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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승감녕(好勝甘佞)
이기기만 좋아하면 아첨이 달게 들린다는 뜻으로, 잘못을 덮으려 허물을 키우지 말고, 바른 말을 들어 잘못을 고치라는 말이다.
好 : 좋을 호(女/3)
勝 : 이길 승(力/10)
甘 : 달 감(甘/0)
佞 : 아첨할 녕(亻/5)
당나라 육지(陸贄)의 주의(奏議; 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글)는 명백하면서도 핵심을 찔러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모범 사례로 꼽혀 왔다. 그가 임금에게 올린 글을 모아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가 엮어졌을 정도다. 정조(正祖)도 '육주약선(陸奏約選)'과 '육고수권(陸稿手圈)'을 펴냈다.
육주약선(陸奏約選)은 조선후기 제22대 왕 정조(正祖)가 당(唐)나라의 명신 육지(陸贄)의 '육선공문집(陸宣公文集)'에 수록된 주의문(奏議文) 중 통치에 도움이 될만한 글 29편을 선별하고 불필요한 부분들을 산삭(刪削;필요 없는 글자나 구절을 지워 버림), 정리한 후 편찬한 책이다.
정조는 육지의 주의문이 간곡하고 절실하여 세교(世敎)에 도움이 될 만한 문장이라고 평가하면서 서연(書筵; 왕세자가 글을 강론하던 곳)과 경연(經筵;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에서 여러 차례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또 즉위 초에는 교서관에 명하여 육지의 문집을 간행, 배포하도록 했다.
하지만 육지의 글은 지루하고 번잡하여 읽기가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정조는 이황(李滉)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예에 의거하여 주의문 중 정수(精髓; 사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알짜)라고 판단한 글을 선별하여 상투적이거나 불필요한 부분은 잘라내고 핵심적인 내용만 수록하였다.
1794년(정조 18)에 29편의 글을 정리하여 '육주약선'을 편찬했으며, 1797년에 이를 다시 교정하여 2권으로 편집한 다음 정유자(丁酉字; 조선 정조 원년에 구리로 만든 활자)로 간행, 배포하였다. 그리고 간행된 책을 전라감영(全羅監營)으로 보내 번각본(飜刻本)을 제작하고 판목을 보관하도록 했다.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당(唐)의 덕종(德宗)이 주차(朱泚)의 난을 피해 봉천(奉天)에 있을 때 올린 주의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상권에 실려 있는 '논양하급회서장(論兩河及淮西狀)' 등 20편은 각종 시무(時務)와 관련된 글들이며, 하권에 있는 '청허대성장관거천속리장(請許臺省長官擧薦屬吏狀)' 등 9편은 육지가 재상이 된 이후 각종 정사와 관련하여 올린 주의문이다.
하권 말미의 발문(跋文)에는 정유자(丁酉字)를 만든 경위가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신료들로 하여금 주의문을 작성하는 데 구체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용도로 이용되었는데, 고종 때 인일제(人日製; 음력 정월 7일에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치른 특별 과거시험)와 삼일제(三日製; 매년 삼짇날인 음력 3월 3일에 치른 과거시험)에서 차상(次上)의 성적을 거둔 유생, 전강(殿講)에서 약(略)의 성적을 거둔 유생 등에게 이 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육주약선(陸奏約選)은 정조가 직접 판단 기준을 세우고 글을 선별하여 편집했다는 점에서, 18세기 조선의 학풍과 문풍(文風)을 주도하고자 했던 정조의 학문 경향과 문장관(文章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 중에서 '봉천에서 여러 신하를 자주 만나 일을 논할 것을 청하는 글(奉天請數對群臣許令論事狀)'의 내용이다.
奉天請數對群臣許令論事狀
(봉천에서 여러 신하를 자주 만나 일을 논할 것을 청하는 글)
上好勝必甘於佞辭, 上恥過必忌於直諫.
위에서 이기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아첨하는 말을 달게 여기고, 위에서 허물을 수치스러워하면 틀림없이 직간을 꺼리게 됩니다.
如是則下之諂諛者順旨, 而忠實之語不聞矣.
이렇게 하면 아첨하는 신하가 임금의 뜻만 따르게 되어 충실한 말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上厲威必不能降情以接物, 上恣愎必不能引咎以受規.
위에서 위세를 부리면 반드시 마음을 비워 사물을 대할 수가 없고, 위에서 강퍅스러우면 분명히 허물을 인정하여 바른 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如是則下之畏愞者避辜, 而情理之說不申矣.
이렇게 하면 아랫사람은 겁을 먹고 잘못을 피하려고만 들어, 마음이 담긴 말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차이는 그 이후에 발생한다. 잘못을 덮으려 허물을 키우지 말고, 바른 말을 들어 잘못을 고치라는 말이다.
苟其違道以師心, 棄人而任己, 謂欲可逞, 謂衆可誣.
진실로 도리를 어겨 마음을 따르며, 남의 의견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욕심은 채워도 된다고 하고, 대중은 속여도 된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謂專斷無傷, 謂詢謀無益.
독단이 해롭지 않고, 꾀를 묻는 것이 쓸데없다고 말하게 되겠지요.
謂諛說爲忠順, 謂獻替爲妄愚.
아첨을 충성과 순종이라 하고, 착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간언하는 것은 망령되고 어리석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謂進善爲比周, 謂嫉惡爲嫌忌.
훌륭한 인물을 천거하는 것을 편 만들기라고 여기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시기한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내 편 네 편을 갈라 잘못을 두둔하고 바른 말을 외면하면 나라 일은 그만 어긋나고 만다.
■ 간언(諫言)을 받아 드려야하는 이유
조선 중기 문장가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말했습니다. "흥성하는 나라는 간언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쇠퇴하는 나라는 간언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망하는 나라는 간언하는 사람을 죽인다."
용주유고(龍洲遺稿)에 나오는 말로, 흥성하는 나라의 군주는 비판하는 사람에게 상을 줍니다. 비판을 수용하여 잘못을 바로잡아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노력입니다. 쇠퇴하는 나라의 군주는 비판을 싫어합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현실에 안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망하는 나라의 군주는 비판하는 사람을 제거합니다. 비판이 없으면 부패와 타락을 막을 수 없으니, 결국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조선중기 학자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이 말했습니다. "간언을 싫어하는 군주는 상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벌을 내리니, 이것은 스스로 눈과 귀를 막고 결국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나오는 말입니다.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혼자가 되고,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발전이 없습니다. 비판을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조선 중기 문신 개암(開岩) 김우굉(金宇宏)의 말입니다. "두루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군주의 급선무이고, 간언의 옳고 그름은 책임질 사람이 따로 있으니 군주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신하가 간언을 하는데 군주가 들어주지 않거나 벌을 내리면, 강직하다는 명예는 아래로 돌아가고 간언을 싫어한다는 비난은 위로 돌아간다."
김우굉의 문집 개암집(介庵集)에 나오는 말입니다.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군주의 할 일이고, 간언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이건 틀린 말이건 일단 듣고 볼 일입니다.
당(唐)나라 명상(名相) 육지(陸贄)가 말했습니다. "간언하는 사람이 많으면 군주가 간언을 좋아한다는 것이 나타나고, 간언하는
사람이 강직하면 군주가 어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간언하는 사람이 거짓을 말하면 군주의 관대함이 밝혀지고, 간언하는 사람이 말을 누설하면 군주가 잘 따른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훌륭한 덕이 되는 것이다."
