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마상청앵도」를 바라보며
석야 신웅순
막 꾀꼬리가 울었나 보다. 울음 소리에 순간 고삐를 당겼다. 말의 앞다리는 주춤, 뒷 다리는 어정쩡하다. 선비는 고개를 들어 버드나무를 치켜다보고 구종 아이도 주인을 따라 올려다보고 있다.
봄날의 적막을 깨뜨린 꾀꼬리 한쌍의 금빛 울음. 선비는 말 위에서 숨 죽인 채 꾀꼬 리의 금빛 울음을 듣고 있다. 선비는 꾀꼬리 울음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실비를 맞 고 있다.
한 줄기 고즈넉한 길, 추욱 늘어진 버들가지. 여유로운 어느 선비의 따뜻한 봄날의 나들이이다.
-석야 신웅순의 「마상청앵도」일부
초등학교 2, 3학년이었을까, 하굣길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려면 신작로를 지나 농로길을 거쳐 작은 산마을을 지나야한다. 여기까지가 반쯤되는 거리이다.
마을 앞에는 둑길이 있었고 거기엔 서너 그루의 커다란 수양버드나무가 있었다. 거기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삣 삐요코 삐요. 삣 삐요코 삐요’
버드나무 위에서 한쌍의 금빛 꾀꼬리가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유리왕이 나무 밑에서 들었던 꾀꼬리 울음보다 더 청승맞게 울고 있었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저 산 아래 대장간의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간간이 들려왔다. 천둥은 “우르르, 쾅” 비를 긋고 있는 버드나무 옆을 폭격하고는 유유이 사라졌다.
소나기가 무엇이길래 꾀꼬리 울음이 무엇이길래 6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도 흑백의 무성영화가 나를 눈물겹도록 생각나게 하는 것인가.
흠뻑 젖은 책보, 벗겨진 검정 고무신, 질퍽질퍽한 논길 그리고 허기진 배, 화폭에 보이지 않는 이런 것들이 흩어져 있어 그런 것은 아닐까.
어렸을 때 나는 이미 김홍도의 수묵화를 실감나게도 이렇게 멋지게 그린 것이다. 저 멀리 대장간의 망치소리가 빗속에다 멋진 차운시를 써 주지 않았는가. 흠뻑 젖어도 좋았고 뼈아프게 맞아도 좋았던 정겨웠던 소나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울음을 내게 들려주고 갔던 꾀꼬리였다. 빗속의 먼 산과 들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해주었던 수양버드나무였다. 화제 밑에 붉은 낙관을 찍으며 화룡점정, 문인화 한폭을 완성해 주고 갔던 천둥이었다.
그 한 컷은 내 인생에 화인으로 찍힌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고 잊을 수 없는 명화 한 장면이었다.
오늘도 천변을 걸었다. 축 늘어진 연한 연둣빛 수양버드나무 잎새가 참으로 곱다. 저 에메랄드빛 하늘에서 불어오는 봄바람도 맛있고 상큼하다. 멀리서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고 천변에서는 백로가 혼자 물질을 하고 있다. 유난히 오늘은 봄물 소리가 멀리서부터 크게 들려온다.
지금 나는 김홍도의「마상청앵도 馬上聽鶯圖」를 바라보고 있다.
선비는 오른손엔 고삐를 쥐고 왼손엔 쥘부채를 들었다. 종아리엔 행전을 쳤고 두 발엔 발막신을 신어 등자에 걸쳤다. 말방울은 달지 않고 다래 오른편 드리개 한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내게는 천변의 수양버드나무가 있고 가끔 봄비도 있으니 부족함이 없고 말 대신 걸을 수 있는 성성한 두 다리가 있으니 그만하면 족하다. 어렸을 적 꾀꼬리 울음이야 이미 불렀으니 어느 수양버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덤으로 긴 마른 갈대밭을 볼 수 있고 그 사이로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다.
이만하면「마상청앵도」의 선비 못지않다. 눈과 귀는 열어두되 입만 잘 조심하며 살면 늘그막의 이정도의 삶이라면 무난하지 않을까.
- 석야 신웅순의 서재, 여여재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연둣빛이 예쁜 이 봄날. .
가장 행복한 삶을 사시는 교수님이십니다. *^^*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잘 계시지요? 늘 건강하세요.
어깨가 많이 편찮으셔서 쉬시는지했는데요.
반갑습니다 😁
예전에 접했던 그림이라도 자세한 설명해주시니 새롭게 다가가게됩니다. 고전과 함께하면 왠지 근거가 있고 유식해지는 이 느낌은 지적허영일까요~~~
대장간의 망치소리가 빗속에다 차운시를 쓰다 이 표현 멋져요.
과거와 연결된 수양버드나무 사진 잘 감상하였습니다.
아 참!
책 잘 읽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책이예요~~~^^
너무 아파서 주사 세대를 맞았습니다.통증은 줄었는데 여전하네요. 불편하지만 살아가는데는 큰 지장은 없습니다.
그것은 지적 허영은 아닙니다. 마음을 비쳐보려면 거울이 필요합니다.
어렸을 적 그 소나기,꾀꼬리 울음, 망치소리,천둥소리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제 졸저를 사서까지 읽어주시니 좀 더 잘 쓸 걸 생각해봅니다.
제게 늘 종자기 같은 분이 되어주셔 더 없이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