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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삼상 30:1-6
1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2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5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 30:1-6 / [아말렉 족속에게 유린당한 시글락] 다윗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아벡에서 시글락까지의 100킬로미터를 사흘 동안 걸어서 돌아와보니, 시글락의 온 성읍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아말렉 족속이 유다의 남부 지역으로 쳐들어와 약탈하다가 시글락에도 손을 뻗친 것이다. 2) 그들이 비록 시글락에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남김없이 포로로 사로잡아 끌고 갔다. 3-4)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돌아와서 그런 광경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 지르며 울었는데, 지쳐서 기진맥진할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5) 다윗의 두 아내, 곧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미망인 아비가일도 포로로 잡혀갔다. 6) 그런데 이러한 사태는 미묘하게도 다윗에게 아주 불리하게 발전되었다. 왜냐하면 처자식을 잃고 흥분한 군중들이 다윗을 돌로 쳐죽이자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다윗은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를 더욱 의지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로 동족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으나, 그의 앞에는 엄청난 시련과 절망적인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말렉이 시글락을 침범함(1-2)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블레셋 땅 시글락에서 살던 때, 블레셋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아말렉을 침범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27:8-9). 이 일에 대한 보복으로 아말렉이 시글락을 침공하였습니다. 다윗은 부하들과 길보아 전투에 참여중이라 그 곳은 여자들과 노약자들만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틈을 타서 이스라엘 백성과 원수된 아말렉이 시글락을 침공한 것입니다. 다윗이 없을 때를 이용하여 아말렉은 시글락을 침범하여 성읍을 불태우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사로 잡아 갔습니다. 다윗의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사로잡아 갔습니다. 우리의 적들은 우리들의 약한 틈이 보이면 가차없이 침입하여 신앙을 약탈하고 믿음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울 기력이 없도록 울다(3-5) 다윗의 무리가 블레셋을 도와 이스라엘을 치는 일에서 다행히 제외되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3일 만에 그들의 주거지인 시글락으로 회군했지만, 뜻밖에도 이곳은 이미 아말렉의 침입자들에 의하여 약탈당한 후였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시글락으로 돌아오는데 삼일이나 걸렸기에 거의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고 싶은 생각으로 돌아왔지만, 절망적인 상황에 모든 사람이 소리내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는 것이 언제나 약점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슬픈 것을 슬프게 느꼈으며, 정의감도 분발하게 되고 의로운 희생도 각오하게 되었습니다. 울음이 없는 자는 대부분 심령이 마비되어 있는 자로 판명됩니다.
슬픔 가운데 위급한 상황에 빠진 다윗(6) 사람들이 다윗이 시글락을 비웠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동고동락해 왔건만 심한 환란을 당해서는 그를 배반하고자 합니다. 다윗은 슬프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두 아내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부하들의 가족들까지 포로로 잡혀가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크게 낙심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놀라운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 강하여졌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절박한 사정에서 지금까지 함께해 주신 하나님을 강하게 의지하고 힘을 얻은 것입니다.
적 용 :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리를 잘 지키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
한 마리의 여우가 토끼를 쫓았습니다. 하지만 토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여우를 향해 아버지 여우는 질책했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고 말이죠. 그러자 아들 여우가 말했습니다. “나는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뛰었지만 토끼는 죽기 살기로 뛰는 데 따라잡을 수 없었어요!” (‘내 마음의 선물’ 중에서)
세상의 모든 일은 간절함의 크기만큼 이루어집니다. 간절함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예배의 자리로, 최선의 자리로 안내합니다. 당신의 간절함은 무엇인가요?
호크마 수석
=====30:1
다윗...시글락에 이를 때. 이것은 다윗과 그의 일행이 블레셋 방백들의 거부로 인하여 (29:3-5)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참여치 않고, 블레셋 군대를 떠나 다시 자신들의 본거지인 '시글락'에 돌아온 사실을 가리킨다(27:6). 제 삼일에 - 여기 '삼일'은 다윗 일행이 블레셋 군대로부터 떠난(29:11) 제 3일을 가리킨다(Keil). 이 기간 동안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아벡'으로부터 '시글락'까지 약 75km를 행군 했음이 분명하다(29:1).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 아말렉 족속들의 이같은 행위는 (1) 이전에 다윗이 자신들에게 행한 침노 행위(27:8, 9)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지니며(Fay, Keil), (2) 또한 생존을 위한 약탈물 확보(Smith) 등이 그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침범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곳을 지키던 다윗이 북쪽 '아벡'으로 이동함으로써, 그곳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기서 '남방'은 유다의 남부 지역을 통칭하는 '네게브'(Negeb)를 가리킨다(27:10). 그런데 원래부터 이곳은 항상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받던 지역이었다(14:48). 그리고 '침노하였는데'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파솨트'(* )는 '홑뜨리다', '벗기다'란 의미로서, 이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침략 행위라기 보다는 갑자가 급습하여 필요한 노획물을 약탈해 가는 노략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27:8)=====30:2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 - 다윗 일행의 가족들인(27:3) 이들은 여자들인 관계로 다윗과 함께 전투에 참여치 않고 시글락에 계속 남아 있었다. 한편, 3절은 이 여자들 외에도 자녀들까지 아말렉 사람에게 모두 잡혀갔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끌고...갔더라 - 아말렉 사람들이 이같이 사로잡아 간 까닭은 그들이 결코 인정이 많아서가 아니었다(15:2). 다만 (1) 무장하지 않은 연약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공격에 대항치 않았으며 (2) 애굽에 노예로 팔 경우(창 37:25-28)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이방 아말렉 족속의 관행을 오히려 선하게 이용하심으로써, (1)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셨으며 (2) 다윗 가문(家門)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계획을 차질없이 계속 진행시켜 나가셨다. 실로 세밀한 구석까지 친히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길을 느낄 수 있다.
=====30:3
아내와 자녀들 - 이들은 그때 시글락에 남아 있던 자들로서, 다윗과 그의 군사들에게 딸린(27:3) 모든 식구를 가리킬 것이다(Klein).
=====30:4
다윗...울었더라 - 다윗의 이같은 비탄은 비단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겼다는 사실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즉 다윗은 시글락을 무방비 상태로 비워 놓고 경솔히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나아간 자신의 실책으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부하들의 아내와 자녀가 포로로 잡혀간 그 엄청난 사실로 인하여 큰 슬픔에 잠긴 것이다. 한편, 다윗에게 닥친 이러한 큰 재난의 궁극적 원인은 목전의 안전과 정착을 도모코자 언약의 땅 이스라엘을 떠나 우상의 나라인 불레셋 땅으로 이주한 데 있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비록 고생과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언약의 땅에서, 언약의 백성과 더불어, 언약의 주를 바라고 믿으면서 울고 웃어야 한다.
=====30:5
본절은 다윗도 자신의 부하들처럼 동일한 환난을 당했음을 말해 준다. 저자는 이 같은 언급을 통하여 (1) 다윗도 다른 부하들처럼 동일하게 슬퍼할 수 밖에 없었으며, (2) 그리고 동일한 피해자인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한 백성들의 태도는 잘못된 것임을 암시하려는 듯하다(6절). 아히노암...아비가일 - 25:3, 42, 43 주석 참조.
=====30:6
백성이...슬퍼서 - 여기서 '슬퍼서'(* , 마라르)는 '쓰리다' 혹은 '괴로워하다'란 의미이다(왕하 4:27;사 24:9). 이 말은 어떤 괴로운 사실로 인하여 마음이 극도로 낙망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 백성들이 이처럼 말한 이유는 재난의 책임이 전적으로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1) 다윗이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아말렉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려 놨으며(27:8, 9), (2) 또한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의 말을 좇아 시글락을 비워 둔 채 군사들을 모두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등, 백성들의 보호자 혹은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치 못했다고 본 것이다(Klein).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 여기서 '군급하였다'(* , 야차르)는 '답답하다', '곤란하다'란 의미로서, 어떤 원인에 의하여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게 되는 답답한 감정 상태를 가리킨다(창 32:7;삿 2:15;10:9;삼하 13:2). 그 하나님 여호와 - 여기서 '그'는 '그의' 혹은 '그 자신의'란 뜻이다. 그리고 '여호와'란 신 명칭(神名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의 계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임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20:12, 15). 결국 저자는 여기서 이같은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때 다윗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으며, 또한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신뢰했는지 분명히 보여 준다. 힘 입고 - 엄밀히 말하여 '...안에서'란 의미이다. 용기를 얻었더라(* , 이트하제크) - '힘을 내다', '견고히 하다'란 의미를 갖는 '하자크'(* )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여호와 안에서)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힘을 내다'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삿 20:22;대하 12:13;17:1;겔 7:13). 즉 이것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확고한 신념에 근거하여 적극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새로이 먹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난관에 대처하는 다윗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즉 이때 다윗은 휘하 군사들을 회유하는 설득이나 구구한 변명 대신 하나님께 그 어려운 문제를 맡기고 그분의 도우심을 전적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실로 신앙인이 불신자보다 월등한 점은 고난에 처했을 때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그 상황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있다. 그리고 당신만을 소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을 믿었다.
< 설 교 >
다윗이 해야 할 전쟁
사무엘상 30:1-8
참 이상하지요. 도로 찾을 것 같으면 왜 하나님께서 잠시라도 잃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흔들기에 나섭니다. 사람들을 당황케 하십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우왕좌왕하게 만드십니다. 사람들은 흔들어주어야 비로소 자기 본색이 들어납니다. 인도의 성자라는 간디의 추종자들이 간디와 더불어 인간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사람들은 간디의 정신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라는 기대를 한 겁니다.
하지만 권력이 없을 때, 마치 성자들 무리처럼 보였던 그들이 막상 인도 정권을 잡고 난 뒤에는 그들이 비난했던 썩은 정권 못지 않고 비리와 권력욕와 돈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약한 때 선한 사람’은 결국 선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독하고 철저하게 악해만큼 힘을 소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악이 악을 드러내는 것도 힘을 가질 때나 이야기입니다. 선한 자도 권력을 가지고 여지없이 악한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다윗과 함께 동거동락한다고 해서 다 다윗 같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들 여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께서 그들의 처나 자식들을 아말렉 군대에게 빼앗기게 만드니 여지없이 다윗 집단 내부에서 다윗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우리에게 이런 불상사가 들이닥치게 했느냐 하는 식입니다.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일려고 합니다. 이들이 그동안 다윗으로 인해 받은 은혜라는 것은 안중에 없습니다. 한순간에 다 잊어버립니다. 이러한 인간의 악을 인위적인 법적 장치로서 막을 재간이 없습니다.
법을 강화하고 교도소를 늘인다고 해서 범죄인들이 순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인들은 생각합니다. “내가 잡힌 것은 운이 없다든지 아니면 방심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범죄는 보다 노련해집니다. 안 집힐 수 있는 방안이 첨가되기에 범죄는 날이 갈수록 발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보복심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즉 이 사회의 정의란 보복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이 그동안 지내온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항시 보복 가능성이 있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다윗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다윗의 집단이 이런 상태로서 사울왕의 공백을 메울 수가 있을까요?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 집단을 흔들어버립니다. 난데없이 아말렉 군대가 와서 다윗이 아내 둘까지 납치해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차후적으로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은 자기에게 해꼬지 한 자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을 살해한 자를 비록 나중에 자기 양자를 삼을 정도로 용서의 극치를 보여도 그 밑바닥에는 맨처음 가졌던 살해의지는 사라지지 자리잡게 됩니다.
따라서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안 잊는다는 말은, 나의 용서와 나의 사랑을 고마워할 때까지 보복을 유보해주겠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어느 순간 자신의 용서를 하찮게 여기는 순간, 이월된 복수심까지 한꺼번에 날아갈 것을 각오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용서하고 말고의 차원을 벗어납니다. 그는 왜 하나님께서 아말렉이 쳐들어오게 했는지를 하나님에게 물어볼 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사적인 복수극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전쟁을 자신을 위한 전쟁으로 보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벌려놓으신 전쟁이기에 하나님께서 마무리지기를 원했습니다.
이 아말렉 민족과의 전쟁은 출애굽기 17:8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전쟁의 특징은, 칼의 유무가 아니라 지팡의 유무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지어진다는데 있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마치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한 자기장 속에서 미리 대기하면서 활동하는 민족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말렉 족속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뭔가가 새삼 규정지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19세기 미국의 황량한 서부, 인디언들이 자기 땅에서 추방되고 난 뒤, 텅텅 비워있는 그 땅의 경계는 먼저 말뚝 박는 사람이 임자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을 통해 이스라엘의 권한이 다윗에게 넘어가면서 규정된다는 점을 알려주시려고 합니다.
이미 사무엘은 죽어 없습니다. 전의 아말렉은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승리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사무엘 선지자가 모세의 지팡이 역할을 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맨처음 아말렉 전쟁에서는 지팡이의 위치에 따라서 이스라엘이 아말렉에게 밀리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세의 지팡이는 전쟁터에는 없고 저 산 위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원격조종하는 셈이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됨은 하나님이 원격조종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원격조정을 받는 중심 인물이 과연 다윗이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두 아내와 더불어 다른 백성들의 아내를 안죽게 하시면서도 아말렉에 납치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해체되었다가 다시 생겨나는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지키시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이 드러납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나 말씀이 단체도 이와 같습니다. 필히 중심되는 지점이 한 곳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그 중보자도 한 분이어야 하는 원칙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그런데 만약에 이 하나 됨을 인정 못하면 여럿이 됩니다. 성경에서 여럿이란 그냥 그대로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한 곳을 쳐다보는 여럿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싸움이 어느 ‘한 곳’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신 ‘그 곳이냐’의 싸움입니다. 하나님 그 ‘한 곳’을 늘 비워놓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한 곳’에 들이서실 분이 이미 확정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뿐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되었던 누가 되었던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한 곳’만을 쳐다보는 사람은 그 ‘한 곳’만의 현실성만 고백할 따름입니다.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사람이 고정적으로 차지할 자리가 아니라 항상 비워지고 또 비워질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주님의 지팡이가 등장되어야 될 자입니다.
다윗 중심의 이스라엘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단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위기 가운데 분별하는 하나님의 뜻
노희승목사 / 삼상 30:3-10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치 못한 인간이기에 때로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있지요. 어떤 결정들에는 심각한 결과가 따르기도 하며 심지어는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거나 안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다윗은 오랜 시간 약 10년 이상을 사울에게로 부터 쫓기는 신세로 광야에서 살아 갔습니다. 그러는동안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함께 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600명 신복들과 식구들로 불어나게 되었지요.
혼자 도망다닐 때에는 그래도 괜찮았는지 모르지만 많은 식구들이 함께 움직이면서 사울의 눈을 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다윗은 아주 인간적인 결정을 하게 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블레셋 족속 밑에 들어가고 말았던 거지요.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천적임에도 불구하고 생존하기 위해 타협하는 다윗의 연약한 모습을 보십시요.
그 보상으로 시글락이라는 도시를 받았구요. 심지어는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곳에 블레셋왕을 따라갈 정도로 분별력을 잃고 맙니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간섭이었는지… 전쟁터에 나가기 바로 직전에 블레셋왕의 부하들이 다윗은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아주 강하게 하는 바람에 다윗과 그의 군대를 다시 집으로 돌려 보내는데서 부터 오늘 본문은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데 마을이 불에 다 타고 연기 밖에 안 남아 있는 거예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1-2절) 남자들이 없는 동안 아말렉 사람들이 처 들어 와서 부인들과 자녀들을 다 잡아 가고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이 보다 더 큰 위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져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러한 위기 가운데 처해져 있을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지는 물론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할 때에 신앙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먼저, 믿음안에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잘 이해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기의 의미 (위험과 기회가 교차하는 것)
‘위기'라는 단어를 한자로 적으면 두 가지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위험(危險)하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기회(機會)'라는 뜻이다.” (John F. Kennedy)
즉 위기는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 가에 따라서 위험할 수도 있고 기회로 만들수도 있습니다. 요셉, 라합, 에스더, 다니엘과 같은 성경의 인물들은 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인물들입니다. 반면에 위기를 멸망으로 몰고 간 사울과 같은 예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위기의 정의 (definition)
삶 가운데 우리가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는 그 기초나 기반이 흔들릴 때 그것을 위기라고 정리합니다.
삶의 기초나 기반을 위협하는 것
건강, 비즈니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할 때에
결혼 생활이나 가정의 위기
재정이나, 신뢰
존재감, 신앙, 외로움
관계, 리더쉽 – 목회, 사역지의 위기도 찾아 올 수 있겠지요.
문제는, 이러한 위기들을 수습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꾸 어떠한 결정을 내리려고 한 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결정에 앞서 더 필요한 것은 분별력인 것입니다.
분별력은 하나님을 바라봄에서 시작합니다
결정 (Decision) 과 분별 (Discernment) 의 차이점
“Decision making has its limits. We make decisions. Discernment is given. The Spirit of God, which operates at the deepest levels of the human psyche and within the mysteries of the faith community, brings to the surface gifts of wisdom and guidance which we can only discover and name. 결정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분별력은 주어진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과 믿음의 공동체 를 통하여 성령님께서는 역사하시며 지혜와 인도함의 선물을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것들을 발견하게 하신다. ” (Danny Morris and Chuck Olsen, Pursuing God’s will together)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수 많은 선택들가운데 우리는 good decision (좋은 결정) 을 할 수 있고, godly decision (하나님 선한 결정) 을 할 수도 있습니다.
Good Decision (좋은 결정) vs. Godly Decision (하나님의 선한 결정)
영적인 분별력이란 인간적인 좋은 것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별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세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인간의 결정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육, 기술, 경험이 있다고 해도 그 수준으로 밖에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치우치거나 절박한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들
상처, 과거의 경험 – 때로는 고집과 오기로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잘 결정한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에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성도는 하나님 수준의 선택들을 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분별력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 이야기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이니까?” (요한복음 9:2)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3절)
누구 잘못인가? vs.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여 주시는가?
결국 무엇을 바라보는가가 결국 다른 반응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정하려면 우리의 생각으로 문제를 바라보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Os Hillman, Making Godly Decisions 결정의 책)
다윗의 부하들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다윗의 실수를 보았던 것이지요.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6절)
다윗의 신복들은 다윗을 따라 목숨까지 바치기로 충성을 다짐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돌을 들게 됩니다. 원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가장 쉬운 해결책이며 누구나 보일 수 있는 반응입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 (예. 잘못된 결정 – 원망, 절망, 낙망)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성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후)
Rogers Phone Bill – 어느 아내가 딴 남자와 바람을 피다가 남편에게 걸려서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Rogers 를 소송했습니다. Phone Bill 에 모르는 번호가 계속 기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혼을 당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누구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다윗의 부하들같이 다른 사람 탓으로 원망의 삶
“정말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가? 만약 그가 블레셋 왕을 따라가지만 않았더라면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어떤 분들은 자기 자신을 정죄, 내가 잘못해서, 내 탓으로
또는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보게 되지요
기도의 중요성 – 청을 하는 기도의 한계
정죄하는 영은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다윗에게서 배워야 할 교훈은 그는 아무에게도 탓을 돌리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정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정말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어. 나는 지도자가 될 자격이 더 이상 없어.”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거나 잘못된 결정을 하였을 때,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대부분의 반응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다윗은 이 절박한 상황에서 돌을 들은 부하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6절)
다윗은 모든 과거의 실수를 뒤로하고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같이 어떠한 다급한 상황에 처하시더라도 이렇게 힘을 얻으시기를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순간 위기는 기회로 바뀌는 전환점 (Turning Point) 이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수와 위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나올 수 있었던 용기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앞에 나온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부탁을 해 에봇을 가지고 오게 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가슴에 착용하는 작은 주머니인데 그 주머니안에는 두 돌이 있습니다. Urim (흰색) 과 Thummim(검은색) 이라는 돌로서 제사장이 손을 주머니에 집어 넣어서 돌 하나를 꺼내는 겁니다. Thummim 이 나오면 ‘Yes’ 고 Urim 이 나오면 ‘No’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아말렉을 쫓을 것인가 아닌가?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no 라고 하는 돌이 나오면 어떻합니까? 가족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원시적인 것 같지만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였습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였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 당연한 것 까지도 하나님께 의뢰를 하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주 확실하게 배우게 된 것이지요.
찬반 비교법
예상되는 결과에 기초한 결정법
필요한 것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따르는 결정
다행히도 하나님의 뜻은 아말렉을 쫓으라는 것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는 것은 다윗의 군사들이 더 이상 다윗을 탓하지 않고 함께 전진을 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순종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함께 움직입니다. 더 이상 원망한다고 가족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의 실수와 원망을 뒤로 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조그만 것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놓치지 마십시요
허허벌판에서 다윗의 군대가 아말렉 사람들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식구들을 데리고 갔는지 알 수가 없었지요. 이렇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지 모를 때가 우리에게도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찾은 것은 버림받아 죽어 가고 있는 애굽 사람 한 명 이였습니다 (11절). 다윗은 급한 발길을 멈추어 그에게 떡과 물을 먹여줍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일 분, 일 초이라도 지체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잡혀간 아내와 아이들에게 위험한 일들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상황가운데에서 다윗은 긍휼을 배풀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세요.
Compassion 자비 vs. Sentiment 감상(Eugene Peterson 교수님은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이라는 책에서 그 차이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감상적인 도움은 우리의 시간과 물질이 남을 때에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돕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비라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나 상황에 상관없이 베푸는 것이 자비입니다.
사실 ‘자비, compassion’ 라는 말은 ‘열정, passion’ 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Com + Passion) – ‘Com’, togetherness, sharing with others
다윗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죽어가는 영혼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 영혼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요?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교와 구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조금 여유가 생길 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황과 시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이면 지금 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버림받은 애굽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정신을 찾은 후에 알게 된 사실은 그는 아말렉 사람의 종이였으며 병이 들었기 때문에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자비를 베품에 감사하며 결국 아말렉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윗의 군대를 인도해 줍니다. 그 덕분에 방심하고 있었던 적군을 물리치고 납치당한 식구들을 다시 찾는 큰 승리를 얻게 되는 모습을 보십시요.