육지의 상소문을 엮은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간언은 군주에 대한 비판입니다. 비판이 많을수록, 비판이 거셀수록, 그리고 비판이 널리 알려질수록 군주의 명예가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비판을 한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명예훼손을 들먹이는데, 정말 명예를 높이고 싶으면 비판을 경청해야 합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있는 말입니다. "나무가 먹줄을 좇으면 곧고, 사람이 간언을 들으면 거룩하게 된다(木縱繩則直 人受諫則聖)"고 했습니다.
■ 신하들에게 간언(諫言)을 구하다
세종실록 세종 7년 을사(1425)년 12월 8일
정사(政事)를 보았다.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의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금년 여름은 가물더니 겨울은 지나치게 따뜻하다. 12월은 얼음을 저장하는 계절인데, 날씨가 따뜻함이 봄과 같아서 아직 얼음을 저장할 수 없고, 또 어제는 짙은 안개가 끼었으므로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 허물은 실로 과인(寡人)에게 있는 것으로서, 장차 재앙이 올 징조가 아닌가 두렵다. 이때에 간언(諫言)을 들어서 하늘의 꾸짖음에 대답하고자 한다. 지나간 옛날을 두루 살펴보니, 비록 태평한 시대에 있어서도 대신(大臣)은 오히려 임금의 옷을 붙잡고 강력하게 간언(諫言)한 자가 있었으며, 또 그 말한 바가 사람의 마음을 두렵게 하여 움직이게 함이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비록 무사하고 평안하였고 하나, 옛날에 미치지 못함이 분명하다. 그런데 아직 과감(果敢)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爭諫)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으며, 또 말하는 것이 매우 절실 강직하지 않다. 어째서 지금 사람은 옛사람 같지 못한가. 각자가 힘써 생각하여 나의 다스림을 도우라." 하니,
좌의정 이원(李原)이 대답하기를, "알지 못하여 말하지 않는 것은 간혹 있으나, 만약 말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찌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옛사람만 못하다고 한 것은 그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의논하라고 내린 일로 보아도, 그것을 논의할 적에 한 사람이 '옳다'고 하면, 다 '옳다'고 말하고, 한 사람이 '그르다'고 말하면, 다 '그르다'고 말한다. 지난번에 최맹온(崔孟溫)의 죄를 결정할 때에도 한 사건을 가지고 전일에는 '그르다'고 하고, 뒷날에는 '옳다'고 하였는데, 한 사람도 중론을 반대하여 논란(論難)한 자가 없었다. 이것을 가지고 내가 지금이 옛날만 못하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원이 대답하기를, "사람은 제각기 마음이 있는 것이니, 헤아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이 사리(事理)에 맞으면 다 '옳다'고 하고, 만약 혹 부당하다면 다 '옳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 마음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좋다고 따르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漢) 나라의 선제(宣帝)는 세상에서는 총명하고 지혜 있는 임금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나라의 힘은 가장 왕성하였다. 안으로는 관리들이 각자의 직무에 적합하고, 백성들은 생업(生業)에 안정하였으며, 밖으로는 흉노(凶奴)가 관새(關塞)의 문을 두드리고 와서 번신(藩臣)이라 칭하면서 한(漢) 나라의 하급 관리로 임명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후세의 평하는 자들은 선제가 도리어 화(禍)의 근본을 만든 임금이라고 말하였다. 송(宋) 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이 집정 대신(執政大臣)이 되었을 때, 스스로 나라를 보좌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한다고 하였으며, 신종(神宗)도 또한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기를 도모한다고 하였었다. 그러나 후세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내가 비록 백성에게 이(利)로운 일을 나라에 시행하고 있으나, 또한 후세에 나무람을 받을 것이 있지 않겠는가. 지금의 이때는 비록 무사 평안하였다고 말하나, 태평을 믿는 것은 쇠퇴(衰退)하고 어지러워지는 징조가 되는 것이니, 오늘의 편안한 것을 믿고 후일의 환란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경서(經書)를 깊이 연구하는 것은 실용(實用)하기 위한 것이다. 바야흐로 경서와 사기(史記)를 깊이 연구하여 다스리는 도리를 차례로 살펴보면, 그것이 보여 주는 나라 다스리는 일은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쉽다. 그러나 실지의 일에 당면하면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 있는 것이다. 내가 비록 경서와 사서(史書)를 널리 찾아 읽었으나, 오히려 아직 능(能)하지 못하니,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총제(摠制) 한상덕(韓尙德)이 아뢰기를, "전하의 오늘의 말씀은 실로 종묘 사직과 백성들의 복(福)입니다. 또한 인신(人臣)으로서 말할 수 있는 때입니다. 만약 말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찌 감히 침묵하고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해서 할 말이 없겠는가. 더구나, 대간(臺諫)은 언책(言責)을 직임으로 삼는 것이니, 해야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다 말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이미 어질지 못하고 사물의 처리에 어두우니, 반드시 하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을 것이다. 힘써 그 허물을 생각하여 하늘의 꾸짖음에 대답하게 하라(予旣無良 昧於施措 必有不合天意者矣 勉思厥愆 以答天譴)." 하였다.
이조 판서 허조가 아뢰기를, "하늘의 꾸짖음은 실로 사람이 하는 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인데, 요사이 천기(天氣)가 순조롭지 않으니, 신은 화란(禍亂)이 일어날 징조를 이미 보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만 신 등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오직 날마다 벌벌 떨며 겁내고 두려워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 하였다.
■ 18세기의 학자 군주 정조의 지식의 위계
정조(正祖) 시대의 지식인들은 의리학(義理學), 그리고 의리학을 전제로 하는 경세학(經世學)이라는 시대정신을 공유했다. 의리학이 전제되지 않은 경세학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이 시대정신을 의리학과 경세학의 '결합' 혹은 '절충'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부족한 면이 있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의리학과 경세학이 일체화된 상태의 주자학(朱子學)에, 나아가 그런 주자학을 정점으로 삼는 지식의 위계에 공감했다고 말하는 편이 사태의 본질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학자 군주는 이런 학문관 혹은 지식의 위계를 어떻게 보고 있었던 것일까. 정조는 조선의 어떤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고 어떤 새로운 학문적 토대를 만들어가려 했을까. 과연 정조는 조선에 들어온 서학(西學), 양명학(陽明學), 고증학(考證學) 등을 주자학을 위협하는 사조로 여겼던 것일까. 정조는 그것들이 모두 같은 위상에 있다고 생각했는가. 정조에게 '실용(實用)'은 어떤 의미였는가.
정조가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확신했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주자(朱子)의 저술에 관한 종합본을 편찬하려 했을 만큼 주자학에 깊은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에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이라는 책을 편찬했다. 이 책은 주자와 송시열의 글 가운데 현실 인식, 학문관 등 공통된다고 판단한 대목들을 편집한 것이다.
