고.
3일차
새벽해뜨는걸 보기위해 '타이거힐'에 꼭두새벽에 일어나 덜컹거리며 산길을 오르다.
예상보다 더 많은 이곳 여행자들로 인산인해고 차량의 홍수로 비좁고 험난길 길은 이미 정체 정체...
세상에 백밀러가 없이 운전한 이유를 그때에서야 알았다. 길이 좁아 차량이 기울이기 까지
서로 교체해 가면서 오르내리는 이곳은 온전히 생명을 이들에게 맡기지 않고서는 어디고 갈수도 없는곳.
아예 그런걱정일랑 다 팽게쳐두고 여기의 처신에 그저 묻혀 살면 다 잘되는곳을.
히말라야의 준령이듯 산들은 높고 그 아래에서 해가 올라오느라 숨이 찼는지 한참을 기다리니
진빨강의 가장자리부터 넘지시 올라와 주는 아침해는 많은 여행자들의 환호와 탄성 어떤이들은
찬송가를 나는 속으로 '알렐루야'를 외치며 그 경이로움과 자연의 위대한 모습들에 경탄과 감사
알수없는 신비감에 잠시 夢해지고 있었고 .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내가 살아 여기까지 지내온 날들에 감사했고 많은 여행자들의 마음속
그 속내들이 전해지면서 순수하고 맑은 인간의 본연의 善함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수많은 카메라의 시선속으로 빨려든 아침해는 그렇게 온 세상을 밝히고 하루를 열어주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롱다( 깃발에 새겨 기도하는 마음을 담아 매단 경전)는 인간이 神에 의탁하는
여린마음들이 줄을 이뤄 엉켜있고, 색색이 바랜 그 깃발들은 하늘아래 숲을 이룬 이곳의 풍경들은
차라리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끈끈이 빌어대는 그 순함으로 인해 사람냄세나는 절절함으로
눈시울이 적셔졌다.
마음속 내 롱다도 저 어디메 몇장이고 색갈을 달리 메어달고 나의 神에게 하염없이 빌었을꼬?
짜이라는 이들의 차를 파는 사람도 홍차를 파는 사람도 커피를 파는 사람도 사이사이 빼꼭한 곳에서
흑진주같은 아이들을 예뻐하면서 몸짓의 말들을 나누다가 숙소로 귀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토이트레인' 을 구경하고 웬만하면 타고 한바퀴 돌 생각으로 집을 나서다.
가는 길목에서 배탈이 났는지 갑자기 배가 틀어올라서 어떤집을 두드리니 7살정도 되는 남자아이가 나왔고
'토일렛'이 어디냐고 물으니 못알아듣는다.
'쉬'하고 흉내를 내도 모르고 응가하는 모습을 흉내내고 일행이 모두 제 나름의 바디랭귀지를 흘러도
못 알아듣는 해맑은 아이.
할수없이 바지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가르키며 다시 쉬이... 하고 흉내를 내니 금새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한참을 어깨를 들먹이며 웃어대는 그 아이는 수줍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는
살짝 몸들 틀어 화장실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르키고는 또 돌아서서 킥킥 웃는다.
그 표정과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순진한지 우리 일행을 죄다 까르르 웃고 도저히 그 화장실에서
(나름 허름하나 깔끔하고 찌든 고무통에 물을 받아놓고 사용하는듯)는 밖에서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신경이 씌어서 곧 다시 되돌아 나오면서 아이에게 한국에서 갖어간 과자한봉지를 꺼내주고는
따라나온 동생이랑 같이 먹으라고 하니 좋아 어쩔줄 모르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 이번 인도 여행에서 또하나의 잊을수 없는 이 소년을 기억하게 되리라 생각하고는 두알의 지사제를 먹고
배를 달래고 주문외듯 별탈없기를 기도했다.
그집이 그집같아서 헌 슬리퍼를 길가에서 주워 기둥에 얹어 흔적을 남기고 모퉁이마다 머리에 새겨두고
나름의 기억을 새기고 나섰던 우리 멤버6명은 이미 예약이 끝나버린 '토이트레인'의 만석을
아쉬워하면서 잠시 멈춰 서있는 기차에 올라타 사진에 담기만하고 돌아서 나왔다.
EBS에서 방영했던 다르질링의 환상적인 모습과 토이트레인의 낭만을 이미 알고 온 우리의 실망은
실재 와 보면 늘 다름도 이미 체득했다지만 일행중 한명은 토이트레인에 올라 손을 들고 달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하다가 터덕 터덕 방향을 바꾸기로 하였다.
서툰영어로 마지막 애원을 해 보아도 마지막시간까지 이미 예약이 차있어서 한바퀴를 돌아 느린속도로
다질링의 이곳저곳을 훋어 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다르질링 차밭과 텐진과 곰부바위
,티베트난민센터를 돌아보기위해 택시두대를 예약해서 한부부와 합세하여 8명이 돌아 다녔다.
이날이 마침 주일날이어서 난민센터는 상가가 문을 죄다 닫았으나 티벳인들이 그들의 차인 짜이와
우리의 동동주 비슷한것들을 대접하였고 일행들은 죄다 마시고 맛있어하는데 나는 아예 비위가 약해서
입에 대지 못하고 맛이 어떻드냐고 물어만 보다 돌아왔다.
곰부바위는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자들의 바위줄타기연습과 산행도중 다친사람들을 구하는 훈련들을
하는 곳이어서 대충보고 돌아 나섰다.
다르질링차밭을 열심히 설명해주던 안내자는 우리가 어련히 알아서 줄 팁을 자청하여 돈까지 지정하여
달라는데 어이없었고 이미 이런행위에 길이 드신 나이드신 어른이셨다 .
우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팁을 주고는 넉넉한 마음으로 돌아서긴 했지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옥에 티...
4일차
아침을 6명이 한국에서 갖어온 각자의 작은 식사분량들을 꺼내 나누며 가볍게 아침을 들고 역시 해맑은
다르질링을 떠날 준비.
아쉬워서 난간에 서서 내내 아래를 바라다보면서 가까이에 그들의 남루함이나 척박함은 가린 산속 집들의
푸름과 빼곡한 집들의 모습들이 이방인인 나를 아쉽게 하고 지난밤 불빛에 몸을 던진 수많은 나방들을
사진에 담고는 길을 떠난다.
