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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어느정도 친숙(?)한 유자민의 논문을 번역했는데, 넷상에서 굴러다니는 글이다. 전형적인 중국학계의 관점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주된 비판 대상은 북한학계의 학설이지만 윤내현의 설(낙랑 관련)도 슬쩍 곁들어 욕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구려 역사 귀속문제' 등 일부 억지주장을 걸러내고 들여다본다면 얻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 역자의 말.
『社會科學戰線』2001年 第4期 pp. 178~189. (吉林省社會科學院)
고구려의 강역 변화 고찰
高句麗疆域沿革考辨
(연변대학 사범학원 역사계 교수)
고구려는 우리나라의 고대 소수민족 할거정권이다. 이들이 작을 때부터 커질 때까지 또 약할 때부터 강하게 될 때까지 발전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 강역의 확장도 자연히 한가지 변천과정을 거쳤다. 때문에 고구려 강역의 변화를 두고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고찰을 벌이는 것은 고구려 역사를 이해하는데 퍽 중요하다.
1. 고구려 5부 강역의 형성
학계의 일각에선 주몽(朱蒙)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구려국(句麗國)”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 “구려국”은 원시사회 말기 적엔 “다섯 혈연집단(5族)이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계급사회에 들어서자 곧 강대한 연나부(涓那部)에 의해 통일되어 다섯 지방행정단위(5部)로 편성되었다.” “고구려는 구려를 계승한 국가”이고, 따라서 “구려국”의 영역은 초기 고구려의 영역 범위 내에 자리하는데, “그 지역은 현재의 혼강(渾江) 유역을 중심으로 두고, 압록강 중류지대, 태자하(太子河) 상류지대, 혼하(渾河) 상류지대, 이통하(伊通河) 유역의 오늘날 중국 요녕성 일부(환인현, 신빈현, 청원현) 및 길림성 일부(유하현, 통화현, 집안현,
“5부(족)”에 관한 기록은 가장 일찍『후한서』와『삼국지』의「동이전」에 나타난다. 이때 5부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바 범엽(範曄)과 진수(陳壽)가 언급한 “5부(족)”는 기정 사실의 상황인데, 그 변천을 두고 원래 연[소]노부가 “王”이 되어 “國主”가 되었으되 뒷날 이를 계루부가 대신했다는 한 가지 기사만을 남겼다. 분명히, 상술한 두 사서의 관련기록은 꽤 아리송하다. 바로 이렇다 보니 학계는 문제를 이해할 때 저마다 다른 뜻의 주파수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
“비류수”가 현재의 어느 강인지를 두고 학계의 견해는 서로 다르지만 지금의 혼강(渾江) 지류인 부이강(富爾江)으로 보는 설이 가장 미덥다. 이른바 “졸본천(卒本川)”이란 의심할 바 없이 비류수의 다른 이름이다. 위에서 인용한 사료를 근거로 짐작하자면, 주몽이 졸본천에 이르기 전 이 일대에는 부여 이민에 의해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고(『제기』에 따르면 주몽 후처의 전남편인 우태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다), 주몽이 나라를 세울 때 국호를 아마도 “졸본부여”라 했을 것이지만 일부 原고구려 부락을 병탄한 뒤 “고구려”로 개칭했을 것이다. 필자는 주몽이 건국하기 이전의 고구려를 “古고구려”라 부를 것인데 이 “古고구려”는 비류국을 우두머리로 한 몇몇 부락의 소국(小國)으로서 예컨대『려기』에 나오는 “황룡국(黃龍國)”, “행인국(荇人國)” 따위가 다 그것이다. 정작 주몽은 비류수 하류지대에 발을 내린 뒤에 부여 이민의 힘을 이용하여 古고구려의 각 부락을 위압 또는 정복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 둘 것은 古고구려는 마땅히 본디 고이(高夷)의 몇몇 부락 중에서 이탈한 새로운 민족의 공동체란 점인데, 고구려족이 탄생하기 전 고이는 이미 서주(西周)때 존재했었고 응당 여러 부락으로 분산된 채 각자 군장이 있지만 통일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고구려족이 부이강 유역에서 형성된 뒤 이 각 부(部)는 한 테두리 내에서 그다지 크지 않은 부락연맹을 형성했고, 그 맹주는 비류국 왕(추장)이었다. 송양이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 왕노릇을 하였다[我累世爲王]”고 한 말은 비류국이 여러 대에 걸쳐 古고구려 부락연맹의 추장 노릇을 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여러 대에 걸쳐 왕노릇을 하였다[累世爲王]”를 두고 비류국이 이미 노예제 국가를 실행했으며 국왕 노릇을 세습했다고 잘못 이해하였다.
필자는 또 한걸음 더 나가 짚어둘 것이 있다. 古고구려는 부락연맹을 이루었지만 연맹의 영역은 본래 고이의 전역을 아우르진 못했었다. 서한(西漢) 제2 현도군의 관할구역은 다해서 3개 현인데 즉 고구려현, 상은대현, 그리고 서개마현이었다. 古고구려족의 분포구역은 겨우 고구려현의 관할 경내에 있어야만 할 것이고 나머지 두 현은 응당 미처 고구려족과 융합되지 못한 고이 부락 혹은 맥인(貊人) 부락을 관할했어야 할 것이다. 고구려현 관할 경내에는 또 양맥(梁貊, 지금의 태자하 상류지대 일대)도 분포했었지만 양맥은 진대(晉代)에 이미 고구려 속으로 녹아 들어가 있었다. 古고구려와 서한 지방정부의 관계를 두고『삼국지·동이전』는 이렇게 적었다. “한나라 때 북과 피리를 잘하는 사람을 (고구려에) 베풀었고, (고구려는) 언제나 현도군에서 조복으로 입을 옷과 갓[幘]을 받아갔는데 고구려(현)령은 그 명부를 써두었다. 뒤에 (고구려는) 차츰 마구 으스대더니 다시는 (현도)군을 찾아오지 않았지만 (현도군)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아 조복으로 입을 옷과 갓을 그 안에 놔두고 해마다 와서 가져갔다. 때문에 오늘날 오랑캐[胡]는 이 성을 책구루(幘溝婁)라고 부른다. 구루(溝婁)란 (고)구려 말로 성을 뜻한다.”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復詣郡, 於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幘溝婁. 溝婁者, 句麗名城也] 여기선 “한나라 때[漢時]” 생긴 일이라고 적었지만『삼국지』보다 늦게 나온『후한서·동이전』에는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딸리게끔 하고 북과 피리를 잘하는 사람을 베풀었다 [武帝滅朝鮮, 以高句麗爲縣, 使屬玄菟, 賜鼓吹伎人]”고 적혀있는데 이는 뚜렷하게 잘못이다.『한서·소제기(昭帝紀)』에 이렇게 실려있다.: “원봉(元鳳) …… 6년(서기전 75년) 봄 정월, 온나라[郡國]에서 (사람을) 징발하여 요동 현도성을 옮겨 쌓도록 했다” [元鳳……六年, 春正月, 募郡國徒築遼東玄菟城]. 여기서 “요동”이란 성(城)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군(郡)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때 요동군의 치소는 양평(襄平)이었고, “요동성”은 뒷날 고구려가 요동군을 점령한 뒤에야 있었다. “현도성”은 의심할 바없이 고구려현 현성(縣城)이며 그 성터는 바로 지금의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永陵鎭) 남쪽의 한나라때 고성(古城)이다. 필자가 일찍이 고증했지만, 서한 제2 현도군은 소제 6년을 전후해서 본래 요동군 새외(塞外)지역으로 교치(僑置)된 것인데 그 관할구역은 기본적으로 古高夷(지금의 渾江 유역)와 貊國(지금의 북한 자강도)의 옛 땅이었다.2 따라서, 고구려현의 설치와 한 무제에 의한 조선 멸망은 아무 관계가 없고, 고구려현령이 관리한 古고구려는 소제 때의 일이다. 주몽이 나라를 세운 뒤에, 고구려국은 비류부를 대신해서 古고구려 지역을 통치했다.『려기』에 따르면, 주몽은 사람을 보내 말갈을 물리치고 “태백산 동남쪽으로 행인국을 쳐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아 가져갔고[伐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爲城邑]” 아울러 “북옥저를 쳐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아 가져갔다[伐北沃沮, 以其地爲城邑]”. 이 사건을 두고 학계의 어떤 사람은 주몽 재위 시절 고구려의 땅덩어리는 이미 퍽 컸었다고 여겼다. 정작 이는 일종의 오해다.
