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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최후
삼상 31:1-13
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4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5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7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
8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9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10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11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12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13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삼상 31:1-13 / [사울의 최후] 그 사이에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길보아산으로 올라갔고, 이스라엘 군인들은 대부분 도망하다가 그 산에서 전사하였다. 2) 이제 블레셋 군대는 마지막 여세를 몰아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을 추격하였는데,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3) 그리고 사울마저 그를 쫓는 자들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4) 다급해진 사울은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경호원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명령하였다. `네 칼을 뽑아 어서 나를 죽여 다오! 어찌 내가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에게 잡혀 조롱당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도 그 경호원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감히 칼을 들어 치지 못하였다. 그러자 사울은 경호원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 사울이 이렇게 자결하자, 경호원도 따라서 똑같이 자결하였다. 6) 이리하여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경호원과 부하들이 모두 한날에 죽고 말았다. 7) 이스라엘 군대가 도망하면서 전멸당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마저 모두 전사하자, 이스르엘 평원과 요단 강가에 있는 주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자기들도 성읍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그래서 블레셋 군인들이 텅 빈 성읍으로 들어와 살았다. 8) 그 다음날 전사자들의 옷을 벗기러 온 블레셋 군인들이 길보아산에서 사울왕과 그의 세 아들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9) 그들은 쓰러져 있는 왕의 머리를 자르고, 그의 갑옷과 장비를 수거하였다. 그들은 이 승전의 기쁨을 자기들의 신과 온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약탈한 물건들을 전령에게 주어 블레셋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보이게 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사울의 갑옷을 아스다롯의 신전에 보관하고,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박아 달아두었다. 11) 길르앗야베스 주민들은 비참하게 죽어 간 사울의 소식을 듣고, 전에 사울이 암몬 족속의 손에서 구해 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12) 자진해서 일어섰다. 그들은 야음을 틈타 밤새도록 벧산으로가서 성벽에 매달린 시체들을 내려가지고 야베스로 돌아와서 화장하였다. 13_ 그리고 그 유골만 거두어다가 야베스에 있는 위성류나무 아래에 묻고,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7일 동안 단식하였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결과 사울 왕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전사(1-6)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참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과 그의 세 아들들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가운데는 다윗이 사랑한 믿음의 사람 요나단도 끼어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참 사랑과 우정을 나눈 친구였습니다(삼상 18:1-4). 또한 지혜롭고 용감한 군인이며(삼상 14:6-14) 왕위에 집착하지 않는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삼상 18:4). 그런 요나단이 패역한 아버지의 죄악의 결과로 죽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사악한 죄가 아들들에게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고한 결과였습니다(삼상 28:19).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경죄를 범하던 사울은 결국 스스로 생명을 끊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울 왕가는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다윗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함(7-10) 전투에서 패배하고 왕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읍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아마도 길보아 전투의 패배와 사울 왕의 죽음이 이스라엘 온 땅에 큰 공포와 두려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은 승리의 증거물로 삼기위해 사울의 머리를 베고 갑옷을 벗겨 그들의 땅 사방에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시체를 성벽에 못 박아 모욕하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승리를 확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이 없다면 온통 공포와 두려움과 실패로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뜻 안에 있는 것이 복이 됩니다.
장사지냄(11-13) 사울 왕의 전사 소식을 들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밤새 달려가서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칠 일을 금식하며 애곡합니다. 야베스 주민들은 암몬의 침공을 받았을 때 사울 왕이 구해 주었던 사람들입니다(삼상 11:1-11). 이들은 과거에 사울 왕이 베풀어준 은혜를 기억하고 그 보답으로 선행을 베푼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일도 필요하지만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적 용 : 가정, 사회, 국가의 지도자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와 우리 가정은 지금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묘지를 돌며 묘비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중 눈길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묘비글이 있었습니다. 그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석 줄의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웃고 있었소.” 순간 웃음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엔 이렇게 써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시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또 평범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피해가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온 흔적으로 당신의 묘비엔 어떤 글귀를 남기고 싶으신가요?
호크마 주석
=====31:2
블레셋 사람들이 쫓아 미쳐서 - 여기서 '쫓아 미쳐서'(* , 다바크)는 '연합하다', '붙다'란 의미로서(창 2:24;신 28:60), 곧 '바짝 달라붙다' 혹은 '바짝 추격하다'란 의미이다(삿 20:42;삼하 1:6). 따라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완전히 분산되고,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은 그들의 아무런 경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Klein). 또한 이때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도 각기 흩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의 세 아들의 이름은 역대상 10:2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여기의'아비나답'은 14:49의 '리스위'와 동일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상 8:33;9:39에 언급된 사울의 네 아들 중 네번째의 '에스바알'은 사울 사후(死後) 아브넬에 의해 잠정적으로 사울의 후계자로서 옹립되었던 '이스보셋'이다<삼하 2:8>. 한편, 우리는 여기서 특별히 다윗을 생명같이 사랑한(18:1)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요나단은 (1) 사울의 아들이었으나 질투와 시기의 화신이었던 사울과는(18:29)대조적으로 참 사랑과 우정을 나눌 줄 아는 자였으며(18:1-4:20:17), (2) 매우 지혜롭고 용감한 군인이었고(14:6-14), (3) 훌륭한 신앙 인격을 갖춘 의인이었으며(19:1;20:30-42), (4) 왕위에 집착하지 않는 겸손의 인물이었다(18:4;23:17). 그러한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패역한 사울과운명을 같이한 사실은 다음의교훈들을 준다. (1)부친의 사악한 죄 때문에 그 자손들이 고난을 당하게 된다(겔 18:2). (2) 의인의 소망과 생명은 이 세상에 국한되지 않고 오는 세상의 참되고 영원한 삶에 있다(잠 14:32). (3) 사악한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운명을 함께 한 효성이 아름답다.
=====31:3
사울이 패전하매 -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 전쟁이 사울에게 무겁게 되었다'란 뜻이다(왕상 12:10;대하 10:14;애 3:7). 이것은 결국 (1) 전황(戰況)이 지극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2) 불리한 전화으로 인하여 극도로 낙심하게 되는 것 등을 말한다(Klein, Lange). 활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 여기서 '따라 미치다'(* , 마차)는 '발견하다', '만나다'란 의미이다(창 36:24;신 22:23). 즉 블레셋 군대의 궁수(弓手)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을 찾아 발견하고는 맹렬히 추격했다는 뜻이다. 한편 '활쏘는 자'는 문자적으로 '활을 가진 자'란 뜻이다. 중상한지라(* , 야헬 메오드) -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 (1) '야헬'을 '고통하다' 혹은 '근심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훌'(* )에서 온 것으로 보고, '매우 떨었다'로 해석하는 견해(Keil, Smith, Klein, Lange,Wigram), (2) '야헬'을 '다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할랄'(* )에서 온 것으로 보고,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매우 많이 다쳤다'로 해석하는 견해(Hertzberg, Davidson) 등이다. 그런데 본 단어 '야헬'은 신명기 2:25에서는 '근심하니라'로 번역되었으며, 또 그렇게 번역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위의 두 견해 중 (1)의 견해가 타당하다. 그러나 위의 견해 중 (2)의 것이 맞다고 보는 학자들은, 사울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린 아말렉 소년의 증언 때문에 그같은 판단을 하는 듯하다. 즉 그 아말렉 소년은, 사울이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알고' 사울을 죽였다고 말했던 것이다(삼하 1:10). 그러나 그 아말렉 소년의 증언은 본장의 언급 및 대상10:1-6의 언급과는 전반적으로 상층되는 위증(僞證)임이 분명하다(삼하 1:1-10). 한편 여기와 병행 구절인 대상 10:3에서는 그 단어가 위의 (1)의 견해와 유사하게 '군급하여'로 번역되어 있다.
=====31:4
31:4 할례 없는 자들 - 이 말은 할례의 징표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창 17:9-14)이라는 선민(選民) 사상에 근거한 말로, 곧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 관계하에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14:6;17:26, 36).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 여기서 '모욕할까'(* ,히트알렐루)는 '더럽게 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알랄'(* )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더럽게 할까'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말은 사울을 죽인 후에 그 시체를 욕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은 남에게 가혹한 잔악 행위를 가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곧 블레셋이 이전에 삼손을 사로잡아 그를 욕보였던것처럼(삿 16:21-27), 블레셋 군대가 사울을 사로잡아 학대하고 욕보이는 행위를 가리킨다(삿 19:25). 그러므로 사울은 그들이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을 기피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병기 든 자가 두려워하여 행치 아니하는지라 - 병기 든 자의 이같은 처신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1) 자신은 왕의 생명을 끝까지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자로서, 기호를 봐서 어떻게 해서는지 그긴박한 상황(3절)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 (2)사울에 대하여 다윗이 가졌던 생각처럼(24:6) 기름 부은 바된 왕에게 감히 칼을 댈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 칼 끝을 위로 하여 칼을 세운 후 그 위에 자신의 몸을 덮친 행위를 말한다. 한편 생명에 대한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고 믿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자살은 결코 흔치 않았으나, 여기 사울의 자살 행위는 그의 비극적인 종말을 더욱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31:5
31:5 병기 든 자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함께 죽으니라 - 병기 든 자의 이같은 행동은 (1) 자신이 모시던 상전의 뒤를 라다라야 한다는 소박한 충성심, (2) 자신의 주인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자살토록 방치한 혐의로 인하여 비록 자신이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처형을 변치 못할 것이라는 염려(삼하 1:14, 15), (3) 사울의 생각처럼 '할례 없는 자'에 의해서는 죽음을 당하지 않겠다는 히브리적 종교심 등의 이유로 이뤄졌을 것이다. 후일 유대 전승은, 여기서 사울의 병기 든 자는 에돔 사람 도엑이며, 그가 자살한 칼은 놉 제사장들은 쳐죽인 바로 그 칼이라고 하나(22:18), 그러한 전승의 신빙성은 없다(Smith)
====31:6
그의 모든 사람 - 역대상 10:6에서는 '그 온 집'으로 말한다. 그러나 여기의 '그의 모든 사람'은 이 어구 앞에 '역시' 혹은 '또한'이란 의미를 갖는 '감'(* )이라는 접속사가 있다는 점에서, 본 어구 앞에 언급된 사울의 병기 든 자와는 다른 무리들 즉 사울의 모든 근위(近衛) 병사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여기의 '모든'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전투에서 사울의 군대가 완전 섬멸됐다고 볼 수는 없다. 아울러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의 가문이 완전 멸절된 것 또한 아니다. 사울의 사촌이다 군대 장관인 '아브넬'(14:50)이 살아 남았고, 아마도 전투에 참여치 않았을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에스바알, 삼하 2:8;대상 8:33;9:39)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사울 사후에도 왕가(王家)의 명맥을 잠시 유지해 갔다.
=====31:7
골짜기 저편에 있는 아스라엘 사람 - 여기서 '골짜기'는 사울이 전사한 길보아 산의 북동쪽 기슭으로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이스르엘(Jezreel) 골짜기'(29:1)를 가리킨다. 그리고 '저편'(* ,에베르)은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지파 등의 주민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을 가리킨다. 당시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분명히 비전투 요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사울의 군대와 합류치 못한 까닭은, 바로 이같은 연합을 방지하기 위하여 블레셋의 군대가 이곳 사람들과 사울의 군대 사이인 '수넴'(28:4)에 진을 쳤기 때문이었다(Aharoni).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 - 요단 서편에서 볼 때 '요단 건너편'은 '요단 동부 지역'(Transjordan) 전체를 가리킨다(Smith). 그러나 여기서는 전투 장소인 길보아 산의 맞은편 지역인 므낫세 반 지파의 거주 지역만을 가리킨다. 한편 길보아 산의 패배 소식은 이곳까지 급속히 퍼져나간 것 같고, 따라서 이들은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남하(南下)했던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 -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사울의 군사들로서, 이들은 주로 유다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 등에 속한 백성들일 것이다.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 이는 길보아 전투의 패배와 사울의 죽음이 이스라엘 온 땅에 큰 공포의 분위기를 몰고왔음을 말해 준다. 블레셋 사람들이 거기 거하니라 - 여기서 '거기'는 갈릴리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이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요단 강 동쪽 길르앗 땅에 있는 '마하나임'(Mahanaim)에서 왕위에 올랐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삼하 2:8,9). 또한 다윗이 사울의 사망 직후 유다 지역에서 왕위에 오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유다 지역도 당시 블레셋의 공략으로부터 점령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삼하 2:1-4).
=====31:8
그 이튿날 -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한 그 다음날을 말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 여기서 '벗기러'(* ,파솨트)는 일반적 의미의 약탈 행위를 가리킨다(27:10;30:1;삿 9:33;대하 28:18). 그런데 이 단어는 주로 의복을 벗기는 행위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된다(욥 22:6;미 2:8). 아마도 이것은 그 당시 옷이 모든 약탈물 중 가장 귀한 것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수 7:24). 사울과 그 세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 의복, 무기, 식량 등 전리품을 획득하러 왔다가, 시체들 중에서 발견된 이스라엘 왕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의 주검은 블레셋에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노획물이었을 것이다.