애굽 종은 별 볼일 없었던 사람, 이제 더 가치가 없을 것 같은 사람, 이용 가치가 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애굽 종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매일 순간 마다 선한 뜻에 순종하는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인류구원
TD or Royal Bank?
큰 것 vs. 작은 것
하나님의 뜻은 늘 우리의 기준에서 큰 일에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작은 자들을 섬기기 보다 오히려 이용하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보통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은 포기해야 한 다고 생각을 하곤 합니다. 큰 일을 위해서 작은 자를 희생 시키는 것이 과감한 결정이라고도 하며 정당화 합니다. 특히 조급한 상황이면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가 더 쉽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조그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 결국 큰 일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풀리게 됩니다. 교황이 미켈란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미켈란젤로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다비드와 관련 없는 것은 다 버렸습니다.” (롤프 도벨리, 스마트한 선택들)
‘다비드’에게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다비드’를 제외한 모든 것들에 집중해서 그것들을 배제함… 저는 이 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에도 적용이 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들을 포기하면 됩니다. 매일 매일 작은 일에서 부터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다 보면 어느 덧 큰 하나님의 뜻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교훈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애굽 사람을 들판에서 만나기 전 다시 rewind 해서 브솔 시내라는 곳을 지날 때의 일이었습니다. 600명의 군사중에 200명은 너무나 지쳐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습니다. 싸울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200명은 브솔 시내가 남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군대에 3분의 1이 이 급한 상황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나머지 400명의 마음도 흔들렸을 겁니다. “아니, 다 같이 힘을 합쳐도 이길까 말까인데… 어떻게 힘들다고 주저 앉을 수 있는가?” 충분히 낙심 되었을 겁니다. (사기저하, 낙심, 정죄, 불평)
하지만 숫자의 의지하지 않고 담대히 나아가는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아마 브솔시내에 남은 그 200명도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 오는 동료들과 식구들을 맞이 하면서 그 미안한 마음은 더 심해 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내들이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을 거예요. “아니 누구 남편은 우리를 구하려고 목숨걸고 싸웠는데 당신은 뭐하느니라고 여기 그냥 있어요? 내가 걱정이 되지 않았어요?” 자신들에 무력함, 함께 싸우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
이때에 다윗은 그들을 은혜로 감싸줍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물을 이들에게도 똑같이 나누어 주기로 명령합니다. 싸움을 했던 사람들 중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22절)
“아니 이 것은 불공평 합니다. 전리물은 싸움을 한 400명만 가져야 합니다. 남았던 200명에게는 아내와 자녀들만 돌려 보내야 합니다.” 뭐 그런 말 입니다.
자신의 의, 공로로 사람을 판단하는 비교하는 모습 (섬김, 기도, 수양회, 선교, 헌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만큼 헌신하지 않을 때, 속에서는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 않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 중심, 결과 중심 – 지친 사람들을 감싸주는 은혜가 마르게 된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어떤 분들은 지쳐서, 아니면 어려운 사정이 생겨서 브솔시내가에 남아 계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책감, 정죄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일 때문에 사랑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하나님
지도자,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10년, 20년, 신앙 생활을 오래 할수록 조직의 쓴 맛?
은혜를 가르치지만 은혜의 능력이 없는 공동체
용서를 말하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관계들
복음을 선포하는데 복음을 살아가지 못하는 성도의 모습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뒤쳐진 자들을 감싸주는 은혜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도하면서 자꾸 찾는데 그 것을 순종하면서 살아갈 마음은 전혀 없다면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응답하실까요?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공동체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지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로 결정하는 삶 보다 매일 매일 삶 가운데 그 분의 뜻을 분별하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정녕도로 찾으리라
삼상 30장 1-10절 / 피영민목사
서론
다윗은 용기의 사람, 승리의 사람, 정복의 사람으로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다윗은 블레셋의 대용사 골리앗을 향해서 지극히 담대한 말을 했습니다. 45절로 46절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20살도 안 된 젊은이인 다윗이 자기보다 키가 두 배나 크고 군사훈련을 잘 받아 무기를 잘 쓰며 갑옷을 입고 있는 골리앗을 향해 이처럼 담대하게 얘기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동으로 양을 칠 때에 사자와 곰이 와서 양을 물어 가면 맨손으로 쫓아가 때려잡고 그 입에 있는 양을 끄집어냈습니다. 동물원에 가서 곰과 사자를 보면 사람이 싸워서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사자와 곰도 쳤기 때문에 골리앗이 아무리 키가 커도 담대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알고 체험했기 때문에 이렇게 담대한 용기가 있었고 또 전쟁을 하면 항상 승리했던 것입니다.
저는 중동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인기 있는 친구는 공부를 잘하거나 집이 부자인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신라의 달밤’이라는 영화를 보면 수학여행에서 학교끼리 패싸움이 붙었는데 앞에 나가 상대방 대표를 말과 힘으로 제압하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인기 있는 친구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신라의 달밤”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시대적인 추억이 우리 속에 있고 ‘나도 그런 폼나는 사람이 되어 봤으면!’하는 소원이 은근히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움이 붙었는데 블레셋은 골리앗을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대표로 다윗이 나가더니 물매 돌을 가지고 미관을 쳐서 졸도시켜 넘어뜨리고 그 칼을 빼앗아 목을 쳐 이스라엘에 대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시대의 인기를 한몸에 다 모은 것입니다. 인기가 있으면 보통 여인들로부터 먼저 반응이 옵니다.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만 사울 왕이 시기심이 나서 자기의 사위가 된 다윗을 죽이려고 십수년을 쫓아다닌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 가운데 여러 가지 전쟁이 있었습니다만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전쟁이 오늘 본문에 있는 전쟁입니다. 이것은 국가를 위한 전쟁도 왕위 쟁탈을 위한 전쟁도 아닌 가족구원을 위한 전쟁(Family Rescue War)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오랫동안 쫓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27장 1절에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다윗이 블레셋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더 큰 원수를 피하여 중간 원수에게 도망간 것입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군사 600명과 그 가족들을 다 이끌고 블레셋으로 간 것입니다.
블레셋의 5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가드라는 도시에 갔습니다. 그 왕은 “아기스”였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에게 도망하여 다윗은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블레셋에서 살아남으려니 아기스 왕에게 비굴한 말도 거짓말도 미친척도 해야 했고 충성하는 척 위선을 행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방법 외에 살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아기스 왕에게 “우리가 어찌 감히 왕과 같은 마을에 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살 수 있는 마을 하나를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아기스 왕이 다윗과 600명의 군사에게 살도록 준 땅이 “시글락” 이라는 땅이었습니다.
시글락에서 다윗과 600명의 군사가 살고 있는데 사무엘상 28장에 보니 다윗에게 아주 곤란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과 군사 600명도 블레셋 군대에 소속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자기 동족 이스라엘과 싸울 수밖에 없는 곤란한 처지가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28장 1절 후반에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고 점잖게 말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2절에서 상당히 애매한 대답을 합니다.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이것이 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애매모호한 대답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면 보통 애매하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이 들고 일어나 아기스 왕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합니다. 사무엘상 29장 4절에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저가 이스라엘 사람인데 저가 돌이켜서 우리의 원수가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 그러므로 다윗과 600명의 군사는 여기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벌써 그런 얘기를 눈치 챕니다. 그리고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8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내가 싸우려고 하는데 저 방백들이 못하게 해서 못나가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기스 왕이 “그러지 마라. 나도 너를 지금 전쟁에 가담시키고 싶지만 내 방백들이 너를 못하게 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다음날 새벽에 돌아갑니다.
1. 시글락의 완전한 황폐
전쟁터에서 시글락까지 삼일길이 걸려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다윗이 인생에서 행한 가장 크고 어려운 전쟁인 가족 구원을 위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돌아오니 시글락은 큰 비극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 와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금과 은을 빼앗아 간 것도, 육축과 짐승을 잡아간 것도 아니고 아내들과 자녀들을 다 사로잡아 간 것입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가정이 이와 같이 아말렉에게 당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비겁하고 사악한 족속이 아말렉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단 한마디도 사랑한다는 말을 안한 족속, 하나님께서 아예 지면에서 쓸어버리라고 이스라엘의 사울 왕에게 명한 족속이 바로 아말렉입니다. 아말렉은 사단과 마귀의 상징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할 때에 뒤떨어진 노약자와 아이들을 골라서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매우 비겁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끌려가서 정권이 넘어가 페르시아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에 하만이라고 하는 자를 통해서 유다인을 전멸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말렉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왕비가 되게 해서 도리어 아말렉 족속 7만5천을 다 죽게 한 사건이 에스더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약한 곳만 골라서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말렉의 전략이요 사단의 전략인 것입니다.
마귀도 우리의 아내들이 외로워 할 때에 공격합니다. 남편이 새벽에 직장 나가 밤늦게 술 취해서 들어오고 그 다음날도 새벽에 나가 술 취해서 늦게 들어오게 되는 생활이 계속되면 외로운 마음이 들어 결국 바람을 피게 됩니다. 또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가서 놀 때 사단은 공격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아말렉이 시글락을 공격한 것은 우연이 아니였습니다. 사무엘상 27장 8절을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아말렉을 침로했다 그랬습니다. 아말렉은 다윗에게 한 번 당한 적이 있으므로 아말렉 사람들은 저 다윗에게 복수 하리라는 계획을 해 의도적으로 침노했던 것입니다. 사단은 이처럼 성도 가정의 약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침노합니다.
오늘날 TV, 인터넷, 각종 음악, 잡지를 통해서 사단은 우리 가족들과 자녀들을 하나님께 반항하는 존재로 만들려 합니다. 심지어는 학교 교육도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반항하는 존재로 만들려 하는 것입니다. 원숭이가 진화되어 인간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가르치고 창조론은 말도 안되는 미신인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과학(Science)이 아니라 Scientism, 거짓종교, 유사종교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떨어지게 하려 합니다. 아말렉이 시글락을 파괴했듯이 21기에 사단은 이런 일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제가 어느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한 부인이 앞에서 펑펑 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은혜 받아서 우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아니라 자기 남편이 방송국 PD인데 자기를 버리고 방송국에 나오는 연예인들과 놀아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들이 이처럼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말렉 즉, 사단 때문입니다. 사단이 이렇게 성도의 가정에 취약한 부분만 골라서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시글락의 황폐가 주는 슬픔
가정이 이렇게 파괴되면 사람이 갖는 감정은 슬픔뿐입니다. 다윗의 군사 600명은 전쟁에 능한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전쟁에서 적들을 많이 죽여 봤고 마을들도 많이 불태워 봤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 자신의 자녀와 아내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자신들의 주거지가 불타게 되자 마음이 크게 상했습니다. 사무엘상 30장 4절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갔는데 강도가 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아내와 아이들을 다 잡아가 어디 갔는지 알 수도 없는 일을 당한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슬피 울 것입니다. 다윗과 군사들도 모두 기력이 없도록 웁니다. 집이 불탄 것이야 다시 세우면 되고 재산 빼앗긴 것이야 다시 찾으면 되고 못 찾으면 그만이지만 아내와 자녀들은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를 잃고 자녀를 빼앗기는 것은 가슴이 부스러지는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슬퍼서 울되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울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녀를 잃고 울은 대표적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야곱입니다. 창세기 37장 35절에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야곱이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낳았습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그만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고 그 형들은 염소의 피를 옷에 발라 악한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이 소식을 듣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랫동안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했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렇다고 해서 음부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도 죽어 내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야곱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잃어 본 사람들은 이 울음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사무엘하 18장에 다윗은 자신에게 반역하고 자기를 왕위에서 쫓아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후궁들을 백주에 모독한 못된 아들 압살롬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압살롬은 긴 머리가 멋있었습니다. 그가 말을 타고 머리를 찰랑거리고 가다가 그만 상수리나무에 걸렸습니다. 말은 쏙 빠져 나가고 상수리나무에 대롱대롱 걸려있는 신세가 되었을 때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가서 창으로 찔러 압살롬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 자기를 반역하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애통해서 울었습니다. 아마도 성경 가운데 가장 애절한 구절이 사무엘하 18장 33절일 것입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무리 못된 자식일리라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이런 것입니다.
저의 인생 가운데 가장 많이 울었던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는데 터울이 11년이나 납니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딸이 하나 있는데 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제 처가 전도사로 매우 바쁘게 사역을 하다가 그만 임신 9개월 되었을 때 전치태반이 되어 수술을 했으나 아이는 하루 만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딸을 산에 묻고 예배를 드리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혀가는 것을 보는 일은 아무리 위대한 용사라도 가슴이 미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다 해도 재산이 다 날아간다 해도 가족이 이처럼 포로되어 끌려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TV를 보며 가장 많이 울은 것은 남북이산가족이 처음 상봉할 때입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애통 없이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만나 좋아해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6.25 전쟁이 나서 “잠깐 갔다 올께” 했더니 그만 그것이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젊은 시절에 만났던 그 여인이 늙어서 백발이 되어 40년 만에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애절하고 기가 막힌 일이겠습니까?
저는 목사로서 수많은 가정들을 볼 때에 동일한 심정입니다. 부모는 교회에 잘 나와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자녀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세상에서 마귀의 종이 되어 방황하고 타락하며 살아갑니다. 마귀는 우리의 가정을 파괴하려고 바쁘게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장래를 진멸하려고 바쁘게 우리의 약한 자녀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비겁하고 야비하며 잔인했던 아말렉 족속처럼 마귀는 우리의 자녀들과 가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다윗을 돌로 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30장 6절 전반에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아히노암과 아비가일 두 아내를 뺏겨 너무나 슬픈데 이런 다윗을 죽인들 가족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다윗을 돌로 치겠다고 하자 다윗이 “군급하였다(greatly distressed)”라고 했습니다. 큰 비탄에 잠겼다는 것입니다. 가족과 자녀를 빼앗긴 고통은 이처럼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인 것입니다.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방향조차 잡을 수도 없는 그런 슬픔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두 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인생을 거기서 포기해버릴 옵션이고 또 하나는 자기 스스로 안되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옵션입니다. 다윗은 포기하고 주저 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내 인생은 절망적이다. 사울은 나를 죽이려하고 아내와 가족들은 다 아말렉에 빼앗겼고 내 군사마저도 나를 돌로 치려한다. 내 인생은 사면초가로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이로다.” 이렇게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하늘은 언제나 열려있고 하늘의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마시고 그 짐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편 55편은 다윗이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을 다시 의지한다. 내가 사자의 공격에도 살아남고 곰의 공격에도 살아남았는데 그것은 내 힘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혜였도다.”라며 하나님께로 간 것입니다.
사무엘상 30장 7절에 보니 다윗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제사장은 속에다 하얀 옷을 입고 겉에다 남색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겉옷 위에다 밑에까지 내려오는 앞치마 같은 것을 걸치는데 이 앞치마가 바로 에봇입니다. 그런데 이 에봇을 왜 가져오느냐? 이 에봇에는 정사각형으로 된 흉패가 달려있는데 흉패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흉패를 열면 주머니가 들어 있는데 주머니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두 개의 돌이 들어있습니다. 이 우림과 둠밈이 바로 왕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번 전쟁을 해야 합니까? 하길 원하시면 우림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해가지고 우림이 나오면 전쟁을 하고 둠밈이 나오면 안하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봇을 가져오라는 말은 중대사에 하나님의 뜻을 묻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께 그 뜻을 물어보아야 됩니다.
8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 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미치겠나이까?”라는 말은 “따라잡겠나이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합니다. 꿈을 꿔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화면이 명백하고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분명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 죄가 용서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지 다른 불투명한 말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고 군사 600명을 데리고 아말렉을 추격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200명은 힘들다고 낙오해 버리고 400명만 데리고 아말렉을 추격하는데 아말렉이 동서남북 어디로 갔는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병들어 죽어가는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예, 저는 애굽 소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길바닥에 이렇게 누워 있느냐?” “예, 저는 아말렉 사람이 부리던 종이었는데 제가 병들었다고 길거리에 버리고 가서 제가 이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묻습니다. “네가 그 아말렉 군대에게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소년이 “나를 살려주신다고 약속하시면 인도하겠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내가 너를 살려주리라”해서 그 소년이 아말렉 군대가 있는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아말렉은 이 애굽 소년 하나를 사람대접을 안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회사에서도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업신여기고 인격모독을 하고 그러면 그 사람이 나중에 기업 전체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애굽 소년 하나가 병들었다고 하니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해주지 않고 쓸모없다고 버려버립니다. 이 아말렉이 이렇게 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이 다윗 군대를 인도하여 가보니 사무엘상 30장 16절에 “그가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하여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의 군대는 400명밖에 안되는데 아말렉 군대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온 땅에 편만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숫자로 하면 상대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춤추고 있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더 먹고 마시고 춤추며 취해서 해롱해롱 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새벽에 400명이 일어나서 저녁 저물 때까지 모두다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다 죽이고 나서 보니 살아남은 것이 있습니다. 17절에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때까지 그들을 치매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백 명은 소년 즉, 미성년자라 술을 못 마셔 정신을 차리고 있다가 약대를 타고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머지는 다 죽여 버렸습니다.
18절로 20절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의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은 빼앗긴 아내와 자녀를 다 찾아왔습니다. 거기다가 덤으로 양떼와 소떼까지 전리품으로 다 받아왔습니다. 대승리를 거두고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니 낙오했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400명의 군사가 “저들은 낙오했던 자들이니 양떼 소떼는 주지 말고 그냥 처자식만 줍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러지 마라. 너희가 승리한 것이 너희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골고루 나눠줘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다윗은 가까스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넉넉한 승리를 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말미암아 다윗은 명실상부한 왕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과 자녀들이 마귀의 종이 되어 끌려가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으려 하십니까? 자녀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웃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아내와 자녀들을 구한 것은 문자 그대로 가족구조전쟁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을 빼앗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마귀의 의도적인 전략을 향한 전쟁입니다. 참으로 힘든 전쟁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용돈을 주고 또 학교를 보냈다고 해서 부모책임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도 하나님 앞에 한 영혼입니다.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대로 있고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잃어버린 영혼(lost soul)입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본 때가 언제입니까? 가족구원을 위해서 전쟁하듯이 전도를 해볼 계획이 있으십니까? 그것을 슬슬 한 두 번 해보고 안된다고 쉽게 포기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5월 17일 우리교회에서 “새생명초청잔치”를 엽니다. 우리는 먼저 가족들을 전도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저 방황하는 내 자녀, 내 형제, 내 남편을 반드시 데리고 오리라.”고 기도하시고 반드시 3명을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가족구원, 관계전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17일에 여러분 가족들을 위해서 참으로 다윗처럼 통곡하고 울고 가족들을 주께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들이 불신앙하여 지옥가고 있는데, 이단 종교에 빠져 있는데, 거짓된 종교에 빠져 있는데, 말도 안되는 것을 무슨 종교라고 믿고 있는데 가만히 계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가족 구원을 위한 전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번영을 부수적인 전리품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는 음성을 들으시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쫓길 때
이윤재목사 / 삼상 30:1-10
여름은 피곤한 계절입니다. 날씨가 더워 짜증나고 장마가 길어 힘듭니다. 한 가정에 한 아들이 있었는 데 조금 모자랍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자기가 아는 작은 회사에 힘들게 취직시켜 주었습니다. 아들이 며칠 다니다가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 놓습니다. “아버지, 나는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 다녔는 데 과장이란 자는 회전의자에 앉아 왜 자기 전화 안 받느냐고 소리쳐요. 나 더러워서 못 해먹겠어요”.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아들을 주유소에 취직시켜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또 불평합니다. “아, 글쎄, 나는 하루 종일 서서 기름넣고 있는 데 주인이란 사람은 에어콘앞에 앉아 텔레비나 보고 있고, 나 열화통 나 못해 먹겠어요”. 아들이 불평하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공동묘지 관리인으로 취직시켜 주었습니다. 아들이 며칠 다니다가 또 불평합니다. “아버지, 참 웃겨요. 나는 하루 종일 앉아 근무하는 데 사람들은 모두 누어 자빠져 자요”.
여름은 무더운 계절입니다. 그러나 단지 덥기만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인생의 무더위입니다. 인생의 무더위는 생존경쟁에 허뎍여 끊임없이 쫓기며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도 인생의 문제로 쫓겨본 적이 있습니까? 고3, 재수생, 시험이 100일 앞으로 다가와서 마음이 쫓기기 시작합니다. 아파트 전세, 월세 내야 하는 사람, 기한에 쫓겨 잠이 오지 않습니다. 등록금, 세금, 각종 공과금 내야 하는 사람들, 기한에 쫓겨 마음이 바쁩니다. 취직시험, 공무원시험, 유학시험, 취업인터뷰 준비하는 사람, 기한에 쫓깁니다. 목회자도 매주 주보, 예배, 설교, 심방, 약속 시간에 쫓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매일 쫓기며 살아갑니까?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평생을 쫓기며 살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의 일생은 처음부터 쫓기는 일생이었습니다. 사울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심 때문에 20년간을 쫓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젊은 날, 유대광야를 전전하며 고통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불레셋에 피하면 잡으러 오지 않겠지”. 불레셋은 사울의 원수요 호전적인 족속이기 때문에 다윗이 거기 숨기만 하면 잡으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간 곳이 시글락입니다. 당시 시글락은 불레셋 왕 아기스가 다스리고 있었는 데 다윗이 자기 몸을 숨겨달라고 부탁하자 아기스는 선뜻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불레셋이 다윗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볼모로 사울을 잡기 의함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윗과 블레셋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재작년에 제가 시글락을 가보았는 데 시글락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빈들에 잡풀만 무성했습니다(사진1). 멀리서 보면 마치 언덕처럼 되어 있습니다(사진2). 이것을 “텔”이라고하는 데 이곳을 현지 이름으로 이곳을 “텔 밀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다윗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겨우 가족과 백성과 함께 불편한 적과 동침을 시작했는 데 갑자기 남쪽에서 아말렉 군이 쳐들어 온 것입니다. 아말렉은 사막의 무법자였습니다. 에서의 후손인 아멜렉은 사막에 살면서 지나가는 상인들, 나그네들, 그리고 인근 도시들을 습격해서 그것으로 먹고 사는 사막의 깡패같은 족속이었습니다. 자, 그래서 어떤 상황입니까? 사울에게 피하려고 원수인 불레셋 속에 숨자 그나마 아말렉이 쳐들어와 다윗의 가족과 백성을 사로 잡혀 갔습니다. 1-2절을 보실까요? 삼상30:1-2,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엎친 데 덮친 격이란 말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안될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다윗이 그랬습니다. 원수와 함께 사는 것도 힘든데 아말렉군대가 쳐들어와 그나마 가족과 백성들을 잡아 갔으니 다윗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도 이런 인생을 산 적이 있습니까? 한 가지가 안되면 또 한 가지가 안되고. 한 가지에 쫓기는 것도 힘든 데 한꺼번에 여러 가지일로 쫓기며 그야말로 정신이 없습니다. 요즘 말로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이 이렇습니다. 늘 쫓기며 삽니다. 한 가지 일로만 쫓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로 쫓깁니다. 직장인 여러분, 얼마나 쫓기고 삽니까? 특히 어렵게 사업하는 교우들 보면 정말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주부들은 한가합니까? 하루 종일 일해도 표도 안납니다. 그야말로 하루 하루 쫓기며 삽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은 이럴 때 어떻게 했습니까?