고구려 제2대왕 유리왕 재위 시절에도 고구려는 여전히 아주 강대하지는 못했다. 한나라 현도군에 의한 상당한 통제력이 아직 있기도 했지만, 북쪽에 이웃한 부여국의 압력 또한 대단히 컸었다.『려기』에 따르면, 서기전 6년, 부여왕 대소(帶素)는 일찍이 사자를 보내 고구려더러 볼모를 보내라고 했고, 이런 까닭에 유리왕은 꽤 두려워했었다. 고구려현의 통제와 부여국의 위협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기 위해 유리왕은 서기전 3년에 국내성(지금의 집안시)으로 도읍을 옮겼지만 본래 수도였던 흘승골성(지금의 환인 동북쪽 오녀산성)부터 거리상 멀지 않은 황룡국의 노여움 조차 섣불리 사지 못했었다.『려기』에 따르면, 유리왕은 사람들을 편안케 하고 나라를 튼튼히 하기 위해 우연찮게 생긴 황룡국과의 원한을 태자에게 내린 죽음으로 해명했다. 여기서 짚어 둘 것이 있다. 즉, 서한 말년에 중원에서 많은 사건이 벌어지면서 동북 변군(邊郡)에 대한 통제력에 대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래서 고구려의 천도 이전에 서개마현(지금의 집안)은 요동군 경내로 이전되었지만, 상은대현은 여전히 존재해서 왕망(王莽)이 나라를 세운지 4년째 해(서기 12년)에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개칭할 때 상은대현은 “하은대(下殷臺)”로 개칭되기도 했었다. 당연하지만, 왕망이 정권을 찬탈하면서 벌린 그릇된 민족정책 탓에 고구려인의 민족감정에 상처를 주어 민족갈등은 깊어졌고, 고구려는 반역의 길을 따라 멀리멀리 가게 되었다.『려기』에 따르면, 서기 12년 이후 고구려는 “한나라 변두리 땅을 더욱 심하게 쳐들어왔고[寇漢邊地愈甚]”,서기 14년엔 “서쪽으로 양맥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없애고(사실상 정복), 군대를 전진하여 한나라 고구려현을 덮쳐 빼앗았다[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이로부터, 한나라 현도군의 관할구역 대부분은 고구려 통제하에 들어가고 말았고, 현도군은 전부 장성 안쪽의 요동군 경내로 옮겨가게 되었다. 고구려 제3대왕 대무신왕은 즉위하자 우선 서기 4년에 부여국을 깨부셨다. 부여국왕의 아우는 압록곡(鴨綠谷, 지금의 압록강 상류지역)까지 달아나 해두왕(海頭王)을 죽이고 갈사수(曷思水, 압록강의 한 지류)에서 스스로 나라를 세워 갈사왕(曷思王)이 되었다. 부여왕의 사촌 아우 역시 1만 여 사람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자 고구려는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掾那部)에 안치했다. 또한 서기 26년 겨울 10월에 “(대무신)왕은 몸소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고……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고[王親征蓋馬國……以其地爲郡縣]”,같은 해 12월에 구다국(句茶國)도 “나라를 들어 찾아와 굴복하니[擧國來降]”,고구려는 “이로 말미암아 땅이 차츰 넓게 뚫렸다 [由是拓地浸廣]”.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부터, 고구려는 국내성 지역의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산, 그리고 산천의 험함을 이용하여 수비는 쉽되 공격은 힘든 절호의 조건으로 끊임없이 주변을 향해 발전하는 할거세력이 되어 그 남쪽 경계는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의 북쪽 기슭까지 도달했다. 제6대왕 태조왕 시절, 서기 68년에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都頭)는 나라를 들어 찾아와 항복했고[曷思王孫都頭以國來降]”, 서기 72년엔 “관나부(貫那部)의 패자(沛者)인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복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으며[遣貫那部沛者達賈伐藻那, 虜其王]”, 서기 74년에도 “(태조)왕은 환나부(桓那部)의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의 아들인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古鄒加)로 삼았다[王遣桓那部沛者薛儒伐朱那, 虜其王子乙音爲古鄒加]”. 대체로 태조왕 집권 시절에 고구려 5부의 강역은 형성되어 있었다. 그 중부(中部, 內部 혹은 黃部라고도 함)는 계루부였다. 여기는 5부의 중심으로서 국내성 지역이자 왕의 직할지역이었으며 지금의 집안시 경내에 있었다. 또한 고구려왕 직속의 지연부락(地緣部落)이었는데 응당 부여 사람(왕족), 고이 사람(개마국, 구다국), 그리고 맥 사람(大水貊)이 융합하여 이루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서부(西部)는 연노부(右部라고도 함)였다. 이 부는 비교적 일찍 형성되었는데 그 주요 거주민은 “古고구려” 사람 및 “졸본부여”의 후예였다. 남부(南部)는 권노부(灌奴部, 前部라고도 함)였다. 그 위치는 응당 지금의 환인현(桓仁縣) 남부와 관전현(寬甸縣) 북부의 혼강(渾江) 하류지대인데 요동군과 장성 줄기를 사이에 두고 있다. 또 여기는 소수맥(小水貊)과 부여왕의 사촌아우가 데리고 왔던 부여사람이 서로 융합하여 이루어진 지연부락이었다. 북부(北部)는 절도부(絶奴部, 後部라고도 함)였다. 그 지역은 바로 지금의 임강(臨江), 장백(長白), 무송(撫松), 그리고 정우(靖宇) 등 현의 경내이다. 여기는 한 무리의 부여 사람(예컨대 갈사국)이 들어오면서 현지의 토착 고이 사람과 융합하여 이루어진 지연부락이었다. 동부(東部)는 순녀부(順女部, 左部라고도 함)이었다. 그 영역은 옛날 맥국(貊國)의 고지(故地)인데, 지금의 북한 자강도 일대이다. 여기는 일부 고구려 사람이 이주해 들어오면서 맥 사람의 잔존 部(주나, 조나)와 융합하여 이루어진 지연부락인데,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형성되었다. 진수(陳壽)는 상술한 역사변천을 살펴보지 못하고 단지 계루부가 연노부의 고구려 통치를 대체했다는 아리송한 말만 할 따름이어서 우리들의 이해를 어지럽게 했다. 연노부가 왕이 되면서 고구려가 시작되었다는 설은 확실히 적절치 못하다.
2. 고구려 강역의 요동방면 확장
전술한 바와 같다면, 고구려 5부의 범위는 기본적으로 한나라 제2 현도군의 관할구역이 되는데 이곳과 요동군 및 제3 현도군의 경계선은 요동장성(遼東長城)이고, 요동지역에서 이 장성 줄기의 주향은 응당 이러한다.: 지금의 철령 이북 동남쪽으로부터 무순 대과(大夥)댐 이동의 남잡목(南雜木) 일대를 거쳐 혼강(渾江) 및 소자하(蘇子河)를 건너 남쪽으로 달려가서, 태자하 중류지대를 넘어, 관전현 이동 지역에서 압록강을 지나 한반도의 “대령강장성(大寧江長城)”에 연결된다.3 고구려는 5부가 형성된 뒤 현도와 요동 두 군까지 진출한 것을 두고 다 “새로 들어가기[入塞]”, “새를 나가기[出塞]”로 부를 수 있는 바, 한•위 시대의 부여와 고구려는 모두 새외민족(塞外民族)이었다.