=====31:9
사울의 머리를 베고 -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큰 승리를 증명키 위한 증거물로 삼기 위한 행동이었다(17:57). 이같은 행위는 고대의 전쟁에서는 일종의 관습이었다(Smith).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 이는 사울의 머리를 벤 중요한 목적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울이라는 인물은 자신들에게 너무도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점에서(14:47;17:52;18:6), 엄청난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은 그들에게 대단한 기쁨을 안겨줄만한 큰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당 에게 전파한다'는 것은, 사울의 '머리'와 '갑옷'을 자신들의 신에게 봉헌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10절;대상 10:10). 이같이 적으로부터 빼앗은 대단히 중요한 전리품을 자신의 신에게 봉헌하는 행위는 (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언약궤를 다곤(Dagon)신당에 바친 경우<5:2>, (2)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여호와의 성소에 보관한 경우(17:54;21:8,9)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신당'(* , 베트 아차베헴)은 문자적으로 '우상들의 집'이란 뜻이다. 그리고 '아차베헴'은 '새기다', '조각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차브'(*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리고 특별히 여기서 '베트'(* )는 형태는 단수이지만, 복수(複數)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Lange, 출 6:14). 결국 이것은, 블레셋 땅에는 많은 신당(神堂)들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31:10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 이같은 블레셋 사람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신(神)에 대한 숭배와 봉헌의 성격을 띤다(9절;5:2). 즉 블레셋 족속은 자신의 신들이 자신들에게 금번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함으로써, 바로 이같은 봉헌 행위를 한 것이다. 한편 '아스다롯'(* ,Ashtaroth)은 '아세라'(Asherah, 신 7:5), '아낫'(Anath) 등과 더불어 가나안 3개 여신 중 하나로서, 전쟁과 풍요의 여신(女神)이다(삿 2:13주석 참조). 그리고 '아스다롯'이란 복수(plural)형태인데, 성경 용례상 이 '아스다롯'이 복수로 사용되는 것은 이것이 항상 '바알'과 함께 여호와의 신적 저주의 대상으로 선포되어지는 문맥에서이다(7:3, 4;12:10;삿 2:13;10:6). 반면에 '아스다롯'의 단수형은 '아스타르테'(Ashtarte)로서, 시돈의 여신인 '아스토레트'(개역 성경에는 '아스다롯'으로 표기되어 있다)와 동일시된다(Klein, 왕상 11:5,33;왕하 23:13). 이 사실은 곧 블레셋 족속들이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에 깊이 동화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그리고 여기 '아스다롯의 집'은 '아스글론'에 있었던 고대의 유명한 신전(神殿)으로 추정된다(Herodotus).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 여기서 사울의 '시체'는 '그 머리를 다곤의 묘(廟)에 단지라'라는 역대상 10:10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머리가 없는 몸뚱이 뿐의 시체였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12절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이때 사울의 세 아들들의 시체들도 함께 성벽에 못박혔음도 분명하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여기서 본 저자가 오직 사울의 시체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은, 오직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으로 인해 죽어서까지 수치를 당하는 처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Hertzberg, Keil). 한편 '벧산'은 요단 골짜기 근처 즉 이스르엘 골짜기의 동쪽 끝부분으로, 요단 강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6.5km 지점, 그리고 갈릴리(긴네렛, 디베랴)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당시 블레셋에 의해 점령된 성읍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은 행위와, 이전에 골리앗이 다윗의 시체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줄 것이라고 그를 위엽했던 일(17:44)과는 어떤 상통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고대 문헌에 따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블레셋 정복 후 블레셋의 에그론 관리들의 시체를
치욕이라 할 수 있다(8:4-8,19,20).
=====31:11
길르앗 야베스 거민 - '길르앗 야베스'(Gilead-Jabesh)는 갈릴리 바다 남쪽 약 30km 지점에 위치한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의 성읍이다(수 17:5,6). 이곳은 사울의 즉위 초기에 '암몬 사람'들로부터 침공을 받았었다(11:1). 그때 사울이 '베섹'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암몬 사람을 공격함으로써, 길르앗 야베스 거민을 구원했었다(11:8-11). 그러므로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과거 사울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이 은혜를 기억한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 -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에서 목을 벤 후, 목은 다곤의 신당에 매달고(대상 10:10), 나머지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박아 사울의 시체를 심히 욕되게 한 일을 말한다.
=====31:12
모든 장사 - 여기서 '장사'(* , 이쉬 하일)는 '남자'와 '유력'(有力)이 합성된 말로서, '기드온'(삿 6:12)과 '입다'(삿 11:1)등에게 적용되었다. 일어나(* , 쿰) - 이는 문자적 의미의 일어남을 의미치 않는다. 보다 함축적인 의미로서, 특별한 행위를 실천하기에 앞서 거기에 대한 강한 결단의 태도를 보여 주는 관용적인 단어이다. 한편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이같은 결단은, 과거에 자신들이 암몬 족속들로부터 침공당하여 극히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11:1-3), 사울의 군사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암몬 족속의 위협으로부터 구원받았던 사실을 기억한 연고이다(11:11). 즉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에게 신의(信義)를 지키고 보은(報恩)하기 위하여 블레셋 족속들에게 능욕당하고 있는 사울의 시체를 취하여 오기로 결단을 한 것이었다. 밤새도록 가서 - '길르앗 야베스'에서 사울의 시체가 못박혀있던 '벧산'까지는 약 21km 정도의 거리이다. 그러나 요단 강 계곡 등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벧산까지의 험한 지형적 요인을 감안한다면, 그때 그 거리를 최소한 약 5시간 정도 이상 행군했을 것이다. 특별히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밤을 택하여 그같은 일을 결행한 까닭은, 말할 나위없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망을 뚫기 위함이었다(28:8). 블사르고(* , 사라프) - 왜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의 시체를 화장(火葬)하는 장사 방식을 택하였는지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즉 (1) 목이 자리는 등 매우 손상된 시체였기 때문에, 매장(埋葬)과 같은 일반 장사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이같이 화장했다느 견해(Lange, Keil), (2) 매장과 같은 일반적인 장사법을 사용할 경우, 블레셋 사람들이 재침공하여 그 시체를 파내고 다시 모욕할까 염려하여 이같이 했다는 견해(Thenius, Smith, Philippson), (3) 죽은 지가 오래되어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어서 이같이 했다는 견해(Hertzberg), (4) 모압 암몬 등의 이방 국가와 인접하여 살던 까닭에, 그들의 영향을 받은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훌륭한 용사들을 화장하는 이교적 장사법에 따라 이같이 했다는 견해(Rainey), (5) '불사르고'(사라프)라는 단어를 '송진을 바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여부스 사람들의 장사 방식에 따라 사울의 시체를 방부 처리했다고 보는 견해(Driver) 등이 있다.그런데 이러한 견해들 중 (2)의 견해는, 사울의 매장지가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권 밖인
사울의 시체를 불사르는 내용은 언급치 않는다. 다만 뼈를 묻은 일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대상 10:12). 이는 산 사람 혹은 시체를 불사르는 행위를 악행에 대한 형벌의 관점에서 보는 모세 오경의 가르침에 따라서(레 20:14;21:9),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행위를 바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여 화장(火葬)은 생략하였기 때문인 듯하다(Klein). 혹은 화장(火葬)과 매장(埋葬) 사이의 조화에 어려움을 느껴 시체 처리에 대한 결과만을 언급했기 때문일 것이다(K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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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 여기서 '에셀 나무'(the tamarisk tree, NIV)-대상 10:12에는 '상수리 나무'(the oak tree, Living Bible)로 표기되어 있다. 히브리 원문은 위성류(渭城柳) 나무를 가리킨다-는 길르앗 야베스에 많았던 유명한 나무였다(Smith). 그런데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의 뼈를 그 나무 아래 장사한 까닭은, 그들은 사울이 그 나무 아래 앉기를 즐기는 등 생전에 그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2:6). 한편 그곳에 묻혔던 사울의 유골은 후에 다윗에 의하여 발굴되어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자신의 아비기스의 묘에 안장되었다(삼하 21:11-14). 칠일을 금식하였더라 - 아론이나 모세가 죽었을 때,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씩 애곡을 했었다(민 20:29;신 34:8). 이같은 애곡은 고인(故人)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키 위함이었다.여기의 '금식'도 애곡의 일종으로서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삼하 1:12). 이처럼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으로부터 걷어다가 장사를 지내고 7일을 금식하였다. 즉 이들은 과거에 사울이 베풀어 준 은혜를 기억하고(11:1-11) 그 보답으로 이러한 선행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를 받는 일도 필요하지만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은혜레 대한 감사 행위는 더욱 큰 은혜를 가져오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만을 맹목적으로 간구하지 말고, 이미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본서를 마무리짓는 사울의 비극적 죽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한(8:5,20)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패를 구속 역사의 섭리 속에 승화시키사, 당신의 뜻에 합당한 한 인물을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삼으셨으니(13:14;15:28;16:13), 그가 곧 다윗이었다.
< 설 교 >
자살할 용기있으면 살아보자
삼하 31:3-5 / 김근중목사
얼마 전 연예인 정다빈씨의 자살이 우리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최근 연예인들의 자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단 연예인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현재 우리 나라 자살률이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인구 10만 명당 26.1명으로 하루 평균 33명이, 약 44분당 1명이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1명이 자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살하지 않았던 사람도 5명중 1명이 자살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닷컴'에서 몇 년 전에 행했던 전화 조사에 의하면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고 응답한 사람이 전체의 20%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제 교회가 자살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될 때입니다. 자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진단하고 예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할 때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죽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 자살을 구원문제와 연관시켜서는 안 됩니다.
'자살'에 대해 생각할 때에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살을 구원문제와 관련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중세시대 기독교에서는 자살은 사단에 의해서 한 것이고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자살한 자에 대해서는 장례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 시체를 해하여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많은 교회들에서 자살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자살했을 때 논란이 생기고 그 장례식을 목사가 해 주어야 하는지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사울, 신약에서 가룟유다를 근거로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이해와 신학적 이해가 부족한 데서 나온 이론입니다.
가룟유다는 본래부터 택함 받지 못한 자로서 구원받지 못한 자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자살했다고 해서 '자살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명제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룟유다가 죽음의 방편을 자살로 선택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사울에 대해서는 구원의 여부를 논하는 자체가 위험한 일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죽이려 하고 제사장들을 죽이고 악신이 들렸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단언하는 일은 위험합니다. 사울도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이고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거듭난 사람도 얼마든지 거듭나지 못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거듭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신학의 배경이 복음주의, 개혁주의, 칼빈주의 입니다. '구원' 곧 천국과 지옥에 가는 문제는 '믿음'에 속한 문제입니다. '자살' 문제는 살인하지 말라(제 6계명)는 계명을 어기는 '행위'에 속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타살에 비해 죄를 회개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자살보다 조심해야할 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죄의 경중을 논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하게 생명을 멸한 살인죄인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자가 계명을 어기고 계명을 어긴 죄를 회개하지 못했다고 해서 한번 얻은 구원이 취소되거나 상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실 때는 원죄(정죄,유전죄)와 본죄(자범죄, 요구죄) 곧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죄값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택함 받은 자의 모든 죄값을 십자가 죽음으로 치루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받아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칭의와 중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살아가면서 자범죄를 짓거나 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상실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그 죄값을 다 치루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회개'라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것을 확인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코 믿는 자가 범죄하고 회개하지 못했다고 해서 구원이 상실되거나 지옥 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하는 경우는 자살한 경우가 아니라도 많이 있습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기 전에 사고당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라도 자살 외에도 의지적으로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죄에 대해 회개하기 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고 믿음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행위가 구원의 조건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2. 자살은 사단의 역사와 심리적 압박으로 하게 됩니다.
최근 자살한 연예인들을 보면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유니, 이은주, 정다빈 씨도 기독교인입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닷컴'에서 몇 년 전 행했던 전화 조사에 의하면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21%)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19%)보다 자살충동을 더 경험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동안 교회들에서 자살을 영적인 문제와 믿음 문제로만 다루었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영적인 문제가 심리적 육체적 문제를 낳는다는 공식에서 벗어나 육체적 심리적 문제가 영적인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육체적 심리적 영적인 문제가 복합적 혹은 유기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통합적 시각에서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울왕은 악령이 지배하여 역사하는 면도 있었지만 악령이 그를 지배하게 된 배경을 보면 심리적인 면이 다분히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어 나라가 강성해 지자 교만해지기 시작했고 다윗이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자 다윗을 시기하여 미워하고 죽이려는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블레셋과 길보아 전투에서 패전하고 도망하던 중 부상을 당하고 블레셋 군사에게 추격을 당하자 부하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하가 명령을 거절하자 자기 칼을 땅에 거꾸로 대고 그 곳에 엎드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자살을 한 것입니다. 사울이 자살을 하게 된 것은 악령의 역사와 다윗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과 전쟁에서 패하게 되는 물리적 상황이 겹쳐진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것도 종합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부분만 보려는 자들은 자살을 사단의 역사로만 간주해 버립니다. 현실적으로 보려는 자들은 돈을 벌지 못한 것과 충격적인 사건과 벗어날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심리적인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학생들은 공부 문제로, 청년들은 이성적인 문제로, 성년들은 가정파괴와 직장 상실과 사업실패 등이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때보다 지금이 더 자살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상담소에 자살 상담을 해 온 사람들의 80~90%는 우울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개인적 상황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 같지만 더 근 본적인 이유는 개인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 그 상황을 감정적으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돈, 이성, 가정파괴, 사업실패 등이 있을 때 소외감이나 단절감으로 인한 고통을 처리하지 못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마지막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자살하기 직전에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반드시 죽음을 알립니다. 또 소외감을 해결하기 위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모이고 집단 자살을 하게 됩니다. 심리적 원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사회적으로 보아도 심리적 요인이 큽니다. 우리 나라 자살률을 보면 통계적으로 여자보다 남자가 2배 이상 많고 남자 중에서도 40대가 가장 많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살면서 남자이면서 40대인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문화구조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공동체 중심에서 개인중심으로 남성 중심에서 여성 중심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문화 적응을 빠르게 해 가는 반면 남자는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40대는 과거의 정신 구조에서 현재의 문화 구조의 갭을 줄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자 40대는 아직도 강한 왕적 존재여야 한다는 통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직장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하면 부모와 아내와 자녀들에게 자격을 상실했다고 생각하여 가출하거나 자살을 생각합니다. 또한 아내와 자녀는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이혼을 요구하거나 대항하는 것을 경험하므로 소외감을 가지고 분노하다가 해결되지 않으면 자살을 생각합니다. 사단은 그 심리적인 요인들을 교두보로 삼아 적극적으로 공략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살은 개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이 올 때 심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여 우울증세를 지속하다가 사단의 속삼임에 넘어가 자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건강한 삶을 살려면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성격적이든 심리적이든 충격적 상황이 올 때 심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자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상황이 와도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심리적으로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정체성이 없거나 약하면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분노하고 우울해 하고 자포자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감정들을 치유하고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으로 내셨습니다.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내셨습니다.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내셨습니다. 우리을 선택하실 때에도 가장 완전하게 생각하여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내시고 선택하시고 우리에 대한 목적을 계획하셨을 때, 우리를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혼자라고 생각하고 아무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우리의 평가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속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키가 크고, 몸매가 늘씬하고, 이목구비가 오똑하고, 공부를 잘하고 돈을 잘 버는 사람을 우월한 존재로 봅니다. 그렇지 못하는 자는 열등하게 봅니다. 그 평가는 대부분 물질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속적이고 우상적이고 사단적인 기준입니다. 왜 그 잘못된 평가에 속아서 자신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포기하려 합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55:8-9).