정조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축봉사(己丑封事; 송시열이 효종 즉위초에 시무 및 유학의 정치적 이상을 13개 조항에 걸쳐 건의한 것)를 읽어보면 바로 송 선생이 주 부자의 무신봉사(戊申封事; 주자가 남송 효종에게 시급히 시행해야 할 일 여섯 가지를 건의한 글)에서 심법을 얻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축봉사는 송시열이 효종(孝宗)에게 올린 글이며, 무신봉사는 주자가 남송의 효종(孝宗)에게 올린 글이다. 정조는 이 두 글 사이를 흐르는 주자와 송시열의 공감대에 주목했던 것이다. 정조가 송시열을 주자의 학통 속에서 이해했다는 사실은 뒷날 송시열의 문집을 규장각에게 간행하게 하면서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에서 성리학은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論) 논쟁 등을 거치면서 철학적으로 완숙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정조는 그런 철학적 성취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정조는 이 문제가 조선의 성리학 역사에서 중요한 논쟁거리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이미 세손 시절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관한 여러 주장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하여 분류하고 편집해서 사칠속편(四七續編)을 편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조의 문제의식은 사단칠정 논쟁의 당사자들처럼 치열하지는 않았다.
당시 정조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단칠정에 관한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설은 진실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실상을 따져보면 모두 우리 유가의 학문이며 주자를 높이는 논설들이다. 그들이 다투는 것은 단지 매우 미세한 차이일 뿐이다." 심지어 정조는 사단과 칠정의 개념이 명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했다.
1781년(정조 5년) 맹자(孟子)를 공부하는 자리에서 정조가 이렇게 말했다. "공자는 일찍이 사단 칠정을 말한 적이 없었다. 중용(中庸)에서 비로소 칠정(七情)을 말하였고 맹자가 비로소 사단(四端)을 말하였다. 단(端)과 정(情)이 이름이 이미 다른데다 사(四)와 칠(七)이 숫자 또한 다르니, 다시 자사(子思)나 맹자(孟子) 같은 성인이 나와 심성의 오묘한 쓰임새를 끝까지 논한다면, 칠정 밖에 또 다른 정(情)이 없고 사단 밖에 또 다른 단(端)이 없으리란 것을 어찌 알겠는가."
정조는 18세기 초 노론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인물성동이 논쟁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동론(同論)과 이론(異論)에 모두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론은 이(理)를 위주로 말한 것이고, 이론은 기(氣)를 위주로 말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이 문제를 더 깊이 천착하거나 시비를 판별하려 하지는 않았다. 군사(君師; 스승으로서의 임금)를 지향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깊이 끼어들어서 얻는 실익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송시열로 상징되는 의리론(義理論)과 존주론(尊周論)을 충실하게 계승했지만, 사단칠정 논쟁이나 인물성동이 논쟁 등 조선 학계가 이룬 심성론적(心性論的) 성취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만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는 문제일 뿐이었다.
정조는 이기심성론 대신 역사상의 경세가들에 주목했다. 정조가 정도전(鄭道傳)을 높게 평가한 것은 그의 처신이 성리학적 명분론에 부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조선 건국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정조에 따르면, 정도전은 '문장과 경륜으로 본다면 일세의 영웅'이며, 그의 문집 삼봉집(三峰集)은 '개국원훈(開國元勳; 나라를 개창한 원로 공신)의 경제문자(經濟文字; 경세제민의 글)'다. 정조는 정도전의 문집을 규장각에서 간행하게 했다.
17세기 조선의 경세가 가운데 정조가 높이 평가한 인물은 김육(金堉; 대동법의 주요 발안자)과 유형원(柳馨遠; 17세기 조선의 전반적인 개혁책을 제시한 실학자)이었다. 정조는 김육이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한 경세가로서만이 아니라 훌륭한 문장가로서 재평가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면서 반계수록(磻溪隨錄; 유형원의 저서)을 참고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정조는 유형원을 '유용한 학문으로 경제문자를 지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정조는 이 밖에도 국난에서 나라를 구한 인물을 특별히 기억했다. 이순신의 문집을 간행하게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조는 중국사에 등장하는 경세가들도 눈여겨 보았다. 그중에 가장 주목했던 사람은 당나라 관료 육지(陸贄)였다. 정조는 육지의 상소문을 모은 '육선공주의'를 학문과 사공(事功; 실용적 학문), 언어와 문장 모든 면에서 높게 평가했다. 즉위 초 육지의 전집을 간행하기도 했던 정조는 뒷날 주서절요(朱書節要)의 체제에 맞추어 육주약선(陸奏約選)을 편찬했으며, 육지의 글에 권점(圈點; 글이 잘된 곳 또는 중요한 곳을 표시하기 위하여 찍는 둥근 점)을 찍은 육고수권(陸稿手圈)을 펴내기도 했다. 정치와 교화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고 장용외영(壯勇外營)을 두어 수비하게 한 것은 수도권 강화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이런 아이디어를 육지의 강간약지정책(强幹弱枝政策; 중국 한나라 때 중앙정부를 강화하고 지방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실시한 정책)에서 얻었다.
정조는 주자학을 계승하면서도 이기심성론 위주로 발달해온 그런 철학, 경사체용(경전을 근본으로 삼고 역사 속에서 경전의 가르침이 실현된 것을 확인하는)을 원칙적으로만 강조하는 제왕학(帝王學)으로는 시대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의리의 근거가 되는 주자학, 경세의 지침이 되는 주자학을 존중했던 것이다. 주자학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 둘은 처음부터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조선의 학문적 지형이 이기심성론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의리학과 경세학의 중요성, 혹은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인식이 희석되는 측면이 있었다.
정조는 이런 세태를 바로잡고 의리학, 그리고 의리학을 전제로 하는 경세학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을 '의리경세학(義理經世學)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침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행복하도다. 내게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아는구나"고 말했다. 이렇듯 공자와 같은 성현(聖賢)이라야만 비로소 허물을 듣고 기뻐하며 비평 의견을 마주하고 자신의 행운으로 여기며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감사할 수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잘못을 발견하여 제때에 고쳐 바로 잡아야만 비로소 도덕과 수양을 제고하고 자신을 완벽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제자규(弟子規)에서는 "모르고 잘못을 하는 것을 일러 착오(錯)라 하고, 알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일러 악(惡)이라 한다. 착오를 고칠 수 있으면 허물이 없지만 덮어 감춘다면 허물이 더 늘어나게 된다"고 했다. 이 문장을 말 그대로 풀이해 보자면, 과실(過失)이 나타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선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의도적으로 악한 일을 한 것인지 분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일을 덮어 감추지 말고 단점을 변호하지 않으며 성심으로 허물을 고친다면 절대 무원칙적으로 자신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근본을 바로 잡고 근원을 깨끗이 한다는 것인데 병의 뿌리를 찾아내어 근본에서부터 마음을 바로 잡고 집착을 없애야 잘못한 과오에 대한 뉘우침이 아닐까.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었다거나, 참아냈다거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며 철저하게 마음에서부터 노력하여 증상에 맞게 치료해야 한다.
만약 마음이 바르지 못해 조성된 것이라면 곧 마음을 바로잡고 이기적인 망념을 없애야 하고, 또 만약 자신을 다스림이 엄격하지 못했다면 일사일념(一思一念), 일언일행(一言一行) 중에서 자신을 바로 잡아야 하며,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성현(聖賢)은 잘못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하지만 고칠 수 있으며 아울러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여 허물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아 물이 흘러가듯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정말이지 옛날 속담에 "성현이 아니라면 누가 허물을 고칠 수 있으랴", "잘못이 있어도 고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은 없다"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겠다. 마음속 깊이 진정한 것을 뉘우친다는 것은 무엇인지 두 편의 이야기를 잘 들어 보자.
