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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한 전리품 분배
삼상 30:21-31
21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22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23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24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25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26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27 벧엘에 있는 자와 남방 라못에 있는 자와 얏딜에 있는 자와
28 아로엘에 있는 자와 십못에 있는 자와 에스드모아에 있는 자와
29 라갈에 있는 자와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겐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30 홀마에 있는 자와 고라산에 있는 자와 아닥에 있는 자와
31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
삼상 30:21-31 / 그들이 이렇게 개가를 부르며 브솔 시내 가까이에 이르자, 전에 지쳐서 그곳에 처져 있던 사람들 200명이 나와서 즐거이 맞아주었다. 다윗은 그러한 그들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22) 그런데 다윗과 함께 출전하였던 사람들 가운데는 더러 야비하고 악의적인 건달패들도 있어서 다윗에게 이같이 주장하고 나섰다. `그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나가서 싸우지 않았으니 전리품을 나누어 주지 맙시다. 우리가 그들에게 처자식만 되찾아 준 것도 과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식구들을 데려가는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하면서 돌아가게 합시다!' 23)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그들과 전혀 달랐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주셨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보호해 주셨을뿐만 아니라, 우리를 약탈한 강도 떼들을 오히려 우리의 손에 넘겨주시어 그들을 약탈하게 하셨습니다. 24) 그러므로 여러분의 주장에 좋다고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 `나가서 싸우는 사람도 있고, 뒤에서 남아 지키는 사람도 있는 법이어서, 전리품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분배되어야 한다'고 누구나 말할 것입니다.' 25) 그리하여 그때부터 이런 규정이 이스라엘에서 법칙으로 통용되었다. 다윗이 처음으로 적용하였던 이 법칙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26) [유다 남부의 친구들을 얻는 다윗] 시글락으로 돌아온 다윗은 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유다 지파의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내면서 이렇게 인사말을 전하였다. `다윗은 조국의 어른들께 문안드리면서 여호와의 원수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을 여러 어른들께 선물로 드립니다.' 27) 다윗이 선물을 보낸 성읍은 모두 헤브론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ㄱ) 브두엘, 남방의 라못, 얏딜, (ㄱ. 원문에는 `벧엘'로 되어 있다. 그러나 벧엘은 유다에 있지 않기 때문에 `브두엘'로 판독한다) 28) 아로엘, 십못, 에스드모아, 29) 라갈, 여라므엘 족속과 겐 족속이 사는 성읍들, 30) 홀마, 고라산, 아닥과 헤브론, 그리고 다윗이 전에 부하들과 함께 숨어 다니던 곳들이다.
브솔 시내에 머물렀던 200명에게 전리품을 주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보호하시고 아말렉을 넘겨주셨으니 모두의 분깃이 동일하다며 같이 분배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전리품의 일부를 유다 장로들에게도 보냅니다.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악한 자(21-22) 다윗과 함께 전쟁에 나갔던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자에게는 전리품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전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전쟁에 나가 싸운 자기 공로를 내세워 전리품을 보상으로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원래 환난당하고 빚진 상태로 떠돌다가(22:2), 다윗의 은혜로 다윗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다윗과 함께한 자들 중에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일들 앞에 자기공로를 내세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눠야 할 분깃(23-25) 다윗은 전리품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기에 그분의 백성은 누구나 전리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한 자나 후방에 있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눠 줘야 합니다. 이들이 후방에서 병참을 비롯한 각종 물품들을 맡아 주었기에 전투도 가능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윗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동일하게 받는 공동체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러한 동일한 은혜의 공동체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은혜로 성취됐습니다.
자신의 전리품을 나누는 다윗(26-31) 다윗은 전리품을 유다 장로들과 나눴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전리품이라 말했지만(20), 다윗은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했기에 그분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전리품을 자신만 갖지 않고 배제되는 사람이 없도록 골고루 여러 곳에 보냈습니다. 자신의 것을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는 다윗의 본은 생명까지 주셔서 우리를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적 용 :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해 합당한 모습과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아침 당신에게 86,400원을 입금해주는 은행이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나 그 계좌는 당일이 지나면 잔액이 남지 않습니다. 매일 저녁 당신이 그 계좌에서 쓰지 못하고 남은 잔액은 그냥 지워져 버리죠. 바보가 아니라면 그날로 당연히 인출하겠지요. 시간은 우리에게 마치 이런 은행과도 같습니다. 매일 아침 86,400초를 우리는 부여받지만 매일 밤이면 이 시간을 다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없어질 뿐입니다. 그날의 돈을 사용하지 못했다면, 손해는 오로지 당신의 몫입니다. 내일로 연장 시킬 수도 없습니다. 단지 오늘 현재의 잔고를 가지고 살아갈 뿐입니다. (‘브라이언 다이슨의 연설문’ 중에서)
호크마 주석
=====30:21
이왕에...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 - 이들은 먼 거리를 급히 행군한 까닭에(9, 10절) 낙오된 자들이었다. 대신 이들은 짐을 지키고 있었다(24절). 다윗이...문안하매 - 여기서 '문안하매'(* , 솨알 솰롬)는 '평강의 여부를 물어보다'란 뜻이다(삿 18:15). 이것은 다윗이 전투에 참여했던 자들에게처럼, 낙오한 자들에 대해서도 매우 호의 적 입장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25:5).
=====30:22
악한 자와 비류들 - 직역하면 '악하고 무익한 남자들'이란 뜻이다. 여기의 '비류'(* , 벧리야알)는 본서에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2:12), 사울의 왕권을 부정하려 들었던 자들(10:27). 그리고 다윗의 요구를 모욕적으로 거절했던 나발(25:17, 25) 등에게 적용됐던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마땅히 행할 바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이전에(6절) '다윗을 돌로 치자'라고 선동했던 자들도 바로 이들이었을 것이다.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주지 말고 - 이같은 비류들의 제안은 (1) 전투에 참여치 아니한 사람들에게도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던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례와 상충되며(민 31:27) (2)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에 따른 것이었으며(8, 23절) (3) 후방에서 소유물을 지키는 일도 작전상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점(25:13) 등으로 볼 때, 뒤에서 소유물을 지키던 자들에게 돌려져야 할 그들의 분깃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 곧 그것을 자신들만 나누어 갖겠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다.
=====30:23
던 자들이나 다 한 아버지로부터 나온 같은 형제들이라는 공동체(共同體) 사상을 불러 일으켰다(F.R. Fay). 여호와께서...보호하시고...그 군대를...붙이셨은즉 - 이것은, 다윗이 비류들의 제안(22절)을 부당하다고 판단했던 논리적 근거이다. 즉 탈취물을 얻을 수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탈취물의 처분에 대해서 왈가 왈부(曰可曰否)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다윗의 생각과 행위는 (1) 전쟁의 승리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2) 전리품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23절) (3) 따라서 전쟁에 불참했던 용사들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형제라는 연대 의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아래 모인 공동체는 '나눔'과 '사랑'의 실천장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행 2:44-47). 한편, 여기서 '보호하시고...붙이셨은즉'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군대에게 금번 아말렉 전투에서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통틀어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0:24
이 일에...너희를 듣겠느냐 - 이것은 비류들의 제안(22절)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시사해 주는, 다윗의 거부적 반문(反問)이다.
=====30:25
다윗이...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 전리품 분배의 규례는 이미 광야 시절 모세 때로부터 있었다. 즉 당시 보세는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여호와의 명을 좇아 노획한 전리품 중 절반은 싸움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그리고 절반은 진(陳)에 머물러 있던 '백성들'에게 분배하도록 하는 규례를 세운 바 있었다(민 31:27). 그런데 본절에서와 같은 다윗의 규례 제정은 그러한 광야 생활의 규례에 근거하여, 그 규례의 폭을 군인들 중 전투자와 비전투자 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등, 확대 제정한 것이다. 한편 이같은 규례 제정은 앞으로도 이같은 경우가 매번 발생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구속력을 지닌 구체적인 규범의 필요성을 느낀 결과였다. 율례와 규례 - 성경 다른 곳에서는 '규례와 법도'라는 말로도 번역된 단어로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신적(神的) 명령이나 규범 등을 강조하여 지칭하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이다. 신 4:1 주석 참조. 오늘까지 이르니라 - '오늘'(* , 하욤 하제)은 본서의 기록 시기<서론, 3. 기록 연대>까지를 가리키는 관용어구이다. 한편 '이르니라'는 다윗의 규례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계속 지켜졌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30:26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 (1) '친구'와 '유다 장로'를 동격(同格)으로 보고, 그때 다윗은 유다의 많은 장로들 중에서 오직 친구들에게만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Keil, Lange, Smith), (2) '친구'와 '유다 장로' 사이에 접속사 '그리고'(* , 웨)가 생략된 것으로 보고, 그때 다윗은 모든 유다 장로들 뿐만 아니라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LXX, Klein), (3) '친구'(* , 레레에후, 문자적으로는 '친구에게')를 '성(城)에 따라'(* , 레에레우)의 오기(誤記)로 보고, 그때 다윗이 유다 모든 성의 장로들에게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Hertzberg, McCarter), (4) '유다 장로'는 모두 다윗의 '친구'였던 것으로 보고, 그때 다윗은 모든 유다 장로들에게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NIV)등이 있다. 그러나 26-30절을 보면 첫째, 특별한 성읍들을 언급함으로써 그때 다윗은 모든 유다 성읍의 장로들에게 탈취물을 준 것은 아니며 둘째, 또한 다윗과 그의 일행이 자주 드나들었던 지역의 사람들을 특별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30절)에서, 위의 네 견해 중 (2)의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아무튼 다윗이 이같이 선심(善心)을 베푼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자신이 비록 블레셋 땅에 망명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며, (2) 사울에게 쫓기는 동안 물심 양면으로 자신을 도와준 성읍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며(30절), (3)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에 앞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닦아 놓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독일의 주석가 크룸마허(F.W. Krummacher)는 이러한 다윗의 행위를 미구(未久)에 이루어질 '왕적 하사(下賜) 행위의 전조'로 보았다.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 - '여호와의 원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1)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계약의 신실한 이행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며 (2)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라는 점에서, 곧 '여호와의 원수'는 이스라엘의 원수였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선물을 바로 이같은 자들로부터 '탈취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1) 적지(適地)에서 망명 생활을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며 (2)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늘 함께 하셔서 자신을 승리로 이끌고 계심을 암시하고 있다. 선사하노라(* , 베라카) - 원문대로 직역한다면, 다
=====30:27
벧엘에 있는 자 - 여기의 '자'(者)는 복수이다. 즉 이것은 한 성읍에 여러 명의 장로가 있었던 사실과 잘 부합된다(16:4). 한편 '벧엘'(Bethel)은 그 이름은 같으나, 오늘날 '베이틴'(Beitin)이라 불리우는 유명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성읍(10:3)은 아니다(Keil). 이같이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1) 27-30절에 나오는 모든 성읍들이 유다 땅 남부에 위치하는 것들이며, (2) 당시 유다 지파의 선무(宣撫)가 시급한 다윗이 베냐민 지파에게까지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벧엘'은 '호라마'와 '시글락' 근처의 '브둘'(수 19:4, 5)일 것으로 추정된다(Smith). 남방 라못 - 브엘세바(8:2) 남동쪽 약 30km 지점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의 성읍으로 추정된다(수 19:8). 얏딜 - 에스드모(28절;수 15:50)의 남서쪽 약 8km 지점으로, 유다 지파에 속한(수 15:48) 제사장의 성읍이다(수 21:14).