이사야43:7에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4:11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고 했습니다.
살아 계십니까?
삼상 31장 3~5절 / 임현수목사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자살을 합니다. 부부싸움을 한다음 자살을 하고, 카드빚 때문에 자살을 하고, 사업에 실패해서 자살을 하고, 신병을 비관해서 자살하고, 학교 성적이 나쁘다고 자살하고, 부모의 꾸중을 듣고는 자살하고, 생활고 비관 노인의 자살, 실직, 퇴직 비관 자살, 채무 압박 등으로 인한 자살, 농가 부채 비관 자살, 청년 실업난으로 인한 자살 등… 자살의 이유는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생계가 힘든 엄마가 어린 세 아이들을 아파트 창문 밖으로 던지고 투신하였습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는 자살을 미화하고 종교화합니다. 2차 대전 때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는 무려 4천여 명의 열아홉, 스무 살 젊은이들이 전투기를 몰고 미국 군함을 향해 돌진, 자폭하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매일 젊은이들이 ‘지하드(聖戰)’라는 깃발 아래 폭탄을 안고 목표물에 뛰어듭니다. 알라를 위해 죽으면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부추겨 그들을 자살로 몰고 갑니다.
한편 스웨덴은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 가난도, 실업도 없고, 의료비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살율이 가장 높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15분마다 1명꼴로 자살이 시도되고, 자살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몇 년째 1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자살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뽑아 보았더니, 첫째로, 45세 이상 된 사람들이랍니다. 어째서 45세입니까? 종종 말하는 ‘Mid-life Crisis,’ 즉 ‘중년의 위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 만큼 살아보았습니다. 죽도록 공부도 해 보았고, 직장생활도 20년 정도 했고, 결혼하면 행복하다 해서 결혼했고 자식도 낳아 키워 보았습니다. 그런 시점에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가?”하는 의문이 들고 가슴 속에 공허감이 깊어진답니다. 집도, 자동차도 사 보았고, 여행도 다녀 봤지만 다 그저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면 죽음을 택하는 것 입니다.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의 자살 /연예인 정다빈씨의 자살 / 국민 배우 최진실의 자살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한 달전에 자살한 안재환의 죽음 이후 연탄불을 피워 놓고 모방 자살한 사람이 10명 가깝게 보도 되고있으며, 최진실이 죽은지 몇 시간 안되어 똑같은 모습으로 죽은 젊은 처녀의 죽음이 보도되었습니다. 3일 하루동안 2건 발생...압박붕대에 목맨 시신을 보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연예인들의 자살은 보다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살은 한국인들에게도 가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매우 슬픈 일 이지만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저 위대한 선지자였던 엘리야도 자살 충동을 강하게 느낀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가롯 유다는 실제로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기에 무척 조심스럽지만 요즘 이런 충격적인 사건을 보면서 이제라도 적극적인 예방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안재환의 자살은 사업실패로 인한 부채 때문이라 하고 최진실이 자살한 이유가운데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안재환의 부채와 관련된 인터넷에 뜨는 악풀이 원인이라고들 합니다. 성경에도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했는데…. 사람을 살리기 보다 사람을 죽이는 쪽으로 발달한 혀들이 문제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괴소문을 내는 것은 혀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에 해당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링컨, 처칠, 루소, 도스토예프스키, 차이코프스키, 칼빈, 루터, 웨슬리, 키에르케고르......이런 사람들의 공통점도 바로 우울증입니다. 오늘날도 전 세계 인구 중 3억 4천만이 우울증에 시달릴 정도로 우울증은 우리와 매우 가까이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라고 유달리 예외도 아닌 듯 싶습니다.
우울증에 꼭 따라오는 이야기가 자살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2/3가 자살을 생각하고 10-15%는 자살을 실행합니다. 또 자살 인구의 90%이상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매년 45만명이 자살하고 있으며,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는 5번째로 자살률이 높습니다. 자살심리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희망의 상실이고 사랑의 상실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은 치유 될 수 있습니다.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 헨리 나우웬은 "우울의 시기는 깊은 정화의 시간이며, 새로운 내적 자유와 창의력을 얻는 기간이 되었다. 우울증은 나에게 '기대하지 않은 선물'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탐심에서 떠나고 사랑을 선택하면 자살은 방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살의 반대는 살자입니다. 생각만 바꾸면 자살은 방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가 자살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될 때입니다. 자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진단하고 예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자살을 구원문제와 연관시켜서는 안 됩니다.
중세시대 기독교에서는 자살은 사단에 의해서 한 것이고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자살한 자에 대해서는 장례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 시체를 해하여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많은 교회들에서 자살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자살했을 때 논란이 생기고 그 장례식을 목사가 해 주어야 하는지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사울, 신약에서 가룟유다를 근거로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이해와 신학적 이해가 부족한 데서 나온 이론입니다.
가룟유다는 본래부터 택함 받지 못한 자로서 구원받지 못한 자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자살했다고 해서 '자살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명제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룟유다가 죽음의 방편을 자살로 선택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죽이려 하고 제사장들을 죽이고 악신이 들렸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단언하는 일은 위험합니다. 사울도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이고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거듭난 사람도 얼마든지 거듭나지 못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거듭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 곧 천국과 지옥에 가는 문제는 '믿음'에 속한 문제입니다. '자살' 문제는 살인하지 말라(제 6계명)는 계명을 어기는 '행위'에 속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타살에 비해 죄를 회개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보다 조심해야할 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죄의 경중을 논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하게 생명을 멸한 살인죄인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자가 계명을 어기고 계명을 어긴 죄를 회개하지 못했다고 해서 한번 얻은 구원이 취소되거나 상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실 때는 원죄(정죄,유전죄)와 본죄(자범죄, 요구죄) 곧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죄값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는 자는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받아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칭의와 중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살아가면서 자범죄를 짓거나 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상실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그 죄값을 다 치루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회개'라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것을 확인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코 믿는 자가 범죄하고 회개하지 못했다고 해서 구원이 상실되거나 지옥 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하는 경우는 자살한 경우가 아니라도 많이 있습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기 전에 사고당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라도 자살 외에도 의지적으로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고 믿음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행위가 구원의 조건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2. 삶의 과부하를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수 없는 짐을 지고 고생을 하게 되면 점점 삶에 의욕을 상실하고 살아갈 의미를 잃어 버리고 자살하게 됩니다. 위대한 사도바울도 너무나 심한 고생에 부딪혔을때 삶의 소망까지 잃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도 삶에 과부하가 걸리니 낙심하여 죽기를 원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절로 2절에 보면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 협박의 말을 듣고 엘리야는 그만 낙심을 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 3백만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오다가 너무나 힘이 들고 지치니까 죽기를 원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같은 사람도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살하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난 다음에 엄히 명령한 것이 있습니다. 안식하라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쉬셨습니다. . 예수님도 여러분 종종 쉬러 갔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1절에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7절에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네 번이나 영국 수상을 지낸 글래드스턴은 성수 주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나이가 90세가 되도록 주일예배 한번도 빠지지를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성가대원으로 봉사했고 늘 힘써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영국에서 역사상 손꼽는 수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최근 자살한 연예인들을 보면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유니, 이은주, 정다빈, 안재환, 최진실 씨도 기독교인입니다. 이들의 경우도 보면 모두 과부하를 못 이긴 것 입니다. 심리적인 압박, 정서적인 압박이 너무 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울왕은 악령이 지배하여 역사하는 면도 있었지만 악령이 그를 지배하게 된 배경을 보면 심리적인 면이 다분히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어 나라가 강성해 지자 교만해지기 시작했고 다윗이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자 다윗을 시기하여 미워하고 죽이려는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블레셋과 길보아 전투에서 패전하고 도망하던 중 부상을 당하고 블레셋 군사에게 추격을 당하자 부하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하가 명령을 거절하자 자기 칼을 땅에 거꾸로 대고 그 곳에 엎드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자살을 한 것입니다. 사울이 자살을 하게 된 것은 악령의 역사와 다윗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과 전쟁에서 패하게 되는 물리적 상황이 겹쳐진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것도 종합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부분도 있지만 실제로 더 큰 원인은 심리적인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학생들은 공부 문제로, 청년들은 이성적인 문제로, 성년들은 가정파괴와 직장 상실과 사업실패 등이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때보다 지금이 더 자살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상담소에 자살 상담을 해 온 사람들의 80~90%는 우울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개인적 상황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 같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개인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 그 상황을 감정적으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돈, 이성, 가정파괴, 사업실패 등이 있을 때 소외감이나 단절감으로 인한 고통을 처리하지 못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마지막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자살하기 직전에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반드시 죽음을 알립니다. 잘 파악해야 합니다….
식사량이 줄어듭니다. 말이 없어집니다. 자기가 아끼던 것 나눠줍니다. 갑자기 침착해집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안부 전합니다. 잘 있어….
심리적 원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사회적으로 보아도 심리적 요인이 큽니다. 우리 나라 자살률을 보면 통계적으로 여자보다 남자가 2배 이상 많고 남자 중에서도 40대가 가장 많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살면서 남자이면서 40대인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문화구조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공동체 중심에서 개인중심으로 남성 중심에서 여성 중심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문화 적응을 빠르게 해 가는 반면 남자는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40대는 과거의 정신 구조에서 현재의 문화 구조의 갭을 줄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자 40대는 아직도 강한 왕적 존재여야 한다는 통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직장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하면 부모와 아내와 자녀들에게 자격을 상실했다고 생각하여 가출하거나 자살을 생각합니다. 또한 아내와 자녀는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이혼을 요구하거나 대항하는 것을 경험하므로 소외감을 가지고 분노하다가 해결되지 않으면 자살을 생각합니다. 사단은 그 심리적인 요인들을 교두보로 삼아 적극적으로 공략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살은 개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이 올 때 심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여 우울증세를 지속하다가 사단의 속삼임에 넘어가 자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건강한 삶을 살려면 희망과 꿈을 잃지 말아야 됩니다.
결국 성격적이든 심리적이든 충격적 상황이 올 때 심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자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상황이 와도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심리적으로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감정들을 치유하고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으로 내셨습니다.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내셨습니다..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혼자라고 생각하고 아무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우리의 평가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속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키가 크고, 몸매가 늘씬하고, 이목구비가 오똑하고, 공부를 잘하고 돈을 잘 버는 사람을 우월한 존재로 봅니다. 그렇지 못하는 자는 열등하게 봅니다. 그 평가는 대부분 물질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속적이고 우상적이고 사단적인 기준입니다. 왜 그 잘못된 평가에 속아서 자신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포기하려 합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 55:8-9).
이사야 43:7에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4:11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고 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삶의 능력의 한계점에 도달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자살만이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저히 피할길이 없고 너무나 삶이 고달프기 때문에 이 고달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은 하나님의 기적의 시작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나가면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꿈과 희망을 가질수 있고 꿈과 희망이 있는 이상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시편 42편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을 바라게 되면 오히려 좌절과 절망 대신에 찬송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로 1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가에 와서 막다른 골목에 처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막다른 골목에서 삶의 길을 얻는 것입니다.
어떻게 적막강산이 될지라도 어떻게 삶의 동굴속에 들어가서 나갈길이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모든 동굴은 터널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갈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선생도 거기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때 죽은자를 살리는 주님을 앙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10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의지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이나 고통이 다가와도 꿈과 희망은 가질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로 18절에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랄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일을 우리가 짊어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짊어지면 지치고 피곤해 집니다. 일을 행하는 야웨, 그일을 지어 성취하는 야웨인 것입니다. 일은 야웨께서 행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당해서 감당하지 못할 때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의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해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에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저와 여러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우리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3절과 9절에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든 자’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신학자였던 폴 틸리히는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죽음의 절망과 고통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이땅에서는 다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라고 칭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아야 우리는 인생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속에서 자살충동을 다 이기고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이응효목사(인애교회) / 삼상 31:1-13절
1년 4개월 동안 주일 강단에서 사무엘상을 설교하여 왔습니다. 이제 오늘로 사무엘상 설교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돌은 가라앉지만 그 파장으로 물결이 연못 전체로 번져가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들과 이웃과 그와 연관된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특히나 그 사람이 공동체의 지도자라면 그 파장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은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에서 각각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엘리제사장 한 사람이 영적으로 어두워지자 이스라엘 전체가 영적으로 어두워졌습니다. 지도자 엘리제사장 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자 이스라엘 전역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삼상3:1)
엘리제사장 한 사람의 집안이 범죄하므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패배하고 많은 땅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무엘 한 사람이 바로 서자 이스라엘이 일어나 블레셋을 물리치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이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그의 자손이 모두 복을 받았고,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그의 조카 롯 한 사람으로 인하여 아내도 죽고 두 딸도 부도덕하고 패역한 딸이 되었고 그 자손 암몬과 모압은 이스라엘과 대대로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 한 사람이 억울하고 원통해도 참고 자신을 죽이자 그로 인하여 애굽과 그 주변의 많은 나라의 백성들이 목숨을 건졌고, 그의 가족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에스더 한 사람이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심하고 금식하며 나아갈 때 하만의 간계로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유다민족 전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니엘 한 사람이 타협하지 않는 확고한 신앙을 가지자 이로 인하여 바벨론과 파사의 왕과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불순종한 요나 한 사람 때문에 요나가 탄 배 안의 사람들이 죽을 고생을 하였고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반대로 요나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키자 이로 인하여 니느웨성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간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아이성 전투에 패배하고 36명이나 죽었습니다.
