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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화화(柳柳花花)
버들버들 꼿꼿이라는 뜻으로, 버들버들 하던 몸이 꼿꼿해졌으니 죽었다는 풍자의 말이다.
柳 : 버들 류(木/5)
柳 : 버들 류(木/5)
花 : 꽃 화(艹/4)
花 : 꽃 화(艹/4)
김삿갓이 산천을 주유하며 떠돌던 어느날, 날이 저물었는데, 하루 온종일 굶어 배가 등짝에 달라 붙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인가는 찾을 수 없어 산중을 헤맸다.
밤이 깊어 삼경이 지난 시각에 멀리 불빛이 아스라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가 문을 두드리려니 울음소리가 흘러 나온다. 주인을 찾으니 모친상을 당한 상주가 나왔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청하는 김삿갓에게 "저는 본디 신분이 천하여 글을 몰라서 부고 한 장 쓸줄 모릅니다. 그래서 모친이 돌아가신 것을 알리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시장하실테니 없는 찬이나마 식사 대접은 하겠으니 제 어머니 부고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거야 어려운 일 아니니, 내가 써 주리라' 하고는 차려준 밥을 허겁지겁 들은 김삿갓. 그러나 막상 여러장 부고를 쓰려니 답답해 졌다. 그래서 꾀를 낸것이 어차피 글을 모르기는 상을 당한 집이나 부고를 받는 집이나 매한가지 일터라는 생각에 부고를 써 주었는데 이랬다.
'년월일시 류류화화라.'(柳柳花花)
풀이를 한다면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버들버들 꼿꼿이라.' 즉 버들버들 하던 몸이 꼿꼿해졌으니 죽었다는 풍자다.
버들버들 움직임은 불안정하고 꼿꼿하게 뻗은 것은 안정되어 있다. 살아가는 세상에 마냥 안정되거나 확실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유유하려는가? 아니면 화화하려는가?
◼ 유유화화(柳柳花花)
뜻글자인 한자의 자획을 하나하나 분해해도 뜻이 통한다. 글자를 깨뜨린다고 파자(破字)라 하는데 한자 수수께끼로 애용되었다. 오얏 리(李)를 나눠 木+子가 되고 나라 조(趙)를 분해하여 走(주)+肖(닮을 초)로 하는 식이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창업할 때 목자득국(木子得國), 중중 때 조광조(趙光祖)를 모함하여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파자도 이용하고 우리말의 훈으로도 뜻이 통하게 하여 익살이 철철 넘치게 하는 희작시(戱作詩)도 재미있다.
파자와 희작시의 천재는 아무래도 김삿갓이다. 그는 어떤 노인이 사망했을 때 부고장에 이렇게 썼다. "버들버들하다가 꼿꼿해졌다(柳柳花花)."
김립(金笠)이라고도 한 김삿갓은 방랑시인이었다. 본명 김병연(金炳淵)인 조선 후기의 해학시인으로 호는 난고(蘭皐)이다.
그가 하늘을 볼 수 없다면서 삿갓을 쓰고 유리걸식한 이유가 애틋하다. 조부가 평안도 선천(宣川)부사로 있었을 때 홍경래(洪景來)의 난에 맞서지 않고 투항한 관계로 역적 집안이 됐다.
어릴 때 도주하여 내력을 알 수 없던 병연이 백일장에서 부사의 죄상을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준엄한 필치로 꾸짖었다. 당당히 장원을 했지만 모친이 바로 조부라고 일러주는 바람에 천륜의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주유천하했다.
김삿갓이 어느 잘 사는 집에 식사 때 쫓겨나서는 주인을 향해서 정구죽천(丁口竹天) 월시화중(月豕禾重)이라 욕했다. 조합하면 가소(可笑)롭고 욕심 많아 돈종(豚種), 즉 돼지라 한 것이다.
파자 말고 기막힌 희작시 한 편을 보자. 부분을 우리말 훈으로 새겨야 한다.
世事熊熊思 人皆弓弓去
세사 일을 곰곰 생각해 보니, 남들은 모두 활활 가는데,
我心蜂蜂戰 我獨矢矢來
내 마음 벌벌 떨기만 하며, 나 홀로 살살 오가는구나
言雖草草出 世事竹竹爲
말들은 비록 풀풀 뱉지만, 세상일은 데데하기 그지없도다
心則花花守 前路松松開
마음을 꼿꼿이 지키면, 앞길이 솔솔 열리리
전해지는 희작시를 대부분 김삿갓의 작품이라 하지만 다른 것도 포함된 것이 많다고 한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의 화초)
시에서는 토 달기의 백미를 감상할 수 있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를 똑 같이 네 번 반복하여 해석을 달리 한다.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다고 하나,
오랑캐 땅이라고 어찌 화초가 없겠는가,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다 하지만,
오랑캐 땅엔들 어찌 화초가 없으리오.
◼ 김립(金笠) 김병연(金炳淵)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자는 성심(性深). 호는 김립(金笠), 난고(蘭皐)이다. 김삿갓이란 이름은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삿갓을 쓰고 다니며 방랑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 유년 시절
김삿갓이란 이름은 그가 떠돌아 다니면서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 '김립(金笠)', 바로 말해 김삿갓이라 대답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김병연이 '김삿갓'이 된 직접적 원인은 그의 할아버지였던 무신 김익순에게 있다.
그가 고작 5~6살이던 1811년 신미년부터 다음해 임신년 봄까지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당시 선천 부사 5품 관료인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붙잡힌다. 그는 홍경래에게 구걸하며 항복해 가족들은 모두 목숨은 부지했으며, 김삿갓의 삶은 이런 파란만장한 배경에서 전개된다. 실록을 살펴보면 그 과정이 복잡하다.