우선 멈춰야 합니다.
다윗이 했던 첫 번째는 우선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가족과 백성들이 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가정 먼저 한 것은 600명의 군대를 데리고 그들을 추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느 만큼 가다보니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어두어 지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백성들과 함께 브솔시내로 들어갑니다. 브솔시내는 시글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지중해쪽으로 난 시냇가입니다. 광야지역에 드물게 보는 강, 사방이 나무로 둘러 쌓이고 숲이 있는 작은 강, 이곳도 제가 제작년에 갔었습니다(사진3). 사방이 광야로 둘러 쌓여 있는 데도 브솔은 물이 흐르고 나무가 울창했습니다. 그 울창한 숲은 예나 지금이나 나그네들을 따뜻하게 품어 주었습니다. 제가 그 나무밑으로 들어가 작은 개울을 보고 앉았습니다. 나무 그늘에 앉자 한낮의 무더위는 물러가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다윗이 600명의 부하들을 쉬게 한 곳이 이곳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다윗이 지금 한가하게 개울가에서 쉴 때입니까? 지금 한 시가 급할 때 아닙니까? 다윗은 가족과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시급히 달려 가야 합니다. 늦게 갈수록 가족과 백성의 생명은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시원한 브솔강가로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현대인은 너무 바쁩니다. 너도 나도 “바쁘다. 바빠”를 외치고 삽니다. 그래서 현대인을 죽이는 소리는 세 가지라고 합니다. 달력 넘기는 소리, 자명종 울리는 소리, 핸드폰 울리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들이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줍니다. 바쁜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한가하게 있지를 못합니다. 과로를 못참는 것이 아니라 한가한 것을 못참습니다. 마치 하루라도 일하지 않고 지내면 죄라도 짓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것과 한가한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게을러서는 안되지만 때로 한가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날 제가 시간이 늦어 교회로 종종 거리고 오는 데 우연히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 방송은 <고도원의 아침편지>였습니다. 방송은 “멈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멈추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멈추면 끊기는 것 같고, 뒤쳐지는 것 같고,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정반대인데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자동차도 기름이 완전히 떨어지거나 고장이 나면 강제로 멈춰섭니다. 사람도 큰 병이 나면 영원히 멈춰섭니다. 힘이 남아 있을 때 멈추어야, 더 큰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기름이 없어서 멈추면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있을 때 멈춰야지 힘이 없을 때 멈추면 그때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가끔 인생이 쫓길 때 우리가 가장 할 일은 일단 멈추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힘을 얻기 위해 잠시 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지금은 쉴 때”라는 글을 썻습니다.
“지금은 쉴 때”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기를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식구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살짝 웃어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하루가 궁금하지 않고 전화도 기다려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슬픈 연속극을 보면서도 극본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다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도 궁금하지 않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친구가 보낸 편지를 받고 그것을 끝까지 읽지 않거나 답장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 번 더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과 저녁이 같고, 맑은 날과 비 오는 날이 같고, 산이나 바다에서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람을 파괴하는 것은 언제나 욕심입니다. 바쁠 때일수록 서두르지 말고 돌아가야 합니다. 섹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쥬리엣”에서 머큐시오란 사람이 로미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맞아. 꿈은 한가한 머리에서 나오는 열매인 것 같아”. 그렇습니다. 꿈은 한가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옵니다. 분주한 사람의 머리에서는 꿈이 나올 수 없습니다. 바쁠 때 돌아가십시오. 예수님도 자주 쉬셨습니다. 쫓길 때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기차가 올 때 일단 멈춰야 합니다. 그래야 기차가 오는 것이 보입니다. 인생에 쫓길 때 일단 멈춰야 합니다.
자신을 진단해야 합니다.
일단 멈춘 다은 다윗이 한 것은 자기를 진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다윗이 찾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제사장 아비아달이었습니다. 그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윗이 어려울 때 그에게 진실하게 길을 지도해준 맨토였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자신의 곤궁한 상황을 털어 놓고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님께 물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8절입니다. 삼상30: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 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다윗에게 지금 쫓가가서 아가족들을 찾아오라고 조언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너를 도와 줄 것이라고 축복도 했습니다. 자신이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와줄 좋은 멘토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인생의 멘토가 있습니까? 인생 살면서 고달플 때, 힘들 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마음을 털어 놓으면 마치 내 일처럼 도와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인생에 쫓길 때 무엇보다 할 일은 일단 멈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급할 것 없습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멘토에게 자문도 구하고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보아야 합니다. 자기 성찰, 자기 진단이 필요합니다. 자기 성찰은 정원 가꾸기와 같습니다. 나무를 심는다고 정원이 아닙니다. 가꿔야 합니다. 풀도 뽑고 가지도 쳐 주어야 합니다. 자기 성찰은 청소와 같습니다. 가끔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면 갑자기 청소한 자국이 나타납니다. 먼지는 쓸어서 침대에 넣고 물건을 모아서 베란다에 넣고 신발은 구겨서 신발장에 넣었습니다. 그래서 대심방의 날은 대청소의 날입니다. 자기 성철은 매일 청소하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은 병원의 정기 검진입니다. 누구나 몸이 병들 수 있지만 조기 발견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자기 성찰은 영혼의 정기검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쫓길 때 왜 쫓기는지 나는 누구인지 자신을 성찰합니까?
베다니의 두 자매가 그랬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집에 갔는 데 마르다는 바쁘게 음식만들고 마리아는 예수님 무릎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때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님, 나는 지금 바쁜 데 내 동생은 가만히 있습니다.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때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말했습니다. 눅10:41-42,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으로 족하니라”. 이것이 진단입니다. 마르다가 스스로 자신을 진단하면 좋았지만 그렇게 못하니까 예수님이 대신 진단해 준 것입니다. 세 가지로 진단했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수고하나 한 가지만 해라”. 첫째 네가 너무 많은 일을 한다. 둘째 네가 너무 많이 염려한다. 셋째 해야 할 한 가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우리가 쫓기는 첫 번째 이유를 아십니까?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내가 해야 할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내 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지나친 일 때문에 우리는 매일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는 본래 공학용어입니다. 지나치게 무거운 물건에 눌리면 압박을 받고 휩니다. 그것이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스트레스란 무거운 짐이 나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 자기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명보다, 자기 능력보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합니다. 결국 왜 힘든가 보면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일을 덜어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쫓길 때 내가 하는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스티븐 코비는 성공의 7가지 비결을 말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시너지를 내라”는 것입니다. 시너지란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그 일보다 우리가 하는 그 일을 통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만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나혼자 하던 무거운 일을 내려놓고 전체로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또 하나 자기 진단은 나는 얼마나 많이 염려하느냐 입니다. 여러분은 염려를 많이 합니까? 그러나 염려로 해결될 문제가 있습니까? 잠12:25절에서 말합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구약에서 “염려”는 “갉아먹다”, 끈임없이 고통을 준다“라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염려는 ”쪼갠다. 분열시킨다“는 뜻입니다. 염려는 우리 마음을 갉아먹고 우리의 정신을 쪼개며 우리 영혼을 분열시킵니다. 어떤 학자가 염려지수를 측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검사지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염려를 하는지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나는 쓸데없고 비생산적인 염려를 하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2) 나는 평소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무 많은 걱정을 한다는 말을 듣는다. (3) 나는 한시라도 염려를 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다. (4) 나는 일을 할 때마다 항상 염려부터 앞선다. (5) 나는 염려를 통해 가까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 적이 있다. (6) 나는 내 염려가 비현실적이며 과장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염려하게 된다. (7) 나는 때로 염려 때문에 심장이 뛰거나, 숨이 차거나, 호흡이 곤란하거나, 진땀이 나거나, 어지럽다. (8) 나는 상황이 좋을 때조차도 아무 문제가 없는지를 거듭 확인해야만 안심한다. (9) 나는 보통의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약간의 어염려를 하는 데 비해 훨씬 많은 염려를 느낀다. (10) 나의 부모님이나 조부모도 염려를 많이 하기로 유명했거나 정서장애로 고통을 받으셨다.
어떻습니까? 5개 이상입니까? 그렇다면 염려를 많이 하시는 것입니다. 7개 이상입니까? 상당한 염려꾼입니다. 10개가 거의 “예”입니까? 큰 염려병에 걸려 있습니다. 성경을 아십니까? 마6:27, “나희 중에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흥미로운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어떤 기관에서 우리가 하는 염려를 분석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하는 염려의 40%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것이고, 30%는 이미 지나간 일들을 염려하는 것이고, 22%는 매우 사소해서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을 염려하는 것이고 4%는 염려한다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염려하는 것이고 오직 4%만 우리가 염려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염려의 96%는 불필요한 염려입니다.
여호와를 힘입어 승리해야 합니다.
다윗은 아말렉에게 쫓기면서 결국 승리했던 세 번째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은 것입니다. 6절 후반절입니다. 삼상30:6,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급했다는 것은 쫓겼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블레셋에게 쫓기고, 아말렉에서 쫓기면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던 것ㄱ은 하나님 여호아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입니다. 내가 힘이 없으니 사울에게 쫓리고 블레셋, 아말렉에서 쫓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강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이 중요합니다. 삼상30:10,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200인을 머물렀고 다윗은 400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중요한 것은 다윗이 아말렉을 추격할 때 600명을 다 데리고 추격한 것이 아니라 400명만 데리고 추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언제나 전쟁은 수가 많아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피곤이 풀리지 않은 사람 만명을 데리고 나간다고 전쟁에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피곤이 풀린 사람, 영적으로 회복된 사람, 여호아로 인하여 힘을 얻은 사람이 전쟁을 이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400명이 아말렉을 추격했는 데 17절입니다. 삼상30:17,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약대타고 도망한 소년 400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이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빼았겼던 모든 것중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다같이 “모든 것을 도로 찾았고”, 그리고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600명이 아니라 400명만 데리고 나갔어도 잃어버린 것들을 다 찾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자신이 먼저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나입니다.
미국의 한 회사에 도둑이 자주 들어왔습니다. 사장이 회사의 안전을 위하여 자동 경보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이 경보 장치는 도둑이 들어오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소리를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경보 장치를 설치하고 집에 들어가 잠을 자는 데 갑자기 경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경보 장치가 지금 울리고 있으니 빨리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갔는 데 도둑이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다시 돌아와 잠을 청하는 데 또 전화가 왔습니다. 또 경보음이 울렸다는 것입니다. “이번엔 틀림없는 도둑이야. 이번에는 반드시 잡는다”라고 나갔는데 이번에도 도둑이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생각하고 있는 데 경찰 한 명이 들어오더니 말합니다. “사장님, 아무래도 문제는 내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도둑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경보기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 경보기를 조사해 보시죠”. 다음날 아침 일찍 경보기를 조사해 보니 과연 경보기가 고장나 있었습니다. 문제는 안에서 생겼고 그날 도둑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제의 원인은 자주 밖에서 찾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부모가 잘 못가르쳐서 그래. 내가 왜 이렇게 술만 마시는 이유는 마누라 때문이야. 사업이 안되는 것은 정부때문이고, 교회 생활이 재미없는 것은 목사님 때문이고”. 이런 식입니다. 잘못된 진단입니다. 문제는 내부에 있습니다. 자동경보장치가 안에서 고장난 것입니다. 다시 6절, 삼상30:6,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는 이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리고 알아야 합니다. 흉터와 상처는 다릅니다. 우리 옛날 시골에 한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그 아저씨에게 항상 큰 흉터가 있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야기합니다. 어느날 산에서 호랑이 나와 자고 있는 자기를 물었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때 죽었다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질렀는 데 어머니가 달려와 자기를 사이에 두고 호랑이와 싸웠답니다.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호랑이에게 물려 있는 아들을 끄집어 당겼습니다. 결국 호랑이가 도망갔는 데 나중에 보니까 호랑이에게 물린 자극이 큰 흉터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국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한손에는 호랑이에게 물린 흉터가 있고 다른 손에는 엄마가 잡아 다니느라 움푹 파인 손톱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 개가 있는 것입니다. 흉터와 상처.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흉터와 상처가 함께 있습니다. 흉터는 호랑이에게 왔고 상처는 어머니에게서 왔습니다. 상처는 마귀의 공격 때문에 왔고 상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는 길이 있습니다. 6절,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여호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어야 합니다. 환경을 바꾸는 것보다 아말렉과 쫓아가기 보다 우리가 힘을 길러야 합니다. 여호아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쫓기는 세상에서 쫓기지 않고 쫓아가는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이를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하찮은 기도제목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누구나 기도하면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힘을 얻으면 회복됩니다. 이것이 이번 여름에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인생이 쫓길 때 하나님으로 힘입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위기탈출의 신앙
인명진목사(갈릴리교회) / 사무엘상 30:1-8
추석 명절입니다. 추석이 되면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성묘입니다. 조상의 묘를 찾아가는 성묘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의 마음에 별로 와 닿지 않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성묘는 일 년에 한두 번 조상의 묘를 찾아 조상을 섬기는 효도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며칠 전 성묘를 다녀왔습니다만 조상의 묘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가족묘지에 제가 묻힐 장소를 정해놓고 거기에 장미나무를 심었습니다. 제가 죽으면 묻힐 곳을 바라보면서 결국은 내가 어떻게 살았든 간에 마지막에 돌아와야 할 곳은 여기구나, 마지막 머무를 곳은 여기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얼마나 이 세상을 살지 모르지만 제가 이 세상에서 사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과 세월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래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저와 함께 살았던 분들이 한줌의 재가 되어 묻혀 있는 것을 보며 새삼스럽게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던 70 평생의 삶이 다시 한번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습니다. 지난날의 여러 가지 어려웠던 일들과 즐거웠던 일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되면서 과거의 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묘는 과거의 나를 생각하게 하고, 미래의 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다 바쁘다는 핑계로 말미암아 현재의 나만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 지금 내가 먹고 사는 현재의 나에게만 매달려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생각해보는 것이 우리 인생에 참으로 유익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상들의 묘 앞에서 지난 70년의 제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쳐 오늘에 이른 감회가 참으로 새로웠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난관이 있었고 위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저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을 평탄하게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어려움이 있고 난관과 위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만나는 위기는 인생의 폭풍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위기에 맞닥뜨리게 되면 ‘인생이 여기에서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때로 ‘나는 여기까지구나. 헤어날 길이 없구나.’ 하는 죽을 것과도 같은 인생의 위기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와 같은 위기를 딛고 극복하고 오늘의 나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되돌아서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닥쳤던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그 위기를 슬기롭게 잘 극복했으면 오늘의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운 아름다운 삶으로 남아있게 되고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위기에 매몰되는 삶을 살면 그 인생은 실패의 삶으로 귀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무엇입니까? 인생의 위기를 잘 극복한 사람은 성공한 것이고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인생길에서 만나게 되는 태풍과도 같은 위기, 내 인생을 한꺼번에 집어삼킬 것만 같은 위기, 죽을 것만 같은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위기를 잘 극복하여 그 위기가 우리 인생의 행복과 승리가 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3-4년 전에도 이 문제로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 가운데 인생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 그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인생의 승리를 이루고 행복을 이룬 사람의 모습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는 그런 예로서 다윗 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인류 역사상 이만큼 성공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유대민족은 다윗을 가장 위대한 민족의 영웅으로 생각하고 다윗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려주기를 기다립니다. 다윗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분열된 이스라엘을 하나로 모아 통일왕국을 이룬 사람입니다. 대단한 권력을 지녔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다윗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윗에게는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탄탄대로, 승리에 승리만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단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닌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우리 가운데 그 어떤 사람도 당하지 않았던 엄청난 위기와 어려움과 난관을 거쳤습니다. 다윗은 저 시골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이 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찾아갔는데 이새는 사무엘에게 다윗을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이새의 마음에 다윗은 별 볼일이 없어 보인 것입니다. 임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아예 보여주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무엘이 다른 아들이 없냐고 묻자 들에서 양을 치던 다윗을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삶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반대자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우리를 반대하고 흉보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저도 한평생 살면서 저를 비난하고 욕을 한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저를 죽여야겠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죽여야겠다고 끈질기게 따라다닌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사울왕이었습니다. 얼마나 미웠으면 다윗을 죽여야겠다고 절치부심하고 다윗을 따라다녔습니다. 자기를 죽이겠다고 밤낮 따라다니는 다윗의 인생이 편안할 리가 없습니다. 그보다 더 큰 위기가 어디 있으며 그보다 더 고달픈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다윗의 삶을 살펴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큰 인생의 위기를 겪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와 같은 심각한 위기를 다 딛고 슬기롭게 극복하고 오히려 그 어떤 사람도 이루지 못한 승리와 성공의 삶을 살았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다른 그 어떤 사람도 이루지 못한 성공과 축복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다윗이 이러한 축복과 성공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주어졌던 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위기 때문에 다윗은 승리와 축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설절인 말이지만 다윗에게 위기가 없었다면 다윗의 성공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의 삶,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그만 위기나 환란이 닥쳐와도 쩔쩔매고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실패하는데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큰 위기에서도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모두는 다윗에게서 그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그가 당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승리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 상 30장의 말씀이 제가 보기에 다윗의 인생 가운데 겪었던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까 다윗이 자신의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부하들을 거느리고 시글락을 근거지로 해서 18년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동안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고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왔을 때 아멜렉군이 쳐들어와서 마을을 불사르고 아내 두 사람과 부하들의 식구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고 했습니다. 이 비참한 모습을 본 다윗의 부하들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4절 말씀을 보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고 했습니다. 자연히 이런 상황 속에서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원망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얼마나 화가 났던지 6절 말씀을 보면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으로서 얼마나 심각한 상황입니까? 그동안 자신을 믿고 따랐던 부하들이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중지란(自中之亂),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먼데 있는 사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가깝게 있는 주변 사람이 나를 배반하고 등을 돌리는 것만큼 심각한 상황은 없습니다. 아마 다윗이 겪었던 인생의 위기가 가장 심각한 위기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지만 적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까지 같은 편이 되어 싸우던 믿고 따르던 부하들이 죽이려고 덤벼드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였겠습니까? 다윗이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이겨내면 성공하는 것이고 실패하면 그동안 쌓은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윗은 이 인생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 방법이 무엇인가 세 가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6절 끝부분에 보면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고 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배반한 ‘이제는 끝이구나.’ 실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배반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용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지혜를 봅니다.
저는 이것을 다윗의 주특기라고 생각합니다. 주특기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나만이 가진 비장의 무기입니다. 성공한 운동선수들은 자기 나름의 주특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야구경기를 보는데 해설자가 “저 선수는 도루가 주특기입니다.” “저 선수는 홈런이 주특기입니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주특기기 없는 선수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합니다. 비단 야구뿐만 아니라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권투선수도 씨름선수도 주특기가 있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주특기가 있어야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인생을 살아가는데 주특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말을 잘한다든지, 성실하다든지, 하다못해 비비기라도 잘 하든지 뭔가 주특기가 있어야 험난한 인생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될 때 ‘저 사람은 평생 성실하게 살았으니 도와주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주특기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주특기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다윗에게도 주특기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주특기는 무슨 일만 생기면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달려가서 엎드려 하나님께 자신이 당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말씀드리고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은 아무 계획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처럼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다윗이 부끄러운 죄를 지었을 때도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다윗은 하나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심지어는 전쟁을 하러 갈 때도 하나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아는 대로 어려서부터 골리앗과 싸운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백전노장입니다. 그쯤 되면 전쟁이 나면 전략을 세우고 전쟁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은 한 번도 전쟁을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나가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달려나가는 것이 주특기였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다윗이 이 주특기를 사용할 때마다 놀라운 위력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주특기를 사용했는데도 효과가 없다면 주특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의 주특기는 다윗이 사용할 때마다 어떠한 어려움이든지 그 위기를 이겨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주특기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그 주특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톡톡히 재미를 본 것입니다. 사용할 때마다 효력과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평생 동안 이 주특기를 사용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다른 것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돈이 많았습니다. 권력이 있고 유능한 참모에 본인 자신이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굳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평생동안 주특기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특기가 효과를 보아서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윗만 특별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다 사용할 수 있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주특기는 무엇입니까? 주특기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인생의 위기를 탈출할 수 있습니다. 언제 우리에게 위기가 닥쳐올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라고 하는데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권력, 권불십년(權不十年)입니다. 권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참으로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 다윗의 주특기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무슨 일이 생기면 제사장을 찾았습니다. 제사장을 상담자로 멘토로 삼은 것입니다. 씨름 선수도 코치가 있듯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멘토가 필요합니다. 상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제사장을 멘토로 삼은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다윗만이 가진 비장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8절 이후를 보면 아멜렉 군대를 따라갔는데 길가에서 사흘 밤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가던 음식과 물을 먹여 그 소년을 살렸습니다. 지금 다윗은 전쟁터로 가고 있습니다. 급하게 아멜렉 군대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빨리 가서 부하들의 가족과 두 아내를 구출해야 하는 급박한 순간입니다. 보잘 것 없는 적군의 소년 때문에 지체해서는 안 되는 국가대사가 발생한 급박한 상황입니다. 음식을 주는 것도 그렇습니다. 전쟁터에서 군량미는 소중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생명과 같은 음식과 물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그러느라 시간도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그랬더니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병든 이방인 소년이 정신을 차린 후 결정적인 정보를 주는데 다윗이 쫓아가는 아멜렉 군대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이 소년이 다윗의 군대에게 아멜렉 군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어 다윗의 군대가 대승을 하게 됩니다. 길가에 버려진 병든 나그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푼 것으로서 이러한 대승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주특기, 비장의 무기였습니다.