아간이 자복하고 난 다음에야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난 배안의 276명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고 한 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의롭다함이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2~21)
로마서5:17절에는 “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는 사울 한 사람의 죄 때문에 그 가족 뿐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군대가 블레셋의 손에 죽고 일반 백성들도 성읍과 전토와 집을 다 빼앗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사울은 불순종해 왔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왕이 된 이년 째부터 경고를 해 왔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38년 긴 세월동안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끝끝내 회개하지 않았던 사울은 결국 죄의 대가를 치르고 말았습니다.
1. 사울은 자신이 죽기 전에 아들 셋이 죽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2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신실한 아들이었고 깨어있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불의한 짓을 할 때 아버지께 목숨을 걸고 충언했던 충신이요 효자였습니다.
그렇게 조국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했던 용감한 사람 요나단도 아버지와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죄가 있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실패가 자식들의 실패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의 영적인 실패가 그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에 미쳐 한꺼번에 전쟁에서 두 아들이 죽었고, 그 며느리도 아이를 낳다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아버지와 자녀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이 가정의 제사장이 되어 자녀에게 좋은 신앙유산을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울과는 반대로 다윗 한 사람 때문에 그 자자손손이 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자 하나님이 진노하셨지만 다윗을 생각하사 그의 세대에서는 나라를 나누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왕상11:12절)
유다의 왕들이 죄를 짓고 불의하여도 하나님은 다윗을 생각하사 그 왕조를 지켜주시고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2. 사울은 결국 생을 자살로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하1장에 보면 사울은 투구를 쓰지 않고 왕관을 쓰고 전쟁에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쟁 중에도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결국 자랑하던 그 왕관 때문에 표적이 되어 활 쏘는 자가 따라 붙었고 결국 적의 화살을 맞았습니다.
중상을 입은 사울은 나중에 적들에게 모욕을 당할까봐 부관에게 죽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하는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몸에 칼을 댈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사울은 결국 자신의 칼에 엎드려져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인생의 가장 슬픈 죽음입니다.
4절에 보면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면 남자다운 죽음이요 장엄한 죽음이라고 칭찬할지 모르지만 성경에서는 대단히 잘못된 죽음이요 비참한 죽음으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적군의 손에 죽었다고 하면 후대에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기록할 것인가?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으로 부관에게 죽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거절당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끝끝내 사람의 시선과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의 모습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오래 살다 죽으면 호상이라고 하고, 교통사고로 죽으면 사고사라고 하고, 집밖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하고, 물에 빠져 죽으면 익사라고 하며, 강도나 도적의 손에 죽으면 비명횡사라고 하고 갑자기 죽으면 급사라고 하고, 천안함 침몰로 죽은 장병들을 순국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죽음의 형태를 가지고 말하지만 그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는 고통스럽게 죽었지만 죽은 후 영원한 즐거움에 참예하고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반대로 건강하게 장수하고, 많은 자손을 두고, 수많은 조문객들의 관심을 받는 장례를 치루었지만 죽은 다음에 영원한 고통에 떨어진다면 영원한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눅16:19~31)
성경은 사람이 죽은 그 이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판은 우리에게 영원한 갈림길을 만듭니다. 그 갈림길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가, 혹은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가가 아니라 이 땅에서 내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울이 마지막 육신의 목숨이 다한 그 순간에 “주여, 내 일생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불의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내 목숨이 다하였습니다. 육신은 죽지만 주여 내 영혼을 구원해주옵소서.” 하고 돌이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죽는 그 순간에도 그는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다윗은 죽기 직전에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유언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2~3)
참으로 좋은 죽음이요 좋은 유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 가족들에게 “에이 하나님이 없어 믿지마” 하고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부산에 살던 어떤 불신자는 죽을 때 그 부인에게 “내 몸을 만원권 지폐로 덥어줘 에이 분하다” 이 말을 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비참한 죽음입니다.
하지만 성군 다윗의 죽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역대상 29:28)
다윗 그는 살 때도 오직 하나님이었고, 죽을 때도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의 죽음 자체도 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은 보기에도 비참합니다.
이튿날 적의 군인들이 수색을 하던 중 사울과 왕자 세 사람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그냥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베어서 머리는 자기네들의 신당에 안치하고 시체는 성벽에다가 못을 박고 걸어놓았습니다. 오고 사람 가는 사람 다 보도록 전시를 한 것입니다. (8~10)
3. 사울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과 성읍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7절에는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 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사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왕의 실패로 말미암아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일반 백성들까지도 자기들의 토지와 가옥과 재산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으로 모든 백성들이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을 추격하여 홍해 바다속으로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바다 물을 다시 합치므로 모든 애굽의 군대가 몰살당하였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을 잘 못 만나 군사들이 도매급으로 몰살을 당한 것입니다.(출14장)
목사 한 사람의 잘못으로 교회가 무너지고 교인들이 흩어지고 교인들의 영적생활과 가정까지도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공동체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은 나 한 사람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신자들이 직분을 감당 못하고 죄악가운데 살면 그 실패의 결과가 나와 내 가정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비극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사울과 반대로 다윗 한 사람의 믿음으로 인해 그 시대 이스라엘은 그 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고 백성들의 삶은 부요하고 풍성한 삶을 살았으며 가장 번성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가니라”(삼하5:10) 라고 하셨고,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대상18:13)라고 하셨습니다.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조공을 바쳤고 모든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백성이 되었고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도 금이나 은을 돌같이 여길 정도였고, 세계의 열왕들이 이스라엘의 부귀와 영화를 보고 눈이 현란할 정도였습니다.
모두 다윗으로 인하여 그런 힘과 부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상의 말씀이 계속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내 삶속에 고통과 어려움이 올 때 내 신앙을 점검하여 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생애를 한 번 살펴보십시오. 인생의 어려운 위기를 몇 번이나 만났습니다. 큰 죄를 지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깨닫고 돌이키자 하나님께서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이 시간 성령의 감동이 주어질 때 생각나는 죄에서 돌아서면 다윗처럼 선한 일에 귀히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 한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바른 신앙을 보여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울의 최후가 주는 교훈
이한규목사 / 삼상 31장 1-13절
본문에는 사울의 최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지만 그 복을 내일의 복을 예비하고 천국의 때를 예비하는 복으로 승화시키지 못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최후의 모습을 통해 얻는 교훈이 무엇인가?
1. 최종 승리를 꿈꾸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패배해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었다(1절). 그때 블레셋 사람들의 추격으로 사울의 세 아들인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죽었다(2절). 사울은 블레셋과의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마지막 길보아 산 전투의 패배로 세 아들을 잃었다. 요나단은 부친이 점차 악한 길로 가는 줄 알면서도 끝까지 부친 곁을 지키며 멋지게 인생을 끝냈다.
사울과 요나단의 모습을 보면 멋진 인생 마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현재의 모습을 인생의 결론으로 내리지 말라. 지금부터 얼마든지 멋진 인생을 살 수 있고 반전의 역전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다. 다시 열정을 가지고 일어서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앞세우라. 하나님의 뜻과 거룩한 비전을 앞세워 열정적으로 살면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신다. 그처럼 열정은 가지되 조급함은 버리라.
무엇이 철든 것인가? 철든 것을 나타내는 여러 기준 중 하나가 조급함을 절제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사람이 흔히 범하는 큰 허물 중 하나가 조급함이다. 바로 승리와 성공이 주어지지 않아도 너무 낙심하거나 초조해하지 말라. 쉽게 이룰 수 있는 큰일은 없다. 큰 인물은 단번에 되지 않는다. 등산할 때 한 발 한 발 내딛듯이 내게 주어진 일에 신실하면 언젠가 반드시 정상의 자리에 설 날이 온다.
2. 영성 과시를 버리라
사울은 패전해 도망치다가 추적하는 활 쏘는 자에 의해 중상을 입고 무기를 든 자에게 말했다. “네 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렵다(4절).” 그때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서 머뭇거리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 칼끝을 위로 세운 후 그 위에 엎드러져 자살했다. 율법에 따르면 자살은 큰 죄이기에 사울은 자살이 아닌 것처럼 수동적인 자살 방식을 선택했다.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 죽기 싫다고 자살하는 장면을 통해 사울의 거룩한 자부심이 느껴지기보다 그의 영성 과시가 느껴진다. 그의 삶의 전 과정을 보면 그는 영성 과시가 심했다.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을 때 그들 중에서 예언해서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다(삼상 10:10-12). 아들 요나단의 공로로 승리한 블레셋과의 전쟁 때는 금식 맹세를 시켜서 영성이 있는 자신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사울은 수시로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영성을 과시했고 죽을 때까지 영성을 과시하며 무대 위의 헛된 삶을 살았다. 그처럼 무대 위에서 인기를 추구하며 살면 점차 공허해지고 불행해지면서 나중에는 자신마저 잃는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두 가지 병은 ‘자신을 잃어버린 병’과 ‘그 사실조차 모르는 병’이다. 결국 참된 행복은 참된 자각을 통해 주어진다. 복된 자각의 출발점은 “나는 참 부족하다. 하나님이 내게 꼭 필요하다.”라는 깨달음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추구해야 점차 삶이 나아지고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3. 소유에 매이지 말라
사울이 죽은 다음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8절). 죽은 자를 벗긴다는 말은 죽은 자의 갑옷, 의복, 식량, 무기, 소유물 등을 탈취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았다(8절). 그러자 고대 관습대로 대승을 기념하려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려고 그것을 블레셋 땅 사방으로 보냈다(9절).
블레셋 입장에서 그 전까지 자신들에게 큰 패배를 여러 번 안긴 최대 원수 사울의 머리를 벤 사실은 사기를 크게 올리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백성은 물론 신당에도 알린 것은 자신들의 신 다곤과 아스다롯이 뛰어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블레셋 땅 사방에서 순회 전시를 마친 후 사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신전에 두고 그의 머리 없는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았다(10절). 사울이 죽을 때 자신이 걸친 것을 다 잃고 심지어 머리까지 잃은 모습은 세상 소유에 매이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
가끔 보면 유산 문제로 인해 부모의 장례식이 형제의 이별식이 되는 경우가 있다. 불행한 일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잘 벗어버릴 줄 알아야 참된 복과 평안을 얻는다. 물질이나 자리를 얻으려고 인생을 허비하거나 평안을 잃거나 목숨을 버리지 말라. 물질과 자리의 선한 활용에 탁월한 프로가 되라.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려고 몇십 년의 인생이 삼켜지지 않게 하라. 열심히 남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았더니 아파트가 저절로 마련되는 삶을 추구하라.
세상적인 복을 너무 크게 여기지 말고 천국의 때를 위해 살라. 천국의 때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이 땅의 물질과 자리로 복을 저울질하지 말라. 예수님은 작은 사람에게 주는 냉수 한 그릇도 천국의 때에 다 평가된다고 하셨다(마 10:42). 지금 내게 주어진 물질과 자리를 지옥 밑천이 아닌 천국 밑천으로 멋지게 쓰라. 그래야 인생의 의미와 보람도 넘치게 되고 상상을 초월한 천국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4. 받은 은혜를 갚으라
당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들었다(11절). 길르앗 야베스는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의 성읍인데 사울의 즉위 초기에 암몬의 침공을 받았을 때 사울로부터 큰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 그 은혜를 갚으려고 능욕 당하던 사울의 시체를 취해 오기로 목숨을 건 결단을 하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벧산 성벽까지 약 20킬로미터를 밤새도록 블레셋의 수비망을 뚫고 달려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장사하고 사울이 베푼 은혜를 추모하며 칠 일 동안 금식했다(12-13절).
은혜를 받으려고만 하지 말라.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갚으려고 해야 더 큰 은혜가 주어진다. 받은 은혜를 오래 기억하는 능력을 키우고 서운한 기억을 은혜의 기억으로 잘 극복하라. 서운한 일을 겪을 때 의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하다면 바르게 의를 세우는 조치를 정당하게 하라. 그때도 서운한 감정은 털어 버리라. 그런 감정 극복이 힘들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서운하게 했는지를 생각하라. 그러면 서운한 감정이 많이 누그러진다.
지금 세상은 은혜가 많이 필요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은혜를 불어 넣으며 살라고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두셨다. 하나님의 뜻대로 누군가에게 설 땅이나 비빌 언덕이 되어 주고 찾아가고 싶은 고향이나 의지하고 싶은 품이 되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갚는 길이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선물이나 복음이 되게 하라. 그렇게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나눌 때 세상은 더 밝아지고 나도 더 은혜를 받고 더 기억된 존재가 될 것이다.
5. 역사의식을 가지라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지금도 하나님은 다윗 같은 인물을 찾으신다. 어떤 공동체의 역사적인 존재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헌신된 사람을 그 공동체가 얼마나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그 공동체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 역사적인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계신다.
내가 섬기는 교회도 교회 자체가 얼마나 커지느냐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승리보다 전체적인 하나님의 승리에 관심을 가진 한 사람을 교회가 배출할 수 있느냐가 교회의 존재 의의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된다. 그래서 나보다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면 그 인물의 길을 잘 예비하는 것이 진짜 승리이고 진짜 복이다. 남을 잘 세워줄 때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남도 살고 나도 살고 더욱 복된 앞날이 펼쳐진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일에 하나님이 쓰실 만한 인물 배출을 위해 기도하면서 일조하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물이 되도록 나 자신을 잘 갈고 닦으라. 하나님은 홀로 찬란한 비전을 이루실 수 있지만 사람을 통해 그 비전을 이루길 원하시기에 지금도 사람을 찾으신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삶을 살았기에 사도 바울은 그의 설교에서 다윗의 마지막에 대해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행 13:36)”라고 외쳤다.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의 묘비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었다.”라는 글귀가 쓰일 수 있도록 이 땅에 살면서 늘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라 살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천국 삶을 사는 것은 영원한 천국 삶을 위한 예행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 앞으로 살면서 행할 핵심 과제로서 스스로 역사적인 인물이 되거나 역사적인 인물을 키우거나 둘 중의 하나는 꼭 하라. 그 과제에 나의 존재 의의가 있음을 깨닫고 그 과제를 충실히 이행하며 복되게 살라.