=====30:28
아로엘 - 브엘세바 남동쪽 약 10km, 헤브론 남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대상 11:44), 오늘날의 '와디 아라라'(Wady Arara)란 폐허지로 추정된다(Robinson). 십못 - 유다 남방(네게브)에 위치한 한 성읍 정도로만 알려질 뿐이다. 다른 사본들에는 '시브못'으로도 표기 되었다(Keil). 에스드모아 - 오늘날 '세무아'(Semuah)라고 하는 폐허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다의 산악 성읍으로(Schubert, Robinson), 헤브론 남서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다(수 15:50;21:14;대상 6:57).
=====30:29
라갈 - 이 성읍은 헤브론 남동쪽 약 11km, 에스드모아 북동쪽 약 6.5km 지점에 위치한 '갈멜'(25:2)로 추정되기도 하나(Thenius), 확실치는 않다(Keil, Smith, Fay).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 - '여라므엘 사람'(the Jerahmeelites)은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 '여라므엘'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대상 2:4, 5, 9). 이들은 브엘세바의 남쪽 지역(네게브)에서 살았다<27:10>. 겐 사람의 성읍 - '겐 사람'(the Kenites)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들로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안내자들이 되어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그곳에 정착하였다(15:6;민 10:29-32;삿 1:16). 이들은 유다 남방, 아말렉 사람들의 거주지 북쪽에서 거주했었던 것 같다<15:6;27:10>.
=====30:30
홀마 - 브엘세바 동쪽 약 11km 지점이다(수 15:30). 이곳의 원래 지명은 '스밧'이었으나, 유다 사람들이 이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시킨 후 '진멸을 위하여 헌신된'이라는 의미(Davidson)의 이름인 '홀마'(Hormah)로 바꾸었다(삿 1:17). 오늘날 '라크마'(Rakhma) 고원(高原)의 서쪽 경사 지대에 위치한 '세바다'(Zepata)로 추정된다(Robinson, Ritter).
고라 산 - 네게브 지방의 변두리에 위치한 세펠라 지역의 한 부분인 '아산'과 동일한 곳이다(수 15:42). 처음 시므온 지파에게 소속된 성읍이었으나(수 19:7), 후일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곳이다(대상 6:59).
아닥 - 이 성읍은 헤브론 북서쪽 약 24km 지점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의 '에델'(수 15:42;19:7)과 동일 성읍으로 추정되기도 한다(tHERIUS).
헤브론 - 예루살렘 남쪽 약 22km 지점에 위치한 주요 성읍으로(수 10:3), 일찍이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곳이다(창 13:18;23:1). 오늘날의 지명은 '엘 칼릴'(el- Khalil)인데, 그뜻은 '벗' 또는 '친구'이다. 다윗은 나중에 이곳을 자신의 잠정적인 왕도(王都)로 삼았다(삼하 2:1-4;5:3). 삼하 2:1 주석 참조.
왕래하던 모든 곳 -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피 생활을 하던 여러 지역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억울한 도피자 다윗에게 먹을 것과 숨을 곳을 은밀하게 제공하여 주는 등 분명 다윗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을 것이다(Fay).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본서의 기자는 이들을 다윗의 '친구'라고 기록하였다(26절).
< 설 교 >
은혜를 아는 자가 은혜를 베푼다
사무엘상 마지막 대목에서는 왜? 다윗이 하나님과 백성이 마음에 합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사울 왕을 피해서 블레셋 아기스 왕을 돕고 그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의 선택과 결정은 항상 자신의 민족인 연약한 히브리 사람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블레셋 아기스왕의 신하들의 모함과 비난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으로 자신이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과 전쟁을 행해야하는 애매한 어려움을 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이 사무엘상에의 다윗의 삶의 여정과 사울의 삶의 여정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세워진 이 두 인물이 왜? 다른 선택과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무엘상 기자는 이 사무엘서를 1차 독자인 히브리사람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합하여 세운 사울왕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세워지 다윗왕이 얼마나 다른 선택과 결과 그리고 중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대비시키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삶의 여정 속에서 보여진 모습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그리고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참다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왕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이 시대에 사무엘서를 읽고 있는 2차 독자인 우리에게 “ 하나님의 사람의 삶의 내용과 선택은 어떠해야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에게 무엇을 보기를 원하시는지? ”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사무엘서 기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해야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께 다시금 쓰임받을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고, 다윗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기회를 계속 붙잡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아말렉과의 전쟁에 함께 가지 못했던 사람들을 돌아본고 배려하고 베푸는 장면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블레셋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긍휼로 제외되어 그들이 거처했던 시글락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제 3일에 시글락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 사람들은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어른이나 아이나 여자나 다 사로잡아 끌고 그들의 길을 갔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렀을 때 성은 이미 불탔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간 후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말렉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치라 말씀하시죠.
가던 중에 애굽사람 한 소년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 소년은 다윗의 일행을 아말렉 사람들의 진영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이 내려가 보니 아말렉 사람들은 온 땅에 가득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해 먹고 마시며 기뻐 춤추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새벽부터 혹은 저녁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쳤고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이 취했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았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도로 찾게 해주셨습니다. 그들은 또 아말렉 사람들의 양떼와 소떼를 다 취하였습니다.
다윗이 이왕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에게 오자 그들은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이르러 문안하였습니다.
그때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불량한자들이 다 말했습니다.
여기서 < 불량배 >들은 < 비류한자. ‘벨리알의 아들들,' 무가치한 자들 >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합니다.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다윗은 그들이 취한 노획물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며 또 백성의 다수가 똑같이 나누는 것을 원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악한 자들의 주장을 눌렀다. 그 날부터 다윗은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고 그것이 훗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시글락에 이르러 그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며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이 전쟁을 어떤 중심으로 치루고 있는지?를 옅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의 시작은 자신의 전쟁인 아닌 여호와의 전쟁으로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의 첫 번째 증거는 전쟁을 치루기 전에 여호와께 묻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 전쟁의 결과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여호와의 능력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고백합니다. <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저들을 우리손에 붙이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전쟁의 기쁨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거나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을 즐거이 나눠줌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신일임을 함께 기뻐하길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들을 나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내가 그 영광과 자랑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합당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말, 손, 그리고 걸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요즈음 성도님들이 카카오톡으로 좋은 글을 보내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글들중에 참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좋은 글들은 따로 메모를 해놓고 있습니다.
최근에 받은 글 중에서 참 좋은 글 내용이 있었습니다.
< 사람이 선물이다 >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고…
쉰에야…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디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얼굴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얼굴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선택이 삶의 선택입니다.
사람은 실수하는 것이 정상이고,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랑이란, 실수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사랑은.. 사람과 하늘이 나눠 가진 성품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만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지요.
사람과의 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자신을 내려놓기 전에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은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사람과 관계는 한번 깨지면 회복하기가 힘들어요.....
관계가 고통스러운 까닭은..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을 인간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수가 전공이고, 부족함이 특징입니다 ..
오늘 본문의 다윗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만드는 <배려와 배픎>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에게서 < 배려와 베풂 >많은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없지요. 다윗은 자신이 나눠 주어야할 것을 기꺼이 나눠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인정과 확신 때문입니다.
아침편지로 잘 알려진 고도원씨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책에 세 가지 방문이라는 글이 나옵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대체로 <세가지 방문>을 잘 한다는 말을 듣는다. <입의 방문>, <손의 방문>, <발의 방문>이 그것이다. <입의 방문>은 부드러운 말로 주위 사람을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방문이고,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힘들 때 망설이지 않고 찾아가는 것이다. 모두 신체를 이용한 마음의 전달법들이다. ”
미국의 카네기 공대 졸업생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이구 동성으로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가 인간관계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의 합당한 중심으로 사람을 향한 배려와 배풂이 흘러 나왔기에 그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 기억될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공을 넘어 은혜를
인명진목사 / 삼상 30: 16-25 고전 15:9-11 눅 12:16-21
저는 가끔 쉬는 날이며 큰 서점에 가서 책 구경하기를 좋아합니다. 단순히 책을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책이 많이 팔리고, 어떤 분야의 책이 많이 출간되느냐를 유심하게 살펴봅니다. 책이 읽혀지고 출간되는 것을 통해 시대의 트렌드와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려는 마음에서입니다. 지난 2003년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서점가를 휩쓸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성인들은 한번쯤은 보았을 법한 책입니다. 이후로 이와 비슷한 유형의 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성공하는 방법론에 대한 책이 출판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재계 정치계뿐만 아니라 스포츠 스타까지도 성공스토리를 마케팅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성공하지 못하는데 남의 성공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뭐가 그리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공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성공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오늘도 사람들은 성공스토리에 대해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보지 않아도 비디오고, 듣지 않아도 라디오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는 옛날 소작농의 아들로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의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는 병이 들어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도 재혼하여 떠나고 할머니 아래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꿈과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가난이 저에게는 가장 큰 스승이었습니다. 저는 주경야독을 하면서 공부했고, 배가 고플 때는 냉수로 배를 채워가면서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명문대학에 입학했고, 졸업도 하기 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며”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성공 스토리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처음엔 감탄하고 놀랍니다. “나도 저 분처럼 성공해 보자.”하고 결심도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애써도 잘 안 되면 나중에는 자신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게 되고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결국 성공 스토리는 남들에게 위로 보다는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쭐하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요즘은 성공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힐링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성공을 부르짖어도 성공할 수 없으니 상처를 받습니다. 또한 성공했다하는 사람들도 어느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허무함을 느낍니다. 성공학의 교과서라 말할 수 있는 “성공한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는 책 한 권으로 엄청난 수입을 올렸지만 지난 2011년 파산 신청을 했습니다. 작년에 병을 얻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자 기자들이 몰려가 한결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성공학의 전문가인데 왜 실패하여 파산하게 되었느냐?” 기자의 질문에 “나는 내가 쓴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처럼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이라 했습니다. ㅍ이것이 성공학이 가지는 맹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공식의 이야기가 아닌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 이야기입니다. 은혜 이야기는 구조부터가 다릅니다. “저는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게으르고, 삶은 무질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저 잘난 맛에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하는 일마다 실패했고, 그 결과 깊은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은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당당하게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제 마음은 의욕과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으시죠? 한 마디로 말하면 저는 은혜로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성도님들은 평소에 어떤 이야기에 익숙하십니까? 오늘 어떤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까? 또한 갈릴리강단에서 어떤 스토리를 듣고 싶어 합니까?