고대 문헌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는 새(塞)로 들어가 두 郡을 침범하기 시작한 것은 태조왕 궁(宮)의 집권시기지만 그 강역의 확장은 여전히 새(塞) 안쪽에서 전개되었었다. 신대왕 백고(伯固), 고국천왕 남무(男武), 산상왕 연우(延優, =伊夷謨) 재위 시,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으로 세력을 확장한 탓에 그 형세는 비교적 평온했고, 공손강(公孫康) 집권 때는 심지어 연노부가 고구려를 이탈하여 직접 공손씨 정권에 귀부하는 현상까지도 있었지만, 공손강(公孫康)은 고구려를 토벌하여 “그 나라를 깨부수고 고을을 불살라[破其國, 焚燒邑落]”4 하마터면 고구려는 망할 뻔하기도 했었다. 조위(曹魏) 시기,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한 사건이 발생해서 고구려는 더욱 비참한 실패를 맛보았다. 어떤 사람은『후한서』와『삼국사기』에 건무(建武) 25년(서기 49년) 고구려가 장병을 보내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그리고 태원(太原)을 덮쳤다는 기록을 근거로 고구려가 동한(東漢)때 정말로 황하 이북 땅까지 원정했었다고 단정했으며, 또한『려기』에 서기 55년 고구려가 “요서 지방에 10좌의 성을 쌓았다[於遼西地方築城十座]”는 기록을 두고 고구려가 그 영토를 대릉하 동남의 의무려산 일대까지 확장했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5 정작 상술한 두가지 사료는 믿을 만하지 않으며 응당 일종의 오해에 따른 그릇된 기록이다. 전자의 오기는 고구려 제5대왕 모본왕 집권시기에 배치되어 있지만 모본왕은 “사람 됨됨이가 사납고 어질지 못한데다 나랏일을 힘쓰지 않아서”[爲人暴戾不仁, 不恤國事]” 백성들의 원한이 매우 컸던 국왕으로서 겨우 재위 6년 만에 가까운 신하에게 죽임을 당했었다.6 이런 한 나라의 군주의 “영도” 아래 고구려가 그와 같은 원정을 했다고 상상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이 사료에 대한 인식을 두고 조덕전(曹德全) 동지가 진작에 정곡을 찌르는 분석을 했었기에 여기선 군말하지 않는다.7 두 번째 사료 역시 와전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간 것이다. 과연 역사상 정말로 고구려가 “요서”에 성을 쌓은 일이 있었다 해도 이는 태조왕 시기에 발생한 것이 아니거니와 “요서” 또한 의무려산 이서의 요서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응당 소요수(小遼水, 지금의 渾河) 서쪽의 요동군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전술했듯이, 역사를 고찰할 때는 반드시 먼저 사료의 진위와 신빙성을 감별할 수 있어야만 빗소리를 듣고 바람이 분다고 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요동지역의 형세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때는 마땅히 동•서진 시기였는데, 이런 변화의 최초 흔적은 “신성(新城)”의 수축과 양맥(梁貊)의 소멸이다. “신성”이란 이름은 가장 일찍『려기』서천왕 7년(276년)조에 보인다.: “4월, (서천)왕은 신성에서 흰 사슴을 사냥해 잡았다.[四月, 王如新城獵獲白鹿]”. 김부식은 “신성”을 두고 “신성은 나라의 동북에 있는 큰 요새[新城, 國之東北大鎭也]”라고 주석을 달았다. 학계에선 이 “신성”을 두고 지금의 고이산상성(高爾山山城, 무순성 고이산 위에 위치)이라고 공인했지만 이곳은 고구려의 “동북”이 아니라 서북에 자리한다. 신성의 설치는 고구려의 영역이 진작에 장성 줄기를 돌파했다는 표식이다. 양맥 문제의 경우,『려기』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이들은 지금의 태자하 상류 제2 현도군 고구려현 남부 새외의 맥인(貊人) 부락으로서 古고구려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고, 고구려 5부의 기본이 형성된 뒤에 양맥은 고구려에 때로는 등돌리고 때로는 달라붙기도 했었지만, 고구려 봉상왕 원년(292년)의 역사기록을 마지막으로 이후 더 이상 역사에 보이지 않는데 이는 한 맥족 부락이 완전히 고구려에 녹아 들어가서 그 옛 땅은 모조리 고구려의 판도에 정식으로 거두어 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에 동의한다.: 지금 신빈현 서남부 하엽하향(下夾河鄕) 북쪽의 태자하 남쪽 기슭에 있는 태자성(太子城)의 수축연대 하한은 늦어도 (고국원왕 5년[335]의) “나라 북쪽 신성 [國北新城]”에 대응될 수 없고, 건축기법을 볼 때 거의 “맥인”과 고구려에 의한 산성수축의 모든 특징이 집중하므로 마땅히 고구려산성 수축의 초•중기 유형에 속해야만 한다. 당연하지만, 문헌의 관련기록과도 잇닿아있어 그 하한은 3세기 말로 비정하는 것이 비교적 타당하다. 마찬가지로 지금 본계지역의 변우산성(邊牛山城)과 하보산성(下堡山城) 또한 응당 서진(西晉) 시기에 수축된 것인데 이 두 좌의 성도 새(塞) 안쪽 지역으로 들어가 있다. 사서 기록 및 고고학적 발굴로 미루어 보아 서진 후반기의 어느 시기에 모용선비로부터 강력한 저지를 받았던 탓에 고구려의 요동을 향한 확장의 기본적인 상한선은 신성, 변우산성, 그리고 하보산성으로 이어지는 일선이지만 서진 말기가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첫째, 미천왕 집권때, 고구려는 요동 갉아먹기를 더욱 강화했다.『려기』에 따르면, 미천왕 3년(서기 302년, 西晉 太安 원년) 가을, 고구려왕은 “병사 3만을 이끌고 현도군에 쳐들어가 8천 사람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놓았고” [率兵三萬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12년 (서기 311년, 西晉 永嘉 5년) 가을 8월에도 고구려는 장병을 보내 “요동(군) 서안평(현)을 덮쳐 빼앗았다” [襲取遼東西安平]. 서안평현은 서한 때 설치된 것인데 지금의 요녕성 단동 애하첨고성(靉河尖古城)이다. 여기는 압록강 물길로 들어가는 목구멍과 같은 땅이거니와 한반도에서 요동지역으로 드나드는 중요한 길목이라서 서안평현의 함락은 고구려가 요동 및 한반도로 팽창하는 과정 중에서 제일 중요한 승리였다. 미천왕 16년(서기 315년, 서진 建興 원년) 봄 2월, 고구려는 마침내 현도군(지금의 무순시 혼하 북쪽 기슭의 노동공단 古城)을 쳐부수고 마구 살상과 강탈을 벌렸다. 이 무렵 晉나라 평주자사•동이교위 최비(崔毖)는 몰래 (선비)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그리고 고구려와 손을 잡아 모용선비를 칠 것을 공모했다. 이에 모용선비를 쳐없애고 그 땅을 셋이서 나누려고 기도했지만, 모용외는 반간계[反間之計]를 택하여 세 집단의 연맹을 교묘하게 깨트리고,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요동군 치소 양평(지금의 요양)을 공격했다. 그래서 최비는 미천왕 20년(서기 319년, 동진 太興 2년)에 가족을 팽개치고 몇 십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 품속으로 달아났다. 모용외는 아들