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곽산(郭山)에서 출전했던 장령(將領)이 보고하기를, '15일 이른 아침 곽산에서 출발하여 신시(申時)에 선천부(宣川府)에 이르렀더니, 모여 있던 적도들은 관군이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서 이미 모두 무너져 흩어졌고 고을 아래 사는 백성들은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았기에 대군(大軍)이 우선 잠시 본부(本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의 첩보(諜報)를 받아 보았더니, '본부(本府)의 영병장(領兵將) 허항(許沆)과 김견신(金見臣) 등이 서림성(西林城)에서 철산(鐵山)으로 진병(進兵)하였더니, 1대(隊)의 적도들이 소문을 듣고 흩어졌으며, 운암성(雲暗城)에 모여 있던 적들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허물어졌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계속 진에 머물고 있는 장령(將領)들의 보고를 받아 보았더니, '선천(宣川)의 전 부사(府使) 김익순(金益淳)이 적괴(賊魁)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진의 앞에 왔으므로, 순무 중군(巡撫中軍)이 잡아들여 공초(供招)를 받은 뒤 칼을 씌워 영문(營門)으로 압송하였습니다' (후략)"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1월 17일(신묘) 4번째기사
이 기사를 본다면 김익순이 홍경래의 참모 김창시의 목을 잘라서 왔기 때문에 비록 항복한 죄는 크지만 어느 정도 용서받을 수 있고 막장테크를 타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전략) "적병이 처음 일어났을 때 방어하는 계책을 본받지 않은 채 흉적의 선봉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항서(降書)를 보냈고, 군관(軍官)의 가짜 첩문을 태연히 받았으며, 인과(印顆)와 부신(符信)을 명령대로 싸보냈습니다. 그리고 날뛰는 마음을 품고 만나기를 청하여 공손히 문안 인사를 나누고, 대청에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말미를 받고 돈과 쌀을 받았으니, 나라를 배신하고 적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죽음을 면할 계책을 내어 적의 수급(首級)을 사서 수기(手記)를 꾸며 주었으니, 흉악하고 패려한 뱃속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모반 대역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9일(신사) 1번째기사
여기에 보면 스스로 투항해서 홍경래가 준 벼슬을 받은 것 뿐 아니라 수급을 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전말이 이러하니 평안 병사가 대역 부도 죄인(大逆不道罪人) 조문형(趙文亨)을 효수하였다고 아뢰었다.
조문형이 애초 적도가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베어오자 죄인 김익순(金益淳)이 천금(千金)을 주겠다는 수기(手記)로 그 수급을 억지로 팔게 하고는 와서 바쳤는데, 도의 조사에서 그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19일(신묘) 1번째기사
다시 말해 항복한 것 때문에 처벌 받을 것이 두려워 조문형이 수령 김창시의 목을 잘라온 것을 돈을 주고 사서 자기가 자른 것으로 속였으니, 그야말로 기군망상(欺君罔上)의 막장테크다.
당시 기준으로는 임금을 속이면 곱게 죽여주는 것(사약)이 은사가 될 지경이니, 본인이 처벌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손까지 벌을 받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가문 전체가 노비로 전락하는 건 면하겠지만 16세 이상 남성들은 사형당하거나 아예 신분 자체가 격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가문이 가문인데다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게 고려되어 벼슬을 받았는데 적극적이 아니라고? 동정론이 대두되어서 조정은 김익순만 왕을 속인 죄로 처형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벼슬길만 막는 선에서 끝냈다.
할아버지의 죄는 그대로 끝났지만, 김병연의 아버지 김안근은 수치심에 의해 다음해 고작 39살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홀어머니(함평 이씨) 아래서 자란 김삿갓은 몰락했어도 양반집 자제였고, 그것도 그 유명한 안동 김씨, 그 가운데도 성골급인 장동 김씨 계통이다.
가문발 덕분에 멸문지화의 위기에 몰렸음에도 조부 김익순이 처형되는 걸로 끝나고 일가의 몰살은 면한 것이다. 덕분에 머리 만큼은 꽤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2. 왜 삿갓을 썼을까?(1)
야사에 따르면 그가 성장하여 16세가 되었을 때, 과거를 본 적이 있다고 하며 이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 8권에도 소개되었다.
해당 과거는 중앙에서 임금이 주재하는 대과가 아니라 거주하는 지역의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시'로 대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봐야 할 시험이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의 시제가 김익순을 논박하라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김익순의 잘못을 이리저리 적어 제출하였다.
그 때 썼다는 시에 따르면 "선대왕이 보고 계시니 넌 구천에도 못 가며,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라. 네 치욕은 우리 동국 역사에 길이 웃음거리로 남으리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여간 글솜씨는 있어서 급제해서 즐겁게 돌아와서 자랑하다가 어머니에게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데… 하필이면 문제에 나온 그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화병으로 죽게 할 정도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전국구 역적인데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얼씨구나 하고 자기 할아버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답안지를 적어냈다는 것이다.
멘붕한 김병연은 무려 4년간 폐인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다가 20살 되던 해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그 폐인처럼 있던 시기에 혼인했는데, 아내 장수 황씨 황철주(黃哲周)의 딸이 절세미녀라 소문이 자자했던지라, 이것도 조용히 방구석에서 지내려던 김삿갓에게는 여간 스트레스가 미치지 않았나 싶다.
다만 다른 기록에는 김삿갓은 이미 자신의 조부가 반역으로 처형된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단 과거시험을 보려면 증조부부터 자신까지의 친가 3대+외조부까지 조상 4대의 이름을 답안지에 모두 적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과연 김삿갓이 조부가 누군지 몰랐을까?"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뭐 저 김익순이라는 사람을 그냥 자기 조부와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근데, 저 김삿갓이 보았다는 그 과거가 정말로 '과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냥 작문을 좋아하는 사또가 연 글짓기 대회였다는 전승도 있고, 친구들끼리 시짓기 도박을 해서 돈을 딴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후자의 경우 돈푼이나 따려고 조상을 욕했던 게 된 것이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강효석(姜斅錫)이 정리한 야사집인 '대동기문'에 실린 정확한 내용은 "사실 김삿갓이 썼다고 알려진 시는 노진이란 자가 지은 김삿갓 조부 디스시"로,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영월 과거장에서 김삿갓이 직접 쓴 시로 와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평안도에 시 짓는데 이름을 날리던 노진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김삿갓과는 거의 라이벌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나 실력은 노진이 약간 그에 못미쳤다고 한다. 그는 평소 김삿갓이 역적의 손자인 주제에 근신하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내키는 대로 시를 짓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떠돌아 다니던 김삿갓이 오랜만에 평안도에 들어오자 김삿갓에게 망신을 줘서 쫓아낼 생각으로 조부의 허물을 끄집어내 시를 한 수 지었으니, 그 제목이 '김익순의 죄가 하늘까지 미쳤음을 꾸짖고 가산 군수 정시의 충절어린 죽음을 논하다(嘆金益淳罪通于天 論鄭嘉山忠節死)'였다.