나방하나하나가 얼마나 모양이 이쁜지 생전 보지도 못한 날벌레들의 아름다운 모습과 죽어있는
그들의 초라함이 無常함을 느끼게 하던것을.
시킴주(시킴왕국이었다가 지금은 인도에 병합이 되었다는 나라)의 현대적인 주도 '강톡'으로 5시간이 넘어 이동.
이미 지난번 지진으로 길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나고 집이 무너지고...
가는 길목마다 바위가 떨어지고 심한곳은 메우고 어디가 현대적인지 전혀 구분이 안가는 이곳은
그 강팍함이 온 길자락마다 파헤쳐져있었다.
산마루까지 조심스런 마음으로 차에 실려 뒤뚱거리며 올라서면서 정원같다는 그들의 말이 무색하듯
그저 남루하고 초라한 蘭식물원을 우리는 그저 문이 열린 틈으로 살짝 보고는 아무도 입장을 하지 않고 되돌아 나왔다.
크기도 그저 웨만한 집 정원정도의 크기지만 주변이 어찌나 초라하고 행여 밖에서 그 식물원이 보이기라도 할까봐
누더기들을 죄다 덮어 씌워서 오히려 경관을 헤친 그곳을 10루피(250원쯤?)를 주고 들어간다는데
자국의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고 인도여성들의 모습들을 훔쳐보면서 잠간 머물다가는 다시 차에 올라타고
이틀간 머물 예정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말이 5시간이지 이미 6시간을 넘어 이동을 하고 멀미로 토하는 루시아언니가 안쓰럽고 언제나 뒷자리에 앉아가는
나는 건강해서 그나마 다행이고 유일하게 아픈구석이 없어서 늘 뒷자리는 내꺼였다.
온몸이 어찌나 흔들리는지 일행중 비구니스님이 두분계셨는데 녹차 몇알을 내 손에 주시더니
강한 햇볕에 머리가 아프다니 먹어보랜다.
우리나라처럼 커텐도 없고 에어컨은 다 고장이고 차들도 어쩌면 죄다 낡을데로 낡아서 수명이 오래된
그러나 그 산몰랭이를 어찌나 제맘대로 치달아 올라가는지 이리저리 짓찌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그 틈속에서도
그 해가 그 구름이 그 나무들이 좋았고, 수척하나 눈빛 맑은 사람들이 죄다 좋아서 만나면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과자들을 두세개씩 나눠주고 볼을 만져주고 다녔다.
간간히 돈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 먹을것 달라는 사람도 많은 이곳.
그래 미리 이런 부스러기 과자들을 챙겨 가방에 담아갔고 작은돈들을 주기도 하면서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곤 했다.
스치는 사람들이 다정하고 좋은 여행. 눈빛하나로도 그들을 서로 알아볼수 있는 묘한 사람들이 지닌 속성들이 좋아서
어쩌면 나는 여행을 하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다 그랬다.
흘리고 지나가는 작은 웃음자락안에서 사람을 만나는 여행. 말도 다르고 옷도 다르고 나라가 달라도 속내에 담긴
예쁜 人情은 다 알아듣는 사람들. 사람들은 다 그랬다.
'나마스떼' 인도의 인사말을 수없이 외우고 나누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여행자들의 모습속에서
사람들은 늘 착하고 고왔으니까.
5일차
가네사 독 전망대에 올라 도시경관을 보고 강톡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하누만 독으로 이동.
카켄중가의 위용과 멋진 준령들을 바라보면서 환호성.
여기저기 사진찍는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모습들도 재밌다.
이름모를 야생꽃들과 나무들 그리고 롱다들..타르쵸... 아! 구름이 있는 하늘은 왜 그리도 파란지....
전통 티벳양식의건축물인 남걀티벳학연구소 방문
대승불교와 티벳문화연구의진흥을 위해 설립된 이 연구소는 세계최대 불교서적및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가는 길목마다 기도경문의 타르쵸들이 절을 한바퀴돌게 하고 일행들은 종교를 떠나 죄다들 무슨 소원을 비는지
그들처럼 돌리고 돌리고 돌고돈다. 사람은 어디고 빌고 기대고 의지하고 그래서 자기의 虛함을 내맡기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음을 다 드러내는 이곳,
남자도 여자도 老少도 죄다 돌리고 돌린다. 가는곳마다 돌린다.
힌두신도 붓다도 하느님도 예수도 이슬람도 여기서는 죄다 섞이어서 그들의 빔을 죄다 들어주어야 될 듯 싶은 이곳.
종교가 다원화되듯 아님 인간은 어디에고 지댈곳을 찿아 떠나는 속성이 있음을 감추지 않는
그 솔직함을 터는 이곳이 참 좋다.
어디를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구도의 흔적들이 불완전한 인간이 지닌 그 眞我의 모습인것을....
절간의 한 구퉁이에 기대고는 끝없이 맑은곳에 머문 구름들과 이곳저곳에 타오르는 香과 촛불.
그안에 잠긴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은 이미 아시리라 알지만 다 들어주기 바란다고 말하면서
한두개의 종들을 돌리고 내려온다.
자두빛 승복을 입은 僧들이 흘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그 無心을 향해 속으로 '나마스떼'하고 지나간다.
숙소로 돌아오면 우리들은 밖에 식사에 관심없고 그저 햇반을 먹거나(이미 한귝에서 뚜껑을 덮고 푹 삶아와서
그냥 먹어도 찬밥처럼 괸찮다)
컵라면을 먹거나 대충 식사들을 나눈다. 몇번 밖에서 시도하고는 아예 다 그렇게 하자고 미리 준비하고 왔고
나름 반찬들을 준비해와서 먹을만했다. 씻을 물이 늘 부족하고 차가워서 처음에 한 사람은 그런대로 하지만
나중에 씻는 사람은 차가운 물에 그나마 만족하거나 아예 뚝 끊어져서 도로 옷을 입고 나오거나 했다.
그런 숙소나 그런 숙소에서 일하는 쳥년들이나 왜들 그리 싫지안은지 나도 모를 일이다.