송(宋)나라 때 서(徐) 선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서 선생이 처음 안정(安定) 선생을 만났을 때 머리가 조금 비딱했다. 안정 선생은 곧 아주 엄숙하게 말했다. "머리는 똑바로 해야 하나니 기울어져서는 안 되느니라."
서 선생은 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는 "아이고!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마음이 바르면 몸가짐 또한 바른 것이다." "그럼 선생께서는 머리를 똑바로 해야 하며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 그럼 마음 또한 어찌 바로잡아야 하는지요?" "마음이 바르면 몸가짐 또한 바른 것이다." "듣고 보니 선생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미숙한 제게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감사라고까지 할 게 있겠는가."
이후 서 선생의 마음은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처세하면서 몸을 닦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 글자가 무엇인지 아는가?" "정직이옵니다." "맞았네, 정직 말 그대로 바르고 곧다는 말이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 알겠는가?" "예, 감사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이다.
송나라 때의 대 문장가인 증공(曾鞏)은 왕안석(王安石)과 친분이 두터웠다. 어느 날 신종(神宗) 황제는 증공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증공에게 이런 말을 했다. "증공!" "예, 폐하!" "증공 그대가 보기에 안석의 인물됨이 어떠한고?"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의중을 모르겠나이다." "그냥 아무 뜻없이 물어 보는거니 증공이 안석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면 된다." "예!, 안석의 문장은 한나라 때 대문장가인 양웅(楊雄)에 못지는 않지만 사람이 인색하기 때문에 양웅을 능가하지는 못하옵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러나 안석의 인물됨이 부귀나 재물을 중시하지 않는데 증공 그대는 어찌하여 인색하다고 하는 것이오?" "폐하, 신이 말씀드리는 소위 인색함이란 안석이 비록, 일을 추진함에 용감하고 쌓은 업적은 많지만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바로 잡는 데는 인색하다는 뜻이옵니다." "증공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도 틀리진 않도다. 그대는 듣던 대로 정직함을 아는 자로다." "황은이 망극하여이다."
그 뒤 왕 안석은 뛰어난 재주와 학문으로 천하에 명성을 날렸으나 잘못을 덮어 감추고 외고집으로 신법(新法)을 추진했기 때문에 결국 창생(蒼生)과 백성을 해쳐 후세에 악명을 남겼다.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에 대해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 잘못된 것을 끝까지 고집을 부려서는 안되겠다.
잘못은 나 한사람이 하는 거라지만 그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잘못을 저지른 본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설사 잘못한 것을 인정을 한다고 해도 뉘우치고 고칠 생각을 하지 않거나 한다면 잘못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거나 다름이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마음, 의지일 것이다. '언젠간 고쳐지겠지' 라고 생각하지 말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바로 인정을 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 아첨에 대한 충고
안영이 죽은 지 17년째 되던 해였다. 어느 날 경공이 여러 신하들과 활을 쏘면서 술을 마시는 잔치를 베풀었다. 경공의 차례가 되어 활을 쏘았는데 과녁을 맞힐 때마다 여러 신하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목소리로 훌륭하다고 소리쳤다.
마침 현장이 들어오자 경공이 그에게 말했다. "현장, 내가 안영을 잃은 지 17년이 되었소. 그 뒤 내 잘못을 지적하는 말은 한 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었소, 내가 방금 활을 쏘아 과녁을 맞혔더니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소리가 한 사람 입에서 나온 듯하더이다."
이 말을 듣고 현장이 대답했다. "이는 여러 신하들이 못난 탓입니다. 그들은 슬기로운 임금일지라도 잘못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임금의 기분을 건드리며 바른 소리를 할 만큼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습니다. 임금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는 것입니다. 신하들은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고, 또 임금이 즐겨 먹는 것을 먹습니다. 자벌레는 누런 잎을 먹으면 몸 빛깔이 노래지고, 파란 잎을 먹으면 파래집니다. 혹시 임금님께서 아첨하는 사람들의 말을 좋아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경공이 불현듯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말이오. 오늘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그대가 임금이고 내가 신하같소."
마침 그때 바닷가 사람들이 물고기를 진상했다. 경공이 그 가운데 수레 50대의 몫을 현장에게 상으로 내렸다. 현장이 돌아가는데 물고기를 실은 수레가 장안을 가득 메웠다.
현장이 수레를 모는 사람의 손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방금 임금님이 활을 쏘았을 때 훌륭하다고 소리친 사람들은, 실은 모두 이 물고기를 얻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네. 옛날 안영 선생님은 상을 사양하고 임금님의 잘못을 바로잡았네. 그래서 임금의 허물도 감출 수가 없었지. 지금 여러 신하들은 아첨해서 이익을 얻으려고 과녁을 맞히자마자 한 목소리로 훌륭하다고 칭찬했던 것이야. 이제 임금님을 제대로 보좌하는 사람은 저 사람들 속에서 보이지 않는데, 물고기를 상으로 받은 사람만 있구나. 내가 물고기를 받는다면 안영 선생님의 가르침을 어기는 일이며, 상을 바라고 아첨하는 저 사람들과 뭐가 다르겠느냐?"
현장은 물고기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아첨하는 사람은 반드시 목적이 있다. 환심을 사서 이득을 챙기려는 것이다. 권력자와 부귀한 자의 주변에는 이런 아첨꾼들이 몰려 있다. 그러나 아첨꾼의 말을 배척하고 뼈아픈 충고를 들을 줄 알아야 발전할 수 있다.
경공은 다행히 안영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여 나라를 잘 다스려왔기 때문에, 안영이 죽고 나서 충직한 사람의 충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다. 안영이 죽고 나서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안영처럼 충고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은, 충고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 신뢰를 얻지 못한 간언은 비방으로 들린다
논어(論語) 이인(里仁)편에서 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游)는 이렇게 말한다. "임금을 섬김에 자주 간(諫)하면 욕을 당한다."
흔히 직언(直言), 직간(直諫) 만을 강조해온 성리학이나 주자학에 익숙한 우리가 볼 때는 조금은 낯선 소리다. 그러나 자장(子張)편에서 또 다른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는 이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윗사람에게 믿음을 준(혹은 신임을 얻은) 연후에 간언해야 하는 것이니, 만일 믿음을 주지 못하고서 간하면 윗사람은 자신을 헐뜯는다고 여길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이다. 사실 공자도 바로 이런 뜻에서 한 말이 있는데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가 바로 그것이다. 애초에 오역(誤譯)을 하고 있으니 그 뜻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기존의 흔한 번역이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이 오역의 방점은 '먼 곳'에 찍혀 있다. 물론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면 반갑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내용이 논어의 첫머리 세 가지 중의 두 번째를 차지할 수는 없다. 만일 이런 번역이 맞는다고 한다면 반문을 해보겠다. 가까이에서 자주 보는 친구가 찾아오면 즐겁지 않다는 말인가?
공자가 기껏 '가까이에서 자주 보는 친구보다는 먼 곳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벗에게 즐거운 마음을 가지라'는 명심보감(明心寶鑑)만도 못한 처세의 노하우를 던졌고, 또 미지의 편집자는 그 뜻을 받아 논어의 첫머리 세 가지 중의 두 번째 자리에 두었겠는가? 당연히 아니다.