김삿갓은 술을 퍼마시고 대취한 상태에서 그 시를 또박또박 낭독한 뒤 '그 놈 시 한 번 잘 지었구나!'고 말하고는 피를 토하면서 평안도를 떠났고, 그 후 일생동안 관서 땅은 단 한 치도 밟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어떻게 출세를 해보려고 같은 문중인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리거나, 자신의 신분을 시골 양반으로 속이고 양반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만 자신의 신분이 들켜 양반들이 왕따를 시킨데다가 사촌이 과거를 봐서 합격했지만 김익순의 자손이란 이유로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김삿갓이 "난 출세는 못하겠구나"라 생각하고 스스로 유랑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데 상식적으로 보면 당시의 태세를 뻘드립으로 풍자하고 비판하던 김삿갓이 '반역자' 취급을 받은 할아버지가 있어서, 혹은 그런 조부를 비난했다는 이유만으로 일평생 방랑만 했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사실 그가 늘그막까지라도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렸다면 철종 시절 안동김씨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군수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자의든 타의든 결국 김병연은 당시의 조선왕조와 안동 김씨의 행각에 회의를 품고 방랑생활을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홍경래의 난도 사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원인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할아버지도 알고보면 낯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했던 터라.
3. 왜 삿갓을 썼을까?(2)
1번째 설로는 22세까지는 그냥 이곳저곳 다니는 방랑생활을 했다가, 어느 날부터 자신은 더 이상 하늘을 볼 낯짝이 없다는 이유로 몸 전체가 그늘지는 거대한 삿갓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 김병연은 김삿갓으로 불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본명보단 김삿갓(김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2번째 설은 당시 삿갓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적인 것이었다. 낚시하던 노인네가 주로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김삿갓의 삿갓은 민중과 함께하려는 그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다음은 위와 관련해서 김삿갓 본인이 쓴, 참고할 만한 시 한 편이다.
나와 삿갓
내 삿갓은
정처 없는 빈 배
한 번 쓰고 보니
평생 함께 떠도네
목동이 걸치고
송아지 몰며
어부는 그저
갈매기와 노닐지만
취하면 걸어두고
꽃 구경
흥이 나면 벗어 들고
달 구경
속인들의 의관은
겉치레, 체면치레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내사 아무 걱정 없네
4.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리고 디스 시문
김삿갓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야말로 백두산을 제외한 조선팔도 이곳 저곳을 누볐으며, 때로는 한곳에 머물며 훈장 노릇을 하여 후학을 기르고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높은 문장으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악덕과 부정부패, 조선 사회에 존재하던 폐해 따위를 비판하여 듣는 이의 동조를 이끌어 내었으며,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노래로 풀어내어 부르는 것으로 명망이 있었다고 한다.
김삿갓의 시는 스웩과 위트와 뼈대가 있는 언어유희가 넘쳐난다. 마음 쓰는 폭이 좁은 친구의 파자를 풀어서 파자로 반박을 한 일화이다.
김삿갓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안주인이 "인량복일(人良卜一) 하오리까?"고 묻자, 그 친구가 "월월산산(月月山山) 하거든" 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정구죽요(丁口竹夭)로구나 이 아심토백(亞心土白)아" 하고 가 버렸다.
이를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人良 卜一 = 食(밥 식) + 上(윗 상) = 밥을 올리다 아니면 食(밥 식) + 具 (갖출 구) = 밥을 내놓다
月月 山山 = 朋(벗 붕) + 出(날 출) = 친구가 나가다
丁口 竹夭(혹은 天) = 可(옳을 가) + 笑(웃을 소) = 가소롭다. 즉, 우습다.
亞心 土白 = 惡(나쁠 악) + 者(놈 자) = 나쁜 놈
犬者 禾重 = 猪(돼지 저) + 種(씨 종) = 돼지 새끼
따라서, 아래와 같은 내용이 된다. 김삿갓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안주인이 "식사 올리오리까?"고 묻자, 그 친구가 "저 친구가 가거든" 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가소롭구나 이 나쁜 자식(혹은 돼지 새끼)아." 하고 가 버렸다.
위 시의 경우 人良卜一이 아니라 上人良이라고 써 있는 판본도 있다. 사실상 여러 판본을 통틀어 이본이 없는 것은 月月山山이 유일하다. 어떤 판본에서는 '정구죽천'을 김삿갓이 아니라 머슴이 외치기도 한다. 김삿갓이 밥을 얻어먹는 것에 대한 성공 여부도 판본마다 다르다.
한편, 이 이야기의 주인공 자체가 김삿갓이 아니라 임진왜란 후의 네임드 문관 둘이라는 판본도 있다. 어찌되었던 내용은 위에 설명한 것과 비슷하다.
사멱난관(혹은 사멱난운)
許多韻字何呼覓
많고 많은 운자에 하필 멱자를 부르는가?
彼覓有難況此覓
첫 번 멱자도 어려웠는데 이번 멱자는 어이 할까?
一夜宿寢懸於覓
오늘 하룻밤 자고 못자는 운수가 멱자에 걸리었는데
山村訓長但知覓
산촌의 훈장은 멱자 밖에 모르는가.