한바케츠의 물을 떠다주는데 겨우 미지근하게 주어도 그걸로 만족해야 했다. 지진으로 전 국토의 수도들이
죄다 틀어져서 어디에서고 물이 제대로 나온곳이 없고 그나마 조금씩 나와서 받아서 호텔 로비에서 덥혀 주기도 하는 곳.
길가에 수도들이 노상에 드러나 물이 줄줄 흐르는 이곳의 모습이 안쓰럽고 이렇게 가난한곳에 왜 이런 지진이
나는지 언제 복구하고 언제 이들이 제대로 될른지 마음이 심난하기만 했다.
몇번이고 물을 주문하고 떠다달래는 일행도 있어서 이들의 불만이 싫었고 차마 아무말은 안했지만
속상하고 여기서는 대충하고 나가면 금새 브루조아삶들이 있는곳에 安住할 터이면서도 여기저기 물을 더 달라고
더 따뜻하게 덥혀달라고 그들을 곤혹하게 한다.
더...더... 이것이 인간에게는 毒이라는것 욕심이라는것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 요구에 당혹하던 얼굴까만
17세정도의 소년들에게 미안했다.
적시는 목욕도 체험해보면 안되나? 내가 살아온 삶이 너무 푸짐했었음을 알고 이렇게 副함을 내가 소유해도 됬는지
나름 많은 부끄럼을 느끼기도 했다. 이들은 여행자들의 요구에 당황하고 잘해주지못함을 미안해하면서 쩔쩔메고 있었다.
다르질링 고향을 하루 갔다온다는 청년에게 약간의 팁을 쥐어줬다면서 벨라언니가 말끔히 떠나는 청년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일하다가 하루 휴가를 얻어 떠난다는 청년의 주머니는 얼마나 가난할지 알것 같았고
그 해맑은 모습은 우리보다 훠어얼 맑기만 했으니까. 손을 흔들어주니까 싱긋웃고 뛰어간다.
해발3,780m에 자리한 중국과의 접경지역에 있는 '쏭고호수'는 이번 지진으로 가는 길이 많이 뭉게져서 갈수가 없고
이미 길을 차단시켰다하여 가지를 못했다. 여기저기 그들이 겪은 지진의 흔적만으로도 엄청난 국가적 손실과
원상복구에 시간이 많이 걸리리라 보여져서 안타까웠다.
6일차
남찌로 힌두사원을 보러 일행들이 다 떠난후( 데레사 언니가 피로해서 장시간 버스타는것이 힘들것 같다며
쉬기를 원했고, 눈이 나빠서 여행중 어려움이 많은 언니의 부탁이라서 나도 하루 일정을 포기하고 언니랑 쉬기로 햤다.)
언니랑 나는 인근 가톨릭 성당이 있는지 찿아보았으나 없고 개신교가 하나 있어서 잠긴 문틈으로 잠간 내다보다가
저녁에 다시 들리기로 하고 주변을 산책하며 걸었다.
M .G.Mage (엠지마그라는 마하트라간디의거리)라는 우리나라 명동같은 길목을 찿아서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도 바라보고 . 말도 나눠보고 아래로 내려가 빅시장이라는곳에 들러 인도인들의 옷인 바지(사왈?)을
사고 머풀러와 웃도리까지 사서 데레사언니는 금새 인도여인으로 변해서 시원하다며 입고 다녔다.
나이어린 아기엄마라서 아기안는모습이 어설프나 얼굴은 왜 이리 이쁜지....
야채시장에 들러 이따 돌아올 일행을 위해 풋고추와 양배추 오이를 사서 챙기고 돌아오다가 나 역시 인도바지만
하나 사고(우리돈 만원으로 바지와 머풀러포함) 둘이 이곳 저곳을 다니며 구경하다가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티벳인이 장사하는 음식점에 들러 인도닭튀김과 뗀뚜(수제비같은것)를 둘이 시켜서 먹고 있는데
엄청 손님이 많아서 다 수용을 못하는 이곳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우리나라 명동칼국수보다는 맛도 덜한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이 옆에 명동 칼국수가 들어온다면
어떨까 잠시 생각해 보고는 이들은 이들의 식성에 맞는 음식이라서 더 선호할거라 생각이 든다.
데레사언니가 '볼리니'연고를 사고 나는 인도아이들이 태어나서 내내 그 큰눈가에 검정라인을 그려준는것이
신기해서 물으니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잘자라고 병도없고 좋다해서 인도에서는 그것을 아이들에게 발라준다고 했다.
가뜩이나 큰 눈에 모든 아이는 위아래 눈화장을 했다.
눈화장을 할때 그리는 연필로 쓰면 좋겠다 싶어서 한번 그려보니 좋고 값도 헐해 몇개 사서 담고는
물가가 이렇게 싸니 우리 여행자들은 놀랍기도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1달러가 47루피이니 연필을 두자리를 사고도 남았다.)
돌아와 일행들이 오기전에 물을 달래서 먼저 씻고 야채도 씻어놓고 기다리니 인근 교회에서 오후6시에 종을 친다.
교회를 찿아가서 이방인의 예배에 참석해보니 목사와 부인 아들 아마 관리인 그리고 우리 둘이 .
나중에 주민두명 . 여행자 셋이 뒤늦게 들어오더니 금새 나가버리고 8명이 앉아서 예배를 보고 있었다.
대충 알아들었지만 우리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왔는지 묻고 환영해주고 찬송가를 부르고 신구약성서를 읽고
대충 알아듣는 귀절들이 들려오면 나름 상상을 하면서 듣고 (요한복음10장 주인은 양들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것과
소돔과고모라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주기도문은 우리는 한국말로 외우고 자유기도를 하고, 축원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끝낸다.
힌두교와 불교가 성한곳에서 이렇게 가난한 교회가 있음이 마음에 걸려서 데레사언니랑 나랑 작은 애긍을 하면
어떠냐했더니 언니가 오케이해서 오히려 언니가 더 많은 돈을 내서 목사님께 드리니 고마워한다.
앞 강대에 십자가가 수놓인 그 낡음을 이야기 하시고는 우리를 문밖까지 나와준 목사. 예배내내 나를 흘끔흘끔
되돌아보던 꼬마아이에게
한국에서 갖어온 과자를 주니 쌩긋웃고는 받는다.