둘째, 고국양왕이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미천왕은 서기 331년에 죽자 같은 해에 그 아들 고국원왕(이름은 斯由 또는 釗)이 즉위했었다. 재위 초기 12년 동안에 잇달아 “평양성을 증축하고[增築平壤城]”, “나라 북쪽에 신성을 (보강하여) 쌓았으며[築國北新城]”,“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아서[修葺丸都城, 又築國內城]” 방위력을 강화했으며, 아울러 “세자를 연나라 왕 (모용)황에게 보내 조회하였다 [遣世子, 朝於燕王皝]”. 이 무렵 모용황은 전연(前燕)의 국왕이었는데 서기 342년(고국원왕 12년) 겨울에 용성(龍城, 후에 柳城으로 개칭됨, 지금의 요녕성 조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차 중원 파병에 따른 배후의 걱정거리를 제거하기 위해 모용황은 같은 해 11월에 몸소 병사 5만5천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 전승하고 전리품도 크게 얻었는데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주검을 싣고, 창고 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보배를 거두었으며, 남녀 5만 여 구를 사로잡고, 그 궁실을 불사르고, (모용)황은 환도성을 허물고 되돌아갔다 [發美川王墓, 載其屍, 收其府庫累世之寶, 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宮室, 毀丸都城而還]”.9 이로부터, 고구려는 볼모와 공물을 바치며 연나라에 신하를 칭했고, 섣불리 요동을 넘보지 못했다. 소수림왕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기 371년에 즉위한 뒤에도 전진(前秦)이 (중국) 동북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전진과 고구려의 관계는 무척 양호했었기 때문에 요동엔 별일 없었다. 그러나 고국양왕이 즉위하자 재위 2년(서기 385년) 봄 정월, 고구려는 병사 4만을 보내 “요동(군)과 현도(군)을 떨궈서 남녀 1만 구를 사로잡고 되돌아왔다 [陷遼東•玄菟, 虜男女一萬口而還]”. 곧바로 같은 해 겨울 11월에 연나라 장수 모용농이 군대를 이끌고 요동과 현도 두 군을 되찾았다.10
셋째, 광개토왕(원문엔 호태왕)이 요동쪽으로 강역을 개척했다.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고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고국양왕의 아들인데 “나면서부터 씩씩하고 남다른 뜻이 있었다[生而雄偉, 有倜儻之志]”. 대략 광개토왕은 즉위 초에 출병하여 현도와 요동 두 군을 쳐 빼앗았다. 이는『광개토왕비문』(이하『비문』으로 약칭) 영락(永樂) 5년(서기 395년) 기사에 광개토왕이 비려(碑麗)를 차지한 뒤에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군대를 돌렸다는 말로써 뒷받침할 수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 9년(『비문』의 영락 10년) 봄 정월, 후연
3. 고구려 북부 강역의 변화
고구려의 북부강역이란 고구려 5부 이외에 점유한 부여의 영토를 가리킨다. 부여땅은 새외(塞外)에 자리하는데 그 강역은 지금의 길림성 중부에 있고 전기왕성(前期王城)은 지금은 길림시에 있다. 각종 흔적에서 드러나지만, 대무신왕이 부여를 크게 이긴 뒤부터 부여의 남부영토는 더욱 고구려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태조왕의 어머니는 부여 사람이라 죽고 나서 부여에 묻혔는데, 일찍이 태조왕은 서기 119년 “부여에 납시어 태후묘에 제사지내고, 백성으로서 고달픈 사람을 살펴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幸夫餘祀太后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16 여기서 행차한 부여의 소재지는 응당 예전엔 부여의 남부 강역이었거니와 왕 태후의 고향이다.『려기』에 의하면, 서천왕 11년(서기 280년) 겨울 10월, “숙신이 쳐들어오자 …… 달가(達賈)가 느닷없이 나가 덮쳐서 단로성(檀盧城)을 발라내 추장을 죽이고, 6백 여 가를 부여 남쪽 오천(烏川)에 옮겨 살게 하였다 [肅愼來侵……達賈出奇掩擊,拔檀盧城,殺酋長,遷六百餘家於夫餘南烏川]”. “오천”이 어느 강물인지는 자료가 부족해 자세히 알 순 없지만, 고구려의 판도 내의 어떤 강물임은 틀림없을 것인데, 필자는 잠정적으로 이 강물을 지금의 이통하(伊通河) 상류 부분으로 생각한다.
고구려의 북부 강역을 고찰할 때 우리는 거란과 고구려 사이의 모순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려기』에 따르면, 소수림왕 8년(서기 378년) 가을 9월, 거란은 병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북쪽 변두리를 침범해서 “여덟 부락을 함락했다[陷八部落]”. 거란은 라오허강[老哈河]과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의 합류지점에 자리한 민족이었는데 당시 영토는 이미 지금의 하요하(下遼河) 북단의 서쪽 기슭 지역까지 달했고, 침입한 “여덟 부락[八部落]”은 응당 지금의 요북(遼北)지방의 개원(開原), 서풍(西豊)지역으로서 이 지역 역시 부여의 고지(故地)다. 광개토왕은 즉위한 지 첫 해(서기 392년) 9월에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해서 남녀 5백 구를 사로잡았으며, 또 (거란 수중에) 떨어진 본국 사람들 1만을 불러 잘 타일러 되돌아오게 하여[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17 빼앗긴 땅을 되찾았다. 대개 더욱 효과적으로 거락인의 칩입을 저지하는 것이야말로 북쪽 강역의 안정을 지키는 것이었던 바, 광개토왕은 영락 5년(서기 395년)에 또 몸소 대군을 이끌고 비려(碑麗)를 치고 부산(富山)을 지나 “염수(鹽水)까지 이르러 그 세 부락의 6~7백 천막집을 깨부셨고, 소, 말떼와 양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빼앗았다 [至鹽水上, 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勝數]”.18 여기서 “비려(“匹黎”라고도 쓰임)”를 거란의 한 부(部)로 보는 데는 학계에서 큰 이견은 없지만, 그 땅의 지리적 위치를 두고 여러 설이 분분하다. 그 중에는 태자하 상류지대설, 혼강 유역설, 혼하 유역설, 시라무렌강설, 적봉 서북설, 감숙성 서북설 따위가 있다. 어떤 사람은 고구려의 전쟁지역이 멀리까지 있는 점을 들어 고구려가 몹시 강대했음을 뒷받침한다고 했는데, 이런 무책임한 케케묵은 학문 닦기는 일종의 비뚜러진 불건전한 학문 닦기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과학적이지 못하고 택하기에 부족하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광개토왕이 정말로 군대를 이끌고 시라무렌강 보다 서쪽의 감숙성 서북까지 원정했었으되 모용선비와 백제국의 위협을 되돌아보지도 않았다면 확실히 너무나도 어리석다. 그러나 그는 결국 걸출한 정치가이자 군사전문가였고, 그의 출정은 너무 멀리까지는 이르지 않았었다. 필자는 비려의 위치를 두고 응당 지금의 요하 서부의 강평(康平), 법고(法庫), 그리고 창무(彰武) 일대에 있던 거란 부락으로 생각하는데 요하를 경계로 고구려의 북방 강역과 서로 떨어져 있었다. 또 “염수”란 응당 요하 서쪽 기슭의 어느 지류(예컨대 秀水河, 拉馬河 등)이고 전투는 요하 서쪽 연안에서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고고학계는 지금의 심양시 동북쪽 포하(蒲河) 상류지대에 있는 기반산(棋盤山)댐 북쪽 기슭의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 철령시 동북쪽 신하(汛河) 북쪽 기슭의 최진보산성(催陳堡山城), 그리고 서풍현(西豊縣) 량수진(涼水鎭) 연반하(碾盤河, 淸河 지류) 오른쪽 기슭의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등은 응당 고구려 중•말기의 산성이고, 그 수축연대는 마땅히 4세기 말로서 광개토왕이 요동을 차지한 무렵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이런 견해는 정확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들 산성은 주로 거란 등 초원민족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쌓았다고 본다. 