붕(朋)은 동지지우(同志之友)
이런 오역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실마리는 '붕(朋)'에 있다. 朋은 그냥 친구가 아니다. '뜻을 같이하는 친구(同志之友)'가 朋이다. 임금에게 동지와 같은 신임을 받고 있는 신하다.
두 번째는 '원(遠)'이다. '멀다'는 뜻밖에 모르면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여기서 遠은 '멀다'가 아니라 '밝다'는 뜻이다. 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遠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자장(子張)이 밝다 혹은 밝음(明)에 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점점 젖어 드는 (동료에 대한) 참소와 살갗을 파고드는 (친지들의 애끓는) 하소연을 (단호히 끊어) 행해지지 않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밝다(明)고 말할 수 있다. (그 같은) 점점 젖어 드는 (동료에 대한) 참소와 살갗을 파고드는 (친지들의 애끓는) 하소연을 (단호히 끊어) 행해지지 않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음과 어두움으로부터) 멀다(遠)고 말할 수 있다."
요즘은 참소(讒訴)나 참언(讒言)이란 말보다는 중상모략(中傷謀略), 무고(誣告), 헐뜯기 등이 더 자주 사용된다. 공자의 이 말도 군주나 지도자를 향해 하는 말이다. 리더가 미리 알아서 신하들 간에 실상과 동떨어진 중상모략이 행해지지 않게 하고 주변 사람들의 사사로운 청탁을 끊어낼 때 그 리더십은 공명정대하다(明=遠)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붕(朋)과 원(遠)을 풀면 거의 다 된 셈이다. 신하들 중에 신뢰하며 뜻을 같이하는 신하가 있는데 먼 곳에, 즉 군주 주변의 사사로운 측근이나 근신(近臣)이나 후궁(後宮)들이 늘 해대는 익숙한 세계[近]에서 벗어난 곳에 가서 공정하고 비판적이고 때로는 귀에 거슬릴 수도 있는 불편하지만 곧은 이야기들을 듣고서 바야흐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당연히 어떤 식으로건 그런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군주로서 불편한 정도를 넘어 불쾌하고 크게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신뢰를 공유하고 뜻을 같이한다 해도 신하의 입장에서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그것은 온전히 군주의 마음 자세에 달렸다.
겉으로만 즐거워해서도 신하는 입을 떼기 어렵다. 진실로[亦] 그러할 때라야 신하는 조심스럽게 군주의 허물들을 피하지 않고 전달할 수가 있다. 눈 밝은 독자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고대(古代) 중국부터 우리 조선시대까지 면면하게 이어진 언관(言官)의 간쟁(諫爭) 정신은 바로 이 같은 임금의 열린 마음이 전제될 때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다.
한 동이 술과 두 그릇의 밥
이것이 지금까지 필자가 10여 년 논어 공부를 통해 알아낸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의 속뜻이었다. 그러나 최근 주역(周易) 공부를 통해 이를 더욱 심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감(坎) 괘의 밑에서 네 번째 음효에 대한 풀이 덕분이다. 이를 소개한다.
이른바 감괘의 육사(六四; 밑에서 네 번째 음효)에 대한 주공의 풀이다. "한 동이 술과 두 그릇의 밥을 질그릇에 담고 마음을 결속시키기를 창문을 통해서 하면 끝내는 허물이 없다."
무슨 시구(詩句)처럼 보이는 이 모호한 표현을 송(宋)나라 학자 정이천(程伊川)은 이렇게 풀어냈다. "이는 신하된 자로서 위험에 대처하는 도리(處險之道)를 말하고 있다. 대신이 위험과 어려움의 때에 직면했을 때에는 오직 지극한 열렬함으로 임금에게 믿음을 보이고 군자와의 사귐을 튼튼하게 해서 틈이 생겨서는 안 되고, 또한 능히 임금의 마음을 열어 밝히며(開明) 가히 허물이 없는 상태를 보존할 수 있다.
무릇 윗사람의 두터운 신임을 바란다면 오로지 그 질박한 진실함(質實)을 다할 뿐이다. 허례허식을 많이 하고 꾸밈을 요란하게 하는 데에는 음식을 잘 차린 잔치만 한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잔치를 갖고서 비유한 것이니 이는 마땅히 요란하게 꾸미지 말고 오직 질박한 진실함만으로 군주를 대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즉 한 동이 술과 두 그릇의 밥만 사용하되 다시 소박한 질그릇을 집기로 사용하는 것은 질박함이 지극한 것이다.
그 질박함이 이와 같고 또 모름지기 '마음을 결속시키기를 창문을 통해서' 해야 한다. 마음을 결속시킨다는 것은 군주에게 나아가 군주의 마음을 결속시키는 방도를 말한다. 창문[牖]이란 열어서 빛을 통하게 하는 것이다. 방은 어둡기 때문에 창문을 두어 빛을 통하게 해서 밝힌다. 창문을 통해서 한다는 것은 빛이 통하는 밝은 곳으로부터 먼저 한다는 말이니 군주의 마음이 밝은 곳을 비유한 것이다.
남의 신하 된 자가 진실한 믿음[忠信]과 좋은 도리[善道]로 군주의 마음을 결속시키려 할 때에는 반드시 군주가 밝게 알고 있는 곳에서부터 먼저 하면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가려져 막힌 곳이 있고 쉽게 통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가려져 막힌 곳이 어두운 부분이고 쉽게 통할 수 있는 곳이 밝게 알고 있는 부분이다. 마땅히 그가 밝게 알고 있는 부분을 취해서 설명하고 이해시켜 신임을 구한다면 쉽다. 그래서 ‘마음을 결속시키기를 창문을 통해서’ 한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설사 위험하고 어려운 때에 처하더라도 끝내는 허물이 없을 수 있다. 또 군주의 마음이 환락에 빠져 가려져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가려졌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강력하게 그 환락의 잘못됨만을 비판하여 군주가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다면 어쩌겠는가? 반드시 가려져 있지 않은 일에서부터 차근차근 미루어 헤아려 가려진 부분을 언급한다면 그 마음을 깨칠 수가 있는 것이다."
유방의 마음을 바꾼 상산사호
'명(明)'이란 창문 중에서도 가장 밝은 남쪽 창문, 즉 임금도 공감할 수 있는 밝은 도리를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 임금의 마음을 바꾼 사례로 정이천은 한나라 유방(劉邦)이 척희(戚姬; 척부인을 가리킨다. 고조의 총희로 조왕 여의를 낳았다)를 아껴 태자를 여의로 바꾸려 했을 때 그의 마음을 바꾼 사호(四皓)의 이야기를 든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장량전(張良傳)이다.
한나라 12년 상이 나아가 포(布; 경포)의 군대를 쳐서 깨트리고 돌아왔는데 병이 더 심해지자 더욱더 태자를 바꾸고 싶어했다. 장량이 간언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장량은 병을 핑계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숙손태부(叔孫太傅; 숙손통)는 고금의 일을 끌어들여 설득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태자를 위하는 간쟁을 했다. 상은 거짓으로 그러겠노라고 했지만 오히려 어떻게든 바꾸고 싶어 했다.
연회가 열려 술자리가 마련됐는데 태자가 상을 모시게 됐다. 네 사람이 태자를 시종했는데 나이가 모두 80여 살이었고 수염과 눈썹이 은빛으로 희었으며 의관이 몹시 훌륭했다. 상이 이들을 괴이하게 여겨 "저들은 무엇을 하는 자들인가?"고 하자 네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며 각자 자신의 이름과 성을 말하기를 동원공(東園公), 녹리선생(角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라고 했다.