간간히 목사님이 예배중 묻는 질문에 대답도 잘하던 그 아이. 나중에 너도 목사가 될른지....
속으로 내내 여기 이 교회를 축복하여주시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가득차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돌아오니
일행들이 돌아와 있었다.
사실 우리6명과 비구니스님 2명 아는 형님부부와 모르는 일행까지 도합 17명이 일행이었다.
늘 식사는 우리 6명이 모여 먹었고 아까 시장에서 산 양배추와 고추는 연한것만 골랐는데도 어찌나 매운지
그래도 듬성듬성 먹었고 오이는 잘라서 고추장에 찍어먹으니 어찌나 맛있는지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했다고
날더러 고맙다고 말한다. 내참 한국사람은 어쩔수없네!!
멸치나 김 짱아찌 내가 갖어온 묵은김치등이 얼마나 소중한 우리의 식사를 내조했는지 아마 두고두고 이야기할것 같으다.
또다시 여기저기 씻을물 이야기가 들려오면서 데레사언니가 입은 옷이 히트를 쳤고 , 그들이 사고 싶어 뛰쳐나갔으나
이미 문이 잠겨 다들 그만 실망만하고 돌아오고 산속 밤은 내일을 떠날 우리들을 잠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7일차
히맗라야의휴양지 칼림퐁으로 가기위한 또 다시 이동 약 4시간( 꼭 한두시간을 더 가야 목적지를 도착했건만)이라고 한다.
가는 도중 포효하는 따스따강이 흐르는 높은 위치의 전망대에서 우리나라의 양평두물머리처럼 두개의 강이
만나서 하나의 강으로 흘러가는것을 구경하고 석회수가 있는지 비취빛이 흐린강물과 만나 흐려지면서
하나로 흐르는 모습을 보다가 내내 꿈틀대는 길목을 오르다 내리다 가는 도중 과거현재미래를 의미하는
바이사쟈 석가모니 마이 드레야 불상이 안치되어있는 타르빠촐링 곰빠를 방문.
마침 이날이 힌두축제가 있는 기념일이라서 문이 잠겨 밖에서만 잠시 보고 그냥 되돌아 나왔다.
모든 차들이 되돌아 가는 좁은길. 힌두축제라서인지 일반트럭에 무슨 원색의 헝겊들을 막대에 세우고
그들은 죄다 야릇한 염색들을 얼굴에 바르고 머리에 뿌리거나 하고 소리를 지르고 나름 축제라는
흥분감에 들떠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지나간다.
동네 어귀마다 커다란 천막을 치고 힌두신들을 모셔놓고 절하고 향을 피우고 이마에 빨간것들을 바르거나 짓뭉게서
그들의 힌두신에게 아마 축배를 올리는것 같다. 모든 차들이 정체되고 가장행렬을 하고 트럭위에 올라탄 젊은 남녀들의
소리들이 어울려져서 길가는 온통 고성이 넘친다. 잠시 차에 내려서 몇장을 찍었지만 그 원색의 가루들과 옷차림들
그들의 신이 지닌 여러 모습들이 생소하고 솔직히 무섭기도 했으나 어쩌면 저리도 기뻐하고 함께 어울어지는지
거리의 구경인파속에서 이방인이 나도 그들의 기쁨에 흠뻑 기뻐진다.
모든곳에 신이 있다는 힌두인들의 사상을 전혀 모르는 나지만 그들이 축제에 임하는 모습안에서 힌두신의 위치를
가늠해볼수 있을것같았다.
내려오는 길에 성데레사 성당을 들린대서 너무나 기뻤는데 일행들이 탄 차가 한대 고장난 바람에 어긋나서
결국 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인도인의 식당에서 음식을 시켜먹는데 맛과 위생이 최하인데다 주인이 가격이
들쑥날쑥 왕바가지를 씌운 바람에 일행들이 밖으로 나와서 투덜대면서도 그냥 스쳐 지나왔다.
같은 음식이 가격이 달랐고 계산도 잘 못하시는 그 아저씨는 스스로 눈치를 채고는 그래도 끝내 자기대로
다하고 만다. 나무관세음보살......
숙소로 돌아와 죄다들 비위가 상하다고 커피를 끓여먹고 김을 꺼내먹고 김치로 입맛을 가셨다.
우리는 어쩔수없이 한국사람인겨!!
내일 부탄왕국을 향해 출발한다는 것이 왜그리 서운한지 이미 인도에 정이 들어서 아쉬움에 밤 10시까지 서성대었다.
8일차
인도의 접경지대인 부탄의 푸엔트슬링(Phuentsholirg)으로 이동
비자발급을 위해 접경지대에 오래 머물었다. 뭐가 그리 시간이 걸리는지 한사람 한사람 다쓰고도 얼마나
기다렸는지 인도 악기로 여행자들에게 구걸하는 눈 먼 아저씨의 처량한 음룰이 마음에
걸려 몇푼의 돈을 쥐어주니 고마워한다.
아무도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아도 그 오랜시간을 불어대는 악기의 소리에 안젤라가 한춤을 얼쑤얼쑤하면서 추어댄다.
모두 박수를 치고 슬그머니 악기할아버지의 돈을 걷어가는 길거리여인같은 젊은 여자는 연신 기침을
해대고 몸은 약하디 약한채 그 주변을 맴돈다. 데레사 언니는 이들이 아마 함께 의지하고 살거라고 짐작한다.
과자와 먹을것을 쥐어주니 얼른 담아간다.폐결핵이 걸린거라며 안쓰러워한다.
어디를 가나 이런 사람은 꼭 있구나...
비자발급이 늦어져 바나나를 사다 나눠먹고 점심을 떼운다. 작은 또띠(밀가루부치미)두장을 사서 나눠먹고 나니 출발이다.
부탄. 최대 빈국이면서 행복지수 세계8위라는 나라.느림의 그 나라를 향해 가는 길목마저 느리고 느려서 마음을 다스린다.
여태 서둘러 살았으니 부탄에 머문동안 조금 더디게 살아보자하고.
인도의 접경지대를 벗어나자 조용하고 사람도 드물고 차도 드물고 여기저기 흐트러져있는것이 덜 보이고
높은 산들이 우뚝우뚝 솟은곳이 턱 우리앞에 전개된다.