고구려 역사상, 그 강역은 기본적으로 요하 일선을 넘어가지 못했다. 수나라때 요하 서쪽 기슭에 자리했던 “무여라(武厲邏)”는 겨우 1개 고립적인 거점 혹은 관찰초소에 불과했고, 수나라 군대가 뽑아버린 뒤로 다시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광개토왕의 북방강토 개척 위업에는 또한 부여 정벌도 있다.『비문』에 따르면, “(영락) 20년 경술년(서기 410년), 동부여는 본디 추모왕의 속민이었지만 언제부턴가 등돌리고 조공하지 않았다. (광개토)왕은 몸소 거느리고 가서 군대는 여성(餘城)에 이르니 여성은 머리가 (서로) 맞닿을 만큼 몰려와 굴복했다. (광개토)왕은 너그러이 봐줘서 드넓은 곳까지 왕의 은총을 두루두루 생각해 따르게 하고 군대를 되돌렸다. 또한 그 (왕의 은총에) 푹 빠져 관(군)을 뒤쫓아 온 이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였다 [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城駢首歸服. 王赦宥, 均追念王恩普處, 於是旋還. 又其慕化, 隨官來者, 味仇婁鴨盧……].” 광개토왕이 갔던 여성(餘城)은 바로 부여성(夫餘城)이고 응당 그 전기왕성(지금의 길림시)이지 딴 풀이는 모두 있을 수 없다. 이유는 대단히 간단하다. 이 곳에는 용담산산성(龍潭山山城), 동단산산성(東團山山城), 삼도령자산성(三道嶺子山城) 등과 같은 고구려산성이 있기 때문이다. 길림시 남쪽으로부터 고구려산성이 다음과 같이 또 있다.: 요원시(遼源市)의 용수산고성(龍首山古城), 공농산고성(工農山古城), 그리고 성자산고성(城子山古城),
4. 고구려 동북~동남 강역의 변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강역은 지금의 연변지역에서 한반도 동부지역까지 이르는 곳을 지칭하는데 바로 고대 옥저와 동예의 옛 땅이다. 고구려 5부가 형성된 이후 그 강역은 이미 동쪽으로 불함산(不咸山, = 백두산) 북쪽 기슭까지, 남쪽으로 살수(薩水, = 청천강) 상류지대까지 달했는데, 그 동남측엔 개마대산(蓋馬大山 = 낭림산맥)이 자리했다. 이와 같이해서 밖을 향해 발전할 조건이 갖추어졌지만, 고구려가 개마대산을 제외한 지역쪽으로 발전한 시기는 5부가 막바지로 형성되었을 때보다 조금 이르고, 그 계기는 호동왕자의 나들이였다.『려기』에 따르면, 서기 32년(고구려 대무신왕 15년, 東漢 建武 8년) 여름 4월에 고구려의 왕자 호동은 “옥저에서 노닐다가[遊於沃沮]” 뜻밖에 “낙랑왕 최리[樂浪王崔理]”와 만났다. 최리는 자신의 딸과 그 사이의 혼인을 허락했는데, 이를 이용해서 호동이 낙랑군을 습격하여 빼앗을 계책을 꾸몄다는 고사(故事)가 있었고, 고구려는 결국 서기 37년에 최리의 낙랑국을 멸망시켰다. 이 사건에 대한 학계의 정확한 이해는 보기 드문데 어떤 외국학자는 “최리의 낙랑국”을 구실로 중국이 한반도 내에 낙랑군을 설치했던 사실을 부정하기도 했다.20 필자는 소위 “최리의 낙랑국”이란 서기 25년에 낙랑동부도위의 한나라 지방관리가 낙랑군의 혼란을 틈타 “영동 일곱 현[嶺東七縣]”에서 세운 할거정권으로 보지만, 필자가 따로 전문적인 글에서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21 그렇지만 여기서 강조해 둘 것이 있다. 즉, 고구려는 최리의 나라를 거쳐가는 교통로를 통해 동옥저(한 무제가 세운 현도군의 옛 땅,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고, 비록 낙랑국을 멸한 후에도 이 땅은 동한(東漢)에게 넘어갔을지언정, 뒷날 고구려가 이 땅 쪽으로 개척하여 발전시키는 도로가 되었다. 수많은 흔적에서 드러나지만, 고구려인은 아주 일찍부터 5부 가운데 동부(지금의 북한 자강도 지역)를 통해 조금씩 한반도를 이해했었던 바, 호동이 옥저를 찾아간 길은 응당 뒷날 관구검이 파견한 왕기(王頎)의 추격을 피해 구려왕 위궁(位宮)이 달아난 도로이다.22 『려기』에 근거하면, 일찍이 서기 30년(대무신왕 13년) 가을 7월에 매구곡(買溝谷, 북옥저) 사람 상수(尙須)와 사촌아우 우도(于刀) 등이 고구려에 찾아와 투항했었고, 서기 47년(민중왕 4년) 9월에도 “동해사람
“책성”이란 이름을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를 두고 학계에는 얼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견해는 “책성(柵城)”이란 “치성(置城)”의 소릿값이 변한 것으로 보는데 그 까닭은 이러하다.:『삼국지·동이전』에, “북옥저”는 “치구루(置溝婁)”라고도 이름하는데 “구루(溝婁)란 (고)구려 이름으로 성(城)이란 뜻이다[溝婁者句麗名城也]”고 적혀있다. 따라서 “치구루(置溝婁)”란 “치성(置城, 즉 성을 설치한다)”이란 (뜻이 되고), “치(置)”와 “책(柵)”은 한가지 소릿값의 변형이다.23 그 둘째 견해는 “책성”이란 목책을 이용하여 수축한 성으로 보는데, “이런 성은 애초부터 돌덩이 혹은 흙으로 쌓은 성이 아니었지만 대량의 목책을 설치해서 방어와 구획의 주요수단이 되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24 필자는 전자의 설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되, 후자의 설은 단지 글자만 보고 대강 뜻을 짐작해서 억지로 갖다 붙여 놓은 말이라고 여긴다. 책성의 옛 자리가 지금의 어디인지를 두고도 학계의 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에는 북한의 종성(鍾城)설,25 경흥(慶興) 및 경성(鏡城)설,26 러시아의 쌍성자(雙城子)설,27 우리나라의 혼춘(琿春) 성장립자성(城牆砬子城)설,28 혼춘 팔련성(八連城)설,29 혼춘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설,30 혼춘 살기성(薩其城)설,31 연길(延吉)일대의 세 성(城子山山城, 興安古城, 그리고 河龍古城)설32 등이 있다. 필자는 책성을 살기성(沙齊城 또는 薩奇城으로도 쓰임)으로 보는 설을 채택할 만하다고 보는데 그 주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성의 이름을 볼 때 “薩”이나 “沙”는 “柵”의 소릿값과 가깝다. 또 “薩其(奇)”와 “柵”에 내재된 잇닿음은 “朱理眞”과 “肅愼” 혹은 “女眞”과 마찬가지로 모두 가까운 소릿값으로 다르게 옮겨 적은 것이다. 즉, 본디 소릿값을 빨리 혹은 느리게 읽을 때의 음절을 문자로 바꿔 늘이거나 줄여 옮겨 적은 것이다. 둘째, 『려기』에서 “왕이 동쪽으로 책성을 돌아보고 ……. 마침내 공적을 바위에 새겨썼다 [王東巡柵城……遂記功於岩]”는 말을 미루어보아 살기성은 산성이다. 책성이 혼춘 경내에 자리함은 의심할 바 없으며, 결코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에 있을 수 없다.
고구려의 옥저 점령에 관한 상황은 고고학적으로 진작에 실증되어 있다. 고고학계에서 제공한 믿을 만한 자료를 보면, 고구려 옛 성터는 연변의 연길(성자산산성, 흥안고성, 하룡고성), 용정(土城屯古城, 仲坪古城), 혼춘(石頭河子古城, 살기성, 온특혁부성) 일대에 분포하지만 이들 현과 시에서 고구려 유물은 결코 분명치 않는데, 이는 북옥저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통제가 상당히 제한적이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른바 북옥저란 고고학계에서 말하는 “단결(團結)- 끄로우노브까[克羅烏諾夫卡]문화” 분포구역인데, 이곳은 우리나라의 연변지역 및 무단강[牡丹江]지역 동부로부터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 및 한반도의 동북지역까지 걸쳐있다. 한반도 동북지역의 고구려 옛 성은 주로 함경남도 북청(北靑)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데 청해고성(靑海古城), 거산산성(居山山城), 용전리산성(龍田里山城), 안곡산성(安谷山城) 등과 같다.
