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여행록1]
ㅡ우물안ㅡ
'코로나19'로 인해 추석 명절 성묘를 자제하라고 하여 아버님 제사는 묘소에서 형제들만 참여했다. 차례상은 선친의 위패가 모셔진 사찰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전통적인 유교 문화가 세월이 흐른 탓인지 많이 변해가고 있다. 주거ㆍ결혼ㆍ장례 의식이 달라지는 것을 볼 때 격세지감을 느낀다.
가족들과도 비대면하라고 모친께서 당부하신다. 연휴가 겹쳐 나의 칠순 기념을 '경자년庚子年이 가기 전 아내와 함께 4박5일간 국내 여행을 하기로 했다.
해외 여행 자유화 이후 그동안 각 나라의 문화를 많이 체험해왔다.
지난 해부터 벼루던 스페인ㆍ포르투갈 역사 기행은 기약이 없다.
9개월째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바이러스는 당분간 멈출 기미가 없다. '송동훈의 그랜드투어'와 '이강혁의 스페인역사 다이제스트 100'을 읽으며 유럽 여행은 눈으로만 체험하고 있다.
아들과 딸이 주선한 통영과 삼척, 평창으로 일정을 잡았다. 고구려 땅에서 백제와 신라땅을 밟으며 삼국의 향기를 느껴볼 기회가 생겼다.
'논개'가 임진왜란 때 왜장을 유인해 의암에서 함께 강물에 투신한 진주성 촉석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다. 경남 유형문화재 666호다.
외국 사신을 맞는 함옥헌,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의기사義妓祠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의로운 기녀를 모신 사당이다. 진주성 안의 20여 곳의 문화재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한다.
이내 점심시간이다. 딸이 적극 추천한 하연옥으로 향했다. 냉면과 육전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남다른 솜씨의 맛이다.
남쪽은 아직도 여름이 진행 중이다. 아쉽다면 지난 여름 태풍 마이삭으로 인해 단풍이 들기 전에 나뭇잎을 거의 떨구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경상도 사투리 "어서 오이소" 에 정감이 간다.
조선시대의 선비 담헌 홍대용(1731~1783)은 음악에 미칠 정도로 재능이 남다르다. 그의 나이 35세 때 숙부 홍억을 따라 청나라를 여행하게 된다. 을유년과 병술년 사이 6개월 동안 연경을 거쳐 심양을 다니면서 썼다고 해서 제목이 '을경연행록乙庚燕行錄'이다. 몇대목 읽어본다.
"참으로 사람의 옹졸한 가슴을 확 뚫어 밝고 환하게 풀어헤치고, 악착스러운 심사를 말끔히 잊을 만하였다. 이제 스스로 내 평생을 헤아려보니 독 속의 자라와 우물 안의 개구리였을 뿐이다. 어찌 하늘 아래 이렇게 거대한 곳이 있는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여행이란 발품을 열심히 팔아야 소득이 생긴다.
ㅡ시인의 발자취ㅡ
국내 여행으로는 최장기간이다.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보던 명소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상상외이다. 지방자치제 이후로 달라진 팬션이나 전원주택들이 눈을 홀긴다. 사통팔달 자동차전용도로와 지방도로, 골목길까지 국제급 수준이다.
문화재나 유원지에 가면 지방의 특색을 알리기 위해 해설사가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새로 난 길은 네비게이션이 골목길까지 꼼꼼히 찾아준다.
통영은 유명인들이 많이 태어난 땅이다. '토지' 작가 박경리 문학관을 찾았다. 월요일은 휴무여서 문이 잠겼다. 작가의 흑백 사진이 걸려있어 카메라에 담고 돌아섰다.
초정艸丁 김상옥金相沃(1920~2004) 시조 시인이 살았던 '통영시 향남 1번가길 13'으로 향했다. 대로변 옆 좁은 골목 안쪽이다. 인도 바닥에 '향남1번가' 동판이 새겨져 있다.
'초정 김상옥 거리' 표지석이 입구에 세워져 있다. 동진여인숙 함석 담벼락에 미소가 담긴 그의 초상과 약력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작가의 시 세계를 들췄다.
'김상옥 시조연구'라는 제목으로 대학원 석사 논문을 썼다. 시인이 살았던 생가가 궁금하던 차였다.
내가 다닌 분원 초등학교 자리가 조선시대 때 사옹원 왕실 백자를 굽던 터다. 시인은 백자ㆍ청자를 좋아하고 시조로 읊었기에 김상옥 작가를 논문의 주제 인물로 선택해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대문이 잠겨있어 들어가지 못한다. 입구 편의점에서 물어보니 현재 수리중이라고 한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닷새만에 부인 곁으로 간 남편, 그가 살던 내부를 못보고 돌아서기가 아쉬웠다.
역사ㆍ유적지를 다 보지 못한 곳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한다.
저녁은 맛집 엄마손 충무김밥이다. 2인분을 포장해서 숙소인 통영국제음악당 옆 스텐포드호텔로 향했다.
[경자여행록2]
ㅡ남해는 여름ㅡ
아침을 먹고 남해로 나선다. 명물다리 사천대교를 건넜다. 미국마을 골목에 지팡이 짚고 거니는 노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불현듯 내 나이를 돌이켜본다. 나의 자화상이다.
내가 꼭 고백할 일이 하나 있다. 젊은 시절에 노인을 경멸輕蔑했다.