부탄왕국. 여기서부터는 식사와 호텔이 깨끗하게 제공되는 일주일이 열린다.페키지여행으로 일주일은
진행이 되기로 했으니까.
가이드가 나와서는 여태까지 힘드셨다면 부탄은 평화의 나라이며 깨끗하고 인도와는 다른나라라며 으쓱한다.
자기나라에 대한 긍지가 대단한것이 인물도 잘 생기고 어글어글 눈빛도 살아있어서 멋진 이 청년은
나이가 25살이라며 정식가이드자격증을 갖이고 있다한다. 내년에 다시 공부를 정식으로 더 배워 더 나은
포부를 갖고 있다고까지 한다.
정식으로 정복을 입고 그 더운날 끝나는 날까지 예를 갖추는 그 청년을 아마 기억할것이고 잊을수 없으리라.
멋진 숙소에 환호한 우리들은 물도 식사도 잠자리도 다 만족하면서 느긋하게 부탄의 첫밤을 기대하고 있었다.
란(음식을 싸서먹는 밀전병)을 워낙 좋아하는 나는 베낭여행인 인도에서는 정작 한번도 못 먹었고
(변두리 구석진곳에서만 머물러서) 이곳 부탄식사에서는 따끈하게 금방 구워서 나오니 다른 음식
(치즈나 커리, 향내나는 음식들,생선)은 전혀 못 먹으니 감자와 란만 실컷먹고 커피를 마셨다.
스님이 여직 남겨 갖이고 다니시는 무우짱아찌를 전 일행이 한조각씩을 접시에 나눠담아 마지막 입가심으로
먹는 행운까지 있었다.
부탄부터는 모든 일행이 한 차에 타고 같이 다니는고로 서로 어색하거나 하던것이 조금은 풀릴것 같다,
누구에게나 금새 친해지는 나지만 남자들은 말을 걸기가 나빠서 아예 모른체 지내는것도 불편하기는 햤다.
일행들은 죄다 씻고있는 틈에 호텔옆에 시장이 있는것을 들어오다가 보아두었으니 밖으로 나가 시장을 구경했다.
물건을 사기위한것이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묻어있는 이곳을 보고 싶어서 였다.
부탄인들이 집집마다 하나씨 갖고있다는 주전자. 차끓이는 주전자를 제일작은걸로 구입.
마른 생선도
수북하고 야채며 등등 인도와 큰 차이는 없어도 나름 마른생선이나 젖은 생선들을 볼수 있었음이 신기했다.
파인애플두개를 사들고 호텔에 들어와 나누어 먹었다. 아주 여럿이.
오랫만에 시원한 빨래와 목간을하고 뽀송한 잠자리에 들면서 내딸과아들과 남편을 생각해 낸다.
엄마가 없어서 불편할 내 가족들... 모두가 떠나 떨어져 있으니 더 잘해줄어야 함을 알아진다.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면서 베게에 머리만 뉘이면 잠을 자버리는 나를 또 감사한다.
9일차
부탄의수도인 팀부로 이동
팀푸페스티발(가면놀이및 민속놀이)을 보러 갔다. 전 국민이 10월 1일부터 10월7일까지 일주일간을
하루종일 열린다는 것.
T.V에서도 Live로 하루종일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불교축제기간이라고 한다. 아마 온 마을 온 공동체가 하나씩
연습을하여 나와서 펼치는 자락이 아닐까. 죄다 민속옷에 온갖의 치장을하고 여기서 선남선녀가 만나기도 한다는
최고의 축제일 그안에 들어간 우리는 산골짝 어디에서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다 내려왔는지 그 넓은 광장에
질서정연하게 앉아 감상하고 풀밭에 앉아 온가족이 음식을 나눠먹고 그야말로 대축제임을 대번에 알수 있었다.
외국인 이라서인지 양보도 해주고 그들이 축제때 높은 스님에게 하사받는 어떤 끈들을 받기위해 그 많은 인파가 줄을
서 있는데 우리를 끼워 넣어주었고 우리들은 욕심많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색깔대로 다 달라고 떼를 쓰고 얻어왔으니..
그들은 하나를 받아 목에 걸어 묶거나 팔에 묶어서 무언가를 기념하는것 같았고 우리는 다만 얻어 죄다
가방에 쓸어 넣고 왔다.
사람들이 질서를 지키는 모습이나 옷차림 음식들을 보면서 일주일간 민속놀이 잔치내내 저 많은 인파가 계속
나올수 있음과 하루종일을 그 자리를 지키고 즐긴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면서 이 나라가 왜 행복지수가
높은지 저 인파속 그들의 순명함과 순수안에서 함께 묻어있을 작은 가치들을 알아내진다.
첫날 공원에서 만난 부탄아이는 날더러 어디에서 왔냐고 유창한 영어로 물었다. 아마 여고1학년정도 학생이었다.
"한국을 아세요? 거기에서 왔다"고 하니까 물론 안다고 하면서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한다.
그러면 K Pop도 아냐고 하니까 물론이라며 '아이돌'을 알고 한국을 좋아해서 혼자 한국말도 공부하고 있단다.
와아.... 와락 안아주면서 고맙다고 하니까 오히려 감사해요. 사량해요. 하면서 떠나던 그 아이.
당당하고 밝은 그 여학생은 언젠가 한국을 꼭 가고 싶다고 말하고 갔었다.
산속 오지의 가난한 나라 부탄이라는 나름의 무지랭이 판단을 지닌 나를 단숨에 배어내던 그 에쁜 여햑생의
당당함이 어찌 행복한지 그날 나는 이들안에 무한의 성장을 하는 이런 젊은이들이 있음을 알고 왕의 결혼을
자랑삼아 말하고 준비하는 이들의 신실함에 그저 넋을 놓았었다.
우리 일행은 사진을 찍고 나서는 금새 축제장에 있는것이 따분해져서 죄다 나오고 말았고 시간보다 더 일찍
주차장으로 와서 길가에 넘쳐나는 대마초를 보고 따보고 쳐다보니 그들도 이것을 따가거나 지니면 경찰에
잡혀간다면서 아무도 손을 대지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들판에 대마초는 엄청나게 자라나고 있었고. 다만 풀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라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축제장에서 들리는 그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저 많은 인파는 언제 그 산골집을 찿아갈지 시내 호텔이
다 예약이 되있다 한들 이 많은 사람이 머물 것같지도 않고... 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데 오후 4시가 다 지나도
그들은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 만석으로 앉아 있었다.