사서의 기록을 미루어 보아 동예(東穢)는 비교적 뒤늦게 고구려 통치구역으로 편입되었다.『삼국지·동이전』에 따르면, “(예)는 한나라 말에 (고)구려에 편입되어 딸렸다. [(濊), 漢末更屬句麗]”. 그런데『후한서·동이전』에 “(元初 5년, 고구려는) 또 예맥(穢貊)과 함께 현도(군)을 쑤시고 화려성(華麗城)을 쳤다 [復與穢貊寇玄菟, 攻華麗城]”고 적혀있다.『려기』에도 역시 태조왕 66년 (서기 118년, 동한 安帝 원초 5년) “여름 6월, (태조)왕과 (예)맥이 한나라의 현도를 덮치고 화려성을 쳤다 [夏六月, 王與(濊)貊襲漢玄菟, 攻華麗城]”고 실려있다. 여기서 “(예)맥”은 응당 옥저를 가리키는 말일 테지만, “화려성”은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영흥(永興) 일대에 자리했거니와 본디 “영동 일곱 현[嶺東七縣]”의 하나였는데 바로 동한 낙랑군 지역의 “현후(縣候)” 소재지다. 이로부터 알 수 있지만, 원초 5년 때 화려성은 고구려의 세력범위 안에 아직 들어가 있지 않은 채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추 몇 년 지나서, 끝내 동예는 고구려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삼국사기·신라본기』(이라『라기』로 약칭)에 따르면, “(지마이사금) 14년 (서기 125년, 동한 안제 延光 4년) 봄 정월,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에 크게 쳐들어와 벼슬아치와 백성을 죽이거나 빼앗았다. 가을 7월, 또 대령책(大嶺柵)을 덮치고 니하(泥河)를 지나갔다 [十四年, 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여기서 “말갈(靺鞨)”은 응당 북옥저와 동예를 지칭하는 것이다. 동예는 진작에 고구려에 귀부했기에 옥저와 한몸을 이루었고, 이리 되고 나서야 말갈은 신라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니하”가 지금의 어떤 물줄기이지를 두고, 학계의 의견은 한가지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지금의 함경남도 용흥강(龍興江)이라고 잘못 이해했다. 이런 이해와 같다면 곧 고구려의 커다란 땅덩어리가 사라져버리므로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니하가 도대체 지금의 어느 곳에 있었는지 다시『라기』가 제공하는 아래의 자료를 보기로 하자. (1) 눌지왕 34년(서기 450년, 고구려 장수왕 38년) 가을 7월,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悉直)이란 벌판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성(何瑟羅城) 성주 삼직이 병사를 내보내 덮쳐 그를 죽였다 [高句麗邊將獵於悉直之原, 何瑟羅城主三直出兵掩殺之]”. (2) 자비왕 11년(서기 468년, 장수왕 56년) 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덮쳤다. 가을 9월, 하슬라 사람으로서 나이가 15살 이상되는 이를 징발하여 니하에 성을 쌓았다 [高句麗與靺鞨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 (3) 소지왕 3년(서기 481년, 장수왕 69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서 호명(狐鳴)을 비롯한 일곱 성을 빼앗았다. 또한 미질부(彌秩夫)에 군대를 나가게 했다. 우리 군대는 백제 및 가야의 원군과 함께 길을 나눠 저들을 막았다. 놈들이 패하여 물러나는 것을 뒤쫓아가 쳐서 니하 서쪽에서 깨부셨다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分道御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신증동국여지승람』(이하『승람』으로 약칭)은 미질부의 위치는 경상(북)도 興海(지금의 흥해)일 것이고, 실직성의 위치는 강원(남)도 三陟(지금의 삼척)일 것이되, 하슬라는 결코 삼척 북쪽에 자리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하필라성은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33이라 했는데, 이 또한 꽤 일리가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지만, 니하는 삼척지역의 오십천(五十川)로 비정할 수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34 이로부터 우리는 알 수 있지만, 2세기 초부터 5세기 말까지 고구려 및 말갈이 신라와 접경하는 곳은 기본적으로 동예 시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짚어 두겠지만, 조위(曹魏)의 관구검은 고구려를 원정할 때 현도태수 왕기(王頎)와 낙랑태수 유무(劉茂)를 파견했으며, 대방태수 궁준(弓遵)을 시켜 “영동 일곱 현[嶺東七縣]” 지역에서 지나가는 고구려왕 위궁(位宮)을 차단하고 원래의 남옥저 및 동예 지역을 다시 한번 고구려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했다. 북옥저 또한 왕기의 토벌로 활기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고구려의 세력은 대대적으로 쇠약해졌다. 이로 말미암아 읍루 사람의 남하를 불러일으켰다. 러시아 고고학계가 제공한 자료를 보면 읍루가 남긴 뽈체[波爾采]문화가 연해주 지역에서 북옥저가 남긴 끄로우노브까문화 위를 덮어 포개지게 되는데, 이 현상은 읍루 사람의 남하로 보기에 너끈하거니와 이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본문에서 전술했지만, 숙신(읍루) 사람은 일찍이 고구려와 충돌했던 바 고구려는 숙신의 6백 여 가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이주시킨 사건도 있었는데, 이 또한 문헌 측면으로부터 읍루 사람의 남하를 실증하는 사건이 된다.『진서·숙신전』은, “숙신은 읍루라고도 이름하는데, 불함산(지금의 백두산) 북쪽에 자리한다 [肅愼一名挹婁, 在不咸山北]”고 했는데 이 무렵에 이미 읍루 사람이 연변지역까지 도달했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고고학계가 제공한 자료로 미루어 보아, 동진(東晉) 시기에 고구려는 오늘날 연변지역의 동남부에 읍루 사람의 남침을 방비하기 위해 “변장(邊牆)”, “장성(長城)”을 쌓았다. 그 중 한 가닥은 혼춘평원 북부의 구릉 위에 자리하는데, 동쪽의 합달문향(哈達門鄕) 태평촌(太平村) 서산(西山)부터 시작해서, 서쪽을 향해 뻗어가 혼춘 북부의 산악지대를 가로질러, 영안향(英安鄕) 관문저자(關門咀子) 서산(西山)까지 곧장 이르니, 총 길이눈 약 25 km 이다. 또 다른 가닥이 화룡(和龍)과 연길시의 북부 산약지대에 꼬불꼬불 있는데, 서쪽의 화룡 팔가자진(八家子鎭) 풍산(豊産)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용정 장안진(長安鎭) 계림(雞林) 북부까지 이르니, 총 길이는 100 여 km 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지만, 이 무렵 읍루 사람 남하의 최전방은 이미 지금의 연길 및 혼춘 이북지역까지 이르렀었다. 읍루가 발전해서 남북조 시기의 물길(勿吉)로 되었을 무렵에 정세가 또 변하게 되었다.『위서·물길전』에 따르면, 서기 475년 (북위 延興 5년, 고구려 장수왕 63년)에 물길은 이미 “고구려의 열 (부)락 [高句麗十落]”을 빼앗은 채로 있었고, 아울러 몰래 백제와 짜고 “물길[水道]로부터 힘을 합쳐 고구려를 차지하려고 [從水道幷力取高句麗]”했었다. 이 기사를 두고 학계의 이해는 일치하지 않지만, 필자는 양보륭(楊保隆) 선생의 견해에 동의하는데 즉, “고구려의 열 (부)락[高句麗十落]”은 지금의 길림시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지금의 혼춘 및 연길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다.35 바꾸어 말하면, 물길 사람은 이미 고구려의 통치구역인 도문강(圖們江)유역을 공격하고 있던 것이다. 