마음 씀씀이가 고약한 시골 훈장이 한 끼를 청하러 찾아온 김삿갓을 내쫓기 위해,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글자인 '찾을 멱(覓)'자 4개로 운을 떼어 시를 짓게 했을때 그가 지은 시이다.
김삿갓 이전에는 이 사멱난운을 통과한 사람이 전무했다고 한다. 잘 보면 멱이라는 글자의 뜻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한 거라 멱이 아닌 다른 글자여도 되니 약간 치사한(?) 수이긴 하나 기발하긴 기발하다고 할 수 있다.
절묘하게 시골 훈장에게 한 방 먹이기도 했고. 훈장은 그의 시에 감탄해서 제대로 식사대접을 하며 하룻밤 지내게 해주고 약간의 여비도 들려 주었다고 한다.
다음은 금강산에 가서 저녁에 한 사찰에 들렀을 때 절에 있던 선비와 스님이 자기들끼리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김삿갓을 우습게 대하다가, 김삿갓의 말솜씨에 눌려 그 선비가 김삿갓을 내쫓기 위해 싯구로써 우위를 가리기를 청했다가 망신을 당한 일화다.
절에 있던 선비: 자, 내가 먼저 운을 띄울 테니 어디 한번 답해 보시오.
김삿갓: 좋습니다. 운을 띄워 보시오.
선비: 타!
김삿갓: 언문 풍월이오?
선비: 당연하지.
김삿갓: 그거야 간단합니다. (속으로 "네놈이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선비: 그럼 해 보시오.
김삿갓: 사면 기둥 붉게 타!
선비: 또 타!
김삿갓: 석양 행객 시장타!
선비: 또 타!
김삿갓: 네 절 인심 고약타
운을 띄우자마자 바로 대답하는 김삿갓을 보고 선비와 스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듣기 거북한 말이 튀어 나오니 운을 더 띄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김삿갓은 "지옥 가기 딱 좋타"고 대답하기 위해 선비가 '타'라고 한 번 더 띄우기를 기다리고 있자 결국 선비가 도망쳤다.
어느 서당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밥을 얻어먹고자 근처에서 놀던 애한테 허락을 구하러 보냈는데, 훈장은 얼굴도 안 들이밀고 그 애를 시켜서 야박하게 문전박대하니 분기탱천하여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이다.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내 일찍이 서당인 줄은 알았지만
방안에는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모두 10명도 못되고
선생은 와서 인사조차 않는구나.
해석만 보면 그냥 점잖게 까는 것 같지만, 실제 이 문장의 음을 소리내어 읽으면...
서당내조지요,
방중개존물이라.
생도제미십이고.
선생내불알이라.
오늘날에 봐도 상당히 저속한 단어들을 사용했는데, 당시 19세기 조선의 언어생활과 이 시를 쓴 김병연은 양반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그 때 김삿갓은 훈장의 푸대접에 굉장히 화가 났었던 것 같다. 근데 이건 허목의 시를 패러디한거다. 보지화양동 불알송선생 참조.
물론 민중들의 대사에서 욕설이 난무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과격한 표현은 감정과 생각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써 그다지 드문 표현은 아니었지만, 이 시에서 파격적인 특징은 시를 지은 사람도 양반이고, 시에서 풍자하는 대상도 서당의 훈장이니 역시 양반이라는 것이다.
김삿갓이 평민이기만 했어도 멍석말이가 한 판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문학적으로는 양반임에도 민중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더하여 이 시는 조선시대의 욕과 비속어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기도 한데, 오늘날도 그렇지만 욕이나 비속어가 기록된 기록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과거의 비속어에 대해 알수있는 귀중한 자료다. 제아무리 기록이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이라도 욕은 기록 못했으니...
그리고 방랑중 돈이 떨어진 김삿갓은 임시로 글을 가르쳐 돈을 벌려 했는데,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自知면 晩知고 補知면 早知다(혼자서 알려 하면 늦게 알게 되고 도움받아 알려 하면 빨리 알게 된다)고 써 붙였다.
내용만 본다면 홍보용으로 적합한 내용이지만 한자의 음만 읽으면,
"자지면 만지고 보지면 조지다(自知면 晩知고 補知면 早知다)"는 더럽게 저속한 섹드립이 된다.
여성 거문고 연주자를 대놓고 성희롱 하는 시도 지었다.
爾年十九齡(이년십구령)
너의 나이 열아홉에
乃早知瑟琴(내조지슬금)
일찍이도 거문고를 탈 줄 알고
速速拍高低(속속박고저)
박자와 고저 장단을 빨리도 알아서
勿難譜知音(물난보지음)
어려운 악보와 음을 깨우첬구나
비처녀논쟁도 했다.
(김삿갓)
毛深內闊(모심내활)
必過他人(필과타인)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것을 보니, 필시 딴 사람이 먼저 지나갔도다.
참고로 처녀도 보통이 아닌지라 다음 시로 응수했다고 한다.
(처녀)
溪邊楊柳不雨長(계변양류불우장)
後園黃栗不蜂坼(후원황률불봉탁)
개울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길게 자라고, 뒷마당 알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네.
김삿갓의 '연유삼장(嚥乳三章)'을 소개한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소재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一章
父嚥其上 婦嚥其下 부연기상 부연기하
上下不同 其味則同 상하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위를 삼키고, 며느리가 그 아래를 삼키니, 위와 아래는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二章
父嚥其二 婦嚥其一 부연기이 부연기일
一二不同 其味則同 일이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둘을 삼키고, 며느리가 그 하나를 삼키니, 하나와 둘은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三章
父嚥其甘 婦嚥其酸 부연기감 부연기산
甘酸不同 其味則同 감산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단것을 삼키고, 며느리가 그 신 것을 삼키니, 단것과 신것은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이런 시를 쓴 이유는 김삿갓이 떠돌아 다닐적에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찾아간 집의 주인의 며느리가 유종을 앓아 젖을 빨아야 되기 때문에 재워 줄 수 없다 하여 이 시를 읊어 놀렸다는 설과, 아비 父가 아니라 사내 夫를 써서 방랑 중 건달패들과 함께 놀다가 패거리들이 원하는 음담패설 시를 지어 웃겨주었다는 설이 있다. 사내들 중 하나가 아내가 유종을 앓아 젖을 빨아줘야 한다는 걸 놀림받고 있던 걸 기억하고 지었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이 시는 봉알선생의 우리 욕 기행에서도 황봉알이 소개한 바 있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함경도에서 어떤 부자들이 노니는 것을 보고 술 좀 달라고 했다가 되려 푸대접을 하니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서 부자들을 화나게 하기도 했다.