사울의 죽음
곽창대목사 / 삼상 28장과 31장, 봉독 31:1-13
전문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아벡에 집결시켰습니다(29:1). 아벡은 이스라엘의 중서부 지역의 에벤에셀 부근으로 추정합니다. 그 당시 블레셋의 주요 성읍 가운데 하나였던 가드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다윗과 그의 부하들도 동족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 시글락에서 북쪽으로 80km가량 떨어져있는 아벡까지 올라갔었는데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블레셋의 방백들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참전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글락으로 회군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시글락에 돌아와 보니 아말렉 사람들이 침공하여 성을 불사르고 부녀자들과 가축과 재물을 탈취하여 떠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한동안 넋을 잃고 대성통곡했습니다. 정신을 차린 다윗이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아말렉을 추격하면 빼앗겼던 부녀자들과 가축과 재물 모두를 되찾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결과는 훨씬 더 풍성했습니다. 빼앗겼던 것들을 모두 되찾을 뿐 아니라 아말렉이 갖고 있던 소유물까지 수거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블레셋 군사들은 아벡에서 북쪽으로 60km정도 떨어져 있는 수넴으로 진군했습니다(28:4). 이스라엘의 북부 갈릴리 지역과 중부이남 지역을 분리하려는 전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길보아에 진을 쳤습니다(28:4). 길보아는 수넴에서 남쪽으로 약 15km에 위치해 있습니다. 길보아가 산지이므로 사울 왕은 수넴에 진을 치고 있는 블레셋 군대를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28:5절을 보면 사울의 마음에 큰 공포가 밀려왔다고 기록합니다. 사울이 다급하여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6절). 그래서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보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합니다(7절). ‘신접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불러내어 미래의 일을 점치는 무녀’를 뜻합니다. 엔돌에 무녀가 있다고 신하들이 알려주었습니다(7절). 엔돌은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길보아 산에서 북쪽으로 10km쯤 떨어져있는 시골 마을인데 수넴에 진을 치고 있는 블레셋 진영 가까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 일행은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잠행했습니다. 사울은 변장까지 했습니다(8절).
28:3절을 보면 사무엘이 죽은 후에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정이 다급하여 다시 무녀를 찾은 것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허약한 인생의 모습을 봅니다.
왜 사울이 신접한 자들과 무당들을 쫓아냈을까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에 따르면 신접한 자들과 무당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악한 영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 18:9-12) 『[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그런데 사울이 신접한 자들과 무당들을 쫓아낸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지도자였던 사무엘이 못한 일까지도 자신은 할 수 있다고 자신의 지도력을 돋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데 사울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의 인기가 높아지기를 바란 것입니다.
무당들을 쫓아내었던 사울이 지금 무녀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결정적인 원인은 그에게서 성령님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삼상 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성령님이 내주하지 않는 사람은 권력자일수록 부자일수록 많이 배운 자일수록 더 위험천만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유는 악한 영이 그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권력으로 돈으로 지식으로 군중들을 암흑의 길로 이끕니다. 자기도 망하고 가정과 기업과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세상역사 가운데 이런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그 같은 일을 볼 때 “어떻게 저렇게 비상식적이고 포학하고 비열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탄식하게 되는데 그게 인생입니다. 인생들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악한 영들에 얼마나 취약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내주가 인생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내주하셔야 자신도 살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꾸려갈 수 있습니다.
(28:8-19) 사울이 밤중에 무녀의 집으로 가서 사무엘의 혼백을 불러올리게 합니다. 무녀는 겉옷을 입은 노인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그 혼백의 모습을 사울에게 알려줍니다. 사울은 그 노인을 사무엘이라고 믿고는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합니다. 사울이 사무엘이라고 믿은 그 노인의 혼백이 사울에게 말합니다. “네가 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네 이웃인 다윗이 왕이 될 것이다.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너와 이스라엘 군사들이 참패할 것인데 바로 그날이 내일이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함께 전사할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무녀가 불러낸 노인의 혼백이 사무엘인 것처럼 말하지만 꼭 그렇게 보지 않아도 됩니다. 무녀와 사울이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에 악한 영의 장난에 놀아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의식을 금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옥으로 떨어진 부자가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나사로를 보고는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저 나사로를 다시 땅으로 내려가게 하여 자기 동생들이 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 요청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눅 16: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지금 땅에서 살고 있는 부자의 동생들 곁에 모세와 선지자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회개하는 길 외에는 천국에 들어올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천국에 올라가든지 지옥에 떨어집니다. 천국이나 지옥에 간 영혼이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 세상을 떠돈다든지 저 세상에 간 영혼을 불러내어 점을 치는 것은 사술입니다. 악령의 역사요 사람의 속임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혼행위를 엄금합니다. 악령과 교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음을 말씀합니다.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계획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악한 영들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영들이 도모하는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20절). 사울은 전쟁에 출전하기 전에 기력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무녀가 차려준 보양식을 먹고 전선에 복귀했지만 전쟁은 이미 결판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21-25절).
31장은 전쟁의 결말을 간단히 언급합니다. 하루 만에 결판이 났습니다. 이스라엘의 패배는 처참했습니다.
1절: 이스라엘의 많은 군사들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했습니다.
2절: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도 전사했습니다.
3절: 사울도 활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4절: 사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칼에 죽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큰 모욕거리가 될 것이므로 호위병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호위병은 자기가 모시던 왕을 죽이는 것이 두려워 머뭇거렸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자기 칼을 뽑아 그 위에 엎어져 자결했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사울이 죽은 결정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대상 10:13-14) 『[13]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5절: 호위병도 사울의 뒤를 따라 자결했습니다.
6절: 사울 때문에 무수한 자들이 죽었습니다.
7절: 상황을 보고 출전하려고 대기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골짜기 저쪽(길보아 산 반대편)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과 요단강 동편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울의 군대가 패퇴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의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 빈 성읍들을 블레셋 사람들이 점령하여 거주하였습니다. 그로써 이스라엘 북부의 이스르엘 들판과 요단강 일대를 블레셋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8-10절: 전쟁이 끝난 다음날에 블레셋의 군사들이 전리품을 챙기러 전쟁터를 다시 방문합니다. 사울의 머리를 베고 갑옷을 벗겨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보냈습니다. 완벽한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울의 갑옷은 아스다롯 신전에 두었습니다. 역대상 10:10을 보면, 사울의 머리를 다곤 신당에 걸어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보다 자기들의 신인 아스다롯(전쟁과 풍요의 여신)과 다곤이 더 강한 신이라는 뜻입니다. 머리가 잘려나간 사울의 시신과 사울의 세 아들의 시신을 벧산 성벽에 못 박아 매달았습니다. 벳산은 이스르엘과 요단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성읍입니다. 이스라엘의 국권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11-13절: 사울이 죽어서도 치욕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밤중에 약 21km를 행군하여 벳산 성벽에 매달린 사울의 시신을 수거하여 자기 성읍으로 돌아가 장사지내고 일주일을 금식하며 슬퍼했습니다. 40년 전에 길르앗 야베스가 암몬의 침공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울이 이스라엘 전역에 통지하여 대군을 모아 길르앗 야베스로 진격하여 암몬을 물리쳤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사울 왕에게서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지금 보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참한 패배 가운데서도 한줄기 서광이 비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우리에게 큰 경각심을 줍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자기도 망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큰 낭패를 당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행하면 그를 추종하는 자들 모두가 고통당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각료들은 나라의 지도자입니다. 사장과 임원들은 기업의 지도자입니다. 교수와 교사는 학생들의 지도자입니다. 부모는 가정의 지도자입니다. 목사와 장로는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교회학교의 교사는 다음세대의 지도자입니다. 목자 부목자는 목장의 지도자입니다. 지도자가 바로 서지 않으면 따르는 사람들이 크게 고통 합니다. 그렇게 되면 따르는 사람들이 지도자를 배척하든지 지도자 스스로가 망하는 길로 갑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특히 성도의 가정이나 교회에서 부모나 지도자가 엉뚱한 길로 가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하나, 오늘 본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도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사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아무리 다급해도 세상의 방식이나 이교도의 방식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신 후에 시내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레 20:22-23, 26-27) 『[22]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27]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다시 경고했습니다.
(신 12:29-31)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쫓아낼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절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게 하실 때에 [30]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31]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하셨는데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경고하십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경고가 로마서 12:1-2입니다.
(롬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성도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방식을 좇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처럼 이교도의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으로 위기를 해석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앞서 본문을 해설할 때 사울이 이교도의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던 근원적인 이유가 성령님께서 사울을 떠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울 왕은 성령님이 떠나신 후로는 스스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해야만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사울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본문에서 드러난 대로 길보아 전투에서 자신도 전사하고 나라도 블레셋의 속국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성령님께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주일에 살펴본 대로 다윗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상식적으로 판단하여 블레셋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래서 큰 위기를 자초하였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다윗도 몇 번의 큰 죄를 범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통했습니다. 들통이 날 것을 우려하여 우리아를 전장의 맨 앞 열에 서게 하여 전사하게 했습니다.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랬어도 성령님께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엄중한 징계를 받았습니다.
6월 첫 주일, 성령강림절 때에 “새 언약”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듯이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님께서 필요할 때에 사람들에게 간헐적으로 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구약의 성도들에게 영원히 내주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도들에게 성령님께서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차이인데 그 차이가 성령님의 강림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 이후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에는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자기 백성들의 마음속에 영원토록 거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새롭고 부드럽게 되어서 능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성령님께서 내주하십니까?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모든 성도의 마음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성도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성령님께서 떠나지 않으십니다. 다윗이 범죄 했어도 성령님께서 떠나지 않으신 것처럼 신약시대의 새 언약 하에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결코 성령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우리가 죄를 범하면 성령님께서 근심하시고 슬퍼하시고 탄식하십니다. 성령님께서 그리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주제인데 히브리서 12장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징계하시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히 12:6-8)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이어서 징계의 목적을 밝힙니다.
(히 12:9-11)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징계의 목적은 네 가지입니다.
*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 믿음을 연단하시려고
*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성도와 교회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은 없습니다. 대신에 현재적인 심판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러므로 징계 받을 때에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하나님 품에 안긴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는 것이며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과 악한 자들이 우리보다 더 큰 죄를 반복하여 짓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실까요? 그들에게는 최종적인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현재적인 징계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그들이 교회와 세상에 너무 큰 해를 입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고 세상을 크게 어지럽히는 악인들을 지금 심판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여기며 자신만만하게 살아가고 있는 악한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이 옹색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심판하시든지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든지 악인들의 심판은 최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악한 자들 때문에 불평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참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즉 위기의 때에 성도와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에는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3) 죄가 생각나면 즉시 진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근심하시고 슬퍼하시고 탄식하시는 성령님께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4) 회개한 후에는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적절한 때에 역전의 새 날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렸을 때에도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걸 누누이 증언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전사했고 이스라엘은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울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연단하셔서 새 시대를 여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징계 가운데서도 새 시대의 여명이 통 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상 마지막 장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 부제를 “하나님의 징계와 새 시대의 여명”이라고 정했습니다.
여러분,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섬세한지 우리의 몸에 각인시키기 위함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징계를 받을 때 우리는 무척 괴롭고 아프지만 그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그때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평화를 누립니다. 평화를 확산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새로워지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입니다. 새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새 시대를 여는 여명이 됩니다. 역전의 은혜요 전화위복의 은혜입니다. 징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달아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찬송 532장
요약
다윗이 아말렉을 치는 사이에 블레셋 군사들이 수넴으로 진군하고 이스라엘의 군대는 길보아에 진을 칩니다. 길보아에서 수넴에 진을 치고 있는 블레셋 군대를 내려다본 사울의 마음에 큰 공포가 밀려옵니다. 사울이 다급하여 하나님께 묻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기 위해 변장하여 밤중에 블레셋 진영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런데 앞서 서울은 신접한 자들과 무당들을 쫓아냈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무당들을 쫓아내었던 사울이 다시 무녀에게로 갑니다. 이유는 그에게서 성령님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삼상 16:14; 롬 1:28). 성령님이 내주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유력한 자일수록 위험천만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내주가 인생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내주하셔야 자신도 살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꾸려갈 수 있습니다.
사울이 무녀의 집으로 가서 사무엘의 혼백을 불러올리게 했는데, 노인의 혼백이 사울에게 사울 가문의 몰락과 이스라엘 군사의 참패를 예언합니다. 무녀가 불러낸 노인의 혼백이 사무엘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울이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에 악한 영의 장난에 놀아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에 간 영혼이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눅 16장 참고).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 세상을 떠돈다든지 저 세상에 간 영혼을 불러내어 점을 치는 것은 악령의 역사요 사람의 속임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영들이 도모하는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20절). 사울은 전쟁에 출전하기 전에 기력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무녀가 차려준 보양식을 먹고 전선에 복귀했지만 전쟁은 이미 결판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21~25절). 전장에 나간 이스라엘의 많은 군사들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했고 사울의 세 아들도 전사했습니다. 사울도 활에 맞아 중상을 입어서 자결해 버립니다. 성경은 사울이 죽은 결정적인 이유가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대상 10:13~14).