이에 상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찾은 것이 여러 해인데 그대들은 나를 피해 달아나더니 지금은 그대들이 어찌 스스로 내 아이를 따르며 교유하고 있는가?"
네 사람 모두 말했다. "폐하께서는 선비를 하찮게 여기고 욕도 잘하시니 신들이 욕을 먹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에 달아나 숨었던 것입니다. 남몰래 듣건대 태자께서는 사람됨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삼가면서[仁孝恭敬] 선비를 아끼시니 천하에서는 목을 빼고서 태자를 위해 죽으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이므로 그 때문에 신들이 온 것일 뿐입니다."
상이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그대들은 잘 해서 끝까지 태자를 보살피며 지켜주시오."
네 사람이 축수를 이미 마치고 총총히 떠나가자 황상은 그들을 멀리 안 보일 때까지 전송했다.
한무제(漢武帝)의 마음을 돌린 전천추
한나라 역사에서 이같은 지혜로운 간언을 했던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한무제(漢武帝)가 여태자를 죽이고서 오랫동안 용서를 하지 않았다. 이때 전천추가 글을 올려 그 처사가 잘못됐음을 지적했는데 이 또한 구사의 도리에 해당한다. 반고의 한서(漢書) 전천추전(田千秋傳)이다.
차천추(車千秋)는 본래의 성이 전씨(田氏)인데 그의 선조는 제(齊)나라의 명문가였던 전씨 중에서 함곡관 동쪽인 장릉(長陵)으로 이주한 집단에 속했다. 천추(千秋)는 고침랑(高寢郞; 고조의 능을 지키는 낭관)이 됐다.
여태자가 강충에게 중상모략을 입어 패망한 일이 있은 지 오랜 시간이 흘러 천추는 급변의 사태를 논하는 글을 올려 태자의 원한을 대변해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군대를 가지고 농간을 부렸다면 그 죄는 태형에 해당합니다. 천자의 아들이 잘못해서 사람을 죽였다면 무슨 죄에 해당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꿈을 꿨는데 머리가 하얀 노인 한 분이 신에게 일깨워 준 이야기입니다."
이때 상은 태자가 두려움에 떨어서 그런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추의 말을 듣고서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천추를 불러 만나보았다. 어전에 이르렀는데 천추는 키가 8척 남짓에 체모가 매우 수려했으며, 무제는 그를 만나보고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자간의 일에 대해서는 남들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건만 공만이 홀로 그렇지 않음을 밝혀주었다. 이는 고묘(高廟)의 신령이 공을 시켜 나를 일깨운 것이니 공은 마땅히 나를 보좌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는 즉석에서 천추를 세워 제배(除拜)해 대홍려(大鴻臚; 귀순한 이민족과 제후들을 관할하는 벼슬)로 삼았다. 여러 달이 지나 드디어 유굴리를 대신해 승상으로 삼고 부민후(富民侯)에 봉했다. 천추는 다른 재능이나 술학(術學; 경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문벌이나 공로도 없이 단지 한마디 말로 상의 뜻을 일깨워 불과 몇 달 만에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봉후(封侯)됐으니 이는 세상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태종의 마음을 바꾼 권근(權近)
우리 역사에서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이 같은 밝은 간언(明諫)의 사례가 있다. 1406년(태종 6년) 8월 18일 태종(太宗)은 전격적으로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겠다는 전위(傳位) 의사를 밝혔다. 당연히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하륜(河崙), 성석린(成石璘) 등 재상들이 전위 의사 철회를 청했으나 태종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가운데 길창군 권근(權近)이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중 일부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일을 함에 있어 그 처음을 잘 도모하라(作事謀始)'고 했으니 그 처음 단계에서 잘 도모하지 못하면 마침내 반드시 근심이 있는 법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대사(大事)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세자께서 비록 총적(冢嫡; 적장자)이라 하더라도 어리고 약하시어 여러 사람의 마음에 미흡하오니 하늘의 뜻이 아직도 모이지 않았음을 진실로 알 만합니다. 전하께서 나라의 형세가 염려스러운 것은 걱정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뜻을 어기고 많은 사람의 마음을 거슬러가면서 억지로 어리고 약한 자에게 나라를 전해주려고 하시니, 이는 종묘사직을 가벼이 여겨 내팽개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자세히 살펴 조치하시어 국새(國璽)를 다시 거두시고 친히 만기(萬幾)에 임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자의 연기(年紀; 나이)가 장성하여 공덕(功德)이 더욱 나타나고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즐겨 따르며 천명(天命)이 모이기를 기다린 연후에 먼저 명나라 조정(朝廷)에 보고하고 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려서 그것을 전하신다면 종묘사직에 심히 다행할 것이요, 국가에도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많은 이의 글이 올라왔지만 실록(實錄)은 유일하게 이 글에 대해 "상은 비록 윤허하지 않았지만 뜻이 조금은 움직였다(感悟)"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틀 후 마침내 태종은 전위의 명을 거뒀다.
■ 임금의 잘못을 타이른 대사간 원계채
조선 중기 문신 원계채(元繼蔡)는 1529년 대사간 재직시 중종(中宗)의 정국 운영이 난맥상을 빚자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요지는 이렇다고 합니다.
전하는 즉위 초에는 정성으로 덕을 닦고, 세운 뜻도 굳었다. 하지만 근년에는 일마다 고식적인 것을 따르고, 구차한 것이 많다. 본원(本源)이 한번 가려지면 백 가지 일이 다 그릇되고 만다. 전하께서 엄하게 다스리려 해도 요행으로 은혜를 얻은 자들이 인척의 힘을 빌려 못된 짓을 한다. 또 간언을 올리면 성내는 뜻을 드러내므로 진언하는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다. 이
틈을 타 인연을 맺은 무리들이 요행을 바라는 버릇을 더욱 제멋대로 행하니, 이래서야 나라 꼴이 되겠느냐고 했다.
성종(成宗) 24년(1493년) 때의 일로, 인사 문제와 관련해 간관들이 성종의 처사를 간하자 화가 난 성종은 "지금의 대간(臺諫)들은 털을 불어가며 작은 흠집을 찾아내려 한다"며 대간들을 잡아들여 국문(鞠問)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자 대사간 허계(許誡)가 상소를 올려 국문 중단을 간절하게 요청했는데 그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하가 말을 올리는 방법이 하나가 아닙니다. 정간(正諫)이 있고 규간(規諫; 정해진 법규에 따라 간하는 것), 풍간(諷諫), 휼간(譎諫)이 있으니 그 간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그 마음은 모두 임금을 허물이 없는 땅에 두려는 것입니다."
