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아가유
01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수많은 시선들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쏠린다. 글래머한 몸매와 길게 쭉 뻗은 팔다리를 가리는 평범한 옷들마저 전혀 평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만큼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습은 그 수많은 시선들을 단 2초만에 사로잡았다.
올해로 데뷔 9년차에 접어든 여배우 다솜. 이제 예전처럼 남들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그녀는 볕이 잘 드는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클러치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꼴에 연예인이라고 선글라스 낀거봐."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거침없는 말을 내뱉으며 양손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오는 올해 스물 다섯살. 2년째 그녀의 매니져이자 명절에도 가족들 대신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같이 마셔주는 사촌 동생 열음이다.
"강열음아. 오늘 비싼 광고 하나 계약하고 왔으니까 기분 좋게 있다 가자, 응?"
"치.. 몸값도 비싼 사람이 무슨 매니져 월급을 그렇게 쥐꼬리만큼 줘?"
"내가 사촌언니니까 경력도 없는 너를 매니져로 써주는거지 너는 나 아니었으면 신인이나 무명배우 매니져나 하고 있었을 거라고. 자비로운 이 언니가 불쌍한 동생 한번 구제해준거지 뭐."
"아주 눈물나게 고맙네요 강다솜씨."
"그러니까 제발 월급 들어오면 너 치장하는데 그만 좀 쓰고 나중에 결혼할때 쓸 결혼자금으로 모으란 말야."
"됐어. 나 결혼같은거 안해. 나는 무조건 혼자 살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여기 시럽 좀 더 넣어가지고 와봐. 이 카페 아메리카노는 왜이렇게 쓰니?"
열음은 속으로 궁시렁대면서도 다솜의 플라스틱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이 사람은..'
시럽통이 있는 곳으로 가니 열음의 눈에 들어오는 부스스한 차림의 남자. 머리카락도 남자치고는 꽤 긴 장발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무늬 없는 평범한 티셔츠에 물이 다 빠진 청바지에 두꺼운 뿔테안경까지. 열음에게 그의 첫 인상은 딱히 호감스럽지가 않았다.
심지어 열음이 오기 전부터 플라스틱잔에 시럽을 넣고 있던 남자는 열음이 뒤에서 기다리는 내내 시럽을 계속 넣었다.
'뭐야 진짜. 저럴거면 처음부터 커피 말고 다른 음료를 시키던가 하지..'
쌩판 모르는 사람이라 차마 입밖으로 꺼내기도 뭐하고 열음은 속으로 남자 흉을 보면서 계속 기다리다 결국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네..네? ...저요?"
열음의 목소리에 남자는 뒤돌더니 열음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살짝 더듬으며 말했다.
"네. 그쪽이요. 죄송한데 저도 그 시럽 넣어야해서요. 도대체 언제까지 넣으실거에요? 한 10번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
"죄..죄송합니다. 그..그럼 쓰세요."
남자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고 열음이 들고 온 다솜의 플라스틱잔에 시럽을 넣으려는데 시럽통 옆에 남자가 두고 간 다른 플라스틱잔이 놓여져 있었다.
"뭐야. 마시지도 않을거면서 시럽 아깝게... 완전 민폐네, 민폐."
시럽을 두번 정도 넣은 열음은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다솜이 왜이렇게 늦게 왔냐며 쪼아댔다.
"아 몰라. 어떤 사람이 먼저 와서 마시지도 않을 커피에 무슨 시럽을 그렇게 넣는지...어휴 아무튼 이상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니까."
"가끔 너도 그 사람들 중에 한명으로 포함될 때가 있지."
"그래도 나 정도면 되게 양호한 편이다 뭐."
"어련하시겠어."
커피가 바닥을 보이고 얼음만 남자 두사람은 다음 스케줄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바로 근처에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고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열음이 아까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저 사람 아까.."
"뭐야? 파파라치?"
다솜도 셔터 소리를 들었는지 열음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니, 잠깐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뭐하려고?"
"금방 끝나."
열음은 망설임 없이 바로 남자에게 걸어갔다. 남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열음을 보더니 깜짝 놀라 급하게 카메라를 숨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이미 눈치를 채버린 열음은 남자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와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저기요."
"..네?"
"방금 다솜씨 찍으셨죠?"
"아..안찍었는데요?"
"찍었잖아요. ..괜찮아요. 어차피 그쪽 말고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다솜 온거 알고 한장씩은 몰래몰래 찍었을텐데."
"진짜 안찍었는데요."
집요하게 묻는 열음에 남자는 점점 표정을 굳히며 정색했다.
"...죄송하지만 사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뭐하자는 거에요?"