물길이 백제와 짜고 고구려를 욕심냈던 문제를 두고 학계는 대체로 이것을 미심쩍어 한다. 왜냐하면 물길과 백제 사이는 거리상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있어 연맹을 결성하여 함께 고구려에 대응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물길과 백제의 비밀 공모 사건은 실제로 존재했었다. 물길[水道]로부터 힘을 합쳐 공격하겠다는 말은 쌍방이 반드시 한줄기 전선에서 연합작전을 펼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응당 두줄기 전선에서 물길[水道]로부터 협공하여 고구려에 공동대응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길(勿吉)은 도문강 혹은 동해[일본해]로부터 한반도의 옥저 고지(故地)을 공격하되 백제는 한반도의 서해안으로부터 고구려지역을 공격하는 것이다. 실제로 뒷날 물길 사람은 연변 동부 및 한반도 동북부지역을 차지했었고, 이 지역은 물길 및 뒷날의 말갈 속말부(粟末部)와 백산부(白山部)의 통제지역이 되고 말았다. 일부 학자는 백산부의 위치를 지금의 연변지역으로 보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고 했지만, 만약 그러하다면, 말갈의 일부 땅은 사라지고 말것이다. 필자는 동만륜(董萬侖) 동지의 의견36에 동의하는 바, 백산말갈의 분포지역은 응당 지금의 한반도 동북부이고, 속말부의 중심지역은 맨 처음엔 지금의 돈화(敦化)일대였고 나중엔 길림시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의 숙신 정벌 여부 문제를 두고도 학계의 견해는 역시 다르다. 그렇다해도,『비문』의 영락 8년 조 기사에서 “백신(帛愼)”이란 말은 숙신을 지칭하므로 고구려가 저들의 땅을 약탈했었음을 증명하기엔 너끈하지만 이 땅을 점령까지 했는지 뒷받침하진 않는다. 흑백을 가리지 못하고, 광개토왕이 갔던 곳을 모두 관할하는 영토로 보는 사고방식은 의심할 바 없이 그 자체가 역사연구 문제에 속한다. 광개토왕 시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단단대령(單單大嶺) 이동 지역을 견고히 했었음은 명백하게 틀림없다.『려기』광개토왕 8년(서기 409년) 조에 따르면,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禿山)을 비롯한 여섯 성을 쌓아 평양의 민호(民戶)를 이주하게 했고, 8월엔 (광개토)왕이 남쪽을 돌아보았다 [秋七月,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八月,
5. 한반도 서부 고구려 강역의 신축
고구려 5부의 하나인 동부는 응당 지금의 자강도 지역에 있었고, 때문에 고구려의 영토는 한반도 쪽으로 대단히 일찍부터 확장하고 있었다. 한반도 쪽으로 발전하면서 먼저 한반도의 동부의 비교적 낙후한 옥저 및 동예를 차지했지만, 한족(漢族)이 살고있는 발달한 지역인 서부 쪽 확장은 마땅히 서진(西晉) 말기부터 시작되어야 하겠다. 고구려는 중원에서 일어난 “8왕의 난”, “영가(永嘉)의 난”이란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욱 서진의 동북 4군을 빈번하게 공격했다. 서기 313년(미천왕 14년) 겨울 10월, 고구려는 “낙랑군에 쳐들어가 남녀 2천 여 구를 사로잡았다 [侵樂浪郡, 虜男女二千餘口]”. 바로 이 해에, 해를 거듭하며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고전하던 요동(사람) 장통(張統)은, 낙랑태수 왕준(王遵)의 건의에 따라, 그 사람들 1천 여 가를 데리고 달아나 요서에 웅거하고 있는 선비의 수령 모용외(慕容廆)에게 투항했고, 이리하여 낙랑군은 요서에 교치(僑置)되어 장통은 태수가, 왕준은 참군사(參軍事)가 되었다.38 314년 가을 9월에 고구려는 또한 “남쪽으로 대방(군)에 쳐들어 갔고[南侵帶方]”,39 대방(군) 역시 요서지역에 교치되었다. 이로부터 420 여 년에 걸친 중원의 한반도 통치는 종말을 고했고, 대신해서 중국의 소수민족 할거정권인 고구려가 이 땅을 관할했다. 문헌기록을 미루어 보아, 낙랑과 대방 두 군의 이전 뒤, 고구려와 한반도 서남부에 있던 백제의 첫번째 무력충돌은 서기 369년(백제 근초고왕 24년, 고구려 고국원왕 39년)에 치양(雉壤, 지금의 황해남도 동남지역)에서 벌어졌다.40 시간적으로 볼 때 이 해는 낙랑 및 대방이 이전된지 벌써 50 여 년이 흐른 뒤인데, 그렇다면 반세기 동안 이 두 군(郡)의 고지(故地)는 도대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을까? 필자는, 사서엔 적혀있지 않지만 고고학이 제공한 자료를 통해 완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1단계는, 본래 거류민으로서 이 땅에 있던 중국인[漢人]과 새로 이주해온 중국인(예컨대 冬壽 등)이 두 군(郡)의 옛 땅에서 한 “자치사회(自治社會)”를 형성했고, 다시 말하면 이 땅은 변함없이 중국인 스스로가 관리를 하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요동 쪽 일에 바빴을 따름이었고, 백제는 내부 치정 및 신라와의 우호적 왕래에 바빴었다. 이 점에 대해서 필자는 따로 글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선 길게 서술하지 않겠다. 고구려와 백제의 첫번째 무력충돌이 일어난 지점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지만, 당시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낙랑과 대방의 옛 땅을 대부분 영토로서 점령했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이 두 군의 옛 땅을 두고 두 번째 전쟁을 벌였는데 고구려는 패배를 많이 먹었다. 서기 371년에 고구려는 또 패하(浿河, 지금의 禮成江)에서 싸움에 졌고, 백제왕은 태자와 함께 “정예병 3만을 내어 고구려를 쳐 평양성(지금의 평양)을 공격했다. (고구)려왕 사유(斯由)는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백)제왕은 군대를 물러 돌아와서 도읍을 한산성(漢山城, 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 옮기기로 했다. [帥精兵三萬侵高句麗ㅡ 攻平壤城, 麗王斯由中流矢而死, 濟王引軍而退, 幷將首都移至漢山城].”41 그 후, 쌍방은 변함없이 “줄다리기[拉鋸戰]”를 벌이며 서로 승패를 주고 받았지만 광개토왕 집정 시에 이르러 정세가 급변했다. 광개토왕은 먼저 백제를 서기 392년에 정벌했다. 그는 병사 4만을 이끌고 백제의 북녁을 공격하여 석현(石硯, 지금의 황해도 開豊 경내)를 비롯한 10 여 성을 함락했고, 한수(漢水) 이북 땅은 고구려에 의해 점령되었다. 같은 해 겨울 12월, 고구려는 또 교동도(喬桐島, 강화도 서해)에 자리한 관미성(關彌城)을 공략했다.42 서기 396년 광개토왕은 수군을 몸소 이끌고 백제의 남녁 경내에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고 땅을 약탈하며 백제 수도 가까이 바싹 죄어가서 백제왕을 굴복시키니,43 그 강역은 한강 북쪽 기슭까지 넓어졌다. 이후 백제 또한 병마(兵馬)를 대대적으로 모우고 일본과 손을 잡아서, 한편으론 고구려에 대항하고, 또 한편으론 신라로 쳐들어갔다. 광개토왕은 신라의 요청에 응하여 서기 400년(영락 10년)에 왜병(倭兵)을 크게 물리쳤으며, 404년(영락 14년)에 광개토왕은 또 몸소 대군을 이끌고 대방(帶方) 경계에서 왜와 백제의 연합군을 크게 이겼으며, 407년에도 광개토왕은 보•기병 5만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전군(全軍)을 전멸시키고 회군하면서 백제의 여섯 성을 연거푸 쳐부셨다.44 광개토왕 재위 무렵 자주 백제에 대해 병사를 일으켰지만 그 강토는 결코 한강을 넘지 못했었다.