간(諫)한다는 것은 임금이나 부모 등 윗사람이 옳지 못한 생각을 하거나 잘못을 했을 때 이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요즘식으로 보자면 비판이 될 수도 있고 설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임금에게 간하는 일을 하는 사간원(司諫院)이 있었습니다. 책임자는 대사간(大司諫; 정3품 당상관)이고 그 아래 사간(司諫; 종3품), 헌납(獻納; 정5품), 정언(正言; 정6품)을 거느렸다고 합니다. 이들 간관(諫官)들은 누구보다도 자주 임금에게 껄끄러운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수시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예부터 말과 태도의 강도에 따라 오간(五諫)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정간(正諫)은 곧이 곧대로 간하는 것, 장간(戇諫)은 우직하게 눈치 살피지 않고 간하는 것, 강간(降諫)은 자신을 최대한 낮춰 겸손한 문체나 태도로 할 말을 하는 것, 휼간(譎諫)은 고사나 시구를 인용해 은근하게 간하는 것, 풍간(諷諫)은 풍자를 통해 알듯 모를듯하게 간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국 주나라의 유학자 순자(筍子)의 말입니다. "나에게 비(非)로써 대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며, 나에게 시(是)로써 대하는 자는 나의 벗이고, 나에게 아첨(阿諂)하는 자는 나의 적이라고 했습니다."
▶️ 好(좋을 호)는 ❶회의문자로 女(녀; 사람, 나중엔 여자를 나타냄)와 子(자; 아이)의 합자(合字)이다. 어머니와 아들 혹은 여자와 남자의 두터운 애정이라는 데서 좋아하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好자는 '좋다'나 '아름답다',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好자는 女(여자 여)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있으니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好자는 보통 이런 식으로 풀이를 하곤 한다. 하지만 好자는 본래 엄마가 아이를 지긋이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왜 母(어미 모)자가 아닌 女자가 엄마를 뜻하는지에 대한 반론 때문이었는지 母자가 들어간 㝀(좋을 호)자가 만들어져 있기도 하지만 쓰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好(호)는 성(姓)의 하나로 ①좋다 ②사이좋다 ③아름답다 ④좋아하다 ⑤사랑하다 ⑥구멍 ⑦우의, 정분, 교분(交分) ⑧친선의 정 ⑨곧잘, 자주, 걸핏하면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미워할 오(惡)이다. 용례로는 썩 좋은 상황을 호황(好況), 무슨 일이 잘 되어 가기 시작함을 호전(好轉), 사물의 사정이나 상태나 경기 등이 좋음 또는 잘 되어감을 호조(好調), 좋아함과 미워함을 호오(好惡), 친절한 마음씨 또는 좋게 생각하는 마음을 호의(好意), 좋은 평가나 좋은 평판을 호평(好評), 좋은 값을 호가(好價), 좋은 감정을 호감(好感), 좋은 일이나 일을 벌이기를 좋아함을 호사(好事), 여럿 중에서 가려서 좋아함을 선호(選好), 어떤 사물을 즐기고 좋아함을 기호(嗜好), 벗으로 사귐을 우호(友好), 사랑하고 좋아함을 애호(愛好), 성적이나 성질이나 품질 따위가 주로 질적인 면에서 대단히 좋음을 양호(良好), 더할 수 없이 좋음을 절호(絶好), 좋아하지 아니함이나 좋지 아니함을 불호(不好), 사이 좋게 지냄을 수호(修好), 좋은 일에는 방해가 되는 일이 많음을 이르는 말을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옷과 좋은 음식 또는 잘 입고 잘 먹음을 이르는 말을 호의호식(好衣好食),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을 이르는 말을 호생오사(好生惡死), 남과 겨루어서 꼭 이기기를 즐기는 성벽을 일컫는 말을 호승지벽(好勝之癖), 학문을 좋아하여 책 읽기에 게으름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호학불권(好學不倦) 등에 쓰인다.
▶️ 勝(이길 승)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힘 력(力; 팔의 모양으로, 힘써 일을 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朕(짐)으로 이루어졌다. 근육(月)을 써서 힘써 싸운다는 뜻이 합(合)하여 이기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勝자는 '이기다'나 '뛰어나다', '훌륭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勝자는 朕(나 짐)자와 力(힘 력)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朕자는 노를 저어 배를 움직이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천자가 자신을 지칭하는 '나'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朕자는 천자가 자신을 뱃사공에 비유하여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여기에 力자가 더해진 勝자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천자가 힘을 발휘한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즉 勝자는 싸움에서 이기거나 나라를 훌륭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이기나'나 '뛰어나다', '훌륭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勝(승)은 (1)일부 명사(名詞) 아래 쓰이어 승리(勝利)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이기다 ②뛰어나다 ③훌륭하다 ④경치(景致)가 좋다 ⑤낫다 ⑥승리를 거두어 멸망시키다 ⑦넘치다 ⑧지나치다 ⑨견디다 ⑩바르다 ⑪곧다 ⑫기회(機會)를 활용하다 ⑬뛰어난 것 ⑭부인(婦人)의 머리꾸미개 ⑮훌륭한 것 ⑯이김 ⑰모두, 온통, 죄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길 극(克), 견딜 감(堪), 참을 인(忍), 견딜 내(耐),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패할 패(敗), 질 부(負)이다. 용례로는 겨루어 이김을 승리(勝利), 이김과 짐을 승패(勝敗), 이김과 짐을 승부(勝負), 송사에 이김을 승소(勝訴), 꼭 이길 만한 좋은 꾀 또는 가망을 승산(勝算), 경기나 내기 따위에서 이겨서 얻은 점수를 승점(勝點), 경치가 좋은 높고 밝은 곳을 승개(勝塏), 뛰어나게 좋은 경치를 승경(勝景), 경개 좋기로 이름난 곳을 승지(勝地), 경치가 좋음 또는 좋은 곳을 경승(景勝), 훌륭하고 이름난 경치를 명승(名勝), 크게 이김을 압승(壓勝), 운동 경기 등에서 이기고 짐을 마지막으로 가림을 결승(決勝), 성미가 억척스러워서 굽히지 않는 이상한 버릇을 기승(氣勝), 경기나 경주 등에서 첫째로 이기는 것을 우승(優勝), 힘이나 가치 따위가 딴 것보다 썩 나음 또는 크게 이김을 대승(大勝), 꼭 이김이나 반드시 이김을 필승(必勝), 통쾌한 승리 또는 시원스럽게 이김을 쾌승(快勝), 잇달아 이김을 연승(連勝), 완전하게 이김 또는 그런 승리를 완승(完勝), 경기 등에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이기는 것을 낙승(樂勝), 한 번도 지지 않고 전부 이김을 전승(全勝), 승전의 결과를 적은 기록을 일컫는 말을 승전보(勝戰譜), 재주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함을 일컫는 말을 승기자염(勝己者厭), 이기고 짐을 판가름하는 운수를 이르는 말을 승패지수(勝敗之數),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뜻으로 싸울 때마다 번번이 이김을 일컫는 말을 백전백승(百戰百勝), 어떤 일에 앞장서는 자나 맨 먼저 주창하는 자를 이르는 말을 진승오광(陳勝吳廣),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이라 한다는 뜻으로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임을 이르는 말을 자승자강(自勝者强), 나은 자는 이기고 못한 자는 패함 또는 강한 자는 번성하고 약한 자는 쇠멸하는 적자 생존을 일컫는 말을 우승열패(優勝劣敗), 한 번 이기고 한 번 짐을 일컫는 말을 일승일패(一勝一敗), 유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으로 약한 것을 보이고 적의 허술한 틈을 타 능히 강한 것을 제압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유능승강(柔能勝剛), 교묘한 꾀로 먼 곳의 싸움을 이기는 것을 이르는 말을 결승천리(決勝千里), 이름난 지구와 경치 좋은 곳을 이르는 말을 명구승지(名區勝地), 예의가 지나치면 도리어 사이가 멀어짐을 일컫는 말을 예승즉이(禮勝則離), 하도 수가 많아서 이루 셀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불가승수(不可勝數), 명승과 고적 즉 훌륭한 경치와 역사적인 유적을 일컫는 말을 명승고적(名勝古跡), 남과 겨루어서 꼭 이기기를 즐기는 성벽을 일컫는 말을 호승지벽(好勝之癖), 매우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름을 일컫는 말을 희부자승(喜不自勝), 이길지 질지 분간이 가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불분승부(不分勝負), 스스로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버릇을 일컫는 말을 자승지벽(自勝之癖), 공은 사를 이기지 못한다는 뜻으로 공적인 일에도 사사로운 정이 끼여들게 마련이라는 말을 공불승사(公不勝私), 싸울 때마다 빈번이 이김을 일컫는 말을 연전연승(連戰連勝), 지세가 좋아서 승리하기에 마땅한 자리에 있는 나라를 일컫는 말을 형승지국(形勝之國),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땅을 일컫는 말을 형승지지(形勝之地),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호승지심(好勝之心), 승부가 서로 같음 즉 서로 비김을 일컫는 말을 상승상부(想勝相負), 재주는 있으나 덕이 적음을 일컫는 말을 재승덕박(才勝德薄), 재주는 있으나 덕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재승박덕(才勝薄德), 수효가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지불승굴(指不勝屈), 보통 사람은 감당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중인불승(中人弗勝),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길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인중승천(人衆勝天),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라는 말을 자승가강(自勝家强), 싸움에서 이긴 기세를 타고 계속 적을 몰아침을 일컫는 말을 승승장구(乘勝長驅), 기묘한 계략을 써서 승리함을 일컫는 말을 출기제승(出奇制勝) 등에 쓰인다.
