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백수
김백겸
우편물을 가지러 퇴직 연구소에 가지
40년 출근한 연구소는 지난날의 모든 출입기록들이 부식과 때로 적혀있는 콘크리트 양피지
후배직원들은 유령을 쳐다보듯 잠깐 목례하고 컴퓨터 모니터에 집중하지
아직도 자리가 비어있는 별실의 내 책상에서 배달잡지와 책들을 수거하여 나오면
하늘에는 흰 구름이 흘러가지
은퇴백수는 짐을 포터에 실어 정문을 나서지
시간은 천수관음의 손처럼 붓을 들어 검은 페인트를 칠하고 가지
아파트 엘레베이터에 오르니
심장의 두근거림이 배어있는 향수 냄새
4월의 라일락 향 같이 가늘어져서 구절양장의 스토리를 불러오는 향수 냄새
주인공이 사랑을 갈망하는 젊은 여자인지 불륜을 꿈꾸는 중년여자인지 모르겠지만
꽃들의 유혹 때문에 가슴이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생각하지
인연들이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밀물처럼 다가왔던 발자국 소리
인연들이 서해 마량항 썰물처럼 백만평 갯벌을 남기고 물러갔던 발자국 소리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지
은퇴백수가 죽림칠현의 페르소나Personna임을 아는 오후
과도로 캘리포니아산 오렌지를 4등분해서 먹지
인간의 식욕이 크레타미궁의 지하 괴물 미노타우르스처럼 타자의 생명을 먹는 쉐도우shadow임을 알지
저녁 뉴스를 틀어 'me too' 열풍이 몰아친 한국사회가 유명 정치가와 배우와 예술가를 향해 썩은 계란을 던지는 폭풍을 보지
인간의 아니마anima가 신과 짐승으로 가는 갈래 길에서 망서리는 원숭이임을 생각하지
봄비 내리는 날, 세종시 다정로를 걸어가지
이정표를 가린 우산 안으로 일생의 모든 망각이 들이 치지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해 죽으러 가는지 모르는 이상한 길
「LG 베스트 샵」 사거리 「투섬 플레이스」에서 커피를 시켜 놓고 찬 손을 녹이면서
창밖으로 걸어온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지
길이 흘러온 모든 시간을 모아
시간이 품은 모든 스토리를 모아
스토리가 품은 모든 스릴과 지루함을 모아
과거는 미래를 향해 흘러가지
황혼이 내린 금강변 자전거 도로를 따라
소문자 내self가 대문자 나Self를 향해 걸어가지
픽션fiction을 향해 떨어지는 리얼real 나이아가라niagara같은
꿈의 강을 따라
계간 『시와 사람』 2018년 여름호 발표
195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 『기호의 고고학』, 『거울아, 거울아』와 시론집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光源)』 등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主幹 역임. 현재 〈시힘〉, 〈화요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