오늘 사무엘상 본문에는 성공과 은혜 두 가지 스토리가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은 결국 블레셋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남의 나라 땅까지는 쫓아오지 못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철천지원수인 블레셋 땅으로 피신하였습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는 골리앗도 이긴 다윗이라는 영웅이 자신에게로 오자 너무나 기뻐했고, 그를 충성스런 신하로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이란 성을 주어 거주하게 했습니다. 그때 마침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국운을 건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아기스 왕은 다윗을 전쟁터에 데리고 가길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존경하고 자랑하던 장수가 블레셋 군대를 인솔하여 사울 왕과 맞서 싸우면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가 떨어질 것이고, 전쟁은 블레셋의 승리가 될 게 뻔했습니다. 이리하여 다윗은 아기스의 명에 의해 전쟁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곤란한 문제였습니다. 블레셋 군으로 참전하기를 거부하면 아기스 왕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고, 참전한다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백성을 보살펴야 할 사람이 자기 백성을 친 꼴이 되니, 이 전력을 가지고 어찌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고, 미래와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전쟁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다윗이 얼마나 난처했을까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뜻밖에도 이 곤란 중에서 다윗을 건진 이들은 다름 아닌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윗이 참전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골리앗까지 이긴 다윗이 만약 전쟁터에서 태도를 바꾸어 이스라엘을 돕는다면 블레셋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강력하게 다윗의 참전을 반대했습니다. 아기스 왕은 어쩔 수 없이 다윗을 자기 거처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돌아가는 다윗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을까요? 다윗은 수하들을 데리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시글락으로 귀환했습니다.
그의 가벼운 마음과는 달리 시글락에 도착하니 어두운 그림자가 마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잠시 시글락을 비운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가족들과 재산들을 모두 약탈하고 끌고 간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절망감을 사무엘상 30장 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의 책임은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돌을 들어 다윗을 치려하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은 이때 다윗이 크게 다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스토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 일행은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가족과 재산을 모두 되찾게 됩니다. 30장 16-20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가 다윗을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약탈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다윗이 또 양 떼와 소 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그들은 기뻐하면서 가족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습니다. 전리품을 나누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대립한 것입니다. 한쪽은 전쟁에 참전한 사람만 전리품을 나누자는 쪽이 있었고, 전쟁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을 다 함께 나누자는 쪽이 있었습니다. 당시 다윗을 따르는 남자들은 육백 명 정도였습니다.그 가족들까지 하면 제법 많았겠지요. 그런데 가족을 찾으러 간 육백 명 중에서 아말렉과 싸운 사람들은 사백 명이었습니다. 나머지 이백 명은 어찌 되었나요? 그들이 힘이 부쳐 힘들어하자 다윗은 그들을 브솔 시냇가에서 쉬게 하고 나머지 사백 명만 데리고 가서 가족을 되찾아 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전리품 분배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말이 어떠했습니까? 두 가지 의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공 스토리>식 의견이었고, 다른 하나는 <은혜 이야기>식 의견이었습니다. <성공 스토리>식 의견이 본문 22절에 나옵니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이렇게 말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본문에는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다윗과 함께 있는 것일까요? 그 연유는 이렇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기 시작할 때 이미 이스라엘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나라 일로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아둘람굴로 모여들었습니다. 다윗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숫자가 점점 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단순히 다윗을 돕겠다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무차별로 다윗에게 모여오다 보니 그 중에 악한 사람, 불량배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전리품 나누는 데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전리품을 나머지 사람들과 나누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전리품을 자신들이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지 말고>라는 말은 다윗에게 하는 말이지만, 사실상은 <절대 주지 않겠다>는 자신들의 의지가 담긴 말입니다. 그들은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싸워서 이겼는데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다 알다시피, 가족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들은 수가 많았고, 우린 이백 명을 빼고 겨우 사백 명 뿐이었다.게다가 적들은 이미 멀린 간 후였다. 그러나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자 봐라. 내 팔뚝과 다리에 칼자국이 보이지 않느냐? 우리는 죽을 각오로 싸웠다. 그래서 가족을 구하고, 전리품을 얻은 것이다. 그러니 전리품은 피땀을 흘린 우리가 가져야 한다. 브솔 시냇가에서 쉬고 있었던 이백 명은 자격이 없다. 이건 우리 거다.> 싸운 것도 자신들이요, 이긴 것도 자신들이요, 권리도 자신들의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게 성공스토리입니다. 문제는 성공이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다는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불량배와 악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적인 논리로 본다면 이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성공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데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생각입니다. 이 사람들의 분위기를 보면 전형적인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제가 사전에서 꼭 없애고 싶은 단어가 자수성가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신수성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을 이루어서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른 생각입니다. 혼자서 성공한 사람은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웃집 사람이 나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았고, 자신의 직원이 회사 돈 횡령해서 도망가지 않았고, 거래처 사람들이 납품대금 떼먹지 않았고, 나와 이웃을 해서 달리던 자동차가 사고를 유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룬 성공입니다. 한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도와주어서 이룬 성공입니다. 그런데 왜 혼자이룬 성공이라고 자수성가라 말합니까? 혼자서 이룬 성공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악한 자요, 불량배라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의 표현으로 한다면 도둑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은혜를 도둑질 하는 도둑놈입니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지독합니다. 인간미가 없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기준이 된다는 점입니다. 나처럼 하면 성공하는데 나처럼 하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가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내 곡식, 내 곳간, 내 물건, 심지어 영혼도 자기 것이라고 내 영혼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성공의 스토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재산과 지식과 시간을 나눌 줄을 모른다는 점입니다. 악한 사람과 불량배라 지칭 받은 사람들은 우리가 생명 걸고 싸웠는데,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과 왜 전리품을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성공한 사람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피땀 흘려 고생하고, 남들이 잠잘 때 잠자지 못하고 수고하고 번 돈인데 어떻게 나누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사건을 보고서도 은혜로 인생과 사건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의 이야기를 우리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은혜의 이야기를 말한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생각해 보니 가족과 재산을 되찾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이 시글락에 조금만 늦게 도착하여 아말렉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토 깊이 들어간 후에 도착했다면 되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길 인도를 해 줄 사람을 만난 것도 은혜였습니다. 적들이 술에 취해 있어 쉽게 빼앗은 것도 그렇습니다. 모든 게 은혜였습니다. 사실 시글락에 돌아와 가족과 재산을 잃은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그 때 다윗에게 힘이 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6절로 올라가 보면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다급한 순간에 다윗을 절망에서 건지시고 사람들을 독려하여 싸울 용기와 기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승리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이 보기에 이 승리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기게 하셨고, 은혜로 가족과 재산을 찾게 하셨고, 은혜로 전리품을 얻게 하셨다. 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골고루 나누라고 합니다.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도 분깃을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약 10년 전 즈음에 뉴욕타임즈지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이룬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물었습니다. 이때 1위를 차지한 인물이 다윗이었습니다. 목부의 여덟 번째 아들, 베들레헴 촌놈 그 이외에는 별다른 이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조건과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공의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말씀으로 만나는 다윗은 단순한 성공의 차원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룬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줄로 깨달았습니다. 그는 성공의 스토리를 은혜의 이야기로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다윗만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도 실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를 성공으로 변질시켜 하나님을 빼먹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가 기준이 되어 자기 의에 사로잡히고, 얻은 것을 내 것이라 생각하여 움켜쥐고 혼자서 천년만년 먹으려하고 나중에는 자식에게까지 그것 물려주고 애써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대단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은혜 이야기의 최고봉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단의 손에서 건져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독생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꽉 닫혀 있고 완악하던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녹이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복되게 사명자로 살뿐만 아니라, 이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천국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 아시지요? 풍성한 은혜가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은 <은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저절로 된 줄 알지만, 우리는 은혜로 된 줄 압니다.남들은 자신이 얻은 줄로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셔서 얻을 것을 압니다. 은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성공 스토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얻을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당연히 얻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공 스토리를 말하는 사람은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톤이 높아집니다. 흥분하게 됩니다. 자기도취에 빠집니다. 그러나 은혜 이야기는 다릅니다. 은혜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나중엔 눈물이 흘러 말을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현재 누리는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기에 일마다 때마다 감사하며 삽니다.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는 모두 사도 바울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자신이 구원을 받아, 복음의 사도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찬송합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코 <내가 했다, 내가 얻었다. 그러니 전부 내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의 악한 사람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으므로 남아 있던 이들과 나누어야 마땅했습니다. 더구나 이것은 일찍이 모세가 미디안과의 전쟁 당시부터 정한 규례였습니다. 민수기 31장 27절을 보면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의견처럼 모두 함께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도 맞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이 수고하고 벌었습니다. 머리도 좋아 농사도 잘 지었고,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어 곳간까지 지어놓았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모두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델입니다. 그가 오늘날 태어났다면 벌써 그의 성공 이야기가 서점에 늘려 있었을 것이고, 그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성공한 자여여!”가 아니라 “어리석은 자”의 표상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혼도 자기 것인 줄 알았는데 영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곳간 준공식을 하는 날 밤에 오셔서 영혼을 찾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당 문만 열고 나가면 성공의 스토리가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믿고, 심지어 성공하기 위해 병도 걸리고, 성공하지 못해 아픔을 겪어야 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불경기가 우리의 마음마저 어둡게 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받은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생명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 땅에 필요한 돈도 건강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받았습니다.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 이야기를 말하며, 은혜의 방식으로 살길 원합니다. 은혜의 방식으로 사는 것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내가>라는 주어를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라고 말하길 기뻐합니다. <내가 얻었습니다.>라는 표현 대신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무언가를 많이 알고,가졌고, 누린다 해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늘 황송하게 여기고 감사할 뿐입니다. 동시에 은혜의 방식으로 사는 삶은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삶>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은혜를 받고, 은혜에 감사하며, 은혜를 베풀면서 삽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어차피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놓고 갈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삶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우리는 성공의 스토리가 판 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슴 아픈 절규를 토해내는 자본주의 한복판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과 절규가 가득한 곳에 보내셨습니다. 자신이 성공하고 성공의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합시다. 그리고 받은바 은혜를 나누어 주어 세상의 이야기와는 다른 은혜를 스토리텔링 하라고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저와 여러분이 서 있는 곳에 감사가 가득하고 나눔이 가게 되길 기원합니다.
아름다운 리더십
삼상 30장 21~31절 / 이준원목사
[들어가는 말]
대개 어느 나라나 정당들을 보면 이념과 사상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쪽은 보수적인 정당이고 다른 한쪽은 진보적인 정당입니다. 크게 이 두 가지가 있고 그 주변에 조금 더 보수적인 정당들이나 더 진보적인 정당들이 있습니다. 또 그 중간에 위치한 중도적인 정당들도 있습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공화당(Republican Party)과 민주당(Democratic Party)을 중심으로 한 양당정치 체제가 지속되어 오고 있는데, 한국도 대체로 그렇지만 시기마다 당이 새로 생기고 없어지기를 반복해왔습니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계속 있어 왔는데, 한국은 진보든 보수든 이름을 계속 바꿔서 조금만 안 보고 있으면 무슨 당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한국 정치계를 보면 종종 두 개의 당이 하나로 통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통합이 되는 과정에서 굉장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 각 당에 자기 입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절충하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그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반발하는 사람이 있고, 탈당하는 사람도 나오고, 나가서 또 다른 당을 세우기도 합니다.