행복지수.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었고 그렇게 알고 살아가는지 내가 왜 걱정을 하고 있는지 나와 그들은
무엇이 차이가 있는지 알다가도모를 일이다.
칼빈디곰파를 방문. 팀부 민속박물관이라고 하는100년전 부탄의 시골보습을 보면서히말라야
동물인 타킨(몸통은소와같고 머리는 염소)을 볼 계획이었으나 사진으로 설명만 듣고 말았다.
다양한 표정의탄트릭신상이 인상적인 국립기념탐을 방문후 파란 돌로 만들어진 城이라는 뜻의 타쉬조종을 방문.
숙소로 돌아와 호텔이 준비한 맛난 란이랑 식사후 또 하루를 접다.
10일차
부탄의 여름철 행정수도인 파로(Paro)로 이동.
부탄을 상징하는 파티마삼바바에전설이 깃든 탁상(호랑이 둥지) 사원을 방문하기로 하고 나서다.
이번여행의 메인이 될 오늘의 여정을 기대하면서 사원아래에서 말들에 죄다 오른다. 말이 아마 70%는
산위까지 올려다준다고 한다.
나와 덩치 큰 남자두분이랑 셋만 말이 부족하여 저 아래 병들어 시들거리는 말들을 할수 없이 불러와서
타게 되었는데 아마 이 말은 금새 위를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쉬고있는 말 같아보였는데 죄다들 시들시들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타기로 한 말중 몇마리를 이태리와 스페인에서 왔다는 여행자들이 타고가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
일행중 맨뒤로 내가 가게 되었고 남자들이 탄 말이 앞에 있었는데 죄다 가다서고 가다서고 하는 바람에
내 말까지 이리저리 밀쳐지고 몇번이고 떨어질 기세여서 어찌나 붙잡고 그 높은곳을 올라타고 갔는지 이러다가
나는 말을 잘 타고 말지도 모른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스님한분이 무섭다고 내려달라고 소리소리 지르셨다고 나중에 두고두고 말들을해서 일행들이 죄다 웃었는데
나는 맨뒤라서 젼혀 듣지도 못했다. 생전처음 말을 타보니 너무 무서워서 그랬다고 부끄러워하사는 스님의 모습이
너무 보기가 좋았다.
스님두분의 해맑은 모습과 모처럼 절밖을 나와 자유여행을 하시는 모습이 귀하고 그들 구도의 삶자락의 한부분을
차지할 이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할까를 생각해보면서 스님을 알게 된 인연에 감사했다. 늘 양보하고 염주를
돌리시는 버스안에서의 모습이나 우리들과 어울리는 자연스러움이 보기가 좋았다.
중간지점휴게소에서 올라온 모든 사람들에게 짜이나 차를 대접하고 비스켓을 원없이 내놓고 대접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먹던 비스켓인데 맛이있다고 일행들이 한국에 갖어간다고 사던 그것을 여기서 또 먹게 된것이다.
안내자 소냐의 허락을 받고 나는 먼저 떠난 일행들 뒤를 바지런히 쫒아가서 그 길목마다 피어있는 들꽃이나
고사리과의 나무들이 큰 나무에 기생해있는 모습이랑(신생대 고생대의 분위기였다) 그리고 산에서 흘러내려돈
맑은 물들을 보면서 롱다와 타르쵸가 나무와 길가에 그득그득 찬 길목을 오르고 또 올라 결국 맨 먼저 탁상사원에 올랐다.
번개가 호랑이등에 선사를 태워 와서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사원. 부탄 종교의 본산인 이곳.
어찌나 신성시 하는지 검문과 카메라까지 맡기고 들어가고 경찰과 스님들이 여기저기 단속이 심하였다.
다 보고 내려오는데 소냐가 바위에 소원지문찍는데를 해보고 왔냐고 한다. 소원지문바위? 다시 검문을 하고
카메라를 맡기고 소냐를 따라 3번째 오르막에 있는 큰 바위가 오른손 엄지만큼 구멍이 짓눌리어 있는데 뒤로
2m정도 떨어져서 눈을 감고 소원을 말하고 걸어와서 그 부분에 엄지손가락이 닿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하길레
전부 일렬로 서서 한명씩 해 보는데 나는 사실 눈을 꼭 감지않고 살며시 뜨고는 한번 해보았더니 다 보이니
당연히 그곳에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밖에. 죄다들 소원이룬다고 난리났고...
다시 정식으로 시도를 해보고 눈을 질근 감고 해 보았더니 어쭈. 딱 들어맞어 소냐가 "됬어요
. 소원이루겠어요".하고 소리를 지른다.
사실 그것보다도 탁상사원의 위용이 대단했고 그 산기슭 그 높은 비탈위에 어찌 저리 큰 절을 세울수 있었을까?
붓다의 얼굴이 너무 따뜻하고 절하는 스님의 손모음이 너무나 진지한 그곳, 그 엄한 검색이 왜 있는지
알것같은 山寺는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그 높은곳에 올라와 기도하는 이곳사람들의 깊은 기도가 어이 안 전해질까... 탁상은 정말 아침에 나서서
저녁나절에 돌아가야할 만큼 깊고
멀고 높은곳이었다.
그래 그 많은 사람의 롱다들이 온 길 모퉁이를 쳐 메이고 원색의 소리들이 하늘을 때리고 있었으니
그 안에 울부짖음 오죽할까?
아마 神도 귀가 시려 가리지나 않을지... 사람들은 언제나 저리 아프고 상처받고 힘들어 사는구나.
나도 너도 또 너도.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들이 '하이' '웰컴' 아니면 미소를 짖고 지나간다. 쟈펜?노 ,코리아...
으음 코리아. 아이 두(I do). 바이(by).....
탁상의 길목에서 神이 없다면 인간은 어찌 버티고 살았을지 그저 모든 神께 감사하기로 한다.