이처럼 지도자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행하면 그를 추종하는 자들 모두가 고통당합니다. 특히 성도의 가정이나 교회에서 부모나 지도자가 엉뚱한 길로 가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아무리 다급해도 세상의 방식이나 이교도의 방식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레 20:22~23, 26~27; 신 12:29~31). 성도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롬 12:1~2). 그리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울 왕은 성령님이 떠나신 후로는 스스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해야만 했지만 다윗에게는 성령님께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몇 번의 큰 죄를 범했어도 성령님께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엄중한 징계를 받았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님께서 성도의 마음에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그로 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새롭고 부드럽게 되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게 하십니다. 만일 성도가 죄를 범한다 해도 성령님께서 떠나지 않으시지만 슬퍼하시고 탄식하시며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히 12:6~8). 징계의 목적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징계로 인하여 믿음을 연단 받고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히 12:9~11). 그러므로 징계 받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며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과 악한 자들이 우리보다 더 큰 죄를 반복하여 짓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최종적인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교회와 세상에 너무 큰 해를 입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인들을 지금 심판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위기를 만났을 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에는 자신을 살펴서 죄가 생각나면 즉시 진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한 후에는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적절한 때에 역전의 새 날을 주실 것입니다.
칠흑같은 어둠이 짙게 깔렸을 때도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전사하고 이스라엘은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연단하셔서 새 시대를 여시려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 괴롭고 아프지만 그로써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평화를 누립니다. 자신도 새로워지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새 시대를 여는 여명이 됩니다. 징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달아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불순종의 비참한 결말
이준원목사 / 삼상 31장 1~13절
[들어가는 말]
한국이 10년 전에 외국인 100만 명 시대가 되었다고 뉴스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2020년 말을 기준으로, 그러니까 10년 후에는 그보다 두 배 이상 늘어 230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문화 가정도 많이 늘었습니다. 사실 등록된 외국인만 230만 명이니까, 불법 체류자와 일반 방문자들을 다 합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국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유일한 단일민족 국가라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아 왔습니다. 단일민족, 단일문화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세계에서 단일 민족 국가가 딱 두 나라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입니다. 그래서 한국과 북한만 단일 민족, 단일 문화 국가인데, 사실 이제 더 이상 한국은 단일민족, 단일문화 국가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빨리빨리’입니다. 실제로 제가 오래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제3세계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선교관에서 1년 동안 지냈습니다. 그때 한 학기가 끝나고 새 학기에 다른 나라에서 새 학생이 오면 기존에 있던 학생이 불러다 새로 온 학생에게 뭔가를 가르쳤습니다. ‘너는 이것을 한국생활에서 꼭 배워야 한다. 가장 먼저 이 단어를 배워라. 빨리빨리!’ 이렇게 가르치는 것을 제가 직접 제 눈으로 봤습니다. 진짜로 ‘빨리빨리’를 가장 먼저 배웁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든지, 한국에 가장 먼저 동화되는 것이 ‘빨리빨리’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원래 한국이 ‘빨리빨리’ 병에 걸려서 건물도 빨리빨리 짓다가 빨리 무너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어떤 결과를 지긋이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눈앞에서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잘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국은 배달이 엄청나게 빠릅니다. 총알배송으로 합니다. 인터넷 속도도 빠르고, 뭐든지 빠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신앙생활에도 나타나서, 어떤 일에 대해 기도해보고 신중하게 결정하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대로 성급하게 결정했다가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그들을 ‘당장’ 심판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잘살고 있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 같기 때문에, 분통을 터뜨리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의심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처럼 일을 성급하게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시간표와 다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일이 풀리기를 원하는데, 그런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그때를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우리는 카이로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빨리 되기만 바랍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가 설치고 다닐 때도 조급하게 나서지 않으시고 충분한 시간을 주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저렇게 악한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는가? 빨리 망하면 좋겠다. 악한 사람은 빨리 망해야지 어떻게 저런가?’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가만히 두시는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까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악한 자라도, 아무리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라도 그 인격조차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하나님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아서 그런 것이지, 영적으로 깨어나면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악한 자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한 번 심판이 내려지면 그 후에는 결코 회복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자라고 해도 상당히 신중하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불순종하며 악하게 살았어도 그의 인격을 존중해주셨고, 심판을 내리시는 데 있어서도 아주 오래 참으시며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오래 기다려주시는 동안에도 결국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고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지금 시리즈 제목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면, 오늘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인 사울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으로 그의 인생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사울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려고 하다가, 다음 번 사무엘하 내용과 연결되기 때문에 살펴보고 넘어가려 합니다.
1.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한 비극
사울은 처음 왕이 되었을 때는 겸손히 행했습니다. 좋은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되어 교만해졌고 우상 숭배의 길로 나감으로써 실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15장에서 하나님이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죽이기는 죽이되 좋은 것들은 남겨두고 처리하며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그러한 사울 왕에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너의 왕위는 끝났다.’ 하시며 폐위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사울을 즉시 제거하신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셨습니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결정적인 범죄는 22장에 나오는데, 다윗을 도왔다는 억지 죄목을 씌우면서 아히멜렉을 비롯한 제사장 85명과 그 가족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일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엄청난 범죄입니다. 이것은 살인을 넘어,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제사를 주관하는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들을 학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사울을 즉시 벌하지 않으시고 그냥 두셨습니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 후 사울은 뉘우치거나 회개하기는커녕, 왕으로서 나라를 이끄는 책임을 모두 내팽개치고 오직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다윗을 잡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다윗만 쫓아다녔습니다. 나라의 위기에도 그랬습니다.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다윗만 쫓아다니며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울을 그냥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기다리시며 기회를 주고 계실 때 마음을 돌이키지 않던 사울과 이스라엘에게 마침내 블레셋 군대가 대대적으로 공격해옵니다. 결국 길보아 산에서 이스라엘 군은 전멸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모두 전사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1-2절)
우리가 어떤 일에 몰두하여 잠도 안 자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몸이 너무 지치고 피곤하게 됩니다. 조금 더 심해지면 감기에 걸리거나 몸살이 나게 됩니다. 독감 시즌에는 독감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무리 일해도 피곤하지 않고 아프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막 일하다가 피곤할 때 피곤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과로해도 몸이 전혀 피곤하지 않은 게 정말 좋은 겁니까? 그건 좋지 않은 겁니다. 잠을 별로 안 자도 피곤하지 않고 아무리 일해도 지치지 않는다면,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피곤을 못 느끼고 있다가 한순간에 가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한 방에 훅 간다.’라고 하는 말이 그런 겁니다. 모르고 있다가 그냥 가는 겁니다.
한국의 40대가 1990년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사망률이 높았습니다(천 명당 8명 이상). 너무 열심히 일하다가 갑자기 죽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천 년대에 들어오면서 좋아졌는데, 요즘 한국에서 많이 말하는 말이 ‘워라밸’인데,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라는 뜻입니다. 요즘 워라밸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상황이 좋아지고,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국 40대 사망률이 천 명당 2명 정도입니다. 오히려 미국은 천 명당 4명 정도로 더 높습니다. 사망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약물 중독입니다.
무리해서 일하면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은 사실 귀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익입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조금 무리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이상이 옵니다. 그런 이상 증세가 올 때 빨리 캐치하고 바른 방향으로 돌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게 하는 이상 증세는 바로 블레셋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고 세상 방식을 따라 살게 되면, 이상하게도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자기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자기들을 괴롭히는 블레셋 사람들이 빨리 사라지거나 망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바라기 이전에, 지금 자신들이 영적으로 형편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사인으로 알아야 했습니다.
<생명의 삶> 공부에서도 그렇고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바로 ‘관계’입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옆으로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으면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것 아무리 잘해도 이웃과의 관계가 엉망이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사랑을 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채우고 옆으로 흘러넘칠 때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달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배를 잘 드리고 성경도 많이 읽고 묵상하며 기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해도, 정작 이웃과 껄끄러운 관계 속에 살아가며 미워하고 있거나 전혀 이웃과의 사랑의 교제가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 보면 불편한 관계가 생길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현상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나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이상증세를 보여주는 사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누군가와 껄끄러운 관계가 생겼다면, 사실은 그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가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교회에서 전혀 문제도 되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터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의 중에 갑자기 누군가가 이상한 말을 해서 요즘 말로 ‘갑분싸’, 즉 갑자기 분위기를 싸하게 하기도 합니다. 또 갑자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막 뭐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면 ‘저 사람이 왜 저러나?’ 하며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 자신이 기도나 말씀 묵상에 약간 소홀해지고 영적으로 게을러질 때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럴 때는 영적으로 해이해진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며 주님 앞에서 회복해야 합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끼리 말다툼할 때도 그렇고, 자녀와 서먹해질 때, 부모님과 서먹해질 때를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졌을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을 때, 이상하게 자꾸 열 받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럴 때 나를 화나게 하는 그 사람이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것을 빨리 깨닫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제대로 동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빨리 사인으로 깨닫고 마음을 돌이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돌아가면 금방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계속 악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사울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떠났으니까, 지금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는 것이 보이는 다윗을 옆에 두고 그의 도움을 겸손하게 받으면서 나아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자존심, 사실은 열등감에서 나오는 시기와 질투로 다윗을 미워하며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것은 결국 다윗을 블레셋 땅으로 쫓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용맹한 장수이자 이스라엘 최고의 장군이며 자기 사위이기도 한 다윗,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을 쫓아버렸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패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이때 블레셋이 쳐들어왔어도 다윗이 옆에서 지키고 있었으면 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쫓아버리니까 자기가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적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나의 적이 누구입니까? 내 원수가 누구입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아닙니다. 자식도, 부모도, 시부모도, 다른 교인도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입니다. 사람이라면 우리가 막 붙들고 이야기라도 해볼 텐데, 사탄에게는 인정사정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나라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전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야 했는데 전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위기 앞에서도 전혀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엉뚱한 짓만 하느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쫓아다니느라고 기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줄 수 있었던 제사장들까지도 이미 다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할 사람이 누가 남아 있습니까? 그러니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여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제사장들까지 다 죽여버리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그렇게 끝난 게 아니라, 결국 자신에게 죽음의 패배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자신을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사울만의 일이겠습니까? 혹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나 자신을 잘못된 길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잘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과 껄끄럽고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면, 어떤 사람을 미워하게 되었다면, 지금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을 미워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에게 손해가 아니라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너무 단순합니다. 그냥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솔직하게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저 사람이 정말 밉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 보면 놀랍게도 상황은 변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내 마음을 바꿔주십니다. 정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히려 그렇게 밉던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코로나 사태 기간 중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함께 꾸준히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얼마든지 이렇게 주일예배, 수요예배, 토요일 새벽에 함께 예배할 수 있고, 삶 공부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도 그렇고 목장도 그렇고, 대면으로 모이지 못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영적으로 우리가 나태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한 동안 교회에 거의 나오지 못한 분들도 꽤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에 소홀했다면, 빨리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도 않고 말씀을 읽거나 묵상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있는데, 하나님과 전혀 동행하는 일이 없는데,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면, 별일이 없다면, 오히려 일이 잘 풀리고 있다면, 승진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사업도 잘되고 직장에서도 잘되고 학교에서도 잘되고 있다면, ‘괜찮은가 보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괜찮은 게 아니라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기다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기다림을 끝내실 때가 있습니다. 그 전에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빨리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2. 이스라엘의 비참한 패배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3-4절)
오늘 본문은 사울이 결국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왕으로서 너무나 치욕적이고 끔찍한 죽음입니다. 일단 이스라엘 군대는 전쟁에서 완전히 패하며 쫓기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인들이 뒤에서 이스라엘을 추격하면서 활을 쏘아댔는데, 무수한 화살들이 쏟아졌습니다. 그 중 한 화살이 사울의 몸을 꿰뚫고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보입니다.
화살을 맞아서 더 이상 싸우기도 힘들고 도망칠 수도 없었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막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붙잡혀 죽는 것은 왕으로서 결코 당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왕이 잡히게 되면 엄청난 수치를 당한 다음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무기를 들고 따라오는 부관에게 자신을 칼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죽어서 자기 시신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살아서 수치를 당하는 것은 모면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무기를 든 자, 즉 그의 부관은 감히 왕을 죽이지 못합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의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드려 죽고 맙니다. 할복자살을 한 겁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만약 이때 사울이 생포되었다면 블레셋 사람들은 이전에 삼손의 눈알을 뺐던 것처럼 사울의 눈알을 빼거나 아주 치욕적인 방법으로 고통을 준 다음에 죽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 (5-7절)
한때는 성령이 임하셔서 예언도 하고 성령 체험도 했던 사울이지만,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욕심을 향해 나아가게 되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못한 상황에서 이런 할복자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비참하게 수치를 당하고 죽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원하는 일이고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절망하게 해서 스스로 저주스러운 죽음의 길로 가게 합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도 절망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리저리 날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사도 베드로도 이야기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아무리 어렵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영광스럽게 살다가 우리 주님의 품에 안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시작도 중요하고, 지금 살아가는 중간과정도 중요하며, 동시에 끝이 아주 중요합니다.
연로하신 분들은 더 생각하시겠지만, 젊은 사람이라고 준비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어떻게 내 생애를 마감할까?’ 이것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내 끝이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이 내 장례식에 와서 뭐라고 할 것인가? 무엇을 느낄 것인가?’ 이것을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처음이 좋아도 끝이 좋지 않으면 결국 좋지 않은 것이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장례예배를 ‘천국 환송 예배’로 드립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간 것을 믿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 슬프지만 슬픔 가운데서도 돌아가신 분을 보며 쯧쯧거리면서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있고, 돌아가신 것이 너무 슬프고 안타깝지만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하며 감사함을 느끼는 장례식도 있습니다.
똑같은 장례식도 이렇게 다릅니다. 끝을 준비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갈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끝이 언제 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평소에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Living Will이나 유언장도 준비해야겠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겉으로 보면 주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던 사도들(바울, 베드로 등)과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사도 야고보는 목이 잘려 죽은 것이 사도행전에 나오고, 베드로는 전승에 의하면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서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고, 바울도 목이 잘려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낙타무릎’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건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고 ‘의인 야고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를 미워하던 자들이 그를 높은 데서 밀어 떨어뜨렸고, 떨어져서 괴로워하고 있던 그를 돌로 쳐 죽었습니다. 칼로 죽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여 순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치욕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난 사울과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의 죽음은 정말 비참한 죽음입니다.