가끔 보면 두 교회가 하나로 합치는 경우가 있는데, 각각 교인이 50명인 두 교회가 하나로 합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둘이 합치면 교인이 100명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교인 수는 그대로 50~60명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든지 따로 새 교회를 다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합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18장에서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시다 기도를 이야기하시며 ‘두 사람이 합심하여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8:19). 단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그렇게 힘들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서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지식층이나 부유층의 지지를 동시에 받기가 어렵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 사이에는 계파가 있고 분열이 생깁니다. 각기 다른 두 계층을 하나로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리더십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리더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로 다윗이 그러한 리더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설교는 은혜받기 위해 듣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든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결단하여 나가서 행동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도 많은 내용이 있지만, 그 가운데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 한 가지를 붙들고 ‘내가 이번 주에 정말 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며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배려와 화합의 분배 원칙 (21~25절)
지난주 본문에서 아말렉 사람들이 다윗의 마을인 시글락을 공격해서 거기 있던 가족들을 다 잡아가는 위기를 당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때 사람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을 얻은 후에 아말렉 사람들을 쫓아가 큰 승리를 거두고 모든 사람과 짐승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아말렉 사람들에게 빼앗아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냥 보면 큰 승리가 이야기의 핵심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브솔 시내에서 일어납니다. 큰 승리를 거두고 기쁨이 충만하여 시글락으로 돌아가던 다윗과 400명은 그 전에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고 싸우지 못한 200명의 동료들이 남아 있는 곳에 돌아옵니다.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21절)
너무 탈진한 나머지 중간에 낙오된 200명은, 승리를 거둔 400명의 동료들이 모든 가족과 짐승을 이끌고 돌아오자 기쁨으로 그들을 영접합니다. 자기 아내와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볼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상상해보십시오. 정말 기뻐하고 서로 얼싸안으며 울고 웃으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비록 자기들이 힘을 보태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함께 기뻐합니다.
이때 다윗도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가 따뜻하게 문안합니다. 그러나 그 400명 중에는 악하고 마음이 굳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낙오한 200명과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22절)
다윗과 함께 아말렉과 싸워 승리한 400명 가운데 악한 자들과 불량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가지 않은 200명에게는 전리품을 나눠줄 수 없다고 선동하며 나선 것입니다. 낙오자 200명은 자기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찾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말렉에게 빼앗아 온 짐승이나 물건들 뿐 아니라, 원래 그들의 것이었던 짐승들도 이미 빼앗겼던 것이니까 돌려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다윗과 함께 가지 못했던 200명은 실제로 아무것도 차지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지쳐서 자기 가족들을 찾는 것조차 포기해야 될 정도로 굉장히 무기력했고 부상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가서 자기 가족들을 되찾아준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들 자신도 그 이상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누어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싸우러 갔던 400명 중에서 악한 자들은 혹시라도 달라고 할까 봐 미리 선수를 치면서 아무것도 나누어줄 수 없으니 가족이나 데리고 가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400명 전체가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악한 자와 불량배들’ 즉 그들 중 일부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상황은 리더인 다윗에게 굉장히 곤란한 상황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주지 말라는 말을 듣자니 저 200명이 걸리고, 그렇다고 해서 싸우러 가지 않은 200명에게 다 똑같이 나누어주자니 목숨을 걸고 가서 싸운 저 400명에게 미안한 상황입니다. 리더가 되면 이런 딜레마가 많습니다. 이때 다윗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23-25절)
다윗은 일단 못되게 구는 불량배들을 향해 ‘야, 이 악한 것들아’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합니까? “나의 형제들아.” 일단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져줍니다. 그들이 그런 마음을 충분히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데, 다윗의 이 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지금 가족들과 재산을 모두 되찾았을 뿐 아니라 이렇게 많은 것들을 더 얻어서 오게 된 것이 결코 우리 힘으로 된 게 아니다.’라는 겁니다.
23절에 나오는 이 표현들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들이 잘해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신 일이라고 선포합니다. 잃어버렸던 가족들에게 어떻게 이토록 아무 일이 없었을 수가 있습니까? 그중 몇 명이라도 못 따라갔으면 아말렉 사람들이 분노하며 쳐 죽이고 갈 수도 있었는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게 우연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입니다.
그리고 아말렉 사람들은 간신히 도망한 사람들이 400명이었으니까 그보다 훨씬 많은 군대가 있었던 것인데, 도망간 사람들과 같은 숫자인 400명만 가지고 이 엄청난 대군을 물리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결코 자신들의 힘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자기들에게 공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다윗과 함께 한 이 사람들이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22장에 보면 아둘람 굴에 있던 다윗에게 찾아온 이들은 원래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다 인생의 패배자이며 사회의 낙오자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다윗을 통해 임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비참한 삶에서 건짐을 받아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의 손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과는 전혀 관련도 없던 사람들이 다윗의 믿음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도 점점 믿음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말렉 추격 사건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이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마을로 돌아오자 가족들이 다 끌려간 것을 보고 “다윗을 돌로 치자”(6)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가족들을 모두 되찾았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재산을 얻게 되니까 또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20). 그러니까 다 다윗 덕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미 고백하며 인정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이 아비아달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힘을 회복하여 자기들을 이끌고 나아갔기 때문에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지, 자기들끼리 가서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을 돌로 쳐 죽인 다음에 자기들끼리 갔으면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낙오자 200명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두가 다윗의 전리품이라고 말해놓고서는 사실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처음에 “다윗을 돌로 치자”라고 주동한 사람들이 큰 승리를 거둔 다음에는 앞장서서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고 외쳤을 것입니다. 또 똑같은 사람들이 200명에게 물건을 주지 말자고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윗을 돌로 치자는 사람들도 소수였고, 200명에게 주지 말자고 한 악한 자들과 불량배들도 소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항상 똑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매번 주동하며 문제를 일으킵니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습니다. 교회도 그렇고 사회의 일반 단체도 그렇고, 항상 소수의 똑같은 사람들이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어떤 때는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라고 하고, 어떤 때는 ‘저 사람들에게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다윗의 전리품이다.’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들의 감정과 자기들의 기준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자기중심입니다. 자기들이 기분이 나쁘면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라고 하고, 자기들이 기분이 좋으면 ‘이 모든 게 다윗 덕분이다.’라고 하며 왔다 갔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마음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 바뀌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못 봅니다. 자기의 감정과 자기 생각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감정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것, 모든 게 자기의 감정에 따라 나오는 것은 자기감정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런데 다윗 일행에게는 전쟁을 위해 가지고 온 물건들이 많았고, 지쳐서 시내를 건너갈 수 없었던 200명이 남아서 그것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을 가리켜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24)라고 표현합니다. 그 물건들을 다 가지고 추격을 벌였다면 그만큼 아말렉을 쫓아가는 데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하러 가면서 군수물자가 없이 갈 수는 없습니다. 먹을 것과 무기들이 무거워도 들고 가야 하는데, 이제 빨리 추격하면서 다 들고 가면 느리니까 그것들을 두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마침 200명이 더 이상 못 가겠다고 하니까 다윗은 재빨리 결단을 내리고 그들에게 남아서 그 물건들을 지키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리로 돌아온 것이지, 아무것도 없었으면 버리고 가자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지난주 2022년 월드컵 축구대회 예선전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본선에 올라가는 32팀이 거의 결정됐습니다. 추첨식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중동인 카타르에서 열리고 그것도 여름이 아니라 겨울(11-12월)에 열립니다. 그곳이 더운 중동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대표 팀은 이번에도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여 10회 연속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도 네 나라밖에 하지 못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한국 팀이 11년 동안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아시아 최강팀 이란을 상대로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2대0으로 이겼는데, 마지막 경기였던 상대적 약체 UAE를 상대로는 오히려 1대0으로 졌습니다. 그들이 수비를 너무 잘했기 때문입니다.
축구에서는 공격이 강한 팀이 아니라 수비가 강한 팀이 이깁니다. 그래서 한국이 그런 아시아의 상대적 약팀들과 경기를 할 때 그들이 수비전략으로 나오기 때문에 굉장히 고전을 합니다. 유럽이나 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적 약팀이 수비전략으로 나와서 강팀들이 고전할 때가 많고 심지어 질 때도 있습니다. 4년 전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이 당시 세계 1위였던 독일을 이긴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다른 스포츠 종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비가 강한 팀이 공격이 강한 팀을 물리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 중에 ‘공격이 강한 팀은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지만, 수비가 강한 팀은 우승을 할 수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가서 공격하여 싸워 이긴 사람들도 잘했지만, 남아서 수비한 사람들, 즉 짐을 지킨 사람들도 정말 잘했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 없이는 자기들이 이렇게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공이 있으니까 모두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없었다.’라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물건들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자기들이 외친 대로(20) 다윗이지, 자기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전리품들을 가리키며 다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러지 않는데 누가 이것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지금까지 놀라운 은혜로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로서 그들도 역시 관대한 은혜로 서로를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베풀 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특히 교회에서 사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 나서서 섬기는 분들이 수고도 많이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뒤에서 묵묵히 따르며 역할을 감당하는 분들의 공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가 같이 섬기다 보면 지쳐서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이 나올 수도 있고, 그럴 때 앞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과 뒤로 물러간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서로에게 가져야 할 마음은 자기주장이 아니라 용납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지금 탈진해서 함께 가지 못한 200명은 일부러 악한 마음을 품고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무 지쳐서 가지 못했습니다. 피곤해서 못 갔다고 되어 있지만, 그들 중 상처를 입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그들을 내치지 않고 품었습니다. 일부러 분열을 일으키는 경우라면 하나 되려고 힘쓰더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함께 나누고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다윗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실천이 참 약합니다. 저처럼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은 말씀을 많이 듣는 데 비해서 실천이 아주 적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속 강조하신 말씀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듣고 행해야 복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구약도 그렇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시고 신약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기만 하면 안 되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단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행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옵션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래, 하나님을 예배해야지’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네 자신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것은 옵션 같이 생각합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깨달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들어 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도 그것을 너무나 잘 깨닫고 요한일서에서 ‘우리가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예수님도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을 안다.’라고 하셨습니다. 삶 속에서 나오는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지, 말하는 것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진정한 자비와 사랑이 아니라 감상(sentiment)이 중심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감상은 실제 삶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감정입니다. 겉으로만 자비심으로 보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현충일인 Memorial Day가 5월 말에 있습니다. 그럴 때 애국심이 충만해지는 분이 얼마나 되십니까? 저부터가 잘 안 됩니다. Memorial Day는 우리에게 ‘노는 날’이지 애국심을 고취하는 날이 되지 못합니다.
한국의 광복절 같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기의 행렬을 보면서 나라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조금 생길 수는 있습니다. 국립묘지 같은 데를 티브이에서 보여줄 때 그런 마음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생긴다고 해서 나라에 결코 세금을 더 내거나 기부금을 내는 것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냥 감정만 조금 일어나다가 말뿐입니다. 그런 것이 감상입니다.
또 고난주간 같은 때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과 같은 영화를 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그 우락부락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무지막지한 채찍으로 막 때려서 등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줄줄 흐르며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님의 그 장면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슬퍼하는 그 마음과 눈물이 매일 하나님께로 나아가 깊이 그분과 교제하는 기도나 QT나 예배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들이 많은데, 요즘은 사회가 각박해서 그런지 자기를 웃겨주고 재미있게 해주는 예능 프로그램을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것들을 보면 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오래 전에 <울지마 톤즈>를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라는 분이 남수단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들을 섬기시던 모습, 그리고 나중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분의 고귀한 헌신과 섬김을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실은 그때 수요예배에서 같이 보았습니다. 얼마나 감동이 됩니까?