▶️ 甘(달 감)은 ❶지사문자로 입 속에 물건을 물고 있음을 나타내며 입속에 머금고 맛봄을 뜻한다. 甘(감)의 음은 머금다의 뜻을 나타냄으로 나아가서 맛있다, 달다의 뜻이 있다. ❷지사문자로 甘자는 '달다'나 '맛좋다', '만족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甘자는 口(입 구)자에 획을 하나 그어 입안에 음식이 들어가 있음을 표현한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甘자는 이렇게 입안에 음식이 들어와 있다는 의미에서 '만족하다'나 '달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甘자의 사전적 의미는 '달다'나 '맛좋다'이다. 그러나 실제 쓰임에서는 甛(달 첨)자가 '달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甘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주로 '먹다'와 관련된 뜻을 전달하고 있으니 甘자를 반드시 '달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甘(감)은 (姓)의 하나로 ①달다(꿀이나 설탕의 맛과 같다) ②달게 여기다 ③맛좋다 ④익다 ⑤만족하다 ⑥들어서 기분 좋다 ⑦느리다 ⑧느슨하다 ⑨간사하다(거짓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는 태도가 있다) ⑩감귤(柑橘) ⑪맛있는 음식(飮食)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기쁠 희(僖), 기쁠 희(喜), 즐길 오(娛), 기쁠 이(怡), 기쁠 열(悅), 즐거울 유(愉), 기쁠 희(憘), 즐길 낙/락(樂), 기쁠 흔(欣), 기쁠 환(歡), 즐길 탐(耽)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슬플 애(哀), 슬퍼할 도(悼), 성낼 노(怒), 슬플 비(悲), 쓸 고(苦)이다. 용례로는 군말 없이 달게 받음을 감수(甘受), 콩과에 속하는 다년생 약용 식물을 감초(甘草), 달콤하여 맛이 좋음을 감미(甘美), 단 것과 쓴 것이나 즐거움과 괴로움 또는 고생을 달게 여김을 감고(甘苦), 달콤한 말로 남의 비위에 맞도록 듣기 좋게 하는 말을 감언(甘言), 단술이나 막걸리를 감주(甘酒), 괴로움이나 책망을 달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을 감심(甘心), 달고 쏘는 맛이 있음을 감렬(甘烈), 단맛으로 설탕이나 꿀 따위의 당분이 있는 것에서 느끼는 맛을 감미(甘味), 음식을 맛있게 먹음을 감식(甘食), 달갑게 여기어 승낙함을 감낙(甘諾), 좋은 맛 또는 맛있는 음식을 감지(甘旨),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보내던 공문을 감결(甘結), 알맞은 때에 내리는 비로 가뭄 끝에 오는 반가운 비를 감우(甘雨), 죽기를 달게 여김을 감사(甘死), 물맛이 좋은 우물을 감정(甘井), 달콤한 말을 감사(甘辭), 스스로 달게 여김을 자감(自甘), 향기롭고 달콤함을 방감(芳甘), 살지고 맛이 좋음 또는 그런 고기를 비감(肥甘), 단맛을 나눈다는 뜻으로 널리 사랑을 베풀거나 즐거움을 함께 함이라는 말을 분감(分甘), 선정을 베푼 인재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당지애(甘棠之愛), 달콤하고 아름다운 말을 이르는 말을 감언미어(甘言美語), 달콤한 말과 이로운 이야기라는 뜻으로 남의 비위에 맞도록 꾸민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남을 꾀하는 말을 감언이설(甘言利說), 물맛이 좋은 우물은 먼저 마른다는 뜻으로 재능 있는 사람이 일찍 쇠폐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정선갈(甘井先竭), 물맛이 좋은 샘은 먼저 마른다는 뜻으로 재능 있는 사람이 일찍 쇠폐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천선갈(甘泉先竭),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으로 사리에 옳고 그름을 돌보지 않고 자기 비위에 맞으면 취하고 싫으면 버린다는 말을 감탄고토(甘呑苦吐) 등에 쓰인다.
▶️ 佞(아첨할 녕/영)은 侫(녕/영)의 본자(本字)로 倿(녕/영)은 통자(通字)이다. 그래서 佞(녕/영)은 ①아첨하다(阿諂--) ②간사하다(奸詐--: 거짓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는 태도가 있다) ③(말을)잘하다 ④미혹하다(迷惑--), 홀리다 ⑤유약하다(柔弱--), 부드럽다 ⑥재능(才能), 재주 ⑦말재주 ⑧아첨(阿諂)하는 사람 ⑨바르지 못함 ⑩위선(僞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남을 아첨하여 유혹함이나 미혹함을 영혹(佞惑), 간사스럽게 아첨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을 영인(佞人), 말솜씨 좋게 아첨함 또는 그런 말을 영변(佞辯),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신하를 영신(佞臣), 간사하고 아첨하는 재주가 있음을 간녕(奸佞), 문장에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불녕(不佞), 말로는 모든 일을 잘할 것 같이 하나 실상이 없음을 편녕(便佞), 부정하고 남에게 아첨하는 일을 사녕(邪佞), 남에게 아첨함을 유녕(諛佞), 아첨하여 남을 참소함을 참녕(讒佞), 몹시 아첨함을 첨녕(諂佞), 음험하고 아첨을 잘함을 험녕(險佞),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는 무리를 일컫는 말을 간녕배(奸佞輩), 아첨하는 사람을 미워함을 일컫는 말을 오부녕자(惡夫佞者), 윗 사람이 이기기를 좋아하면 아첨하는 말을 달게 여기게 됨을 이르는 말을 호승감녕(好勝甘佞)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