옛날 왕실에 어려움이 생기면 임금이 나라의 창고를 열고 불쌍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이 감동해야 사람이 감동합니다. 미국 뉴욕의 리버사이트 처치를 지은 사람이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록펠러입니다. 록펠러가 젊어서 병이 들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털어 리버사이드 처지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록펠러의 병이 나았습니다. 물론 의술의 힘을 빌리기도 했겠지만 아무튼 교회를 지은 후 병이 나은 것입니다. 우리나라 재벌 회장이 병이 들었는데 저에게 어떻게 하면 병이 나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 제가 그분이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지만 좋은 일하라, 착한 일하라고 했습니다. ‘명량’ 영화를 천칠백만명이 보았다고 합니다. 돈을 내고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다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돈이 없어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을 텐데 이 사람들에게 공짜로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65세 이상 어르신들에게 공짜로 영화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분 병이 나아야 될 텐데 하고 있습니다. 병들면 병원에 가져가는 돈 반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써야합니다. 이것이 비장의 무기입니다.
다윗이 가졌던 주특기는 검증이 확실히 끝난 주특기입니다. 다윗이 실험해 보고 효과를 얻은 주특기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윗이 가졌던 이 세 가지 주특기를 여러분의 주특기로 삼아 살아간다면 여러분의 인생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고 해도 여러분의 인생도 승리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추석선물로 어떤 경우에든지 세상 의지하고 두리번거리지 말고, 누가 나를 도와줄까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로 곧장 달려가서 하나님과 의논하는 이 주특기, 제사장을 자신의 인생의 상담자로 삼았던 주특기,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병들고 배고픈 나그네를 돌보고 선한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주특기는 검증이 된 주특기입니다. 효과가 있는 주특기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다윗의 주특기를 여러분의 주특기로 삼아서 다윗처럼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위기 극복의 지혜
사무엘상 30:1-10 / 崔仁根 牧 師
그 옛날 다윗이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도망 다닐 때의 한 에피소드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이 되고 있어 오늘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사울 왕이 너무나도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 할 수 없이 다윗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도망을 가다가 끝내는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블레셋 땅 시글락까지 피신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성을 비우고 출타하는 일이 있었는데 마침 그 때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모든 사람들을 다 포로로 잡아가고 성은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삼상30:1-2)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 삼일에 시글락에 이를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이 일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남은 사람들이 더 이상 울 기력이 없을 만큼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삼상30:3-4)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왜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충성을 다 했던 왕에게 쫓기어 도망 다니는 것도 서럽고 억울한데 이처럼 낯선 나라에서 처절하게 공격을 받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으니 누군들 그렇게 통곡하고 절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충격과 혼란가운데 빠져버린 용사들이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다윗을 공격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삼상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아말렉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사라져버렸고 공연히 다윗 때문에 이렇게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것 같아 그들의 분노가 이처럼 다윗을 향하여 폭발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 역시 모든 것을 다 잃고 빼앗긴 엄청난 피해자였습니다.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역시 포로로 잡혀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다윗이 취한 자세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교훈으로 삼는다면 은혜와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인생의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겠는지? 지혜를 얻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위기 극복의 지혜
다윗을 추종하고 충성하기에 위기에 몰린 다윗과 함께 생사고락을 하기 위해 사울의 칼날을 피하며 다윗과 함께 했던 충성스런 용사들이 이처럼 극에 달한 위기를 만나자 주군인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는 배신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이 그처럼 위기의 상황에서 사람을 믿고 의지하려는 자세를 미워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극한 위기상황을 주시어 우리들의 진실된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시험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절대로 믿을 대상이 아닙니다
다윗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가 이스라엘 나라와 사울 왕을 위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대적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나라도 떨고 용사들도 떨고 심지어는 사울 왕까지도 떨고 있을 때 어린 다윗이 그들 앞에서 대적 골리앗을 물리쳐 준 죄밖에 없었습니다. 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 싸우고 이긴 죄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그러한 다윗을 시기하여 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삼상18:6-9)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문자 그대로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윗은 또 어떠한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까? 자신도 엄청난 피해자인데 수하들이 자신을 돌로 쳐 죽이려고 집단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는 목숨을 걸고 함께 하겠다고 나서놓고 위기와 고통이 따르자 돌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당하는 인간으로부터의 배신은 어쩌면 이제 시작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는 숱하게도 많은 배신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었던 요압 장군에게 배신을 당하였고 충신 중의 충신이었던 시므이라는 신하로부터 배신을 당하였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 압살롬에게까지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평생을 배신의 삶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나서 남신 한 마디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시37:5-7)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이것이 바로 배신당하며 일생을 고통당한 다윗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 한 마디로 요약해 놓은 산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타락한 존재들이고 그러므로 철저하게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위해 배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가슴에 새기고 인생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도 오늘 우리는 엄청난 삶의 유익과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취한 삶의 자세가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가 또한 오늘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이 됩니다.
(갈1:15-17)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 엄청난 역사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찾아가 지식과 지혜를 구하지 아니하고 광야로 나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철저하게 배워야 할 하나님 중심 신앙의 근본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다윗이 부하들에게 엄청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힘을 모아도 안 될 이처럼 절박한 위기의 상황에 도리어 떼를 지어 자신을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어리석은 부하들을 보고 엄청 좌절하였을 것입니다. 순간 그도 매우 놀랐고 당황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단순하게 "군급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다윗이 당한 순간적인 놀람은 매우 컷을 것입니다. NIV 성경에서는 "David was greatly distressed"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와 같은 엄청난 위기를 해결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간적인 감정으로 이처럼 자신을 배신하는 부하들을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문제 해결의 도움을 받기 원하였습니다.
(삼상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30: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이처럼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응답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응답하신 말씀 그대로 아말렉을 추적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잃었던 모든 것을 다 되찾아 왔습니다.
(삼상30:17-20)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의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위기에 처한 다윗을 통하여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기의 때에 그릇 행하여 사람도 잃고 하나님도 잃고 소중한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인간적인 인성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위기의 때에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위로 받고 기도하여 방법을 찾게 되면 오히려 위기가 변하여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만약 믿음이 있다면 진정 이렇게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센디에고에 살고 있는 로버트 거스라는 미국인이 몸으로 경험한 위기 극복의 지혜가 [마음을 열어 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기록 되어 있어 여기 요약하여 보려고 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살배기 딸과 함께 RV를 빌려 멕시코의 바하 캘리포니아 지역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내일이면 떠나려는 마지막 날 밤 깊이 잠이 들어 있는데 강도들이 찾아 와 자동차 앞 유리를 몽둥이로 때려 부수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운전석으로 가서 차를 움직이려고 시동을 걸었으나 단 한 번도 문제가 없었던 차인데도 웬일인지 부릉거리기만 하고 엔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순간 운전석 옆 유리를 깨고 괴한들이 잠긴 문을 열고 자신을 끌어 내렸습니다. 땅 바닥에 엎어지게 한 후 두 손을 묶었습니다. 괴한들은 4명인데 한 사람은 총을 들었고 한 사람은 낫과 같은 긴 칼을 들었고 또 한 사람은 야구방망이를 들었으며 마지막 한 사람만 무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순간적으로 위기를 당한 로버트는 땅에 얼굴을 댄체 엎드려서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지혜를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이 차에 올라가 아내와 어린 아이를 공격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였습니다. 그 순간에도 그들은 차를 온통 벌집수셔 놓은 듯 뒤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돈이었습니다. 순간 그는 자기를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내가 가진 돈을 찾을 수 없다. 내 지갑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줄게... 그리고 중요한 물건 이를테면 카메라며 먹을 것이며 그들이 좋아 할 만한 것은 죄다 가르쳐 줄게." 그러자 그들은 오히려 당황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라도 강도들이 찾지 못하도록 숨기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조금은 긴장을 늦추는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가질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자신을 묶은 채로 차에 태우고 그들이 운전을 해서 어두운 어디론가로 가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끌려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불안은 그 때부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맥스코인들이 잘 아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어 순간순간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듯 차는 깊은 산 속 작은 마을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렸습니다. 한참 동안 옥신각신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들 중에서 무기를 들지 않았던 자가 차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우리는 산 속에서 이처럼 가진 것이 없어 나쁜 줄 알면서도 강도짓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우리들을 적대시 하지도 않고 우리들을 너무나도 따뜻하게 대해 주어서 우리들의 마음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든 물건을 돌려드립니다. 그리고 돈도 다 돌려 드립니다. 조심해서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로버트는 깨달았습니다. 왜 멀쩡하던 자동차의 엔진이 걸리지 않았는지, 왜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버려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왜 그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평안으로 노래까지 부르게 하셨는지... 그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순간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간섭하시고 지혜를 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삶에 위기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나 로버트는 이렇게도 엄청난 위기 앞에서 사람의 사사로운 방법을 동원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과 함께 하므로 오히려 축복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자신을 돌로 치려는 자들을 변함없이 자신의 수하에 두고 용사로 키워서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연약함을 이해하고 용서하여 변화를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무자비하게 돌로 치려는 그런 무지막지한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그들의 무지한 처사도 다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저렇게 할까? 얼마나 속이 상하고 원통하면 저렇게 행동할까? 그래 나에게 다 해라. 그렇게 해서라도 직성이 풀린다면 누구에게 하겠니? 다 내게 쏟아 놓으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렇게도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로버트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밤 중에 총과 칼과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 온 그런 악랄한 떼강도들에게 어떻게 돈 지갑을 내 주고 카메라를 내 주고 모든 음식을 다 내 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을 베풀게 하셔서 그들의 악한 마음을 녹이게 하시고 재물보다 더 귀한 생명과 가족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해답입니다. 악한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하나의 방법은 이처럼 사랑을 베푸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시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희생과 사랑의 달 6월이 막바지로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들의 삶의 위기를 어떻게 이기고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요? 늘 대비하고 준비된 자들만이 위기의 순간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지금은 월드컵 축구가 한창인데 준비와 훈련 없이 세계의 막강한 팀들과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인생이든 운동이든 신앙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지간에 준비된 사람과 훈련된 사람만이 위기에서 승리하는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다하여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보여 준 아름다운 위기극복의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위기를 축복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런 사람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복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자니 우리들의 근본 자세가 사람 중심인 인본주의에서 하나님 중심인 신본주의로 바뀌고 하나님의 중심 사상인 사랑으로 무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복된 주님의 날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구별된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지혜로 위기를 축복으로 바꿀 줄 아는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 멘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김필곤목사(열린교회) / 삼상 30:1-6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주 교회에 잘 나가던 어떤 40대 남자가 주일날 교회를 가지 않겠다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그러자 평생 동안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일 예배에 참여한 80대 어머니가 이불을 벗겨 빼앗으며 “빨리 일어나 교회 가라”로 소리쳤답니다. 그래도 아들은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어머니는 큰 소리로 “도대체 이제까지 잘 다니더니 이유가 뭐냐?”라고 물었답니다. 아들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일어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이 참여하는 온가족 예배를 드리는데 혹시 오늘 아침 이불을 뒤집어쓰고 교회 가지 않겠다고 때를 쓰는 아이들이 있었습니까? 어떤 분은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책을 쓰신 분도 있습니다. 그 이유 몇 가지를 보면 “각종 모임 참석에 대한 강요가 많아, 고리타분하여, 말 많은 전도사가 싫어, 헌금이 무서워, 교회에서 진짜 신앙인을 보지 못해, 교회에 쓸 만한 총각이 없어, 마음 터 높고 깊은 이야기할 친구가 없어” 등 77가지를 나열해 놓았습니다. 아들이 일어나지 않으려고 하니까 어머니가 “왜 이제까지 잘 잘 다녔는데 교회를 안 가려고 하느냐?”고 말하며 아들에게 “교회 가기 싫은 이유를 세 가지를 말해봐”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아들은 “첫째 주일날 늦게까지 잠을 자고 싶은데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둘째, 주일 조금 쉬고 싶은데 하루 종일 교회 붙들어 놓으니까 싫고”, “셋째, 예배드릴 때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 가기 싫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80대 어머니가 아들에게 “너 안 나가면 나도 안 나간다”고 말하며 주일날 교회에 가야할 이유 세 가지를 말씀하더라는 것입니다. “첫째 주일 날 예배드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니까. 둘째 예배는 사람보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니까”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지 못하다 서원기도를 하고 아들을 낳아 하나님께 바친 80대 노모는 긴 한 숨을 푹 쉬면서 “셋째는 너는 담임 목사이까 설교하러 가야하지 않니?”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도 어느 날 아들이 교회에 안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는 목사의 아들이니까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의 아들이 교회에 안나오면 교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겠냐? 아빠가 설교하면 교인들이 네 자식이나 잘 가르치라고 하지 않겠냐?”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교회에 다니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어린 자신에게도 목사의 수준의 삶을 요구하는 교인들의 무언의 시선이 견디기 힘든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들에게 이 장로님 가정을 보라고 했습니다. “아들과 딸이 다 결혼하여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가 한 교회를 섬기며 신앙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보기에도 아름다우냐? 하나님 보시기에도 얼마나 아름답겠냐?”라고 했습니다. 오늘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날인데 아들과 딸이 결혼하여 멀리 살지 않는다면 같이 한 교회를 섬기며 손자 손녀와 함께 같은 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리고, 같이 삶을 공유하며, 한 주일에 한 번이라도 같이 만나 식사하고, 이 가을에 공원에 같이 나가 온 가족이 단풍 구경도 하며 같이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이들이 자라면 부모를 떠나 끼리끼리 어울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울릴 친구가 없으면 부모를 떠나 친구가 있는 교회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 생활은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보다 부모 따라 교회 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친구가 부모보다 더 중요한 것 아닙니다. 친구가 학비를 내어 줍니까? 결혼식을 비용을 내어 줍니까? 아프면 치료를 시켜 줍니까? 언젠가는 이 땅을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녀 따라 교회 옮겨 다니지 말고 자녀들을 잘 설득하여 온 가족이 함께 교회 생활하도록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3대가 4대가 함께 한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부모도 영원히 이 땅에서 자녀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실 분은 친구도 부모도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도 하나님 한 분 의지하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원하시는 마음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세 번째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는 마음, 네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울이 그렇게 죽이려고 하는데도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를 잘 다니다가 방학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의지하다가 하나님의 떠나 부모 말도 듣지 않고 주일날 교회도 나오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25장 1절을 보십시오. 갑자기 정신적인 스승인 사무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자신에게 왕이 될 수 있도록 기름을 부은 스승이고 자신의 대관식을 집례해야 할 분인데 아직까지도 도망자 신세인데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27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어떤 위협을 당하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은 다섯 가지 오류를 범한다고 합니다.
첫째가 단정입니다. 둘째는 과장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간과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지나친 일반화입니다. 다섯째는 그릇된 가치관을 갖습니다. 다윗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블레셋 나라로 망명해 버립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니까 27장 5절을 보십시오. 비굴의 탈을 씁니다. 8절을 보십시오. 위선의 탈을 씁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거짓의 탈을 씁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것입니다. 왕의 신임을 받기 위해 그술과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과 겐 지역을 공격하였다고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천하의 다윗이 이렇게 밀려가고 추락을 하였습니다. 28장 2절을 보십시오. 왕의 경호원이 되었습니다. 29장 4절을 보십시오. 아기스 왕은 다윗을 이 전쟁에 끌고 갔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다윗의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진짜 망명인지 가짜 망명인지를 시험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29장 10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새벽에 일어나 전쟁터에서 쫓겨났습니다. 30장 2절을 보십시오. 목숨이라고 살겠다고 망명 왔는데 달랑 자기 목숨 남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16개월 동안 아기스라는 말처럼 하나님을 떠나 "아, 기를 쓰고 빌붙어 아부하며" 살아간 결과입니다. 재산도, 아내도, 자식들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자기 하나 믿고 따르던 부하들의 식구들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오늘 성경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합니다.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다윗과 함께 했던 600명의 사람들이 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까? 그렇게도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함께 신앙생활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원수가 되어 버립니까? 왜 교회를 등지고 떠나버립니까? 왜 가정을, 왜 부모를, 왜 회사를 등지고 원수가 되어 떠나버립니까? 다윗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블레셋이라는 이방 땅까지 따라왔는데 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까? 자식들 때문입니다. 아내들은 서운하게 들리겠지만 자식들 때문입니다. 자식에 대한 애정을 참 대단합니다. 특히 어머니들은 자식이라면 꼼짝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장가를 갔는데도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돈 잘 버는 아들 이미 장모 아들 되었는데 그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들은 큰 도둑, 며느리는 좀도둑, 딸은 예쁜 도둑” 되었는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라고 외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한 할머니가 맞벌이하는 아들 내외와 살면서 손자를 키워주었답니다. 어느 날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손자가 다쳤답니다. 연락을 받고 병원에 달려온 며느리가 “어머니는 얘가 이렇게 될 때까지 뭐했냐?” 폭언을 퍼붓더라는 것입니다. 놀란 할머니가 서운해 아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까 “엄마, 당연하지”라고 말하며 자신을 나무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아들 집에 나와 자신 앞으로 있는 아파트를 팔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다윗 시대도 자식 사랑 못 말렸습니다. 다윗도 자기 자식들 다 잡혀갔는데 자기 자식 생각하면 다윗의 아픔은 헤아리지 못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심리학 용어로 말하면 `대상상실'인한 극한 스트레스로 인정도 사정도 예의도 법도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이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란 다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극적인 상황을 만나면 바꾸어집니다. 그렇게도 죽고 살기로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도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못하면 헤어지고 살인을 합니다.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27살 총각이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과 혼수 문제로 다투다 여자 친구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부산에서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가 갈라지니까 여자 친구의 아파트를 찾아가 여자 친구와 아버지 어머니 심지어 할머니까지 잔인하게 죽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작년에 이런 애정살인으로 85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지난 9년 동안 824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좋을 때 좋은 것이지 싫어지면 어느 순간 원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의지할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다윗은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형들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왕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부인 미갈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블레셋 장군들에게 블레셋 왕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제 자신과 생사를 같이하며 자신이 거둔 부하들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때 다윗은 정신을 차립니다. 새번역에는 “군인들이 저마다 아들딸들을 잃고 마음이 아파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할 정도였으니,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새번역)”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꾀를 의지하고 살 궁리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극한 상황에 도달하자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훈련을 하나님이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날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충성했던 직장에서 배신을 당하면 원망하며 돌을 들지 말고 하나님이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아브라함도, 요셉도, 바울도 다 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만 의지하자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6절을 보십시오. 크게 다급한 상황입니다. 다급하다(야짜르)라는 말은 “누르다. 좁혀지다. 묶다,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다, 답답하다, 포위하다”라는 뜻입니다. 인생 막다른 골목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진 것입니다. 담대해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면 어떤 막다른 골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담대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 보면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모든 인간의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카네기도 인간의 행복과 성공의 85%는 인간관계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관계에는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자신), 너(상대), 관계, 환경"입니다. 만족할 만한 인생살이를 하려면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상대입니다. 바꿀 수 없는 상대를 내가 바꾸려고 할 때 갈등과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상대보다 쉽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그만 둘 수 있고,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관계도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 관계도 부부 관계도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자기를 바꾸는 것보다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먼저 변화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결정성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선택과 행동의 결과이고 미래도 지금 나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 조건, 사건이 생겼는데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건설적으로 대응하고 행동할 수 있고, 비건설적으로 대응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고 파괴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건설적으로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용기를 중요하게 생각한 아들러는 "만일 나의 아이들에게 단 하나의 재능을 줄 수 있다면 용기를 주겠다."라고 용기를 강조했습니다. 용기는 하나님이 앞서 가심을 절대 신뢰하는데서 나옵니다. 용기는 하나님을 의지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7-8)
다윗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 무엇을 합니까? 기도합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27장부터 모든 것을 잃어 버릴 때까지 다윗은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하자 기도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 잡고 도로 찾으리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두려움 앞에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가 질병으로 죽음의 위기 앞에 있을 때 그 두려움 앞에서 용기 있게 기도하여 치유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던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두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원망하고 핑계 대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게 기도하여 잉태의 복을 누렸습니다. 다니엘도, 에스더도 두려움 앞에 기도로 용기를 가지고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니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바로 6백 명을 거느리고 출발합니다. 기도하고 행동합니다. 이 때 다윗은 몹시 지쳐 있을 때입니다. 1절에 보면 아벡에서 시글락까지 3일 동안 달려온 길입니다.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즉각 순종합니다. 브솔 시내에 오자 2백 명의 낙오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지쳐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6백 명이다 가도 모자라는 군인입니다. 그 때 기도하고 출발한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멈추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낙오자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지지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착각이며 교만입니다.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7명은 무관심하고 2명의 비판하고 1명만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이 법칙입니다. 다윗은 따르는 자 4백 명만 거느리고 추격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한 사람이 취할 행동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주인에게 병들었다고 버림받아 밤낮 3일을 굶주린 사람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이 보내어준 인도자가 되어 준 것입니다. 광야의 나침반이 되어 준 것입니다. 200명의 중도 포기자보다 훨씬 다윗에게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위기를 극복할 키멘을 만난 것입니다. 당시 아말렉 사람들은 반 유랑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일정 지역에 정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사정을 잘 아는 안내인이 없으면 찾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16절, 17절을 보십시오. 적은 군인으로 기습 공격하여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18절 이하를 보십시오.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도로 찾아왔고... 양 떼와 소 떼를 다 되찾았더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찾고, 찾고,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요셉이 형들이 인신 매매 해서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종이 되었지만 중년 여성이 유혹을 거절하니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왕의 신하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 그는 왕을 만나 결국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장인 이드로를 만납니다. 다 자기를 죽일 것같지만 자신을 돌보아 주는 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할 때 왕과 고위 관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살려주는 왕궁 내시 흑인 이방인 구스 사람 에벳멜렉을 만납니다. 그가 웅덩이에서 예레이먀을 살려 줍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용기 있게 하나님의 의지하고 행하면 한 사람을 붙여 주어 모든 것을 찾고 찾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다윗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하고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4.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기도하여 응답받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으로 살아갑니다(10,22,23)
2백 명의 낙오자들에 대하여 다윗을 따른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4백 명의 용사 중에는 악한 자와 불량배였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은 자들에게는 전략물을 주지 말자는 것입니다. 처자만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의지한 다윗의 마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했다면 마땅히 공로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정의이고 공평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풀어 주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에 따라 분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누가 승리하게 했다는 것입니까? 내가 아닙입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전쟁에 갔던 자들이나 피곤하여 남아 소유물을 지켰던 자들이나 동일하니 같이 분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멋지게 사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마음입니다. 모든 역경을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고난을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상실을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돈을 의지하면 돈 떨어지면 모두가 떠나고 실망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관계 나빠지면 배신을 당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 마음 좋은 때 좋은 것이지 싫어지면 그렇게 없으면 못살 것 같은 사람도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인 페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사업에 투신했으나 심한 재정난으로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재물 의지하다 모든 것을 다 잃고 급기야는 격리 병원에 수용되었답니다. 어느 날 아침 낙망하고 좌절한 그에게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 보니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답니다. 그가 뒷자리에 앉아 있을 때 매우 친숙한 찬송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어려워 낙심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너 쓸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가 불리고 있었답니다. 그는 그 순간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좀 돌봐 주시옵소서."라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윗이 이 때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했는가는 시편 56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3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사망에서 건져 주시고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려고 실족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너무 의지하지 말 것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을 제하여(이사야 3:1)”버린다고 했습니다. 재물 너무 의지하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시편 146편 3절에서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 너무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5절에서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 절대 주권이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기도하여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잃은 것 찾고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믿음은 증명된다
이규현목사(수영로교회) / 삼상 30:1~6
본문에 보면, 다윗의 생애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난 후 왕이 되기까지 굉장히 험난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바로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때에 즉각적으로 응답될 때도 있지만, 응답 받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해도, 응답하신 대로 이루어지기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열매가 무르익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지만, 바로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말도 되지 않는 왕을 섬겨야 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애썼습니까.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썼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서 왕에 대해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향해 질투심을 갖고 있는 왕을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난 후 왕관을 쓰고 돌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다윗이 그랬다면, 일이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의 기본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것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좋은 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조급한 마음을 갖는 것은 믿음의 행위와 반대됩니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믿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의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이 믿음생활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기다리는 것이 어렵습니다. 힘든 데 기다려야 할 때가 어렵습니다. 일이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는데, 빨리 이루어지지 않고, 어려움 가운데에서 기다려야 할 때가 가장 힘든 시간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숙성시키십니다.