日出猿生原 일출원생원.
猫過鼠盡死 묘과서진사.
黃昏蚊簷至 황혼문첨지.
夜出蚤席射 야출조석사.
해 뜨자 원숭이가 마당에 나타나고
고양이가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저녁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이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 대네.
역시나 언어유희가 잘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각각 성이 원생원는 원숭이, 서진사는 쥐, 문첨지는 모기, 조석사는 벼룩으로 치환된다는 언어유희를 이용한 것이다. 이 한시가 품은 뜻을 모를 리가 없는 부자들은 그 시를 읽고 화를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어느 절에 갔더니, 절에 있던 승려와 선비가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만 보고 하대를 하고 푸대접을 하는 등 매우 고약하게 굴었다. 이에 지필묵을 갖다 달라고 하고 시를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僧首團團汗馬囊 승수단단한마랑
儒頭尖尖坐狗腎 유두첨첨좌구신
聲令銅令零銅鼎 성령동령영동정
目若黑椒落白粥 목약흑초락백죽
중의 둥근 머리는 땀이 찬 말의 X알이며
뾰족뾰족한 선비 머리통 상투는 앉은 개 X지로다.
목소리는 구리방울을 구리솥에 굴리듯 요란하고,
눈깔은 검은 후추알이 흰죽에 떨어진 듯 흉하구나.
경기도 개성에 가서 어느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려 했으나, 주인이 '집에 불을 피울 장작이 없다'는 핑계로 문을 닫으며 쫒아냈다. 그러자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조롱했다.
邑名開城何閉城(읍명개성하폐성)
山名松岳豈無薪(산명송악기무신)
고을 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 걸며
산 이름은 송악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느냐
개성의 한자를 그대로 직역하면 성을 연다는 뜻이고,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松岳山)은 '소나무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도 쌍욕은 안 한 걸로 봐서 그렇게 화가 나진 않았나 보다.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도 썼다.
宣化堂上宣火黨 선화당상선화당.
樂民樓下落民淚 낙민루하낙민루
咸鏡道民咸驚逃 함경도민함경도.
趙冀永家兆豈永 조기영가조기영.
선화당에서 화적같은 정치를 행하고
낙민루 아래에서 백성들이 눈물흘리네
함경도 백성들이 모두 놀라 달아나니
조기영이 가문이 어찌 오래 가리오?
당대 함경도 관찰사 조기영의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로 선화당, 낙민루, 함경도, 조기영의 한자 훈을 바꿔서 기가 막힌 시를 지었다.
걸식 도중 쉰밥을 얻어먹고 분노하여 이런 시도 지었다.
二十樹下三十客 이십수하삼십객
四十村中五十食 사십촌중오십식
人間豈有七十事 인간기유칠십사
不如家歸三十食 불여가귀삼십식
스무(스물) 나무 아래에 서러운(서른) 나그네
망할(마흔) 놈의 마을에서 쉰(쉰) 밥이네
사람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선, 설익은) 밥 먹느니만 못하구나
또한 시 중에는 시(是)와 비(非) 단 2글자로 지은 시도 있다.가가 가가? 제목도 시시비비가(是是非非歌). 허황된 이론을 가지고 옳다 아니다 하며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부류를 풍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으며,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음이 아니다.
그른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이 그른 것이 아니며,
옳다는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함이 도리어 이 그른 것을 옳다 함이다.
회갑축시
披坐老人非人間(피좌노인비인간)
疑是天上降神仙(의시천상강신선)
膝下七子皆盜賊(슬하칠자개도적)
偸得天桃獻壽宴(투득천도헌수연)
저기 앉은 늙은이는 사람이 아니니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신선 같구나
슬하 일곱 아들 모두 도둑놈이니
천도복숭아를 훔쳐다 잔치를 빛내는구나
한 시골 노인의 회갑연에서 지은 시이다. 말석에서 푸대접을 받자 즉석으로 축시를 짓는다 하여 써내려 갔다. 첫 소절을 보고 그 뜻을 알아차린 가족들과 하객들이 화가 치밀어 몰매를 쳐서 쫓아내려 하자 두번째 소절로 그들을 감탄시킨다. 세번째 소절을 써내려간 후 좌중이 눈치만 보고 있자 맛 좋은 술을 청한 후 시를 마무리하여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시는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나온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이 아니로구나), 즉 '이곳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라는 구절을 오마주하였다고 한다.
김삿갓의 시에 감탄한 가족들과 노인은 여러날동안 그를 대접했지만 그가 떠나기로 결심하자 더 있어 달라고 사정하고 기어이 삿갓이 떠나게 되자 여비를 두둑하게 주며 삿갓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시가 아닌 말장난 중에도 이런 것도 있다.
어느 머슴이 헐레벌떡 뛰어가길래 김삿갓이 잡고 "어딜 그리 급하게 가냐"고 하니 "사람이 죽어 부고를 쓰러 간다"고 했다. 김삿갓이 "내가 글을 알고 있으니 써주겠다"고 했는데, 쓴 것은 유유화화(柳柳花花)였다. 글을 모르는 머슴은 "고맙다"고 하고 그것을 받아갔다.
그런데 국어로 그대로 직역하면 '버들버들꽃꽃', 그러니깐 버들버들 떨다가 꼿꼿해졌다. 즉, 생판 모르는 남의 죽음을 희화화한 것이 된다.