만약 사울이 블레셋 군대에게 붙들려서 치욕을 당했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그가 하나님께 회개했더라면,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제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하고 갔더라면 그는 이전의 죄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의 명예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하다가 비참한 결말을 맞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낮추실 때는 거기에 분명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달으며 우리가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기다려야겠습니다. 삶이 어려울 때 아예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버리면 오히려 반등하며 치고 올라갈 길이 생길 수 있는데,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급해하면서 미리 중간에 자기 마음대로 판단을 내리고 도망치거나 포기해 버릴 때, 더 비참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우리는 끝까지 우리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을 붙들어야겠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무릎 꿇고 나아가야겠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붙들어야겠습니다. 어려울수록 이러한 예배의 자리를 지키며 나와야겠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반드시 책임져주십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7천 개 이상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3. 사울의 죽음과 장사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8-10절)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시체가 널려 있는 들판으로 돌아온 블레셋 군인들은 죽은 이스라엘 군인들의 옷을 벗기면서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필요한 것들을 챙긴 겁니다. 그러다 저기 보니까 남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아주 화려한 왕의 갑옷을 입고 죽어 있는 시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자들, 즉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야!’ 하고 환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의 시체를 훼손합니다. 일단 목을 베고 그 머리를 블레셋 사방에 보냅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의 머리다!’ 하면서 선전을 하는 겁니다. 이때 세 아들들의 머리도 함께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몸은 벧산이라는 곳의 성벽에 박아 놓습니다.
안식월 때 성지순례를 하면서 그곳을 가보았는데, 로마시대 때 세운 유적이 남아 있고 사울 때의 유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근처가 산지이고 옛날에는 거기 성이 있었는데, 그 성벽에 사울의 시체를 매달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도 발가벗겨서 시체를 매달아 놓은 겁니다. 아주 큰 수치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성 중 하나였던 벧산에 시체를 박아 놓고는 ‘너희 왕과 왕자들의 시체가 이렇게 되었다.’하고 전시하면서 자신들의 승리를 과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청난 절망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11-13절)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신을 훼손하고 수치를 안겨준 이때, 이전에 사울에게 은혜를 입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줍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요단강 동쪽에 있고 이스라엘 전체로 보면 중부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했습니다.
11장에 보면 암몬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에 쳐들어와서 모든 사람의 오른쪽 눈을 빼면 항복을 받아주겠다고 위협했을 때, 사울이 가서 암몬을 물리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답게 사용되었던 일이었습니다.
만약 사울이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사용된 적이 없었다면, 모든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오래도록 그의 시체가 그냥 성벽에 매달려 있었을 뻔했습니다. 그가 그때는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잘한 일이 계속되었더라면 사울이 괜찮았을 텐데, 바로 타락함으로써 안타까운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또 안타까운 것은, 다른 왕자들은 몰라도 요나단은 아는데 왜 사울과 함께 요나단까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야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가 컸지만, 요나단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면서 자기 아버지 사울이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다윗을 보호해주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었지만 사울과는 완전히 달랐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왜 사울과 함께 이토록 비참한 죽임을 당했습니까? 왜 하나님은 요나단을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왜 시신도 훼손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죽임을 당하도록 놓아두신 것입니까?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는 비참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요나단의 죽음은 사울의 죽음과 결코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다가 심판의 죽음을 당한 것이지만, 요나단은 끝까지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용사의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비록 요나단이 사울과 같은 시간에 죽임을 당하여 목 베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똑같이 성벽에 매달렸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의 의미는 사울의 것과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똑같이 보였을 수 있고 오히려 사울의 죽음이 더 위대하다고 보았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나가는 말]
제사 어제 페이스북(Facebook)에 알림이 떠서 보는데, 제가 아는 한국의 어느 목사님이 유명한 분이신데, 짧은 글을 올리신 것을 보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목사로서 목회도 하시지만 집안 대대로 하는 회사가 있는데, 그 회사에서 우크라이나 긴급구호 기부금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조용하게 했는데 신문에 나서 쑥스럽다고 쓰셨는데, 그분의 한마디 말이 마음을 울렸습니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상이 당신을 바꾸지는 못하게 하라!”
그분이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부금을 냈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성금 1억(지금 약 $82,000)으로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은 사실 별것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세상이 나를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라고 쓰셨습니다.
지난주 당회 및 연석회의와 임시제직회 때 우리도 우크라이나를 위한 특별헌금을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지난 12월에 토네이도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미국 남부에 생겨서 구호헌금을 걷어 연초에 보냈으니까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엄청난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해 헌금을 하자고 하면 얼마 전에도 했는데 뭘 또 하는가 하고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다음 주에 정성스럽게 부활절 헌금을 준비해주십시오.’라고 하니까 부활절 헌금도 해야 하고, 또 평소에 주일헌금도 해야 되고 십일조 헌금도 해야 하고, 할 것도 많은데 또 우크라이나 특별헌금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된다고 느껴질 수 있음을 잘 압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헌금을 계속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목사가 안 할 수도 없고 해야 하니...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저 몇 백 불, 천 불, 이천 불 보낸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 사람들에게 그게 뭐 그리 큰 도움이 되겠나?’ 그렇지 않습니까?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해 마음을 모으자고 하면 얼마가 모이겠습니까? 얼마나 모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몇 천 불을 모아서 보낸다고 해도 그게 그들의 삶을 바꾸겠습니까?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특별헌금, 구호헌금을 한다고, 또 실제로 가서 봉사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중단되었지만, 단기선교를 가서 뭘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변한다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나밖에 모르고, 내 가족밖에 모르고, 내 자식밖에 모르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고 그러던 내가 이것을 함으로써 변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은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사울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죽음이 그렇게 비참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 길로 가고 있는가?’ 또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길의 끝은 어디인가?’
내가 가는 이 길은 그 끝에 하나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길입니까? 아니면 그 끝에 마귀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하고 있는 그런 길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로 걸어가 하나님을 기쁨 가운데 만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결과
삼상 31장 1~5절 / 이근수목사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다가 타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 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울(Saul) 「희망」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삼상 9:1,10:21).
그는 미남이었고 키도 훤칠하게 컸습니다(삼상 9:1,10:23)
청년 때는 믿음이 좋았고 성령 충만한 효자였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구하여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자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믿음을 버렸습니다.
후에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도 그를 버렸습니다.
결국 사울은 망했습니다.
1.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은 사울
1)사울 왕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죄를 범했습니다. (삼상 13:8-15)
이것은 월권이요 망령된 짓이었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왕이니까 여호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사장을 무시해도 되는 줄 착각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지도자로 삼으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래드 카드였습니다.
그러면 즉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사는 무늬뿐인 교인이 있습니다. 망령되게 사는 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는 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는 교인이 있습니다. 안 됩니다.
2) 아말렉을 멸하지 않았습니다.[삼상 15:21-23]
사울 왕은 아말렉의 침략을 받고 전장에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아말렉을 이기게 해 줄 테니 생명 있는 것은 다 멸하라고 강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재물에 욕심을 내어 아각 왕과 소와 양떼 등을 죽이지 않고 몰래 숨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때에도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하나님이 사울 왕을 버린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 래드 카드였습니다. 무서운 경고요 강한 질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불의한 재물을 탐내는 교인이 있습니다.
재물에 욕심을 내어 자살골 먹는 교인이 있습니다.
안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3) 엔돌의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삼상28:7-8)
사울 왕은 불레셋이 쳐 들어오자 무서워 떨며 접신녀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갔습니다. 사울은 불신앙의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다.
사울은 백성의 눈을 피해서 변장을 하고 몰래 무당에게가서 미신행위를 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점점 더 불신앙의 악한 길로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미신의 길로 망하는 길로 갔습니다.
지금도 미신에 빠져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배반해서는 안 됩니다. 망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울과 아들들과 군대를 불레셋 손에 망하게 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삼상28:19] 이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러면 즉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사울은 이를 악물고 버티다 쓰러졌습니다.[20]
2. 의로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그토록 자기와 나라에 충성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수금을 탈 때도 여러 번 죽이려고 창을 던졌고, 그 후에도 다윗을 9번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가까이에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죽일 마음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조금 잘랐습니다(삼상 24:4-7).
다윗은 이런 못된 사울 왕에게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절대로 왕을 죽일 마음이 없음을 증거물을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더 이상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지 말라고 간곡히 충간(忠諫) 하였습니다. 다윗의 말을 듣고 사울도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잘못인 것을 알고 죽이지 않겠다고 말은 하였지만, 그때 뿐 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의지가 약했습니다. 컴플랙스가 많았습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습니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했습니다.
우리 중에도 의지가 약하고 컴플랙스가 많고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뿐인 사람, 작심삼일인 사람이 있습니다. 쩨쩨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큰 일 을 못합니다. 변변한 일을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큰 마음을 가지세요. 믿음으로 열심히 사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큰 일 을 하세요, 가치 있는 일을 하세요.
-남대문 시장에서 만년필 장사하는 분이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30억을 헌납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예, 너무 아름답고 따뜻하고 멋진 소식이이지요.
우리도 이렇게 살자 구요. 돈을 벌어서 좋은 데 쓰자구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인간은 때로 자기가 역사의 주인 인양 착각하고 자행자지하고 망령되이 행합니다. 그래서 죄 짖고 못된 짓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망합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1-6절).
사울 왕의 불법과 불신앙과 연이은 실정(失政)으로 국력은 기울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숙적 블레셋의 공격을 받고 이스라엘은 대패했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을 버린 결과는 몰락이었습니다. 사울의 영적 붕괴는 가정 붕괴, 왕권 붕괴, 국가붕괴를 가져왔습니다. 왕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왕이 왕다워야 하고, 국정수행 능력도 탁월해야 하고, 자신과 백성이 복 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강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자는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불레셋의 침략은 사울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1)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함
길보아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사기가 꺾여 모두 도주(逃走)했습니다. 너무도 어리석은 한 사람의 지도자 사울 왕 때문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망했습니다.
2)사울이 참혹한 최후를 맞음
불레셋과 전투 중에 사울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울은 부하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손에 죽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하가 무서워하며 머뭇거리자 사울은 스스로 자기 칼에 엎드러져 자결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사울의 최후는 이렇게 참혹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참 믿음으로 바로 삽시다. 진실한 믿음으로 삽시다.
3) 자식까지 저주를 받음
아버지 사울 왕의 죄악이 자식들에게까지 저주로 임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악을 행한 아버지 사울 왕 때문에 그의 자식들이 저주스럽게 죽었습니다.
- 오늘도 부모님의 불신앙 죄, 불순종의 죄, 불법한 죄 -
를 지으면 자신은 물론 자식까지 화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아버지기 잘못되면 자식이 잘 못됩니다.
- 아버지 때문에 자식이 안 됩니다.
- 부모가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고, 믿음 없이 살면 자신도
안 되고 자식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유심히 볼 때 -미덥지 못한 교인이 있습니다.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저렇게 살아선 복을 못 받는데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부모의 신앙생활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신5:9,10)
하나님을 귀찮게 여기고 미워하는 자는 그 죄 값을 3-4대 까지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대 까지 은혜를 받습니다.
3. 망하는 사울의 집
4부자가 전투에 나갔다가 전사함으로 사울의 집은 하루에 망했습니다. 사울 왕을 폐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말씀대로 사울을 무너뜨렸습니다. (삼상15:23)
사울은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래드 카드를 여러 번 받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설마 하다가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자행자지 하다가 망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믿고 순종하세요.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상을 주십니다. [창15:1]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한 사람 잘못된 아버지를 만나면 그 자식들이 불행하고, 한 사람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면 온 국민이 불행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버지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지난 12월 말에 한목협 임원들과 모자원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성탄 선물을 전달하였습니다. 85%의 모자 가정이 이혼한 가정이었고 그 중에 남편-아버지-의 음주와 폭력에 시달리던 모자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 여러분, 식구들을 사랑하세요.
아내나 자녀들을 욕하거나 때리지 마세요.
1) 사울의 시체가 능욕을 당함
사울의 시체는 블레셋 군사에게 발각되었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사울의 목을 베어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몸뚱아리 시체는 벳산 성벽에 못을 박아 걸어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행자지하던 불경한 자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불행하고 처참한 운명에 처해지지 않도록 끝까지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2) 사울의 갑옷이 우상의 신전으로 옮겨감
사울의 갑옷은 블레셋 우상 아스다롯의 신전으로 옮겨졌습니다. 아스다롯은 여신으로 곡물과 생식을 주관한다고 믿는 우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의 갑옷이 우상의 신전에 놓여 있다는 것은 이방 신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가 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택한 백성이 범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4.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 지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밤중에 몰래 사울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 지냈습니다. 이들은 과거 암몬 족속의 공격을 받을 때 사울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사울의 시체를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삼상11:1)
일주일을 금식하며 애곡함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을 장사한 후 일주일을 금식하며 슬퍼하였습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우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통하여 이웃의 슬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알고 함께 슬퍼하며 애통할 줄 아는 신실한 신앙인의 도리를 배워야 합니다. 상가 집에 가서 문상 온 사람들 끼리 얘기하고 농담하다가 큰 소리로 깔깔대고 웃는것 조심해야 합니다
결론
사울은 비참하게 일생을 마쳤습니다. 사울 한 사람의 영적 몰락은 그 가정과 나라까지 망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홍성교회 성도 여러분, 사울 왕 한 사람의 영적 몰락으로 그 가정과 나라가 망한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새해에는 하나님을 잘 믿읍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시다.
그래서 잘되고 잘되는 성도님들과 자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사울의 죽음
양인국목사 / 삼상 31:1-13.
1. 31장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과 세 아들이 적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며 잠언의 한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사울의 예는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의 의미를 보더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여 삶의 여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할 것이다. 사울은 왕이 된 후, 왕으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일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일에 전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권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 날에 대적의 손에 자신뿐만 아니라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세 아들이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사울을 통하여 우리의 계획과 수고가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교훈 받는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삶의 보장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2. 본문의 내용이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침략을 받아 힘을 다하여 싸웠지만 갈보아산에서 패했다. 그 날에 사울과 그의 세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블레셋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서 사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3-6절은 그날의 상황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사울은 블레셋에게 쫓기는 중에 블레셋이 쏜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므로 살 소망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할례 없는 블레셋의 손에 죽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길을 택했다. 그는 병기를 든 자에게 자신을 찌르라고 명했지만 그가 두려워하여 명령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찌름으로 생명을 버렸다. 사울이 이와 같은 모습을 본 병기든 자도 사울의 곁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이 전쟁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비참했는지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31:6)”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가운데 첫 번째 왕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이처럼 실패함으로 삶을 마쳤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울의 삶을 통하여 은혜로 삶을 시작한 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교훈을 얻는다.