사무엘상에서 우리는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사울 왕은 급조된 왕이었습니다. 숙성의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몰락했습니다.
무엇이든 빨리 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뭔가 빨리 이루어내고 싶은 욕망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숙성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어떤 자리에 앉는 것, 그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어떤 자리에 앉혀놓으면 안 됩니다. 망합니다. 거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기름 부음 받는 순간부터 다윗을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훈련학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최고의 스승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일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사무엘상 27장에 보면,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며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살 방도를 찾았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동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디로 갔습니까? 다윗은 블레셋으로 들어갔습니다.
블레셋이 어떤 곳입니까?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첨예하게 싸움을 벌인 나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블레셋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블레셋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에 숨어 블레셋의 아기스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다윗은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편안했습니다. 그러나 몸은 편하고 자신의 안전은 보장 받았겠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어두웠습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몸이 편한 것이 좋습니까. 환경은 굉장히 좋지 않고 위기가 많지만, 영적으로는 최상의 상태를 택하시겠습니까. 쉬운 길을 찾으면, 더 큰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에 가면 안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이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적당히 야합을 하며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다윗은 살기 위해 블레셋으로 갔는데,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아기스 왕은 다윗을 전선(戰線)에 내보내어 이스라엘과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윗은 살기 위해 블레셋으로 도망갔는데, 자신의 나라와 싸워야 할 상황입니다.
삶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선적으로 편한 것만 생각하면, 오히려 문제가 꼬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자신의 동족과 전쟁하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문제에 잘못 접근하면, 문제가 점점 더 꼬입니다. 처음부터 문제를 잘 풀어야 합니다. 문제를 잘못 풀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복잡해졌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싸울 수도 없고,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다행히 아기스 왕의 부하들이 다윗과 함께 전선에 나가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결국 아기스 왕도 부하들의 뜻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이스라엘의 싸움은 무산되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 싸운다면, 일이 완전히 꼬여버립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간섭하셨습니다.
마침내 다윗과 그의 군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사흘 길이었습니다.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지쳤지만, 곧 가족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멀리서 보니 마을에서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있었습니다.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가족들은 모두 포로로 붙잡혀갔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를 틈타 아말렉이 시글락을 공격한 것입니다. 다윗은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성통곡했습니다.
본문 사무엘상 30장 4절에 보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다윗에게 돌리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은 사면초가의 상태에 놓였습니다.
본문 사무엘상 30장 6절에 보면,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큰 곤경에 처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다윗이 그 동안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지만, 지금 겪는 이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의 추종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섬기겠다고 스스로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아둘람 굴에서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욕할 때에도 이들은 늘 다윗을 따랐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꿈꾸며 함께했던 동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돌을 들어 다윗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동지애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사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복병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우리 앞에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다윗의 감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비애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이 누구보다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괴롭히던 사울의 칼날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니라, 추종자들의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처럼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때 다윗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향해 박수를 쳐주었던 지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돌을 들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신이 의지해야 할 대상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일상을 살다 보면, 이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합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부터 함께했던 동지들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윗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가 믿을 것은 무엇이냐. 네가 무엇을 의지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을 언제 깨닫습니까.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을 때에 이것을 깨닫습니다.
본래 사람들은 믿을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동안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칭찬에 스스로 속았습니다.
평소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밑바닥을 경험한 후에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다윗은 곤경에 처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본문 사무엘상 30장 6절의 뒷부분에 보면,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이 자신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그때서야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은 한동안 하나님을 잊은 채 살았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아기스 왕을 찾아간 것부터 인간적인 처세술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적인 처세술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처세술과 관련된 책은 그리스도인이 읽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처세술은 그리스도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처세술, 그리스도인에게는 위험한 것입니다.
처세술은 일종의 자신의 머리를 쓰는 것입니다. 머리를 쓰며 사는 사람들끼리 모여 경쟁하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머리를 쓰며 살았습니다. 블레셋이 어떤 곳인데, 블레셋에 갈 수 있습니까. 어찌 아기스 왕에게 머리를 굽실거립니까.
그렇게 하니 일이 터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셨으면, 다윗은 전쟁터에 나갈 뻔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다윗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문제를 모면하는 것에 신경을 썼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자주 실패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연약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일평생 따라다닙니다.
설교를 듣지만 현실 속에서 문제가 생기고 다급해지면, 사람은 문제를 빨리 하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사람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문제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우리와 분리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윗의 인생이 전환되었습니다. 바닥으로 추락하여 죽기 직전에 하나님의 낙하산이 펼쳐졌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바라본 순간, 하나님께서 다윗을 살려주셨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자신의 동지를 의지했습니다. 블레셋의 아기스 왕을 의지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바닥을 쳤습니다.
다윗은 죽기 직전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간단한 것 같지만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실패합니다.
다윗과 사울 왕을 비교해봅시다. 다윗과 사울 왕은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둘 다 실수투성이였습니다. 오십보백보입니다.
사람이 위대하다 한들 얼마나 위대하고, 똑똑하다 한들 얼마나 똑똑하겠습니까.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사울 왕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지만, 사울 왕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엉뚱한 것을 붙들었습니다. 사무엘상 28장에 보면,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무당을 찾았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신접한 무당을 찾았습니다.
사울은 무당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과 달랐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을 다윗 되게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강점입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다급한 일을 당했을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위급한 일을 당하면,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현명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둔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다윗은 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우둔해졌습니다. 사울은 미련한 짓을 했습니다. 위험한 것을 선택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누구를 찾는가가 중요합니다.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위기의 상황에 무엇을 했습니까?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위기가 닥치자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신들의 지도자인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다윗을 죽이면 잃어버렸던 가족이 돌아옵니까.
지금은 어떤 때보다 다윗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지금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는가를 생각하며 다윗을 비난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시시비비를 따지는 데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제를 푸는 방법이 아닙니다.
다윗은 직감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신자는 문제의 본질을 찾아내야 합니다.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은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비결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을 때에 그는 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바닥으로 내려갔던 원인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의논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각을 접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블레셋 땅에 머물러 아기스 왕에게 빌붙어 살 때에는 다윗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 8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27장에서의 다윗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사무엘상 27장 1절에 보면,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신의 머리를 굴렸습니다. 다윗은 살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썼습니다.
사무엘상 27장 1절에 보면,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살기 위해 궁리했습니다. 다윗이 기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꼬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다윗이 변화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후 다윗은 변화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 8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인생에서 실패했을 때에는 하나님과 의논한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밧세바와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다윗이 기도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윗이 무릎 꿇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들어간 것이 두 번째입니다. 이전에 그는 블레셋 아기스 왕을 피해 미친 체 하며 도망 나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블레셋 땅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다윗 혼자였지만, 두 번째 들어갈 때에는 6백 명의 군사를 거느렸습니다. 아기스 왕은 이들이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블레셋에게 다윗은 전설적인 존재였습니다.
다윗이 아기스 왕의 그늘에 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피한 것입니다. 다윗 자신은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보호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동족을 죽이는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에게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다 빼앗겼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길을 찾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다윗은 지불하지 않아도 될 수업료를 지불했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면 수업료를 많이 지불해야 합니다. 몸도 망가질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와 잔꾀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머리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조언을 구하더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잡으러 갈지 말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다윗은 왜 하나님께 물었습니까?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왜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머리를 쓰고 전략을 짜고 꾀를 쓰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머리를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머리를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려고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는 밤을 새며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결정적 순간에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몸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가 중요합니다. 수단과 방법과 머리를 동원하여 여기까지 왔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왔다면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의중을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답을 얻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질문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질문에 하나님께서 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려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매일 읽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오늘 자신이 선택해야 할 것에 대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길을 걸어가는 것은 초행길을 걸어가면서 위대한 가이드를 포기한 채 혼자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인생길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성급하게 행동할 때, 하나님께서 답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머리로 답을 찾아 행동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는 가운데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듣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말씀을 읽는 중에,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선배를 통해,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공동체 속에서 말씀을 나누는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을 얻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말씀해주십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처음에 제가 생각했던 것이 있었는데, 설교를 준비하던 중에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키지 않습니다. 회중과 맞지 앉는 듯합니다. 그래도 말씀을 전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긴급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까이에 있는 믿음의 지체를 하나님의 통로로 사용하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소그룹에서 늘 만나는 지체와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을 얻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성급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상 30장 8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말렉을 잡으러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결재가 떨어졌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질문에 신실하게 응답하십니다. 모든 것이 초토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돌을 던지려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6백 명 중 2백 명은 이미 지쳤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4백 명을 거느리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매우 지쳤습니다. 거의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인이요 아말렉 사람들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병들어서 버림받았습니다.
다윗은 버림받고 죽어가는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를 돌봐주었더니 그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알려고 하는 것을 모두 다윗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막힌 방법으로 다윗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너무나 빨리 아말렉 군사들을 만났습니다. 다윗은 힘을 들이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처자들을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빠르고 정확했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사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엉뚱한 데서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자와 함께 걸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도자 없이 자신의 생각과 고집으로 가다보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면, 다윗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척박한 광야에는 푸른 풀밭이 없습니다. 저지대에 물이 고이는 곳에만 푸른 곳이 약간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삭막합니다. 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인도하지 않으면, 양은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양이 산과 산 사이를 다니다 보면, 골짜기를 만납니다. 양이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양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습니다.
양이 골짜기를 다닌다 해도 목자와 함께 간다면 골짜기를 순적하게 통과하고 목초지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낯선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남이 만든 가이드북을 보며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벽한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벽한 가이드가 되십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늦어져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 전에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늦어져도,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도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뭔가 시작하면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가면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인가 선택할 때, 인생의 기로에 있을 때,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의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의논상대이십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발견하는 비밀입니다. 다윗은 인간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기의 순간에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어두운 길을 지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해주세요.”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설교 말씀을 통해, 말씀묵상을 통해,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답답해집니다. 결정하기 두렵습니다. 그때가 중요합니다. 그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물어야 답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으면 기다려야 합니다.
말씀묵상을 규칙적으로 하세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신(交信)이 끊어졌습니다.
말씀묵상과 기도생활을 규칙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통신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통신 상태가 좋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들리지 않았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힘듭니다. 그래서 실수할 수 있습니다.
평소 규칙적인 말씀묵상과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말씀묵상과 기도생활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정해야 합니다. 말씀묵상과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긴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기막힌 책입니다. 말씀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계속 만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인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무엇을 훈련해야 합니까. 목자 곁에 있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양은 목자와 친밀해져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꼬인 지점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하나님께 한 번이라도 물었더라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 중에도 무엇인가 결정할 때에 하나님께 단 한 번도 질문하지 않고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인가 결정하고 매일 무엇인가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추진하고, 새로운 일을 기획합니다. 그 중에 하나님께 묻고 결정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답을 얻기 전에는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기다리세요.
다윗은 자신의 꾀로 살려고 하다가 곤경에 처했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최고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죽을 뻔 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으로 돌이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에서도 그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묻는 사람,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해주십니다. 말씀해주십니다. 인도해주십니다.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얻어야 합니다.
영적 회복의 강가로
이윤재목사 / 삼상 30:1-10
며칠전 급하게 서울을 가게 되었습니다. 급한 연락을 받고 차를 모는 데 차에 불이 들어오자 마자 기름통에 기름이 떨어졌다는 신호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그 신호는 며칠 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바쁜 나머지 기름을 넣치 못하고 있다가 고속도로에 들어가자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기름이 없다는 표시가 깜빡 깜빡 하자 제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유소는 보이지 않고 차는 달리는 데 금방이라도 차가 멈춰 버릴 것 같았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서울로 빠지는 첫 번째 출구로 무조건 나가 주유소부터 찾았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넣었습니다.
가끔 우리 인생도 기름떨어진 자동차처럼 깜빡거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기름이 없다는 것을 오래 전에 알았지만 그냥 어떻게 되겠지 하고 그 날 그날 미루다가 어느날 큰 낭패를 당합니다. 본래 기름이 없는데도 오랫동안 그냥 두어서 기름이 고갈된 경우도 있고 너무 한번에 기름을 더 써버려서 기름이 떨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주유고에 기름이 고갈되어 불이 깜빡 거리는 신호를 자주 보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는 영적인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항상 그만큼 채우느냐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난 주에 전국목회자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전국에서 온 1500여 목회자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눈 것은 저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제가 기진맥진하고 말았습니다. 제 속에 있는 에너지가 다 바닥나고 제 영혼의 게지에 더 이상 기름이 없다는 신호가 깜빡 깜빡 들어왔습니다. 몸은 천근만근이 무겁고 마음은 무겁게 눌려왔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도 힘들고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은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란 책에서“고갈된 연료통의 상태”라고 불렀습니다. 마치 연료통에 기름이 바닥나듯 영적인 연료통이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나 평신도나, 죄인이나 성자나 사람이면 누구나 나타나는 영적 현상입니다. 연료통이 바닥나면 반드시 몇 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소리가 납니다. 소리는 보통 화로 나타납니다. 쉽게 화를 내고 자주 감정적이 됩니다. 마음에 여유와 기쁨이 사라지고 마른 장작같은 분노만 남아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버럭 화를 냅니다. 둘째 연기가 납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일을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연기가 나기 때문에 자기도 힘들고 옆에 있는 사람도 힘듭니다. 무엇보다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예배를 드려도 맥이 없고 찬송을 불러도 신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잘나가던 기도도 3분 이상 하면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딱 한 가지 이유때문입니다. 영적 연료통에 기름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꼭 이런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일생 사울 때문에 힘들게 살았습니다. 20대에 쫓겨 수십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다윗의 연료통을 고갈하게 만든 사람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일생동안 다윗을 힘들게 했습니다. 사울같은 사람을 만나면 우리의 연료통은 언제나 바닥납니다. 다윗의 연료통을 고갈하게 만든 사람은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불레셋 사람이 그렇게 했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해안가에 살면서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던 호전적인 이방민족이었습니다. 문제는 다윗이 홀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혼자 몸이면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십니다.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600명의 추종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울에 의해 정치적으로 눌리고 경제적으로 빼앗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다윗 하나 믿고 다윗에게 왔는 데 어떻게 합니까? 이들을 살리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불레셋 사람들에게 거짓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시글락을 얻었습니다. 사방이 적들로 둘러쌓인 불레셋성에서 그 많은 식구들을 데리고 하루 하루 사는 것은 다윗에게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일이 생겼습니다. 다윗이 군사작전을 나간 사이 사막의 무법자 아말렉 군대가 쳐들어와 다윗의 가족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아 갔습니다. 삼상30:1절 뒷 부분을 보십시오.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정말 엎친 데 덮친 격이란 말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원수와 함께 사는 것도 힘든데 아말렉군대가 쳐들어와 그나마 다윗의 가족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 잡아 갔으니 이제 다윗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도 이런 인생을 산 적이 있습니까? 한 가지가 안되면 또 한 가지가 안되고. 힘든 세상에 믿음 하나로 간신히 버티고 사는 데 어느날 시아버지가 암에 걸리고, 아들이 취직시험에 떨어지고, 시골에 계신 친정 어머니가 교통사고 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있는 기름통에 인내의 연료 떨어지고 믿음의 기름 바닥나 연기가 풀풀 날 때. “아, 괴로운 인생, 더 못살겠다”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오늘 다윗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다윗은 이 분야에서도 인생 선배입니다. 다윗은 고달픈 인생살이에 마지막 있는 연료통마저 바닥날 때 우리가 사는 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을 놓고 쉬어야 합니다.
다윗이 했던 첫 번째 회복의 방법은 일을 놓고 쉬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가족과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에게 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가정 먼저 한 것은 600명 백성을 데리고 그들을 추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백성을 이끌고 어느 만큼 가는 데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윗은 그때 백성들과 함께 말머리를 돌려 브솔시내로 들어갑니다. 브솔시내는 이스라엘 중부지역에서 지중해쪽으로 난 작은 강입니다. 광야지역에 드물게 보는 강, 사방이 나무로 둘러 쌓이고 숲이 있는 작은 강, 그곳으로 다윗은 들어갑니다. 사실은 한 시가 급합니다. 늦게 가면 갈수록 손해입니다. 늦게 가면 가족과 백성의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지금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시원한 브솔강가로 들어갑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현대인은 너무 바쁩니다. 너도 나도 “바쁘다. 바빠”를 외치고 삽니다. 그래서 현대인을 죽이는 소리는 세 가지라고 합니다. 달력 넘기는 소리, 자명종 울리는 소리, 핸드폰 울리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들이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줍니다. 바쁜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한가하게 있지를 못합니다. 과로를 못참는 것이 아니라 한가한 것을 못참습니다. 마치 하루라도 일하지 않고 지내면 죄라도 짓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작 와츠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사탄은 한가한 사람의 손을 빌어 범죄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가함은 악마의 작업실이다”. 이 말은 사람이 한가하면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고 사탄은 그것을 틈타 사람으로 범죄하게 하고 결국 사람을 망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것과 한가한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게을러서는 안되지만 때로 한가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날 제가 시간이 늦어 교회로 종종 거리고 오는 데 우연히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 방송은 <고도원의 아침편지>였습니다. 방송은 “멈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멈추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멈추면 끊기는 것 같고, 뒤쳐지는 것 같고,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정반대인데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자동차도 기름이 완전히 떨어지거나 고장이 나면 강제로 멈춰섭니다. 사람도 큰 병이 나면 영원히 멈춰섭니다. 힘이 남아 있을 때 멈추어야, 더 큰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기름이 없어서 멈추면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 힘이 있을 때 지금 기름이 있을 때 멈추십시오. 지금 멈추면 언제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있을 때 멈춰야지 힘이 없을 때 멈추면 그때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가끔 인생이 힘들고 속에 있는 힘조차 빠질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멈추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힘을 얻기 위해 잠시 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지금은 쉴 때”라는 글을 썻습니다. 상당히 공감이 가는 글이었습니다.
“지금은 쉴 때”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기를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식구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살짝 웃어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하루가 궁금하지 않고 전화도 기다려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슬픈 연속극을 보면서도 극본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다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도 궁금하지 않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친구가 보낸 편지를 받고 그것을 끝까지 읽지 않거나 답장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 번 더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과 저녁이 같고, 맑은 날과 비 오는 날이 같고, 산이나 바다에서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기에 해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는 예수님도 바쁠 때일수록 돌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병을 고치기 위해 줄을 선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영적 회복을 위해서 가끔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빵과 생선을 먹기 위해 아우성치는 군중들 속에서 정신없이 바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막6:31,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쉬어라.” 예수님은 바쁠 때 한가했고 분주할 때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폭풍치는 배머리에서 제자들이 깨워야 일어날 만큼 깊히 주무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능력의 비결이었습니다.