그런데 눈물을 흘린 그것이 내 주변의 힘든 이웃을 찾아가 섬기는 것으로 잘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감동은 받았는데, 그것이 섬김으로 연결은 잘되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으로는 동정을 느끼며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자선단체나 교회에 기부금이나 헌금을 하면서 $10, $20, $50, $100을 보내며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삭막한 세상에 그래도 나는 온정이 꽤 많은 사람이구나.’ 하지만 평소 생활로 돌아가면 어려운 사람들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외칩니다. ‘당신들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이것은 모두 다 내 것이다.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얻은 것들이다. 당신들에게 줄 수 없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 게으른 사람에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어주어야 하는가?’ 이러면서 행동을 막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회가 문제이고 저 사람들의 게으름이 문제라고 하며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 탓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자신을 생각해보아도 이민 올 때 별로 가진 게 없었는데 지금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중 진짜 나의 것이 뭐가 있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만약에 진짜 내 것이라면 죽어서도 가지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게 진짜 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내가 가진 것 중에 얼마나 됩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것도 아닌데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시간도, 재능도, 물질도, 가족도, 모두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그것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과제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성도님들이 잘하고 계십니다. 2년 전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에 어려운 분들을 함께 돕자고 했을 때 이웃사랑 기금에 많이 동참해주셨습니다. 또 지난번 토네이도 피해자 구호헌금을 하자고 했을 때도 많은 분들이 거기에 동참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도 그렇고, 앞으로 이런 일들은 계속 벌어질 텐데, 우리가 각자 형편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을 계속 나누며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정말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해주셨다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지 않습니다. 내놓아도 아주 조금 내놓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점검해봐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내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로 알고 있는가? 나는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봐야겠습니다.
2. 감사의 선물을 보내는 다윗 (26~30절)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다고 믿은 다윗은 모든 전리품을 서로 나누었을 뿐 아니라 주변의 유다 마을들에도 보냅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26절)
다윗은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였던 자기 부하들만 감동시킨 게 아니라, 지방 유지들과 지도자들도 감동시킵니다. 그는 자기들이 얻은 전리품을 유다 지방의 유력한 지역 지도자들에게 보낸 겁니다.
다윗이 무슨 의도로 전리품을 유다 마을들에 보낸 겁니까? 그냥 보면, 다윗이 자기도 유다 지파이니까 자기 동족인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 정치적 로비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는 사울 왕은 곧 패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왕이 될 테니까, 미리 자신의 정치 기반을 마련해놓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살 수 있는 행동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실제로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엄청난 현실 정치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동족 유다 사람들에게 미리 보내놓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유다 지역의 사람들이 나중에 다윗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해석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탈취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자기들이 처리하기에는 너무 많았던 겁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던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 (31절)
여기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다윗을 평소에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대부분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닌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다 지파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든 그들의 은혜를 갚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에게 정말로 정치적인 야망과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 사람들을 보내서 다 나누어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자기 사람들을 미리 심어 놓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환심을 살 만큼의 양은 안 되었겠지만, 일부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어서 지파별, 지역별로 자기 사람들을 심어놓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순수하게 감사를 표현한 것뿐입니다.
3. 다윗의 리더십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의 아름다운 리더십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리더의 자리라는 것은 남들이 보기엔 매정한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자리입니다. 제3자나 옆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리더의 모질고 냉정한 면이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책임을 맡게 되면 자기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그 자리에 가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어느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우고 나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 사람은 집사 때는 참 좋았는데, 장로가 되더니 사람이 변했어.” 정말 사람이 변질된 경우라면 문제이지만, 사실 교회의 장로가 되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전에 못 보던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그저 자기가 맡은 사역만 열심히 하면 되었는데, 막상 장로가 되면 교회 전체를 다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쪽을 지지하는 사람, 저쪽을 지지하는 사람, 둘 다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누가 대통령이 되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고,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비난을 합니까? 그 시간의 1/10이라도 기도해주십시오. 지금도 그렇고, 차기 대통령도 그렇습니다. 내가 지지를 하든 안 하든,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이 할 일입니다.
특히 내가 지지하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 뭔가가 삐거덕거리며 잘 안 될 때 어떻게든 방어를 해주려고 하고, 반면 내가 반대하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잘하지 못하면 엄청나게 공격을 퍼부어댑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상관없이 미국의 경우는 주지사나 국회의원이었을 때 또 한국의 경우는 야당 지도자였을 때 대통령이 하는 일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하던 사람이, 막상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 나면 또는 어떤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면 이전에 자기가 말했던 것과 반대로 하는 경우들이 종종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일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런 것을 봅니다. 왜입니까? 대통령이 되고 보니까 이전에 자기가 비판했던 것이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라에는 극비사항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어서 그것을 알고 보니까 이전에 자기가 말한 대로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꽤 많습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막상 자기가 그 자리에 가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사회에서 엄청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어서 국회로 들어가더니 바보가 되었다고 느끼실 경우가 많을 겁니다. 특히 한국 국회의원들이 그렇습니다. ‘저 사람은 그렇게 똑똑하던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더니 왜 이렇게 바보가 되었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 들어가 나라의 극비사항을 알게 되면 이전에 자기가 했던 것과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 겁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도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난하기는 쉽지만, 대안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는 것을 매일 실감하는 것이 리더의 자리입니다. 교회는 극비사항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모든 분들이 리더의 위치에 있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는데 ‘교회는 왜 저런 식으로 일을 하나?’ 하고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뒤에서만 ‘저건 왜 저러나?’ 하지 마시고, 제직이 되고 리더의 자리에 가서 같이 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러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정말 잘못된 것이라면 바꾸는 겁니다. ‘이것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리더십을 행사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리더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결과가 좋더라도,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 대가가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을 쓴 손무도 이론가였을 때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고다.”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라고 했는데, 막상 전쟁에 뛰어 들어가서 보니까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해, 또 단 한 명의 장수를 만들기 위해 치르는 군인들과 가족들의 희생이 너무나 참혹한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죽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백전백승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다.”라는 또 다른 명언을 남겼습니다.
몽골의 황제 칭기즈칸은 서양 사람들이 무자비한 정복자라고 알고 있는데, 자기 아내로 하여금 전쟁터에서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서 키우게 했습니다. 그의 부하들은 그것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책임자로서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치른 희생과 또 거기에서 수많은 고아들이 발생하게 된 것에 대한 인간적인 슬픔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엄청난 사람들을 죽인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가 거기서 나오는 희생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리더의 길은 너무나 외로운 길입니다.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엄청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20세의 젊은 나이에 10년을 도망자로 쫓겨 다녔는데, 그 젊은 나이에 수없이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그런 과정 속에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결국 사랑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매일 하나님 앞에 무릎 끓고 나아갔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기도할 때만이 여러 결정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깨닫고 그 결정의 결과에서 오는 여파를 견디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십여 년의 세월 동안 기도하는 다윗과 동행하시며 그를 빚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왕이 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리더십의 핵심은 기도하기 위해서 꿇는 무릎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은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손입니다. 무릎과 손이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수많은 결정의 순간들을 만납니다. 혹시 여기에 ‘나는 리더가 아닌데?’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면 리더입니다. 특히 부모이신 분들은 모두가 리더입니다.
리더로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 앞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주님을 신뢰하고, 거기서 받은 힘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믿음의 사람, 아름다운 리더로 우뚝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습니다
삼상 30:21-31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다윗이 전리품을 전쟁에 참여한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똑같이 공평하게 나눈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21-22절에, 아말렉을 기습하여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찾아온 다윗의 군사 중에 일부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전리품을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전리품은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만 나누어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만일,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아무런 차별 없이 대해 준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서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논리적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22절에 이렇게 말한 자들을 가리켜 ‘악한 자와 불량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연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기력이 소진되어 싸울 수 있는 힘을 완전히 소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은 전쟁에 참여했다면 오히려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충분히 이해한 다윗이 나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변호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아말렉과의 전쟁의 승리는 그들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다윗과 함께 한 자들이 아말렉을 찾기 위해 헤맬 때, 애굽 소년을 만나게 하셔서 그들의 행방을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면 어찌 사로잡힌 이스라엘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이 단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단지 끌려가기만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자신들보다 수십 배가 많은 아말렉의 군사들을 어찌 그리 쉽게 무찌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하기에 그들이 얻은 전리품은 그들이 탈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탈취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그들도 실상은 ‘연약한 자’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도우셔서 이길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에 참전했던 자들은 마땅히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모든 사람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며, 함께 기뻐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본문에서와 같은 어리석은 주장을 하게 된 것은, 자기보다 ‘더 연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마땅히 할 바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보다 더 연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자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의 통로입니다. 오늘, 이러한 가장 큰 축복의 통로를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래서 이어지는 23-24절에, 다윗은 전쟁에 참여한 자나 그렇지 못한 자에게나 전리품을 동일하게 분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백성들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원리 아래, 모든 백성에게 평등하게 분배가 이루어지며, 연약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아말렉 기습공격으로부터 다윗 일행의 가족들이 한 사람도 다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보호 덕택이며, 수십 배가 넘는 아말렉과 싸워서 이긴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일행이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었고,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과연 누가 참된 왕권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참된 왕이심을 인정하신다면, 본문의 다윗처럼 모든 결정권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이어지는 26절 이하에, 다윗은 아말렉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유다의 장로들에게까지 나누어주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방 땅에서 망명 생활하는 처지로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가운데 있었지만, 재물이 생기자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어려움 가운데 있는 동족에게도 나누어주었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선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전쟁에서 승리했고, 전리품을 취할 수 있었음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믿고 나누는 삶을 삽니다. 이를 믿기에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무엇을 하든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노력합니다. 아무런 노력이나 수고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아말렉과 생명을 걸고 싸웠기에 전리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 줄 알아, 가진 것이 많은 자는 많은 대로, 적은 자는 적은 대로 나누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나눔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공동체도 나눔의 공동체로서 세워져 갑니다. 그를 통해 사랑의 공동체로 성장해 갑니다. 오늘, 나눔으로써 더욱 큰 은혜를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나보다 더 연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자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통로임을 깨닫습니다. 나의 권리를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놓고 순종함으로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를 통해 우리 가정과 교회를 평등과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싸운 사람과 지킨 사람
삼상 30:21-26 / jocw0104
4. 싸운 사람과 지킨 사람
1) 다윗이 무사히 가족들을 찾아서 돌아왔을 때 너무 피곤해서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했던 사람들이 다윗을 영접하러 나왔다. 이때 다윗과 함께 출전했던 사람들 중에서 악한 불량자들은 그들과 함께 아말렉을 치기 위해 브솔 시내를 건너지 않은 사람은 전리품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약한 사람들에게 물건은 아무것도 주지 말고 가족만 데리고 떠나게 하라는 것이었다.
21-22절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2) 사실 여기서 이들의 지나친 면이 드러난다. 물건을 주지 말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가족을 데리고 떠나게 하라는 것에서 이미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떠나라 말라 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다윗이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것은 앞으로 온 이스라엘의 규례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25)
23-24절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3) 다윗은 가족들을 찾은 것이 결코 자신들의 힘으로 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잃어버렸던 가족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또 아말렉 군대를 쳐서 많은 이익을 얻게 된 것이 결코 자신들의 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결코 자신들에게 공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다윗 일행의 물건들이 많았는데 그것을 다 짊어지고 추격했다면 그만큼 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친 사람들이 그 물건들을 지키는 일을 해 준 것이다. 그래서 공격만큼 중요한 수비, 곧 짐을 잘 지킨 사람도 똑같이 잘 싸운 것이라고 말했다.