아무튼 김병연은 유유자적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10년 단위로 집에 들어와서 자신의 아내와 아들과 딸들을 보고 또 나가고 그런 모양이다. 대표적으로 32살 때인 1838년 음력 9월 21일에 아내가 죽자 집에 돌아와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에 경주 최씨 최흥주(崔興柱)의 딸과 다시 결혼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들이 "그만 여행하고 집에 돌아오라"는 편지를 수십통이나 베끼어 아버지가 갈 만한 마을마다 이를 부탁하고 맡긴 모양이다. 그런 편지를 아무 탈 없이 받은걸 감안하면 그의 엄청난 명망이 짐작된다. 그리고 아들과 집안 사람들이 몇 번 귀향을 권하였으나, 그 때마다 심부름을 보내는 둥 따돌리고는 도망쳤단다.
그렇게 살다가 김병연은 마흔 줄에 들어 떠돌아 다니는 생활이 힘에 부친다는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려고 왔는데, 가정의 일을 소홀히 하여 가족들로부터 냉대받는 것이 다시 그를 바깥에서의 생활로 발길을 돌리게 했다.
5. 방랑생활의 종지부
그는 말년에 접어들어 건강이 갈수록 나빠졌고 외지인 전라도 동복현(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지인 집의 사랑방에서 누워 치료를 받다가 숨지는 것으로 방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도 뭔가 가련한 느낌을 준다. "안 초시, 춥구려. 이제 잠을 자야겠으니 불을 꺼주시오…"
뒤에 '어머니가 보고 싶소'라고 했다고 한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후에 친정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는데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서 소식만 묻고 바로 가는 일을 여러번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뒤늦게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들은 아들 김익균이 직접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데리고 왔다고 한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방랑생활이 몸에 배었을지 몰라도, 가족 입장에서는 훌륭한 가장은 아니었던 셈이다. 김삿갓의 묘지는 고향인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다.
그래도 사후에는 워낙 유명해져서 임금도 알고 있을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김삿갓의 손자인 김영진이란 사람이 절에서 스님으로 있었는데, 절에 다니던 궁녀를 통해 그걸 알게 된 임금이 일부러 궁으로 불러서 김익순의 죄를 사면해주고 환속을 시켜 관직을 내려주었다.
이후 김영진은 망국 후에 양조장을 차려 큰 부자가 되었으나 자신이 번 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다가 정작 본인이 가난해졌다고 한다.
◼ 김삿갓은 없다
(1)
희작시의 특징은 파격과 해학, 민중성과 익명성으로 대표된다. 특정 작가가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하더라도 의미 없는 가탁이 대부분이다. 또 이들 희작시들은 기존 한시의 문법을 과감히 깨뜨리고 있고, 시의 소재 또한 당시 사설시조가 평시조에 대해 그랬듯이 비시적(非詩的) 대상을 시(詩)의 소재로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그럴듯한 표면 진술의 당의(糖衣)를 입혀, 이면에서 풍자와 해학을 겨냥하는 언문풍월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전통 한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들 희작의 파격시들은 시랄 것도 없는 희학질에 불과하다. 도대체 점잖은 선비가 할 짓은 못되는 것이다. 시시덕거리고 키득키득대는 정서에 더 가깝다.
희작시는 보통 전승의 과정에서 복수성을 띠면서 부연 확장된다. 예를 들어 김삿갓이 어느 늙은이의 부고장에 '류류화화(柳柳花花)'라고 넉 자를 써 주었는데, 그 뜻은 훈으로 새겨 '버들버들(柳柳) 떨다가 꼿꼿(花花)이 죽었다'의 의미가 된다. 그러면 이것이 그 다음에 가면 '류류정정화화(柳柳井井花花)'로 부연된다. 즉 '버들버들 떨다가 우물우물 하더니 꼿꼿이 죽었다'는 것이다.
'흥부전'에서 놀부의 심술 가지 수가 이본에 따라 한없이 늘어나는 양태와 방불하다. 이런 말장난이 좀 더 세련된 시의 모양을 갖추면 새로운 한편의 희작시가 탄생된다.
世事熊熊思 人皆弓弓去
세상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남들은 모두 다 활활 가는데,
我心蜂蜂戰 我獨矢矢來
내 마음 벌벌 떨기만 하며 나 홀로 살살 오가는구나.
言雖草草出 世事竹竹爲
말들은 비록 풀풀 뱉지만 세상일은 데데하기 그지없도다.
心則花花守 前路松松開
마음을 꼿꼿이 지키면 앞길이 솔솔 열리리라.
참으로 절묘한 말장난이다. '웅웅(熊熊)'이 '곰곰'이 되고, '궁궁(弓弓)'은 '활활'로 읽는다. '봉봉(蜂蜂)'이 '벌벌'로, '시시(矢矢)'가 '살살'이 된다. 대개 장난도 이쯤 되려면 이전부터 쌓여진 노하우가 있지 않고서는 안 된다. 김삿갓의 부고장이 극단에까지 이른 양상이다.
김삿갓은 없다. 언필칭(言必稱) 그의 시로 일컬어지는 시들은 김삿갓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시를 지으랴 싶은 것을 모두 주워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면 거의 실상에 가깝다.
TV 광고에서 김삿갓이 죽장을 짚고 근엄하게 외치는 "백년도 못되는 인생을 살면서, 천년의 근심을 지닌 채 살아가는 중생들아(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도 사실은 그의 시가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 가운데 한 구절이다.
(2)
이응수에 의해 김삿갓의 시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그가 세상을 뜬지 근 70년 뒤인 1939년의 일이다. 이응수는 이곳저곳에서 구전되던 김삿갓의 시 183편을 모아 상재하였다. 대부분이 전설(傳聞)에 의한 기록이고 보면, 그 진위(眞僞)를 헤아려 따진다는 것은 애초에 무망한 일이다.
'최불암 시리즈'가 그렇고 '덩달이 시리즈'가 그렇듯이 극단적으로 말하면, 김삿갓의 시 또한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불특정 다수의 희작시들이 모두 그의 이름 아래 모인 것일 뿐이다. 김삿갓의 시로 알려진 다음 시를 보자.