사람을 파괴하는 것은 언제나 일에 대한 욕심입니다. 게으른 것과 한가한 것이 다르듯이 열심히 일하는 것과 욕심으로 일하는 것은 다릅니다. 욕심으로 일하면 연료통에 기름이 고갈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다행히도 이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다퉈 아말렉을 쫓아가야 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브솔강가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일을 내려놓고 쉬기 시작하자 승리의 미소는 그에게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가함은 악마의 작업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이방입니다. 바쁠수록 서두르지 말고 돌아가야 합니다. 섹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쥬리엣”에서 머큐시오란 사람이 로미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맞아. 꿈은 한가한 머리에서 나오는 열매라고 생각해.” 그렇습니다. 꿈은 한가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분주한 사람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바쁘지만 돌아가십시오. 예수님도 자주 쉬셨습니다. 일을 놓고 쉴 때 우리는 회복됩니다.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고갈될 때 회복되는 두 번째 길은 은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혜라는 말을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쓰는 바람에 진정한 의미의 은혜를 잃고 삽니다. 자. 다윗을 보십시오. 지금 자기 가족과 백성들이 잡혀 갔습니다. 가족중에는 연로한 부모님이 있습니다. 임신한 아내와 앞으로 그를 이어 왕이 될 왕자도 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다윗의 구조를 기다리며 아말렉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다윗이 이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마음같아서는 당장 쫓아가서 아말렉을 진멸하고 가족과 백성들을 찾아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이때 빠지기 쉬운 마음이 “내가 반드시 하리라. 꼭 하리라. 내가 반드시 아멜렉을 진멸하고 내 가족을 찾아오리라“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무엇이 잘못이겠습니까?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은혜에서 벗어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잘해야 해”. 그러다 잘 안되면 “나는 좀더 잘했어야 하는데.” 하고 괴로워 합니다. 그리고 무섭게 자신을 짓누릅니다. “나는 반드시 잘해야 해.” 그러다 또 안되면 실망하고 낙심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심지어 자살까지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완전주의”라고 합니다. 완전주의는 처음에 잘해보겠다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잘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되고 잘하고 못하는 자기가 계속해서 판단의 대상이 되면 잘해도 행복하지 못하고 못하면 쉽게 낙심합니다. 완전주의는 율법주의의 현대판 질병입니다. 율법주의는 내가 주인공입니다. 내 행동이 표준입니다. 내 성공이 목표입니다. 그러면 은혜는 무엇입니까? 모든 행동의 주체와 가치와 기준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은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믿을 뿐 아니라 즐기는 것입니다.
마 18장에 보면 탕감의 비유가 나옵니다. 남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1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돈이지. 1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이기 때문에 1만 달란트는 1만x6000 곧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을 10만원으로 한다면 1만 달란트는 우리 돈으로 6조원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돈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와서 말했습니다. "종아, 이것이 너무 큰 돈이니 내가 없는 것으로 해주겠다. 이제부터 안 갚아도 된다“. 말했습니다. 이 종은 분명히 자기 빚이 탕감받을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만일 정말 그가 감사했다면 그에게 10데나리온의 빚을 사람을 찾아가 멱살까지 잡고 빚갚으라고 윽박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은혜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복음을 우리는 듣습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1만 달란트, 6조원의 엄청난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기는 아는 데 즐기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아는 데 가슴은 뜨겁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는 아는 데 우리의 삶에 적용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예배할 때, 찬송할 때, 말씀들을 때만 씁니다. 우리 삶의 고통과 아픔속에는 거의 적용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어떤 상담학자가 오늘날 크리스쳔 기혼 여성들이 우울증에 빠지는 열가지 원인을 설문조사한 후 중요한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습니다. 첫째. 낭만적인 사랑이 결핍된 결혼 생활. 둘째.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과의 갈등. 셋째. 낮은 자존감. 넷째. 자녀들과의 갈등. 다섯째. 경제적인 문제. 여섯째. 고독감, 격리감, 지루함, 일곱째. 성생활의 문제. 여덟째. 건강 문제. 아홉째. 피로감과 시간에 좇기는 삶. 열 번째. 나이를 먹는 것. 어떻습니까? 여성 여러분, 맞습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주셨다는 말씀을 이미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미 듣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은혜가 첫째 여러분의 결혼생활과는 무관합니까? 은혜는 받았는 데 결혼생활은 불행해야 합니까? 결혼생활에 은혜가 스며 들어갈 수는 없나요?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와 사는 일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용한 것입니까? 자녀들을 키우고 경제적인 문제와 씨름하며 하루 하루 사는 가정생활에서 십자가에서 받은 그 엄청난 사랑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고독을, 하루 하루 나이 먹고 늙어가는 여러분의 생각에 변화를 주는 일에 아무 힘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진짜 은혜겠습니까?
진정한 은혜는 은혜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6조원의 빚 때문에 죽을 뻔한 사람이 그것 갚지 않아도 된다 했다면 우리는 날마다 춤을 춰야 하는 것 아닙니까? 6조원, 그 많은 돈도 갚아 주었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안되는 사업, 밀린 부채, 힘든 직장도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6조원도 아끼지 않고 갚아주었다면 재수하는 아들, 취직시험보는 딸, 합격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행복을 위해서 네 가지 오해를 극복해야 합니다. 첫째.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나도 소유해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셋째.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넷째.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완전히 행해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우리는 다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완전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이 완전히 행하셨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원리로 돌아가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날마다 이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은혜는 받는 것이 아니라 누리고 즐기는 일입니다. “아는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합니다”. 좋아하고 즐겨야 신앙입니다. 그래야 고갈되지 않습니다. 김연아 코치 오서가 말한 대로입니다.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 성공한 한 가지 원인이 있다면 김연아는 스케이팅을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니까 믿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믿어야 합니다. 은혜는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위해 받습니다. 날마다 은혜안에 살고 은혜를 즐기면 고갈된 우리의 영적 연료통이 채워 집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이 브솔강가에서 했던 것은 첫째 쉬고, 둘째 은혜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 은혜안에 있기 위해 그가 한 것이 기도였습니다. 피곤할 때 우리는 일을 그치고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지 쉰다고 힘이 오겠습니까? 기도해야 힘이 임합니다. 기도는 힘의 통로입니다. 삼상30:6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거기서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거기“가 어디입니까? 브솔시내입니다. 고요히 흐르는 브솔강가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힘을 얻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두 가지 “힘”이 나옵니다. 육체적 힘이 있습니다. “아온”이라고 합니다. 골리앗에게 있었던 힘이 “아온”입니다. 육체적 힘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힘입니다. 시18:1에 나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 “힘”을 히브리어로 무엇이라고 한지 아십니까? “하자크”라고 합니다. 이 힘은 하나님이 힘입니다. 영적인 힘입니다. 시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가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이 “힘”이 “하자크”입니다. 하늘이 주는 힘입니다.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힘이 우리에게 임하는 통로입니다. 다윗이 브솔강가에 가서 밤새도록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입니다. 그는 아마도 밤을 새워 “우리 부모님 살려달라”, “우리 아들, 딸 살려 달라”, “아말렉에게 사로잡힌 내 동포, 내 백성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600명의 군사들을 점검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상30:10절이 중요합니다.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200인을 머물렀고 다윗은 400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밤새도록 쉬었는 데도 아직도 피곤이 안 풀려 연신 하품만 하는 200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피곤한 200명은 버려두고 피곤이 풀린 400명만 데리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언제나 전쟁은 수가 많아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피곤이 풀리지 않은 사람 만명을 데리고 나간다고 전쟁에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피곤하지 않는 사람이 나가야 이깁니다.
우리가 오늘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것을 회복하지 못하고 삽니까? 왜 빼앗긴 우리의 것을 마귀에게서 찾지 못하고 있습니까?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세상 피곤이 아직 안 풀렸기 때문입니다. 늘 급한 일로 쫓기고 살면서 하나님과 깊히 사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교회를 다녀도 둘 중의 하나입니다. 피곤한 200명에 속한 사람이 있고 피곤이 풀린 400명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집사, 권사, 장로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말렉과 싸워 이기고 어떤 사람은 아예 싸움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삼상30:10절이 해답입니다.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200인을 머물렀고 다윗은 400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먼저 피곤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한주간동안 찌들린 세상의 피곤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브솔 강가로 가야 합니다. 거기서 은혜를 회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삼상30:17절 이하를 보십시오.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약대타고 도망한 소년 400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이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빼았겼던 모든 것중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다같이 “모든 것을 도로 찾았고”, 그리고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영적 회복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자기가 회복되니까 남도 살렸습니다. 영적으로 회복되니까 세상에서 빼앗긴 것 회복했습니다. 세상 일과 세상 유혹으로 바닥난 우리의 영적 연료통에 주일마다 성령의 기름으로 채우십시오. 새벽마다 은혜의 기름으로 채우십시오. 매일, 은혜의 강, 생명의 강,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패배에서 승리의 인생으로
김정호목사 / 삼상 30:1-20
D.C.윌슨의 「당신의 날개로 날으리라」 라는 책에 인도의 유명한 의사 마리 버기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매우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버기스는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습니다. 절망의 세월을 지내던 그는 마침내 의사가 되었고 나병환자를 위해 봉사하면서 수많은 인도인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두 다리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제게 두 날개를 주셨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고통은 크기가 다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 다르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 인생에 날개를 달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고통의 현장으로 찾아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다리를 든든하게 세워서 고통을 딛고 의연하게 걷게 하십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의 얄팍한 인격을 성숙한 인격으로 바꿔 나가십니다. 세상 속에서 고통을 만나 막막해질 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분을 알아 갈수록 막막함은 점점 걷히고 내 안의 적개심, 분노, 열등의식 같은 것들이 점점 옅어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앙망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영적 투사의 길입니다. 인생 과정에는 좌절과 패배와 도약과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패배에서 승리로 나아갈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가족들만 남겨 놓고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싸우려고 가족들이 있는 시글락을 떠나 사흘만에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 왔을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그들의 길로 갔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뜻밖의 위급하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 다윗이 어떻게 승리의 인생으로 바뀌어 졌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본문 6절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은 블레셋 군대의 어려운 상황에서 빠져 나온 후 사흘만에 시글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가 전혀 생각지 않았던 뜻밖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원한 원수인 아말렉 군사들이 시글락에 쳐들어와 마을을 불사르고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가족 모두를 사로잡아 갔던 것입니다.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 간 것에 대한 분노로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긴박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다윗은 군사들을 설득하거나 변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어려운 문제를 맡기고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은 억울하고 다급하고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 순간에 하나님이 위험을 막아 주셨고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믿음만큼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릭 워렌(Rick Warren) 목사가 쓴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교회에는 크게 다섯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지역사회’입니다. 이들은 교인이 아닌 사람으로 무슨 행사가 있을 때 와주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군중’으로서 예배에만 참석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등록 교인’으로서 왔다 갔다만 하는 게 아니라 이 교회의 교인으로 등록하는 교인입니다. 네 번째는 그보다 더 나아가 ‘헌신된 사람’으로 성숙한 사람이며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며 성숙한 신앙의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핵심 멤버’이며 이들을 보통 사역자라고 부릅니다. 나는 이 중 어디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비교인인 지역사회인가? 아니면 예배만 왔다 갔다 하는 군중인가? 등록해서 다니는 교인인가? 더 헌신된 삶으로 나아가는 헌신된 사람인가? 정말 헌신되어 사역을 감당하는 핵심 멤버인가?
다윗이 어려운 블레셋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듯이 이런 저런 일로 마음고생과 상처가 얼마나 많으십니까? 침노하는 아말렉과 모든 것이 불타고 빼앗기고 가족들을 잃어버리고 백성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 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위험이 얼마나 많으십니까? 그러한 가운데서도 다윗이 요동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힘과 용기를 주셔서 아말렉을 크게 물리치는 승리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과 장소에서도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크게 도우셔서 패배에서 승리하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힘과 용기를 주셔서 승리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여호와께 물어야 합니다
본문 8절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의 신앙적 행동의 출발점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에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에봇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하였으며 올바른 행동과 승리의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항상 복되고 의로운 길을 걸을 수 있는 방법은 범사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말렉 군대를 추격하면 포로 된 가족들을 구출할 수 있느가를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다윗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쫓아가면 반드시 따라잡고 가족들을 찾는다는 응답이었습니다. 다윗은 급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게 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데 원인이 있었습니다. 이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승리의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실패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우리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우리마음대로 행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멸망하게 됩니다(잠언 16:18). 한번 실패했지만 기도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나라 무속인의 공식적인 수는 약 1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무속인까지 계산하면 100만명 가까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tv를 통해 점술 박람회가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점술가들이 사람들의 사주팔자와 점을 봐 주는 박람회였는데 모여든 사람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이 시대가 복을 갈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추구하는 많은 것이 사실은 허망한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허망’이란 뜻의 헬라어 ‘마타이오테티’는 주로 우상 숭배와 관련해서 나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뜻이 무엇이고 성도의 온전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직 내 배를 채우고 쾌락을 즐기며 세상이 주는 유익을 더 얻는 것에만 눈이 먼 것을 허망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허망한 것들을 추구하는 이유는 자기 사랑과 자아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자아는 끊임없이 ‘더, 더, 더’를 요구한다.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 ‘자기애’입니다. 그런 자아의 욕망이 삶의 기준이 되면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욕망을 실현하는 데 눈이 멀어 옳고 그름 따위는 생각해 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아의 욕망을 비우고 깊이 기도할 때에 우리는 넘쳐흐르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기도는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을 떠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욕망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거나 분주하거나 기도보다 내가 앞서면 반드시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아말렉을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다시 찾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과 의논하고 대화하고 해결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거나 묻거나 기도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상처 받고 식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거나 작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분명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옛날에 비하면 가정과 교회가 편해지고 풍성해졌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것이 줄어들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인간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시험이고 위기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며 실패에서 승리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돕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본문 13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에게 속하였으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다윗은 자신을 돌로 치려하는 큰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를 일순간에 반전시켜 600명 가운데 브솔 시내에 낙오자 200명은 머물게 하였고 400명을 거느리고 아말렉을 쫓아갔습니다.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데려왔습니다. 그에게 떡과 물과 건포도를 주어 정신을 차리게 하였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포로로 잡혀 와서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습니다.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그를 버린 것입니다. 그가 다윗과 군사들을 아말렉 군대로 인도하였습니다. 아말렉 군사들은 승리에 도취하여 먹고 마시고 춤을 출 때에 다윗과 400명의 군사들이 새벽에 치매 모든 사람과 물건을 다시 찾았고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버린 애굽사람을 만나 큰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돕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셔서 아말렉을 쳐서 이기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람이 병들었다고 버리면 안 됩니다. 버린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아말렉은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병든 사람을 살렸을 때 그로 인하여 다윗의 군대가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살렸더니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모든 가족을 다시 만나는 큰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열 살 된 아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몇 시간을 낚싯대 앞에 앉아 있었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낚시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아버지의 낚싯대에 큰 물고기가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흐뭇해하며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는 알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을에서는 어종 보호를 위해 산란 어종 낚시를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물고기는 풀어주고 그만 가자꾸나." 그러자 아들은 억울해하며 말했습니다. "안 돼요. 이렇게 큰 물고기를 잡은 건 처음인데요." 펄떡이는 물고기를 내려다보는 아들의 얼굴은 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하게 아들에게 물고기를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정직하고 모범적인 경영자로 뽑혀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껏 아버지를 따라 정직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열 살 때 아버지와 낚시를 하면서 배운 원칙이 오늘의 저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원칙이란 누가 보든 안 보든 내가 손해를 보든 이익을 보든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바르고 곧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말씀대로 살면 반드시 높여 주시고 좋은 사람과 돕는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병든 애굽 병사같은 사람들을 섬기면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됩니다. 병든 사람을 버림으로 아말렉이 망하였습니다. 병든 사람을 살리면 큰 승리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 주위에 버려진 애굽 병사를 살림으로 패배에서 승리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 가족 여러분!
사람은 연약하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윗처럼 하나님께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돕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 패배에서 승리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삼상 30장 1-15절 / 너 시험을 당해(342장) / 조영식목사(김포한신교회)
들어가는 글
오늘은 3월 첫째 주일입니다. 이제 겨울은 뒷전으로 물러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봄이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생명의 봄처럼 새롭게 싹이 나서 자라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인생의 최대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블레셋으로 망명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의 조국 이스라엘과 망명한 나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은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어느 편을 위해 싸워야 할지 결정하기 전에 먼저 블레셋의 방백들이 참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려운 상항에서 잘 벗어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고 합니다(3절). 다윗에게 인생의 고난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윗이 계속 이어지는 인생의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를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어떤 눈물을 흘렸는가?
오늘 본문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고 합니다(4절). 그들이 함께 울었지만 그 안에는 두 종류의 울음이 있습니다. 먼저 그와 함께 한 백성들의 울음은 슬픔의 눈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라고 나옵니다(6절). 그리고 슬픔의 눈물은 원망으로 변해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였습니다(6절). 이처럼 슬픔의 눈물이 원망으로 변화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갈등을 일으켜서 더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다윗도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눈물에도 가족을 잃어버린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5절). 그러나 그의 눈물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눈물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고 합니다(6절). 다윗과 백성들이 동일하게 눈물을 흘렸는데 그 결과는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백성들은 슬픔의 눈물이 되어서 좌절이 되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의지하는 눈물이 되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의 눈물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용기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크게 다급하였으나”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6절). 백성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들의 감정에 휩쓸렸습니다. 그들이 감정에 휩쓸리는 만큼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었다”고 합니다(6절). 여기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용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정에 휩쓸릴수록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서 섭섭한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감정을 다스릴수록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평안을 얻습니다. 우리들이 감정에 휩쓸려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을 다스림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은 다윗은 어떻게 회복시키셨는가?
다윗은 아말렉에게 가족을 잃은 것보다도 함께 했던 동지들의 ‘그를 돌로 치자’라는 배신이 더 가슴 아플 수도 있었습니다(6절). 우리는 다윗과 같은 처지를 ‘벼랑 끝에 서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다윗처럼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벼랑 끝에 서 있으면 “왜 어려운 일이 생겼느냐?”라는 원인을 찾는데 집중합니다. 그러나 원인을 찾아도 마음만 상하고 더 힘들어서 추락할 수 있습니다. 그런 습관에 젖어서 오늘 본문에서도 “왜 다윗에게 어려움이 생겼느냐?”의 원인만을 찾습니다. 그 원인은 ‘그가 블레셋 땅으로 갔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왜 문제가 생겼느냐’라는 원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느냐’라는 치유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려움을 만들고 싶어서 생긴 사람들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도망친 이유도 그의 잘못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과거의 ‘왜’라는 원인보다 미래의 ‘어떻게’라는 치유를 찾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땅 끝에 서 있는 다윗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 탈출구를 찾았습니까?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기도를 하였습니다(8절). 그는 얼마동안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마음에 생각대로” 행동하였습니다(27:1). 그가 ‘그 마음에 생각대로’ 했을 때 영적인 침체에 빠졌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다시 묻는 기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회복하였습니다. 저는 다윗의 엎드러짐을 보면서 시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이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나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라고 합니다(시107:12). 하나님은 우리들이 고통 중에 겸손하다고 도와주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라고 합니다(시107:13). 우리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해 주십니까? 그 다음절에 “흑암과 사망의 그들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다”라고 합니다(시편107:14). 우리들이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통하여 얽어 맨 줄을 끊어버리고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드린 후에 그들의 가족을 찾기 위하여 행동하였습니다(9,10절). 우리도 기도를 한 후에 행동을 하여야 하나님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족을 찾기 위해 쫓아가다가 들에 버려져서 죽어가는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났습니다(11절).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지 시험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마10:42). 다윗은 들에 버려져서 죽어가는 지극히 작은 애굽 소년을 대접함으로 그의 가족들을 다시 찾는 상을 잃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강도만난 이웃을 사랑하는지 시험합니다. 예수님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고 합니다(눅10:30).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눅10:31,32).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돌보아주었습니다(눅10:33).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될 것인지 아니면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될 것인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강도만난 애굽 소년에게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자비를 베푸셔서 그의 가족들을 찾게 해주셨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에 어떤 사랑이 있는지 시험합니다. 다윗이 들에 버려진 애굽 소년을 그냥 지나쳤다면 그들의 가족을 다시 찾는 것이 이기적인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길에 버려진 애굽 소년을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길에 버려진 애굽 소년의 생명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 생명도 사랑하셔서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들에 버려져서 죽어가는 애굽 소년을 만난 것은 가족을 다시 찾는 시간을 지체하는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애굽 소년을 돌보아 주었을 때 그의 가족들을 찾도록 인도해 주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애굽 소년을 돌보아주었을 때 “내가 당신을 그 군대로 인도하리이다”라고 합니다(15절). 우리 인생에 장애물을 만났을 때 걸림돌이 아니라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서 지름길로 인도해주시는 은혜가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말씀 다지기 (함께 되새김질 하는 시간입니다)
1. 다윗이 흘린 눈물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용기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6절)
2. 다윗은 동료들의 배신으로 벼랑 끝에 서있는 고난이 생겼을 때 어떻게 반응하였나요?
3. 벼랑 끝에 서 있던 다윗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 탈출구를 찾았습니까?(8절)
4. 다윗이 들에 버려진 애굽 소년 하나를 만나도록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요?(세 가지)
5. 다윗이 애굽 소년 하나를 돌보아 주었을 때 받은 은혜는 무엇인가요?(15절)
다윗의 위기극복 방법은?