적용) 사실 하나님의 일이나 교회 일을 봐도 마찬가지이다. 앞에 나서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수고도 많이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뒤에서 묵묵히 따라주는 사람들의 공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선교를 할 때에도, 앞에 나서서 선교하는 분들의 수고와 능력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뒤에서 헌금하고 묵묵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수고도 결코 작지 않다.
4) 다윗은 이 승리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해서 그 모든 전리품을 유다의 많은 고을에 보냈다. 이는 많은 유다 백성들이 가난과 궁핍 가운데 있는데 자기 혼자만 풍족하게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윗은 이 선물을 통하여 다시 백성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26절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5) 사실 유다가 약탈당하고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다윗은 그들을 도울 수가 없었다. 어려울 때 돕지 못하는 다윗은 유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물질을 혼자 차지하지 않고 함께 나누었을 때 사람들은 다윗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즉 다윗이 자기들을 직접 돕지는 못했지만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언제나 자기들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적용) 성도들이 서로 물질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당신을 잊지 않고 있으며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는 사람은 이 일을 하나님이 하고 계시며 이 사람 뒤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적용을 위한 질문 )
4. 우리는 앞에서 일하는 사람과 뒤에서 일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 우리는 앞에서 일하는 사람은 드러나게 일하는 사람으로 자기 권리가 분명하다고 하지만 뒤에서 조용히 묵묵히 일하는 사람은 드러나지 않아서 그들의 수고가 보잘 것 없다고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의 예를 통해서 보듯이 공격수와 수비수 똑같이 잘 싸운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둘 사이의 차등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눔의 축복을 누리라
삼상 30:21-31 / 한우리교회 박석훈 목사
주 제: 하나님은 우리가 나눔을 통해 더 부요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말씀:
들어가는 말)
어떤 사람이 임신 중인 아내에게 재산 분배에 대한 유언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에게 재산의 2/3를 주고 당신은 1/3을 가지시오.
만약 딸을 낳으면 그 딸에게 1/3을 주고 당신은 2/3를 가지시오”
그런데 아내가 아들과 딸의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자! 재산을 만족스럽게 분배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정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유언 내용을 조사해보면 아들 : 아내= 2/3:1/3= 2:1, 딸 : 아내= 1/3:2/3= 1:2로 나누면 좋으므로 아들:아내:딸=4:2:1이 되도록 나누면 됩니다.
따라서 딸은 1/7, 아내2/7, 아들4/7가 됩니다. 대단히 어려운 계산입니다.
상속재산을 둘러싼 후손들의 법정 다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세상입니다.
돈에는 부모, 형제도 없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 탓입니다. 목숨 걸고 싸우는 모습도 있습니다. 정말 서글픈 일입니다. 공평한 분배는 정말 어려운 일임입니다.
사회 복지 정책에서 ‘평등’과 ‘공평’이라는 용어를 자주 교환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 용어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빵 한 조각을 세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경우 평등 정책은 세 사람에게 각각 빵 1/3조각씩 배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공평정책은 만약 한 사람은 배가 고프고 다른 두 사람은 충분히 먹었을 때 배고픈 사람에게 더 큰 조각의 빵을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주제는 모든 사람의 욕구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평등하고 동시에 공평한 정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분배에 대해서는 저마다 의견이 다르고 마음이 다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나누어 준다 해도 만족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 오늘 본문은 신앙생활에서 나눔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 배경.......아말렉 족속이 다윗과 장정들이 전쟁에 나간 틈을 이용해 시글락에 있는 모든 재산과 가족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말렉을 추격하여 그들을 몰살시키고 가족과 모든 재산을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더불어 아말렉 족속이 가진 많은 전리품도 갖게 되었습니다.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브솔 시내에 남겨둔 200명의 병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다윗이 이들에게도 전리품을 나누어 주자고 하자 목숨 걸고 전투에 참여한 이스라엘 병사들은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들에게도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누어 줍니다.
1. 나눔의 가장 큰 적은 우리의 욕심입니다.
22.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다윗이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나누자고 할 때 반대했던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이스라엘 병사들 모두가 나누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성경은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나누는 것을 반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어: ‘모든 악한 사람과 무가치한 자’ 두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동의어를 반복한 말.
‘마땅히 행할 바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6절 다윗을 돌로 치자고 선동한 자들.
모든 일에 불만과 원망이 앞서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무엇이든지 나누어주지 말자”
이들의 주장이 공평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공평함이란 약자를 잘 배려하지 않고, 어떤 사정이나 상황에도 관계없이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약자를 배려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눅10:25-37)
.....강도 만난 이웃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이들의 주장은 몇 가지 사실로 볼 때 정당하지 못합니다.
1) 전투에 참여치 않는 사람들에게도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던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례와 상충됩니다.(민31:27)
2) 그들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자신들의 공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도 어긋난 것입니다.(8,23절)
3) 후방에서 소유물을 지키는 일도 작전상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점(25:13)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악인들이라 불릴 만큼 매우 잘못된 자들이었습니다.
-나눔의 가장 큰 적은 욕심입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와 불량배들은 전리품을 나누면 자신들의 몫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에 나누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욕심 부린다고 해서 자신이 많이 가져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욕심이 있습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욕심의 정도가 지나칠 때 이웃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내가 욕심 부린다고 많은 것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만 추해집니다.
욕심예화2)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다.
먼저 원숭이가 잘 다니는 길목에 가죽으로 만든 자루를 단단한 나무에 매어 놓는다.
이 가죽 자루는 겨우 원숭이의 손이 드나들 정도의 작은 입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 가죽 자루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과일을 넣고 멀찍이 떨어져서 기다린다. 숨어서 한참을 기다리면 원숭이가 그곳을 지나가 과일이 냄새를 맡고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과일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빈손만 겨우 들어가는 자루에서 과일을 집는 순간 빠지지 않는다. 바로 이때 원주민들은 소리를 지르며 원숭이에게 달려 나간다. 원숭이는 깜짝 놀라 도망치려고 하지만 자루 손에 있는 과일을 놓지 않으려고 손을 쥐고 있는 바람에 도망가지 못한다. 결국 원숭이는 원주민들에게 붙들리고 마는 것이다. 작은 욕심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고 마는 것이다.
-우리 안의 욕심을 잠재우는 방법? ...자족하며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나누며 살기 원하십니다.
다윗은 전리품 분배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3.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24.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나의 형제들아”...전쟁에 참여했던 자들이나 뒤에 남아 있던 자들이나 다 한 아버지로부터 나온 같은 형제들이라는 공동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입니다.
다윗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전리품을 얻을 수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전리품의 처분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다윗의 생각과 행위는 전쟁의 승리를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전리품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23절), 따라서 전쟁에 불참했던 용사들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형제라는 연대의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사상은 신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나눔과 사랑의 실천장이 되어야 한다는 모범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브솔 시냇가에 남은 낙오자 200명(30:9-10)
이들은 이미 아벡에서 시글락으로 오는 3일 간의 행군으로 지쳐 있는 데다가 다시 아말렉 추격전을 강행한 까닥에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버린 비교적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윗의 군대가 성공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들의 짐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21.○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오늘 우리에게도 브솔 시냇가에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 연약한 성도들, 몸이 아프고 병든 자들, 장애우들, 장결자들, 미신자 가족들, 불신자들.
오늘 우리는 이 남은 자들에게 소중하고 값진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보다, 건강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나눔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 나눔의 시작이 바로 행복나눔 전도잔치 전단지를 나누고 배포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3. 인생의 행복은 나눌 때 옵니다.
*히13: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말 성경]
그리고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교회는 사랑과 나눔의 실천 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쁨은 나눌 때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나눔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손을 펼 때 더 많은 것으로 손에 안겨 주십니다.
반대로 손에 움켜쥐고 욕심을 내면 어느 순간에 다 사라지고 맙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나눌 때옵니다. 나눔의 행복을 누리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빼앗긴 것보다 훨씬 많이 주신 이유는 베풀고 나누라는 뜻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싸우지 못한 사람들과 나누고 나아가 유다 지파 사람들과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과 교회에 주신 넉넉함 역시 나누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욕심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실 때 언제든지 내놓을 수 있는 멋진 성도들이 되십시오. 건강, 물질, 재능, 시간도...
*잠11:24-26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윤택하게 한다’....‘마르웨’ 충분히 마시게 한다.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이웃의 궁핍함을 채워주어 이웃에게 생기를 불어 넣는 사람은 자신도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요?
*전11:1-3 1.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2.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3.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여기 2절에 보면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 세상에서는 피치 못할 재앙의 날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다 고난이 있습니다.
3절 말씀처럼 먹구름을 통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몰아쳐 나무가 쓰러지듯이 인간은 비바람을 맞고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이번에 남부지방의 태풍으로 인한 물 폭탄 피해)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았던 사람은 그런 재앙의 때에 일으킴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1절에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위해 가진 떡을 나누라는 뜻입니다. 2절에 보시면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일곱이나 여덟은 많은 수를 나타냅니다. 가능한 대로 많은 이들에게 베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됩니다. 더욱 더 풍성한 복을 받도록 주님께서 만들어 주십니다. 재앙이 이 땅에 임할지라도 사랑을 실천한 사람을 주님은 결국 이 땅에서 영원까지 건저주시는 것입니다.
*시41:4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나누는 자에게 하나님은 가득 가득 채워 안겨주십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나누면서 행복하게 살기 원하십니다.
오늘 성경에 나누지 않고 욕심내는 사람을 가리켜 악한 자, 무가치한 자,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극심한 난관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형제들과 나누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은혜롭고 덕스럽게 여러 사람과 나누고 후히 주어도 더 나눌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 성경이 말하는 이런 부---자 되십시오.
*신15:10,11 / 10.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는 일과 절대 궁핍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부요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인생의 핵심 사명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교회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나눔의 운동을 해야 합니다. 내게 있는 좋은 것으로, 하나님의 복음으로 나누십시오.
--과연 내가 섬기며 도울 사람은 누구인가? 어떻게 도울 것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기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자녀들도 베푸는 사람이 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나눔과 베품이 주는 기쁨을 누리며 사십시오. 인생의 행복은 나눌 때 옵니다.
전리품 분배
삼상 30:21-31 / 이국진목사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다윗은 승리하였다. 빼앗겼던 아내와 자식들과 물건들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전에 낙오되어 전투에 함께 하지 못했던 200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몇 사람이 다윗에게 말했다. 처자식들을 이들에게 돌려주지만, 전리품은 나누어주지 말자고 했다. 그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한편으로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성경의 원리로 본다면,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으니까 말이다(살후 3:10). 만일 전투에 나간 사람이나 전투에 나가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이 전리품을 나누어준다면, 다음번에는 누가 전투에 나가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악한 자” 또는 “불량배”라고 지칭하였다. 다윗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전투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전리품을 나누어주라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전쟁의 승리가 다윗과 용사들의 승리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전리품은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리품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비록 그들이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역할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가리켜 다윗은 낙오자라고 표현하지 않고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라고 했다. 그들은 후방에 있으면서 그들의 재산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투에 나갔던 사람들이 안심하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매일 전투에 나간다. 그리고 그 전투를 통해서 전리품들을 얻는다. 하지만 그 모든 전리품은 내가 잘 해서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기적인 탐욕의 마음에서 이런 전리품들을 사용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은혜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 옳다.