是是非非非是是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옳음 아니고
是非非是非非是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옳지 않음 아닐세.
是非非是是非非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 그름이 아닐진대
是是非非是是非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로구나.
김삿갓의 '시시비비시(是是非非詩)'는 이미 김시습이 지은 것으로 홍만종의 '소화시평'에 소개되고 있다. 한마디로 시비(是非)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한 개판의 세상을 향한 야유다. 뿐만 아니라 김시습은 아예 한수 더 떠서 이런 구절도 남겼다.
同異異同同異異
다른 것 같다 하고 같은 것 다르다 하니, 같고 다름이 다르고
異同同異異同同
같은 것 다르다 하고 다른 것 같다 하니, 다르고 같음이 같구나.
허후(許厚)도 그의 '시비음(是非吟)'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是非眞是是還非
참 옳은 것 시비하면 옳음도 그름 되니
不必隨波强是非
물결 따라 억지로 시비할 것 아닐세.
却忘是非高着眼
시비를 문득 잊고 눈을 높이 두어야
方能是是又非非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할 수 있으리.
다 비슷한 발상에서 나온 말장난들이다. 또 김삿갓이 문전축객 하는 주인을 풍자해서 지었다는 '인도인가(人到人家)'에 다음 구절이 있다.
人到人家不待人
사람이 사람 집에 왔는데 사람 대접 않으니
主人人事難爲人
주인의 인사가 사람 되기 어렵도다.
매 구절마다 '인(人)' 자를 세 번씩 썼다. 말장난의 기미가 농후하다. 이 또한 조선 전기의 문인 기준(奇遵)의 시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人外覓人人豈異
사람 밖에서 사람 찾으니 사람이 어찌 다를 것이며
世間求世難同世
세간에서 세상을 찾으니 세상을 같이하기 어렵겠네.
여기서는 인(人)과 세(世)를 각각 세 번씩 반복했다. 예전 시조에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 하는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하던 말장난과 비슷하다.
(3) 김삿갓은 없다
정조 때 정승을 지낸 이서구(李書九)가 만년에 은퇴하여 향리에 물러나 있을 때 일이다. 그가 허름한 베잠방이 차림으로 냇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경망한 선비 하나가 시내를 건너려다, "여보. 늙은이! 나를 좀 업고 건네게." 했겠다.
"그러시지요." 하고는 젊은 것을 업고 시내를 건너는데, 이 친구 늙은이 등에 업혀 까닥까닥 냇물을 건너다보니 아뿔싸! 늙은이가 정승이나 할 수 있는 옥관자(玉貫子)를 하고 있지 않은가.
시골 무지랭이 늙은인 줄 알았다가 큰 경을 치르게 생겼다. 어쩔 줄 몰라 부들부들 떨다가 창졸간에 시내를 건넜는데, 경망한 선비는 좀 전의 서슬은 간데없이 난짝 꿇어앉아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죽을 죄를 빌었다.
그러자 이 의뭉스런 늙은이는 시를 한 수 읊어주고는 다시 건너가 모른 척 낚시질이다. 그 시에 이랬다. 외관으로 보아 육담풍월의 일종이다.
吾看世시옷 是非在미음
歸家修리을 不然点디귿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굳이 해석을 해보니 이렇다.
吾看世시옷 是非在미음
내가 세상의 '시옷'을 보니 是非가 '미음'에 있더라.
歸家修리을 不然点디귿
집에 돌아가 '리을'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디귿'에 점찍으리라.
점점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시옷은 '인(人)'이요, 미음은 '구(口)'의 모양이다. 리을은 '기(己)'요, 디귿에 점을 찍으면 망할 '망(亡)'자가 된다. 이렇게 풀고서 다시 시를 읽으니 이렇게 된다.
吾看世人 是非在口
내가 세상 '사람'을 보니 是非가 '입'에 있더라.
歸家修己 不然則亡
집에 돌아가 '몸'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망'하리라.
경망한 선비에게는 활운(活訓)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이 김삿갓의 시로 둔갑이 되면서는 처음 1, 2구가 슬쩍 바뀌고, 전후 이야기도 달리 윤색되었다.
腰下佩기역 牛鼻穿이응
허리 아래엔 '기역'을 차고 소 코에는 '이응'을 뚫었네.
歸家修리을 不然点디귿
집에 돌아가 '리을'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디귿'에 점찍으리.
1구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무색하다. 소의 코뚜레를 잡고 허리에 낫을 차고 지나가는 떠꺼머리 총각을 묘사한 것이 1, 2구라면, 3, 4구는 박절하게 나그네를 타박하는 주인에게 쏘아붙인 독설이다. 자! 어느 것이 진짜 김삿갓이 지은 것인가?
현재 김삿갓의 시로 수록된 작품 속에서 역대 야담집이나 시화에 다른 사람의 시로 이미 소개된 것은 위의 예들 말고도 얼마든지 더 있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도 오늘날 김삿갓의 시로 믿고 있는 것이 어떤 경로로 정착되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영월 소재 김삿갓 묘를 발견하여 보고한 바 있는 박영국(朴泳國) 선생이 1987년 김삿갓의 삼회갑(三回甲)을 기념하여 전국에 김삿갓 유시(遺詩)를 공모했던 바, 무려 690수의 시가 제보되었는데 앞서 본 "세상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는 시도 이때 김삿갓의 시라고 제보된 것 중 하나이다.
이렇듯 김삿갓의 시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고 보면, 종내는 조선조에 노래된 모든 희작시가 김삿갓의 이름 아래 야권통합(?)을 이루고야 말 모양이다.