삼상 30:1-8 / 이선영목사
1. 오늘도 예배 드리는 여러분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사무엘상 연속설교 13번째 시간입니다. 다윗이 어려운 위기를 당하여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위기 관리 능력은 경영대학원이나 전문 경영인 CEO과정의 필수 과목입니다. 회사에서 사원을 뽑을 때, 반드시 물어보는 것이 위기를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모든 사람은 위기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사업의 실패, 결혼의 위기, 자녀교육의 어려움, 건강관리의 위기, 인간관계의 실패도 있습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잘하였다 할지라도, 위기를 당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인생의 배는 침몰하게 마련입니다. 위기관리 능력이 참 중요합니다.
2. 저도 인생의 큰 위기가 닥친 적이 있었습니다. 제 인생이 계속하여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입니다.
성공이 멈춘 것입니다. 저의 모습이 점점 더 퇴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계획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눈을 감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때,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목사이기에, 목사의 본분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껏 저의 성공을 위하여 달렸던 것입니다. 성공이 멈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 아니라 충성인 것을 깨달었습니다.
목사로서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수입이 많고 적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많고 적음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제 욕심을 내려놓았습니다. 교회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저보다 하나님이 우선이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3. 오늘은 다윗이 어떤 위기를 당하였는지를 알아보고,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였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시글락 땅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곳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숙적인 아말렉 접경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조차 불안하여 블레셋 땅으로 피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알아보고 왕에게 보고하므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미친 짓을 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다시 가족과 신하들이 있는 시글락으로 돌아와보니, 아말렉이 시글락을 침략하여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이 불에 타고, 여자들을 비롯하여 아이와 노인들까지 모두 사로잡아 간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까지 잡혀갔습니다.
그러자 다윗을 따르는 신하들이 목을 놓아 대성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 울 힘이 없어 지칠 때까지 울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아들 딸을 잃고, 마음이 너무 아픈 나머지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이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부하들이 하루 아침에 적으로 돌변한 것이었습니다.
4. 제가 아는 어떤 전문 경영인이 있습니다.
그분이 자기 처세술을 말하는데, 어떤 경우에든지 아군과 적군을 잘 구분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사업을 하고 전문경영인으로 살아가려면, 적군과 아군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적과 아군도 구별하지 못하고 어떻게 세상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무엇을 할 때, 잘 하려고 하기보다는 누가 적군인지를 알고, 그분만 공격을 합니다. 그러면 그를 미워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신이 못하는 것을 이 사람이 대신해주기 때문인 것이지요.
상대편 적이 분명하면 싸우기가 쉽지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쉬웠던 것은 골리앗이 엄청나게 큰 아낙 자손이었습니다. 덩치가 크다 보니 빈 구석도 잘 보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다윗의 적은 아말렉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하들입니다. 그들이 돌로 치려는 것입니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의 딸과 아들들이 아말렉 군사들에게 생포가 된 것입니다.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모두 사로잡아 간 것입니다. 종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식이 남의 나라에 사로잡혀 가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느 아비인들 제정신이겠습니까? 저들은 그 괴로움을 다윗에게 돌을 던져 화풀이를 하려 하는 것입니다.
5. 다윗이 돌에 맞음으로 저들의 화가 풀린다면 왜 돌로 맞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돌에 맞는다고 하여 잡혀간 딸과 아들들이 돌아오는 것인가요?
더군다나 다윗은 마음이 그리 단단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울의 옷자락을 자르고 마음에 찔림을 받을 정도로 마음이 여리고 약하였습니다.
그러니 자기 때문에 신하들의 자식이 포로로 잡혀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을 겉잡을 수 없는 것이지요. 좌불안석인 것이지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근심, 걱정, 염려가 밀물처럼 그의 마음을 삼키는 것이지요. 차라리 자신이 잡혀가거나 죽었으면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6.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군대 가기 전에, 대전 시내의 어느 큰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을 맞았습니다.
여름방학을 하여 수련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광수라고 제1년 선배가 학생부를 맡았습니다. 중고등학생을 데리고 논산 근처에 있는 양촌이라는 곳으로 수련회를 갔습니다.
저희는 초등학교 여름성경학교를 마치고 가느냐고 하루 뒤에 수련회에 합류하였습니다. 오전에 수련회 장소에 도착을 했는데, 오전 중에 수영시간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오후에 수영시간이 있게 마련인데, 오전에 있기에 이상하다 하면서 물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쪽 편에서 한 학생이 헤엄쳐서 건너오면서 물 속에 사람이 빠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헤엄을 쳐서 갔더니, 한 학생이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건져내 보니, 수련회에 참여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저 위쪽에서부터 밑바닥으로 기어 내려오다가 심장마비가 왔던 모양입니다.
고등학생들이 여학생들에게 장난을 치려고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고등학생들이니 얼마나 통제가 어렵습니까? 그렇기에 지도 교사인 선배 전도사님이 오전에 수영시간을 넣었던 것입니다. 근데 건져 놓고 보니, 담임목사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인공호흡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는 휴대전화가 없었던 시절이라, 양촌 읍내에까지 달려가서 대전 교회에 연락을 하고, 거기에서 기다렸다가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수련회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두 시간 후에 담임목사님이 오셔서 함께 차를 타고 수련회장으로 가는데, 사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차라리 내 자식이 죽어서 다행이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련회에 와서 교인 자식이 죽었으면 어떻게 할 뻔 하였느냐는 것이지요.
지금 다윗이 심정이 그렇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으면 하는 심정인 것입니다.
7. 그러면 다윗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요? 오히려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담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급하였다는 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사면초가입니다. 죽고 싶을 지경인 것입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믿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였다는 말입니다. 달리 방도가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합니다. 단순하게 하나님만 의지한 것입니다.
이리저리 궁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머리를 굴리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하나님만 의지한 것입니다.
이 때의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같았으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8. 다윗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이리저리 피할 방도를 구했다면, 다윗은 심히 약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부하들마저 다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또 다윗이 자살이라도 하였다면, 다윗은 무책임한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군사를 몰고 아말렉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잡혀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부하들을 달래고 설득한다고 하여 되겠습니까?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은 단순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방법을 그쳤다는 뜻입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였다는 것은 다윗이 머리를 굴려 어떤 방도를 강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어떤 용기도 잃었습니다. 마음이 녹아져 내린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는 심복들이 자기에게 돌로 치려 하니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용기를 잃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에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9. 저는 이 부분에서 묘한 감동을 얻습니다. 우리의 삶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 것일까요? 다윗이 곤경에 처했으니 다윗에게서 멀리 있는 하나님일까요? 아니면,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기를 얻었으니 가까이 계신 하나님일까요?
저는 그 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에 계셨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적적인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일이 발생하여, 뜻하지 않은 대박 사건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절망 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부하들과 함께 새롭게 작전을 세울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저 당하고만 있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실망한 나머지 포기하고 있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10. 사람은 누구나 꺾일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절망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라 할지라도 희망을 붙잡으면 됩니다. 용기를 되찾으면 됩니다.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희망의 끈을 붙잡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용기를 잃지 않고 희망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용기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라 하여, 제사장이 입는 옷을 입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제가 아말렉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가서 잡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쫓아가라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군사 400명을 데리고 가서 모두를 되찾아 옵니다.
삼상30:18-19, “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11.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다윗이 곤경에 처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용기를 얻고 나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물어보는 자가 된 것입니다.
사무엘서는 이 사건 이후로 다윗은 무슨일이든지 하나님께 먼저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한 사람임을 밝힙니다. 반면에 사울왕은 위기를 닥쳐서 “신접하는 무당”을 찾아가 묻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상28:7, “바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사울 왕이 신접한 무당을 찾는 이유는 죽은 사무엘에게 물어보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점점 군박해지고, 피폐해지니, 자신에게 기름을 부었던 죽은 사무엘에게 묻고자 한 것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사울은 사람에게 묻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따라 살고자 하고, 사울은 사람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붙잡을 분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이고, 사울은 사람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12. <안소니 드 멜로>라는 수도사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매우 믿음이 깊은 성자가 있었는데, 천사들도 그를 늘 주목했습니다. 그는 대단히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았지만, 자신 스스로 그렇게 여기지 않고, 늘 보통 사람으로서 순진무구하게 살았습니다. 진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성인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어느날 천사가 그에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에게 보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든 이루리라! 치유의 능력을 받고싶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직접 치유해주시기 바랍니다!" "죄인들을 무수히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설교자가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드는 일은 주님의 성령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면 덕행의 모범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본받고 싶은 모델이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주님만 관심의 초점이 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정 그러신다면, 제가 한 가지 청하겠습니다. 저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교만에 빠지지 말게 해 주세요!"
그래서 그 성자는 교만에 빠지지 않았고,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본인은 그것조차 알지 못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13. 다윗은 큰 위기를 겪으면서 새롭게 거듭나게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누구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었습니다. 다윗은 이제부터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연초에 계획을 세웠던 일들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요? 우리의 계획과 뜻대로 되어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요?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모두 공감하실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실망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묻고 사시기 바랍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기 바랍니다.
주여! 힘을 주소서
김원효목사 / 삼상 30:1-6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옵니다. 그리고 지금도 캐나다로 이민을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사를 해보면 이민을 선호하는 국가 중에 캐나다가 항상 1-3위 안에 들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캐나다로 이민을 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마음먹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민 수속을 합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중에 드디어 영주권이 나오면 너무나도 기쁩니다. 그 동안 쌓였던 긴장과 스트레스가 풀어지고 한 숨이 놓입니다. 아- 참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교회에도 알립니다. “저희 영주권 나왔어요.” “아- 그래요? 할렐루야!” 저를 비롯해 교회의 모든 분들이 축하를 해줍니다.
일단 영주권이 나오면 아이들이 무상으로 학교에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온 식구들 의료보험이 무상으로 커버가 됩니다. 취직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대학교 학비도 비영주권자보다 많이 싸지고 정부로부터 학자금 융자도 가능합니다. 꽤 많은 액수의 아이들 우유 값과 노인연금 등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방문이나 미국 여행에도 자유롭습니다.
캐나다 영주권이 뭔지 그게 나오면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같이 갑자기 힘이 납니다. 마냥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주권을 가지고 좀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영주권이 나와도 그게 다가 아니다. 이 외국 땅에서 살다보면 또 다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생기게 된다. 고로 여기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다.”
그렇습니다. 저도 여기 캐나다 캘거리에서 25년째 살면서 각종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똑같은 문제라도 한국에서 겪는 것보다 외국 땅에서 겪는 것이 더욱 스트레스가 됩니다. 인종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기후도 다르고, 법률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다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가족들이 보다 더 잘살아 보겠다고 캐나다에 왔는데, 영주권이 나왔는데 가족 중에 하나라도 여기에서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힘들어하면 그게 참 모두를 안타깝게 합니다. 그 힘들어하는 가족을 보면서 캐나다에 계속 살아야하는지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또 다시 스트레스가 쌓이고 이곳의 삶에 활력을 잃고 무기력해질 수 있습니다. 애들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이곳 캐나다에 왔지만 모든 것이 낯섭니다. 인종이 다른 애들과 학교에서 영어로 수업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과 경쟁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그들 속에서 잘 적응하는 자녀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우리 자녀들이 적응에 애를 먹습니다.
남이 모르고, 부모가 모르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잘 지내게 하여 주옵소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여러분들 중에 이곳 캐나다에 이민 오는 큰 이유 증 하나는 자녀 교육 때문이라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막상 내 자녀가 이곳의 학교생활에 힘들어하면 부모는 ‘아차’ 싶습니다. 괜히 내가 이곳에 애들을 데리고 왔나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아이의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애야, 내가 미안하다. 내가 죄인이다.” 하고 남몰래 펑펑 울 때도 있습니다. 사실 부모가 사는 이유 중 하나는 자녀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이 땅에서 너무 힘들어하고, 부모로서 그러한 내 자녀를 뻔히 보면서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할 때에는 참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주여, 이 아이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이 아이에게 용기와 희망과 힘을 주시옵소서.”
어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이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합니다. 일할 곳을 찾아야하고, 힘들고 고달파도 매일 출근을 해야 합니다. 행여나 몸이 아프면 안 됩니다. 마음이 지치고 쳐져도 안 됩니다. 계속해서 힘을 내야 합니다. 때로는 초인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 성도님들에게 일터에서 힘을 주소서.”
특히 외국 땅에서는 가정이 참 중요합니다. 태평양 건너 이곳 북미 캐나다까지 왔는데 가정이 깨지거나, 가족 중에 하나라도 불행해지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가족들이 서로 도와주고, 서로 위로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의 삶이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어 때로는 서로에게 힘이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식구들이 단체로 처지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 가정, 우리 식구들에게 힘을 주세요.” 요즘 들어 성도님들이 한국 방문을 많이 합니다. 그 동안 COVID-19 때문에 2년간 갇혀 지내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이고 힘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좀 살다 보면 뭔지 모르게 우울감과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좀 더 심하면 계속 눈물이 나오고, 때로는 통곡이 나오게 됩니다. 우울증 증세입니다. 이때 한국에 한번 갔다 오면 좀 마음이 풀리기도 합니다. 나도 모르게 생긴 향수병이 치료가 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하고, 물질적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저의 경우 이곳에 25년째 지내면서 한국에 방문한 경우를 보면 아버님이 병들어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루기 위해 한번, 어머님이 병들어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루기 위해 한번, 그리고 조용기 목사님 성역 40주년 선교 대회 참석을 위해 한번, 이렇게 총 5번을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보고 싶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니까 특별히 한국에 갈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제가 여기 캐나다 캘거리 땅에서 보람을 느끼고 사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라고 하는 사명의 장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새벽예배를 인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성도님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성도님들을 위해 매일매일 순간마다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성도님들의 수가 정확히 300명이 됩니다. 그리고 요즘 제 기도제목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여, 우리 교회 식구들에게 힘을 주소서. 가정에서도 힘을 주시고, 일터에서도 힘을 주시고, 학교에서도 힘을 주시고, 그리고 교회에서도 힘을 주소서.”
특히 COVID-19으로 인해 지난 2년간 교회 예배 모임이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배 인원 제한이 풀려서 다시 이전대로 예배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COVID-19 사태로 인해 성도님들 중에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예배에 못나오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금요예배도 열심히 나왔던 분들이 지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못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기도합니다. “주여, 성도님들에게 다시 예배에 나올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찬송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봉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시29:1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40:31)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5) “이스라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시68:35)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한때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되기 전에 사울 왕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자기를 따르는 600명의 군사들과 그 가족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땅을 떠나 한때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으로 가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다윗이 6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전쟁을 치르러 나간 사이에 아말렉이 침략해서 다윗과 그 600명의 군사들의 가족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다윗과 함께한 군사들이 돌아와서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그들 모두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엉엉- 울었습니다.
더구나 다윗을 따르는 군사들이 자기 가족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으로 인해 너무 슬프고 분노에 차서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아니- 다윗도 자기 가족들을 잃고 엉엉- 울고 지쳐있는데 이제는 자기를 따르는 군사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제 다윗은 완전히 끝장났습니다. 절망입니다. 회복불능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니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여러분, 다윗에게는 힘이 떨어질 때마다, 낙심하고 쳐질 때마다, 큰 환난이 닥칠 때마다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얻어서 아말렉을 뒤쫓아 갔습니다.
그리고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초인적인 힘으로 아말렉을 무찔렀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갔던 가족들을 모두 구출하고 많은 전리품도 얻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힘이 떨어진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살 희망이 끊어진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합3:19)
사랑하는 여러분, 대저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에게 살 수 있는 힘과 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힘입고 살며 기동하고 있습니다.(행17:28) 고로 인생이 지치고 힘이 들 때, 가지고 있던 힘이 모두 떨어져 도저히 내 힘으로 일어나기 힘들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주여, 저에게 다시 힘을 주소서.”
예수님도 인생의 끝에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심히 지치고 피곤했습니다. 이 고비를, 이 마지막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힘이 달립니다. 그러나 이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22:43)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해야 하는데 종종 힘이 달립니다.
이때 주님이 그의 영으로, 그의 천사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고로 우리도 그 힘의 능력으로 끝까지 사명을 잘 마칠 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주님이 주신 힘을 얻고 또 얻어 달려갈 길을 끝까지 잘 달려가시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중에 최후의 승리와 영광의 노래를 부르시기를 축원합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배영진목사 / 삼상 30:1-20
오늘은 곤경에 빠졌을 때, 이것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다윗의 최악의 날, 큰 곤경에 빠집니다. 6절에 보면, 다윗이 큰 곤경에 빠졌다! 라고 합니다. 다윗과 부하 6백명이 재난의 상태, 남의 땅 망명도 서러운데 대성통곡을 할 정도입니다. 무슨 곤경에 빠졌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어요. 사랑하는 집이 불타서 잃어버렸어요. 내 소중한 재산인 가축들을 다 잃어버렸어요. 이것이 재난입니다. 모든 인생의 재난은 한마디로 나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상실의 경험입니다. 내가 아끼는 것을 잃어버려요. 우리도 내 삶에서 뭔가 빼앗기는 경험을 합니다. 내 것을 빼앗기는 경험, 이게 박탈감입니다. 박탈감과 상실감이 참 쓰라립니다. 오늘 다윗의 큰 곤경이 이래요. 견딜 수 없는 시간입니다. 블레셋에 몸을 붙여 블레셋왕에게 시글락이라는 땅을 얻어 겨우 살고있는데, 다윗과 부하들, 장정들이 전쟁터에 출전했다 돌아와보니,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이게 뭐지? 어떻게 이런 일이? 다윗이 사는 성읍이 불타고 폐허가 된 겁니다. 아내도 없고 아이들도 사라지고 없어요. 아 아말렉족속이 쳐들어왔구나.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어요. 장정들이 대성통곡합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은 곤경이 하나 더 얹어서 와요. 부하 6백명이 서럽게 울다가 갑자기 다윗을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6절로 가봅니다. 부하 6백명이 슬픔과 분노를 다윗에게 쏟아붓습니다 우리가 다윗만 따라다니다가 다 망한 거야! 저 다윗을 돌로 쳐죽이자! 다윗의 부하들, 아둘람굴 4백명부터 다윗과 함께한 동지들입니다. 다윗이 보니 부하들이 손에 돌이 있어요. 박탈감에다가 배신감까지! 참담합니다. 이게 다윗에게 큰 곤경입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요. 그런데 다윗이 여기서 이 곤경을 이겨내고 일어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여기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18절부터 보면 다윗이 모든 것을 되찾아옵니다. 빼앗긴 것들을 모두 되찾았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다윗에게 무슨 비결이 있었는가? 이걸 오늘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지혜가 있습니다. 큰 곤경에 빠졌을 때,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모든 것을 잃고 빼앗기고 큰 곤경에 빠졌을 때, 과연 거기서 일어날 수 있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다! 이것입니다. 다윗이 일어난 비결을 봅니다. 첫째, 하나님을 찾으라. 둘째, 도울 사람을 찾으라. 이렇게 했고,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윗과 6백명의 부하들이 잃었던 것을 모두 되찾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곤경도 이렇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곤경에 빠질 때, 하나님을 찾는다.
오늘 6절 우리가 다같이 읽어봅시다.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다윗은! 이 표현, 어디에 많이 나옵니까? 시편입니다. 다윗의 다윗됨이 여기에 나옵니다. 왜 다윗인가 할 때 이게 다윗이예요. 그러나 다윗은!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고 개역성경에는 크게 군급했다 해요, greatly distreessed, 견디기 힘든 시간이죠. 아내 잃고 재산 다 잃고 배신당하고! 그런데 반전이 나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러분 이 반전은 어디로부터 나왔죠? 항상 반전은 내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믿음은 항상 여기서 출발해요. 믿음은 내 상황이 나쁠 때 더 많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내가 믿음으로 살고 순종하고 헌신하고 살면 모든 재앙은 날 피해간다! 이거 성경이 약속했나요? 아닙니다. 경건하게 살면 고난도 피해가고 모든 사고도 피해간다! 성경이 약속하나요? 그런 때도 혹 있습니다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중심원리는 아닙니다. 믿음의 원리는 뭐냐? 그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뭔가? 재난의 시간에, 곤경에 빠졌을 때, 다 잃어버린 상실의 시간에, 그런 시간에 모두 절망하는데, 믿음의 사람은 달라요. 그 때에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
자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다윗이 좌절했나요? 안했나요? 4절을 보시고 6절을 보세요. 다윗과 그 부하들이 목놓아 울어요. 울 힘이 없을 때까지 다윗도 웁니다. 상실감과 박탈감이 오면 울지 않고 기도만 한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는 못일어납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목이 쉴 때까지 울고 더 이상 울 힘이 없을 때까지 울고, 그 다음이 6절입니다. 개역성경은 이렇게 말해요.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NIV, David found strength in the Lord his God! 다윗은 그때 어디선가 힘을 발견해요. 어디에 힘이 있는지를 발견합니다. 아 여호와 하나님 안에 힘이 있구나! 다윗은 이걸 봅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찾아요. 곤경의 상황에 하나님이 그의 눈에 보이면 삽니다. 그 안에 일어날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요? 그 아주 짧은 시간에 하나님 경험을 기억합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 적어도 세번의 하나님 경험!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날 건지신 하나님, 골리앗의 손에 날 건지신 하나님, 사울의 손에서 날 건지신 하나님, 그래 하나님은 날 버리지 않으신다. 날 건지신다! 오늘 설교후 이 찬양 부를 것입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 없다! 내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 내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약속하시고 행하신 주님!