사실 우리는 400명의 용사를 닮았다기보다는 낙오되어 있었던 200명의 사람들을 더 많이 닮았다. 우리는 늘 넘어지고 쓰러진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죽음에서부터 승리하셨다. 그리고 그 전리품을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셨다. 늘 넘어져 아무런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말이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름다운 리더십
삼상 30장 21~31절 / 콜롬버스한인장로교회
[들어가는 말]
대개 어느 나라나 정당들을 보면 이념과 사상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쪽은 보수적인 정당이고 다른 한쪽은 진보적인 정당입니다. 크게 이 두 가지가 있고 그 주변에 조금 더 보수적인 정당들이나 더 진보적인 정당들이 있습니다. 또 그 중간에 위치한 중도적인 정당들도 있습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공화당(Republican Party)과 민주당(Democratic Party)을 중심으로 한 양당정치 체제가 지속되어 오고 있는데, 한국도 대체로 그렇지만 시기마다 당이 새로 생기고 없어지기를 반복해왔습니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계속 있어 왔는데, 한국은 진보든 보수든 이름을 계속 바꿔서 조금만 안 보고 있으면 무슨 당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한국 정치계를 보면 종종 두 개의 당이 하나로 통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통합이 되는 과정에서 굉장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 각 당에 자기 입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절충하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그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반발하는 사람이 있고, 탈당하는 사람도 나오고, 나가서 또 다른 당을 세우기도 합니다.
가끔 보면 두 교회가 하나로 합치는 경우가 있는데, 각각 교인이 50명인 두 교회가 하나로 합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둘이 합치면 교인이 100명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교인 수는 그대로 50~60명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든지 따로 새 교회를 다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합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18장에서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시다 기도를 이야기하시며 ‘두 사람이 합심하여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8:19). 단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그렇게 힘들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서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지식층이나 부유층의 지지를 동시에 받기가 어렵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 사이에는 계파가 있고 분열이 생깁니다. 각기 다른 두 계층을 하나로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리더십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리더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로 다윗이 그러한 리더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설교는 은혜받기 위해 듣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든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결단하여 나가서 행동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도 많은 내용이 있지만, 그 가운데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 한 가지를 붙들고 ‘내가 이번 주에 정말 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며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배려와 화합의 분배 원칙 (21~25절)
지난주 본문에서 아말렉 사람들이 다윗의 마을인 시글락을 공격해서 거기 있던 가족들을 다 잡아가는 위기를 당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때 사람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을 얻은 후에 아말렉 사람들을 쫓아가 큰 승리를 거두고 모든 사람과 짐승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아말렉 사람들에게 빼앗아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냥 보면 큰 승리가 이야기의 핵심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브솔 시내에서 일어납니다. 큰 승리를 거두고 기쁨이 충만하여 시글락으로 돌아가던 다윗과 400명은 그 전에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고 싸우지 못한 200명의 동료들이 남아 있는 곳에 돌아옵니다.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21절)
너무 탈진한 나머지 중간에 낙오된 200명은, 승리를 거둔 400명의 동료들이 모든 가족과 짐승을 이끌고 돌아오자 기쁨으로 그들을 영접합니다. 자기 아내와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볼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상상해보십시오. 정말 기뻐하고 서로 얼싸안으며 울고 웃으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비록 자기들이 힘을 보태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함께 기뻐합니다.
이때 다윗도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가 따뜻하게 문안합니다. 그러나 그 400명 중에는 악하고 마음이 굳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낙오한 200명과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22절)
다윗과 함께 아말렉과 싸워 승리한 400명 가운데 악한 자들과 불량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가지 않은 200명에게는 전리품을 나눠줄 수 없다고 선동하며 나선 것입니다. 낙오자 200명은 자기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찾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말렉에게 빼앗아 온 짐승이나 물건들 뿐 아니라, 원래 그들의 것이었던 짐승들도 이미 빼앗겼던 것이니까 돌려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다윗과 함께 가지 못했던 200명은 실제로 아무것도 차지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지쳐서 자기 가족들을 찾는 것조차 포기해야 될 정도로 굉장히 무기력했고 부상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가서 자기 가족들을 되찾아준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들 자신도 그 이상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누어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싸우러 갔던 400명 중에서 악한 자들은 혹시라도 달라고 할까 봐 미리 선수를 치면서 아무것도 나누어줄 수 없으니 가족이나 데리고 가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400명 전체가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악한 자와 불량배들’ 즉 그들 중 일부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상황은 리더인 다윗에게 굉장히 곤란한 상황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주지 말라는 말을 듣자니 저 200명이 걸리고, 그렇다고 해서 싸우러 가지 않은 200명에게 다 똑같이 나누어주자니 목숨을 걸고 가서 싸운 저 400명에게 미안한 상황입니다. 리더가 되면 이런 딜레마가 많습니다. 이때 다윗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23-25절)
다윗은 일단 못되게 구는 불량배들을 향해 ‘야, 이 악한 것들아’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합니까? “나의 형제들아.” 일단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져줍니다. 그들이 그런 마음을 충분히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데, 다윗의 이 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지금 가족들과 재산을 모두 되찾았을 뿐 아니라 이렇게 많은 것들을 더 얻어서 오게 된 것이 결코 우리 힘으로 된 게 아니다.’라는 겁니다.
23절에 나오는 이 표현들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들이 잘해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신 일이라고 선포합니다. 잃어버렸던 가족들에게 어떻게 이토록 아무 일이 없었을 수가 있습니까? 그중 몇 명이라도 못 따라갔으면 아말렉 사람들이 분노하며 쳐 죽이고 갈 수도 있었는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게 우연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입니다.
그리고 아말렉 사람들은 간신히 도망한 사람들이 400명이었으니까 그보다 훨씬 많은 군대가 있었던 것인데, 도망간 사람들과 같은 숫자인 400명만 가지고 이 엄청난 대군을 물리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결코 자신들의 힘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자기들에게 공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다윗과 함께 한 이 사람들이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22장에 보면 아둘람 굴에 있던 다윗에게 찾아온 이들은 원래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다 인생의 패배자이며 사회의 낙오자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다윗을 통해 임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비참한 삶에서 건짐을 받아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의 손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과는 전혀 관련도 없던 사람들이 다윗의 믿음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도 점점 믿음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말렉 추격 사건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이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마을로 돌아오자 가족들이 다 끌려간 것을 보고 “다윗을 돌로 치자”(6)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가족들을 모두 되찾았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재산을 얻게 되니까 또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20). 그러니까 다 다윗 덕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미 고백하며 인정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이 아비아달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힘을 회복하여 자기들을 이끌고 나아갔기 때문에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지, 자기들끼리 가서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을 돌로 쳐 죽인 다음에 자기들끼리 갔으면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낙오자 200명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두가 다윗의 전리품이라고 말해놓고서는 사실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처음에 “다윗을 돌로 치자”라고 주동한 사람들이 큰 승리를 거둔 다음에는 앞장서서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고 외쳤을 것입니다. 또 똑같은 사람들이 200명에게 물건을 주지 말자고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윗을 돌로 치자는 사람들도 소수였고, 200명에게 주지 말자고 한 악한 자들과 불량배들도 소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항상 똑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매번 주동하며 문제를 일으킵니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습니다. 교회도 그렇고 사회의 일반 단체도 그렇고, 항상 소수의 똑같은 사람들이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어떤 때는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라고 하고, 어떤 때는 ‘저 사람들에게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다윗의 전리품이다.’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들의 감정과 자기들의 기준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자기중심입니다. 자기들이 기분이 나쁘면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라고 하고, 자기들이 기분이 좋으면 ‘이 모든 게 다윗 덕분이다.’라고 하며 왔다 갔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마음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 바뀌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못 봅니다. 자기의 감정과 자기 생각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감정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것, 모든 게 자기의 감정에 따라 나오는 것은 자기감정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런데 다윗 일행에게는 전쟁을 위해 가지고 온 물건들이 많았고, 지쳐서 시내를 건너갈 수 없었던 200명이 남아서 그것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을 가리켜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24)라고 표현합니다. 그 물건들을 다 가지고 추격을 벌였다면 그만큼 아말렉을 쫓아가는 데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하러 가면서 군수물자가 없이 갈 수는 없습니다. 먹을 것과 무기들이 무거워도 들고 가야 하는데, 이제 빨리 추격하면서 다 들고 가면 느리니까 그것들을 두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마침 200명이 더 이상 못 가겠다고 하니까 다윗은 재빨리 결단을 내리고 그들에게 남아서 그 물건들을 지키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리로 돌아온 것이지, 아무것도 없었으면 버리고 가자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지난주 2022년 월드컵 축구대회 예선전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본선에 올라가는 32팀이 거의 결정됐습니다. 추첨식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중동인 카타르에서 열리고 그것도 여름이 아니라 겨울(11-12월)에 열립니다. 그곳이 더운 중동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대표 팀은 이번에도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여 10회 연속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도 네 나라밖에 하지 못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한국 팀이 11년 동안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아시아 최강팀 이란을 상대로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2대0으로 이겼는데, 마지막 경기였던 상대적 약체 UAE를 상대로는 오히려 1대0으로 졌습니다. 그들이 수비를 너무 잘했기 때문입니다.
축구에서는 공격이 강한 팀이 아니라 수비가 강한 팀이 이깁니다. 그래서 한국이 그런 아시아의 상대적 약팀들과 경기를 할 때 그들이 수비전략으로 나오기 때문에 굉장히 고전을 합니다. 유럽이나 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적 약팀이 수비전략으로 나와서 강팀들이 고전할 때가 많고 심지어 질 때도 있습니다. 4년 전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이 당시 세계 1위였던 독일을 이긴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다른 스포츠 종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비가 강한 팀이 공격이 강한 팀을 물리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 중에 ‘공격이 강한 팀은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지만, 수비가 강한 팀은 우승을 할 수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가서 공격하여 싸워 이긴 사람들도 잘했지만, 남아서 수비한 사람들, 즉 짐을 지킨 사람들도 정말 잘했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 없이는 자기들이 이렇게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공이 있으니까 모두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없었다.’라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물건들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자기들이 외친 대로(20) 다윗이지, 자기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전리품들을 가리키며 다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러지 않는데 누가 이것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지금까지 놀라운 은혜로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로서 그들도 역시 관대한 은혜로 서로를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베풀 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특히 교회에서 사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 나서서 섬기는 분들이 수고도 많이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뒤에서 묵묵히 따르며 역할을 감당하는 분들의 공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가 같이 섬기다 보면 지쳐서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이 나올 수도 있고, 그럴 때 앞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과 뒤로 물러간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서로에게 가져야 할 마음은 자기주장이 아니라 용납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지금 탈진해서 함께 가지 못한 200명은 일부러 악한 마음을 품고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무 지쳐서 가지 못했습니다. 피곤해서 못 갔다고 되어 있지만, 그들 중 상처를 입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그들을 내치지 않고 품었습니다. 일부러 분열을 일으키는 경우라면 하나 되려고 힘쓰더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함께 나누고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다윗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실천이 참 약합니다. 저처럼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은 말씀을 많이 듣는 데 비해서 실천이 아주 적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속 강조하신 말씀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듣고 행해야 복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구약도 그렇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시고 신약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기만 하면 안 되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단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행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옵션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래, 하나님을 예배해야지’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네 자신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것은 옵션 같이 생각합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깨달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들어 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도 그것을 너무나 잘 깨닫고 요한일서에서 ‘우리가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예수님도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을 안다.’라고 하셨습니다. 삶 속에서 나오는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지, 말하는 것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진정한 자비와 사랑이 아니라 감상(sentiment)이 중심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감상은 실제 삶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감정입니다. 겉으로만 자비심으로 보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현충일인 Memorial Day가 5월 말에 있습니다. 그럴 때 애국심이 충만해지는 분이 얼마나 되십니까? 저부터가 잘 안 됩니다. Memorial Day는 우리에게 ‘노는 날’이지 애국심을 고취하는 날이 되지 못합니다.