오던길에 돈을 두번이나 주웠는데 기도처에 놓고 나도 촛불을 밝히고 여기 다녀간 모든이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해지기를 기도했고 촛불을 켠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다시 간절히 기도하고 돌아섰다.
맨먼저 아까 휴게소로 내려와 기다리니 한참을 있다가 죄다 내려온다. 절에서 주는 밥을 푸짐하게 야채만 주니까
먹을수있어서 고추장을 넣고 비벼서 실컷 오랫만에 포만을 느끼며 먹고는 아까 말을 탔던 곳으로 내려왔다.
또다시 부탄에서 가장 오래된'카주락항'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 왔다. 그 아름다움이 길목의 보라빛 꽃들과
절의 여러 문양모습들까지 멋짐이었다.
돌리는 경전자락에 자신들의 기도를 위해 놓아둔 엄지만한 탑이 예뻐서 그냥 하나 들고 나왔다.
작고 별 보잘것은 없어도 그들이 놓아둔 그 물건이 소중해서 약간의 캥김이 있었지만 들고 기념으로 갖어 왔다.
내 기도에 그들의 기도도 넣어줄 요량으로 하고.
피곤함도 모르고 하루내내 고되게 다닌 길들이지만 아마 이번 여행중 가장 멋진 하루가 아니었을까?
또 여행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음이 아쉬워서 이밤이 몹씨도 아깝기만 하다. 하루하루가 지나감이 너무나 빠르기만한것 같은 밤.
11일차
17세기 부탄의 서울 수도인 푸나카(Punaka)로 약 2시간 이동.
도중 헤발3,140m의 도츄라고개에셔'조모라리'등의 히말라야 설산이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감상.
108개의 탑이 서있는 이 고개에는 히말라야의 준령이 전망이 되는 아름다움과 롱다와 여행자들의 모습들이 가득했고
일행중 몇은 고산증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이 탑을 저 아래까지 내려가 한바퀴를 돌아서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모추강과포추강이 주변에 둘러 흐르는 푸나카종은 부탄의300년동안 옛수도였다고 한다.
이곳의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공원에서 잠시 쉬면서 사진을 담고 부탄의 현 왕의 결혼식이 10월13일에
이곳에서 치뤄지기 때문에 외국인은 들어갈 수가 없다하여 이곳에서 잠시 보다가 가까이가서는 문밖에서만
그 위용을 보고 여기저기 학생들이 나와 대청소를 하고 있었다,
오는 도중에서 산자락 길자락 모든 대국민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왕을 위해서라기 보다 자기나라의 긍지를 위해 열심히 여기저기 자기네 집까지 동네까지 죄다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왕듀(Wangdue)로 이동하여 푸나카강 언덕위에 있는 고대 군사상 요충지 왕듀포두링 방문
천둥번개로 세상을 구한 '드럭파쿤리'스님의 금강저를 보러 '치미라캉 사원'을 탐방.
부탄의 마지막 밤을 생각하면서 산돌아 또 돌아 오르고 또 오르고 천길만길 낭떠러지길을 아스라이
숨차 달리던 시간들.
산속 그 길들위에서 작은 평지하나 없이 산속에 둥지틀어 살아가는 부탄사람들. 이 험한 준령에 사는 그들은
무엇이 그리도 행복할까?
어디를 보아도 풍족함이나 넉넉함이 없어보이고 물자들마저 쉽사리 구할만큼 가까이 살지도 않고 밭이 넓거나
농사마저 산속 어디에서 지어내고 있는지 알수도 없건만 숙소에 짐내릴때 내짐이 안온다고 종종대는
우리 일행들에게 "뭐가 그리 의심이 많냐고.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죄다 알아서 숙소에 갔다줄것이니
믿어달라'고 화난듯 말하던 부탄의 안내자의 말을 전하는 소냐의 안타까운 일침이 우리와 그들의 차이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든다. 베낭하나 카운터앞에 두고 나가면서도 이리두어도 되냐고 묻는 우리들에게
그들의 시선이 의아하고 괸찮다고 그냥 가도 된다고 말하던 그들의 순수함과 여행객이 밤10시가 지나도록 혼자
다녀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부탄.
물질의 풍요가 절대로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것 이론으로만 알고있는 우리들일까?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順하고 더 純하고 팁을 주면 놀라고 안 받으려하고 송구스러워하고 깍뜻하고
말이나 표정이 따뜻하고 다소곳하기만 하다. 우리일행들은 돌아오는날까지 그 잘난 가방이나 걸망하나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한 반면 그들은 언제고 반듯하고 정직하게 제자리에 잘도 갖어다 놔두고 갔었다.
다만 우리처럼 쏜살같이 갖어오는게 아니라 서서히 아주 느리게 갖어올 차이였을 뿐이다.
12일차
달리는 차창밖으로 지는 해를 보느라 목이 아픈줄도 몰랐다
부탄의 마지막을 접고 푸엔트숄링(Phuentshoing)으로 이동 약 6시간 이동 . 인도접경지대에서 다시 비자싸인을
하는데도 시간소요가 엄청 휴....
인도 실리구리로 또다시 4시간 이동 .
해저물어가는 시간대의 인도의 하늘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숲이있는 나라.
그 숲사이 지는 태양의 모습과 나무에 걸려있는 태양은 우리들의 피곤을 막고 카메라에 이 모든것을 담기로
흔들리는 차창을 기웃거리게 했다.
그리고도 지는 노을의 아름다움. 다시 길가로 나오면 먼지와 소와 개들.... 작은 노점들. 많은 인력거 . 사람들....
부탄의 산자락을 돌다가 大地인 인도로 내려온 나는 그 편안함과 사람들의 질펀함이 왜그리 좋은지 ,
인도의 까만 눈과 휘감는 옷자락과 가난해서 길바닥에 노숙을 하던 그 많은 사람들의 헤설픈 웃음소리가
왜그리 좋은지 뭔가 그득 넉넉한 이들의 삶의 자락과 누추함이 함께 공존하는 이 모순의 현장안에서
사람냄세나게 진득이며 비벼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은 왜 생기는지.....