그래서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지난 날 하나님이 날 건져주신 스토리를 찾아서 입술로 확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요나단은 누구인가? 내 삶에 사무엘은 누구인가? 내 삶에 아비가일은 누구인가? 그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고 나를 일으키고, 나를 건지신 증거들이 있으면, 오늘 큰 곤경에서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안찾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보인다, 그러면 죽습니다. 쓰러져서 못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반전은 놀랍게도 뭐예요? 항상 내면에서 벌어집니다. 최악의 상황, 무슨 반전이 있을 가능성이 전무한 상황, 친동생같은 부하들이 돌을 들고 나를 쳐죽이려 할 때, 그렇게 몰리는 상황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때 어떻게 상황이 반전되었는지, 어떻게 부하들이 돌을 땅에 내려놓고 물러갔는지 성경기록이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다윗에게 힘을 주시니까 부하들이 안정감을 갖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힘입고 일어난다는 것이 뭔지 아시겠어요? 여러분이 큰 곤경에 빠졌는데 거기서 헤어나올 힘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 안에서 힘을 발견합시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거 다 경험합니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그 상황에서 다윗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주저앉아 서럽게 울던 슬픔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짱돌들고 서있는 부하들을 보는데, 화가 안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제가 한번 상상을 해보니, 아마 다윗이 돌들고 서있는 부하들에게 주님처럼 하지 않았을까? 얘들아 이리 와봐. 내가 너희들 한명씩 허그해주겠다! 주님 배신한 베드로를 주님이 어떻게 해주셨죠? 숯불에 고기구워 먹여주셨어요. 다윗이 부하들 한명 한명 불쌍히 여기고 껴안아주고 부하들이 돌멩이 다 던지고 다같이 부둥켜 안고 울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러분 이것밖에 없습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는 내 믿음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이 상실의 시간, 그 큰 곤경의 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날 건져주신 주님, 골리앗 앞에서 날 이기게 하신 주님, 사울의 칼에서 기가 막히게 날 건져주신 주님, 이제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7절 에봇을 가져오라! 하나님의 뜻을 물어봅니다. 8절, 주님 우리가 아말렉 쫒아가면 잡을 수 있나요? 잃은 것 찾을 수 있나요?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그래 너희가 따라잡을 수 있다, 모두 되찾을 수 있다! 뭡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뭐죠? 일어날 수 있다! 내가 너의 힘이다. 일어나 아말렉을 잡으라! 틀림없이, 틀림없이, 두번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다 잃어버리고 빼앗겨도 그 곤경에서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사람은, 얼마든지 회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곤경에 빠질 때, 도울 사람을 찾는다.
이것은 긍휼, 하나님의 성품을 장착하는 순종입니다. 곤경에 빠지면 내가 도움받을 사람을 찾는 것이 본능인데, 오늘 성경의 진리를 보십시오.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긍휼을 베푸는 것, 내가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9절부터 17절까지 살펴보면 나옵니다. 9절 다윗의 부대가 아말렉을 추격합니다. 그런데 6백명 중 2백명이 지쳐요. 아마 기력이 쇠하였는지, 출동이 어려워요. 다윗이 이때 지친 2백명을 돌보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들을 쉬도록 해줍니다. 다윗이 바쁘다고 앞만 보지 않습니다. 주변 양옆도 살핍니다. 후방도 살핍니다. 곤경에 빠지려고 할 때 지금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군가, 혹 돌볼 사람이 있는가 누군가 찾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 긍휼입니다. 그를 돕다가 내가 힘이 납니다. 그를 돕다가 내 일이 풀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11절입니다. 다윗의 부대가 한참 아말렉군대를 뒤쫒아가다가 낙오병을 만납니다. 다윗이 보니까 병든 이집트소년이고, 아말렉군사인데 병들어 버리고 난 거예요. 다윗과 그 부하들이 그 병든 소년에게 긍휼을 베풀어요. 빵과 물을 먹이고 무화과와 건포도를 먹입니다. 병들어 버림받은 생명을 살립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봐야 합니다. 지금 뭐하러 가는 중이죠? 잃어버린 우리 아내과 우리 자식 우리 재산 이거 빼앗아 도망간 아말렉군사 쫒아가는 중이예요. 여러분 내 지갑 하나만 잃어버려도 아무 정신이 없습니다. 스마트폰 잃어버리면 삶이 멈춥니다. 그런데 길에서 병든 외국인 청소년, 이집트출신, 얘 돌보고 있을 시간이 있어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의 마인드가 뭐죠? 긍휼의 인생입니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내가 좀 곤란해도 도와줄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않는다!
지금 다윗의 부하들이 아말렉에게 빼앗긴 아내와 자식들 찾으러 가는 길이지만, 병든 소년을 발견하고 그 소년을 지나치지 않습니다. 돌보고 살핍니다. 이것이 긍휼의 성품입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내가 지금 내 상황이 별로 안좋다 해도, 바빠도 내 문제 이거만 신경쓰지 말자, 나보다 더 곤경에 빠진 이웃을 찾아보자! 내가 지금 도와줄 사람이 혹 어디 있는가? 그가 누군가 찾아보자 이겁니다.
그런데 13절, 여기서 다윗의 모든 것이 풀려버립니다. 따뜻하게 긍휼을 베풀어준 그 병든 이집트소년이 다윗앞에서 뭘 말합니까? 내 주인은 아말렉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나를 병들었다고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이 엄청납니다. 이 이집트 소년으로부터 아말렉이 어디로 갔는지 엄청난 군사기밀 고급정보가 다 흘러나옵니다. 아말렉군사들이 그동안 어디를 약탈했는지 군대의 이동경로를 다 말해줍니다. 15절, 다윗이 물어요. 아말렉군대가 어디로 갔고 어디 진쳤느냐? 소년병사가 대답합니다. 나를 살려주시면 아말렉이 어디있는지 안내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소년이 다윗에게 다 알려줍니다. 16절부터 보세요. 그 소년병사의 보물같은 군사정보를 가진 다윗과 부하들이 아말렉을 뒤쫒아 진영을 살펴보니 그들이 승리에 들떠서 약탈한 전리품으로 술잔치를 벌입니다. 부어라 마셔라! 완전 취합니다. 17절,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다윗과 그 부대가 약탈을 하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 그들을 진멸합니다. 아말렉은 완전무방비상태로 전멸합니다.
여러분 인생회복의 원리가 뭡니까? 하나님이 지금 다윗을 회복시켜주려고 길에 병든 소년 한명을 놓아두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소년이 바로 승리의 열쇠예요. 그 병든 소년에게 긍휼을 베풀고 먹려줬더니, 거기서 모든 것이 흘러나왔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진리를 선포합니다. 내가 힘든 곤경의 시간에 사람을 찾자.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는 데 아니고, 나보다 힘든 사람 도와줄 사람 찾아보자. 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 살펴주면, 그 사람도 살고 내 길도 열리고 회복된다, 왜 그렇습니까? 누가 우리의 길을 열어주셔요?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세상에서 긍휼을 베푸는 사람을 엄청 귀하게 보십니다.
그리고 18절부터 보세요. 엄청납니다. 18-20절 핵심단어는 되찾았다! 되찾았다는 말이 다섯번 나옵니다. 다윗이 아말렉에게 빼앗겨버린 모든 것을 되찾아 옵니다. 다윗은 아내를 되찾았어요. 사랑하는 아비가일을 찾은 다윗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다윗만 되찾았나요? 다윗의 부하 6백명도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 찾았어요. 되찾은 정도가 아닙니다. 20절 개선행렬에서 소리를 칩니다. 다윗의 전리품이다! 흥분을 감출 수 없는 회복의 시간입니다. 질문합니다. 왜 곤경에 빠질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나서는 자에게 길이 열리는가? 하나님의 실제보상법입니다. 땅에서 내가 도우면 내 하늘길이 열리는 원리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승리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를 붙드십시오. 곤경에 빠졌을 때 무엇을 해요? 곤경에서 일어나는 법을 두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아보라. 억울하다고 눈물만 흘리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보라.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힘들다고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너보다 힘든 주변을 돌아보라. 이게 긍휼입니다. 그를 찾아가 위로하라! 그에게 긍휼을 베풀라! 이것이 오늘 주님의 명령입니다. 순종해보시겠습니까? 곤경에 빠질 때 이렇게 순종하면, 회복이 올 줄 믿습니다! 네가 잃었던 것들을 모두 되찾게 해주겠다! 오늘 큰 곤경의 시간이 찾아올 때, 이 말씀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긍휼을 베푼 이들은 큰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큰 곤경에서 벗어나는 비결
계강현목사 / 삼상 30:1-8
<실락원>을 쓴 ‘밀턴’은 실명했고, 악성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고, 미생물학의 혁명가 ‘파스퇴르’는 중풍을 앓았고, ‘헬렌 켈러’는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기의 삶을 완전히 성취한 인생을 살아냈다. 절망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결과일 뿐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절망하지만, 어떤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금방 회복하고 어떤 사람은 오랜 동안 회복하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 그러니까 절망은 받아들이는 마음의 결과란 얘기다. 하나님에 대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잃지 않는 이에게 절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시 46: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큰 곤경에 처한 다윗을 만난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물맷돌로 죽인 용기와 기개는 어디로 다 사라지고, 큰 곤경에 빠져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다윗을 발견하게 된다. v6, “군인들이 저마다 아들딸들을 잃고 마음이 아파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할 정도였으니,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몹시 당황했다는 뜻이다. 사태가 다윗에게 아주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KJV “David was greatly distressed.” 스트레스를 엄청 받아 아주 고뇌에 차서 지쳐버린 다윗이다. 자신을 존경하며 따르던 부하들이 돌을 던지려고 할 정도니 이해가 된다. 어떻게 하다가 다윗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배경을 좀 살펴보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인기가 상승하자, 사울왕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게 된다. 다윗은 오랜 세월, 거의 10년 동안 사울왕의 집요한 살해 추격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지쳤다. 영적 멘토인 사무엘 제사장마저 죽자, 그는 힘든 결정을 내린다. 이스라엘의 원수나라,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블레셋으로 망명을 가기로 한 것이다. 가족들과 부하들까지 다 거느리고 떠나게 된다. 조국을 버리고 타국으로 망명가는 자의 심정을 생각해보라. 다른 선택이 마땅한 게 없기에 마지못해 택한 길이다.
질 지내던 중 하루는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전쟁에 출정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바로 자기 조국 이스라엘과의 전쟁이었다. 다윗은 승낙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그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적군과 힘을 합해 조국을 쳤다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만약 참여하지 않는다면 블레셋 왕으로부터 의심받고 결국 목숨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다. 다윗은 일단 마지못해 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은 불편하기만 하다.
만약 그대로 진행됐다면, 다윗은 앞날에 큰 오점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막아주셨다. 출전에 앞서 블레셋 군대 지휘관들이 심한 반발을 한 거다. 삼상 29:4-5, “그러나 블레셋 족속의 지휘관들은 다윗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블레셋 족속의 지휘관들이 아기스에게 강요하였다. ‘저 사람을 돌려보내십시오. 임금님께서 그에게 지정하여 준 그 곳으로 그를 돌려보내시고, 우리와 함께 싸움터에 나가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싸움터에 나가서 그가 우리의 대적으로 돌변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자기의 주인과 화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군인들의 머리를 잘라다 바쳐서 하지 않겠습니까? 5 그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춤을 추면서,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 하고 추켜세우던 그 다윗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블레셋 지휘관들로 하여금 10년 전 골리앗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셨다. 그때 블레셋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 바로 다윗이다. 골리앗 장수를 죽인 다윗을 전쟁에 데리고 갔다가 “배신하여 자신들을 죽이고 그 목을 사울 왕에게 갖다 바칠 수 있지 않냐?”며 모두 다윗의 출전에 극구 반대했다. 지휘관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자, 블레셋 왕 아기스는 다윗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오히려 사과를 했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피할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가족들이 있는 시글락 성으로 사흘 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윗 일행이 전쟁에 나간 사이에 주변 아말렉 군대가 공격하여 성은 불타고 있고,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혀간 거다. ‘산 넘어 산’, ‘엎친 데 덮친 격’, ‘여우를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난 격’이다.
다윗과 함께한 모든 장수들은 이제 다윗의 리더십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온전히 다윗에게 맡기고 살아온 저들이었다. 원수나라 블레셋으로 망명가자고 했을 때도 그저 주군만 믿고 따라 내려갔다. 그러다가 자기 조국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일 뻔했던 위기를 겪었고, 이제 겨우 모면하여 한숨을 내쉬며 가족에게 돌아온 터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집들은 다 불타고 가족들의 생사가 위급한 상황이 벌어져 있다. 다 다윗 때문에 생긴 위기다. ‘과연 이 사람 다윗에게 우리들의 미래를 맡겨도 좋겠는가?’하는 의심이 생겼다. 신뢰가 깨지고 다윗이 미워서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왔다. 부하들 몇몇은 다윗을 돌로 치자고 선동했고 군대가 동요하였다. 다윗은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훨씬 더 큰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아마도 이 날이 다윗의 일생에 최악의 날일 거다. 그의 도피 생활 10여년에, 최대의 위기를 만난 것이다. 사울에게 쫒길 때에는 힘들어도 자신을 따르며 협력하는 부하들 때문에 위로와 격려를 받고 용기를 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하들 중에는 어느 누구도 다윗의 편은 없고 다 돌을 들어 치려고 하고 있다. 외부의 공격은 군대로 싸우면 되지만, 내부의 분란은 다윗도 어찌 할 수 없는 큰 곤경에 빠진 것이다.
우리도 살다보면 이런 일을 만날 때가 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공격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킬레스건을 공격한다. 약한 부분, 넘어지기 쉬운 부분, 그런 부분을 통해 사단이 공격해온다. 우리의 아킬레스건은 뭔가? 그걸 건드리면 견디기 힘들어지는 것 말이다. 다윗이 오늘 바로 그런 곤경에 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나? v6에 보니까, “군인들이 저마다 아들딸들을 잃고 마음이 아파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할 정도였으니,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 이 큰 곤경 속에서 다윗은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지치고 피곤하였지만, 절망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이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but David encouraged himself in the LORD his God.’ 다윗이 그의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격려했다는 뜻이다. 자기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었는데, 그것이 하나님 때문이다. 아가페 쉬운 성경, “그러나 다윗은 자기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절망에 빠지지 않고 큰 곤경 가운데서 벗어나는 비결을 배울 수 있다.
1. 하나님을 바라본다.
바라본다는 것은 마음을 집중하여 주시하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누구를 바라보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봤을 때 물위를 걸어갔지만, 풍랑을 바라봤을 때 물에 빠지고 말았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바라봤을 때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죽이는 승리를 거뒀지만, 협박하는 이세벨 왕비를 바라보자 두려워 도망가다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는 연약한 자로 전락했다.
초점이 흩어진 빛은 아무런 힘이 없지만 초점이 맞추어진 빛은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맑은 날, 돋보기로 태양 빛을 한군데 집중시키면 종이를 태울 수 있다. 초점이 안 맞는 안경을 낀 사람은 시야가 어지러워 제대로 걸을 수 없지만 초점이 분명한 안경을 끼면 똑바로 걸을 수 있다. 초점이 맞춰지면 이탈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큰 힘을 얻는다. 왜 힘들고 갈등될까? 초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시글락을 불타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다윗은 그 불타는 순간이 자신의 구원의 순간임을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글락이 불타서 주저앉은 것을 보고서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새롭게 그의 인생을 인도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나의 파멸과 멸망의 시간이 구원의 시간이 된다. 물론 모두에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파멸이 곧 파멸일 뿐이다. 그러나 롬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낙심치 않고 극복하고 승리하기를 원하는가? 사람이나 환경을 산만하게 보지 말고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전능하시고 지혜와 인자가 무궁하신 하나님만을 주시하고 바라보라.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히 12:2)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환경이나 사람이 보이지 않고, 반대로 사람이나 환경을 바라보는 자는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막히고 꿈이 사라지고 삶이 우리를 지치게 할 때 우리는 절망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확실하냐? 그렇다면 너는 절망하지 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큰 곤경 중에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
2. 기도한다.
하나님을 바라본 다윗이 제일 먼저 어떻게 조치하나?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뜻을 구한다. v8, “제가 이 강도들을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왜 이게 중요한가 하면 오늘 다윗이 겪는 이 큰 곤경은 하나님과의 기도가 막혀있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무엇을 하던 어디를 가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인이었다. 블레셋 군대와 전쟁할 때마다 묻고 또 물었다. 기도를 앞세웠다. 사울을 피하여 숨어 다닐 때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물었다. 그일라 성을 공격한 블레셋을 치러갈 때에도 “내가 출전하여 이 블레셋 사람을 쳐도 되겠습니까?” 물으면 하나님이 대답하길, “그렇게 하여라. 어서 출전하여 블레셋 족속을 치고, 그일라를 구해 주도록 하여라.”(삼상 23:2,4) 그러면 가서 쳤다. 사울이 그를 잡으러 올 때에도. “하나님 이 지역 사람들이 나를 사울의 손에 내어주겠습니까?” 물었다. 하나님이 대답하시길, “그래, 내어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바로 그일라를 떠났다. 매사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런데 망명길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로에서 다윗은 기도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삼상 27:1-2, “다윗이 혼자서 생각하였다. ‘이제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 살아나는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망명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사울이 다시 나를 찾으려고 이스라엘의 온 땅을 뒤지다가 포기할 것이며,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2 그래서 다윗은 일어나서, 자기를 따르는 부하 육백 명을 거느리고,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넘어갔다.” ‘다윗이 혼자서 생각하였다.’가 강조되고 기록되었다. 다윗은 기도 대신 자기 혼자의 생각과 궁리를 통해 블레셋 망명길을 선택한 것이다.
어쩌면 다윗은 기도해도 하나님이 사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도록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의 불신과 서운한 마음이 슬그머니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시고, 그를 사랑하신다면 사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데려 가시거나, 아니면 사울을 데려가시면 될 텐데…. 계속된 피난생활에 지친 그는 지난날들을 회고해 봤을 거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그일라 주민을 블레셋으로부터 구해줬다. 그랬더니 그일라 주민들이 은혜를 오히려 원수로 갚는 억울한 일을 만났다. 그래서 이번엔 하나님의 인도보다 자기의 생각을 좇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과 그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우리도 기도하다가 하나님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면 기도가 약해지고 만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의심과 불신으로 기도할 때가 생긴다. 염려하며 하는 넋두리가 아니라 믿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시종여일하신 분이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지금 다윗 옆에는 성읍이 불에 타서 연기가 올라가고 있다. 부하들이 손에 돌을 쥐고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며 울부짖는 소리들이 들린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기도의 비결’이 있다. 그런 엄청난 위기의 상황을 돌파하는 ‘기도의 능력’이 있다. 기도할 때 문제는 해결되고 살 길이 열리게 된다. 기도를 시작하라. 믿음의 기도, 진정한 기도를 시작하라.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 기도하기 전에는 내 생각이 옳은 것 같았는데, 기도한 후에는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도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은 잃게 되고 기도를 회복하면 모든 것은 회복할 수 있다. 기도하면 안 될 일도 되지만, 기도 안하면 될 일도 안 된다. 목장사역이 기도사역이란 말이 바로 그런 얘기다. 혼자 생각하고 궁리해서 영혼구원, 제자 만드는 게 이뤄진다면 누군들 못하겠나? 하지만 기도 없이 하다간 큰 곤경에 처하게 되고 쉬 탈진하고 만다. 기도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에게 묻고 기도하며 의지하는 순간부터 제대로 시작하는 거다. 이게 신앙의 원리다.
3. 즉각 순종한다.
다윗이 기도로 묻자, v8b, “네가 틀림없이 따라잡고, 또 틀림없이 되찾을 것이니, 추격하여라!” 하나님의 응답이 떨어졌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포기하여 주저앉아 있으면 아무 소용없다. 그러나 다윗은 즉각 순종하여 600명의 군대를 출동시켰다. 아말렉을 급습하여 쳐서 가족들을 다 찾아 데리고 돌아오고 전리품도 취하여 올 수 있었다. 가족과 전리품만 회복된 것인가? 아니다. 더 중요한 다윗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가 회복된 것이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에 즉각 순종하니까 막혔던 게 쉽게 풀려진 것이다.
삼상 31장을 보면, 블레셋과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하고 사울 왕은 자살하여 죽는다. 이어지는 삼하 2장에 가면 다윗 왕이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윗을 훈련을 마치시고 결국 왕으로 세운 것이다. 사울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대상 10:13-14, “사울이 주님을 배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점쟁이와 상의하며 점쟁이의 지도를 받았다. 14 그는 주님께 지도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의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맡기셨다.” 사울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신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는 신앙이 과연 하나님께 기도하는 걸까? 하나님의 지도를 받지 않는 기도는 기복적인 기도에 불과하다. 기도는 늘 하고 사는 것 같은데, 내 자신의 복만을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다고 하실지 모른다.
복만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복만 떨어지길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한다. 이게 차이점이다. 젊었을 때, 힘 있을 때는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살다가 은퇴한 후에 주님 위해 일한다고 하는데, 그게 맞나? 지금 힘 있고 기력이 있을 때, 총명할 때, 젊어서부터 헌신하여 복음을 위해 일해야 하지 않겠나? 누누이 얘기하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는 “너 뭘 하면서 돈 벌다가 왔냐?”, “무슨 직장에 다녔나?” 그런 거 일절 묻지 않고, “영혼구원 제자 만드는 일에 얼마나 힘쓰다가 왔냐? 얼마나 남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다 왔냐?” 그것 물으실 거다. 그렇다면 지금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살아야겠나? 무엇을 주업으로 하면서 살아야 하겠나? 마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우선순위의 삶을 바로 살면 생존과 생계는 반드시 책임져 주신다.
목자부부가 갑자기 새벽기도회를 나오면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 하나님이 뭔가 그 목장에 일을 벌이시는 것이다. vip들을 전도하려고 하다 보니, 막상 기도로 매달리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리곤 응답하고 지시하시는 대로 즉각 순종해보는 것이다. 마침내 때가 되면 아름다운 열매를 주신다. 기도의 불을 지피고 기도의 제단을 쌓으면 때가 되면 꼭 하나님이 보상하신다. 축복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자. 또한 비록 살다가 큰 곤경을 만날 지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주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다시금 기도하자. 응답하고 지시하시는 것에 즉각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역전시켜 주시고 넉넉히 극복하도록 은혜와 승리와 축복을 주신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