사울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좋은 출발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이스라엘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혜였다. 그러나 그는 불신앙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축복을 지킬 수 없었다. 그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들을 오히려 스스로를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게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은혜를 지키는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좋은 출발을 한 사울을 넘어지게 한 것은 불신앙이었다. 언급한 것처럼 사울은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을 받아 왕으로서 좋은 출발을 하였다. . 그러나 그는 이 은혜와 축복을 지킬 수 있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믿음의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모두는 삶의 여정에서 때로는 형통함을 누리지만 때로는 시련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시련을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스스로를 보다 더 온전함으로 세울 수 있는 기회로 만들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시련은 절망과 좌절을 가져다 줌으로 스스로를 무너지게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삶이 세워지고 넘어지는 것은 믿음의 유무에 의존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불신앙은 사울로 하여금 삶의 여정에서 위기를 만날 때마다 기회를 잃게 하였다. 우리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함으로 세워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는 시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욥을 온전함으로 세워주시기 위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허락해 주셨다. 그가 직면한 시련들은 그의 삶을 위기로 몰고 갔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결국 그 시련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함으로 세워주는 기회로 만들었다. 욥의 예는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그것을 기회로 만들 수 있는지 교훈해 준다. 즉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면 삶의 여정에서 어떤 위기에 직면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기회가 될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위기를 만날때마다 불신앙에 빠졌을까? 사울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체험한 자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심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능하심에 대한 체험이었다.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사울을 택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라고 말씀하시며, 이와 같은 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사울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세 가지 징조를 보여주셨다. 물론 그 징조들은 모두 성취되었다(삼상10:1-16). 이와 같은 징조들이 성취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하심에 대한 체험이다.
또한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은 후 암몬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함으로 백성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의 능하심에 대한 체험이었다(삼상11:1-15). 이처럼 사울은 충분히 하나님의 능하심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는 위기에 직면할때마다 불신앙에 빠졌을까?
다음의 몇가지 예를 살필 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예들 가운데 하나는 블레셋과의 싸움이다(삼상13-14장).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년 후에 블레셋으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그 때 블레셋의 군사력은 대단했다.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 그리고 병사들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았다. 그들에 비하여 사울의 군사는 삼천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울의 군사들 가운데 무기를 가지고 있는 자는 사울과 요나단뿐이었다. 사울의 군사들은 블레셋의 군사력에 압도되어 싸워보기도 전에 미리 겁을 먹고 숨어버리거나 도망갔다. 물론 인간적으로 판단한다면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이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사울은 이와 같은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만유의 주되심을 보기 보다는 위협적인 환경을 더 크게 보았다.
이와 같은 예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아말렉과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고 그들의 모든 소유를 진멸 하도록 명하셨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사울은 아말렉왕 아각과 양과 소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남기고 가치 없는 것들만 죽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전리품을 원하는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크심보다 백성들을 더 크게 보았다.
또 다른 예를 찾는다면 다윗과의 싸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울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버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에게 기름을 부음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라고 말씀 하셨다. 사울은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언제나 다윗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자로 생각하고 있었다(삼상20:30). 그래서 그는 왕권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충성스런 신하였던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시도를 다했다. 즉 하나님보다 다윗이 더 크게 보였기 때문에 다윗을 제거하려는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사울은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하심과 만유의 주 되심 보다는 환경을 더 크게 보았기 때문에 환경이 이끄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와 같은 생각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능하심과 만유의 주되심에 대한 고백을 상실하게 된다면 불신앙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삶의 여정에서 어떠한 위기에 직면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믿음을 지킬 수 있고 이것은 우리에게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줄 것이다. 실제로 믿음의 사람들은 전쟁의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고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인하여 그들은 전쟁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 다윗에게 골리앗이 없었다면 군대 장관이 될 수 있었겠는가? 여호사밧에게 암몬과 모압의 연합군과의 전쟁이 없었다면 오직 하나님의 능하심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에게 위기는 언제나 기회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하심과 만유의 주 되심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믿음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하여 위기는 기회로 변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교훈해 준다. 그것은 삶의 여정에서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능하심과 만유의 주 되심을 깊이 생각하고 믿음 위에 굳게 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울의 최후
전승문목사 / 삼상 31:1~6
인생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너무나도 중요한 기회입니다. 그 기회는 절대로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그 기회는 딱 한 번만 허락된 특별한 기회입니다. 다시는 기회가 없는 유일한 기회 마지막 기회입니다. 왜 그러냐면 인생은 잠깐 동안 기간을 연장시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멸망당할 시점을, 지옥에 떨어지는 순간을, 잠깐 동안 아주 잠깐 동안 연장시켜 주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당장 죽어야 하는데, 당장 멸망당해야 하는데, 잠시 동안 그 멸망을 연장시켜 주신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죽어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하신 선악과를 우리 조상이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을 거라고 하셨는데 알면서도 범했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그건 아담과 하와가 범한 거지 나는 안 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자신을 살펴보면 우리 안에도 선악과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판단하고, 마음대로 결정하는, 선악과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라, 선악과가 그 죄가, 그것을 원죄라고 하는데 우리 모두에게 유전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셔도 우리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악하다고 하시는 것들을 우리는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요 생각이며 판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하신 선악과를 범했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물론이고 영혼까지 죽는 겁니다. 그게 멸망입니다. 그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사망이고 둘째 사망은 영혼의 사망입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그걸 잠깐 연장시켜 주신 겁니다. 당장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데, 당장 죽어야 하는데, 아주 잠깐 동안 목숨을 연장시켜 주신 겁니다. 기회를 주신 겁니다. 멸망을 면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목숨이 있는 동안 회개하고 선악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기회라는 겁니다. 선악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래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너무너무 중요한 기회인 겁니다.
여러분은 선악과에서 벗어나셨습니까? 그래서 인생이라는 이름의 기회를 붙잡으셨습니까? 선악과에서 벗어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선악과에서 벗어난 거고 믿음이 없으면 여전히 선악과를 품고 있는 겁니다.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하다고 말씀하시면 선하다고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악하다고 말씀하시면 악한 것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선악과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안 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악과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니까 믿음으로 선악과에서 벗어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인생이라는 이름의 기회는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목숨이 남아있는 동안, 기회가 남아있는 동안, 반드시 믿음을 얻어야 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인생은 잠깐입니다. 정녕 쏜 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이라는 기회는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과 함께 구원의 기회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잠깐의 기회인 겁니다. 여러분은 그 기회를 붙잡으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그대로 인정하십니까? 기회는 지나가는 겁니다. 쏜살같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겁니다.
사울에게도 그날이 왔습니다. 인생이라는 기회가 다 지나가버린 순간이 찾아온 겁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정한 최고의 인물이었습니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왕이 된 겁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인정할만한 사람이라 왕이 된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울에게도 끝내 그날이 찾아왔다. 인생이라는 기회가, 목숨이 사라지는 날이 찾아온 겁니다. 사울은 기회를 붙잡았을까요? 똑똑한 사람이니까 대단한 사람이니까 인생이라는 이름의 기회를 붙잡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끝내 기회를 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실 사울은 이미 오래전에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결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때 사무엘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삼상 15:22~23)” 그랬습니다. 그때 이미 사울은 기회를 놓친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울이 회개할까 싶어 좀 더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셨던 겁니다. 왜냐면 그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무엘이 있어서 하나님이 기다리신 겁니다. 이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중요한 겁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기회를 더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기회마저 놓쳤습니다.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 그래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는 동안, 그동안 연장된 그 기회마저 놓쳐버리고 만 겁니다. 사울은 그 기간 동안에도 회개는 고사하고 더욱 악하게 굴었습니다. 제사장들을 85명이나 학살했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을 잔인하게 핍박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얼마나 잘못 다스렸는지 모릅니다. 사울은 그렇게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모든 기회를 다 놓친 겁니다. 그게 40년입니다. 사울이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그렇게 다스린 겁니다(행 13:21). 4는 땅의 숫자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을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는 세상에서의 기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를 40일 동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생활도 40년 동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에서도 400년 동안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또한 그래서 사울도 40년 동안 왕으로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최대한의 기회를 주신 겁니다. 사무엘이 기도하니까 그렇게 허락해주신 겁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40년이나 허락된 기회를 다 놓쳐버리고 만 겁니다.
사울의 마지막은 블레셋을 통해 찾아왔습니다. 블레셋이 대규모의 병력으로 이스라엘을 침공한 겁니다. 블레셋은 5개의 도시가 연합한 국가입니다.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 이렇게 5개의 도시가 연합한 국가입니다. 그리스의 크레타 섬 출신이라 그리스 식의 도시국가를 이루고 있었던 겁니다. 그 5개 도시가 한꺼번에 쳐들어온 겁니다. 그러자 사울이 크게 당황했습니다. 사실 블레셋의 5개 도시는 알게 모르게 알력다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동안은 전쟁을 일으켜도 하나의 도시가 쳐들어오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합해서 쳐들어온 겁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병력이 한꺼번에 쳐들어온 겁니다.
사울은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늘 돕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가장 큰 도움은 사무엘이 주곤 했습니다. 사무엘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한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이 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이 전쟁 때마다 앞장서서 블레셋을 무찌르곤 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분들이 곁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죽었고 다윗은 블레셋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참 절묘한 상황입니다. 사무엘과 다윗 이 두 분 중에 한 사람만 있었어도 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였어도 이번 전쟁에는 틀림없이 참전했을 겁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패배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참전한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역사하셨을 겁니다. 다윗이 참전하는데 하나님이 가만히 계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블레셋에 가고 없는 겁니다. 더 절묘한 건 블레셋마저 다윗을 참전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블레셋의 아기스는 다윗을 참전시키려고 했지만 다른 도시의 왕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참전하지 못한 겁니다. 만약 다윗이 그렇게라도 참전을 했다면 양상이 달라졌을 겁니다. 비록 적군의 입장이었을지라도 다윗이 참전했다면 다윗은 이스라엘 편에 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저히 참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 시간에 아말렉과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말렉 민족이 시글락에서 다윗과 부하들의 가족을 붙잡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출하느라 사울과 이스라엘이 패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막으신 겁니다.
그렇게 사울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사울이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실 사울도 기도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기도를 하지 않아서 영적으로 깜깜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울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삼상 28:5~6)” 사울은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눈을 감으면 영적인 어둠에 짓눌렸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악한 영이 역사해서 캄캄한 어둠에 짓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그런 겁니다. 사울이 그렇게 악한 영에게 눌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를 하고 싶은데도 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한 겁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교회가 교우들이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잘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같이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목회자들에게 잘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가장 열심히 기도해주는 분들이 바로 목회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 어떤 교회든 목회자와 관계가 나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기도하는 분들 특히 목회자들과 언제나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게 지혜로운 겁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죽었고 다윗은 쫓아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마저 85명이나 죽였습니다. 그 가족들까지 다 죽였습니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겁니다. 기가 막힌 건 그러자 사울이 무당을 찾아갔다는 겁니다. 사울이 얼마나 영적으로 깜깜한 사람인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사울이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움도 기도하는 사람들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습니다. 사울과 함께 이스라엘도 패배했습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이스라엘이 왕을 원한 이유는 이런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있으면 자신들을 지켜줄 것 같아서 왕을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왕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선택한 결과 이렇게 망하고 만 겁니다.
안타까운 건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이 때 같이 죽었다는 겁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그랬습니다. 요나단도 이 날 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같이 죽었어도 같은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고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멸망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첫째 사망 곧 육신의 죽음은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다 당하는 겁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아닙니다. 성도는, 믿음의 사람은, 둘째 사망 곧 멸망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같은 날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멸망으로 요나단은 영생으로 나눠졌습니다. 사울의 죽음은 기회를 잃어버린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죽음은 기회를 붙잡고 사명을 다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단은 사명을 다했기 때문에 죽은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이스라엘이 패했습니다. 블레셋에게 철저하게 패배한 겁니다. 얼마나 크게 패했는지 왕의 시신조차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큰 패배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왕의 시신은 신하들이 수습하기 마련입니다. 왕의 시신을 전장에 그대로 방치했다는 것은 정말 철저하게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울이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신조차 수습할 사람이 없었던 겁니다. 그토록 사람을 좋아했는데 아무도 남지 않은 겁니다.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싶어 했는데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겁니다. 사울의 시신은 벧산 성벽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머리는 블레셋의 우상 다곤의 신전에 매달렸습니다(왕상 10:10). 참 비참하게 죽은 겁니다. 참 비참하게 멸망한 겁니다.
다행히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벧산 성벽에서 사울의 시신을 되찾아왔습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사울이 왕이 된 후 제일 처음 전쟁을 벌인 지역입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에게 핍박을 받던 길르앗 야베스를 구출해 준 겁니다. 길르앗 주민들이 40년 만에 그 보답을 한 겁니다. 시신을 되찾아다 화장해서 아셀 나무 아래에 장사를 지내준 겁니다 :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11~13절)” 이렇게 사울이 죽었습니다. 참 비참하게 참으로 허망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잘 생겼던 사람, 이스라엘에서 가장 뛰어났던 사람, 그래서 모든 사람이 왕으로 인정했던 사람 사울이 이렇게 죽은 겁니다. 또한 그렇게 이스라엘도 무너졌습니다. 왕이 있으면,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들도 왕만 있으면 잘 될 줄 알았던 이스라엘도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인생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중요한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인생이 남아있는 동안, 목숨이 남아있는 동안, 기회를 붙잡으십시오. 반드시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십시오. 선악과를 벗어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십시오.