서기 427년(장수왕 15년)에 고구려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는 고구려 역사상 획기적인 대사건으로서 고구려의 전략과 목표의 중대한 전환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남진에 몰두하여 한반도를 두고 백제 및 신라와 힘을 다해 다투었다. 마침내 서기 475년(개로왕 21년) 장수왕은 3만 대군을 몸소 이끌고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공략해서 백제왕을 죽이는 바람에 그 아들 문주왕이 즉위하여 도읍을 웅진(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옮겼다. 그러나 뒷날 백제는 다시 한성을 되찾았고, 동성왕은 483년 봄 2월에 한산성에 사냥을 나가 군민(軍民)을 위로하기까지 했었다.45 고구려 남쪽 강역의 전성기는 마땅히 장수왕 집정 말기에서 문자명왕 재위 초기까지의 세월이다.『위서·고구려전』에 따르면,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가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고구려의 “남녁은 조그만 바다[小海]까지[南至小海]”라고 말했고, 같은 책『백제전』에도 백제국은 “고구려 (도읍에서) 1천 여리 떨어져 있는데 조그만 바다[小海]의 남쪽에 있다 [去高句麗千餘里, 處小海之南]”고 했다. 학계에서는 이 “조그만 바다[小海]”를 두고 지금의 아산만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이는 옳다. 우리가『승람』을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고구려의 최남단은 지금의 강화(江華), 인천(仁川), 남양(南陽), 직산(稷山), 진천(鎭川), 괴산(槐山), 연풍(延豊), 영주(榮州), 청하(淸河)를 잇는 선인데, 경기도 전역, 충청남북도 북부, 그리고 경상북도 동북부 대부분이 포함된다. 1979년에 한국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 마을에서 발견된 고구려 문자명왕 시기에 세운 고구려비는 고구려가 넓힌 땅의 유력한 물증이다. 그러나 역사 전개는 복잡한 것이고, 고구려의 남쪽 강역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가 발생했었다. 백제의 분발과 신라의 빠른 발전으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남쪽 강역 또한 뒷날 줄어들고 말았다.
고구려가 타당한 전성기에 이르러 기세가 등등할 때, 백제와 신라는 자기생존과 발전을 위해서 한 때 연합하여 고구려에 공동대응 했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기 484년(소지왕 6년, 동성왕 6년, 장수왕 72년)에 나제 연합군은 모산성(母山城, 전라북도 동남 天嶺郡 雲峰 지방)에서 고구려를 쳐부셨고46, 494년(소지왕 16년, 동성왕 16년, 문자명왕 3년) 가을 7월에 고구려는 “신라사람들과 살수 벌판에서 싸웠는데 [與新羅人戰於薩水之原]”, 신라사람들이 “견아성을 지키고 있는 것을[保犬牙城]”, 고구려 군대가 포위했지만, 백제가 “병사 3천 여를 보내 신라를 거들자[遣兵三千援新羅]”, 고구려 군대는 물러났다.47 여기서의 “살수(薩水)”를 두고 어떤 학자는 한반도 서북부의 살수(지금의 청천강)와 똑같이 취급하고, “견아성(犬牙城)”을 청천강 왼쪽 기슭에 자리한 안주군(安州郡) 안주읍(安州邑)의 고구려 안주성(安州城)으로 비정했었다.48 필자는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신라 및 백제 사람이 북상하여 고구려 수도 평양 이북의 청천강 남쪽 기슭에서 고구려와 전투를 벌였다고 상상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살수”의 위치는 마땅히 당시의 시대배경에 연계하여 한강 유역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삼국사기·지리지』와『승람』을 근거로 “청주(淸州)”, “청주현(淸川縣)”, “청주리(淸川里)”, “청주(淸川)”, 그리고 “살매현(薩買縣)” 등 지명의 어떤 잇닿음을 고증하고, 세 나라가 전투를 치른 “살수 벌판[薩水之原]”이란 응당 오늘날 보은(報恩, 충청북도 남부)을 거쳐 흐르는 “청천(淸川)”지방이라고 했다. 필자는 이런 견해가 사실과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소위 “살수”란 오늘날 충청북도 경내에 흐르는 한강의 지류인 달천(達川)이고, “견아성”은 응당 달천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벌써 5세기 말에 삼국은 지금의 충청북도 지역에서 영토쟁탈전을 전개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역사 기록에 근거하면, 서기 495년 고구려는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 首陽山城)을 포위 공격한 바 있으나 나제 연합군에 의해 격퇴되었고,49 502년엔 백제가 병사 5천을 일으켜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황해북도 平山郡 南山城里 예성강 서쪽 기슭의 太白山城, 城隍山城이라고도 함)를 기습했으며50,507년엔 고구려는 고노(高老) 장군을 보내 말갈과 함께 한성(漢城, 백제의 옛 도읍, 지금의 경기도 광주)를 치기로 꾀하여 “횡악(橫岳) 아래로 나아가 주둔했으나[進屯於橫嶽下]” 백제에 의해 격퇴되었고51, 523년 고구려는 패수(浿水, 지금의 예성강)까지 이르렀으나 백제의 1만 기병에 의해 격퇴되었으며, 548년 “고구려왕 평성(平成, 양원왕)은 (예)•말갈과 짜고 백제의 한강 북쪽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했지만 [高句麗王平成與(濊)靺鞨謀攻百濟漢北獨山城]” 나제 연합군에 의해 격퇴되었다.53 상술한 정황에서 알 수 있지만,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부까지,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공동 공격 아래에서 고구려는 점차 패퇴하였고, 백제는 한강 이남의 땅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한강 이북의 어느 지방까지 점령하면서 힘껏 고구려와 싸웠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가 거둔 승리의 성과는 머지않아 상당한 부분이 곧 신라가 독차지하고 만다.
『라기』에 따르면, 서기 550년(진흥왕) 11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다툼을 틈타 어부지리를 취해 교묘하게 도살(道薩)과 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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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郭毅生:「兩漢魏晉時期東北地方史資料」,참조 孫進己等『東北歷史地理』第一卷.
24. 李宗勳:「也談高句麗柵城遺址」,『史學論叢』,延邊大學出版社,1999年,延吉.
25. 이 설의 주장자는 조선학자 丁茶山. 참조「大韓疆域考」,『丁茶山全書』,漢城,弘益人間出版社.
26. 慶興說의 주장자는 일본인 吉田. 참조 『日韓古史斷·中古紀』第3章; 鏡城說의 주장자는 일본인 松井 등,참조 『渤海五京考』.
27. 이 설의 주장자는 일본인 鳥居龍藏,참조 『東北亞搜訪記』第13章「尼古里司克之探訪」.
28. 참조「黑龍江古代民族史綱」175頁,黑龍江文物出版編輯室,1982年;孫進己等『東北歷史地理』第一卷.
29. 이 설을 지지하는 이는 몹시 많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는 齋藤甚兵衛(참조 『半拉城渤海遺跡調查』), 金毓黻(참조 『渤海志長編』), 鳥山喜一(참조 『渤海東京考』),『中國歷史地圖集釋文彙編·東北卷』의 편집자를 비롯한 북한학자
30. 이 설의 주장자는『延邊文物簡編』의 편집자 및 嚴長祿(참조「對主要高句麗古城的考察」,1989年『延邊大學朝鮮學國際學術討論文集』、方學鳳(참조 『渤海遺址及其硏究』,延邊大學出版社,1992年)등.
31. 이 관점의 학자는 李健才선생,참조「琿春渤海古城考」,『東北史地考略』,吉林省文史出版社1986年版; 참조「關於高句麗歷史地理的幾個問題」未刊稿,轉引自『東北歷史地理』第一卷.
32. 이 관점은 학자는
34.『延邊文物簡編』,延邊人民出版社,1998年,延吉.
35. 楊保隆:「勿吉地域西南部邊至考」,『北方文物』1985年5期.
36. 董萬侖:『東北史綱要』,黑龍江人民出版社,1987年,哈爾濱.
37.38.『資治通鑒·晉紀·孝湣上』.
41.42.45.49.50.51.52.53.『三國史記·百濟本紀』.
46.『三國志·新羅本紀』.
첫댓글 지도를!!! 뭔강인데 하나도 제대로 모르겄슈~
참 어이없는 주장이군요. 왕조사관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군요.
지도 라도 ㄱ-;
표현이 참.. 부여를 깨부시고 케케묵고 -ㅁ- 요동군과 현토군을 떨구고 .. 어이업고 케케묵은 주장,반박할 가치도 없는 주장, 등등등 -ㅁ-
우리도 어서어서 우리중심의 역사를 써야 할텐데
어이구..........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빠뜨린것이 하나 있다면 우리가(북한과 남한) 같은 국가라 생각하는 것이다~ (민족개념 포함된것같은) 북한의 학설을 비판하는것은 곧 한국 학설을 비판하는 것이다 ~ ! 한국인 한테 니네나라 지도 그려봐라 해봐라 한반도를 그리지 남한만 그리나
강역이라는데 그림이 없어요
저기.. 유자민이 조선족???아니면 떼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