초라한 모습과 동작도 느리고 뒤뚱거리며, 꾀죄죄한 차림이 싫어서다. 노인 대열에 들어서니 정신이 번뜩인다. 망각했었다.
미국마을 앞 횃불을 불끈 쥔 자유의 여신상은 먼 바다를 주시한다. 바라보는 곳이 필시 태평양 건너 미국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모습이다. 무생명도 고국 땅을 그린다.
'다랭이마을' 박원숙 커피 앤 스토리 2호점 계단을 밟았다. 경사가 심한 길을 관광객들이 연신 오르내린다.
가천마을 다랭이 논에는 곧 베어질 누런 벼가 태풍에 스러지지 않고 꼿꼿히 박혀 있다.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 다랭이마을이 누대累代로 이어져 왔다.
독일마을로 향한다. 박원숙 커피 앤 스토리 1호점에서 차 한잔으로 시간이 제법 흘렀다. 가을꽃이 풍성한 마을길의 거리가 한산하다. 한적한 독일 시골 마을에 있는 느낌이다. 대리만족한다.
사천해상케이블카를 타고 각산봉수대角山烽燧臺에 오르니 경남의 풍광이 한눈에 보인다. 청명한 날씨 덕분이다.
백 번 듣기보다 직접 눈으로 보니 생생하다. 해설사는 마스크 착용 단속원으로 임무가 바뀌었다.
넓은 주차장엔 승용차 몇 대 뿐, 관광버스는 한 대도 없다. 수도首都와 제일 먼 거리에 있는 땅 경남 남해! 올 여름 집중호우로 피해가 심하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하동 ㆍ합천, 사천도 예외는 아니다. 열심히 복구 중이다.
서호시장 만성복집이 유명하다고 소문이 났다. 저녁을 먹기 위해 갔는데 문이 닫혔다. 꿩대신 닭, 인근 남옥식당에서 졸복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ㅡ블루로드길ㅡ
만성복집은 새벽부터 줄을 선다. 참복이 해장국으로 제격이다.
바다를 끼고 달리는 새벽길은 상큼하다. 푸르디 푸른 동해, 해풍을 가르며 후포항에 다달았다. 친구 영오의 전원주택이 있는 동네다. 도착해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수 백년 아름드리 금강송들이 태풍에 넘어져 피해를 입은 흔적이 남아있다.
어느 나라에 못지 않은 지방의 도로는 자랑할 만하다. 덕분에 차막힘 없이 목적지 삼척에 도착했다. 구름과 숨바꼭질하는 달빛을 받으며 해변 둘레길을 밤늦도록 걸었다.
아침을 먹고 잠시 휴휴암에서 방생 후 낙산사로 향한다. 15년 전의 대형 화재로 재건한 절 모습은 고찰같다. 홍련암으로 이어지는 길은 인산인해다. 제법 숲이 이루어져 민둥산은 사라졌다.
달리고 달려 오대산길로 들어선다. 차들이 매표소에서 정체를 이룬다.
상원사ㆍ중대사자암ㆍ적멸보궁 가는 길의 현무암 1,241계단을 밟는다. 가을다운 하늘은 오를수록 점점 높아간다.
먹이가 흔한 숲에 다람쥐는 겨울 양식 줍기에 바쁘다.
ㅡ평창으로ㅡ
평창은 벌써 겨울이 온 듯하다. 이미 단풍이 물들고 있다. 밤공기가 제법 차갑다. 아이들의 천국이다. 곧 스키어들이 장사진을 이룰 날이 머지 않았다.
드래곤밸리호텔에서의 뷔페가 여정 마지막날 아침식사다. 먹는 시간 빼고는 마스크 착용이다.
동계올림픽 때의 부산했던 모습과는 대조적인 한산한 길을 달린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음식은 모두 포장 판매(테이크아웃) 한다.
점심은 떡볶이와 오뎅으로 차 안에서 먹었다. 체온 검사, 거주지와 연락처 적는 일 등 드라이브 스루로 질서를 철저히 잘 지키는 국민성을 실감한다.
한산한 고속도로는 경기도에 접어들면서 잠시 정체다.
작은 나라, 아니 광대한 우리나라 땅을 미처 가보지 못한 곳은 5년 뒤 아내의 칠순 때 기약하고 여행을 접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강진의 다산초당은 가을이 가기 전에 떠나볼 예정이다. 여행하는 동안 스친 인연이 많다. 못다 쓴 글은 머리에 스켓치했다.
호주에 거주하는 처 조카딸 수연과 여의도에 사는 둘째 조카 딸 나리, 각자 씩씩한 아들을 둔 아이 엄마다. 십시일반 세심히 챙겨준 덕분에 행복한 여행이었다.
닷새 일정이 짧았던 여행에서 얻은 양식은 백배다. 여정 중 일정을 챙긴 아내와 후원을 아끼지 않은 아들과 딸의 배려 덕분에 행복하고 즐거운 경자년 여행이었다.
여행 중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바다회와 통영의 명물인 멍게비빔밥이 눈에 밟힌다.
이제부터 내 삶은 마음가는대로 따른다는 종심소욕從心所欲이다.
2020.09.28~10.02.
첫댓글 통영, 삼척, 평창의 4박5일 여행이 풍경화로 그려지네요...
잘 다녀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