"안찍었다면서요. 내가 지금 그쪽 말을 어떻게 믿어요. 그것도 쌩판 모르는 사람인데."
"근데 지금 그쪽 이러는거 되게 웃긴 거 알아요?"
"네?"
"그쪽 말대로 지금 저 말고도 다솜씨 사진 찍은 사람이 한둘이 아닐텐데 왜 저한테만 사진을 확인하자고 하는 거냐고요. 아까 그 셔터 소리의 주인이 제가 아닐 수도 있는데."
"..."
"혹시 제 옷차림이나 생김새 때문에 그러는건 아니고요?"
"..."
열음은 순간 할말을 잃었다. 이 남자 분명히 아까 그 시럽 넣던 남자랑 같은 사람인데 열음은 정녕 그 남자와 이 남자가 같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로 세게 치고 나오는 남자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표정이 처음보다 한결 여유로워졌고, 오히려 처음에 당당했던 열음은 창피함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먼저 일어나기 힘드신 것 같은데, 그럼 제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남자는 옆에 놓아둔 카메라를 목에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아씨.. 쪽팔려."
남자가 완전히 카페를 나서자 그제서야 몸과 함께 입도 풀린 열음. 마음같아서는 지금 당장 남자를 뒤쫓아가 그게 욕이 됐든 뭐가 됐든 무슨 말이라도 시원하게 퍼부어주고 싶지만 오후 스케줄이 있는 다솜 때문에 차로 가봐야했다.
*
"으아- 피곤하다."
"촬영은 내가 했지, 네가 했냐?"
"몇 시간동안 움직이는게 낫지, 가만히 앉아있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러니까 누가 따라오래?"
"나 없으면 차도 없는데 집에 어떻게 오려고?"
"차 없으면 다른 남자 배우들한테 부탁해서 얻어타서 오면 되지 뭐."
"저 여자가 미쳤나. 작년에 언니 그랬다가 스캔들 나서 그거 수습하느라 사장님한테 얼마나 많이 깨졌는데! 아우 진짜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강열음아. 언니 내년이면 벌써 서른이야. 이제 슬슬 시집갈 준비를 해야지."
"언니 아직 20대야. 그리고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시집 가기 전까지 무조건 작품 30개 채워야 시집 간다고 했던가?"
"어..어머, 얘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아무튼 지금은 스캔들 때문에 이미지 하락한거 다시 회복시켜놓으라는 말이야."
"치.."
결국 본전도 못찾은 다솜은 급 시무룩해지며 발코니로 나갔다.
"꺄악!!"
열음이 샤워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발코니에서 들려오는 다솜의 비명에 열음은 깜짝 놀라 황급히 발코니로 뛰어갔다.
"언니 무슨 일이야!!"
"카..카메라가..."
"카메라?"
심하게 놀랬는지 다솜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열음은 도대체 누군지 모습이라도 확인하려고 블라인드 뒤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밖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며 밖을 자세히 살펴보다 어두운 옷을 입은 남자와 눈이 마주친 열음.
"누구지?..파파라치인가?"
그런데 분명 열음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더 이상 사진을 찍거나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 남자.
"뭐야. 다솜언니가 아닌걸 알아버렸나?"
그리고 자리를 뜨는 남자. 열음은 남자가 완전히 가버린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거실로 들어왔다.
"갔어?"
"응. 갔어."
"...그래."
"물 좀 마실래?"
"아냐..괜찮아."
"앞으로 당분간 발코니 쪽으로 나가지마, 언니."
"알았어..조심할게."
아직도 후유증이 조금 남았는지 몸을 떨고 있는 다솜이 안쓰러워 열음은 옆에 앉아 다솜을 토닥였다.
하지만 분명히 그 남자가 내일도 다시 올 것 같은 예감에 열음은 당분간 이 시간대에 항상 발코니에서 그 남자를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
이미 시간은 자정이 훌쩍 넘었지만 오로지 스탠드의 불만 의지한채 방의 불은 꺼놓고 노트북을 하는 한 남자.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들을 하나씩 훑어보면서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진들 속에는 카페에서의 다솜의 모습, 다솜이 앉아있는 모습, 발코니에 서 있는 다솜의 모습 등등.. 남자라면 부러워할만한 다솜의 다양한 표정들이 담긴 사진들이었지만 남자는 달랐다. 무언가 제맘에 안들어 결국 사진들은 전부 삭제해버리고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젠장. 제대로 건진게 하나도 없잖아.."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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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봤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스토커인가요 앞으로 쭈욱 잘읽겠습니다 자가님도 화이팅 하시고 마지막까지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