말이 4시간이지 거의 7시간을 걸려 (인도를 들어오자마자 인파와 먼지와 자동차와 길거리
소와 개와 찻길 한가운데서 용변보는 사람들이 있는 그 번잡함을 통과하고 기차가 어찌나 긴지
기차하나 통과하기위해 반시간을 기다리다 가야되는 정체된 시간까지) 캄캄한 밤에 숙소에 도착하니
곰팡내가 주룩주룩하고 목욕탕에 타올도 없고.... 긴 시간 덜렁대는 차를 타도록 배려한 여행사에게도
차라리 비행기로 바로 옮길수는 없었을까? 인도에서 이렇게 하루를 차만타고 이동했다는 억울함때문에
숙소에서 화를 내기까지 소냐가 건의하기로하고 이미 파김치가 된 우리들은 그냥 씻고 저녁은 건너뛰고
6명이 술을 먹을줄 몰라 맥주 한병을 사서 6등분하고 남들처럼 여행을 잘 마친 것 감사하고
또 다시 멋진 여행을 기약하며 건배를 했고 루시아언니가 김구워온 것이 남아 안주와 식사보충용으로
죄다 나누어 먹었으니 ... 그리고 인도의 마지막 밤을 곰팡내때문에 저녁내내 에어콘의 징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려 14시간의 자동차에 시달린 피로에 항복하여 푹 빨려들어 자버렸다.
13일차
포스터를 찍어 올릴수밖에....
살라구라애서 바구도구라로 이동, 국내선 탑승하여 (10:10) 델리에 (12:05)에 도착.
일단 맨처음 인도에 왔을때 들렸던 빠리건즈(여행자의거리)라는 곳의 숙소에 짐을 놓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쉼터'라는 한국식당에서 김치찌게와 된장찌게를 시켜서 정말 머슴처럼(?) 밥을
감칠나게 먹고 여행자의 거리가 이미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처럼 큰 시장이어서 이곳은 숙소도 많고
베낭여행온 사람들을 위해 허름한 숙소와 음식점이 많고 볼거리도 많아서 여행자의 거리라고 일컫고 있다한다.
우리 6명만 빼고 이들은 늦은 저녁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쉬거나 시장을 간다고 남았고 ,
우리는 인도가 '타지마할'과 '악쎄르담'을 자랑한다는 그 '악쎄르담(힌두사원본부)'를 지하철
(한국기술로 만들었다한다) 7정거장을 타고 가서 비행기 탈 때보다 더 많은 검색과 몸까지 커텐속에
들어가 검사를 받고 어느것 하나 들고 갈수 없이 다 맡기고 (신발까지) 맨발로 그 본산을 감탄하고
감탄하면서 인도의 문화에 놀라움을 표했다. 소냐가 이것을 안보고 가면 후회한다고 했는데도
안 따라와준 일행들이 오히려 고마웠다, 왜냐면 그 일행이 다 왔다면 검문시간도 길었고 그것을
기다리다가 앞면만 보다가 되돌아 올 뻔 하였기 때문이다. 맨발로 뛰어다니며 시간이 절박하여
수박겉핥기 식으로 보다가 목말라 루시아언니가 콜라를 샀는데도 마실시간조차없이 후두둑 들고
다시 지하철로 뛰어와 숙소로 돌아오니 겨우 30여분밖에 시간이 없었다.
씻고 가야겠지만 이 시장도 조금은 둘러보아야해서 나는 남아서 이리저리 훝어보다가 몇개의
딸을 위한 선물등을 샀고 시간이 얼추되어 골목을 뛰어 들어갔으나 아뿔싸..
너무 급하게 뛰어오다가 그만 그 많은 미로 골목에서 내 숙소를 착각하고 말았으니...
시간이 되어 공항에 갈 시간이 임박해서 소냐나 일행이 기다릴터인데 아무리 그 근방을 뒤져도 오리무중.
하느님, 성모님.... 외우고 외우고 다시 골목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마음을 차분히 먹고
천천히 더듬어 호텔을 찿아냈다.
소냐는 벌써 나를 찿으러 갔고 . 다행히 약속시간5분전에 내가 도착했고 소냐가 되돌아 왔고 .
공항에 와서 온 땀으로 가득한 나는 화장실로 먼저가 발을 씻고 땀도 씻고 시장에서 주어온 것들을
가방에 꾹꾹 눌러담고 어찌나 놀랐는지 행여 일행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어떻하나? 공항시간 놓치면 어떻하나?
내 소심함이 발동하여 잠시 앗찔했던 그 무서움이 공항도착까지 두근거려서 한참을 애를 먹었다.
차창으로 인도를 바라보면서 '인도여 안녕. 또 한번 오게 될꺼야. 이제는 남인도를 저번에 덜 보고
간 곳을 다시 가 볼거니까"
인도. 마음안에 어떤 익숙함으로 다가오는 것들.
그것이 무엇일까? 어떤 편안함이 마음자락에 그리고 나마스떼가 갖인 그 말들안에 받아들이는 운명의 윤회를
그들이 자연스레 순명함이 왜 그리도 좋아질까? 사람이 좋아서 나는 다시 이곳을 오고 싶어하고 이미 마음으로 정하고 있다.
흑진주같은 눈빛들이 가난함안에 반짝이는 그 유유함이 너무 좋아서 나는 인도가 너무나 좋다.
비행기에 올라타면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과 내 조국이 있음이 든든하고 좋아져서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14일차
12;25분 인천공항 도착.
날씨도 좋고
TV에선 연신 뉴스들이 똑같이 어제들을 이어나가고...
아, 또 듣기싫은 말들이나 보기싫은 일들이 정치판에 움쩍이고 있는 우리 나라.
나는 13박14일을 이 모두를 떠나 행복했네요.
인도여 안녕
부탄이여 안녕
부탄왕 어제 장가는 잘 가셨남요?.....
13박14일 .
무지 행복한 그 기억들.
그 기억들이 있어서 또 하루하루 잘 살고 말것임을.
안녕 Yesterday!!
나마스떼!!
이방인들에게 관심이 많은 이들은 함께 모이더니 사진을 찍어주겠냐고 한다. 같이 끌어 안고 사진을 찍고 보여주니 너무 좋아한다, 이쁜것들.
첫댓글 아름다운 사진 ,고맙구요
혼자서여행하신건가요 , 용기가 진짜 엄청부럽습니다 ,엄두가 안나서요
멋지시네요~ 사진도 글도 아주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