한국의 광복절 같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기의 행렬을 보면서 나라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조금 생길 수는 있습니다. 국립묘지 같은 데를 티브이에서 보여줄 때 그런 마음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생긴다고 해서 나라에 결코 세금을 더 내거나 기부금을 내는 것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냥 감정만 조금 일어나다가 말뿐입니다. 그런 것이 감상입니다.
또 고난주간 같은 때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과 같은 영화를 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그 우락부락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무지막지한 채찍으로 막 때려서 등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줄줄 흐르며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님의 그 장면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슬퍼하는 그 마음과 눈물이 매일 하나님께로 나아가 깊이 그분과 교제하는 기도나 QT나 예배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들이 많은데, 요즘은 사회가 각박해서 그런지 자기를 웃겨주고 재미있게 해주는 예능 프로그램을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것들을 보면 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오래 전에 <울지마 톤즈>를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라는 분이 남수단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들을 섬기시던 모습, 그리고 나중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분의 고귀한 헌신과 섬김을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실은 그때 수요예배에서 같이 보았습니다. 얼마나 감동이 됩니까?
그런데 눈물을 흘린 그것이 내 주변의 힘든 이웃을 찾아가 섬기는 것으로 잘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감동은 받았는데, 그것이 섬김으로 연결은 잘되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으로는 동정을 느끼며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자선단체나 교회에 기부금이나 헌금을 하면서 $10, $20, $50, $100을 보내며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삭막한 세상에 그래도 나는 온정이 꽤 많은 사람이구나.’ 하지만 평소 생활로 돌아가면 어려운 사람들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외칩니다. ‘당신들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이것은 모두 다 내 것이다.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얻은 것들이다. 당신들에게 줄 수 없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 게으른 사람에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어주어야 하는가?’ 이러면서 행동을 막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회가 문제이고 저 사람들의 게으름이 문제라고 하며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 탓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자신을 생각해보아도 이민 올 때 별로 가진 게 없었는데 지금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중 진짜 나의 것이 뭐가 있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만약에 진짜 내 것이라면 죽어서도 가지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게 진짜 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내가 가진 것 중에 얼마나 됩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것도 아닌데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시간도, 재능도, 물질도, 가족도, 모두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그것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과제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성도님들이 잘하고 계십니다. 2년 전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에 어려운 분들을 함께 돕자고 했을 때 이웃사랑 기금에 많이 동참해주셨습니다. 또 지난번 토네이도 피해자 구호헌금을 하자고 했을 때도 많은 분들이 거기에 동참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도 그렇고, 앞으로 이런 일들은 계속 벌어질 텐데, 우리가 각자 형편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을 계속 나누며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정말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해주셨다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지 않습니다. 내놓아도 아주 조금 내놓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점검해봐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내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로 알고 있는가? 나는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봐야겠습니다.
2. 감사의 선물을 보내는 다윗 (26~30절)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다고 믿은 다윗은 모든 전리품을 서로 나누었을 뿐 아니라 주변의 유다 마을들에도 보냅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26절)
다윗은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였던 자기 부하들만 감동시킨 게 아니라, 지방 유지들과 지도자들도 감동시킵니다. 그는 자기들이 얻은 전리품을 유다 지방의 유력한 지역 지도자들에게 보낸 겁니다.
다윗이 무슨 의도로 전리품을 유다 마을들에 보낸 겁니까? 그냥 보면, 다윗이 자기도 유다 지파이니까 자기 동족인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 정치적 로비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는 사울 왕은 곧 패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왕이 될 테니까, 미리 자신의 정치 기반을 마련해놓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살 수 있는 행동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실제로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엄청난 현실 정치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동족 유다 사람들에게 미리 보내놓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유다 지역의 사람들이 나중에 다윗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해석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탈취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자기들이 처리하기에는 너무 많았던 겁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던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 (31절)
여기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다윗을 평소에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대부분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닌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다 지파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든 그들의 은혜를 갚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에게 정말로 정치적인 야망과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 사람들을 보내서 다 나누어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자기 사람들을 미리 심어 놓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환심을 살 만큼의 양은 안 되었겠지만, 일부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어서 지파별, 지역별로 자기 사람들을 심어놓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순수하게 감사를 표현한 것뿐입니다.
3. 다윗의 리더십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의 아름다운 리더십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리더의 자리라는 것은 남들이 보기엔 매정한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자리입니다. 제3자나 옆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리더의 모질고 냉정한 면이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책임을 맡게 되면 자기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그 자리에 가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어느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우고 나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 사람은 집사 때는 참 좋았는데, 장로가 되더니 사람이 변했어.” 정말 사람이 변질된 경우라면 문제이지만, 사실 교회의 장로가 되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전에 못 보던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그저 자기가 맡은 사역만 열심히 하면 되었는데, 막상 장로가 되면 교회 전체를 다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쪽을 지지하는 사람, 저쪽을 지지하는 사람, 둘 다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누가 대통령이 되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고,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비난을 합니까? 그 시간의 1/10이라도 기도해주십시오. 지금도 그렇고, 차기 대통령도 그렇습니다. 내가 지지를 하든 안 하든,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이 할 일입니다.
특히 내가 지지하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 뭔가가 삐거덕거리며 잘 안 될 때 어떻게든 방어를 해주려고 하고, 반면 내가 반대하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잘하지 못하면 엄청나게 공격을 퍼부어댑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상관없이 미국의 경우는 주지사나 국회의원이었을 때 또 한국의 경우는 야당 지도자였을 때 대통령이 하는 일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하던 사람이, 막상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 나면 또는 어떤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면 이전에 자기가 말했던 것과 반대로 하는 경우들이 종종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일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런 것을 봅니다. 왜입니까? 대통령이 되고 보니까 이전에 자기가 비판했던 것이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라에는 극비사항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어서 그것을 알고 보니까 이전에 자기가 말한 대로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꽤 많습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막상 자기가 그 자리에 가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사회에서 엄청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어서 국회로 들어가더니 바보가 되었다고 느끼실 경우가 많을 겁니다. 특히 한국 국회의원들이 그렇습니다. ‘저 사람은 그렇게 똑똑하던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더니 왜 이렇게 바보가 되었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 들어가 나라의 극비사항을 알게 되면 이전에 자기가 했던 것과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 겁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도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난하기는 쉽지만, 대안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는 것을 매일 실감하는 것이 리더의 자리입니다. 교회는 극비사항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모든 분들이 리더의 위치에 있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는데 ‘교회는 왜 저런 식으로 일을 하나?’ 하고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뒤에서만 ‘저건 왜 저러나?’ 하지 마시고, 제직이 되고 리더의 자리에 가서 같이 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러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정말 잘못된 것이라면 바꾸는 겁니다. ‘이것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리더십을 행사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리더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결과가 좋더라도,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 대가가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을 쓴 손무도 이론가였을 때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고다.”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라고 했는데, 막상 전쟁에 뛰어 들어가서 보니까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해, 또 단 한 명의 장수를 만들기 위해 치르는 군인들과 가족들의 희생이 너무나 참혹한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죽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백전백승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다.”라는 또 다른 명언을 남겼습니다.
몽골의 황제 칭기즈칸은 서양 사람들이 무자비한 정복자라고 알고 있는데, 자기 아내로 하여금 전쟁터에서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서 키우게 했습니다. 그의 부하들은 그것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책임자로서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치른 희생과 또 거기에서 수많은 고아들이 발생하게 된 것에 대한 인간적인 슬픔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엄청난 사람들을 죽인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가 거기서 나오는 희생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리더의 길은 너무나 외로운 길입니다.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엄청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20세의 젊은 나이에 10년을 도망자로 쫓겨 다녔는데, 그 젊은 나이에 수없이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그런 과정 속에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결국 사랑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매일 하나님 앞에 무릎 끓고 나아갔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기도할 때만이 여러 결정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깨닫고 그 결정의 결과에서 오는 여파를 견디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십여 년의 세월 동안 기도하는 다윗과 동행하시며 그를 빚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왕이 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리더십의 핵심은 기도하기 위해서 꿇는 무릎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은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손입니다. 무릎과 손이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수많은 결정의 순간들을 만납니다. 혹시 여기에 ‘나는 리더가 아닌데?’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면 리더입니다. 특히 부모이신 분들은 모두가 리더입니다.
리더로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 앞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주님을 신뢰하고, 거기서 받은 힘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믿음의 사람, 아름다운 리더로 우뚝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낙오자를 대하는 다윗의 기준
사무엘상 30:21-31 / 매원감리교회
1. 아말렉을 뒤쫓아 갈 때 낙오자들에 대한 차별을 제안하는 다윗의 부하들
2. 그러나 다윗은 전투에 참가한 자들과 낙오자들을 공평하게 대해줌
. 묵상 말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오.”(삼상30:23)
1. 문제아
어느 시대 어떤 사람들을 막론하고, 문제아들은 항상 존재하는가 봅니다. 다윗을 따르던 부하들 가운데도 그런 문제아가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그들을 일컬어 “악하고 야비한 사람들”(22)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과 낙오자들과 차별을 둘 것을 제안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만 돌려주고 그밖에 약탈당했던 물건들은 주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전쟁에 나간 사람들과 낙오자들을 공평하게 대해줬습니다. 악하고 야비한 문제아들이 내세우는 원리는 이른바, ‘세상의 원리’입니다. ‘자기가 일 한 만큼 만 가져가는 원리’입니다. 흠잡기가 쉽지 않은 ‘정의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적용한 원리는 ‘사랑의 원리’였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하루 종일 일 한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주는 원리입니다.
2. 사랑의 원리
문제아들을 다루는 법은 강요나 설득이 아닙니다. 바로 ‘감동’이 필요합니다. 정의의 원리로 똘똘 뭉쳐있는 이에게 사랑의 원리를 이해시키고 설득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영역으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감동’입니다. ‘나는 한 시간을 일했는데, 품삯은 하루치를 다 받았다’라는 자각, 그게 필요합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그런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오.”(23) 다윗이 정의의 원리를 사랑의 셈법으로 극복해낼 수 있었던 비결인 셈입니다. 자신이 지닌 모든 것,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엡2:8) 선물은 거져 주고받는 호의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대해주신대로 나도 남을 대하는 태도, 그게 바로 은총의 원리요 사람의 셈법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 감동이라는 게 꿈틀거립니다. 사람은 감동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