▶️ 柳(버들 류/유)는 ❶형성문자로 栁(류), 桞(류)는 통자(通字), 桺(류)는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흐르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卯(묘, 류)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가지나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 곧 버드나무를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柳자는 '버들'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柳자는 木(나무 목)자와 卯(토끼 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卯자는 조그만 간이 문을 열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서의 柳자는 木자 아래에로 卯자가 그려진 형태였다. 이것은 치렁하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갑골문에서의 柳자는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버드나무의 부드러움과 연약함은 가녀린 여인을 연상케 했다. 그러다 보니 柳자는 '연약한 여인'이나 '허약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柳(류/유)는 ①버들, 버드나무 ②상여(喪輿)의 장식(裝飾), 관(棺)의 장식(裝飾) ③수레의 이름 ④별의 이름 ⑤오음(五音)의 하나 ⑥혹(=瘤) ⑦모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버들 양(楊)이다. 용례로는 버들가지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미인의 허리를 유요(柳腰), 버드나무의 잎을 유엽(柳葉), 버드나무 가지를 유지(柳枝), 버드나무의 꽃을 유화(柳花), 미인의 눈썹을 유미(柳眉), 버드나무의 그늘을 유음(柳陰), 버드나무 가지와 같은 고운 맵시를 유태(柳態), 가지가 가는 버드나무를 세류(細柳), 꽃과 버들을 화류(花柳), 강 언덕에 서 있는 버드나무를 안류(岸柳), 여자의 글재주를 기리는 말을 유서지재(柳絮之才), 푸른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는 뜻으로 자연의 모습 그대로 사람의 손을 더 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을 유록화홍(柳綠花紅), 버들은 무성하여 그윽이 어둡고 꽃은 활짝 피어 밝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강촌의 봄 경치를 이르는 말을 유암화명(柳暗花明), 버들 같은 눈썹에 개미 같은 허리를 일컫는 말을 유미봉요(柳尾蜂腰), 갯버들 같은 모습이라는 뜻으로 허약한 몸을 이르는 말을 포류지자(蒲柳之姿), 갯버들 같은 체질이라는 뜻으로 나이보다 빨리 늙어 버리는 체질이나 몸이 약하여 병에 잘 걸리는 체질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포류지질(蒲柳之質), 길 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는 뜻으로 기생을 의미함을 일컫는 말을 노류장화(路柳墻花), 마른 버드나무와 시든 꽃이라는 뜻으로 용모와 안색이 쇠한 미인의 모습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패류잔화(敗柳殘花), 바람 앞에 나부끼는 세버들의 뜻으로 부드럽고 영리한 사람이 성격을 평하여 일컫는 말을 풍전세류(風前細柳) 등에 쓰인다.
▶️ 花(꽃 화)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化(화)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초두머리(艹)部는 식물, 花(화)는 후세에 생긴 글자로 본래는 華(화)로 쓰였다. 음(音)이 같은 化(화)를 써서 쉬운 자형(字形)으로 한 것이다. ❷형성문자로 花자는 '꽃'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花자는 艹(풀 초)자와 化(될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化자는 '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는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본래 소전에서는 땅속에 뿌리를 박고 꽃을 피운 모습을 그린 芲(꽃 화)자가 '꽃'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花자가 모든 '꽃'을 통칭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花(화)는 성(姓)의 하나로 ①꽃 ②꽃 모양의 물건 ③꽃이 피는 초목 ④아름다운 것의 비유 ⑤기생(妓生) ⑥비녀(여자의 쪽 찐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 ⑦비용(費用) ⑧얽은 자국 ⑨꽃이 피다 ⑩꽃답다, 아름답다 ⑪흐려지다, 어두워지다 ⑫소비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꽃구경을 하는 사람을 화객(花客), 꽃을 꽂는 그릇을 화기(花器), 뜰 한쪽에 조금 높게 하여 꽃을 심기 위해 꾸며 놓은 터 꽃밭을 화단(花壇), 꽃 이름을 화명(花名), 꽃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화용(花容), 환갑날에 베푸는 잔치를 화연(花宴), 화초를 심은 동산을 화원(花園), 꽃과 열매를 화과(花果), 꽃을 파는 곳을 화방(花房), 꽃병 또는 꽃을 꽂는 병을 화병(花甁), 꽃놀이 또는 꽃을 구경하며 즐기는 놀이를 화유(花遊), 비가 오듯이 흩어져 날리는 꽃잎을 화우(花雨), 온갖 꽃을 백화(百花), 많은 꽃들을 군화(群花), 꽃이 핌으로 사람의 지혜가 열리고 사상이나 풍속이 발달함을 개화(開花), 떨어진 꽃이나 꽃이 떨어짐을 낙화(落花), 한 나라의 상징으로 삼는 가장 사랑하고 가장 중하게 여기는 꽃을 국화(國花), 암술만이 있는 꽃을 자화(雌花), 소나무의 꽃 또는 그 꽃가루를 송화(松花), 시들어 말라 가는 꽃을 고화(枯花), 살아 있는 나무나 풀에서 꺾은 꽃을 생화(生花), 종이나 헝겊 따위로 만든 꽃을 조화(造花),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 번 성한 것이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짐을 이르는 말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무늬가 같지 않음 또는 문장이 남과 같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화양부동(花樣不同), 꽃다운 얼굴과 달 같은 자태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여자의 고운 자태를 이르는 말을 화용월태(花容月態), 꽃이 핀 아침과 달 밝은 저녁이란 뜻으로 경치가 가장 좋은 때를 이르는 말을 화조월석(花朝月夕), 비단 위에 꽃을 더한다는 뜻으로 좋은 일에 또 좋은 일이 더하여짐을 이르는 말을 금상첨화(錦上添花), 말을 아는 꽃이라는 뜻으로 미녀를 일컫는 말 또는 기생을 달리 이르는 말을 해어화(解語花), 눈처럼 흰 살결과 꽃처럼 고운 얼굴이란 뜻으로 미인의 용모를 일컫는 말을 설부화용(雪膚花容), 마른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뜻으로 곤궁한 처지의 사람이 행운을 만나 신기하게도 잘 됨을 이르는 말을 고목생화(枯木生花), 달이 숨고 꽃이 부끄러워 한다는 뜻으로 절세의 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폐월수화(閉月羞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